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48)

알릭은 고개를 들었다. 라트반과 성녀는 이미 벽의 통로를 이용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 멀리 후원의 입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델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리라.

알릭은 후원의 입구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미친 듯이 주변을 뒤지며 다가오는 신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 카를을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던 자들이었다.

알릭은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소리를 질렀다.

“가짜 성녀를 보았습니다!”

성녀는 저에게 대신전을 떠나라 했다. 그 말에 알릭은 울고 싶었다. 그녀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진심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관들이 그를 바라보자 알릭은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제가 부르자 저쪽 길로 급하게 달려 도망갔습니다. 아마도 창고가 있는 쪽으로 숨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알릭은 두 사람이 사라진 곳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앞장서겠다는 듯이 달렸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실은,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괴로워하는 성녀를 보고서도 카를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은 마지막까지 그를 위해 말했다. 대신전을 떠나라. 그 말은 어서 카를을 피해 달아나라는 뜻이었다. 어서 도망가서 살아남으라고.

알릭은 사라지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달렸다.

그가 달린 만큼 두 사람은 더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죽겠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알릭의 얼굴은 평온했다.

나와 라트반은 조심스럽게 비밀 통로가 시작되는 방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그사이에 시델의 시체가 발각되지는 않았는지 내 처소는 아직 조용한 상태였다.

“이쪽이 대신전 입구로 가는 통로예요.”

내가 옷장을 가리키자 라트반이 재빨리 그것을 열고 안쪽의 벽에 손을 대었다. 다행히 라트반의 성력으로 비밀 통로의 문이 열렸다. 라트반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나는 그를 붙잡았다.

“잠시만, 라트반. 이대로 나갈 수는 없어요.”

그렇게 말한 다음 나는 내 방으로 뛰었다. 그러고는 천으로 된 주머니와 가방을 챙겨 재빨리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금화와 보석들을 쓸어 넣었다.

“라트반, 그쪽 서랍에 있는 것을 챙겨요.”

내 말에 라트반은 빠르게 성호를 한 번 그리더니 망설임 없이 서랍을 열었다. 그가 연 서랍에는 예전에 대신전 밖으로 나가 찾아왔던 카일레스의 단검을 시작으로 다양한 신전의 보물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라트반이 들고 있는 주머니 안에 담겼다.

지금부터는 최대한 빨리 대신전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작정 나와 라트반의 다리만 믿을 순 없다. 달릴 말을 구해야 하고 먹을 것도, 잘 곳도 필요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한 번이라도 밖에 나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전 밖의 마을에서 마차와 말들이 모여 있는 곳들을 떠올리며 나는 라트반과 함께 다시 비밀 통로가 시작되는 방으로 돌아갔다. 라트반이 먼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들어가려 하던 나는 고개를 돌려 처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대신전. 성녀를 위해 만들어진 곳.

그래서일까. 성녀가 아닌 나는 단 한 번도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껴 보지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기도 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날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떠날 줄은 몰랐다.

“…성녀님.”

라트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떠나는 것을 망설인다고 생각한 것일까. 라트반은 조심스럽게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고민했던 질문이다. 언젠가 이 대신전을 벗어나게 되면 어디로 가야 할까.

처음에는 그저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예전의 삶에서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면서, 내가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대신전은 물론 라트반과 레온, 아슬란으로부터 아주 멀리. 그리고 이리스에게서 아주 멀리 떠나려 했었다.

그것이 내 목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내게 내밀어진 상처 입고 검게 물든 손을 바라보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날카로운 검의 날을 잡았던 손. 원래대로라면 라트반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트반뿐만이 아니다. 레온도, 아슬란도. 모두가 나를 위해 움직였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나는 라트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트리온으로.”

트리온. 그곳에 이리스가 있다.

지하에서 일렁이다 사라진 성력이 생각났다. 그것에 손을 대었을 때, 성력은 제가 있을 곳을 찾았다는 듯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이리스에게 간 성력도 다시 가져올 수 있을 거야.’

그녀에게서 이벨리나의 성력을 되찾아야 한다.

나는 라트반의 손을 잡은 채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

“어서 찾아!”

신관들이 거칠게 성녀의 방의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는 방 앞을 지키는 여신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짜 성녀와 전 기사단장 라트반을 찾아야 한다! 서둘러!”

먼저 방으로 들어선 신관들이 안쪽에 열려 있는 서랍을 보고 소리쳤다.

“이곳에 들른 흔적이 있습니다!”

“신전의 물건들을 가져간 모양입니다!”

신관들은 빠르게 방을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녀와 라트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떠오를 때 절뚝이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카를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신관들은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카를을 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경외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 정체를 들키는 것을 두려워해 가짜 성녀가 지하 감옥에 집어넣은 신관. 그는 지하 감옥에서도 신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죄수들을 돌보았다. 그런 그가 어쩐지 걱정스럽다며 시델이 평안히 신의 곁으로 갔는지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면 시델의 시체를 발견하는 데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시델의 시체가 발견되고 나서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카를은 지하 감옥을 나왔다. 아무도 그에게 죄인이라 하지 않았다. 그가 그곳을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카를은 약자였다. 그러니 피해자일 것이었다.

잠시 카를에 대해 의심을 품더라도 절룩이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마음속에 생기는 동정심이 의심을 지워 버렸다.

방으로 들어선 카를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망설이고 있는 신전 기사단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최대한 빨리 새로운 자들로 갈아 치워야겠군.’

워낙 오랜 시간 동안 라트반과 함께 지내 왔던 기사들이다. 아무리 손을 쓴다 하더라도 저들은 쉽사리 라트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카를은 어떻게 해야 신전 기사단을 문제없이 빠르게 갈아 치울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답은 쉽게 나왔다.

‘트리온에 마수가 나타났지.’

헥사는 그가 기억하기로는 무척이나 강대한 마수다. 아마도 그것을 퇴치하려면 많은 기사들의 희생이 필요할 것이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그는 라트반을 믿는 기사들을 처리할 수 있고, 기사들은 그토록 자신들이 원하는 신의 곁으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혹시 살아남은 자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성녀의 성력을 보면 제 믿음이 흔들릴 것이다.

성녀의 처소를 뒤지는 신관들을 바라보면서 카를은 창가로 다가갔다. 저 멀리 신관들이 흰 천에 덮인 시체 한 구를 옮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릭의 시체였다.

성녀와 라트반을 찾는 신관들을 이끌고 대신전의 끝까지 달려간 알릭이었다. 그는 눈속임이었을 알고 분노한 신관들에게 둘러싸이자 소리치기 시작했다.

“모두 카를에게 속고 있습니다. 저자는…!”

카를은 알릭이 진실을 내뱉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자 역시 가짜 성녀와 결탁하여 대신전을 어지럽히려 하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동안 대신전을 흔들었던 불안은 터질 곳을 찾고 있었고 카를은 그 길을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신관들이 알릭에게 달려들었다. 진정하라는 카를의 목소리는 오히려 신관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소리친 것이었다.

일은 너무도 손쉽게 끝났다. 신관들의 흥분은 알릭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엉망이 된 꼴로 숨을 헐떡이는 알릭을 보면서 카를은 제가 손을 쓰지 않아도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멍청한 놈.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지.’

물론 그렇다 해도 살려 둘 생각은 없었지만.

알릭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보았다. 분명 성력을 잔뜩 썼을 것이다. 그가 어디에 성력을 그리 쏟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델은 목에 치명상을 입고 죽어 있었고 그 곁에서 피범벅이 된 칼이 함께 발견되었다. 기사가 아니더라도 그 상처를 성녀가 내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라트반을 치료해 주었나.’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봤자 알릭은 평신관이었다. 그 미약한 성력으로는 절대로 그 독을 다 치료할 수는 없다.

‘게다가 알릭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는 말이지.’

그도 그럴 것이 단검에 발라져 있던 것은 마수의 독이다. 상급 신관이 들러붙어도 그것을 완벽히 치료하기란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모든 신전에는 성녀와 라트반의 수배령이 내려질 것이다. 그들은 그 어떤 신전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없다.

‘어떻게 하려나.’

카를은 잠시 성녀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곳에서 제게 당했던 일을 떠올린다면 그저 멀리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이제는 성력도 없으며 살아 있는 한 앞으로 계속 대신전의 추격이 뒤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신전조차 없는 험한 오지로 숨어드는 것이 제일 안전하겠지.

‘하지만….’

카를은 새롭게 나타난 성녀를 떠올렸다. 이리스.

‘성력을 되찾으려 할 수도.’

비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성녀, 아니 이벨리나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카를은 몸을 돌렸다. 모두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랐던 상급 신관들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대신관의 예복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카를 대신관님.”

자신에게 공손히 내밀어진 대신관의 예복을 보며 카를은 씁쓸한 표정을 꾸며 내었다. 그리고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곧, 대신관의 예복이 그의 어깨에 둘러졌다.

카를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신관들에게 엄숙히 말했다.

“가짜 성녀를 쫓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짧게 성호를 그으며 말을 이었다.

“진실된 성녀님을 어서 대신전으로 모셔 와야 합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사이에 가짜 성녀가 그분께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그러니….”

카를은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우리가 트리온으로 가야 합니다.”

그의 말에 신관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 속에서 카를은 생각했다.

그래, 어서 빨리 트리온으로 가야 한다. 분명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가 제힘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을 것이다. 그 소녀를 다정한 말로 안심시키며 위로하고 그녀가 가장 의지할 사람이 되어야 했다.

신께서 그를 위해 보내 준 또 다른 성녀. 이벨리나가 찾아가기 전에 그가 먼저 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러면 지난 시간처럼 대신전과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아마 새로운 성녀도 이벨리나처럼 제가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는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될 것이다.

***

“하아….”

얼어붙은 손을 얼굴로 가져와 호호 불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건만 대륙의 끝, 트리온이라 불리는 지역은 이미 빠르게 기온이 낮아지고 있었다. 변방 중의 변방. 지형이 험하고 산세가 깊은 이곳은 농사를 지을 땅도 거의 없으며 그렇다고 사냥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 아니다.

이리스는 얼어붙은 손을 몇 번이고 주무르다 다시 차가운 개울물에 손을 담갔다. 피로 물든 낡은 천은 몇 번이고 비벼도 그 자국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서 빨리 세탁을 끝내고 모닥불로 가져가 말려야 했다. 붕대로 쓸 천이 바닥이 났으니까.

한참 후, 힘껏 천을 쥐어짠 이리스는 잠시 근처의 평평한 바위에 앉아 허리와 무릎을 두드렸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다음 두 손을 꼭 붙잡았다.

화악! 하는 불길이 이는 소리와 함께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은 맑은 성력이 그녀의 손끝에서 타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이리스의 얼굴은 공포에 가득 질려 있었다. “왜….”

갑작스럽게 생겨난 힘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불꽃 정도의 성력이었다. 의사가 없는 산속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게 몇 명을 치료하자 누군가 자신을 향해 성녀님이라 말했다.

몇몇은 그녀를 향해 엎드려 기도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이미 죽은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와 살려 달라 울부짖었다. 광기 어린 사람들의 모습에 이리스는 두려움을 느끼며 미친 듯이 달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때를 떠올리던 이리스의 눈이 붉어졌다.

“난 이런 거 원한 적 없어….”

이리스는 울먹이며 제 손을 감싼 성력을 바라보았다.

“무서워….”

이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왜 이런 힘이 생긴 거지?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지?

산속의 어떤 열매가 독이 있는지, 계곡의 물고기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는 배웠지만 그 어느 누구도 갑자기 성력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이리스는 제 손을 바라보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을 새로운 성녀라 외치던 신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리스는 귀를 막고 고개를 흔들었다.

누구라도 좋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두려움이 가득 담긴 흐느낌이 개울물 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대신전을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어둠 속을 헤치며 정문 근처의 창고로 나올 때까지 우리를 쫓는 자들은 없었다. 생각보다 느린 대신전의 반응에 의아하면서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신관복이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형태라 어찌나 다행인지. 하지만 가려 주는 것은 얼굴뿐인지라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라트반은 역시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장이었던 그다. 검술은 물론 그 체격부터 기사들의 이상이라고 했던가. 결국 라트반은 푹 머리를 숙인 채, 경비병들의 시선을 피해 죄인처럼 대신전의 정문을 나서야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 역시 고개를 떨구었다.

‘나 때문이야.’

라트반은 내 손을 잡았다. 그 대가가 이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환호와 존경을 받고 이 문을 나섰을 그가 이제는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며 이 문을 지난다. 그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될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늘이 지나기 전에 그의 이름은 대신전의 영광스러운 기록에서 흔적도 없이 파내어질 것이며 가장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겠지. 그 누구보다도 올바르고 고결했던 기사가 이제는 비아냥과 추잡함이 가득한 수다거리가 될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자 라트반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놓아도 자신은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렇게 신관복 아래에서 손을 맞잡은 채, 우리는 대신전을 벗어났다.

***

도주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대신전을 나서자마자 마차와 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말 두 필을 구했다. 그리고 갈아입을 옷과 먹고 마실 것들도.

처음에는 각각 말을 타고 달리려 했으나 곧 내가 심각할 정도로 승마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나는 라트반과 함께 말을 타야 했다. 일부러 크고 튼튼한 말을 샀건만 두 사람을 태운 말은 생각보다 빨리 지쳤다. 달리다 쉬기를 반복하며 하루를 꼬박 달리고 밤이 되었을 때는 나도 말들도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멀쩡한 것은 라트반뿐이었다.

너무 어두워져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작은 도시 하나가 보였다. 우리는 그 도시의 가장 외곽에 있는 여관 앞에 멈춰 섰다.

“아야야….”

라트반이 나를 안아 들 듯이 잡아 땅에 내려 주자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모든 몸의 뼈가 어긋났다가 다시 붙는 것 같은 느낌과 근육이 함께 뒤틀렸다가 펴지는 듯한 통증에 저절로 신음 소리가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라트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리려 했지만 한 걸음 움직이자마자 다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방을 구하고 오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그를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괜찮겠어요?”

“걱정 마십시오. 저라고 해서 바깥세상의 일에 무지하지는 않습니다. 비밀 임무를 처리하면서 돌아다닌 적도 많으니 이런 흥정에는 익숙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에 라트반은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혹시나 안쪽이 시끄러워지면 그대로 도망치십시오. 이쪽의 갈색 말이 아직 체력이 좀 더 남아 있습니다.”

“…….”

조금의 망설임 없이 말하는 라트반의 모습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역시나, 그는 언제라도 들킬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치안이 괜찮은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마음을 놓지는 마십시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라트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 손을 한 번 잡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길에서 나는 말들의 고삐를 쥔 채, 여관의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대신전을 벗어나 이렇게 멀리 온 것은 처음이다. 카일레스의 단검을 찾아오느라 잠깐 대신전 밖으로 나갔을 때도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보다 더 멀고 낯선 곳에 오니 내 눈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다행히 여관은 입구가 바깥쪽이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방을 받지 않을까 했었는데 이곳의 여관들은 모두 밖에서 객실로 바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부러 라트반이 이런 곳으로 고른 것 같았다. 한적한 외곽이었기에 다행히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길 여기저기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가게가 몇 군데 보이긴 했지만 특별히 이상한 느낌도 없었다.

그러다 그런 가게들 중 한 곳에서 남자 두 명이 나왔다. 척 보기에도 거나하게 취한 것 같은 남자들은 나와 말을 한 번 흘긋 보더니 곧 관심 없다는 듯 내 옆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당분간 그쪽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할 것 같아. 이거 원, 이렇게 갑작스럽게 제국과 페르벤이 전쟁을 시작할 걸 누가 알았겠어?”

남자의 말에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귀를 세웠다. 제국? 전쟁?

“그러게 말이야. 게다가 페르벤이 그 많은 군사를 잘게 나눠 이렇게 깊숙이 제국령까지 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어.”

“덕분에 제국군이 패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게 되었잖나. 그나저나 페르벤은 이제부터 큰일이고만.”

“왜? 이겼는데?”

“왜긴 왜야. 제국군에는 황태자가 있어. 그 교활한 금색 여우 말일세.”

“레온 황태자?”

“그래.”

갑작스레 튀어나온 레온의 이름에 나는 더욱 숨을 죽였다.

“그 여우가 그냥 물러섰을 것 같아? 분명 패퇴하는 척하면서 뭔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게 분명해.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라고. 황태자는 지는 것 같으면서도 마지막에는 기어이 제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않았나.”

그 말에 레온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자신이라고 했던가.

‘어쩐지 연락이 없다 싶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거구나.’

갑작스레 대신전에서 모습을 감춘 이후로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내 생각보다 더 그의 상황은 심각한 듯했다. 그사이 남자들은 다시 레온에 대해 뭐라 옥신각신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리를 떴다. 다시 혼자 남자 푸르릉거리는 말들의 고삐를 잡으며 나는 레온을 떠올렸다.

그가 죽거나 다쳤다는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하니 무사할 것이다. 페르벤과의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언젠가 그가 원하는 바를 이뤄 내면 그는 다시 대신전으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내가 아닌 카를이 그를 맞이하겠지만.

‘다행이야. 카를은 아직 레온이 어느 쪽인지 모를 테니.’

의심이야 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레온은 카를에게서 더 많은 것을 캐내기 위해 라트반을 적대시하고 카를에게 손을 뻗는 척을 했었다.

‘앞으로 레온이 어떻게 움직이려나.’

레온에게 별일이 없다면 그는 곧 우리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레온은 어떻게 할까? 그는 성력이 없는 나를 찾으려 할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라트반이 여관 문을 나오는 것이 보였다.

“라트반.”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불렀다. 라트반은 재빨리 나에게 다가와 말고삐를 받으며 조용히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별일은 없었나요?”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아슬란의 소식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의아해졌다. 들었다, 도 아니고 ‘들은 것 같다’니? 내가 어서 말해 달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라트반은 내 손을 잡고 방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말들을 마구간에 부탁한 다음 곧바로 따라가겠습니다.”

***

여관의 객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훌륭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필요한 것은 다 있었으며 평소에 관리를 열심히 하는 듯, 오래 묵은 냄새 없이 침구에서도 볕에 말린 좋은 냄새가 났다. 게다가 벽 곳곳에 매달린 마른 허브의 향이 잔뜩 굳어 있던 몸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씻어야 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침대 위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말의 등 위에서 흔들렸던 몸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욱신거렸다. 그냥 멀쩡한 상태로 탔어도 피곤했을 터인데, 전날 라트반과 밤을 보내다 보니 욱신거리는 둔통이 남아 있던 몸이었다. 그런데 온종일 말을 탔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하아….”

하지만 아프다 말할 수 없었다. 부끄럽다기보다는 이런 통증으로 라트반에게 걱정을 끼쳐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푹신한 천 위에 누우니 피곤함이 몰려와 저절로 눈꺼풀이 감겼다.

다행히 여분의 옷은 있으니 내일 아침에 씻고 갈아입으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저 내가 조금 찝찝하게 잠들어야 하는 것뿐이지. 그렇게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무십니까?”

작은 그의 목소리에 나는 침대 위에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내 눈꺼풀에 묻어 있는 잠의 흔적을 찾은 모양이었다.

“많이 피곤하실 테지요. 그냥 누워서 들으셔도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관 로비에서 들은 이야기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아, 아슬란의….”

“그렇습니다. 솔직히 아슬란의 소식이라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는 이유가… 정확히는 헥사에 대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헥사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수십 장의 날개로 날아다니는 마수에 강력한 독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사람들을 뜯어 먹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고….”

“그렇습니다. 또한 무척이나 강력한 마수이기도 하지요. 헥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것이 출현할 때마다 그 주변이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또한 헥사는 인간에게만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마수들도 제 먹이로 삼는 흉포한 마수입니다. 그 탓에 헥사가 나타나면 그 주변에 있는 다른 마수들은 모습을 감춥니다. 사실 어지간한 마수는 헥사를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얼마 전 트리온에서 목격된 헥사의 모습이 처참했다고 합니다. 날개 절반 가까이가 뜯기고 다리 하나도 큰 상처를 입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설마….”

강대한 마수가 신전 기사단이 나서지도 않았는데 큰 상처를 입었다니. 누가 헥사에게 그런 상처를 입힐 수가 있단 말인가.

“…아슬란이.”

“네. 아마도 그가 했을 거라 추측됩니다. 다른 마수가 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라트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헥사가 다른 마수와 싸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쩐지 분명 그 상대가 아슬란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라트반의 말을 듣고 있는 사이 다시 내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레온의 소식도 아슬란의 소식도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 왜인지는 몰라도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그 둘의 상황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조용해지자 라트반이 내 앞을 서성이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던 그가 욕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조금 더 편하게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라트반이 씻는 사이에 잠들 수 있겠지.

그렇게 내가 까무룩 잠이 들려고 할 때, 라트반이 다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곧바로 침대로 다가오더니 누워 있던 내 몸을 안아 올렸다.

“라트반? 왜….”

그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라트반이 대답했다.

“많이 피곤하실 터이니 푹 주무십시오.”

그의 대답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려는 순간이었다.

“제가 씻겨 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라트반이 뭘 한다고?

그가 너무도 평온하게 말한 탓에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라트반의 팔이 나를 감싸 안더니 종이 상자를 들듯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대로 주무시면 감기에 걸리실 겁니다. 게다가 오늘 하루 내내 흔들리는 말 위에 계셨으니 근육이 여기저기 뭉쳐 있겠지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정신을 차렸다.

“아, 그, 그럼 내가 알아서…!”

그렇게 외치며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지만 팔을 올리기가 무섭게 뻐근한 근육의 통증이 몸을 타고 흘렀다. 신음 소리를 내며 급히 팔을 내리자 라트반은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거침없이 욕실을 향해 걸었다.

대신전의 욕실보다 훨씬 좁은 곳이긴 했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춘 곳이었다. 아니, 오히려 안에 있는 물건들은 라트반의 자택보다 더 많을지도. 라트반은 욕실 한쪽에 있는 등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나를 앉혀 두더니 넉넉히 쌓여 있는 타올 중에서 한 개를 꺼내어 따뜻한 물에 적셔 가져왔다.

이쯤 되면 반항해 보았자 소용없다 싶어서 나는 그냥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따끈한 타올이 얼굴과 손을 꼼꼼히 눌러 닦는 것이 느껴졌다. 아픈 곳마다 꾹 누르는 라트반의 손에 작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욕조 가득 담긴 따뜻한 물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와 라트반의 손길에 나는 조금 전 눈을 떴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가 내 팔을 들어 겉옷을 벗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가 죄다 벗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를 내보내고 혼자서 씻어야 하는데….

다시 조심스러운 손길이 굳은 몸 여기저기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난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고 깊게 잠이 들었다.

마치 지금 이곳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인 것처럼.

라트반은 성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깊게 감긴 눈은 그가 그녀의 신발을 벗겨 내어도 살짝 떨릴 뿐 뜨이지 않았다. 라트반은 퉁퉁 부은 그녀의 발을 뜨거운 수건으로 감쌌다. 그러자 깊게 잠들었음에도 나른한 신음 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힘드셨겠지.’

라트반은 고개를 돌려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보았다.

말을 타고 이동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걷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중에 말이 달리기 힘든 길은 내려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제일 힘들었던 길은 진흙이 가득한 길이었다. 그가 앞에서 말을 끌고 걷는 동안 그녀는 열심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수건에 말라붙었던 진흙이 닦이자 흰 발 여기저기에 붉은 생채기가 난 것이 보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꽤나 따끔거렸을 텐데. 성녀는 이곳에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저릿함이 라트반의 가슴 한쪽을 스쳐 지나갔다. 성녀를 바라보던 그는 시선을 내렸다. 수건을 붙잡고 있는 제 손이 보였다. 낮에는 일부러 보이지 않도록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다. 여전히 상처가 있던 붉은 자국과 함께 검은색의 독이 머물러 있는 것이 보였다.

‘임시로 눌러 놓은 것뿐이야.’

제 성력과 함께 알릭이 온 힘을 다해 그의 성력으로 상처와 독이 퍼지는 것을 눌러 놓았다. 덕분에 더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이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이것은 다시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상처도 다시 벌어지겠지. 그때 성력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마수의 독 같은데.’

라트반은 과거 전투 중에 마수의 독에 당했던 동료들을 떠올렸다. 거의 붙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마지막 힘을 내어 험하고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갔던 마물. 그것을 뒤따르던 동료는 마물이 뱉은 독이 섞인 체액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워낙에 험한 곳이기에 기사단을 돕던 신관들은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라트반과 다른 기사들이 자신들의 성력으로 동료의 독을 누르면서 그를 업고 달렸지만 헛된 일이었다. 제때 치료받지 못한 동료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던 동료의 모습을 떠올리던 라트반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저는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상급 신관은 되어야 치료가 가능하겠군. 그게 아니면 성녀님의 성력이거나.’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건만 성녀 역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끔 말고삐를 잡은 그의 손을 이유 없이 만지작거릴 때가 있었다. 분명 독을 신경 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라트반은 대신전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때를 기억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질문했을 때, 성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트리온으로 가겠다고 했다. 잃어버린 그녀의 성력을 되찾기 위해서.

그녀의 대답에 라트반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지금 트리온은 그녀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다. 그곳으로 곧바로 가겠다 결심한 것에는 제가 독에 당한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라트반은 몸을 일으켰다. 욕조에 손을 넣어 뜨거운 물과 찬물이 잘 섞이게 휘휘 저은 그는 다시 성녀에게로 돌아왔다.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지만 얼굴은 무척이나 평안해 보였다. 그것이 저를 신뢰하기에 나오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자 어쩐지 손끝이 간지러웠다. 그렇게 성녀를 바라보고 있던 라트반의 손이 조금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제 겉옷은 벗겼다. 남은 것은 안에 입고 있는 것들뿐이다. 목에 있는 단추를 하나씩 풀수록 드러난 옷 사이로 뽀얀 살결이 보였다. 그러다 그의 손이 조금 더 밑에 있는 단추를 풀자 그가 남겼던 자국과 함께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가슴의 골이 보였다.

“…….”

라트반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인 채, 손을 놀렸다. 이렇게 머뭇거릴수록 물은 식고 성녀 역시 힘들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손은 몇 번씩이나 움직임을 멈췄다.

‘…좀 더 익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큰 착각이었다. 익숙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손이 떨렸다. 처음 하는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나 손이 미끄러지는지.

크고 거친 손이 제 몸에 닿고 있음에도 성녀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만큼 그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겨우 그녀의 옷을 전부 다 벗길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성서의 문구를 몇 번이나 읽으며 그는 성녀를 안아 올렸다.

“…라트반.”

그의 품을 알아차린 것일까. 성녀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그의 품속으로 몸을 묻었다. 내뱉는 숨결 하나마저 모두 느낄 수 있을 만큼 닿은 몸에 라트반의 목이 크게 울렁였다.

신이시여.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라트반은 신을 찾았다. 아무래도 무척이나 길고 힘든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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