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아암….”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새벽 안개가 가득한 길에는 새 소리만 가득할 뿐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크게 마음껏 기지개를 편 다음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간밤에 정말로 푹 잔 덕분에 몸에 근육통이 남아 있을망정 기분은 상쾌했다.
‘발도 좀 괜찮아진 것 같아.’
지난 밤 욱신거리던 발도 지금은 부기가 가라앉은 데다가 상처 위에는 딱지가 생겼다. 이런 상태라면 오늘 걷는 것도 크게 문제는 없으리라.
‘게다가 라트반이 새로운 신발도 준비해 두었고.’
팔을 흔들며 몸을 풀고 있자 마구간 쪽에서 라트반이 나왔다. 말에 묶여 있는 큰 가방이 두둑한 것으로 보아 여관에서 오늘 먹을 음식과 물을 가득 채운 모양이었다.
말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우리는 곧바로 여관을 떠났다.
다행히 오늘은 진흙탕이 된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더 길이 좁아지고 거칠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대신전에서 보았던 이 대륙의 지도를 떠올렸다. 무척이나 많은 나라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있는 상태다. 물론 그 원흉은 제국 때문이었다.
제국의 정복 전쟁 때문에 이 대륙의 지도업자들은 눈물을 꽤 흘렸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굳건할 것 같았던 왕국이 하루아침에 제국의 속국이 되어 이름이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 차라리 속국이면 다행이다.
‘트리온까지 하루 종일 달려도 2주일은 걸린다고 했지.’
이 대륙의 가장 끝에 있다는 곳이다. 워낙에 험한 곳이고 마수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라 어느 왕국도 가지기를 거부했다는 땅.
나는 이제 가물가물한 책의 내용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이리스는 주인공이었기에 그녀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는 이벨리나보다 훨씬 더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름도 없는 마을이었고 과거 광산이 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어.’
적어도 특징 하나는 기억하고 있으니 조금 더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다 갑자기 아슬란이 생각났다.
‘아슬란은 이리스를 찾았을까?’
성력을 추적해 갔으니 분명 이리스에게 모든 성력이 갔음을 그도 느꼈을 것이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잠시만 가만히 계십시오.”
내가 아슬란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라트반이 말을 멈춰 세웠다. 재빨리 말에서 내린 그는 우리가 지나온 언덕을 한번 바라보더니 땅에 엎드렸다. 그러더니 라트반은 재빨리 나에게 팔을 뻗었다.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었다. 그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리자 라트반은 말을 잡아끌고는 수풀이 우거진 산길로 들어갔다. 말은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곧 라트반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그 뒤를 재빠르게 따랐다. 한참이나 안으로 들어간 그는 가방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어 말에게 물려 주더니 다독이며 진정시켰다. 푸르륵 몸을 떨던 말은 갑자기 주어진 간식과 휴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 깜짝할 새 사과를 먹어 치우고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라트반 갑자기 왜….”
“쉿. 몸을 숙이고 가만히 계십시오.”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몸을 숙였다. 잡초가 무성한 숲길 속에는 이제 조용해진 말의 숨소리만이 가늘게 들렸다. 한참 후, 우리가 가던 길 쪽으로 두두두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곧, 나뭇잎 사이로 언덕에서 달려오는 여러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순백의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의 앞에는 대신전의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깃발을 보는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들이 곧바로 나를 향해 달려와 검을 뽑아 드는 모습이 잠시 눈앞을 스쳤다. 하지만 곧 그들은 우리가 숨어 있는 곳을 빠르게 지나갔다.
말발굽이 일으킨 흙먼지가 가라앉고 그들의 모습이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라트반의 목소리에 그제야 나는 크게 숨을 쉬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지 가슴 아래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려서 바깥으로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손바닥을 바라보자 식은땀이 흥건했다.
“라트반, 조금 전 기사들은….”
“신전 기사단입니다. 하지만 사제들도 섞여 있군요. 게다가 기사단이라고 해도… 아직 수련생들도 섞여 있었고.”
라트반은 굳은 얼굴로 기사들이 사라진 언덕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선발대입니다. 아마 이 뒤로 또 다른 대신전의 사람들이 지나갈 것입니다. 저들의 깃발이 금색인 것으로 보아 이 뒤로 지나갈 사람은….”
“…카를이겠군요.”
내 대답에 라트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색의 깃발을 신전에서 쓸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성녀와 대신관. 성녀는 없으니 대신관일 것이고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만큼이나 급하게 이 길을 이용하려는 대신관이 누구인지는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산길을 이용해야겠습니다.”
라트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말 고삐를 잡았다. 나는 기사들이 왔던 언덕을 바라보았다.
‘개새끼.’
나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조금 전 지난 기사들이 앞에 있는 마을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었다. 나와 라트반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면서 곧 이곳을 지날 새로운 대신관을 맞이할 준비를 하겠지.
‘이리스를 찾으려 하는 거야.’
대신관이 성녀를 찾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를이 애절하고 급박한 모습을 보일수록 사람들은 그의 신실함을 칭찬하며 열심히 그를 도울 것이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이리스를 찾으려 하는지도 모르고.
‘또 같은 짓을 하려 하겠지.’
이벨리나가 대신전으로 왔을 때, 적어도 그곳에는 그녀를 걱정하던 전 대신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많았고 카를은 아직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신전이 발칵 뒤집힌 이 틈을 그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을 전부 제 추종자들로 채우겠지. 그곳에 새로운 성녀가 서게 된다면.
역겨움에 속이 불편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신발의 가죽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오늘도 무척이나 힘들고 긴 하루가 될 것이다.
***
“짜증 나네.”
바위에 앉아 산 아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레온의 모습에 뒤에 서 있는 부관들은 몸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산 저 아래에는 어젯밤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피로 물든 땅 위에서 피어오른 새벽안개는 붉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진한 피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새들은 새벽부터 열린 연회에 즐거운 듯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어젯밤, 레온이 이곳으로 온 다음 가장 큰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제국군 400과 페르벤군 800의 전투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얼마 있지 않아 서로 숨겨 둔 병력을 끌어냈다. 최종적으로 전투에 임한 양측의 병력은 제국군 800명과 페르벤군 3000명이었다.
수를 셀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페르벤군의 승리에 돈을 걸었을 것이다. 양측 다, 끝없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최정예의 기사들만을 모았다. 기량이 비슷하다면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숫자다. 하지만 제국군에는 급히 합류한 레온이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전투의 승패를 바꾸었다.
제가 만들어 낸 결과 앞에서도 레온은 그저 밤을 새운 사람의 피곤함만을 보일 뿐 평소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부관들은 고개를 돌려 좀 떨어진 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제국 기사단이 보였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셀 수 없는 전장을 겪어 온 노련한 자들이다. 그런 기사들마저도 지금은 간밤의 전투를 치르고는 흥분을 쉬이 누르지 못하고 있다.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충혈된 눈과 기이할 정도로 들뜬 말투.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부관들마저도 끓어오르는 피를 누르기 힘든데, 정작 이 모든 결과를 이끌어 낸 레온은 당연한 것을 본다는 듯한 표정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것을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다면 무엇이 짜증 난다는 것일까.
그때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손에는 흰색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디에서 온 거지?”
“…대신전 같은데?”
전령의 얼굴을 알아본 자가 중얼거리자 부관들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길을 터 주었다. 지금 레온이 가장 반가워할 자가 온 것이다.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쓸어 버려야지.’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뒹구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의 전투는 이겼다. 그렇다고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꽤 남아 있을 거란 말이지.’
처음, 페르벤군이 800이라 들었을 때는 대신전에서 저를 못 죽여 안달이었던 사단장이 개인적으로 군을 끌고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도착한 순간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페르벤이 작정을 하고 저를 노린 것이다.
평소라면 이 상황이 무척이나 즐거웠을 것이다. 레온은 언제나 위험한 것을 좋아했으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레온은 대신전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인가 이것은 그의 버릇이 되어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흘은 무슨 놈의 나흘….”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목소리가 신음처럼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간을 뒤로 돌릴 수만 있다면 편지에 자신만만하게 나흘이라 적었던 제 뒤통수를 후려친 다음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나흘이라 적지 마! 그냥 시간이 좀 걸린다고 적어! 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온갖 생각이 레온의 머릿속을 스쳤다. 성녀가 나흘이라더니 날짜도 못 세는 거냐며 저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라트반 그자가 옆에서 그놈은 입만 살았다면서 저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라트반은 저와 아슬란이 없는 만큼 성녀를 독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자 레온은 저도 모르게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 탓에 시체를 뜯어먹고 있던 새들이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돌아가고 싶다….”
레온은 자신을 바라보던 성녀를 떠올렸다. 대륙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장소에 대해 말할 때, 그녀는 모험을 동경하는 아이와 같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평생 저를 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레온은 눈을 감고 성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무척이나 즐거운 상상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상상이 점점 망상이 되어 그녀를 닮은 딸의 모습까지 그리고 있을 때 부관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대신전에 두었던 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부관은 그렇게 말하며 흰 봉투를 공손히 레온에게 건넸다. 레온은 낚아채듯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이런 연락이 올 리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봉투에서 종이를 꺼낸 레온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시선이 편지를 읽어 나갈수록 레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곧 레온의 손이 들려 있던 편지를 거칠게 구겼다. 그는 몸을 돌려 부관들에게 말했다.
“부단장들을 죄다 불러와. 내 검도 가져오고.”
“네?”
갑작스러운 레온의 말에 부관들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부단장들을 부르는 거야 갑작스럽다지만 그렇다 치고 검을 가져오라니?
물론 레온 역시 기사긴 했지만 지금 같이 열세인 전투에서는 그는 선봉에 나서기보다는 후방에서 전체적인 지휘를 담당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직접 선두에 나서려 한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부관들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레온은 이를 갈며 선언하듯 말했다.
“오늘 밤이 오기 전에 전부 다 정리한다.”
떨리는 그의 주먹 안에서 대신전의 상황을 전한 편지가 더욱 엉망으로 구겨지고 있었다.
***
쾅!
라트반의 발길질에 굳게 잠겨있던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밖에 있는 기둥에 말의 고삐를 묶은 다음 가방 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려 주었다. 힘들게 산길을 탄 다음 먹는 과일이 마음에 들었던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말은 신나게 사과를 먹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주황색으로 물들었던 하늘이 빠르게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산에 밤이 찾아오는 것이다.
열심히 걸었건만 밤이 될 때까지 마을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라트반은 주변을 살피더니 길이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갑자기 그러는가 궁금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그를 따랐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안쪽에 이런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라트반은 처음부터 사냥꾼들이 다니는 길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말에게 사과 한 개를 더 먹인 뒤 그를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잘 관리되고 있는 곳이군요. 비워 둔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겠습니다.”
안을 둘러본 라트반은 혹시나 위험한 것이 있는지 꼼꼼히 살피더니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오두막은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품속의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을 하나 꺼내어 오두막 가운데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 정도면 문을 박살 내고 들어온 사죄의 표시로는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나와 라트반은 빠르게 잠을 잘 준비를 했다. 구석에 있던 모포를 꺼내어 먼지를 한번 털고 바닥에 깐 다음 밖에 흐르는 개울에서 적당히 몸을 씻은 뒤 눕자 하루의 고단함이 빠르게 다가왔다.
곧 뒤이어 씻은 라트반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내 옆에 눕는 대신에 테이블 옆의 의자에 앉았다.
“라트반, 안 자요?”
“…먼저 주무십시오.”
어제보다 좀 더 피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걱정이 되었다. 내가 좀 더 편하게 자게 하기 위해 내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대신전을 나온 이후로 그와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물론 같은 침대 위에서 잠들기는 했지만 정말로 잠만 잤다. 눈을 떠 보면 내가 그의 품속에 파고들어 가 있긴 해도 딱 거기까지일 뿐, 라트반은 내 몸을 만지는 일도 없었다.
대신전에서 보냈던 마지막 밤에 그가 몇 번이고 나를 안았던 것이 생각났다. 눈물로 빌어도 들어주지 않겠다는 듯, 몇 번이고 그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하면 할수록 그는 만족하기는커녕 더욱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처럼 나를 안았었는데. 대신전을 나온 후로는 한 번도 몸을 섞지 않았다.
‘하긴… 독도 그렇고. 라트반도 피곤할 테니까.’
아무리 기사라 하지만 그도 사람인 이상 체력의 한계는 있을 것이다.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는 겁니까?”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것일까. 라트반이 몸을 일으켜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아니… 별건 아니고… 당신이 무척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서요.”
내 말에 그는 눈을 끔벅거리더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피곤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목소리도 그렇고… 나와 잠도 자지 않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피곤….”
거기까지 말하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내뱉은 거야?
라트반은 내 말에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냐는 듯이 눈을 끔벅였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 제가 피곤해서 당신을 안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라트반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들렸다.
“퉷!”
피가 섞인 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슬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힘껏 내던졌다. 그러자 사람 머리만 한 동그란 구체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더니 앞에 있는 바위에 부딪혀 퍽! 하고 터졌다.
그가 던진 것은 마수의 몸이었다. 정확히는 마수 헥사의 눈.
그것을 잡아 뽑았을 때 헥사가 얼마나 날뛰었는지 지금 주변에는 성한 것이 없었다. 나무란 나무는 죄다 꺾여 부러졌고 땅 여기저기는 거인이 삽으로 파낸 듯 패어 있다. 그가 조금 전에 헥사의 안구를 집어 던진 집채만 한 바위도 원래는 여기에 있던 것이 아니다.
초토화된 주변을 보던 아슬란은 바위를 따라 주룩 흘러내리는 안구 잔해를 보았다. 눈 하나가 뽑혔다 해서 헥사에게 대단한 타격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놈의 눈은 곧 재생할 터이니.
바위를 바라보던 아슬란은 언젠가 비슷한 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언제더라?
잔뜩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에 잠시 웃음이 돌았다.
맞다, 그 금색 강아지 놈의 얼굴에 빵을 집어 던졌었지.
꽤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성녀의 옆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무해한 척, 사람 좋은 척, 다정한 척을 하던 그 얼굴을 빵 부스러기가 덮어 버렸으니까. 성녀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지만 황태자니 뭐니 하는 인간들의 지위는 그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그놈은 온갖 불쌍한 척을 하며 성녀의 곁에 앉았다. 성녀는 그런 그놈의 얼굴을 안쓰럽다는 듯이 닦아 주었고.
웃고 있던 아슬란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갑자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대신전으로 돌아가 그놈의 얼굴을 한 대 때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물론 검은색의 개새끼도.
“젠장….”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슬란은 조금 전 헥사의 눈을 집어 던진 제 팔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붉은 털로 가득한 짐승의 발이 있었다. 마수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아슬란은 제 몸 안에 들끓는 마력을 헤아리다 털썩 주저앉았다. 만약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면 폭주가 시작될 것이다. 아무래도 헥사는 그것을 노리는 것 같고.
“교활한 새끼.”
마수들 중에서도 유난히 머리를 굴리는 놈이었다. 그렇다 해도 감히 저를 상대로 함정을 팔 줄이야.
“어쩐지 마법이 늦게 완성된다 싶었어.”
대신전에서 시작된 그의 마법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늦게 완성이 되었다. 그때는 그저 대신전에 고여 있는 성력과 제 힘이 부딪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트리온에 오고 나서야 아슬란은 헥사가 제 마력을 빨아 먹고 있었던 탓에 마법의 완성이 늦어진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헥사가 제 몸 안에 있는 마력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그 자식도 이제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나 보군.”
헥사는 언제나 이쪽 세계에서 인간들로 포식한 뒤 잽싸게 제 세계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번 방문에서 헥사는 성장을 하고 말았다. 무리 없이 드나들던 세계의 틈은 이제 헥사가 지나가기에는 너무도 작아져 버린 것이다.
머리가 있는 놈인지라 헥사는 곧바로 제가 무엇을 얻어야 돌아갈 수 있을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세계의 틈을 찢어발길 더 강한 마력.
마침 이곳에는 아주 거대한 마력을 가진 아슬란이 있었다. 심지어 꽁꽁 싸매어 제 안에 두었어야 할 마력을 대륙 전체에 퍼트리는 미친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헥사가 보기에는 저 먹으라 차려진 음식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헥사를 천 번 정도 갈가리 찢던 아슬란은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짜증이 밀려왔다. 제 마력을 다 풀어서 성녀의 사라진 성력이 어디로 갔나 겨우 찾았더니,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헥사가 달려드는 탓에 마법은 깨지고 말았다. 덕분에 아슬란은 성녀의 성력이 모여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딘지 놓치고 말았다.
‘차라리 잘된 건가.’
아슬란은 제가 폭주해 이성을 잃게 될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쯧.”
곧바로 불쾌함을 가득 담은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성을 잃게 되면 제 안에 있는 본능 중 가장 강한 본능이 그를 이끌 것이다.
‘번식욕.’
아슬란은 제가 어떻게 될지를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제 암컷을 들키지 않고, 일을 방해받지도 않기 위해서 헥사를 갈가리 찢은 다음 곧바로 성력이 있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고는 오직 제 욕구를 채우는 데만 집중할 것이다.
‘싫은데.’
지금 성녀는 성력을 잃었다. 마법이 깨지기 전, 그녀가 잃었던 성력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움직임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것은 다른 인간의 몸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는 그자를 성녀라 착각하고 취할 것이 분명하다. 그게 싫었다.
“…….”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곧 당황했다. 왜? 목적은 새끼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얻든지 상관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쾌한 기분이 든단 말인가.
아슬란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곧 석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성녀에게 성력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석판을 바라보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길고 붉은 머리카락을 따라 마수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지금까지 왜 한 번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성력은 당연히 성녀의 것. 그러니 그것이 리나에게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성녀가 생겨나는 것이라면?
석판을 향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이것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제 목을 조이는 목줄이 될 것이다.
‘단순한 아티팩트가 아니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서명한 것을 지켜야만 하는 힘을 가진 석판으로 보일 것이다. 얼핏 들으면 강제력을 동반하는 계약서 정도로 보일 이것에는, ‘반드시’라는 말이 붙는다.
인간들은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성녀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것에 서명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슬란은 마수화된 팔로 떠 있는 석판을 잡았다. 그러자 석판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는 걸 보고는 처음에 어이가 없었지.’
단순한 사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인간들이 말하는 ‘신’의 일종이었다. 전지전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많은 제약이 있는 그런 존재들. 온갖 세계를 넘어 다니다 이쪽에서는 석판이라는 형태를 갖추고 약속을 이행하게 만드는 쪽으로 제 권능을 한정시킨 모양이었다.
아슬란의 눈이 아직 비어 있는 성녀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녀가 제 새끼를 품게 되면 그는 성녀가 요구하는 것이 어떤 명령이든지 그것에 따라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계속해서 그의 마음속에 걸렸다. 왜 성녀는 아직도 이곳에 어떤 것도 적지 않았던 거지? 도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려고?
“하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의문은 늘어 가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슬란은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제가 보고 싶은 존재가 떠올랐다. 성력을 확인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불안해하던 성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그냥 다 죽여 버리고 데려올 걸 그랬나.’
인간들의 세계는 뭐 그리 조심해야 할 것이 많은지. 마수답게 오직 힘이 절대적 해결책인 그에게는 귀찮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혼자서 지낼 텐데 별일은….’
혼자 있을 성녀를 생각하던 그의 이마에 신경질이 가득한 주름이 잡혔다. 생각해 보면 혼자는 아니다. 남겨 두고 온 개새끼 두 마리가 있을 테니까.
‘내가 성녀를 다시 만날 때까지 그녀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그걸 핑계로 성녀에게서 멀리 떨어트려 놔야지. 물론 죽이면 더 편하긴 하지만 그랬다가는 성녀가 저에게 웃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혼자 히죽이며 라트반과 레온을 떼어 놓을 생각을 하던 아슬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에에에엑!
석양이 지는 하늘 저편이 일그러지나 싶더니 그곳에서 듣기 싫은 울음소리와 함께 헥사가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마수는 아직 커진 제 몸이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게다가 제 세계가 아닌 곳에서 성장을 해 버렸으니 더욱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아슬란은 이를 악물었다. 본체로 돌아가면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저런 놈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다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본체로 돌아가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데다가….
‘안을 수 없잖아.’
그 몸으로는 성녀를 안을 수 없다.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저 하늘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말이다.
아슬란은 헥사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좋아하던 하늘에 저런 것이 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다음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마수 두 마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라트반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제 앞에서 붉어진 얼굴을 돌린 성녀의 말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제가 피곤하기 때문에 그녀를 가만히 두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갑자기 억울함이 몰려왔다.
그는 기사다. 그것도 신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다. 그 말은 이 대륙에서는 손에 꼽히는 자라는 소리다. 검술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기사가 가져야 할 많은 요건 중에서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체격과 체력이다. 당연히 라트반은 그 요건들 역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겨우 며칠 말을 타고 달리는 것뿐인데 지칠 리가 있나. 열흘 넘게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마수들을 상대했던 날들도 흔했다. 그에게 이런 도주는 산책보다 조금 더 힘이 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라면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성녀였다.
그렇게 흔들리는 말 위에서 기절한 듯이 제 품에 기대어 잠들었었다. 숙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잠에 빠진 와중 간간이 내뱉던 앓는 듯한 신음 소리로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감히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힘들어하는데 혹시라도 제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할까 봐.
그런데 이런 오해를 받고 있었을 줄이야.
라트반은 성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말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을 하다 슬그머니 그를 바라보았다. 작고 붉은 입술이 민망함을 참지 못해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 당장, 저 입술을 핥고 싶은데.
그는 불쑥 떠올라 저를 물들이는 제 욕망에 이를 물었다.
“그렇다면, 리나.”
라트반이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제는 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해도 풀어야 할 것 같았고.
“제가 오늘 밤, 당신을 안아도 되겠습니까?”
그는 저번에 밤새 성녀를 안으면서 스스로가 타락의 끝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열한 제 욕망의 바닥은 더 깊은 곳에 있는 모양이다. 라트반은 오늘에야말로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미친 듯이 안고 싶었다. 걱정을 담은 눈이 오직 애원만을 담게. 자신을 걱정할 여유 따위는 한 조각도 남기지도 못할 만큼 격렬하게.
그의 애원 같은 질문에 성녀는 한참이나 눈을 끔뻑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답을 재촉해 볼까 고민하던 라트반은 입을 여는 대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손바닥이 스치다 손가락이 부딪혔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성녀의 손가락 사이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곧 얽혀 든 두 손이 단단히 서로를 붙잡았다.
“아….”
그제야 그녀는 그가 무엇을 애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는 듯, 짧은 숨을 토했다. 곧, 하얗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라트반은 그녀의 입술이 머뭇거리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피곤할 텐데….”
피곤? 당연히 피곤하다. 매일 밤 그를 엄습하는 욕망과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라트반은 제가 한번 맛본 그 쾌락을 잊을 수 없었다. 특히나 매일 밤, 그에게 몸을 붙여 오며 잠드는 그녀의 숨결이 그의 몸에 닿을 때마다 그날 밤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욱신거려 오는 하체에 제가 이렇게나 짐승 같은 자였나 자책하면서도 잠든 성녀를 바라보던 시선은 돌릴 수 없었다.
제 이성은 조금만 흔들려도 그대로 추락하고 마는 가느다란 줄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왜 그렇게 힘들게 서 있냐며 그의 등을 떠미는 손이 있었다. 그가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그렇기에 라트반은 기꺼이 떨어지기로 마음먹었다.
“리나.”
라트반의 입술이 성녀의 이마에 닿았다.
“지금부터는 부디 제가 아닌, 당신을 걱정해 주십시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얼굴을 따라 내려왔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그를 미치게 하던 붉은 입술을 물었다.
***
“아, 아아… 라트반. 그, 그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 아래 있는 희고 가냘픈 몸이 신음 소리와 함께 들썩였다. 평소라면 곧바로 떨어져 성녀를 살필 라트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대한 산이 된 것처럼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을 핥아 올리던 그가 점점 더 아래로 얼굴을 내렸다. 아직 다 벗지 못한 얇은 옷이 붉게 물든 피부를 가리고 있었다.
라트반은 얼굴을 들었다. 잠시 생긴 틈에 성녀가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것도 잠시였다. 라트반은 머뭇거리지 않고 손을 들어 저를 방해하는 옷을 잡아 내렸다. 얼마 전 그가 남겼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흰 피부가 달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라트반!”
그의 행동에 성녀는 놀란 듯이 두 팔을 들어 제 가슴을 가렸다. 라트반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성녀의 얼굴 옆으로 눌렀다. 그렇게 가리려 했던 제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되자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왜 숨기려 하십니까.”
“…….”
“이토록….”
다시 라트반은 머리를 숙였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챈 성녀의 눈이 커졌지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제가 노리던 것을 입술로 물었다. 잔뜩 흥분해 도드라진 유두가 그의 입술 사이에서 문질러지다 깨물렸다.
“아… 아아!”
성녀는 온몸을 관통하는 짜릿한 감각에 수치를 잊은 채 소리를 질렀다. 라트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듯이 그녀의 목소리를 감상했다. 제가 이끌어 내는 그 소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말캉한 살덩어리가 그의 입 안에 가득 담겼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이를 세워 쉴 새 없이 곤두선 정점을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성녀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흐, 아, 아아….”
신음 소리에 물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한참이나 정신없이 유두를 핥으며 빨아 대던 그의 혀가 힘을 주어 가슴 전체를 꾹 누르는 순간 결국 터져 버린 쾌감이 성녀의 입에서 격렬한 교성으로 튀어나왔다.
“하읏…!”
그제야 겨우 라트반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달빛 아래 그녀의 가슴이 그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가 탐했던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전 이어지지 못했던 말을 끝냈다.
“…이토록 달콤한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가 내뱉는 말들이 정말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게 맞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라트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누군가를 상대로 살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떤 일이든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부터는 쉽다고 했던가. 라트반은 이제 수치심과 민망함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제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더 보여 주십시오.”
“라트반…?”
다정한 목소리임에도 성녀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직도 제 손을 붙들고 있는 그의 팔에 험악하리만큼 튀어나온 핏줄들이 꿈틀거렸다. 도대체 또 무얼 하려고….
그런 성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라트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맹수가 제 발밑의 사냥감을 보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잠시의 이별이 안타깝다는 듯 그의 입술이 붉게 성난 유두의 끝에 가볍게 닿더니 밑으로 한 뼘씩 도장을 찍듯 내려갔다. 거침없이 내려가던 입술이 배꼽의 아래에 닿았을 때 성녀가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가 어디를 향하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그녀의 본능이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새 손목을 놓은 그의 팔이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가 다리 사이를 향했다.
“라트반!”
애절한 부름에 언제 벗었는지 모를 그의 상체 근육이 땀에 젖은 채 꿈틀거렸다. 잠시 움직임이 멈췄다. 성녀는 필사적으로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적시는 사이, 제 아래가 민망할 정도로 젖어 들었기 때문이다.
곧 라트반의 입술이 밀부를 가리고 있는 천 조각에 닿았다. 그의 혀가 푹 젖어 있는 위를 스치고 지나가자 성녀는 이제 엉엉 울며 그에게 매달렸다.
“라트반, 그만! 그만하세요! 제발….”
몸을 직접 섞는 것이 이보다 덜 부끄러울 것이다. 거침없는 희롱에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물방울들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고개를 든 라트반은 그것이 무척이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었다.
“안 돼. 제발 그만…아!”
허공을 젓던 손이 파르르 떨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혀가 천 조각을 밀어내고 수줍게 다물린 살 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단단히 붙잡힌 흰 다리에는 붉은색의 손자국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 아, 아아! 으, 읏!”
그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들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그의 이름조차도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지나친 쾌락은 고통과 비슷했다. 온몸이 떨리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입은 달뜬 숨과 신음을 내뱉었다.
라트반은 미친 사람처럼 그녀의 아래에 제 얼굴을 묻었다. 위만큼이나 아래도, 아니 이곳은 조금 전 그가 물었던 곳보다 더욱 달콤했다. 종일 핥으라 해도 따를 수 있을 만큼.
“아, 흐, 흐읏! 아…!”
울음소리가 섞인 신음 소리가 커졌다. 그러다 그가 유난히 그녀가 반응을 보이는 곳을 파고들어 꾹 누른 순간.
“아아악!”
크게 버둥거리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툭 모포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왈칵 뜨거운 액이 흘러내렸다.
“흐, 흐윽….”
라트반이 얼굴을 들자 성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라트반의 입으로 절정에 달해 버린 제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힘없이 벌어진 다리 사이로 그녀가 느꼈던 흥분이 흘러내려 모포에 둥그런 자국을 만들어 냈다.
“리나.”
“흐, 읏….”
그가 부르자 성녀는 들썩이는 숨을 달래려는 듯 훌쩍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 모습을 보던 라트반은 몸을 일으켰다. 물론, 제 다리 사이에 단단히 그녀를 가둬 둔 채.
“…라트반?”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을 차린 성녀는 그가 하의를 벗는 모습을 보다 다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가 탈의하는 순간 튕겨 나오듯 그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녀는 맹세코 제가 본 그 어떤 무기보다 지금 그의 것이 가장 흉악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배에 닿을 듯이 서 있는 성기는 핏줄이 돋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라트반. 자, 잠시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아닌 당신을 걱정하시라고.”
“그, 그렇지만….”
“게다가 체력을 걱정해 주시다니, 그것이 기사에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말인지 모르셨겠지요.”
“아니, 난 정말 그냥 걱정이 되어서…!”
라트반의 무릎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겨우 다물 수 있었던 아래가 다시 벌어지며 끈적한 액으로 젖었던 음부가 부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라트반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채 그녀의 다리를 제 허리에 걸치게 했다.
그가 손으로 제 성기를 붙잡아 그녀의 음부에 물리자 마치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부드럽고 따뜻한 살점이 그의 끄트머리를 물었다.
“으응….”
다시금 흘러나오는 성녀의 신음 소리에 라트반이 말했다.
“그러니 더 이상 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뭘 어떻게 노력하겠다는 것인지 성녀가 되묻기도 전에 그가 제 허리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이미 눅진하게 풀려 있는 밀부 안으로 귀두가 모습을 감추었다.
쾌락으로 느른해진 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라트반은 이번에도 그녀가 힘겨움에 몸부림치며 눈물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
성녀는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숨을 삼키며 그가 무엇을 해도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받아들였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여린 몸이다. 처음 몸을 섞은 밤도 무척이나 힘들어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 역시 그때를 기억하는 것인지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지금부터 그가 할 일에 대한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짙은 신뢰가 있었다. 당신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듯한 신뢰가.
라트반은 움직임을 멈춘 채,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색색거리는 거친 숨결, 흐트러진 머리카락. 신기하게도 사냥꾼의 오두막에 버려져 있던 낡은 모포 위에 있는데도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라트반은 이를 악문 채로 아주 조심스럽게 제 허리를 내렸다. 굵은 성기가 천천히 그녀의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그녀의 안으로 조금씩 들어갈수록 그녀의 얼굴이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커졌다가 점차 숨 쉬는 것을 버거워하며 입이 벌어졌다. 그러다 다시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르르 떨어진 순간 라트반은 모든 힘을 다해 제 이성을 붙잡아야 했다.
그의 것이 완전히 그녀의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두 사람의 몸이 원래부터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빈틈없이 맞닿았다.
이제 겨우 들어갔을 뿐인데 이미 그녀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라트반이라고 해서 편한 것은 아니었다.
저를 따뜻하게 조이는 그녀의 안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미친 듯이 움직여 버릴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분명, 그녀가 다칠 것이다. 그런 것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리나.”
라트반이 그녀를 부르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괜찮습니까?”
“괜찮… 아요…. 그러니까… 어서….”
괜찮을 리가. 이렇게나 힘들어하고 있으면서.
히끅거리는 숨을 감추지도 못하면서 그를 위하는 대답에 라트반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 열기는 그의 몸 가장 깊은 구석까지도 빈틈없이 가득 채워 나갔다. 라트반은 따스하면서도 부드럽게, 간질거리면서도 포근하게 제 안을 가득 메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리나.”
그의 손등이 눈물로 젖은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라트반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그를 가득 채운 감정이 이름을 얻어 흘러넘쳤다.
그의 고백에 들썩이던 성녀의 숨이 멈췄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들은 사람처럼 크게 뜬 눈이 그를 향했다. 푸른 눈동자가 호수에 잠긴 것처럼 일렁이더니 후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굵은 물방울이 모포 위로 떨어졌다.
성녀의 입술이 무엇인가를 말하려 달싹였다. 라트반은 가만히 그녀가 할 말을 기다렸다. 한참 후, 그녀는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뱉었다.
“이, 이리스는….”
그 말에 라트반은 성녀가 왜 그동안 불안한 빛을 보였는지 깨달았다.
이리스. 새로이 성력을 가진 여자. 그리고 자신에게는 조금도 의미가 없는 사람.
“…설마 제가 그 사람에게 가리라 생각한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대답 대신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라트반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럴 때마다 맞물린 몸이 흠칫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져 왔다. 서로의 심장 고동 소리가 느껴질 만큼 이렇게나 깊게 닿아 있어도 그녀가 가진 불안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제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믿게 할 수 있을까.
라트반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깊이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몸이 그 한계를 넘어서자 성녀는 벗어나려는 듯이 도리질을 치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에게서 도망치려는 듯한 움직임에 라트반은 그녀의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다시금 깊게 찔러 들어오는 그의 것에 성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무너졌다. 하지만 곧 다시 벗어나려는 듯 몸을 일으키려 했다. 라트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리를 붙잡았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둥근 엉덩이를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붙잡아 제 몸에 붙이듯이 끌어당겼다.
“……!”
신음조차 내지 못한 성녀가 놓으라는 듯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다.
“라, 라트반… 너무… 기, 깊어….”
“리나.”
애원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허리를 움직였다. 밝은 금발이 크게 출렁이며 그녀가 고개를 젖혔다. 이제 겨우 시작된 자극임에도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고 강렬했다.
“저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다시 라트반의 허리가 크게 움직였다. 그는 제 위에서 활처럼 휘는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당신 역시 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라트반은 그 사실을 그녀의 깊은 곳에 새기고 싶었다. 육체가 아닌, 더 깊은 곳에 있을 그녀의 영혼에.
그의 몸이 더욱 깊이 그녀의 안을 향했다. 그동안 참아 왔던 모든 욕망을 터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