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48)

아슬란이 떠난 다음 날 아침, 나는 레온의 편지를 받았다. 급하게 쓴 듯한 글씨로 곧 돌아오겠다고 적힌 짧은 편지에는 무슨 일로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라트반 경에게도 전해 달라는 추신이 적혀 있었다.

레온뿐만이 아니라 그의 부관들까지 전부 다 사라진 탓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편지를 전하고 돌아간 부관을 붙잡았을 것을.

아슬란이 떠났고 이번에는 레온이 떠났다.

‘혹시 레온도 이리스에게 간 것일까?’

그 역시 이리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처음 레온이 대신전에 왔던 목적이 생각났다. 그는 성녀를 찾아왔다. 그렇다면 또 다른 성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이리스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까지 빨리 움직이지는 않을 거라 애써 위로했지만 자꾸 마음은 좋지 못한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라트반은 오늘 아침에도 짧은 인사만 했을 뿐, 여전히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카를 신관이 죄를 인정했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대신전의 지하 감옥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규율에 따르면 적어도 10년 정도는 그곳에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만 정확한 형량은 과거 처벌의 기록을 좀 더 살핀 다음 정해질 것 같습니다.”

소식을 전한 상급 신관은 그 외에도 많은 말을 했지만 결국 내용은 하나였다.

카를이 죄를 인정했다.

‘그럴 리가.’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왜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한 듯이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그를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 홀로 가두라 명령했다. 머릿속에서 카를과 이리스에 대한 수많은 의문과 걱정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불쑥 그 사이에 라트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슬란도 레온도, 이곳을 떠났다. 그들은 라트반을 믿고 떠났지만 지금은….

‘…내가 그를 믿지 못하겠어.’

***

아슬란과 레온이 떠난지 나흘이 지났다. 아슬란이야 얼마 걸릴지 모를 것 같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레온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자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아슬란은 돌아오지 않는 거지? 레온은 왜 연락이 없는 걸까?

그 사이에도 대신전은 시끄러웠다. 임시로 신전 기사단을 트리온에 보냈지만 역시 라트반이 가야 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다행일까, 라트반은 그 말에는 단호하게 아직 자신은 근신 중이며 지금 같은 때일수록 더욱 나를 경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너들은 그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마음이 불안한 탓일까.

“허억…!”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왜….”

이마와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고 손은 무엇을 쥘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렸다. 꿈에는 계속해서 책의 내용이 나왔다. 나는 살아남으려 발악해 보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면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서 있는 꿈이었다. 그렇게 꿈속에서 나는 이벨리나로 죽고 또 죽었다.

한참 숨을 고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다. 어차피 더 잘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꿈을 다시 꾸느니 차라리 계속 깨어 있는 편이 나았다.

무언가 읽을 것이라도 찾아볼까, 하던 나는 서재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

내 방에서 보이는 것과 조금 다른 밤의 풍경을 보던 내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내 방에서 보이지 않았던 중앙 신전의 뒤쪽에 있는 작은 건물의 바닥 쪽에 푸른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성력이었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내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방 앞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대신 신관들이 앉아 기다리는 의자 옆에는 그녀들이 밖을 나설 때 입는 옷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홀린 듯이 그것을 움켜쥔 뒤 나는 곧바로 건물 끝의 계단으로 달렸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다행히 내가 방을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복도 주변으로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인적이 없는 건물 끝의 계단을 조심스레 걸어 내려왔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던 데다가 최근 대신전의 뒤숭숭한 분위기 탓에 밤에 밖을 돌아다니는 신관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조금 더 한적해지기를 기다리던 나는 손에 닿는 대로 집어 들고 왔던 신관복을 걸치고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내 처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님에도 걸어가는 길이 끔찍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혹시나 누구를 만나지 않을까, 그러다 상대가 나를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에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만이 귓가를 두들겼다.

“헉… 헉….”

건물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나자 차가운 밤공기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바닥에서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성력을 살폈다. 분명 이것은 이 건물 아래의 땅속에서 올라오는 것이 분명했다.

‘이 밑에 뭐가 있길래?’

건물은 얼핏 보면 마치 중앙 신전의 창고처럼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 건물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작은 나무 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똑똑.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다시 바라보자 어둠 속에서도 뽀얗게 쌓여 있는 먼지가 보였다. 나는 다시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다음 몸으로 문을 밀었다. 단단히 닫혀 있을 것 같았던 문은 몇 번 덜컹거린 다음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갑자기 열렸다.

“읏….”

그 탓에 안쪽으로 나뒹군 나는 고개를 들어 안을 살펴보았다. 창문 하나 없는 공간에는 그저 암흑뿐이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바깥의 희미한 빛이 아니었다면 위아래조차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나는 다시 몸을 숙였다.

“이건….”

밖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 정신이 없었던 탓에 제대로 보지 않았던 바닥의 돌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벨리나가 보았던 그곳의….”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그녀는 성력이 타오르는 공간에 서 있었다. 이 돌은 분명 그 기억에서 보았던 공간의 벽과 똑같은 것이었다. 마감이 거친 여러 가지 색의 대리석. 그것을 알아차리자 곧바로 짐작이 갔다. 이곳 어딘가에 이벨리나가 보았던 그 성력의 불길이 있는 것이다.

‘땅 밑에서 성력이 올라오고 있었지.’

그리고 이벨리나가 서 있던 곳은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 내려가야 다다를 깊숙한 곳이었다. 분명 이 아래에 성력의 불길이 있는 것이다.

혹시나 누가 다가올까 걱정이 되었기에 나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이제는 정말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암흑으로 가득 찼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바닥의 돌 틈 사이로 올라오는 성력의 빛이 보였다. 나는 기어가듯 바닥에 엎드려 성력의 흔적을 살폈다.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을 뜯어내며 바닥을 기어 다니다, 곧 커다랗고 네모난 돌의 주변으로 성력이 올라오는 것을 찾았다.

“여기구나.”

돌 위를 더듬어 보자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차가운 쇠로 만들어진 고리가 잡혔다.

나는 주변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조심스럽게 밀어낸 다음 일어나 고리를 잡아당겼다.

“흣!”

조금 들썩거리기는 했지만 돌은 쉽게 들리지 않았다. 다시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그제야 드르륵 끌리는 소리와 함께 돌판이 들렸다.

“허억… 헉….”

간신히 내 몸이 지나갈 정도로 돌을 밀어내고 나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 아래로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계단이 보였다. 너무나 아득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 성력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내려가 봐야 하는데….’

두려움이 몰려왔다. 저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내려가면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으로 뛰어왔던 것은 지금도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성력 때문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성력을 잡아 보았다. 그것은 잠시 내 손끝에 감기더니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신을 집중하고 성력을 모아 보았다.

“……!”

다시 손끝에 아주 짧게나마 성력이 돌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만약 이 밑에 성력의 불이 남아 있다면 조금이라도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계단 앞에 선 다음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 밑에서 일렁이던 푸른빛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는 분명 이벨리나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곳이 맞다. 하지만 그 기억과 너무도 다른 것이 있었다….

“이게… 전부…?”

기억 속에서 성력의 불길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 정도로 거대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벨리나가 보는 도중에 그 크기가 줄어들기는 했어도 여전히 이 공간을 채우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불길은 작은 모닥불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내 성력이 사라졌기에 이 정도라도 남아 있음을 감사해야 하건만, 원래의 모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렁이는 불길의 끝부분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아마도 저것이 내가 서재에서 보았던 성력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곧 완전히 사라질 거야.’

이벨리나가 이곳에 왔다 간 후로 성력의 불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완전히 그 힘을 잃었겠지. 여기 남아 있는 성력은 이리스가 전부 가져가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하다.

그것을 깨닫자 나는 남아 있는 성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미처 이리스 쪽으로 다 넘어가지 못한 이 찌꺼기가 나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었다. 그렇게 성력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화르르르륵!

갑자기 거센 소리를 내며 손끝에 닿았던 성력이 폭발이라도 하듯 거세게 타올랐다.

“읏!”

열기는 없다 하더라도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에 나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왜 이러는 거야?’

혹시나 성력이 돌아오는 것일까. 작은 기대가 마음 한구석에 피어올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성력만 다시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두려움 속에 떨지는 않을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이 타오르던 성력의 불길 속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놀란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자 그쪽도 나를 알아본 듯이 덩달아 놀란 얼굴이 되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무척이나 피곤한 듯 초췌한 낯이었고 오랜 시간 굶은 것 같은 비쩍 마른 몸이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는 놀람과 두려움을 넘어선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리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이 세계의 주인공. 곧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될 사람.

내가 이름을 부르자 이리스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 역시 이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로의 손이 닿기 직전.

팟!

높이 타올랐던 성력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내 앞에는 조금 전의 모닥불보다도 못한 불씨들만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안 돼! 성력이!”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남아 있는 불씨들을 필사적으로 잡았다. 그때였다.

“이건….”

“……!”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라트반이 서 있었다.

“…라트반.”

성력에 정신이 얼마나 팔려 있었으면 그가 나를 뒤따라 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성력의 흔적을 붙잡으려 허공을 휘젓던 팔이 툭 떨어졌다. 그가 이 모든 것을 보았다. 불타올랐다 사라져 버린 성력도, 그 성력 너머에서 나타났던 이리스도.

“라, 라트반 이건….”

“설마 성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까?”

“……!”

내가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들켰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끝이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몸 전체가 미친 듯이 떨리며 턱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내었다.

들켰다. 내게 더 이상 성력이 없다는 것을 라트반이 알아 버린 것이다. 불길 너머에서 나타났던 이리스의 모습이 생각났다. 라트반도 이리스를 보았을까?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자신이 새로이 섬겨야 할 사람임을 알아차렸을까?

“그럴 리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라트반은 당황하는 나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트반이 나를 직접 끌고 가 사람들 앞에 내던질까? 다시 이벨리나의 최후가 떠올랐다. 안 된다. 여기서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라트반의 손에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그 순간 나는 계단을 향해 뛰었다. 나를 잡으려는 듯 라트반이 손을 뻗었지만 나는 곧바로 그 손을 쳐 냈다. 한참이나 걸어 내려왔던 계단은 그사이 더 길어지기라도 한 듯 아무리 오르고 또 올라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계단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대로 암흑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일까.

몇 번이고 달리다 넘어졌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영원할 것 같았던 계단의 끝이 보였다. 계단을 모두 올라온 나는 몸을 돌려 아래를 보았다. 내려갔을 때보다 더한 어둠이 아래에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은 어둠이.

저 아래에서 나를 따라오는 듯한 라트반의 걸음 소리가 들리자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밖으로 내달렸다.

방에 도착하자 조금 전 자리를 비웠던 신관들이 놀라 나를 맞이했다.

“성녀님! 언제 밖으로 나가셨…!”

“비켜요!”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소리친 다음 나는 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문을 걸어 잠갔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들어오지 마!”

계속해서 문을 두드려 대는 신관들을 피해 나는 다시 방의 안쪽에 있는 문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몇 개의 문을 단단히 잠근 다음에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헐떡이는 숨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그대로 폐가 찢어지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다.

아픈 곳은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아… 윽….”

바닥에 엎드린 채 다리를 바라보았다. 계단을 뛰어 올라오면서 다쳤던 것일까. 치마 사이로 드러난 흰 다리에는 여기저기 긁힌 자국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다리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도망가야 해.’

나는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떨리는 손은 거칠게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오래전에 이벨리나가 넣어 둔 여러 가지 보석들이 있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주머니에 그것들을 집어넣었다.

주머니가 찢어질 정도로 보석을 밀어 넣은 나는 허겁지겁 비밀 통로가 있는 방으로 갔다.

이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지?

‘일단은 멀리 도망가야 해.’

대신전의 입구로 연결되었던 통로가 생각났다. 최대한 빨리 그곳을 이용하여 대신전을 벗어난 다음, 마을에서 마차를 구해 멀리 떠나야 했다. 돈은 보석들로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급한 대로 저번에 내가 갔던 그 뒷골목에서라도 팔아 치울 수 있겠지.

하지만 곧 걱정이 몰려왔다. 그곳의 규칙도 모르는 내가 과연 안전하게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그곳을 나서기도 전에 어딘가로 끌려가지는 않을까? 혹시 무사히 나온다 하더라도 대신전의 눈을 피해 잘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러는 사이 나는 통로가 열리는 벽에 손을 올렸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벽을 바라보며 소리치다 깨달았다. 맞다, 이제 나는 성력이 없지.

그러니 성녀의 성력에 반응하는 이 벽도 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읏!”

급하게 몸을 돌리다 다시 느껴지는 다리의 통증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차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에 밀어 넣었던 보석들이 바닥 위에 어지러이 굴렀다. 나는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방 한구석에 있는 거울에 내 모습이 보였다. 엉망인 꼴을 한 채로, 도둑처럼 보석들을 집어 든 채 도망가려고 하는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가짜 성녀.

지금 내게 그 단어만큼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제 거짓이 들통나자 도망치려고 하는 꼴사나운 모습이라니.

책에서 보았던 이벨리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떻게….”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이런 걸 버틸 수 있었어?”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아직 이 안에 있을 이벨리나에게.

그녀는 성력을 잃었어도 끝까지 대신전에 남았다. 신관들이 억지로 끌어내는 순간에도 고고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자신이 성녀라 외쳤다. 책을 읽을 때는 어쩌면 이렇게 뻔뻔하게 버틸 수 있을까 욕하며 그저 그 모습이 밉살스럽다 생각했는데.

이벨리나는 어릴 때부터 살아온 이 대신전이 자신을 죽이려 드는 두려움을 끝까지 버티면서 이곳에 남은 것이었다.

“흐윽….”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죽기 싫었다. 그렇다고 이런 두려움 속에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무서워.

많은 노력을 해 보았지만 결국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시간이라도 남은 줄 알았는데, 멀게만 느껴졌던 미래는 도망가려는 나를 향해 비웃듯이 성큼 다가오고야 말았다.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처럼.

나는 팔에 얼굴을 묻은 채 계속해서 울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지친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천천히 눈이 감겼다. 이젠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꿈속뿐인 것을 알았으니까. 그렇게 천천히 잠들어 갈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다독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굴까. 분명 이 방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정한 손길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를 받은 나는 조용히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카를은 지하 감옥의 벽을 만져 보았다. 축축한 습기가 그의 손이 지나간 곳에 물방울을 만들었다. 벽을 따라 아래로 물방울이 떨어지자 이끼 위에 앉아 있던 벌레가 놀라 재빨리 구석으로 기어들어 갔다.

카를은 비틀린 발을 들어 구석으로 기어들어 간 벌레를 짓밟았다. 몇 번의 헛발질 끝에 그는 겨우 벌레를 밟아 죽일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의 간수를 맡고 있는 신관들의 걸음 소리였다. 그들은 곧 카를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물론 카를은 처음부터 이러고 있었다는 듯,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를 신관님.”

그들이 부르자 카를은 그제야 눈을 떴다. 그리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미안합니다. 제가 기도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봅니다.”

온화한 카를의 목소리에 신관들의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사실 이곳에 얼마 전부터 수감된 시델이라는 신전 기사가 있습니다. 성녀님을 해하려 했기에 라트반 단장님의 즉결 처분으로 곧바로 이곳으로 보내졌지요.”

“…시델?”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같은 훈련 기사였던 시절부터 라트반을 우러러보며 제 우상으로 삼았던 어린 기사의 이름이 분명 시델이었다. 그런데 성녀를 해하려 해서 이곳으로 들어왔다니?

카를이 어렴풋이 기억난다는 표정을 짓자 신관들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이곳으로 들어오고 나서 그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점점 더 헛소리가 심해지면서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는 모양입니다.”

“저런. 그런데 왜 갑자기 그의 이야기를….”

“사실, 저희들이 카를 신관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가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반가운 이름이 들렸던 탓일까요. 그가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혹시 신관님을 만날 수 있느냐, 이야기할 수 있느냐 물어 오길래….”

그 말에 카를은 필사적으로 떠오르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죄를 인정한다고 했을 때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혼자 고립되어 있으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 능력은 다른 자를 만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여태껏 계속 그 방에 혼자 갇혀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럴 순 없지.’

제 예상대로라면 지금 이벨리나의 성력은 무척이나 약해졌거나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그 방에 갇혀 있기보다는 차라리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지하 감옥이 나았다.

이곳으로 온 카를은 그 누구보다 신실한 신관의 흉내를 내었다. 원래부터 하던 것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거기에 아무 말도 없이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라며 마치 고난과 시련을 짊어진 성인과 같은 소리를 했다.

신을 부정하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가득한 지하 감옥에서 카를은 들어오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유일한 신관이었다. 자연히 그런 그에게 간수들의 대접이 달라졌다.

“그래서 그가 제 옆방으로 오게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곧 이곳을 나가거든요.”

“나간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몸도 몸이지만 병을 얻었습니다. 살날이 그리 오래 남은 것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기에 하늘을 보고 죽을 수 있는 마지막 자비를 얻었지요. 며칠 후면 이곳에서 나가 대신전 구석의 죽음의 집에서 최후를 기다릴 겁니다.”

“…그렇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겁니까?”

“몸은 괜찮지만 식사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며칠 내로 목숨을 잃겠지요.”

이제 필요한 정보는 어느 정도 얻었다. 카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있지 않아 간수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축 늘어진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남자를 붙잡고 있었다.

“시델?”

“카를 신관님!”

죽은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시델이 얼굴을 들었다. 카를은 그런 그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녀를 시해하려 해서 이곳에 들어왔다고.’

그리고 며칠 후면 이곳을 나갈 자. 죽음을 기다리는 자. 성녀를 싫어하는 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신뢰하는 자.

시델은 카를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

결국 나는 도망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칠 용기조차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침에 그 방에서 눈을 뜬 다음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보석들을 다시 주워 담았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곤 방을 정리했다. 언제 어느 때가 됐든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더 이상 치울 일이 없도록.

신기하게도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차분해졌다. 두려움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어느 순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도망칠 용기 대신에 체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히 찾아올 자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 각오가 무색하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전은 다시 조금씩 평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변한 것은 있었다. 라트반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나를 경호하겠다고 찾아온 것은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라트반 경은….”

“최근의 일들로 더욱 면밀히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조사할 것이라….’

내가 왜 성력을 잃게 되었는지 조사한다는 것일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 잡으러 오겠다는 걸까? 그사이에 내가 어디로 도망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머릿속을 채우는 수많은 물음에 잠겨 있을 때 부기사단장이 말을 걸었다.

“들어오기 전, 상급 신관들이 혹시 성녀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대신전 내의 일정을 진행해도 될지 물어봐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최근에 여러모로 분위기가 흉흉한 데다가 좋지 못한 소문까지 퍼지고 있어서….”

“좋지 못한 소문이라면 또 다른 성녀에 대한 것이겠군요.”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이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부기사단장은 마치 자신이 그 소문을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내가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고 있던가요?”

내가 되묻자 부기사단장이 대답했다.

“이제 곧 세상을 떠날 자들의 기도를 위해 죽음의 집에 들러 주시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집.

이름은 공포스러웠지만 그곳은 그저 더 이상 성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자들이 조용히 안식을 기다리는 곳이었다. 신관들은 내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날 자들에게 마지막 기도를 해 주기를 바랐다.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일정으로는 이것이 제일 제격이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를 맞이하려 서 있던 신관들이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죽음의 집을 둘러보았다. 새하얗게 칠해진 건물은 깔끔함 그 자체였다. 게다가 곳곳에는 작은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잘 관리된 정원의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거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정원 가운데서는 작은 분수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솟아올랐다. 그런 정원에 햇살이 내리자 그곳은 마치 작은 낙원처럼 보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는 상쾌한 허브의 향이 섞여 있었다.

“좋은 곳이군요.”

“모두가 마지막 순간까지 평안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신관의 얼굴을 보니 이 세상을 떠나 신의 곁으로 가는 자들의 두려움을 덜어 주는 일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정원을 바라보다 나는 신관들에게 말했다.

“환자들에게는 혼자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역시 이렇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 같군요.”

“하지만….”

“대부분 일어날 기력도 없는 자들이라 들었습니다. 혹시 다른 위험할 일이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래도….”

나는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얘기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을 알아들었는지 신관은 알겠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그들에게 물러서 있을 것을 명령하고 정원을 지나 환자들의 공간으로 갔다. 훤히 트인 곳도 있었으며 작은 방으로 나누어진 곳도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몸 여기저기에 보기 흉한 종기가 가득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완전히 녹아내리고 있는 얼굴은 눈코입이 어느 곳에 달려 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누가 보아도 여자는 성력으로도 완전히 치유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내가 옆에 앉자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누… 구?”

비틀려 있는 치아 탓에 뭉개진 발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녀가 무어라 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 곧 힘겹게 미소지었다.

“…성녀님이시군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에게 차마 내가 성녀라 거짓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나를 붙잡으려는 듯 꿈틀거렸다. 내가 서둘러 그녀의 손을 맞잡자 그녀는 더욱 환한 웃음을 지었다.

붙잡은 손을 보며 그녀가 왜 웃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언젠가 나도 이런 적이 있었다.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약이 잘못되어 피부 전체가 뒤집어졌을 때, 나는 다 함께 쓰는 병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모두가 눈을 흘기며 대놓고 불편함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옆 침대를 쓰던 사람은 돌아누운 내 등에 재수 없다며 침을 뱉기도 했다. 아마 이 여자도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힘을 다 쏟은 것처럼 내 손을 한번 쥐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점점 그녀의 숨결이 약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나는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위로 이불을 덮어 준 뒤 짧게 성호를 그었다.

가짜인 내가 그녀의 마지막 길에 위안이 되었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돌았는지 모른다. 대부분 나이가 든 자들이었지만 가끔은 아주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반응들도 전부 달랐다. 처음의 여자처럼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죽기 싫다고 울며 매달리는 자들도 있었다.

“후….”

얼마나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낸 것일까. 마지막으로 만난 아이를 도닥거리며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 정원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하늘에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전부 만난 것 같고… 이제 그만 돌아갈까.’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침대 하나를 제외하면 모든 환자들을 만나 그들의 손을 잡고 기도를 올렸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입구로 나가려고 할 때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걸어 다닐 정도로 상태가 괜찮은 사람이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살짝 문이 열린 방이 보였다. 바람에 열린 것일까?

그때 안에서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있어?’

창고라고 생각했던 곳이기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사람이 있었다니. 되도록 모든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었기에 나는 서둘러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은가요? 기침 소리가… 큭!”

방 안으로 미처 들어가기도 전에 안쪽에서 튀어나온 손이 곧바로 내 목을 잡아채더니 안으로 내동댕이쳤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문이 닫히더니 나를 잡아당긴 자가 몸 위를 타고 올라 두 손으로 내 목을 졸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며 그를 밀어내었다.

퍽!

휘두른 손이 그의 얼굴을 후려치자 신음 소리와 함께 남자가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목을 조르는 손 하나가 줄어들었을 뿐, 그는 여전히 내 위에서 비키지 않았다. 그가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린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시델!”

엉망인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넝마나 다름없는 옷 때문에 처음에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노려보는 광기 어린 눈빛을 마주하자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잊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라트반의 집 앞에서 내 목을 조르던 저 눈빛.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죽음을 다시 실감하게 해 주었던 존재.

그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가짜 성녀.”

“……!”

그 말에 내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마치 정답을 맞힌 아이처럼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신께서 너를 벌하라 나에게 명하셨지.”

그렇게 말한 시델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번쩍이는 것이 보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굴렀다. 바람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움직였다. 거의 죽어 가던 시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시델이 움직였다.

캉!

큰 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었던 자리에 시델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사….”

살려 달라 소리를 지르려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지금 소리를 지르면? 분명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시델은 과연 뭐라 말할 것인가.

‘빨리 죽나 늦게 죽나의 차이일 뿐이야.’

시델이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오면 곧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이제 나에게 내 몸을 지킬 만한 성력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사특한 계집, 신을 능멸하고 아직도 살기를 바라나.”

시델은 내가 그를 막아 내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서두르려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는 그의 몸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달리 파리하게 말라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사람이 없었던 침대 하나가 기억났다. 그곳이 시델의 자리였던 것이다.

시델은 위대한 사명을 짊어진 자처럼 더 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는 가장 역겨운 오물을 보는 듯한 시선을 나에게 던지며 말했다.

“감히 성녀를 사칭하고 이 더러운 몸뚱이로 라트반 님을 홀렸다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혐오감일 뿐, 욕정 따위는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 몸을 더럽다 생각하는 것이다.

“카를 신관님께 네년의 악행은 죄 다 들었다. 그분께도 더러운 마수를 뻗으려다 실패했다는 것도.”

“…카를이었군.”

시델은 죽음의 집에 올라오기 전에 지하 감옥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금 카를이 있다. 그 사실만으로 모든 일이 짐작이 되었다.

“그 입으로 그분의 이름을 담지 마!”

내가 카를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시델은 몸을 떨며 내 목을 더욱 힘주어 졸랐다. 도저히 이런 몸 상태의 사람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신께서 내게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성업(聖業)을 내려주셨어. 너를 죽이고 네가 가짜 성녀였다는 것을 알리면 카를 신관님께서 오명을 벗고 대신관이 되어 모든 일을 정리해 주시겠지. 진짜 성녀님을 모셔오면 이 대신전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

시델은 벅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그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벨리나가 망가지기 전, 카를의 손 아래 움직이던 그 시절의 거짓된 평화를 원하고 있었다.

시델은 손에 들린 단검을 고쳐잡았다. 이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지 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번만 더 손을 휘두르면 나는 죽는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델의 입에서 진짜 성녀를 모셔온다는 소리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또 같은 짓을 하려고?’

카를은 다시 반복하려 하고 있다. 이벨리나를 짓눌렀고 그녀가 망가지면 또 다른 성녀를 짓누르는 일을 말이다. 나는 옆을 바라보았다. 원래 창고가 맞았는지 그곳에는 내가 넘어지면서 넘어트린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중에 막대 부분이 긴 빗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시델의 손이 움직였다. 그 순간 내 손은 곧바로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시델의 검이 막대기에 부딪혔다. 운은 거기까지였다. 시델은 귀찮다는 듯 그대로 팔을 휘둘렀고 내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는 그대로 창고 구석으로 날아갔다.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몇 번 되지 않았던 라트반과의 수업에서 그는 나에게 단검을 잡는 방법을 가르치려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른 것을 알려 주었다.

“이건 무슨 동작인가요?”

“가까이에서 누군가 공격을 해 올 경우 잠시 버티는 방법입니다.”

“잠시라면 결국은 의미 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되묻자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어떤 상황이든 두 번째 공격을 받으시기 전에 제가 막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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