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48)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미친 듯이 숨을 몰아쉬고 있는 레온이 있었다. 잔뜩 흐트러진 금색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어지럽게 달라붙어 있는 모습에 그가 얼마나 서둘러 달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팔에 더욱 힘을 주어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손을 올려 짧아진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땀과 눈물, 먼지에 피까지 섞여 엉망일 텐데도 그는 웃으며 말했다.

“못 보던 사이에 더 예뻐졌네요.”

언제나 그랬듯 조금은 가볍고 웃음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순간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으아아악!”

하지만 곧 들려온 기사의 비명 소리가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 머리를 잡아 흔들던 기사는 손이 잘려 나간 팔을 붙잡은 채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잘린 그의 손이 나뒹굴고 있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그 처참한 광경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레온이 나를 붙잡았던 기사의 손목을 그대로 잘라 버린 것이다.

나는 레온을 붙잡으며 그에게 부탁했다.

“레온, 어서 라트반을…!”

“레온 황태자!”

내 말은 다른 이의 목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기사들에게 안겨 있다시피 한 카를이 대신관의 예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카를이 제힘으로 서자 옆에 있던 기사들은 손목이 잘린 기사에게 다가갔다.

누군가 굴러다니는 손목을 들고 와 잘린 자리에 가져다 대었고 주변에 있던 신전 기사들은 자신들의 성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성력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손목은 제대로 붙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사이 피를 너무 흘린 탓인지 그는 새하얗게 질리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카를은 그런 기사를 도울 생각이 없는지 나와 저편에 붙잡혀 쓰러져 있는 라트반을 보고는 레온을 향해 말했다.

“드디어 두 사람을 붙잡았군요.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 말을 멍하니 듣던 나는 다시 레온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나를 향해 웃던 얼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곳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한 레온이 있었다.

‘협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머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레온과 함께 나타난 카를. 그는 레온이 날 붙잡고 있는 모습에 당황하기는커녕 안심했다는 듯이 웃었다.

“……!”

레온이 카를과 한패라는 사실을 알아챈 나는 레온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세게 그를 밀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나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레온, 당신이 어떻게…!”

있는 힘껏 그의 가슴을 때렸지만 레온은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배신감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레온이 카를과 손을 잡았다니.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았던 줄은 배신이라는 이름의 썩은 밧줄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미안합니다, 리나.”

레온은 때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때리라는 듯, 내 주먹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난 처음부터 라트반 경이 싫었습니다. 물론 그도 나를 똑같이 싫어했겠지만요. 그렇지 않습니까, 라트반 경?”

그는 그렇게 말한 다음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에게 눌린 채, 라트반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레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살기에 카를과 함께 온 기사들이 한 걸음 물러설 정도로. 레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라트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쪽 팔을 가슴에 올린 뒤 라트반을 향해 정중한 인사를 했다.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라트반 경. 이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말에 라트반은 거칠게 몸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

라트반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레온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라트반을 누르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검을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

“안 돼! 그만둬!”

내 필사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손은 빠르게 라트반을 향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기사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이 햇살을 받아 시퍼런 빛을 뿌렸다. 그 빛에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린 순간.

퍽!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

놀라 다시 바라본 곳에는 축 늘어진 라트반이 있었다. 그 어디에도 피는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라트반을 내려쳤던 기사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

기사는 검날로 라트반을 내려친 것이 아니었다.

“손잡이로….”

기사는 곧바로 제 검을 내렸다. 더 이상 라트반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러더니 기사는 라트반을 어깨에 들쳐 메고 일어섰다. 그의 행동에 라트반을 향한 적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상당한 제 전우를 챙기는 것 같은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그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기사들도 그 기사와 라트반을 지키려는 듯이 둘러싸며 카를을 향해 검을 세웠다.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카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라트반을 검 손잡이로 내려쳤던 기사가 제가 쓰고 있는 투구를 벗어 카를이 있는 쪽으로 집어 던졌다. 투구는 데굴데굴 굴러 카를의 앞에 멈췄다.

그 투구를 바라보던 카를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투구를 벗어 던진 기사를 바라보았다.

“네놈은…!”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카를은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그 기사를 바라보았다.

“부기사단장!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분명히 막사에 잡혀 묶여 있었을 터인데!”

부기사단장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나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카를의 외침을 무시한 채, 레온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레온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나는 약속을 지켰어. 그러니 자네들도 나와 한 약속을 지키기를 바라네.”

“물론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약속…?”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레온이 나에게 말했다.

“그래요, 대신전을 이탈해 라트반 경을 찾고 있었던 저들과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들에게 라트반 경을 구할 기회를 주겠다고 말입니다.”

레온이 말하자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카를이 소리쳤다.

“황태자!”

레온은 그런 카를을 보며 조소를 흘렸다.

“그래서 저들을 붙잡아 온 척했지요. 죄수 호송 마차가 편하지는 않았겠지만 덕분에 저들은 대신전의 무리를 피할 필요도 없이 그 가운데에서 모든 정보를 들으며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 물론 카를 대신관이 필요 이상의 노력을 해서 저들을 데려온 것은 라트반 경을 만나면 그를 협박하기 위해 하나씩 눈앞에서 처형하기 위함이었으니 속은 카를 대신관을 안쓰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레온의 말에 악다문 잇새로 소리가 날 만큼 카를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이쯤 되자 나는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장에서도 보았듯이 라트반을 따르는 사람은 많다. 그중에서도 신전 기사단이라면 누구보다도 라트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다. 아무리 카를이 대신관이 되어 명령을 내렸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기사단장을 잡으라는 명령에 그들이 쉽게 따랐을 리가 없다. 하지만 카를의 명령을 거부한 그들 역시 대신전의 추격을 받는 상태였고 수가 많다 보니 나와 라트반처럼 모습을 감추며 이동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숨지 않고도 누구보다 라트반을 빨리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레온이 제시한 거야….’

포로 상태로 이동하다 카를이 나와 라트반의 소식을 듣고 움직인 사이에 레온의 수하들이 저들을 풀어 주었으리라. 그리고 그들은 카를의 편을 드는 신전 기사들을 제압하고 옷과 투구를 빼앗았을 것이고.

하지만 아직 의문은 다 풀리지 않았다.

라트반을 따르는 기사단과 레온이 손을 잡아 기사단은 그들의 단장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레온이 얻는 것은 무엇이지?

그때 레온과 레온을 따르는 제국 기사단이 카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레온이 말했다.

“그럼 어서 자네들의 단장을 데리고 떠나. 되도록 아주 멀리 떠나 주길 바라네. 깨어날 것 같으면 또다시 후려쳐서라도 아주 멀리 데려가도록.”

레온의 말에 부기사단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른 기사와 함께 라트반을 들었다. 서둘러 멀어지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레온, 설마….”

“그래요. 내가 얻는 것 하나 없이 저들을 도왔을 거라 생각합니까? 라트반 경을 위해서?”

레온의 손가락이 다시 조심스럽게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와 내 협력 관계는 끝났습니다. 사실 그를 죽게 놔둘까도 생각했습니다. 그편이 나에게 이득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내가 없는 동안 당신을 지켜 냈습니다. 그를 살려 주는 것은 그 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는 당신을 살렸기에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 그사이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었다면….”

레온은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카를보다 먼저 내가 그의 목을 쳤을 겁니다.”

서늘한 목소리에 나는 멀어지는 라트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레온은 몸을 돌려 소리쳤다.

“떠나도록! 그리고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네. 그때는 적으로 만날 터이니.”

그 말에 부기사단장은 다시 예를 표한 다음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카를 휘하의 신전 기사단이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제국 기사단의 검이 그들을 막아섰다. 카를이 라트반을 기어이 쫓아가려 한다면 그들은 먼저 제국 기사단과 큰 전투를 치러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나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설령 제국 기사단을 제친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 카를이 라트반을 쫓아가기란 더욱 무리일 것이고.

그렇게 대치가 계속되는 사이 라트반의 모습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많은 일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지쳐 버린 몸은 더 이상 생각을 하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라트반이 멀어진다는 사실뿐이었다.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멈추라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가 죽을 테니까. 카를에게. 아니, 어쩌면 레온에게.

시야가 흐려진다 싶더니 눈물이 떨어졌다. 레온은 아무 말 없이 내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끌어안은 팔에는 더욱 힘을 주었다.

그때 뒤에서 카를의 노성이 들려왔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합니까, 황태자?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당신이 안고 있는 자는 대신전의 대역죄인입니다. 그녀는 대신전의 것! 모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단 말입니다!”

그 말에 몸이 흠칫 떨렸다. 카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벨리나는 성녀로 대신전에 들어오면서 대륙의 그 어떤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전 그 자체였다. 바꿔 말하면 대신전 역시 그녀에 대한 모든 권리와 권한을 갖고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이대로 우리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제국이 아무리 강대하다 한들 대신전의 권위에 손을 대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제국은 아직도 다른 왕국들과 전쟁 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설마 가짜 성녀 하나에 제국을 거는 짓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그 말에 레온이 나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레온은 황태자다. 그는 지금까지 제국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 모든 노력을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가짜 성녀라… 그래서 대신전이 이리도 집착을 하며 달라붙나 봅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레온은 갑자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저들의 입을 닥치게 할 당신의 다른 신분이 필요한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레온은 갑자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뜻밖의 상황에 나도, 카를도 그리고 양측의 기사단들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 속에서 레온은 나를 보며 말했다.

“리나,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지금 레온이 뭐라고 한 거지?

나는 내가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그저 멍하니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허락을 구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신을 얻기 위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레온의 뒤쪽에 서 있던 제국 기사단과 그의 부관들이 보였다.

그나마 기사들은 표정을 관리하는 것 같았지만, 부관들은 숨길 수 없는 황망함을 담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 몇은 거의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이 꼴을 하고 있는 내가 청혼을 받았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 상대가 레온이라는 사실이 더욱 문제였다.

대륙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고 있는 제국이다. 그 제국의 황태자가 황궁의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도 아니고 이런 대륙 끝 변방의 숲속에서, 대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한낱 도망자에 불과한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청혼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저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깃거리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레온이건만,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고민도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이 순간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던 사람처럼.

“왜….”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물었다.

“…내가 거부한다면 당신은 나를 대신전에 넘길 건가요?”

내 질문에 레온은 조금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내가 그리할 것 같습니까?”

“…….”

“리나, 나는 당신에게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하는 것보다 당신이 나를 선택했을 때 얻게 되는 것을 말하고 싶군요. 당신이 그저 고개 한 번만을 끄덕이면 제국의 모든 것이 당신의 손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세상의 신비로운 것들은 모두 제국령에 있는 것. 아닌 것도 제국령으로 만들면 되지요.”

그의 말처럼 되려면 몇 개의 왕국이 사라져야 할 일임에도 레온은 그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당신에게 더욱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레온의 시선이 뒤에 서 있던 제국 기사단에 닿았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라트반 경을 추격할 신전 기사단, 그들을 막을 제국 기사단 같은 것을 말이지요.”

“……!”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레온은 계속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누구를 마음에 품든 상관없습니다. 그런다 해서 사라질 마음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저 당신이 내 옆에 있고 당신이 나와 이름을 나누며 그것이 영원히 기록에 남아 함께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리나.”

레온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었다.

“나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위해서… 나를 선택해 주세요.”

목이 메어 왔다. 그의 청혼은 그에게는 조금도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대신전의 도망자 하나를 얻기 위해서 너무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청혼. 거래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거래가 아니다. 이것은 레온의 일방적인 희생에 가까웠다. 그는 시작하기도 전에 항복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다시 레온이 물었다.

“리나, 부디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다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피와 흙으로 엉망이 된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대하는 것 같은 경건한 모습에 그 누구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카를마저도.

잠시 후, 레온은 입술을 떼고 한 걸음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이제 쉬도록 해요, 리나.”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몸에서 힘이 빠졌다. 쓰러지는 내 몸을 레온이 끌어안았다.

“모두, 제국의 황태자비를 수호하라!”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레온이 외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가에 울렸다.

***

“여기가 좋겠군.”

아슬란은 산허리 한쪽에 위치한 깎아지르는 절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절벽의 사이에는 기다란 틈이 있었다. 틈이라고는 해도 워낙에 큰 절벽이었기에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넓은 곳이었다. 그가 그 틈으로 들어가 안을 살피자 아니나 다를까 먼저 이곳에 머물렀던 산짐승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좀 더 안을 살펴보던 아슬란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산만한 크기의 바위다. 무척이나 단단한 암석이라 기척을 숨기기는 좋은데다가 입구는 가늘고 좁은 편이라 쉬이 눈에 뜨이지는 않으리라.

아슬란은 안을 마저 살펴본 다음 손에 들려 있던 것을 툭 내던졌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진 그것이 꿈틀거리더니 옅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나름대로 죽지는 않게 신경 써서 들고 왔는데 워낙에 약한 인간의 몸이다 보니 그것도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여자는 잠시 눈을 떴다. 아슬란은 그 여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히끅!”

아직 뭐라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움찔한 여자는 곧 눈물과 콧물을 쏟아 내며 아슬란의 앞에 엎드렸다.

“이, 이리스예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이름을 물어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금도 관심 없는 사실을 알게 된 아슬란은 다시 이리스를 보며 말했다.

“인간, 그 힘은 네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다 아슬란은 화가 난다는 듯 다시 이리스를 옷째로 잡아 들었다.

“한 번만 더 그 힘으로 장난질을 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알아듣겠나?”

“네, 네!”

번뜩이는 붉은 눈에 이리스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지금 조금이라도 주저하며 대답했다가는 그가 정말로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다.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던 이리스는 결국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갖고 싶어 가진 게 아닌데.”

“……?”

이게 뭐라는 건가. 아슬란은 이리스가 도대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 제가 갖고 싶어서 가진 게 아니에요…. 어느 날 갑자기….”

거기까지 말한 이리스는 결국 서러움을 견디다 못해 흐엉, 하는 큰 소리를 내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두려움이 터지고 만 것이다.

아침부터 제 편이라고는 하나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촌장 부부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다가 갑자기 마수가 쳐들어왔고 눈앞에서 집이 박살 나며 사람들이 죽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쓰러질 것 같았는데 갑자기 납치되어 이제는 제가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를 분노를 받아 내야 했다. 이리스는 그저 모든 것이 서럽고 무서웠다.

새끼 고양이를 들듯 이리스를 들고 있던 아슬란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서렸다.

‘젠장.’

성녀의 힘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이제는 시끄럽게 울기까지. 이걸 괜히 주워왔나 싶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짜증 난다 해서 헥사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밖에 내어 놓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걸 어쩐다.’

아슬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펑펑 울던 이리스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대신에 동굴 안에 울릴 정도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리스는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젠 정말로 더 울 힘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시끄럽게 울어 댄다 했더니 배가 고픈 거였나.’

일단 이것의 배를 채워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아슬란의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손을 들어 허공에 마력을 조금 개방했다. 그러자 곧 바닥으로 무엇인가 투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리스는 놀란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빵과 햄 치즈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예쁜 색의 과자가 굴러다녔다.

“리나가 잘 먹는 것들이니… 이 정도면 되겠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쳤다. 이리스는 잠시 넋을 놓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흉흉했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즐거움과 그리움만 남은 표정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리나?”

아슬란의 말에 이리스가 중얼거리자 그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런 아슬란의 모습에 이리스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제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가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내가 자는 동안 이걸 먹고 있도록. 쓸데없이 도망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멀리 가기도 전에 헥사가 널 찢어 먹을 테니. 알겠나?”

“네, 네!”

이리스가 끄덕거리며 대답하자 아슬란은 다시 그녀를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그대로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리스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순식간에 움직임이 없어진 아슬란을 바라보다 그가 만들어 낸 음식을 바라보았다.

꼬르륵.

배고픔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엉금엉금 기어간 이리스는 동굴 바닥에 굴러다니는 빵을 집었다. 마치 막 만든 것 같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빵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크게 한입 베어 물었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흰 빵이 씹혔다.

이리스는 제가 어떤 상황이라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입에 넣었다. 무엇 하나 지금껏 먹어 본 적이 없는 맛있고 예쁜 것들이었다. 한참 후에야 이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리나라고….”

남자가 말한 이름을 이리스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 좋아한 덕분에 자신도 이런 음식을 먹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리스는 바닥에 남은 음식 중에 과자를 잔뜩 집어 제 옷 주머니에 넣었다. 동굴 입구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붉은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수들이 쓰는 마력이 이것과 같은 색이니 아마도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마법이리라.

이리스는 조심스레 그것에 손을 대었다. 혹시나 아프지 않을까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과는 달리 그녀의 손은 아무것도 느끼지를 못한 채 그대로 통과했다.

“……!”

이리스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여전히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

‘이대로 도망갈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리스가 동굴의 입구를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캬아아아악!

산 너머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은 끔찍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낮에 보았던 헥사의 울음소리가 분명했다. 이리스는 곧바로 몸을 돌린 다음 미친 듯이 아슬란을 향해 뛰었다. 그러고는 잠들어 있는 그의 곁에 몸을 납작 엎드렸다.

“허억… 허억….”

낮에 보았던 처참한 살육의 현장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하지? 저것이 여기를 찾으면 또….

쿵. 쿵. 쿵.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동굴 입구 너머로 거대한 몸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헥사가 가까이 온 것이다. 이리스는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 있지 않을까. 뽑혔던 자리에 새로이 생겨나고 있는 눈이 그녀와 아슬란이 있는 동굴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리스가 절망을 느낀 순간, 헥사는 몸을 휙 돌리더니 다시 하늘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곳에는 더 볼일이 없다는 듯이.

“어…?”

들키지 않았다. 이리스는 동굴 입구에 은은히 빛나고 있는 마법을 보았다. 분명 이 남자가 쓴 마법이 저 마수의 눈을 속인 것이리라. 그렇다면….

“못 나가잖아….”

동굴의 구석으로 들어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이리스는 중얼거렸다. 이 남자한테서 도망칠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무서워….”

숨기지 못한 마음이 이리스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이리스는 덜덜 떨리는 제 손을 보다 눈을 감았다. 어쩐지 누군가 제 손을 잡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깊게 잠이 들었다.

***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레온의 청혼을 받아들인 후, 곧 그의 품에서 정신을 잃었다. 나를 안아 들던 레온의 품과 고함을 치던 카를의 목소리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여긴….”

주변을 둘러보자 화려한 가구와 카펫이 보였다. 하지만 고개를 든 순간 이곳이 이동용 천막 안임을 깨달았다.

‘제국 기사단의 막사… 인 건가?’

그리고 아마도 레온의 처소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호사스러움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 천막 안 여기저기에는 램프가 켜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미 밤이 된 모양이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고?’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서려던 나는 그대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워낙에 지쳤던 탓에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힘을 주고 일어나려던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은 신부의 예복이었다

신부의 예복을 본 순간 기억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레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모두, 제국의 황태자비를 수호하라!”

“아….”

그 기억에 나는 내가 왜 이런 예복을 입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나는 조심스레 예복을 살폈다. 고급스러운 천은 아니었지만 한 땀 한 땀 놓인 순백의 자수가 무척이나 섬세하고 정교했다.

그것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쓸며 나는 계속해서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다행히 기억에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곧 약한 두통이 느껴졌다.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천막의 입구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입구를 가린 천이 올라가며 익숙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 일어났군요.”

당연하게도 들어온 사람은 레온이었다. 그의 옷차림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처럼 흰색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물론 결혼식의 예복이었다. 그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멋쩍게 웃었다. 쑥스러워 짓는 웃음은 아니었다. 레온은 침대로 다가와 옆에 앉아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 올랐었는데 괜찮습니까? 아마도 두통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 약을 한 번 더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레온은 그렇게 말하며 근처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작고 동그랗게 말려 있는 검은색의 약을 물과 함께 가져왔다. 그는 나에게 입을 벌리라는 듯 제 입을 살짝 벌렸다. 나는 가만히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많이 아픕니까? 먹기 힘들 것 같아요?”

레온의 시선이 이리저리 날 살폈다. 정말로 어디가 더 아프기라도 한 건지 걱정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

내가 계속해서 아무 말 없이 그를 보고 있자 레온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오직 나의 상태만을 걱정하는 레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정신을 잃기 전의 일들이 모두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신없이 도망치며 카를을 만나고 라트반이 쓰러지고 나 역시 붙잡혔던 그 많은 일들이.

하지만 그와 내가 입고 있는 예복을 보는 순간 다시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레온은 내 시선이 계속해서 예복 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더니 긴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예복은 근처 마을에서 급하게 구해 왔습니다. 대신전이 이 결혼을 무효로 할 온갖 트집을 잡으려 할 것이 분명하기에 최소한의 구색은 맞출 필요가 있었거든요. 소리를 들어 보면 알겠지만 아직 식은 진행 중입니다. 당신이 내 청혼에 승낙을 하고 쓰러졌기에 다행히 당신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예식은 전부 약식으로 처리되었어요. 결혼식은 끝났고 지금은 연회를 치르는 중이지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왁자지껄하게 높은 목소리로 떠드는 술에 취한 말소리와 함께 음악이 들렸다. 그리고 그 음악 사이로 황태자 전하의 결혼을 축하드린다는 환성도 가끔씩.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일부러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미리 쓰인 대사를 읽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전부 연극이야.’

이 결혼식은 연극이다. 가장 중요한 배우는 나와 레온. 연극의 제목은 <황태자의 결혼>.

이 연극을 위해서 레온은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마을에 가서 옷을 준비하고 제국 기사단의 주둔지 전체를 무대로 삼았겠지. 아마도 근처에 있을 카를과 신전 기사단이 바로 이 연극의 관객들일 것이다.

내 얼굴을 보며 레온이 설명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오늘은 급하게 치르는 약식일 뿐입니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성대한 예식이 치러질 거예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카를을 닥치게 하기도 힘들뿐더러… 제국 기사단 역시 쉽게 움직일 수가 없거든요.”

나는 계속해서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결국 레온은 그런 나를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일어나면 나에게 화를 내거나 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

“차라리 그게 나았을 것 같군요. 지금처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말입니다.”

레온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다음 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쓰러진 후의 일이 궁금합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레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라트반 경의 일이 궁금한 것이겠지요.”

“…….”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다르게 질문한 그의 저의를 나 역시 알고 있었기에 나는 죄인처럼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라트반 경을 데려간 신전 기사단은 무사히 대신전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겼습니다.”

“아….”

그 대답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를 떠나게 했을 뿐, 그 외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으니까요. 다친 데다가 강한 독에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신전 기사단의 성력으로 어느 정도는 더 견뎌 낼 수 있겠지만 더 큰 성력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잘하면 예상보다 더 살지도 모르겠지요. 몇 달, 아니 어쩌면 몇 년까지도. 그리고 숨이 붙어 있는 한 당신을 다시 만나려 할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레온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것만으로도 레온이 라트반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대신전에서는 그다지 드러내지 않았던 강한 레온의 적의에 나는 그가 그동안 대신전에서 얼마나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는지를 실감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레온은 더욱 라트반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에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왜 라트반을 죽이지 않았나요?”

레온이 라트반을 죽이려 했다면 이번 일은 둘도 없을 기회였다. 물론 라트반을 지키려 하는 신전 기사단과 맞서는 일이 힘들긴 했겠지만 애초에 그들을 풀어 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너무도 쉽게 그는 라트반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카를과 맞서 가면서까지 라트반이 도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라트반이 나를 지켜 준 것에 베푼 자비라고 생각하기에 레온은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 왜 레온이 그리한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레온은 내 질문을 예상한 사람처럼 곧바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가 그를 죽여서 얻을 것이 없으니까. 아니, 잃을 것밖에 없더군요.”

레온은 그렇게 대답하며 조금 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라트반 경을 죽이면, 당신이 그 사랑의 방향을 나에게 돌릴 거라 생각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그런 멍청이는 내 아버지 하나만으로도 충분해요.”

“…….”

“내 아버지는 어머니의 약혼자를 죽여 그 머리를 선물했지요. 아버지가 죽인 것은 그 약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에 어머니의 희망도 함께 죽인 거였지요. 인생에 절망밖에 남지 않은 자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 같나요?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죽어 가는 거예요.”

“…….”

“리나, 라트반 경이 살아 있는 한 나는 당신이 희망을 갖고 살아갈 것을 알고 있습니다.”

“레온….”

“날 원망하면서 증오해도 당신은 죽어 가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라트반 경이 당신의 마음을 가져갔으니 나는 나머지라도 가지려 노력한 것뿐입니다. 이제 당신과 내 결혼은 성립되었어요.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내 이름과 함께할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진심이 담긴 레온의 말에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당신은 적어도 내가 쓸모 있는 한 계속 나에게 웃어 줄 것이며 상냥할 것이고 또한 나를 안아 주겠지요. 그렇다면 부디 끝까지 나를 이용해 줘요. 나는 있는 힘껏 내 쓸모를 증명해 보일 테니.”

레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마치 쓰임을 기다리는 도구처럼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건 레온은 나에게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대로 천막을 나간다 하더라도 그는 나를 붙잡지 않겠지. 아니, 내가 어디 먼 곳으로 가려 한다면 옆에서 나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는 나를 위해서 어떤 짓이든 하겠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를 이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레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레온, 난 당신이 좋아요.”

내 대답에 레온이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손을 뻗어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이 부드러운 가슴 사이에 묻혔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몸이 조금 떨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었다.

“하….”

느른한 한숨이 그의 잇새로 새어 나와 예복 너머 가슴께에 닿았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그가 좋았다. 처음 그와 자게 되었을 때, 아무리 이벨리나의 기억이 있다 하더라도 두려움으로 가득 차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까지 더해졌었기에 그저 모든 것이 끔찍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내가 레온을 끔찍하게 생각했었던가? 급작스러운 상황에 조금 거칠긴 했어도 그는 나에게 무척이나 다정하게 대해 주었었다. 내가 그날 밤을 떠올리며 그를 바라볼 때 괴로워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을 만큼.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이후에 나는 그가 나와의 관계를 들먹이며 또 다른 밤이나 애정 따위의 것을 요구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나를 도와주고, 내가 궁금해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며 그저 나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정말로 마음이 잘 맞는 친구처럼 말이다.

그는 나에게 우정과 비슷한 평안을 주었었다. 그것이 긴장으로 가득 찼던 대신전의 일상에서 나에게 얼마 안 되는 소중한 휴식이었음을 레온은 알고 있을까.

“레온, 난 당신이 정말로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전 당신과의 우정을 바라지 않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레온이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미안해요.”

나는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 다시 그의 입에서 아쉬움이 가득 담긴 뜨거운 숨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내 손이 그의 예복 단추를 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난 지금부터 또다시 당신을 이용할 생각이거든요.”

그 말에 레온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는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젖은 혀가 얽히는 소리와 함께 숨이 달아올랐다.

아플 정도로 그의 혀가 혀뿌리를 내 혀에 얽혔다. 한참이나 안을 헤집는 그의 혀에 숨이 모자라 내가 버둥거리자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해서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

이를 훑던 그의 혀는 내가 안정을 되찾자 다시 조심스럽게 안을 더듬었다. 뾰족이 세운 혀의 끝이 여린 점막을 느릿하게 훑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은 곧 열기로 바뀌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레온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용할 생각이라.”

그의 말에 가슴 한쪽 구석이 욱신거렸다.

“무엇을 어떻게 이용할 생각인지 궁금하군요.”

여유는 잠시뿐이었다. 다시 레온의 혀가 안으로의 침입을 시작했다.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하지만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면서.

“하아… 하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그가 나에게서 몸을 떼었다. 모자란 숨을 마시며 조금 정신이 든 순간 나는 그에게 물었다.

“…황태자비는 어느 정도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지요?”

내 질문에 레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의 긴 입맞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내가 어떻게 그를 이용하려 하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황제의 직속인 1기사단, 황후의 2기사단 그리고 황태자의 3기사단을 제외한 제국의 모든 병력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습니다.”

긴 입맞춤의 대가로 얻어 낸 답변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이곳에는 어떤 기사단이 와 있나요?”

내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입술이 목을 훑고 내려오더니 쇄골 위를 맴돌았다. 어떻게 해야 그에게 대답을 얻어 낼 수 있을지 나는 이제 알고 있다. 하나를 얻고 싶으면 하나를 주어야 한다.

나는 말없이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맴돌고 있는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래로 이끌었다. 긴장에 크게 올라갔다 내려가는 가슴 위로 거칠어진 레온의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마치 젖을 먹이는 듯이 보였으리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는 내 가슴을 크게 베어 물었다. 얇은 신부의 예복은 금세 젖어 들어 피부에 달라붙었다. 레온의 혀가 느릿하게 천 위를 핥았다.

“아… 읏….”

참아 보려 했지만 능숙한 혀의 놀림에 신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 소리가 레온을 자극한 것일까.

“흣!”

갑자기 그가 거칠게 츱,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을 빨아올렸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던 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치 굶주린 맹수가 먹이를 찾은 듯한 거친 움직임이었다. 둥그런 가슴이 그의 입 안에서 사정없이 뭉개지고 짓눌렸다.

“레, 레온! 아, 아, 읏!”

놀란 내가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도망가지 못한다는 듯 더욱 강하게 허리를 끌어안으며 제 얼굴을 내 가슴에 묻었다. 자극을 견디다 못한 유두가 단단히 솟아오르자 그는 그것을 입술로 비벼 물었다.

“하, 아읏!”

단단한 살점이 계속해서 그의 입술에 뭉개졌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를 찾은 아이처럼 미친 듯이 그 행위를 반복했다. 입술이 괴롭히지 않는 다른 쪽의 가슴을 어느새 올라온 그의 손이 덮듯이 쥐더니 강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플 정도로 거세게 쥐었다 내가 몸을 뒤틀며 벗어나려 하면 달래듯이 다시 손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주무른다. 손바닥 전체로 누르며 둥글게 문지르는 그의 손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반죽처럼 일그러지는 가슴의 옆에서는 난잡하게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레온은 계속해서 내 가슴을 빨아올렸다. 잔뜩 희롱당한 가슴의 끝이 퉁퉁 부어올라 저릿한 통증이 느껴져 나는 그를 붙잡았던 손을 놓으며 허우적거렸다.

“하, 하지 마요! 레온, 그만!”

정말로 젖이 나올 때까지 빨아 댈 것 같은 그의 움직임에 덜컥 겁이 났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린 덕분일까, 다행히 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헉헉거리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레온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조금 전, 미친 듯이 내 가슴을 탐했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해 보였다.

“이곳에 있는 기사단이 궁금하다고 했나요.”

그는 축 늘어진 내 몸을 조심스레 침대 위에 눕혔다.

“그건 꽤 높은 기밀인지라 가벼이 말하기 곤란합니다, 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이 다시 예복의 위로 올라왔다. 곱게 매어 있던 끈이 하나씩 풀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섶이 모두 풀려 버린 예복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피부를 스쳐 침대 위로 흘러내렸다. 속옷이 없던 터라 내 가슴은 고스란히 밤의 공기에 드러났다.

긴장으로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 위로 레온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한껏 희롱한 유두의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으, 읏…!”

그 간지러운 감촉에 몸을 뒤틀자 레온이 어쩐지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무척이나 달콤하군요. 하루 종일 빨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핥기만 해도 혀가 아릴 정도로 단데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얼마나 달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가슴을 쥐는 그의 음란한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해졌던 머리가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뜻을 이해하였기에 얼굴은 뒤늦게 붉어졌다. 레온은 웃으며 그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 예쁜 표정을 지을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 걸 그랬어요. 지금까지는 그럴 여유가 없기도 했었지만.”

레온은 그렇게 말한 다음 몸을 숙여 다시 가슴의 끝을 물었다. 젖은 살을 핥는 소리가 내 귓가에 천둥처럼 올렸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의 행위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원하는 만큼 빨아 대었는지 레온이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려 눈꼬리를 휘며 웃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이곳에 있는 기사단을 물어봤었지요? 여기 있는 기사단은 3기사단입니다. 제 휘하의 기사단이지요. 제 명령이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자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레온의 눈이 빛났다.

“그들은 내가 명령하면 내 아내에게도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신부의 예복을 입고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에서 그를 받아들이고 황태자비가 되는 것. 그것이 레온이 원하는 것이었다.

내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레온이 말했다.

“정보원이 알아 온 바에 의하면 신전 기사단이 내일 새벽, 정비를 마치는 대로 타락한 신전 기사들을 추적하러 떠난다는군요.”

“……!”

“당신도 알겠지만 지금 당장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곳에 있는 제국 기사단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레온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의 사랑은 그가 가져갔으니 나는 다른 것을 원할 수밖에 없군요. 리나, 나를 이용하십시오. 나를 받아들이고 내 모든 것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휘둘러요.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도구가 되겠습니다. 그렇게라도 당신이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레온은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끌어 그의 심장 위에 내 손을 올렸다. 매끈하고 단단한 근육 너머로 쿵쿵 뛰는 그의 심장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땀에 젖은 그의 피부의 감촉이 어쩐지 민망해 나는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레온은 내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보기 좋게 갈라진 근육을 따라 움직이던 손이 그의 배꼽 아래를 지나는 순간, 나는 그가 원하는 곳이 어딘지를 알았다.

“레, 레온….”

곧 내 손에는 꺼덕거리는 기둥이 자리했다. 손 너머에 있는 그의 욕망이 더듬거리는 벗어나려 더듬거리는 내 손길에 크게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그 뜨거움과 묵직한 질량에 놀란 내가 손을 떼어 내려 하자 레온은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리나, 도구를 사용할 때는 꽉 쥐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레온….”

“그리고 있는 힘껏 잡아 휘둘러야 해요. 그래야 제대로 쓸 수 있으니.”

그는 천천히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손 아래에서 살아 꿈틀거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란한 감각이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그래, 레온을 이용할 생각이다. 그가 원하는 것을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단순한 거래. 그런 단순한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레, 레온….”

내 손으로 제 욕망을 키우며 짙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가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손안 가득 쥐어진 성기의 끝이 움찔거리며 액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번들거릴 정도로 끝을 물들인 액은 아래로 흘러넘쳐 내 손을 적셨다. 멈추지 않는 그의 손짓에 찌걱거리는 야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섞여 사라졌다.

“리나, 흐, 으읏!”

점점 빨라지던 그의 손이 멈춘 순간, 희뿌연 액이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올랐다. 그것은 내 얼굴과 가슴 위로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런.”

레온은 제 손가락으로 내 입가에 묻은 정액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위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곳에 뿌릴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레온은 그렇게 말하며 무릎으로 내 다리 사이를 벌렸다. 곧 뭉툭한 성기의 끝이 내 질구에 닿았다.

“이제 이곳에 가득 뿌릴게요, 리나.”

그렇게 말한 레온은 나를 끌어안으며 감격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내 아내.”

젖은 살덩어리가 천천히 붉은 꽃잎을 밀어내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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