소설리스트

37화 (38/48)

“흐, 으읏, 아, 아!”

헐떡이며 내뱉는 성녀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가득했다. 그것이 고통스러워 내뱉는 소리가 아님을 레온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이용할 거라고.’

그녀가 그 말을 하면서 죄책감 가득한 얼굴을 했을 때, 레온은 속으로 웃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원하는 것임을 성녀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어떤 감정이든지 좋다. 그녀를 자신의 곁에 묶을 수 있는 밧줄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반길 것이니까.

미친 듯이 움직이던 레온은 성녀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었다. 얽히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이번에는 아주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조금씩 전진한 그의 것이 그녀의 내벽 끝에 다다랐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더욱 몸을 밀어붙였다.

“아…제발….”

멈추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제 것을 기쁜 듯이 이리도 꽉 물고 조여 대지는 않을 것이니.

예전에 안았을 때 알아차렸지만 미치도록 예민한 몸이다.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그녀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렸다. 몸의 구석구석까지 달아오른 열기로 붉어진 몸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레온은 다시 크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 응! 레온! 그, 그만!”

깊은 곳 한쪽을 꾹 찌르자 들썩거리던 그녀의 몸이 벼락에 맞은 듯 바르르 떨렸다. 그녀가 애원하듯 교성과 함께 그의 이름을 불러 댈수록 레온은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좋을 것이라 생각은 했었다. 조종당하지 않는 그녀가 저를 안고 있는 남자가 저라는 것을 깨달으며 제 움직임에 이름을 불러 준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하지만 이제 레온은 알게 되었다. 황홀 따위로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다. 그녀는 저를 완전히 잠식해 버리는 마약과도 같았다.

세차게 진입을 시도할 때마다 거친 침입자를 막아 보려는 듯 그녀의 안이 그를 휘감는다. 하지만 그것은 레온에게 미칠 것 같은 쾌감을 선사할 뿐이었다.

지금 도대체 몇 번이나 그녀의 안에 사정을 했을까. 레온은 고개를 내려 단단히 결합한 부분을 살펴보았다. 넘쳐흐른 정액이 그의 기둥이 드나들 때마다 거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레온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매일 보고 싶을 정도로. 아니, 매 순간 이렇게 있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제 3기사단은 그녀의 것이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 제국의 모든 것은 이제 그녀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곧 제국의 주인이 될 그를 붙잡아 흔들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단 하나만을 제외하고.

‘라트반.’

그를 떠올리며 레온은 다시 깊숙이 그녀의 안에 제 몸을 묻었다. 가장 깊숙한 곳의 벽을 누르자 성녀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와 함께 흔들리는 가녀린 몸부터 힘겹게 내뱉는 숨 한 조각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

라트반은 제 처음을 저리도 아름다운 그녀와 함께했을 것이다. 레온은 라트반이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레온은 성녀의 허리를 감아 안아 올렸다.

“아, 으, 으읏!”

그의 위에 올라타듯이 앉게 된 그녀는 더욱 깊숙이 들어온 그의 것에 고개를 젖히며 교성을 토해 냈다. 그런 그녀를 숭배에 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레온은 다시 한번 그녀의 안에 제 욕정을 토해 내었다. 그러면서 성녀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리나.”

레온은 맹세했다.

제 처음은 그녀가 아닐지라도 마지막은 그녀가 될 것이었다.

아침을 맞이한 제국 기사단의 주둔지는 전날 연회가 열렸던 자리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 조용했다. 근처 마을에서 불러온 악단들과 마을 사람들은 제 손에 쥐어진 금화를 기쁜 눈으로 바라보다 제국의 번영과 황태자 부부의 행복을 기원하며 돌아갔다. 그나마 아직 남아 있는 술통들을 바라보며 레온은 팔짱을 끼었다.

이제 이곳에 주둔하는 3기사단은 그의 명령은 물론 황태자비의 명령 또한 목숨처럼 받을 것이다. 지난밤, 성녀는 이 기사단을 통째로 손에 얻기에 충분할 만큼의 자신을 레온에게 주었다.

레온은 아쉬운 눈빛으로 제 천막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받았는데도 그는 아직도 갈급함을 느꼈다. 저 멀리 보이는 신전 기사단의 주둔지를 보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저것들만 없었어도.’

그러면 곧바로 제국으로 돌아가 성대한 연회를 열고 국혼을 대륙 전체에 알리며 황태자비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많은 것들을 리나에게 보여 주었을 것이다.

레온은 그것을 볼 리나의 얼굴을 생각하며 웃음 지었다. 세상의 새로운 것에 무척이나 깊은 호기심을 보이던 그녀다. 황궁에 있는 것들만 둘러본다 하더라도 족히 수년은 걸리고도 남을 것이다. 제 아버지는 물론 저도 세상의 온갖 것을 모아다 두었으니.

처음에는 그저 취미가 따로 없으니 닥치는 대로 수집이나 해 보자, 했던 일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레온은 리나와 함께 돌아가서 할 일들을 생각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관들의 얼굴은 그와 반대로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들의 황태자가 첫날밤을 무척이나 행복하게 보낸 새신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신부가 범상치 못했다.

성녀와 결혼했다는 것만 해도 머리가 복잡할 판에 가짜 성녀라니. 이후의 일들이 얼마나 더 복잡해질까.

그때 그들의 근심을 깨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레온 역시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와 제국 3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다. 그런 곳의 경비가 삼엄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저리도 당당하고 빠르게 말을 타고 들어올 수 있는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내 말 위에 있던 자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의문은 쉽게 풀렸다.

“1기사단이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레온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황제의 직속 기사단이 도대체 왜 이곳에 왔단 말인가. 아들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황제가 증원을 위해 보냈다고 하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였다.

레온에게 곧바로 달려온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말에서 내리더니 레온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됐으니 일어나. 무슨 일이지?”

“황태자 전하께 필요할 거라며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

레온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뒤이어 도착한 1기사단의 기사들이 천으로 덮인 큰 상자를 들고 레온의 앞에 섰다.

“이건….”

천을 벗겨 내자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고급스럽고 화려한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레온은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폐하께서 보내는 전언이나 서신은 없었나? 도대체 이게 뭐지?”

“저희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쭈어보았으나 ‘열면 알게 될 것을 굳이 적을 필요는 없다.’라시며 어서 전하기를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에 레온은 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성인 두 명이 들어야 할 정도의 큰 상자이다. 게다가 안에 있는 것은 분명히 무척이나 값어치가 있는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뭐지?’

레온은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하….”

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상자 안에는 황태자비를 위한 관, 예복, 장신구가 곱게 담겨 있었다. 레온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황궁에 앉아서도 황제는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에 레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황제가 성녀를 황태자비로 인정 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아직 리나를 섬기는 데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한 자들의 머리를 숙이게 할 것이며 제국령 내에서 그녀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황제를 해하려 하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상자 안을 바라보던 레온은 곱게 접힌 천 한 장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황태자비와 조금도 관계가 없을 이질적인 물건에 그는 접힌 천을 펼쳐보았다.

“…정말 대단하시다니까.”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레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국기였다. 대신전의 상징과 제국의 국기가 섞인 새로운 아펠리우스의 국기. 아직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지만 결국 언젠가는 대륙 전체를 덮을 국기이기도 했다.

레온은 그제야 황제가 이것들을 보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를 죽이라는 거군.’

이 기가 세상에 걸리기 위해서는 황태자와 성녀의 국혼이 무사히 성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가 결혼을 한 상대는 세상으로부터 가짜 성녀라 손가락질을 받는 자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를 다시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 성녀로 섬기게 할 것인가.

레온은 한숨을 쉬며 카를과 신전 기사단이 있는 주둔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다 죽여 버려야겠네.”

물론 이리스라는 그 여자까지.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카를 측에 심어 둔 정보원이 전하길, 카를은 라트반을 추격하는 것을 제국 기사단이 막을 것을 알고는 제국 기사단의 병력을 이리스를 찾는 데 돌렸다고 했다. 확실히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지금 카를에게는 수배자를 잡는 것보다 성녀를 찾는 것이 그의 권력 유지를 위해 도움이 될 터이니.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새로운 성녀라는 이리스가 제가 살던 마을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마수의 습격을 받아 쑥대밭이 된 마을의 생존자들은 그들이 본 것을 전했다. 마수 헥사가 나타났다. 그런데 붉은 머리의 남자가 나타나 헥사를 제압하더니 이리스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온은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슬란이군.’

그렇다면 아슬란이 이리스를 데리고 바로 리나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리스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굳이 데려간 것을 보니 어쩌면….’

레온은 대신전에서 자세하게는 듣지 못했던 성녀와 아슬란의 계약을 떠올렸다. 도대체 뭘 걸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슬란은 성녀의 성력을 필요로 하기에 그 계약을 맺었다 들었다.

‘그러면….’

라트반도 문제지만 아슬란은 그보다 더 큰 장애물이다.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그가 강대한 마수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 자가 리나를 원하면 그를 막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멀리 있는 산맥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성력이 필요한 거라면 그 새로운 성녀로 만족하면 되는 거 아니야?”

***

이리스는 물끄러미 누워 있는 아슬란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물론 죽지 않았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잠든 순간부터 머리카락 한 올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가끔 그런 착각을 불렀다.

“읏차….”

한참이나 그를 보고 있던 이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옆에는 큰 나뭇잎 위에 올려 둔 나무 열매가 있었다.

“오늘 먹을 걸 찾아야지.”

아슬란이 만들어 준 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먹어 버렸다. 아껴 먹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놔두면 상할 것이 분명했을뿐더러 모든 음식들은 이리스가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 본 적 없는 맛있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리스는 아끼기는커녕 부스러기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먹어 버리고 말았다.

혹시나 다 먹으면 아슬란이 일어나 다시 만들어 주지 않을까,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잠든 상태였다.

이리스는 조심스럽게 입구로 다가갔다. 그사이 이리스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헥사가 떠난 이후로 이곳에는 더 이상 마수가 오지 않는다는 점.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산짐승은 절대로 이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점 등을 말이다.

동굴의 입구에서 고개를 내민 이리스는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해가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위험한 짐승들은 이제 모두 제 보금자리로 돌아갔을 터였다. 물론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밖에 나가 식량을 구하려면 지금이 제일 좋은 때였다.

‘목도 마르고….’

다행히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는 작은 계곡이 있다. 그곳에서 목을 축인 다음 어제 발견한 나무 열매들을 따서 돌아오면 될 것이다.

“후아…!”

이리스는 계곡의 물로 얼굴을 씻은 다음, 치마를 찢은 천을 물에 적셔 몸을 닦았다. 시원한 물에 찝찝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 보자….”

계곡 근처에서 전날 봐 두었던 열매를 딴 이리스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한쪽 주머니를 가득 채운 그녀는 곧이어 반대편 주머니에도 열매들을 차곡차곡 넣어 채웠다. 처음 주머니에 넣었던 것들보다 더 크고 잘 익은 열매들이었다.

‘먹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리스는 매일 제가 먹을 것을 구하면서 아슬란의 것도 함께 구했다. 그러고는 잠든 그 옆에 그것들을 놔두었다. 마법으로 음식들을 쉽게 만들어 내는 데다가 헥사도 물리칠 정도로 강한 자가 이런 것을 먹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이제 이리스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아슬란이 곁에 있나부터 살폈다. 오래전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이후로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이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정작 아슬란은 저를 귀찮은 물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강하면 무서운 게 없겠지.’

마을이 박살 났던 날 보았던 아슬란의 힘을 생각하자 이리스는 그가 부러워졌다. 자신도 그런 힘을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이리스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이상한 소리에 이리스는 숨을 멈췄다.

‘착각인가?’

이곳으로 온 후로 들려오는 소리는 새소리와 곤충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가끔 짐승이 우는 소리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뭔가 다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리스는 몸을 숙인 다음 다시 귀를 기울였다.

“…해!”

“……!”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이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들려오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누구지?’

이런 길도 없는 깊은 산 속에 누가 들어온단 말인가. 자신처럼 약초를 캐어 파는 이들도 쉽게 들어오기 힘든 숲인 데다 가볍게 놀러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차피 이 일대에 그런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없을 테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건만 이리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위험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려 한다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리스가 망설이는 사이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리스는 곧 다가오는 사람들이 기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가까워진 그들이 말하는 소리가 이리스의 귀에 들려왔다.

“라트반 단장님의 상태는 좀 어때?”

‘라트반 단장님?’

들려오는 말에 이리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기사들 중에서도 높은 사람이 여기까지 온 것일까. 게다가 상태를 묻는 것을 보니 어딘가 다치기라도 한 모양이다.

이리스는 숨을 아주 느리게 쉬며 바닥에 엎드린 채, 나뭇잎 사이로 멀리 보이는 자들을 살폈다. 곧 수풀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기사들 몇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

피와 흙으로 엉망이 된 꼴이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신전 기사단이야!’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이리스는 숨을 멈추고는 바닥에 딱 달라붙은 채 눈동자를 굴렸다.

아주 오래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 이리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전의 사람들과 얽히면 안 된단다. 곁에 얼씬도 하면 안 돼. 최대한 피하고 살아야 해.”

그렇게 말하는 부모님의 얼굴에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했던 것을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부모님 때문에 이리스는 어쩌다 신관들을 만나도 축복을 내려 달라 하기는커녕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지나가야 했다.

‘우리 부모님은 이교도인 걸까?’

하지만 정작 부모님은 매일 아침과 잠들기 전에는 신을 향해 열심히 기도를 했다.

“우리 아이들을 지켜 주세요.”

침대 속에서 부모님의 기도를 들으면서 이리스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두 분 사이에 자식이라고는 저밖에 없는데 우리 아이들이라니? 언젠가 그것을 물어보자 부모님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다 두 분이 눈물짓는 것을 보고 이리스는 더 이상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다.

부모는 이리스를 데리고 대륙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신전도 신관도 없는 곳에 다다라서야 부모는 겨우 짐을 내리고 떠돌이 생활을 멈췄다.

좀 더 크면 부모님이 숨기고 있는 사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마수에 의해, 어머니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리스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제 손을 잡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대신전… 네 언니가….”

그것이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때 이리스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언니는 대신전에 있는 걸까?’

신관이 된 사람들이 속세의 연을 끊는다고는 해도 가족을 완전히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제 먼 친척이 대신전의 신관이라며, 만나러 가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며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는 필사적으로 대신전을 피했다.

‘도대체 왜?’

이제 두 분은 세상을 떠났기에 이리스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이리스가 잠시 오래전 일을 떠올리는 사이 기사들은 그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을 보더니 소리쳤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단장이….”

“지금은 우리 성력으로 계속 상처와 독을 눌러 둘 수밖에 없어. 그러니 일단은 우리도 좀 쉬면서 성력을 회복해야지. 밤새 산을 넘었잖아. 식사도 이틀째 하지 못했으니 하루 정도는 여기에 머물면서 회복을 하도록 하지. 일단 머물 곳을 확보하고 사냥을 하자고.”

그 말에 여기저기서 찬성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하지.’

그들이 멀어지면 벗어날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도망갈 수가 없다. 이리스는 동굴에 남아 있는 아슬란을 생각했다. 그가 제가 없는 사이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러면 혹시 저를 찾으러 오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이리스는 눈을 감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이건 마수에게서 벗어나 인간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상대가 하필이면 신전 기사단이라서 문제지.

‘어쩌지….’

이리스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사이 기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리스의 눈이 그들의 움직임을 쫓았다. 곧 뒤에서 한 기사가 제 등에 업은 남자를 근처의 부드러운 풀이 있는 곳에 눕히는 것이 보였다.

“……!”

무척이나 큰 남자였다. 볕에 그을린 피부에 검은색의 머리카락.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두꺼운 팔과 근육이 그 역시 기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를 살피던 이리스의 눈이 커졌다.

‘손이….’

한쪽 손을 붕대로 감고 있지만 이미 그것은 피에 젖어 있었다. 게다가 붕대 위쪽으로 보이는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마치 팔이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독이야.’

이쪽 지역에서는 마수에 당한 사람들에게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될 때까지 버티고 있는 거지?’

독에 당한 범위가 손바닥을 넘어갈 정도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고 만다. 마을에서 가장 크고 건강했던 남자도 몇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숨이 넘어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누워 있는 남자는 팔 하나가 시커멓게 변했음에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일단 단장을 조심히 눕혀 두고 이쪽 좀 도와줘!”

기사들의 대화에 이리스는 누워 있는 남자가 그들이 말하던 라트반 단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곧 기사들은 개울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더니 주변의 풀들을 정리하고 나뭇가지를 꺾으며 자신들이 쉴 곳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야.’

기사들이 있는 곳에서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저기 누워 있는 자는 의식이 없으니 저를 보지도 못할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며 이리스는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때였다.

“쿨럭!”

죽은 듯이 있던 남자가 갑자기 기침을 했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이리스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리스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그의 기침 소리를 듣고 와 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날아가는 새 떼의 울음소리와 그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소리 때문에 남자의 기침 소리는 기사들에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달려가 동료가 죽어 간다고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리스가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기침을 하던 남자의 입에서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리나.”

“……!”

리나?

이리스는 아슬란이 저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말했던 이름을 떠올렸다. 그도 분명 리나라고 했었는데.

물론 리나라는 이름은 널리고 널린 이름이다. 이리스가 살던 작은 마을에도 두 명이나 그 이름을 갖고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리스는 저 리나가 어쩐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더 고민하던 이리스는 조심스럽게 남자를 향해 기어갔다. 다행히 멀리 있는 기사들은 그녀를 눈치채지 못했다.

‘한 번만 해 보자.’

마을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이리스는 성력을 쓰려 시도한 적이 없었다. 아슬란의 협박도 있긴 했지만 쓰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부모님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힘은 그녀가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힘을 쓸 때마다 이리스는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제 것이 아닌 옷을 입은 것처럼. 그래서 더 이상 쓰려 하지 않았는데.

‘만약 힘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곧바로 도망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이리스는 남자의 손끝에 제 손을 대었다. 지금 제 상황이 다른 사람을 챙길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촌장의 아들과는 다르게 이 사람은 어쩐지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이리스는 남자가 살아나길 바라며 정신을 집중했다.

“……!”

그 순간 이리스의 손끝으로 빠르게 푸른 성력이 모여들었다. 모인 성력은 이리스가 놀랄 새도 없이 곧바로 라트반의 몸을 휘감았다.

시커멓던 팔은 빠르게 원래의 색을 되찾아 갔다. 뚝뚝 흐르던 피 역시 어느새 멈추었다. 그때 이변을 눈치챈 모양인지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그 목소리에 이리스는 황급히 손을 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아슬란이 있는 동굴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달린다 해도 그녀가 기사보다 빨리 산길을 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곧 바위를 기어 올라가려는 이리스의 뒷덜미를 기사 한 명이 잡아챘다.

“살려 주세요!”

이리스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메아리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여자는 뭐야?”

“설마 단장에게 무슨 짓을…!”

뒤따라온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찔러 죽일 것 같은 흉흉한 눈빛으로 동료의 손에 잡혀 대롱거리는 이리스를 노려보았다. 성질이 급한 자는 이미 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사, 살려….”

살려 달라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살기가 그녀를 향하고 있을 때, 라트반의 곁으로 갔던 기사가 소리쳤다.

“잠깐! 단장의 독이 사라졌어!”

“뭐?”

분명 라트반을 해하려 온 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라트반이 괜찮아졌다는 말에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자신들의 성력을 부어 넣어도 잠시 눌러 두는 것조차 힘든 독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졌다니. 이 정도의 성력을 가진 사람은 한 명뿐이다. 이리스를 붙잡은 기사가 중얼거렸다.

“설마 새로운… 성녀님?”

***

“으응… 레온, 제발 그만….”

나는 가슴을 주무르는 레온의 손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레온은 며칠간, 정말로 쉬지 않고 틈이 날 때마다 나를 안았다. 그러다 결국 내가 까무룩 정신을 한 번 잃고 나서야 겨우 안는 것을 멈췄다. 하지만 결코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린 후에는 재빨리 천막으로 돌아온 다음 침대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지금처럼 모든 피부가 붉어질 때까지 연신 나를 주무르고 빨아 대었다.

“많이 힘들어요?”

“그걸 몰라서 물… 아흣!”

그가 손가락으로 곤두선 유두를 붙잡고 흔들자 다시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대로라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레온, 나 정말 힘들어요…. 제발….”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울먹거리며 애원하자 레온은 무척이나 아쉽다는 얼굴로 손을 내렸다. 대신 내 뺨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그 아쉬움을 달래는 것 같았다.

“…당신 체면도 생각하는 게 어때요?”

이곳은 천막 안이다. 아무리 두꺼운 천이라 하더라도 소리를 완전히 막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꼭 소리 때문이 아니더라도 틈만 나면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이제 막 결혼한 신랑이 제 신부를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 건 당연한 일이에요. 오히려 다들 제국의 미래가 든든하다고 여길 겁니다.”

부끄러움 따위는 조금도 못 느끼는 당당한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다행히 이제 정말로 좀 쉬게 해 줄 생각인 건지 그는 얌전히 나를 끌어안기만 한 채 말했다.

“아직 아슬란과 이리스는 찾지 못했습니다. 신전 기사단이 라트반 경을 발견했다는 소식 역시 없어요.”

처음에 나는 레온이 이런 정보를 나에게 숨기려 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한 게 무색할 정도로 레온은 모든 것을 나에게 말했다. 그런 점이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를 가둬 둔 다음 모든 것을 마음대로 통제하려 했다면 마음껏 그를 원망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곳에서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었고 레온은 모든 것을 나와 공유했다.

게다가 매일같이 대신전에서 견뎌야 했던 나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은 이곳에 없었다. 레온이 건네준 황태자비의 예복을 입고 밖으로 나갔을 때, 그곳에는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복종의 시선들이 있을 뿐이었다.

“아슬란이… 이리스를….”

내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레온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금방 돌아올게요.”

“…늦게 와도 돼요.”

내 말에 레온은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상처 입는다구요.”

그렇게 말하며 레온은 천막을 나섰다. 다시 조용해진 천막을 보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침대 위에 쓰러졌던 몸이 눈을 떴다.

“아슬란이 이리스를 데려갔다고….”

중얼거리는 것은 이벨리나였다.

“안 될 일이지. 강대한 마수여.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새끼를 밸 것이고….”

이벨리나의 눈이 강렬한 증오와 의지로 번뜩였다.

“너는 내 소원을 들어주어야 해.”

“젠장….”

무심코 속내를 내뱉던 카를은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의 천막 안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카를은 손등으로 제 입을 쓸었다. 점점 더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처음 이리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모든 일이 쉽게 끝나리라 생각했다. 트리온에 가면 제가 새로운 성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들뜬 시골 계집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그 전에 이벨리나와 라트반을 생포하여 좋은 유희 거리로 삼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상황은 무엇 하나 그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이리스라는 계집은 마법사인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 하고 라트반의 추적은 제국 기사단이 막고 있으며 이벨리나는 아예 황태자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그의 손이 닿지 않는다.

신음 소리를 흘리던 카를은 제가 원하던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모든 것을 정리한 다음 이리스를 데리고 대신전으로 돌아간 후의 미래를.

새로운 성녀는 더욱 다루기 쉬울 것이다. 이벨리나의 실패를 발판 삼아 더더욱 고립시키고 세뇌할 생각이니까. 이벨리나가 그랬던 것처럼 이리스 역시 매일 자신을 위해 성력을 바쳐야 할 것이다.

카를은 잠시 이리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자국은 원래 그에게 성력을 부어 넣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력은 이렇게 먼 곳에 있는 여자에게로 넘어갔다.

‘왜?’

처음에는 그냥 새로운 성녀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는데. 긴 시간은 아닐지언정 분명 이벨리나와 이리스는 동시에 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뭔가 관계라도 있나?’

카를은 이벨리나의 부모를 떠올려 보았다. 갑자기 성녀가 되어버린 제 딸의 행복을 기원하며 제 손을 붙잡고 몇 번이나 잘 부탁한다고 애원하던 부부. 이벨리나에게는 그녀를 버리고 돈만 요구한 다음 문제를 일으키다 사라진 부모로 기억되었을 그 부부.

다른 자들은 잘도 제 거짓 모습에 속아 넘어갔지만 아이를 맡긴 부모의 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거짓을 간파했다. 그 부부는 제 딸을 돌려달라 애원했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자 부부는 자신들도 대신전으로 들여보내 달라 빌었다. 아마 그때부터 그들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카를은 좋은 말로 그들을 달래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노력하겠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대신전으로 돌아온 다음 그는 이벨리나에게 말했다. 오늘도 당신의 부모가 돈을 요구했다고. 당신보다도 돈이 더 소중하다 했다며, 버림받은 불쌍한 당신은 이 대신전에서 성녀로 평생을 안락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을 위해 좋은 음식을 잔뜩 준비해 갔던 카를은 혀를 찼다. 남은다 한들 그건 제가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 독이 가득 들어있었으니까.

‘그 후로 흔적도 없는 걸 보면 어디서 죽어 버린 모양이지.’

어딘가에서 다시 나타나면 그때야말로 제대로 처리해야겠다 생각했는데 그들은 그 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오래전 일을 생각하던 카를은 혀를 차며 제 다리를 살폈다. 더욱 휘어짐이 심해진 것 같은 제 다리를 보자 이가 갈렸다.

이벨리나의 성력을 모두 저에게 쏟게 만들고 나서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제대로 걷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았다. 그것은 마약보다 더욱 유혹적이고 중독적이었다.

이벨리나의 뜻이라고 거짓을 말하면서 일부러 그녀가 사람들에게 성력을 써야 하는 일정들을 취소시켰다. 그랬기에 이벨리나의 성력을 그는 고스란히 저에게만 집중시킬 수 있었다.

‘빨리 이리스를 찾아야 해.’

카를은 천막 안 책상 위에 올려진 성서를 보았다.

신이 성녀를 내려 주는 한, 그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성녀와 대신전은 영원할 것이다.

그때 천막 밖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대신관님!”

“무슨 일입니까.”

급한 목소리에 카를은 무언가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음을 짐작했다.

“배신자들을 보았다는 자가 왔습니다.”

그 말에 카를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스의 소식이 아닌 것이 아쉬웠지만 당장 라트반이라도 잡아 처형을 해야 한다. 제국 기사단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추적을 포기한 상태였는데 이렇게 누군가 와서 알려 줄 줄이야.

천막의 천을 걷어 낸 그는 절뚝이며 말을 전한 신관에게로 걸어갔다. 대신전이 아닌 이쪽 지방의 신전에서 카를을 만나기 위해 왔던 신관들이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 그들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카를이 걷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를은 그들의 시선에서 동정을 재빠르게 읽어 낼 수 있었다.

‘죄다 눈을 파 버리고 싶군.’

저에게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 보내는 그 시선이 카를은 끔찍했다.

‘계속 성녀의 성력을 받았다면 나을 수도 있었어.’

이벨리나를 떠올리며 카를은 이를 갈았다. 곧 주둔지 가운데에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카를이 다가가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제가 무례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고개를 숙였다.

“대, 대, 대신관님을 뵙습니다.”

“그래, 다른 신관들에게 들었습니다. 대신전의 배신자들을 목격했다지요.”

카를은 마음이 급해졌다. 약초꾼이 건네는 인사 따위에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어디서 보았는지부터 말하라 윽박지르고 싶었다.

“그, 그렇습니다. 저는 저기 산 몇 개를 건너야 나오는 작은 마을에 사는 약초꾼입니다. 아이고, 이런. 제 이름은 퍼시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일부러 아주 큰 신전에 가서 받아 오신 이름입니다. 성인의 이름을 따왔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들을 어디에서 보았다는 겁니까.”

“아, 네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사는 마을 근처에는 무척이나 험준한 산이 있습니다. 깎아지른 절벽 때문에 사람들이 어지간해서는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지요. 그렇다 보니 무척이나 희귀한 약초들이 많이 있는데 그날은 제 아내가 가지 말라는 것을 뿌리치고 새벽부터 길을 나섰습니다. 새벽에만 캘 수 있는 것들이….”

“그래서 어디에서 보았다는 거야!”

계속해서 이어지는 약초꾼의 말에 카를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의 고함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든 신관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굳어 있던 카를은 재빨리 제 가면을 뒤집어썼다. 곧바로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 노성을 질렀던 사람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슬퍼하고 미안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미안합니다, 퍼시, 대신전의 형제자매들을 해한 자들을 향한 분노를 순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신을 거스른 자들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있을 터, 잠시 흐트러졌던 나를 부디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카를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약초꾼은 당치도 않다는 듯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아닙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네네, 마음이 급하시겠지요. 제가 그 기사 무리들을 본 곳이 어디냐면….”

덕지덕지 사족이 붙은 약초꾼의 말을 들으며 카를은 여전히 미안함을 가득 담은 얼굴을 유지한 채 생각했다. 라트반 일행을 찾고 돌아오는 길에 이 약초꾼을 그 절벽에서 밀어 버리고 말겠다고.

***

“저기, 저 풀이 지혈 효과가 있는데….”

이리스는 제 팔에 난 상처를 살펴보던 기사를 향해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는 약초를 잘 아는 동료를 바라보았다. 이리스의 말이 사실이냐 묻는 눈빛이었다.

“이리스 님께서 말씀하신 게 맞아. 꽃은 독이 있으니 버리고 이파리만 짓이겨 붙이면 좀 따갑긴 해도 피가 빨리 멈추지.”

동료 기사에게 확인을 받은 기사는 이리스를 향해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잎을 따 손으로 비볐다. 이리스는 그런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전 기사들은 신관들처럼 성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제 성력을 자신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쓰지 않았다. 대신 조금이라도 회복이 되었다 싶으면 자신들의 성력을 누워 있는 라트반에게 쏟아부었다.

‘라트반이라고….’

처음 듣는 이름임에도 이상하게 아주 낯설지는 않다 생각했는데 언젠가 큰 마을에 나갔을 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름이었다.

“라트반 님이라면 헥사도 처리하실 수 있을 거야.”

과거에도 강한 마수들을 물리쳤다는 신전 기사단의 단장. 독에 중독된 채 누워 있는 남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과 신전 기사단이 왜 이런 곳까지 왔냐고 묻자 그들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정말 모르는 겁니까?”라고 되물어 왔다.

이리스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을 때, 라트반을 살피던 기사 한 명이 이리스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한 번 더 성력을 사용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이리스를 대했다.

우선 라트반을 치료해 주었다는 점이 그들의 경계심을 무너트렸고 이리스가 엉겁결에 제 이름을 말한 순간 “이리스…?”라며 펄쩍 뛸 듯이 놀라고는 고개를 숙였다.

“신께서 단장을 살리기 위해 인도하심이 틀림없군요. 이런 곳에서 새로운 성녀님을 뵐 줄이야.”

그 말에 이리스가 펄쩍 뛰었다.

“저, 전 그런 거 아니에요! 성녀라니, 당치도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분명….”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들은 이리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우선 새로운 성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대신전에 의해 배신자라 낙인찍힌 그들이 이리스에게 쉽사리 다가가도 되는 것인지… 모든 것이 고민스러웠다.

결국 신전 기사단은 모든 것을 라트반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라트반이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터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리스가 치료해 준 덕분에 라트반의 독은 많은 부분 사라져 있었으니까.

기사의 부탁을 받은 이리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 보긴 할게요. 그런데 안 될 수도 있어요…. 저는 정말로 성녀도 아니고…. 성력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니까….”

제가 성력을 쓰지 못했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촌장의 눈빛을 떠올리니 절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처음 성력을 쓴 것은 큰 마을에 약초를 팔러 간 날, 헥사의 습격을 받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였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 놀라 뭔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한 순간 강력한 성력이 나타났었다. 그리고 조금 전, 라트반을 낫게 했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나으면 좋겠는데.

‘할 수 있을 거야….’

이리스는 조심스럽게 라트반에게 다가가 아직 독이 남아 있는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파앗!

이리스가 눈을 감자 빠르게 성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성력은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다는 것처럼 라트반의 다친 손을 휘감았다.

“으….”

이리스는 신음 소리를 내며 이를 물었다. 땀이 비 오듯 흐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성력이 빠르게 독을 지워 나가는 듯했지만 상처 부위와 그 주변의 독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리스는 더욱더 성력을 유지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정말로 제 생명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성녀님은 매일 이런 일을 하셨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이리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누워 있던 라트반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신전 기사단원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들의 단장이 드디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것이다.

기사들의 환호를 들으며 이리스는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그가 눈을 떴다. 아직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더니 중얼거렸다.

“리나….”

그러면서 라트반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리스는 언젠가 이런 표정을 본 것 같다 생각했었다.

‘언제였지? 분명…!’

아슬란이 그녀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리나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꼭 이런 웃음을 지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쩐지 손끝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웃음을.

곧 라트반의 눈동자가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빠르게 웃음을 잃어 갔다. 그러고는 놀라 이리스의 손을 쳐 내며 물었다.

“…당신은?”

이리스가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었다. 모두가 놀라 고개를 든 순간 하늘에서 모두를 짓누를 것 같은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검은 개새끼 왜 네가 여기 있지?”

아슬란이었다.

“그것보다 왜 혼자 여기에 있어?”

붉은 눈이 제 암컷을 찾아 분노로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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