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48)

내가 어디에 있건, 어느 순간이든 곧바로 달려오겠다는 것을 돌려 말한 그의 말에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져 시선을 돌리고 말았었다.

‘거짓말.’

이제 두 번째 공격을 해 올 것이다. 하지만 라트반은 오지 않는다. 시델의 단검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것이 나를 향하는 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라트반!”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창고의 문이 열렸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미친 듯이 숨을 몰아쉬는 라트반이 보였다. 죽기 전에 보는 환상이라 해도 시델의 단검을 보다 죽느니 차라리 라트반의 환상을 보다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다음 순간 라트반이 나를 향해 그대로 몸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가 나를 감싼다고 생각한 순간 푹!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도, 라트반도, 시델도.

“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툭! 소리와 함께 미지근한 것이 내 얼굴로 떨어졌다. 내 얼굴의 바로 앞에 단검을 그대로 붙잡은 피투성이의 손이 보였다.

라트반의 손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피가 흐르는 손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그는 피가 흐르는 손에 힘을 주더니 단검을 붙잡은 채로 그것을 내 옆으로 밀어냈다. 이런 것을 내 곁에 가까이 두지 않겠다는 듯이. 그런 그의 손을 타고 붉은 피가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 것 하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라트반이 왔다는 것도. 그가 나를 공격하려던 시델을 막았다는 것도. 그리고 지금 그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그가 어떻게, 아니 왜 이곳에 온 거지?

“단장님!”

시델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멈춘 것 같았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재빨리 몸을 굴려 그에게서 멀어졌다. 동시에 라트반은 그대로 발을 날렸다. 큰 소리와 함께 시델의 몸이 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라트반!”

내가 그에게로 다가가려 하자 라트반은 손을 들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그사이 구석에 박혔던 시델이 몸을 일으켰다. 어딘가 이상했다. 시델의 몸은 비쩍 말라 근육이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저런 몸이 얼마나 약한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좀 전의 공격처럼 큰 충격이 가해지면 다시 일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숨조차도 제대로 쉴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시델은 그런 고통은 조금도 느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

‘어떻게?’

그를 살피던 내 눈이 커졌다. 시델의 왼쪽 팔이 부러져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시델은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희번덕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더니 다시 라트반을 보았다.

“단장님, 저 계집에게 속고 계시는 겁니다. 저건 가짜 성녀예요.”

그 말에 나는 숨을 죽였다. 시델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어서 저것을 죽이고 카를 신관님께 가십시오. 그분과 함께 진짜 성녀님을 맞이하러….”

시델이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오자 라트반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를 향해 말했다.

“눈을 감으십시오.”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눈꺼풀 위로 떨어졌던 그의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단장님, 어서 저년의 목을 베고….”

“내가 섬겨야 할 분을 해하려 한 죄.”

그 어느 때보다도 낮고 거친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으로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라트반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왔다. 날카로운 것이 가죽을 찢고 근육을 끊으며 뼈를 부수는 소리가 창고에 울렸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비명을 내지를 겨를도 없이 시델의 숨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시델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 이후에도 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걸까.

저벅저벅. 라트반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앞이 검게 변했다 생각한 순간, 한 손이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곧 내 몸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에 닿았다. 거친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쏟아지고 맞닿은 얼굴 너머로는 시끄러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라트반의 옷을 잡아당기며 더욱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심장 소리에 이 모든 것이 천천히 실감 나기 시작했다.

“…다행입니다.”

“…….”

“조금이라도 늦었다면…당신은….”

나를 품에 안은 라트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끌어안은 팔도, 그의 몸도. 마치 끔찍한 공포를 겪은 사람처럼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이 몇 번이고 나를 확인하듯 쓰다듬었다. 한참 후에야 라트반은 숨을 골랐다.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나는 괘,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내 대답에 그는 정말로 안심이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땀에 젖은 그의 몸이 느껴졌다. 도대체 얼마나 급하게 이곳으로 달려온 것일까.

그러다 다시 밀려오는 피 냄새에 그가 다쳤다는 것이 기억났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라트반… 손이… 상처가….”

뼈가 보일 정도로 예리하고 깊게 베인 상처다. 상처는 그가 단검을 손으로 밀어낸 탓에 더욱 깊어져 있었다. 게다가 베인 것뿐만이 아니다. 상처의 가장자리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색이 변하고 있었다.

“왜 상처가….”

“독이 발라져 있었군요.”

라트반은 제 손을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 신관들을 불러올게요!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내가 문을 향해 달리려는 순간 라트반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 탓에 나는 다시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안 됩니다.”

“하, 하지만… 독이….”

다친 사람은 라트반이건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였다. 라트반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내 등을 토닥이며 내 귓가에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시고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지금 제 손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용한 목소리에 내 거친 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저를….”

거기까지 말한 라트반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우리’를 위해서.”

***

시원하게 물이 떨어지는 분수대의 끝에 앉은 나는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 내었다. 물이 찰박이는 소리를 낼 때마다 핏물이 사방으로 엷게 퍼지다 곧 사라졌다. 손톱 끝까지 꼼꼼하게 씻어 낸 다음 근처에 있는 성수가 담긴 수반에 혹시나 남아 있는 핏자국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다음에는 엉망으로 구겨진 옷을 폈다. 물론 노력해도 한번 구깃구깃해진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사이 하늘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문밖에서 얼른 이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기사단과 신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야 했다.

입구로 걸음을 옮기기 전 나는 고개를 돌려 창고를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창고의 문을 보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문을 열자 당장이라도 들어오려고 한 듯, 계단을 올라오고 있던 부기사단장이 외쳤다.

“성녀님!”

그를 뒤따라오던 신관들 역시 다행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계속 나오지 않으시길래 들어가 보려 하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시델이 죽었다.

“곧 떠날 자들 모두와 기도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졌군요. 걱정을 끼쳐 미안합니다.”

나를 지키려던 라트반은 크게 다쳤다.

“성녀님, 옷이….”

앞에 서 있던 신관 하나가 흙먼지가 묻고 구겨진 내 예복을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 신관을 향해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느라 조금 단정치 못하게 되었군요.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태연히 말하는 내 모습에 신관들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들어가려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멈추라는 듯이 손을 들었다.

“이 안에 있는 환자들은 모두 금식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나요?”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자들은 대부분 음식을 먹지 못한다. 억지로 먹이는 것도 힘들며 가끔은 그것을 제대로 삼키지 못해 더 큰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대신전에서는 죽기 바로 직전인 자들은 금식을 시켰다.

“그렇습니다.”

“그럼 아침까지 저들에게 평안을 주세요. 조금 전까지 저들과 함께 긴 기도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밤에는 이곳에 있는 자들 모두 먼 길을 떠나기 전 아주 긴 고해의 기도를 올릴 것입니다. 내일 아침, 저들의 육신을 거두도록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성호를 그었다. 경건한 손짓에 신관 몇몇도 나를 따라 성호를 그었다. 결론적으로 내일 아침까지 이곳에 아무도 들어가지 말라는 말에 죽음의 집을 관리하는 신관은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곧 그 역시 나를 따라 성호를 그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말을 끝낸 나는 마치 양을 모는 것처럼 기사단과 신관들을 모두 이끌고 죽음의 집에서 멀어졌다.

***

밤이 깊어지자 나는 문에 귀를 대었다. 내 방 앞을 지키는 신관들이 잠시 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기러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들이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 나는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이 순간이 아니면 분명 나를 한 번 놓쳤던 그녀들이 필사적으로 내게 따라붙을 것이 뻔하다.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후드를 눌러쓰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라트반이 알려 준, 인적이 뜸하고 순찰하는 기사들이 거의 오지 않는 길로 걸었다. 한참을 걸어 기사단의 숙소로 들어온 나는 익숙한 집을 찾았다. 라트반의 집이었다.

끼익.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라트반.”

불이 완전히 꺼진 조용한 집 안을 향해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트반? 돌아왔나요?”

하지만 집 안은 그저 고요할 뿐,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라트반!”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붉은 피. 깊고 독이 퍼지던 상처. 하얗게 질려 가면서도 침착하게 나를 진정시키던 그의 모습이.

“밖으로 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십시오. 그리고 최대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해 주십시오. 제가 이곳을 정리하겠습니다.”

‘설마….’

상처의 독이 심해진 것일까? 그래서 죽음의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까?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쓰러져 있던 시델의 시체. 혹시 라트반이 그 옆에 함께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설마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나를 내보낸 것일까.

“안 돼….”

그렇다면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안쪽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들렸다.

“……!”

재빨리 소리가 난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라트반이 바닥에 앉아 침대의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그의 손이 보였다. 비릿한 피의 냄새가 코로 훅 밀려왔다.

“라트반!”

구르듯 그에게 다가가 라트반의 몸을 붙들었다. 하얗게 질려 차가워진 몸이 느껴졌다. 설마 그가 죽은 것인가? 목이 메어 오는 순간 그의 입에서 다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아 있어!’

그것을 깨달은 나는 필사적으로 라트반을 끌어안았다. 어쩐지 조금 전보다 그의 몸이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양손으로 그의 몸 여기저기를 문지르며 깨달았다. 이대로 몸이 식으면 라트반은 죽는다. 어떻게든 그의 체온을 올리고 정신이 들도록 해야 했다. 게다가 치료를 위해서라도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깨끗이 닦아 내야 했다.

“라트반, 금방 돌아올게요. 제발, 제발 죽지 말아요.”

그를 끌어안고 중얼거리자 라트반은 마치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긴 신음을 뱉었다. 힘겹게 그를 떼어 놓으며 나는 욕실로 달려갔다.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집이었기에 욕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익숙한 문을 열자 그곳에는 예전과 똑같은 욕실이 보였다. 모든 물건이 처음부터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욕실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욕조에 물을 틀어 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라트반!”

그사이 조금이라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라트반은 쓰러진 그대로였다. 나는 그의 팔을 어깨에 둘러 그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일으키기는커녕 내가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라트반! 대답 좀 해 봐요! 라트반!”

정말 살아 있는 것이 맞을까, 조금 전에 들었던 그의 신음은 헛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게 와 닿는 그의 피부가 차가웠다. 몇 번을 일어나려다가 주저앉은 나는 어깨에 둘렀던 그의 팔을 내린 다음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라트반의 몸이 조금 끌려왔다. 나는 그를 붙잡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읏…!”

하지만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축 늘어진 그의 몸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라트반의 몸이 큰 것은 알고 있다. 함께 서 있으면 목을 꺾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큰 키에 대륙 최고의 기사라는 말을 몸으로 보여 주는 듯한 넓은 어깨. 언젠가 만져 보았던 옷 아래의 그의 몸은 단단한 근육으로 꽉 잡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 해도 너무나 무거웠다. 모든 힘을 다해도 겨우 반걸음 정도밖에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고 있으면 바위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무리 정신을 잃은 사람이라 한들 이렇게까지 무거울 수 있을까.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하얗게 질린 라트반의 얼굴을 보고 번뜩 정신이 들었다.

“…라트반을 놓아줘.”

이것은 라트반의 무게가 아니다. 그를 붙들고 있는 죽음의 무게이다.

나는 한 번 죽었었다. 그렇기에 라트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지를 알고 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아무것도 없는 암흑.

“…안 돼.”

시델의 검은 나를 향했었다. 그러니 이 죽음의 무게는 라트반이 아닌 내가 짊어져야 한다.

한참 후, 나는 겨우 욕실의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라트반을 붙잡은 채 등으로 문을 밀자 훅 더운 수증기가 몰려왔다. 안을 바라보니 이미 물은 욕조를 넘쳐 나무 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조금만 더…!’

죽을힘을 다해 끌어당겨 겨우 욕조 가까이에 라트반을 끌어올 수 있었다.

“허억… 허억….”

그를 잡았던 손을 놓자 저릿한 통증이 손바닥과 손가락 전체에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욕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조금은 뜨겁지 않을까 싶은 물이 덜덜 떨리는 손을 감쌌다. 나는 욕조 안의 물을 가득 손으로 떠 올린 다음 그것을 그대로 라트반의 위에 뿌렸다.

“라트반, 라트반….”

조금 움찔거리나 싶었지만 라트반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자 바닥으로 흘러내린 물이 그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이내 그를 적시는 물과 함께 피도 그의 옷 위로 번져 나갔다.

나는 다시 욕조의 물을 떠, 피투성이인 그의 손 위에 뿌렸다. 말라붙었던 피가 씻겨 나가면서 단검을 잡았던 상처가 드러났다.

“으….”

상처에 닿은 물 때문에 조금 정신이 들은 것일까. 욕조에 기대어 있는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라트반, 제발….”

혹시나 싶어 다시 물을 뿌리고 그의 상처를 씻어 내 보았지만 이제는 미약한 신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곧 죽음이 그를 데려갈 것이다. 점점 더 차가워지는 듯한 그의 몸이 어떻게든 체온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나는 라트반을 끌어안았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소리가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라트반, 죽으면 안 돼요.”

살아남기 위해서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누군가를 희생해서라도 기어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 라트반은 들어가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차가웠던 나의 기사. 그러면서도 끝까지 내 옆에 있었던 사람.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변화했던 사람. 내가 정해진 운명의 흐름을 거슬러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썩은 오물을 뒤집어쓰던 날, 그것들로부터 나를 감싸준 그의 행동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지막 힘을 내었다. 욕조에 기댄 그의 몸을 밀어 올리는 탓에 옷이 뜯어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미 내 숨도 거칠어져 있다. 지금 주저앉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마지막 기회에 라트반의 체온을 되돌려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욕조의 가장자리 위로 라트반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거의 일어선 것처럼 그의 몸이 들린 순간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대로 욕조 안으로 몸을 내던졌다.

풍덩!

큰 소리와 함께 욕조의 물이 크게 파도치며 욕실의 바닥으로 쏟아졌다. 나는 내 위를 덮은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거센 힘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쿨럭! 쿨럭!”

순식간에 물 위로 머리가 올라왔다. 나는 참았던 숨을 기침과 함께 토해 냈다.

누가 나를 잡아당긴 것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을 다 토해 낸 다음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젖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트반이 있었다.

“라트반!”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그대로 그를 끌어안고 말았다. 이럴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목이 메어 눈물이 흘렀다.

“사, 살아… 있었…. 다, 당신이… 죽은… 줄… 알았….”

“…당신께서 저를 필요로 하시는 한 죽지 않습니다.”

라트반의 손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달래려 한 행동이겠지만 덕분에 확실하게 느껴지는 그의 심장 소리에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더욱 강하게 라트반을 끌어안고 울었다. 라트반은 그런 나를 그저 토닥거릴 뿐이었다.

맞닿은 그의 서늘했던 몸이 이제 다시 원래의 따뜻함을 되찾자 몰려드는 안도감과 함께 다른 것들이 생각났다.

“…어떻게 되었던 거죠? 상처는? 괜찮나요? 당장 치료를 해야 하는데!”

정신없이 말을 쏟아 내며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가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속에서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손이 더욱 단단히 나를 끌어안았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 주십시오.”

“…….”

그의 말에 나는 몸에 힘을 빼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라트반이 살아 있다. 그것으로 나는 이제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는 적당히 아물었고 독도 잠시 눌러 둔 상태입니다.”

“어떻게….”

“저 역시 신관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상급 신관만큼은 아니더라도 상처를 아물게 하는 정도는 가능합니다.”

“아….”

라트반의 말대로였다. 신전 기사단의 기사들은 성력이 있는 자들 중에 선출된다. 그렇기에 큰 상처라면 모르지만 작은 상처들은 스스로 회복할 수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라트반의 다친 손을 끌어왔다.

“상처가….”

적당히 아물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었다. 라트반의 왼손 가운데에는 붉은 물감으로 그린 것 같은 긴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선의 주변으로는 거뭇하게 변한 피부가 보였다.

‘독을 눌러 놓았다고 했지.’

그 말은 라트반이 제 성력으로 상처를 잠시 아물게만 했을 뿐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는 소리였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그는 진심으로 스스로가 부끄럽고 민망하다는 듯, 조금의 짜증을 섞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죽음의 집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한 탓에 예상보다 피를 좀 더 흘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크게 문제는 없었….”

“…거짓말.”

나는 라트반의 말을 잘랐다.

“…….”

“거짓말하지 말아요. 당신은 분명….”

차마 그다음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죽어 가고 있었다고 말하면, 죽음이라는 단어를 다시 입에 올리면 지금 그와 눈을 맞추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이 모든 순간이 환상이었다는 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나는 라트반의 손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직 다 씻기지 않은 피가 묻어 있는 그의 손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자 라트반의 입에서 신음을 삼키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성력으로 아물게 했다 하더라도 이 상처와 독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나를 향해 다가오던 검의 날카로운 날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잡아 내던 라트반의 모습도.

“…왜 그랬어요.”

“검을 뽑기에는 시간이 아슬아슬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 나를 지켰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

라트반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침묵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라트반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질문입니까? 아니면 확인입니까?”

“…….”

이번에는 내가 대답하지 못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는 욕실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한 번만 더 비겁해지기로 했다.

“…당신도 보았듯이 나는 이제 성력이 없어요.”

아직도 내 입으로 스스로를 가짜 성녀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애써 외면해 왔던 진실이 실재가 되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 가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섬길 필요가 없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성녀가 아니다. 그 말을 하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자 나를 바라보던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옆에 있어야겠군요.”

라트반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젖은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어디 조금이라도 상처가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라트반의 얼굴이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고 그의 이마가 내 이마에 닿았다. 그것이 그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라는 듯이.

“당신께서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하셨을 때부터….”

무척이나 비밀스러운 것을 말하듯 속삭이는 라트반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제가 섬기는 분은 오직 당신입니다, 리나.”

그의 말에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지금 라트반이 무엇을 부정했는지 나는 알고 있다.

신의 가르침 아래 오직 성녀만을 따르도록 살아온 그가, 지금껏 살아온 모든 시간과 신념으로부터 돌아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품에 끌어안았던 그의 상처 입은 손에 입을 맞췄다. 그 가벼운 접촉에 라트반은 불에 닿은 사람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 마십시오. 아직 독이….”

내가 붙잡고 있는 그의 팔이 잔뜩 힘이 들어가 딱딱해진 것이 느껴졌다. 내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그의 팔을 붙들며 나는 입술을 움직였다. 팔을 타고 올라가는 입술의 끝에 그의 몸 여기저기에 남은 자잘한 상처들이 느껴졌다. 이것은 그가 쌓아 올린 시간이었다.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그의 믿음은 굳건해지며 그의 명성은 올라갔을 것이다.

이제 내 입술은 그의 어깨를 더듬었다.

“제발… 그만… 읏….”

검을 손으로 잡아 냈을 때도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그가, 손가락 하나로도 나를 충분히 밀어낼 수 있을 텐데도 몸을 떨며 신음을 참고 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크게 몰아쉬는 숨소리.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몸. 그런 그를 무시한 채, 나는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목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혀를 내밀어 핥은 순간, 그가 거친 목소리를 내었다.

“그만하십시오. 더 이상은….”

“라트반. 나의 기사.”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요.”

툭. 천장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욕조의 물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욕실에 크게 울렸다. 그의 목울대가 한차례 울렁였다. 그것은 곤란하다는 말을 하며 나를 밀어낼까. 그때였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다음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친 물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동시에 잇새로 그의 혀가 내 입을 침범했다.

내가 라트반을 현혹시켜 타락으로 이끌었다 소리치던 시델이 생각났다. 입 안 가득히 범하듯 밀려오는 그를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흣…! 으읍!”

라트반은 작은 입으로 저를 힘겹게 받아들이는 성녀의 신음 소리에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평소라면 이런 소리가 들리는 순간 몸을 떼었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소리는 둘 사이에서 나면 안 됐다.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모를 물에 젖은 소리가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 안에 울렸다.

그녀에게 닿을 때마다 미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그녀에게 닿아 있는 지금, 라트반은 제가 미쳤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그녀의 모든 것이 천상의 것처럼 황홀할 리가 없다.

그녀와 닿아 있는 몸 곳곳에서 시작되어 제 안을 완전히 재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맹렬한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라트반은 그것이 낯설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수도 없이 제 안에서 그의 몸을 잠식할 틈을 노리던 불길이었다. 라트반은 그 불길을 거부하지 않고 제 몸을 맡겼다. 드디어 그것은 제가 타오를 때를 맞이한 것이다.

라트반은 조심스럽게 성녀의 몸을 끌어 욕조와 제 몸 사이에 그녀를 가두었다.

“라, 라트반….”

아주 잠시 생긴 틈을 타 그녀가 그의 이름을 힘겹게 불렀다. 그 부름에 라트반은 짙은 웃음을 지었다.

“계속 불러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다음 그는 다시 얼굴을 숙여 성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의 귓가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타고 제 이름이 불렸다. 작은 소리였음에도 그는 마치 사슬에 묶인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한 채, 이미 사라진 소리의 흔적을 더듬었다.

그녀가 불러 주는 제 이름이 이렇게 황홀할 줄이야.

라트반은 제 인생의 가장 성스럽고 황홀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대신전에 들어와 신관의 교육을 마치고 기사단의 입단 시험을 통과하고 기사 서품을 받던 그때, 그는 제 인생에 이 이상의 순간은 없을 거라 확신했었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라트반은 지난 모든 제 찬란한 기억이 빛바랜 종이처럼 부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오래된 환희의 순간은 그렇게 사라졌다. 성대한 서품식도, 사람들의 환호성도, 날리는 꽃잎도 없었지만 신도 주지 못했던 강렬한 기억들이 새로이 오래된 기억 위에 새겨졌다.

모든 순간을 눈과 귀에 담아 머릿속에 새기며 라트반은 성녀를 바라보았다.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제 마음을 모르기 바랐다. 제가 그동안 품었던 그 모든 불경함을 아는 순간, 그녀는 도망치려 할 것이다. 그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깃털조차 함부로 닿을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존재임과 동시에 그의 짐승과 다름없는 저열한 욕망에 함께 헐떡이는 존재였다.

“라트… 읍!”

라트반은 제 욕망을 가득 담은 혀로 말캉하고 예민한 그녀의 점막을 더욱 깊숙이 휘저었다. 그녀의 안을 저로 가득 채우겠다는 본능이 무엇 하나 제대로 모르는 라트반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어미를 찾아 울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그의 몸은 본능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였다.

부드러운 혀가 난폭한 움직임을 할 때마다 그와 이어진 그녀의 몸이 움찔거리며 신음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거기에 고통은 없었다.

어깨를 끌어안았던 라트반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조금은 마른 듯한 등의 움푹 팬 선을 따라 천천히 눌러 쓸어내리자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간지러운 듯, 그의 손을 피하기 위하여 활처럼 휘어지는 등허리 때문에 그녀의 헐벗은 가슴이 그의 가슴팍에 더욱 깊게 닿았다.

“아, 읏….”

나긋하게 뭉그러지는 부푼 가슴에 라트반의 입술 사이로도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참이나 맛을 보고서도 아직도 모자라는 듯, 그녀의 입술 주변을 지분거리던 라트반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희고 가느다란 목에 도장이라도 찍듯이 느릿하게 눌러 오던 입술은 쇄골을 지날 때부터 조금씩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곧, 그의 입술이 풍만한 가슴 위쪽에 멈췄다. 부풀어 오른 가슴 위를 맴돌던 그가 고개를 들자 성녀는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짐승보다 예민한 그의 감각이 그 한숨에 나른함과 안도감이 섞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트반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언제나 그의 상상 속에서만 보았던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전의 그라면 얼굴을 붉히며 곧바로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라트반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것을 감싸듯 쥐었다. 크림을 쥔다 한들 이보다 더 부드러울 수 있을까. 그것은 라트반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촉감이었다. 그 생경한 감촉에 라트반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읏….”

그러자 풀린 눈으로 욕조에 기대어 있던 성녀의 입에서 다시 소리가 흘러나왔다. 뜨거운 물 속에 느른히 누워 있던 그녀의 몸에도 힘이 들어갔다.

라트반은 황급히 제 손에서 힘을 빼었다. 그러자 성녀의 얼굴에 나른함이 퍼져 나갔다. 제 행동에 기분 나빠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라트반은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감싸 쥐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자신의 이 행동이 그녀를 기쁘게 만들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뿐이었다.

새하얀 가슴을 굵고 긴 손가락이 강하게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굳은살이 가득한 거친 손이 비단보다 부드러운 살덩이를 쓸어 만졌다. 그러는 사이 라트반은 제 손바닥 아래에서 가슴의 정점이 딱딱하게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곧 손가락 사이로 음란하게 빠져나온 분홍색의 짙은 살점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라트반은 처음으로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그것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손을 움직였다.

“아!”

그의 손가락이 붉게 물든 살점을 붙잡은 순간 성녀의 입에서 삼키지 못한 교성이 흘러나오며 그의 배와 허벅지에 붙어 있던 그녀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동시에 라트반의 몸도 크게 떨렸다. 제 아래가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옷 아래에서 일어서고 있는 그의 남성이 아플 정도로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읏….”

물에 젖어 달라붙은 천 아래에서 부풀어 오른 성기가 그 흉흉한 크기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기의 팔뚝만큼이나 굵은 것 위로 튀어나온 핏줄이 젖은 천 너머로도 선명하게 보였다.

가릴 수도 없을 만큼 커진 그것은 그녀의 다리 사이와 배 위를 천천히 압박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이라도 한 듯 성녀의 몸이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라, 라트반…?”

당황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라트반은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라트반은 두 손을 내려 움찔거리는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아 눌렀다. 그러자 성녀의 몸이 더욱 그와 가까워졌다. 여전히 욕조와 제 몸 사이에 그녀를 가둔 채, 라트반은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뜨거운 물 속에서 젖은 천이 비벼지기 시작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뜨거운 기둥이 성녀의 피부에 닿았다.

“흐, 흐읏!”

그 거대한 양감에 그녀는 놀란 얼굴로 몸을 버둥거렸지만 헛수고였다. 그녀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라트반이 더욱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제 쪽으로 붙였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서로의 몸에 두 사람 모두 들뜬 숨을 내뱉었다.

“하, 아, 앗, 으, 으응!”

그의 것이 당장이라도 천을 찢고 들어올 듯 성녀의 배와 다리 위를 거칠게 문질렀다. 라트반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그의 움직임과 함께 흔들리는 가슴을 물었다.

혀는 잔뜩 예민해진 정점을 꾹 눌러 핥았다. 그러고는 마치 처음으로 단것을 문 아이처럼 정신없이 빨았다.

“아, 앗! 라, 라트반! 그렇게, 으흣, 빨면…!”

성녀는 애절하게 그를 불러 대었지만 라트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제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짧고 격렬한 성녀의 신음 소리가 그의 귓가를 채웠다. 그 소리가 너무도 황홀해 라트반은 더욱 거세게 혀를 움직였다.

“아, 아앙…!”

이윽고 절정에 도달한 듯한 큰 교성이 터져 나오고 성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동시에 천 아래에서 잔뜩 달아올라 그녀의 다리 사이를 문지르던 그의 것도 희뿌연 액체를 뱉어 냈다.

뜨거운 물 속에 서로가 흘린 것들이 흩어져 사라졌다.

라트반은 말없이 헐떡이며 늘어진 성녀를 안고 일어섰다. 이곳에서는 그가 원하는 만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감쌌던 따뜻한 물이 욕조와 바닥으로 튀었다. 라트반은 그런 것에는 시선을 두지도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아찔함이 뜨거운 물과 수증기 때문만이 아님을 알고 있다.

문으로 다가간 라트반은 그곳에 있던 큰 타월을 잡아채 제 품 안에 있는 성녀를 감쌌다. 붉게 달아올라 축 늘어진 몸이 보였다.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붉어진 채, 큰 눈 가득히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도, 몇 번이고 빨리어 잔뜩 부은 붉은 입술도, 모자란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느라 들썩이는 흰 가슴도, 그의 가슴을 더듬고 있는 가느다란 팔도.

그저 여체에 제가 미친 것일까?

라트반은 곧바로 아니라 부정할 수 있었다. 대신전의 절반은 여성이다. 성녀 외에 그가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여성이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그와 함께 신을 향한 길을 걷는 동료들이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가끔 먼 변방으로 출정을 나갈 때, 신전 기사단의 이름에 홀려 밤에 막사를 찾는 여자들도 있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좋은 향기를 감은 채 몸을 드러내던 그녀들을 봤을 때도 흥분은커녕, 더욱 차분해진 정신으로 그녀들을 물렸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은 왜 이렇게 그녀에게, 도대체 그녀의 무엇에 끌리는 것일까. 의문을 품은 채 라트반은 걸음을 옮겼다.

곧, 라트반은 침실의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가 그를 반겼다.

라트반은 타월에 감싸인 성녀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올라타 천천히 그녀의 몸을 닦아 내었다. 투명하리만큼 흰 피부 위에 조금 전 욕실에서 제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욕망이 진득히 들러붙은 자국들은 달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라트반은 확인이라도 하듯 그 자국들을 눌렀다. 그럴 때마다 성녀의 몸이 움찔거리며 입에서 나른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고개를 들어 성녀를 살피는 순간,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트반.”

그 순간 라트반은 제 의문의 답을 찾았다.

이렇게 제 이름을 불러 주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장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상처나 독 따위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저 목소리가 오직 제 이름만을 부르며 환희에 젖기를 바랄 뿐이었다.

라트반은 고개를 숙여 성녀의 배에 제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용서받지 못할, 그리고 용서받고 싶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서.

이미 욕실에서 한 번 절정을 맞이했던 내 몸이 침대 위에 축 늘어졌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두려움조차 포기한 몸을 이끌고 죽음의 집으로 갔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마지막 기도를 함께하며 계속해서 진짜 성녀가 아님을 용서해 달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러다 시델을 만났고, 라트반이 왔고, 그가 다쳤고, 그가 죽을 뻔했고.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섞였다. 그러다 그가 눈을 뜬 순간이 떠올랐다.

라트반이 살아 있다. 그것으로 되었다.

하루 종일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 수 있다면….’

다만 잠들기 전, 지금까지의 일이 허상이 아님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트반.”

내 부름에 몸의 곳곳을 닦아 주던 그의 손이 멈췄다. 돌아올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천천히 잠들려고 한 순간,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그가 대답을 해 왔다.

“흣!”

아랫배에 닿은 감각에 놀라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조심스럽게 그곳에 입을 맞추고 있는 라트반의 모습이었다. 나를 닦느라 정작 그는 젖은 모습 그대로였다. 짧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내 배 위로 떨어진 순간 나는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골반을 단단히 잡은 라트반의 손에 그저 들썩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라트반, 뭐, 뭘 하려고….”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라트반은 신전의 기사다. 그는 평생을 금욕적으로 살아갈 것을 신 앞에서 맹세했고 누구보다도 그 규율을 착실하게 따른 사람이었다. 예전에 내가 자국의 영향으로 그를 유혹했을 때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 전 욕실에서의 행위가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직 몸이 성하지 않은 그였다. 그러니 이쯤에서 멈출 것이라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배꼽 주변을 맴돌던 입술이 밑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라트반!”

놀란 내가 몸을 일으키며 그의 머리카락을 붙잡았지만 라트반은 멈추지 않았다. 의식을 잃었던 그를 잡아끄는 사이 거의 찢어지다시피 한 옷이었다. 거기에 물에 젖기까지 해, 입었다고 말하기 민망한 옷 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물에 젖어 드러난 굴곡을 그의 혀가 거침없이 쓸어내렸다. 마치 그 사이에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것이 흘러내린다는 듯이. 한껏 예민해진 살점을 자극당하자 입이 숨을 토해 냈다.

“하, 아, 흐앗!”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놀라 일어나려던 움직임은 다시 라트반의 손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내가 이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골반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탓에 나는 도망가지도 못한 채 그가 주는 모든 자극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메마른 방에 다시금 젖은 소리가 울렸다. 이제는 그것이 욕조의 물 때문이라 변명할 수도 없었다.

“아, 흐, 하앗! 자, 잠깐만! 라트반!”

내 필사적인 목소리에 그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미칠 듯이 몰아치던 자극이 멈췄다는 안도의 숨도 잠시, 곧 그의 손이 내 젖은 속옷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가락이 몇 번이나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신음 소리를 흘렸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다. 곧 닥쳐올 미래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푹 젖은 천이 침대 밖으로 떨어졌다. 이제 정말로 나와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라트반이 잠시 내 아래에 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재빠르게 몸에 걸치고 있던 남은 옷가지를 벗었다. 물에 젖은 무거운 천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

맙소사. 나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막고 말았다. 희미한 달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그의 모습은 검은 실루엣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것이 얼마나 흉흉하게 솟아올라 있는지는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품은 욕정을 확인한 순간 두려움과 함께 몸이 떨렸다.

내가 원하는 것만큼 그가 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팔을 뻗으며 순식간에 내 몸을 덮었다.

“앗….”

닿는 순간, 젖어 있는 것이 나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성기 끝은 마치 침을 흘리고 있는 듯이 번들거렸다.

“하아….”

그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몸을 내렸다. 맞물려져 물을 흘리는 살 틈 사이에 그가 자리 잡았다.

그의 것이 내 밀부에 닿는 순간, 나는 숨을 삼켰고 그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밑을 찔러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라트반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성기의 끄트머리만을 살짝 물고 있는 내 아래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어서 빨리 이 열기를 그가 어떻게든 해 주기를 바랐다. 내가 보채듯 몸을 들썩이자 끝만 물려 있던 그의 것이 살짝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아, 흣!”

그 순간 나는 신음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동시에 라트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가 몸을 떼었다. 맞붙어 있던 그가 멀어지는 감각에 아쉬워 그에게 손을 뻗자 그는 복종하는 짐승처럼 고개를 숙여 내 손을 제 얼굴에 대었다. 잔뜩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이 만져졌다.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라트반… 왜….”

왜 그가 멈춘 것일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움직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슬슬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그가 멈춘다면. 다시 몸을 일으킨 다음, 역시 이러면 안 될 것 같다며 몸을 물리고 옷을 입혀 주며 물러간다면.

그런 생각을 하자 숨이 막혔다. 갑자기 신이 제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잘 따르고 있던 어린양을 불쌍히 여겨 이 순간 그에게 이성을 되돌려준 것일까. 그러면 라트반은 지금 나와 이러고 있는 것을 부끄럽다 여기게 되는 것일까. 조금 전까지 가득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트반…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시, 싫은 거라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제발 이대로 멀어지지 말아 달라는 듯이. 내 손가락이 단단한 그의 팔을 간지럽히듯 쓸어내린 순간, 라트반은 크게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왜, 왜 갑자기….”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신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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