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48)

아무래도 머뭇거렸던 제 태도를 성녀는 다르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분명 그녀를 다치게 할 것 같아 필사적으로 저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것을 과연 그녀는 알아줄까.

싫은 거냐고? 그건 그가 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 설사, 그녀가 이제 와 싫다고 해도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본능이 다시 그의 몸을 이끌었다. 라트반은 제 성기를 붙잡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하고 커진 그것이 부드러운 살점 안을 파고들었다.

“허억!”

그러자 그녀가 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 조르듯 그의 팔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그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하지만 라트반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뜨겁고 부드러운 것을 느껴 본 적이 있었나. 라트반은 머리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갈급함을 느꼈다. 더 원한다. 더. 더. 자신이 완전히 잠겨 버릴 정도로.

“아, 아, 아앗!”

조금씩 그의 몸이 성녀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혀를 섞을 때만 하더라도 이 이상의 희열은 느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매 순간, 그는 제 인생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혼자서가 아니다. 그녀가 이끌어 주는 경이로운 순간들이었다.

라트반은 왜 신전의 규율이 엄격하게 남녀의 관계를 다스리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시작하는 순간 멈출 수 없다. 맛보는 순간, 지금까지 그의 인생을 지배해 온 모든 규율과 규범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다스리지 못한 짐승의 본능만이 남는다.

“아, 라, 라트반… 처, 천천히… 제발….”

아무래도 제 본능은 무척이나 글러 먹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라트반은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흐, 흐앗!”

…이렇게 말을 듣지 않을 리가 없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라트반은 고개를 숙여 그녀가 흘리는 눈물을 핥았다. 지금부터 그는 그녀가 흘리는 그 어떤 것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 한 방울도, 신음 하나도, 숨결 한 조각도. 그녀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속해 있기를 바랐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 다 제 것이다.

날것의 소유욕이 그를 휘감았다. 거대한 것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 가는 것을 알면서도 라트반은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곧, 그는 끝에 도달했다.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라트반은 숨을 골랐다.

“하아….”

저를 감싸고 있는 따스함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분 좋았다. 평생 이대로 있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라트반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러자 그를 감싸고 있던 그녀의 안이 나가지 말라는 듯이 그의 것을 단단히 물었다.

“으읏….”

마수의 발톱에 찔렸을 때에도 나오지 않았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몸 전체가 뜨거운 용암 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섞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라트반은 제 것을 아슬아슬한 곳까지 빼내었다.

성기의 가장 굵은 부분이 입구에 걸리자 성녀는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라트반은 다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제 몸을 밀어 넣었다.

퍽!

다시금 거친 소리와 함께 젖은 피부가 철썩이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성녀의 입이 벌어졌다. 크게 뜬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라트반은 얼굴을 숙였다. 크게 벌어진 입을 그의 혀가 거침없이 범했다. 뿌리까지 뽑을 것 같은 격렬한 입맞춤이었다.

“흐, 읍, 으읍!”

그녀가 뱉어 내는 소리와 함께 라트반의 허리가 다시 움직였다. 깊게 찔러 들어가 끝을 짓누르듯 눌렀다. 터지는 신음을 삼키며 그녀의 몸이 제게 주는 미칠 것 같은 쾌락을 맛보다 다시 몸을 물렸다. 그러고는 반복해 한껏 열린 그녀의 몸 안으로 그는 다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더 깊숙이 닿고 싶었다. 이 몸이 저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미친 듯이 꿰어 올리듯 거칠게 밀어붙이던 움직임이 규칙을 갖기 시작했다. 동시에 성녀의 숨소리에도 빠르게 뜨거움이 담겼다. 이제 그녀의 안을 찔러 대는 것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된 것이다. 라트반은 그녀가 내뱉는 모든 것을 삼켰다. 방 안이 뜨거워진 체온과 숨으로 달아올랐다.

신을 따르고 성녀는 섬기는 길을 걸으리라 맹세했다.

그가 맹세한 것은 인간의 본능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절대적인 숭배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어떤 모습인가.

금기. 배덕. 타락.

평생 자신과 함께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단어들이 그를 짓눌렀다.

점점 두 사람의 소리가 커졌다. 처음에는 어긋나던 신음 소리가 이제는 한 몸이 내는 것처럼 겹쳐져 하나가 되었다. 서로를 원하며 함께하고 싶을 때에만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한계라고 생각했던 몸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이제 가장 큰 쾌락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아, 아, 아아아!”

성녀가 울부짖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그녀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라트반은 있는 힘껏 저를 그녀의 안에 묻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그의 욕망이 터졌다. 그것은 그가 그동안 품었던 만큼의 양을 끊임없이 토해 냈다. 안을 가득 채우고 결국은 넘쳐흐를 때까지.

굳게 맞물린 채 거품이 이는 몸을 바라보던 라트반은 고개를 들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축 늘어지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새로운 삶을 얻은 타락한 기사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제 품속의 존재를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껴안으며 생각했다.

저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십시오.

나의 성녀님.

밤이 계속되었다.

라트반은 기절한 듯이 잠들어 있는 성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몸 곳곳에 제가 남긴 자국들이 붉은 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언젠가 그녀의 목에 아슬란이 남겼던 자국을 본 순간 도대체 이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저렇듯 모두가 보는 곳에 제 흔적을 남겼었나, 하고 미친 듯이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 생각났다. 이제야 라트반은 아슬란이 이해되었다.

그 역시 그녀에게 무엇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되도록이면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라트반은 고개를 숙여 제가 만든 목덜미의 붉은 자국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아찔한 살 내음이 그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스치는 살이 간지러웠던 걸까. 잠들어 있던 성녀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라트반은 망설임 없이 그의 품 전부를 내주었다. 그러자 성녀의 얼굴은 다시 평안을 찾았다.

라트반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아직 젖어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지난밤, 몇 번이나 그녀를 안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까지 안고 또 안았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용서하지 말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성녀가 들으면 어이없다는 탄식을 내뱉을 것 같은 생각을 하며 라트반은 지난밤을 떠올렸다. 몇 번이고 그녀의 몸 안에 토정한 뒤,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위해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물론 그 순간에도 라트반은 쉬지 않았다. 몸의 모든 곳을 맛보겠다는 듯, 구석구석 그녀의 몸에 입을 맞추며 굳은 몸을 풀어 주고 있을 때 성녀가 물었었다.

“왜… 그동안 나를 피했어요?”

원망 가득한 목소리에 라트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다시 몸을 일으켜 그녀의 발목을 잡아당긴 다음 다리 사이로 제 몸을 묻었다. 그래서 성녀 역시 그에게 다시 물어보지 못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마도 눈을 뜨면 다시 물어볼 질문이었다. 라트반은 품 안에 있는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기억이 없다고 했다. 과연 그 기억들은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지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알릭과의 대화가 그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카를의 방에서 나오는 알릭을 본 순간 그가 카를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음을 확신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나오는 알릭의 얼굴에는 분노과 공포 그리고 후회가 섞여 있었다. 라트반은 곧바로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는 제 말에 알릭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서자 알릭은 털썩 주저앉더니 신을 찾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라트반은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알릭이 입을 열었다.

“성녀님과 카를 신관은 깊은 관계였습니다. 그래요, 세간에서 말하는 몸을 섞는 관계 말입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음에도 그것이 알릭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라트반은 그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오랜 시간 스스로를 자제하고 살았던 삶이었기에 그런 그의 생각은 잠시 이를 악무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다.

“…무슨 말입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제가 보았습니다, 아니 카를 신관이 보여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군요. 저는 그와 성녀님께서 몸을 섞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카를 신관은 일부러… 저를… 불러들였고… 그때마다 성녀님은 그의 아래에서 헐벗은 채 신음을 흘리고 계셨고… 가끔은 입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격해지는지 알릭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갔다. 신관에게 허락되지 못한 육체의 관계를 보았다는 민망함 때문인가 싶었지만 지금 알릭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명 분노였다.

“…처음에는 도망쳤습니다. 동시에 끔찍하고 혐오스러웠습니다.”

“…….”

라트반은 조용히 이어지는 알릭의 말을 들었다. 그는 마치 고해를 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감히 입에 올리는 것도 민망한 일이지만… 저는 성녀님을 사모했습니다. 네, 신의 길을 따르는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존경이 아닌. 세속의 정념이 섞인 그런 마음 말입니다. 저는 성녀님을 여자로 보았습니다. 감히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

라트반은 입술을 물었다. 자신도 알릭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죄인이었다.

“그리고 성녀님께서도 저를 마음에 두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냥 한 망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리도 완벽한 분이 제가 들어오면 몇 번이고 잘 모르겠다며 이것저것을 물으시고, 일이 끝나면 다과라도 들고 가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실수로 손이 스쳤을 때는 얼굴이 붉어진 채 손을 끌어안고는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네,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단 한 번, 돌아가려는 저를 붙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어지는 알릭의 말에 라트반은 입을 닥치라 말하고 싶었다. 같은 죄를 지은 죄인 중에서 마치 오직 알릭만이 면죄부를 받고 일어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녀가 그를 마음에 두었었다고? 미친 신관의 망상이 아니라?

하지만 슬프게도 알릭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광증 특유의 들뜬 언성과 눈빛 따위는 없었다. 그저 오래된 처참함만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 나올 뿐이었다.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래서 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겁니다. 그분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계시는지를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방을 나왔습니다. 그러다…카를 신관이 저를 불렀습니다. 오늘 밤에 성녀님의 서재에서 제 도움을 받을 일이 있다면서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스스로를 꾸짖었습니다. 아, 밤에 일이 많아서 남아 달라 하셨던 거구나. 그것을 나 혼자 들떠 너무 큰 착각을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밤에 서재로 찾아갔습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그리고 성녀님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좋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그곳에 갔을 때는… 성녀님께서… 카를 신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입으로….”

알릭은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라트반은 되었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한참이나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카를 신관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성녀님의 턱을 잡아 들더니 저를 보도록 그분의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성녀님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

“…저는 도망쳤습니다.”

알릭의 목소리에 울음소리가 섞였다.

“…제가 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하고 있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비참함이 저를 갉아먹었습니다. 세상에서 제가 제일 불쌍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를 이리 만드는 것들을 경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릭이 마지막 말을 토했다.

“그분이 울고 계셨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떠올렸습니다.”

그 후로도 알릭은 한참이나 말을 이었다. 그가 보았던 것들, 그리고 알아낸 것들. 그러면서도 왜 아무에게 말하지 못했는지까지.

라트반은 다시 잠든 성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어디까지 말 해야 할까. 기억이 없다면 차라리 카를과의 일을 영원히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민이 계속되었다.

한참 후, 라트반은 성녀의 뺨을 쓸었다. 일단 그 전에, 그와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조금은 축축한 듯한 천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아….”

눈을 뜨기도 전에 전신으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 소리부터 흘러나왔다. 뭐지? 왜 이러는 거지? 잠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한 감각들이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냈다.

잤다. 라트반과.

“……!”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자 흐릿한 시야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세상 더없이 귀한 것을 보는 듯한 애정과 사랑이 담긴 검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안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고 있던 눈이 더욱 부드럽게 휘었다.

“라트… 아!”

라트반을 부르며 손을 뻗으려던 나는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찌르르한 통증에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내 신음 소리에 라트반이 벌떡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덮은 이불을 걷어 내더니 내 몸을 살피려 했다.

“괘, 괜찮아요!”

나는 그가 치운 이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다시 느껴지는 통증에 손이 멈추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던 라트반이 알겠다는 듯, 내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흐응….”

아직도 들뜸이 가시지 않은 피부 위를 그의 손이 훑자 나도 모르게 새벽 내내 뱉어 내던 교성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계십시오.”

“하지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그의 손길을 받고 있다는 이 사실이. 내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라트반의 손이 내가 통증을 느낀 부분을 정확히 누르자 나는 신음을 삼키며 몸을 비틀었다. 그래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허리 이곳저곳을 꾹꾹 누르던 그의 손이 곧 피부 위를 부드럽게 매만진 순간, 나는 조금 전보다 훨씬 통증이 줄어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갑자기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근육들이 놀랐을 겁니다. 아무래도 어제 제가….”

거기까지 말한 라트반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붉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가 생각하지도 못한 자세로 나를 안았음이 기억나는 모양이었다. 부끄러운지 잠시 눈을 피하던 그가 헛기침을 내었다. 조금 전까지의 따뜻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좀 더 깊게 주무시라 말씀드리고 싶지만.”

라트반의 얼굴에 서늘한 긴장감이 서렸다.

“우리는 대신전을 벗어나야 합니다.”

***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얼굴을 가리는 후드를 잡아 눌렀다. 다행히 라트반의 저택에는 예전에 내가 돌려주었던 그의 신관복이 남아 있었다. 신관복을 입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라트반 역시 큰 신관복을 입은 채, 고개를 숙이며 걸었다. 그렇다 해도 워낙 큰 키와 덩치 때문에 눈에 띄었지만.

새벽에 일어난 덕분에 내 처소로 돌아오는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길을 재빨리 걸으며 나는 내 손을 붙잡은 라트반의 손을 보았다.

‘빨리 치료해야 해.’

상처는 아물었지만 검게 변한 피부는 그대로였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넓게 퍼진 것 같기도 하다.

‘개자식.’

나는 카를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시델이 내뱉은 말로 어떻게 된 일인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하 감옥으로 간 카를이 시델에게 술수를 부린 것이다. 분명 그를 따로 가둬 두라 일렀지만 카를이 간수들을 구워삶았음이 분명했다.

‘내 실수야.’

성력이 사라진 것에 정신이 없는 나머지 카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내가 조금만 더 정신을 제대로 차렸다면 라트반이 이런 식으로 다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독을 중화시키는 데는 꽤 많은 성력을 필요로 한다. 내가 라트반에게 단검에 묻어 있던 독이 심각한 것이냐 물었을 때, 그는 아주 잠시 머뭇거리다 괜찮다고 대답했다. 분명 괜찮지 않을 것이다.

‘나를 죽이려 했던 독이 가벼운 것일 리 없어.’

나를 향했던 시델의 증오가 얼마나 깊은지 나는 똑똑히 보았다. 아마도 나에 대한 증오만큼이나 강했던 독이었을 것이다.

라트반과 내가 비밀 통로를 이용하기 위하여 후원 가까이에 다가간 순간이었다.

“성녀님, 라트반 경.”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

몸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심장이 떨어진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잘 숨어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누군가에게 들킬 줄이야. 게다가 하필이면 남이 보면 벽이나 다름없는 비밀 통로의 앞이다. 분명히 여기서 뭘 하고자 했는지 알아내려 할 것이다.

‘다른 통로들까지 들킬 순 없어.’

나보다 먼저 라트반이 몸을 돌렸다. 나는 그가 곧바로 신관을 제압해 기절시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라트반은 조용히 우리를 멈춰 세운 신관의 이름을 불렀다.

“알릭 신관.”

“아….”

들려온 이름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알릭 신관인 건가. 나는 조심스레 몸을 돌려 그를 살펴보았다.

조금 마른 몸에 큰 편인 키. 스쳐 지나간다 하더라도 잘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평범한 얼굴.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평신관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죽음의 집에서 시델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라트반 경. 피가 묻은 단검도. 당신이 하신 일이겠지요. 지금부터 도망치실 생각입니까?”

“…….”

그 말에 라트반이 내 앞을 막아섰다. 나 역시 긴장을 한 채, 라트반의 뒤에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알릭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나와 알릭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무엇인가 찾으려 하는 듯했다.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리게 했던, 이벨리나에게 특별했던 사람. 그가 나를 보며 찾으려 하는 것은 이벨리나와 함께 했던 기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그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구며 라트반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다친 곳을 보여 주십시오.”

“…….”

“검에 독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약하지만 제 성력으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알릭이 라트반에게 무언가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그럴 의도였다면 차라리 지금 밖으로 달려가 큰 목소리로 이곳에 가짜 성녀와 배신자가 있다고 소리치는 것이 나았으리라.

라트반도 그것을 알았는지 알릭에게 손을 맡겼다. 어차피 성력은 누군가를 해하려 사용할 수도 없기에 알릭이 성력을 이용해 부정한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푸른 성력이 라트반의 손을 감쌌다. 나는 조금 몸을 내밀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이 이 세계를 위하는 마음으로 내려 주었다는 힘. 그렇다면 차라리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강한 힘은 그저 한 명의 인간에 불과했던 소녀에게 주어졌다.

나는 이제 저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이벨리나가 아무런 힘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 대신전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벨리나가 카를을 만나는 일도 없었겠지.

너무나 어릴 적에 대신전으로 온 이벨리나였기에 그녀가 대신전으로 오기 전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벨리나의 기억보다 대신전의 기록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었었다.

이벨리나는 아주 작은 산골 마을에서 부모, 그리고 여동생 한 명과 함께 평범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이벨리나가 마수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신전에 가서 축복을 받으려는 순간, 세상 가득히 푸른 성력이 퍼져 나갔다. 그렇게 이벨리나는 성녀임을 증명하고 곧바로 대신전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좀 더 비밀스러운 기록에는 그녀를 대신전에 보내는 대가로 부모는 많은 돈을 받았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어딘가로 떠나 버렸다고 적혀 있었다.

만약 이벨리나가 대신전에 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평범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 않았을까.

마을의 친구들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서로 속삭이며, 장이 서는 날에는 가족들의 손을 잡고 예쁜 물건들을 보며 갖고 싶다고 조르는 그저 평범한 삶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저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청년을 만나 연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됐습니다.”

내가 잠시 헛된 생각을 하는 사이 라트반의 손 위에 머물렀던 성력이 사라졌다. 라트반의 손을 보자 확실히 나오기 전에 보았을 때보다 독이 퍼진 검은 부분이 조금 줄어들었으며 상처 역시 좀 더 아문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금일 뿐이다. 상처와 독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은 더…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성력을 다 쏟아부은 것일까. 알릭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이마에서는 비 오듯 땀이 흐르고 있었다.

“어서…어서 도망가십시오. 시델의 시체는 곧 발각될 겁니다. 그러니….”

“…고맙습니다.”

라트반은 짧게 고개를 숙인 다음 비밀 통로의 입구가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나 역시 라트반의 뒤를 따라가려 하는 순간 알릭이 내 옷을 붙잡았다.

“……!”

놀라 돌아보자 다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알릭은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그가 나에게서 무엇을 찾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벨리나와 함께 했던 추억을 찾으려는 것이다.

“성녀님, 저는….”

그 순간 나는 이상함을 깨달았다. 갑자기 현기증과 함께 마치 공중으로 내던져진 것처럼 의식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치 영화관에 앉아 있는 것처럼 모든 광경이 어둠 속에서 멀리 보였다.

‘……!’

나는 내가 몸의 통제권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벨리나!

놀라 소리를 질렀건만 내 목소리는 그저 어두운 의식 속 공간을 맴돌다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오래전 이벨리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제 기억을 스스로 박살 낸 후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벨리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몸을 빼앗아서.

‘…빼앗아?’

스스로의 생각에 흠칫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벨리나는 빼앗은 것이 아니다. 되찾은 것이지. 이 몸의 원래 주인은 그녀가 아니던가.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이벨리나가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내 앞에 보였다.

알릭은 여전히 이벨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벨리나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대화는 없지만 얽히는 두 사람의 시선에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과거에서 두 사람이 그저 단순한 성녀와 신관의 관계가 아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이벨리나가 입을 열었다.

“놓으세요.”

차가운 목소리였다.

“성녀님.”

알릭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벨리나를 불렀다.

“죄송합니다. 저는… 저는… 무서워서… 제가 당신을… 외면하고….”

그 말에 이벨리나는 눈을 감았다. 내 시야 역시 어둠으로 가득 찼다.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이벨리나는 지금 울고 있었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던 이벨리나가 입을 열었다.

“알릭 신관.”

이벨리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마치 알릭을 바라보기 힘들다는 듯이.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당장 대신전을 떠나도록 하세요. 되도록 빨리.”

그러자 알릭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공중을 떠돌고 있는 것 같았던 느낌이 사라지고 나는 다시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벨리나가 나에게 몸을 돌려준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제 몸을 다시 나에게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벨리나!’

마음속으로 그녀를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손을 움직여 보았다. 조금 전 몸의 통제권을 잃었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모든 감각은 멀쩡했다. 나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는 알릭을 바라보았다. 이벨리나가 왜 알릭에게 대신전을 떠나라고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 같은 자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몸을 돌려 라트반에게 말했다.

“우리는 어서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우리는 어서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성녀의 말에 알릭은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칼에 깊숙이 찔리는 기분이었다. 저 ‘우리’는 그녀와 라트반을 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그녀가 말하는 우리에는 라트반이 아닌 그가 있었다.

“알릭, 우리 대신전 밖으로 나가 볼래요?”

어쩌다 둘만 남아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했던 날, 성녀는 뜬금없이 그에게 물어 왔다. 그 말에 알릭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었다.

낮에 카를이 있는 동안에는 어지간해서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 성녀였다. 가끔 말을 건다 하더라도 업무에 대한 아주 짧은 질문이 전부였다. 다만 가끔 시선이 마주치거나, 동시에 서로를 부른다거나 했을 때, 성녀는 조금 수줍은 듯한 미소를 보여 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부른 것도 모자라 대신전 밖으로 나가 보자니. 게다가 ‘우리’라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람들에게 듣는 별 의미 없는 단어가 이 순간에는 그토록 황홀할 수가 없었다. 그 우리라는 말에는 그와 성녀만이 존재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성녀를 향해 다가가려던 알릭의 머릿속에 언젠가 카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성녀님은 모두에게 다정하시지. 그러니 그분의 다정함을 착각하지 말게나.”

돌려 말했지만 카를이 무엇을 경고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카를의 말을 떠올린 알릭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성녀에게 대답했다.

“…대신전 밖이라니요. 성녀님께서 가실 만한 곳이 아닙니다. 게다가 어찌 저와 성녀님만이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적어도 신전 기사단을 불러 호위를 세우심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 카를 신관님께 먼저 말씀은 드려야….”

그의 대답에 성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에 알릭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어쩐지 지금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카를 신관에게 허락을 받아야겠지요….”

중얼거리는 성녀의 말에 알릭은 그저 이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카를 신관님을 말씀하시니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은 이곳으로 좀 늦게 올 거라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긴히 논의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

그의 말에 성녀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알릭. 오늘은 수고했어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해요.”

성녀는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더 이상 이곳에 올 필요 없어요.”

하지만 밤늦은 시각, 그는 카를이 부른다는 말에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를과 성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알릭은 뒤늦게 성녀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 대신전 밖으로 나가 볼래요?’라고 물은 그날 그가 그러자는 대답을 했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었을까.

적어도 그날 밤, 성녀는 울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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