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48)

나는 옆으로 메고 있는 가방 안을 뒤졌다. 곧 내 손에는 말라비틀어진 빵 반 조각과 그 빵 만큼이나 볼품없는 육포 두 조각이 나왔다.

“이게 끝이네….”

이게 남은 식량의 전부라니. 숨기려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오고 말았다.

트리온에 가까워질수록 나와 라트반은 마을에 다가갈 수 없었다. 언제 한번 이른 새벽에 작은 마을로 들어가려 했다가 입구 근처에 붙은 수배령을 보았다. 나와 라트반의 생김새에 대해서 적혀 있던 수배령의 밑에는 우리의 죄목도 함께 적혀 있었다.

내 죄목이야 과거 이벨리나가 했던 짓을 기반으로 열 배쯤 부풀려져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라트반의 죄목의 경우에는 누가 보면 욕정의 마수라고 생각할 정도의 낯 뜨거운 내용들로 가득했었다.

그 중에서도 끔찍한 것은 그가 기사단장의 위치를 이용해 대신전 안에 지내는 어린 자들을 성적으로 유린했다는 소리였다. 내가 그것을 잡아 찢으려 하자 라트반은 내 손을 잡아 말렸다. 찢으면 우리가 지나갔다는 흔적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라트반의 손도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되었건 마을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식량이었다. 잠자리가 불편한 것이야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지만 산짐승을 잡고 열매를 따 먹는 것으로 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하루 종일 발목을 붙잡았다.

‘내가 이 정도인데….’

나는 흘끔 라트반을 보았다. 내 앞에 서서 걷고 있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조금 창백해 보였다.

‘독도 이전보다 더 영향을 끼치고 있을 테고.’

그러니 더욱 몸을 챙겨야 할 때, 라트반은 오히려 제 먹을 분량을 나에게 넘겼다.

“저는 괜찮습니다. 전투 중에는 며칠씩 굶는 일도 허다했는걸요.”

그렇게 말하긴 했어도 계속해서 이런 식이면 더 빨리 한계에 다다를 것은 분명했다.

‘식량을 구해야 해.’

그러려면 마을에 가는 수밖에 없다. 마침 산자락을 타고 내려올 때, 멀리 보이는 큰 도시의 바깥 공터에 장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도시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힘들지만 바깥에서 열리는 저런 장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라트반, 아무래도 식량을 사 와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기다리시면….”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내가 가겠어요.”

“안 됩니다!”

당연하게도 라트반은 곧바로 반대했다. 하지만 나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

“라트반, 어차피 둘이 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죠? 다들 함께 다니는 남녀를 찾느라 눈이 벌게져 있으니까요. 어딜 가도 두 명이면 가장 먼저 검문을 받아요. 그러면 따로 움직여야 하는데…. 라트반 당신의 체격은 너무도 눈에 뜨이기 쉬워요.”

“…….”

내 지적에 라트반은 말을 잃었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워낙에 키가 큰 데다가 몸이 좋은 라트반이다. 누가 보아도 기사의 체구인 그는 로브를 뒤집어쓴다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좋았다.

라트반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외모는 제 체격보다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입니다. 로브로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쉽게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역시나, 그 점을 지적할 것 같았다. 역시 포기하겠다는 말을 기다리고 있는 라트반에게 나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어요.”

“쌉니다, 싸요! 아침에 막 따 온 사과입니다!”

“구워서 바로 가져왔어요. 아직도 빵이 따끈합니다!”

공터에는 나무로 된 좌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좌판 위에는 온갖 채소와 과일은 물론 계란이나 빵, 우유 같은 먹을 것들로 가득했다. 또한 옷을 팔고 있는 사람, 빗이나 장신구 같은 잡화를 팔고 있는 사람도 볼 수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칼을 갈아 주는 사람에 꽃을 파는 사람, 단 과자를 파는 사람 등등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손님들을 불렀다.

나는 그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 공터의 가장 끝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훅 비릿한 냄새가 몰려왔다. 그곳에는 임시로 만든 울타리와 함께 여러 종류의 가축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막 도축된 고기를 쌓는 사람들을 흘긋 살펴보며 울타리 근처로 갔다.

사람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나는 울타리 옆으로 다가가 슬쩍 손을 뻗어 바닥에 있는 짐승들의 분변을 슬쩍 옷에 발랐다.

“으….”

곧바로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것을 적당히 여기저기 옷에 묻히고는 잠시 후 털어 내자 적당한 얼룩과 함께 냄새가 남았다.

그러다 나는 가축들의 여물통을 바라보았다. 담겨 있는 물 위로 내 모습이 비쳤다.

‘완벽한걸?’

그곳에는 산발이 된 머리에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더러운 꼴을 한 사람이 보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를 행색에 쓴웃음이 났다.

예전에 대신전 밖으로 나와 도시를 돌아다닐 때 유심히 본 것 중 하나가 시장 구석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르는 가축들을 몰고 와 그 자리에서 잡아 고기를 파는 사람들은 그다지 깨끗한 꼴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계속 동물들을 끌고 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그들에게서 조금 냄새나고 더러운 꼴을 해도 그러려니 하고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무심히 보던 것이 생각이 났다.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었지.’

내가 그들로 변장하기 위해서 갖고 있던 단검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으로 마구 흐트러트린 다음 개울로 내려가 진흙을 덕지덕지 붙이자 라트반은 정말로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라며 나를 말렸다.

물론 나는 가만히 있어 보라고 한 다음에 하던 일을 마저 했지만. 잠시 후, 개울물에는 엉망인 꼴을 한 사람 하나가 보였다.

“…좋았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정체를 알아보면 그거야말로 대단한 것이다. 구석구석 뜯어봐도 성녀는 온데간데없고 험한 일을 하다 막 돌아온 사람 하나가 있을 뿐이다. 옷도 적당히 찢어 더럽히면 거지로 오해받는 데는 조금의 문제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라트반?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그리고 이거….”

나는 주머니에서 전날 먹다 뱉었던 열매를 꺼냈다.

“아….”

그것을 알아본 라트반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요. 어제 이거 먹다가 얼굴이 부었잖아요. 아픈 것도 없고 조금 저릿하다가 몇 시간 후에는 되돌아오긴 했지만.”

그때 개울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어쨌든 이런 모습에 이 열매까지 먹으면 잡아다 앉혀 놓고 제대로 보지 않는 한, 나라는 것을 알 사람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안 됩니다. 그런 걸…!”

라트반은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열매를 빼앗으려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그것을 냉큼 씹어 삼키자 신맛과 함께 혀뿌리 쪽에 아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뱉으십시오!”

그는 차마 나에게 강제로 뱉어 내게 할 수 없어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붙들었다. 나는 그런 라트반의 팔을 붙잡고 달래듯 토닥였다.

“이러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연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던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향했다.

“아쉬워요?”

내가 물은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차피 도망치는 신세에 긴 머리카락은 귀찮기만 하고…. 라트반?”

라트반은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왜. 왜 그래요? 라트반? 놔줘요. 당신 옷 더러워지는데…!”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그를 밀어내려던 나는 그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가 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더 밀어내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보았다.

햇살 아래에 반짝이는 금색의 타래는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놔둔 채, 진흙투성이인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한참 후 라트반이 나에게 속삭였다.

“저는 그저…죄송할 뿐입니다. 제가 모자라 당신께서 이런 모습이 되도록 한 제가 한심스럽습니다.”

그 말에 나는 조용히 라트반을 끌어안았다.

“하….”

이곳에 오기 전의 일을 떠올리던 나는 한숨을 쉬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변장을 했다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것이 없다. 나는 재빨리 상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꾀죄죄한 내 모습과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서둘러 딱딱한 빵과 마른고기, 오래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을 산 다음 사탕을 팔고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라트반도 은근히 단것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계속해서 힘들게 산을 걷는데 단것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나을 것 같았다. 단 냄새가 나는 쪽으로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전 기사네 뭐네 하더니 결국 계집 다리 사이에 빠져 홀랑 넘어갔다는 거 아니야? 그 고고한 척하는 기사님들이라고 해 봤자 결국은 다 똑같다는 거지.”

“그러게. 게다가 대신전 사정을 좀 안다는 사람 말 들어 보니 대신전의 신관들에게도 손을 댔다던데? 신관들뿐만이 아니래. 수습 기사들 중에서도 맘에 드는 자들을 밤에 불러….”

“뭐? 남색도 즐겼다는 거야? 그것도 제 아래 기사들로?”

사람들의 수다에 이를 물었다.

‘뺨이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짝!

시원한 소리에 갑자기 사람들의 목소리가 멈췄다. 나도 놀라 그곳을 바라보자 한 중년의 여자가 조금 전까지 라트반의 험담을 하던 남자의 뺨을 그대로 올려붙인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더러운 소리 작작 하고 꺼지지 못해! 짐승도 구해 준 은혜를 아는데! 그분이 마수를 막고 사람들을 살린 건 네놈들 기억에서 다 지워 버린 거냐! 우리 집 닭도 너보다는 똑똑하겠다!”

“뭐? 이 여자가…!”

“왜? 너도 때려 보려고? 그래 어디 한번 해 봐! 라트반 경이 구해 주지 않았으면 이미 들판의 백골이 되었을 새끼가 말이야!”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 화를 내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런 여자의 행동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여자를 욕하는 것일까.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들은 내 생각과 달랐다.

“그러게, 은혜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 라트반 경이 구해 준 사람들이 몇 명인데.”

“맞아요. 그분이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없어요.”

“우리 마을은 그분이 아니었으면 모두가 죽었을 거야!”

라트반의 도움을 잊지 않은 사람들의 말에 어쩐지 내가 다 어깨가 으쓱거렸다. 그때 라트반의 편을 들던 사람들이 말했다.

“이게 다 그 가짜 성녀 때문이라니까!”

“…….”

하마터면 죄송하다고 말할 뻔했다.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작정을 하고 덤벼들었겠지!”

들려오는 말에 점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틀린 말도 아니니까.’

처음 이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가 생각났다. 이대로라면 불에 타 죽을 거라 생각했기에 나를 무시하는 라트반에게 일부러 더 다가가며 살갑게 대했었다.

‘만약 내가 라트반과 얽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찌 되었건, 라트반은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으리라. 명예를 유지하며 신념을 지킨 채, 여전히 추앙받고 사랑받는 신전 기사단장으로 그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겠지.

잠시 사람들을 보던 나는 몸을 돌렸다.

‘빨리 돌아가자.’

살 것은 다 샀다. 아무리 나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이곳에 오래 있어 좋을 것은 없다. 그렇게 내가 서두르는 걸음으로 시장을 벗어나려 할 때 갑자기 다시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려는 순간 내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성녀님!”

***

이리스는 굳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헥사 하나만으로도 무서워 죽을 것 같은데 저를 끌어안은 이 남자도 마수라니.

그사이 헥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 다음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발로 그녀를 내려찍으려 했다.

“아악!”

땅이 파이고 흙과 함께 고여 있던 핏물이 튀어 오른다. 동시에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다음 순간 이리스는 제가 하늘에 떠 있는 것을 알았다.

“꺄아아아악!”

붕 떠오른 몸에 놀란 것도 잠시, 이내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낙하감을 느끼자 이리스는 발버둥을 치며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힘주어 안더니 속삭였다.

“괜찮아, 무서웠나?”

다정한 목소리에 이리스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의 손이 남자의 옷자락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아슬란은 이를 갈았다.

‘망할 새끼.’

그의 주먹이 재빠르게 다가오는 헥사의 거대한 발을 후려쳤다. 그러자 돌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헥사의 발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헥사가 불러들인 다른 마수들이 아침부터 저에게 이상하다 싶을 만큼 달라붙었다. 그것들을 상대하다 아슬란은 곧 헥사가 제 주의를 돌린 채 다른 곳으로 날아간 것을 알아차렸다.

곧바로 뒤쫓았더니 헥사는 어느 작은 산속의 마을을 제가 불러낸 작은 마물들과 함께 박살 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 도착한 순간, 아슬란은 제 마법의 흔적과 함께 성력을 느꼈다.

저와 상극인 힘이면서도 그동안 그가 아끼고 품었던 힘의 흔적에 다시 아슬란의 이성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성녀가 여기 있다.

마수의 본성이 그의 안에서 크게 울부짖었다. 감히 성녀를 노리다니. 저 미천한 것을 갈가리 찢어 죽일 것이다. 어째서 성녀가 여기 있는지는 그 후에 생각할 일이었다.

아직 자유로운 아슬란의 한쪽 손이 바닥에 떨어진 헥사의 날개 끝을 붙잡았다. 산만 한 크기의 새와 인간보다 좀 더 큰 정도의 팔. 하지만 다음 순간 헥사의 날개는 가죽이 뜯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찢겨 허공으로 던져졌다.

캬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헥사는 남아 있는 날개를 퍼덕거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하늘로 날아오른 마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런 헥사를 따라가려던 아슬란은 곧 제가 무엇인가를 끌어안고 있던 것을 기억했다.

‘성녀.’

헥사를 잡아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녀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 아슬란은 헥사의 추적을 포기하고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제 품에 안았던 그녀를 소중히 내려놓았다. 일단 왜 여기에 있는지부터 물어야….

제가 내려놓은 것을 보던 아슬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뭐야?”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자는 그의 성녀가 아니었다.

***

“성녀님!”

그 목소리에 순간 몸의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발밑이 꺼지며 심장이 추락한다. 시야가 어두워짐과 동시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맙소사. 누가, 누가 날 알아본….

“성녀님이 오셨다!”

“새로운 성녀님이 이곳에 오셨대!”

“……?”

사람들은 멍하니 서 있는 내 옆을 스쳐 달려갔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저건 뭐야?”

내가 바라본 곳에는 화려한 마차가 걷는 것보다도 느린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들과 번쩍거리는 장식, 새로이 색을 칠해 화려해 보이기는 하지만 저것은 분명 원래 짐마차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벽이나 지붕 하나 없이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만 있는 마차는 없을 테니까. 그 마차 위에 있는 의자에는 한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딱 보기에도 그 여자가 입은 옷이 무엇을 따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먼지 하나 없는 순백색에 금실로 수놓인 복잡한 문양의 자수들.

“성녀의 예복….”

여자가 입은 옷은 내가 매일같이 입고 다녔던 옷을 따라 한 것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 이번에 새로 나타났다는 성녀님이신가?”

“그런가 봐. 트리온에서 마수의 독에 당한 수백 명을 한 번에 치료하셨대!”

“허어, 그것 엄청나네. 그럼 우리도 어서 가 보자고. 진짜 성녀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게 아니잖아?”

그러는 사이 여자는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끝에 푸른 성력이 모이는 것이 보였다.

“성력이다!”

“성녀님이셔!”

사람들은 성력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거나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개중에는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대신전에서도 사람들의 광적인 믿음을 보았건만, 이곳은 더욱더 그 믿음이 굳건한 것 같았다.

‘…더 위험한 곳이니까.’

가장 안정된 땅이라는 대신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주 마수가 출몰하는 곳. 이곳에서 성력은 그들을 보호하는 절대적이며 하나뿐인 힘이다. 그러니 그만큼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벨리나가 계속해서 성녀로 남아 있을 수 있었지.’

그녀가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갖고 있는 힘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그녀는 인간들이 이 땅에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존재였으니까.

나는 다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여 주고 있는 성력은 원래 내가 갖고 있던 것만큼 엄청난 양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중급 신관 정도의 성력은 되어 보였다. 어차피 성녀나 상급 신관들이라 해도 그 힘을 항상 다 끌어 쓰는 것은 아니니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여자의 힘은 성녀나 상급 신관들만큼이나 강력해 보일 것이었다.

‘보여.’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여자의 손에 맺혀 있는 성력이 가늘게 다른 곳과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겨 보았더니 그 끝에는 마차의 마부가 있었다. 여자의 성력은 그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원래 신관이었던 자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대신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끔 등장한다는 가짜 성녀인 것이다. 새로이 나타났다는 성녀가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금은 그들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시기일 것이다.

성력의 근원인 마부가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마수로부터 안전하고자 하는 자들은 성녀님을 따라오시오!”

사람들은 그 말에 마차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지는 가짜 성녀를 보며 몸을 돌렸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던지는 사랑과 애정이 원래 이벨리나의 것임을 알고 있다. 다른 자를 향하는, 그리고 앞으로는 이리스를 향할 사람들의 마음을 보며 나는 어쩐지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

“이건 뭐야?”

그 말에 이리스는 히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수라는 것도 두려워 죽을 것 같은데 심지어 헥사를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날개를 찢어발긴 마수다. 막 나타났을 때는 구해 주려는 듯이 끌어안고 날아오르더니 이제는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다.

‘그러면 왜 조금 전에는 날 구해 준 거지?’

이리스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을 때 아슬란은 그녀를 살폈다. 제가 왜 성녀와 착각했는지 그는 곧 알게 되었다. 이 여자가 성녀와 같은 성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이리스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컥! 컥!”

살려 달라는 듯이 버둥거리는 이리스를 보며 아슬란은 중얼거렸다.

“이걸 죽이면 성력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나…?”

그 말에 이리스는 더욱 강하게 버둥거렸다.

아슬란은 고민에 빠졌다. 힘의 형태로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성력이 새로운 몸을 찾아 들어갔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걸 죽여서 힘이 돌아가는 거라면 다행인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대로 그녀에게 힘이 돌아가지 않은 채 성력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일단 찾긴 찾았으니 대신전으로 가져가야 할 텐데.’

그냥 이대로 들고 가면 되는 건가 고민하던 아슬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헥사 그놈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제가 뿌린 마법을 흡수해서 성장을 한 헥사이다. 함정까지 파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놈인데 제가 돌아가는 것을 얌전히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렇다고 그놈을 당장 죽일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지금이야 물러갔다지만 그건 잠시뿐이라는 것을 아슬란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잠시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큿!”

아슬란은 갑자기 제 팔을 때리는 강한 통증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제가 잡아 들고 있던 여자가 어느새 성력을 끌어내더니 그대로 제 팔을 후려친 것이다. 순간 눈앞에 별이 깜빡거리는 것 같았다. 마력과 성력은 반대에 있는 힘이다. 그렇지 않아도 약해져 있는데 방심한 사이 제대로 당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쿨럭!”

바닥에 떨어진 여자는 목을 잡고 기침을 내뱉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이걸 그대로 걷어찰까, 하던 아슬란은 동작을 멈췄다. 만약 이것이 잘못되었다가 성녀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일단 성력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소중히 다뤄야 했다.

그러는 사이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이 주변으로 하나둘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 들었던 날붙이들이 시퍼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쉬는 건 무리겠군.’

하긴, 어차피 헥사가 난장판을 친 곳인 데다가 분명 빠른 시일 안에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꺄악!”

아슬란은 짐승이 새끼를 물어 들 듯이 성력을 가진 여자의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라지는 아슬란의 모습과 그의 손에 붙들린 채, 버둥거리는 이리스의 모습이었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도 성녀님을 찾지 못했다니요?”

카를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제가 이곳에 도착할 때쯤이면 당연히 새로운 성녀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왜 아무런 연락이 없나 조금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새로운 성녀를 찾지 못했을 줄이야.

카를은 치솟아 오르는 화를 달래기 위해 방 안을 거친 걸음으로 절뚝이며 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계집이니 만나기만 하면 쉬운 일이거늘.’

분명 갑자기 생긴 힘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것이다. 제가 새로운 성녀라는 사실에 들떠 있거나 아니면 두려워하고 있겠지. 어느 쪽이나 다루기는 쉽다.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는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아우성을 들었다.

성녀를 맞이하기 위해 왔다는 대신전의 화려한 행렬을 본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성녀를 찾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달래기 위해 함께 온 상급 신관들이 성력을 사용해 다친 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오직 성녀를 외칠 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카를은 속이 뒤틀렸다.

제가 아무리 대신관복을 입고 있어도 무지한 자들에게는 그저 절름발이인 신관에 불과한 것이다.

“하….”

치미는 화에 그가 얼굴을 쓸어내렸을 때, 소매가 흘러내려 팔이 드러났다.

“카를 대신관님? 괜찮으십니까?”

“네? 아, 이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는 제 팔의 자국을 황급히 숨겼다. 오래전 이벨리나의 몸에 박아 넣었던 것은 이제 별다른 쓸모가 없었다. 어차피 이벨리나에게 남아 있는 성력이 없으니 이것은 사용해 봤자 그녀에게 성욕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마음 같아서야 개처럼 헐떡이도록 당장이라도 쓰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붙잡아 오면….’

지하 감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곱게 처리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잡아 끌어와 사람들 앞에 묶어 놓고 사용을 해 볼까. 아니, 역시 그것만으로는 제 분이 풀리지 않는다. 들짐승들을 잡아다 그 안에 던져둔 다음 사용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이 저열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카를 대신관님!”

밖에서 다급히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무슨 일입니까?”

“가짜 성녀와 살인자를 찾았다고 합니다!”

카를은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신관들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듯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은 그는 얼굴을 든 다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모든 신전 기사단을 보내어 그들을 잡아오도록 하십시오!”

가짜 성녀와 라트반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신전의 일행이 주둔하고 있는 야영지가 술렁거렸다. 곧 주둔지를 박차고 달려 나가는 신전 기사단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레온이 말했다.

“모든 신전 기사단을 보낸다라….”

그는 제 부관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빠르게 주둔지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처음부터 준비한 일을 하러 사라진 것이다.

레온은 재빨리 제 말에 채찍질을 했다. 큰 울음소리와 함께 말은 거침없이 먼저 간 자들을 따라 내달렸다. 말 위에서 레온은 미소 지었다.

“그 명령에 따라 드려야지.”

캉!

쇠와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꽃이 번쩍 튀었다.

“컥!”

검이 부딪히는 충격을 이기지 못한 기사는 순간, 검을 손에서 놓고 말았다. 라트반은 그새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그 기사를 걷어찼다. 그는 허공을 날아 바닥을 굴렀다. 몇 번 꿈틀거리며 움직였지만 결국 일어나지는 못했다.

‘이래서….’

그가 신전 기사단장의 자리를 그냥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기사들과 이 정도까지 역량의 차이가 날 줄이야. 다시 덤벼드는 여러 개의 검을 한 번에 막아 낸 라트반이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힘을 주자 모두가 허수아비처럼 우르르 힘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헉… 헉….”

조금 전과 비교해서 확연히 거칠어진 라트반의 숨소리가 들렸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가 점점 지쳐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수만 만나지 않았더라도….’

새벽, 산길을 넘다 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마수와 마주쳤다.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여러 종류를 보았고 아슬란이 불러냈던 마수를 본 적도 있었기에 마주쳐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번뜩이는 마수의 눈을 본 순간 나는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을 향한 마수의 적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강렬하고 거대했다.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릴 정도의 공포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선 순간 라트반이 나를 감싸며 앞으로 나섰다. 안도감보다 먼저 무력감이 몸을 짓눌렀다. 한 번에 마수를 베어 넘기는 라트반을 보면서는 더더욱.

성력이 없는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무력한 존재였다.

마수는 쓰러트렸지만 그 후부터 라트반의 상태는 급속히 나빠졌다.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산길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트리온으로 가야 해.’

가서 이리스를 찾을 수 있을지, 찾는다고 해도 정말로 성력이 되돌아올 수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로 내려온 데다가 걷는 속도도 느려진 탓에 조심하며 트리온으로 향했건만, 우리는 곧 마수를 추적하던 사람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이렇게 기사들이 몰려온 것이다.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구잡이로 덤비는 게 아니야.’

뭐라 해도 그들은 신전 기사단이다. 나는 그들이 퇴로를 차단하고 라트반과 나를 길의 끝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 명을 쓰러트리면 다시 두 명이 다가온다.

‘카를이 쓰라고 한 걸까.’

그들은 모두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얼굴로 라트반을 공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모두가 라트반의 부하였던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보았다면 라트반은 거세게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누구인지 모르기에 이렇게 마구 공격할 수 있는 거겠지.

라트반의 공격에 튕겨 나가던 그들은 갑자기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런가 싶어 바라보니 곧 그들 사이로 한 명의 기사가 걸어 나왔다. 그는 라트반을 향해 외쳤다.

“그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며 신의 길을 걷던 자가 육욕에 빠져 이런 꼴이라니! 명예를 기억하고 수치를 알고 있다면 당장 들고 있는 검으로 스스로를 찔러도 모자랄 것을! 어서 그 사특한 자를 넘기고 이제 그만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

기사의 말에 나는 조용히 라트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가 이런 말을 듣게 된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목이 메었다. 라트반은 한 손을 내려 그를 붙잡은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

갑작스러운 사과의 말에 나는 그가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다시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았다. 그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 저 무례한 입을 벌하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

그의 말에 신전 기사들이 말을 잃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나를 보는 라트반의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아무래도 내가 무척이나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나 보다.

더 이상 라트반을 설득시키려 해 봤자 무의미한 일임을 알아차린 것일까, 신전 기사들은 빠르게 다시 공격 대형을 갖추더니 소리쳤다.

“공격해!”

그 소리가 들린 순간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라트반이 그대로 나를 끌어안고 바닥에 몸을 굴렀다. 어지러운 시야에 눈을 깜빡이자 내가 서 있었던 자리에 파르르 떨리는 화살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젠장….”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거친 말을 내뱉은 라트반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공격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라트반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화살이 네 생각이 맞다는 듯 나를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캉!

그 화살은 내 앞에서 라트반의 검에 밀려 옆으로 날아갔다.

‘죽이려는 건 아니야.’

화살이 나를 향해 날아오긴 했지만, 그것은 머리나 심장이 아닌 다리를 노렸다. 생포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카를이 명령했겠지.’

그것이 옛정 따위가 아님은 잘 알고 있다. 그가 나를 생포하면 무슨 짓을 할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분명 지금까지 해 온 것보다 더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시키려 함이 분명했다. 내가 나락으로 떨어질수록 그와 이리스의 이름은 더욱 높아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캉! 캉!

날아오는 화살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라트반은 나를 끌어당기더니 근처에 있는 큰 나무의 뒤로 몸을 숨겼다.

“저기 붉은 장식이 붙은 투구를 쓴 기사가 보이십니까? 제가 저쪽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니 먼저 가십시오.”

“라트반!”

“이대로라면 곧 잡힙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말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트반은 조금 전보다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나는 곧바로 시선을 그의 손으로 내렸다. 어느새 그가 끼고 있던 장갑이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상처가….”

검에 베이고 독에 당했던 상처가 결국 터진 것이다. 그의 손을 적신 피가 점점 빨리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물었다. 카를은 나를 살려 두려 한다. 하지만 과연 라트반도 살려 두려 할까?

‘아니야.’

그는 카를에게 너무 위험한 인물이다. 지나온 마을에서도 보았듯이 그가 구해 준 많은 사람들이 아직 그를 기억하며 그를 위해 소리를 높인다. 만약 라트반을 끌고 와 비참하게 죽인다면 그들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높았다. 라트반은 설득되지도 않을 것이며 목숨으로 협박한다 해도 마지막까지 절대 굽히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카를은 라트반이 이곳에서 죽기를 원할 거야.’

그래야 그의 죽음에 온갖 더러운 불명예를 뒤집어씌울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런 라트반에 비해서 누구 하나 편들어 주지 않는 나는 살아 있을수록 더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고.

나는 생각을 정리한 다음 라트반을 붙들었다.

“당신이 가요.”

“그게 무슨….”

내가 라트반과 이야기하는 사이 다시 화살이 날아와 우리의 발치에 박혔다. 애써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카를은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살려 두는 편이 새로운 성녀를 드높이는데 더욱 쓸모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

라트반은 바보가 아니다. 그 역시 이미 이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내가 알아차리기를 바라지 않았을 뿐.

“둘 중의 하나가 도망간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어야 해요, 라트반.”

만약 이곳에 라트반이 남고 나 혼자 도망간다면. 그는 죽고, 나는 잡힌다. 그러면 모든 희망은 사라진다. 하지만 내가 잡히고 그가 도망간다면. 나도 살고 그도 살 수 있다. 지켜야 할 짐이 사라지면 적어도 그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살아야 희망이 있어요.”

내가 무사히 도망간다 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리스를 찾기도 전에 마수를 만나 죽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라트반이 도주에 성공한다면 적어도 그는 다시 나를 구하러 올 확률이 있다.

‘…상처가 버텨 준다면 말이지.’

나는 일부러 그의 손에서 시선을 돌렸다.

라트반의 눈이 흔들렸다. 그도 내가 말한 것이 이 상황의 정답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서 결정하라는 듯 화살 하나가 우리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라트반은 아무 말도 없이 나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그가 이럴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그러니 나는 그를 떠밀 수밖에 없다.

“라트반.”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른 다음 그의 얼굴을 붙잡아 당겼다. 조금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일말의 물러섬도 없었던 기사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는 내 손길에 순순히 따라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닿기 직전 눈을 감는 그의 얼굴을 나는 조금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내가 먼저 몸을 떼자 아쉽다는 듯, 더 원한다는 듯 그의 이가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는 그런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대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절대로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달려요.”

“……?”

잠시 당황하던 그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그의 얼굴을 눈에 담은 후 나는 웃으며 달렸다. 아마도 조금 전에 나도 저런 표정을 지었었겠지.

내가 달려 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화살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

날카로운 화살촉의 끝이 내 팔을 스치고 날아갔지만 나는 이를 더욱 악문 채 미친 듯이 뛰었다.

“성녀님!”

“어서 가요, 라트반!”

나는 라트반에게 소리치며 내달렸다. 그에게 돌아보지 말라고 했지만 나 역시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잡아!”

“어느 쪽부터?”

하지만 당황해하는 기사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쪽을 먼저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건 그가 나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니까.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더욱 다리에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멀어져야 한다. 한 명의 기사라도 나를 더 따라오기를, 그만큼 라트반이 더욱 멀리 갈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화살이 날아와 다리를 스쳤다. 잠시 휘청이긴 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급하게 헤치고 지나가는 잡목의 가시에 얼굴이 긁히고 오래된 낙엽 더미에 발이 미끄러졌지만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뒤에서 달려오는 기사들의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모양인지 더 이상 화살도 쏘지 않았다. 그리고 곧.

“잡았다!”

“……!”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나는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잡았어! 가짜 성녀를 잡았다!”

제압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곧 내 몸 위로 무거운 몸이 올라타더니 곧바로 두 손을 뒤에서 붙잡았다. 버둥거려 보았지만 헛된 반항이었다.

“남은 자들은 모두 라트반을 추적해!”

기사들이 외치자 몇몇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라트반이 간 쪽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언덕 위에 그들이 노리던 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라트반!”

그사이에 몇을 상대한 것일까. 어느새 그는 피를 가득 묻히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결국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을 듣지 않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다시 본 그의 모습에 곧바로 울어 버릴 정도로 기뻐하는 내가 있다. 곧 언덕 너머에서 그를 추적했던 것 같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트반은 저항하지 않고 그들에게 잡혔다. 그는 저항해서 그 자리에서 죽는 것보다, 차라리 투항해서 나와 함께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조금 전의 나와 똑같이 바닥에 엎드린 채로 구속당하는 그를 보았다. 나를 붙잡았던 기사는 그 모습을 보며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다시 머리채를 붙잡아 흔들었다.

“홀려도 제대로 홀렸군.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다시 찾으러 오다니.”

정신없이 흔들리는 머리에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기사는 그대로 내 얼굴을 손으로 갈겼다.

“컥!”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거세게 얻어맞은 머리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도 알 수 없는 그때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내 몸을 붙잡았던 손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잡고 있던 손이 사라진 나는 그대로 다시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다가올 고통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다른 손이 나를 붙잡았다.

“리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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