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48)

레온이 알릭이라는 신관에 대해서 묻는 순간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내 반응에 레온보다 내가 더 놀라고 말았다.

“리나, 괜찮습니까?”

당황한 레온이 눈물을 훔칠 것을 찾았다. 하지만 마땅한 것이 근처에 보이지 않자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옷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눌러 주었다. 하지만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없는데… 왜….”

몸이 이런 식으로 반응을 보였던 적이 있었다. 바로 카를의 이름이 처음 나왔을 때였다. 그때는 크나큰 공포에 질린 듯 몸이 떨렸었는데 이번에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 알릭이라는 자가 카를만큼이나 이벨리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아무런 기억도 없어.’

급히 알릭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그 역시 카를만큼이나 이벨리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이벨리나는 그에 대한 것도 내가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나는 게 없단 말은 사실인 것 같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 모습에 레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신관이 당신에게 꽤 중요한 사람인 건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레온은 탐탁지 못하다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 겨우 눈물을 멈춘 나는 레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알릭이라는 사람은 왜 언급한 거죠? 혹시 카를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사람이에요?”

대신전에 있는 많은 신관 중에서 레온이 특정 인물을 우연히 물어봤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벨리나가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이라니. 혹시 알릭이라는 자도 카를과 관계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왜 이렇게 카를의 이름을 들었을 때와는 반응이 다른 걸까?

레온은 나를 소파에 앉히며 설명을 시작했다.

“카를 신관이 변방에 있을 때, 꽤 많은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저번에 말해서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라트반 경에게 부탁해서 그동안 그가 대신전의 어떤 사람들에게 얼마나 편지를 보내왔는지를 찾아보았어요.”

저번에 카를을 궁지에 몰아넣을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레온이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카를이 신관들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야 한다고, 그게 있어야 카를의 세뇌를 깨고 다른 신관들을 흔드는 것이 더욱 쉽다고 했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확인했습니다. 수많은 신관들 중에 알릭이라는 평신관이 언제나 카를이 보내온 편지를 잘못 왔다며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받지 않았다는 건….”

“기록을 확인해 보니 아예 편지를 열어 보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른 신관들은 언제나 카를 신관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알릭은 단 한 번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실 카를 신관이 정말 편지를 잘못 보내고 있다면 한 번쯤은 그에게 알리기 위해 답장을 할 법한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좀 더 알아보았지요. 그는 과거 카를 신관을 수행한 적이 있더군요. 그러다 건강이 좋지 않다면서 그만두었고요.”

“…혹시 그게 언제인지도 기억하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레온은 알릭이 카를과 함께 일했던 때를 알려 주었다. 그게 언제였는지 생각하던 나는 곧 그 시기가 이벨리나가 기행을 시작하게 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알릭이라는 자에게 분명 뭔가 있어.’

레온은 생각에 잠긴 나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카를 신관과 관계가 있는 것 같으니 알아보겠습니다. 혹시나 기억나는 게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나는 그런 레온의 모습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가기 싫어지게.”

“…생각보다 빨리 일어나는 것 같아서요. 당신이 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솔직한 내 대답에 레온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러고 싶습니다. 라트반과 아슬란을 내보내고 당신과 이렇게 단둘이 있을 기회가 흔치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질 생각은 없으니 일어나는 겁니다.”

“질 생각…?”

“그래요. 지금 나와 라트반 경, 아슬란은 서로 싸우고 있는 중이니까요.”

레온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 고개를 내리자 아직도 벌겋게 부어오른 그의 손이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눌렀다. 그러자 레온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아파서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생각하기에 레온의 얼굴은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였으니까.

“우리 셋은 지금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당신을 돕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선택해 줄 테니까요.”

“…….”

선택이라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사실, 내 선택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리고 이런 말이 당신에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싸움에서도 진 적이 없어요.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 내지요.”

레온의 눈이 진지해졌다. 친구처럼 보이던 그가 순식간에 다시 제국 황태자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시 말하지만, 리나. 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좀 더 정확히는 당신이 나를 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 어떤 일보다 당신의 마음을 얻는 게 가장 어려울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는 시작이 좋지 못했으니 더욱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요. 솔직히 다시 떠올려도 좀 충격입니다. 그렇게 잠자리만 하고 휙 떠나 버리는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조금은 호감이 있어서 날 끌어당긴 게 아닌가 싶었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니.”

“그건….”

그가 말하는 시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와 처음으로 밤을 보냈던 날을 말하는 것이다. 레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시작이야 어쨌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니까요.”

그렇게 말한 레온이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보았다.

“결국 당신을 얻는 건 내가 될 겁니다. 그것만큼은 확실해요.”

***

밤이 되고 침대에 누웠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레온이 했던 이야기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이벨리나가 눈물로 반응하고 카를을 거부하는 신관이라니….’

알릭이라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 나 역시 궁금해졌다. 그는 카를의 편일까? 아니면 성녀의 편? 카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분명 카를에게 우호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벨리나의 편이라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한 번 만나 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릭에 대한 생각을 하다 이벨리나의 의식 속이 떠올랐다. 그곳에 다시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다면 거기서 또 다른 기억들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지난 일을 떠올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헉!”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었다.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떨리며 온몸이 굳어 가는 것 같았다.

“왜, 왜….”

아득해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침대 위에서 몸을 바르작거리다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서, 성력이….”

온몸에 성력이 맴도는 것이 보였다. 마치 몸 안에서 모든 생명력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낮에 라트반을 치료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내가 사용하는 힘이 아니었다. 누군가 강제로 이 성력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내 몸 전체를 감싸고 있던 성력이 갑자기 일렁였다. 그러고는 세차게 내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러던 성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동시에 몸을 짓누르던 피로감이 겨우 자취를 감추었다.

“헉… 헉….”

숨을 몰아쉰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성력이….”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허벅지의 자국이 뜨겁다는 것을 알았다.

“설마….”

덜덜 떨려 오는 손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낮에 했던 것처럼 성력을 모아 보았다. 하지만 손끝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십 번 다시 시도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러다 나는 이 장면을 오래전에 읽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럴 리 없어. 벌써 이렇게 될 리가….”

그것은 분명 이벨리나가 완전히 성력을 잃던 날의 내용이었다.

악역이 몰락하기 시작하는 부분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만족감을 주기 마련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녀라는 신분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모두를 억압하던 이벨리나가 성력을 잃고 울부짖던 부분을 보며 재미있다고, 더 당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벨리나에게 아무런 것도 남지 않기를, 그렇게 모든 것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괴로워하기를 바랐다. 그게 이벨리나에게 어울리는 미래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바라는 미래였다.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고 생각했던 그 미래의 비극은 현실이 되어 바로 지금, 나를 덮쳤다.

“왜…?”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갑작스러운 일 앞에서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머릿속이 그대로 새하얘졌다. 나는 그저 덜덜 떨면서 손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야.”

무엇이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내가 몇 번이고 읽었던 부분을 떠올렸다. 책 속에서 이벨리나의 성력이 한 번에 사라졌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리스에게 문제가 생긴 거야.’

책에서 이벨리나의 성력이 완전히 사라졌던 날, 이리스는 마수의 습격을 받았다. 갑작스레 생겨난 성력을 쓰기 두려워했던 이리스는 그날 모든 힘을 다해 성력을 사용하고 사람들을 지켜 냈다. 그날로 이벨리나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

책의 내용이 떠오르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도 파악 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나는 다시 온 힘과 정신을 집중해 성력을 모아 보았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이 우습다는 듯이 손끝에는 바람 한 점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성력을 쓰려고 하면 이리스에게 간 성력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아래로 흘러간 물이 다시 위로 올라오지 않듯이 이리스에게로 가 버린 성력은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성력이 사라지고 난 후의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상상 속에서 그때의 나는 이미 성녀의 자리를 원만하게 이리스에게 넘긴 후였다. 그다음에는 대신전에서 멀리 떠나 이 세계를 혼자 돌아다니며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또한 카를의 일 같은 것은 없었으며 라트반도, 레온도, 아슬란도 없었다.

세 남자를 떠올리자 지금까지와 또 다른 아득함이 느껴졌다.

만약 세 사람은 내게서 성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까지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고해를 하듯 울며 제 마음을 말하던 라트반, 웃으며 내가 선택해 주기를 바란다던 레온, 나를 품에 안은 채 자신의 모든 것은 곧 나의 것이라고 했던 아슬란까지.

그들의 표정은 영원을 약속하는 듯한 진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책의 내용이, 여기에 와서 보았던 흐름이, 그리고 과거 내가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정해진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을 해도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상황들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나의 평판은 좋지 못하며 성력은 줄어들고, 이리스가 나타나려 한다.

사실 나는 조용히 흘러가던 개울에서 힘껏 몸을 뒤틀고 분탕을 쳐, 제가 일으킨 흙탕물이 시야를 덮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좋아하는 멍청한 미꾸라지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흙탕물은 잠시의 시간이 흐르면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에 깨끗이 쓸려 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법이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똑같다. 계속해서 흐르는 물에 이길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가야 할 곳을 향해 흘러가는 이 세계의 흐름에서 나는 그저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다시 현실을 바라보았다.

성력이 없다. 더 이상 나는 성녀가 아니다.

그것이 알려지면 무엇이 바뀔까. 대신전이 발칵 뒤집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저 멀리 대신전의 넓은 광장이 보였다. 책에서 이벨리나는 저곳에서 화형을 당한다.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쌓인 장작더미의 꼭대기에서, 사지가 묶인 다음 기름을 뒤집어쓴다. 그다음 곧 뜨겁게 솟구칠 불을 피하려 멀어지는 신관들을 향해, 그녀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이벨리나는 자신이 진짜 성녀라 외친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책에서 세 명의 남자는 그 광경을 그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목 아래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나도 모르게 옷자락을 강하게 쥐어 잡아당겼다.

지금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광장이다. 나는 화형당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내가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세 사람을 향해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서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성력이 없는 성녀가 무슨 의미가 있는 존재일까.

책에서도 마지막까지 참고 참아 이벨리나의 옆에 있던 라트반은 그녀에게 더 이상 성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알자 미련 없이 몸을 돌렸었다.

물론, 지금의 라트반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두려움이 쉬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제 인생을 신을 섬기는 길에 바친 자이다.

기사단장직을 잃는 파면은 각오할지 몰라도 신전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파문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람. 그가 나에게 갖는 호감 중에 많은 부분은 그가 평생을 섬기고 따라야 할 존재에 대한 숭배의 감정이 섞여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슬란은 어떨까.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새끼이다. 정확히는 그 새끼를 품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태이다. 성력을 죄다 잃어버린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만약 아슬란과 다시 관계를 가지고, 그의 새끼를 품게 되면….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쩌면 화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욱 빨리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성력을 잃었다고 말하는 순간 아슬란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슬란은 대륙 전체에 제 마법을 펼쳤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얼마 후, 완성이 될 것이며, 완성이 된 순간 곧바로 사라진 성력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생각한 것은 성력의 행방이겠지만 이대로라면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성녀를 만나겠지.

그때도 그는 나에게 하늘을 약속할 수 있을까?

이제 생각은 레온을 향했다. 황태자인 그가 이 신전에 와서 성녀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대신전을 제국 아래에 두기 위함이다.

책 속에서 보았던 레온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레온의 모습도. 그나마 레온은 나를 쉽사리 놓으려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리라.

‘성녀가 아닌, 그저 평범한 여자라면 오히려 손을 쓰기가 더 쉽겠지.’

내가 아는 레온이라면… 아마도 그는 나를 어딘가에 숨겨 줄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저 이름 없는 여자로 지낼 수 있도록. 어찌 보면 라트반이나 아슬란보다는 좀 더 나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는 가장 위험한 결말이 될 수도 있다.

만약, 그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름 없는 여자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물론 지금의 세 사람이 나에게 영원을 약속할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쉽사리 믿을 수 없다. 이미 이전의 삶에서 한 번 겪었던 거짓말들이 생각났다.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 평생 너를 기억하겠다. 끝까지 책임지고 널 살리겠다.

부모가, 친구가, 의사가 했던 약속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었다. 차가운 감각이 정신을 일깨웠다.

‘당장은 말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짧으면 며칠, 길면 몇 주간의 시간이 나에게는 있다.

‘일단 카를의 일은 처리해야 해.’

카를의 죄를 밝히고 처분하는 일은 이미 시작됐고, 또한 끝내야 한다. 오로지 나를 위한 일만은 아니었다.

‘이리스가 대신전으로 오게 된 후도 생각을 해야 하니까.’

여기서 흐지부지 일을 대충 끝내고 만약 카를이 어떻게든 대신전에 남아 제 세력을 회복한다면, 이리스가 성녀가 된 후에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보았던 기억들을 생각해 보면 카를은 절대로 이벨리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끝내야겠어.’

그렇게 결심한 순간 얼마 전 카를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얼마나 든든했던가. 심지어 조금은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홀로 버텨야 할 뿐 그 누구에게도 이것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갑자기 이벨리나가 떠올랐다. 이벨리나도 이랬을까? 그녀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해결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생각했을까?

나는 이 세계에 와서, 이 몸을 가진 이후로 처음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

대신전의 벽을 따라 밤의 경비를 서는 기사들이 덜그럭거리는 갑옷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소소한 대화를 하며 걷던 그들은 성벽 위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경계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다행히 눈은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라트반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딘지 이상했다. 평소라면 그들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기척을 느끼고는 인사를 했을 라트반인데, 지금 그는 멍하니 어딘가를 보고 서 있을 뿐이다.

불러야 하나?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은 라트반의 모습에 기사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푸른빛의 덩어리가 빠르게 대신전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단장님!”

그 모습에 기사들은 놀라 라트반을 불렀다.

지금은 파면 신청을 해 둔 상태이기에 단장이라 불릴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그 빛 덩어리는 기사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마법과 달리 쓰임새가 한정되어 있는 성력이라지만 그래도 지난 오랜 시간 동안 대신전은 성력을 좀 더 다양하게 쓸 수 있도록 노력했었고 저것은 그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였다.

라트반은 빛 덩어리를 보자마자 곧바로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높은 성벽 아래를 상처 하나 없이 가볍게 뛰어내린 그는 곧바로 대신전의 중앙 광장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는 사이 그의 머리 위를 푸른 빛 덩어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광장 한가운데 내려앉은 빛 덩어리를 본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은 이것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떠올렸다.

1년 전, 변방에 대규모의 마물이 출현했을 때 그곳에 있던 상급 신관 한 명이 제 성력을 쥐어 짜내다시피 해서 만들어 대신전으로 보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이것 역시….

달려온 라트반이 빛 덩어리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대 마수 헥사. 트리온에 출몰.”

헥사라는 말에 누군가 성호를 그었다. 대신전에 기록된 수많은 마수 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흉포한 마수가 트리온이라는 지역에 나타난 것이다.

곧이어 푸른빛이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또 다른 성녀. 이리스.”

“이리스? 그것이 그 사특한 자의 이름이랍니까?”

노여움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다른 신관들이 한마디씩 제 분노를 더했다.

지금 회의실은 시장보다 더한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번에 아슬란이 마력을 썼을 때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곳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성력으로 만든 전언()傳言)이 뱉어 낸 몇 개 되지 않는 단어는 이 대신전을 뒤흔들기 충분한 무게가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또 다른 성녀.

과거 몇 번이고 세상에는 가짜 성녀가 나타났었다. 그들의 목적은 다양했다. 성녀를 사칭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자들부터 대신전의 힘과 명성을 손에 넣으려는 집단까지.

하지만 성녀의 성력은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기꾼들은 대신전의 신관들과 기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면, 도착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곤 했다. 그렇기에 이제 신관들은 그런 종류의 소문에는 그저 불쾌감을 드러낼 뿐, 특별히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성력으로 전언의 기술을 쓸 수 있는 정도가 되려면 어지간한 성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대신전에 있는 상급 신관들 중에서도 이것을 쓸 수 있는 자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아데크 신관이라고 했었나.’

이 전언을 보내온 아데크라는 사람은 오래전부터 변방으로 가 그곳에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신관이었다. 이벨리나의 기억을 살펴보니 그는 무척이나 강한 성력을 갖고 있는 자였으며 신실한 신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또 다른 성녀라는 말을 썼다. 그 말은 이미 그가 이리스의 성력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았다는 소리였고, 그녀의 성력에 거짓이 없음을 확인했다는 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리스가 갖고 있는 성력은 원래 이벨리나가 갖고 있던 성력이기 때문이다.

‘그건 네 것이 아니야.’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러다 흠칫 몸을 떨었다.

‘왜…?’

이벨리나의 성력이 사라지고 이리스가 성력을 얻게 되는 이 미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났는데, 왜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일까.

그러는 사이 신관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대화가 아닌 언쟁을 하려는 자들도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다 알아차렸다. 평소라면 신관들이 이렇게까지 시끄러워지기 전, 그들을 조용히 시킬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멍한 표정의 라트반이 서 있었다. 그는 이 소란스러움이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갑자기 뭔가를 억누르는 듯이 주먹을 쥐자 목에 핏발이 서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불안해하는 것처럼 팔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를 알고 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친해진 이후로 내가 그를 보았을 때,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돌아보면 라트반은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다는 듯 시선이 마주쳤었는데.

“라트반?”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내 쪽을 돌아보지 않는 그의 모습에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

겨우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한 순간,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피했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발아래가 꺼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의자의 팔걸이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식은땀이 흘렀다.

왜? 어째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라트반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내 앞 테이블에 놓여 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전언의 내용을 적은 종이의 밑에는 이것이 자신들이 들었던 말이 확실함을 증명하는 몇몇 신관들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라트반의 서명도 있었다.

또 다른 성녀. 이리스.

‘설마….’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직접 들었다 한들, 단지 그것만으로 라트반이 이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어젯밤 혼자 떨며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세계는 원래의 흐름으로 흘러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했던 생각이.

‘아직은 안 돼.’

내가 살아남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바꿀 생각은 없다. 성녀의 자리는 이리스에게 갈 것이고 라트반과 레온과 아슬란의 관심이 이리스를 향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왜 하필, 카를을 상대해야 하는 지금 이리스가 나타났단 말인가.

초조함과 불안함에 머리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점차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손끝이 저릿해지며 차가워졌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굳은 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것 같았다.

‘돌아가고 싶어.’

조용하고 따뜻한 곳에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푹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신관들은 떠들던 입을 다물고 재빨리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그럼 이제부터 어제 도착한 전언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마수 헥사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 이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헥사는 55년 전 북부 델루시 반도에 나타났던 마수로 형태는 사자와 비슷하나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기사단장이었던 헥토르 경이 그 마수의 한쪽 눈을 베어 멀게 하면서 다른 마수들과 구분이 가능해진 이후로 헥사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강력한 독을 쓰는 마수이며 그때 사상자가 천 명을 넘었던….”

진행을 맡은 신관이 마수 헥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그 마수가 나타났을 때 과거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을 이어 나갔다.

곧 설명이 끝나고 신관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제일 가까이에 있는 신전의 신관들을 모두 소집하여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곳의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어서 신전 기사단을 보내셔야 합니다.”

신전 기사단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외치고 말았다.

“안 됩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신관들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전 기사단을 보내야 한다는 신관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작은 마수라면 모를까 거대한 마수는 절대로 일반인들이나 어지간한 기사들이 상대할 수 없다. 극도로 훈련된 성력을 지니고 있는 기사들이 아닌 이상 거대 마수를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지금 신전 기사단을 보낼 순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라트반을 보낼 수 없었다.

소설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수를 상대하던 라트반이 이리스를 만나고. 그녀에게 끌리고. 그러다 완벽하게 성녀로 각성한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게다가 지금은 소설보다 더욱 빠르게 이리스가 성녀로서 각성을 한 상태다. 라트반은 헥사가 나타난 곳에 도착한 이리스가 행하는 기적들을 보며 진짜 성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성녀님, 하지만….”

“보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신관들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이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단순한 실망이 아니었다. 그 눈에는 익숙한 경멸이 스며 있었다. 내가 처음 이벨리나의 몸에 들어왔을 때 신관들이 나를 보았던 그 시선이었다.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지 알고 있다. 과거 이벨리나가 신전 기사단의 출동을 막아 많은 사람이 큰 피해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들의 시선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은 이벨리나가 했던 것과 똑같았다.

***

밤이 되어서야 나는 내가 원하던 고요함을 얻을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린 내 방의 침대 위에서 나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계속해서 입술을 씹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회의는 별 소득 없이 끝났다. 기나긴 이야기 끝에 결정된 것이라고는 라트반을 제외한 일부 기사단을 먼저 마수가 나타난 곳으로 보낸다는 것과 신관들을 보내는 것 정도였다.

마수에 대한 건은 일단 그 정도에서 끝났다. 그러다 신관들은 눈치를 보면서 그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언을 보낸 아데크 신관이 무엇인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그의 전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 말은 힘을 얻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이리스라는 성녀가 나타났다는 말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그 이리스라는 여자가 의심스러웠다면 아데크 신관은 가짜 성녀라고 말을 했겠지요!”

누군가 한 말이 가슴에 와서 박혔다. 가짜 성녀.

“…그건 나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예전에는 이벨리나가 아니었기에 가짜라 생각했다면 이제는 이벨리나이니 가짜인 것이다. 손으로 허벅지 위를 쓰다듬었다. 성녀에게서 성력이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회의가 끝난 후의 일이 생각났다. 라트반은 방 앞까지 나와 함께했으나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데려다주어 고맙다는 인사에도 형식적인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라트반이 왜 이러는 걸까? 정말로 전언의 말 때문에? 혹시 원래의 흐름대로 가기 위해서 그가 이리스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이리스라는 이름은 정작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 마수가 나타난 지역으로 기사단을 보내긴 보내야 하는데 라트반은 어떻게 하지? 그가 떠난 후에 카를을 상대하는 것에 문제는 없을까?

하나의 걱정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른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제 크기를 키웠다.

나는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속이 답답해지며 배가 아파 왔다. 생각해 보니 저녁을 먹지 않았던 것 같지만 어차피 지금은 물조차도 삼킬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정답일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왜 그러고 있어?”

서늘한 바람 덕분에 창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렸기에 아슬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와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아슬란.”

고개를 들자 아슬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나를 똑바로 바라봐 주는 그의 시선에 조금 안심이 되려는 순간 아슬란이 입을 열었다.

“마법이 완성되었어.”

그 말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그래, 당신이 잃어버린 그 성력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지. 게다가 그 근처에 꽤 강한 마수의 기운도 함께 느껴지더군. 그래서 일단 내가 그곳에 가 보려고 해. 대신전에 있으면 회복도 늦어지니 차라리 잠시 벗어나 빠르게 회복하고 오는 게 당신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말이야. 물론, 곧바로 돌아올 거야.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기사 놈이 당신을 지킬….”

그 순간 나는 아슬란의 옷을 붙잡았다.

“가지 말아요, 아슬란.”

내가 그를 붙잡자 아슬란은 놀란 얼굴로 한참이나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허리를 숙이더니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설마 걱정을 해 주는 건가.”

“…….”

어딘지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 한쪽이 따끔했다. 걱정? 걱정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리스의 소식이 전해진 순간부터 나는 오직 내 걱정만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채, 기뻐하는 것 같은 아슬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아슬란은 그런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내 손을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군. 살면서 누군가의 걱정 따위 받아 본 적은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슬란은 웃고 있었다.

“큰 마법 한 번에 힘을 잃은 것처럼 보여서 그런 건가?”

“…그래요.”

사라진 성력의 행방을 찾기 위해, 대륙 전체에 마법을 한 번 사용한 이후로 아슬란은 유독 피곤한 모습을 보였다. 오죽하면 내 옆에 라트반과 레온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놔두었겠는가.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대가 알아 두었으면 하니 말해 두겠어. 이 정도의 마력 손실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아니야. 여기가 대신전만 아니었다면 이미 회복하고도 남았지. 사실, 대신전이라고 해도 회복 못 할 것도 없긴 해. 그저 내가 원래의 모습으로 한번 돌아가면 끝날 일이니까. 하지만….”

아슬란은 제 얼굴에 비벼 대던 내 손의 끝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 꽤 오래 마수의 모습을 유지해야 하거든. 그렇게 되면 한동안 당신을 만지기가 힘들 것 같아서 말이야. 그 상태로는 당신의 성력과 닿는 순간 위험해져. 그나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해야 그대를 만질 수도 있고 옆에 있을 수 있지.”

그의 말에 어쩐지 목이 메었다. 대신전으로 온 뒤 벌어진 많은 상황들은 결코 아슬란에게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그의 힘에 한계가 있기에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손끝을 입술로 지분거리고 있는 그를 보았다. 자존심도 굽혀 가며 그저 옆에 있고 싶어서 모든 걸 참고 있었다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게다가….’

그가 아프지 않게 살짝 물어 대는 손에 집중하는 바람에 어느새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붙잡아 끌어안은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대로 힘주어 당겨 안고 입을 맞추며 몸을 섞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슬란은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참고 있었다.

아슬란은 참을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지만 이 몸은 그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기에 그는 계약의 이행을 위하여 나를 안고 싶으면 안을 수 있었다. 설사 내가 거부한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힘도 있었고.

“…역시 이상하군.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움직이지 않고 빤히 그를 바라보자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아슬란은 나를 안아 들더니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나를 내려놓은 후 마치 무릎을 꿇듯이 내 앞에 앉았다. 그다음 아슬란은 침대 끝에 걸터앉은 내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었지만 그저 기억이 사라진 것에 대한 불안함이라고 생각했지.”

“무슨 말….”

“그 표정 말이야. 계속해서 뭔가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그 표정.”

“……!”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는지 아슬란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두 놈이 왜 그렇게 그대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는지 몰랐던 모양이군.”

아슬란이 나에게 손을 뻗었다. 마치 애원하는 듯한 그의 손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놈들이나 나나 자신이 있었지. 그대를 향해 구애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약속하면 한 번이라도 그대가 더 편하게 웃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럴수록 이상하게 그대는 더 불안해해.”

아슬란은 손에 잡힌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상한 일이지. 이제는 내 손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지고 또 받아들였으면서도 그대는 언제나 어딘가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봐. 마치 내가 그대를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

“나에게만 그랬으면 차라리 그러려니 했을 거야. 일부분이긴 하지만 내 마수화된 몸을 보았으니 두려워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 하지만 정작 그대는 그런 것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슬란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눈이 바로 앞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지?”

“…….”

아슬란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아니 당신들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미래가 두렵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쓴웃음과 함께 짧은 한숨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대답이 없을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곧 돌아올 거야. 그곳에 가서 당신의 성력이 어떤 형태로 머무는지 보고… 새로이 나타난 마수도 좀 짓밟고 와야겠어. 그놈 때문에 대신전이 시끌시끌한 것 같으니 말이야. 그러니 잠시 다녀올 동안 이곳에 가만히 있어. 그동안은 그 검은 머리 놈이 그대를 지키겠지.”

말을 하다 진심으로 짜증 난다는 듯 아슬란은 이를 갈았다.

“나는 그놈이 싫어. 그래도 그놈이 그대 옆에 붙어 있는 것을 참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야.”

아슬란이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은 그대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을 버릴 놈이니까.”

***

카를은 의자에 앉은 채 문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생활에 바뀐 것은 없었다. 하루 두 번 식사를 가져오는 신관 외에는 다른 자들과 접촉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방 안에는 검사를 받은 성서 외에 다른 책들이나 물건은 아예 들일 수도 없다. 알릭이 다시 들어오지 않을까, 그러면 그를 놀리는 재미라도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곧 사그라들었다. 알릭은 그날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심심하지는 않았다. 아니, 심심할 수 없었다. 매분, 매초 카를은 들끓는 제 분노를 다스리느라 노력해야 했다.

성녀를 향한 분노의 끝은 언제나 과거를 떠올리는 것으로 끝났다. 과거 그녀가 보여 주었던 굴욕적인 모습을 떠올리고 나서야 카를은 저열한 만족을 느끼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욕망이 그의 안에 떠올랐다.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욕망이.

‘하지만 이래서야.’

여전히 하루 두 번 식사를 가져오는 신관 외에는 누군가와 접촉할 수 없었다. 밖에 서서 그를 감시하고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열릴 때 잠시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카를은 저를 향한 호감이 티끌만큼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라트반이 저와 접촉한 적이 없는 새로운 기사들로 배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줄어들고 있다고는 해도 지치지 않고 면회를 신청하는 신관들은 있었다. 하지만 어제부터 갑자기 그 신관들 중 절반에 가까운 수가 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포섭된 건가?’

하지만 누가? 성녀일 리는 없다. 카를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관리하는 만큼 신관들이 성녀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노력했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고립되어야 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도록 말이다.

성녀가 자신과의 일을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있었다. 성녀는 알릭이 뛰쳐나간 이후 자신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빠르게 자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먼저 다른 신관들에게 말해 두었다. 성녀가 최근 자신에게 불만이 많다고. 가끔은 당혹스러운 거짓을 입에 올린다고.

덕분에 성녀가 자신에 대한 일을 말하려 다른 신관들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도 큰 용기를 낸 그녀의 말은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카를을 음해하려는 거짓으로 치부되기 마련이었다.

“카를 신관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곤란한 웃음과 함께 나오는 그 말에 성녀는 모든 의지를 잃었을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오래 버텼단 말이지.’

자살할 수도 없으니 살아는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성녀는 기행을 저지를 뿐, 완전히 미치지는 않았다. 카를은 제가 떠나 있던 시간 동안 성녀가 제 속박을 풀기 위한 무언가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를이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교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움직임이 여느 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평소라면 짧은 인사를 하고 곧바로 교대했을 기사들이 여전히 방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카를은 기척을 죽이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으로 다가갔다. 문틈 사이로 기사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또 다른 성녀라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럴 수 없기에 이렇게 난리가 난 거 아니겠나. 성녀는 한 번에 오직 한 명뿐이야. 아무래도 아데크 신관께서 뭔가 큰 오해를 한 것이 분명해. 그래서 그 이리스라는 여자에 대해 대신전에서 사람을 보내 알아보기는 한다는군. 일단 그쪽으로 갈 기사들이 곧 정해진다고 하니 다들 준비 단단히 해 두도록. 마수 헥사에 대한 것도 숙지해 두고.”

“알겠습니다.”

곧 문 앞을 지키던 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새로 온 자들이 자신의 자리에 섰다. 하지만 카를의 귀에는 그런 소리 따위는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성녀.

그 말이 벼락처럼 카를의 머릿속에 울렸다.

오래전 자국을 만들었을 때, 그는 두 가지를 목표로 삼았다. 성녀를 조종하는 것과 그녀의 성력을 제가 받는 것을 말이다.

첫 번째 목표는 성공했다. 하지만 두 번째 목표는 처참하리만큼 실패하고 말았다. 성녀에게서 빼앗은 성력은 원래 그에게 머물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성력은 카를의 몸에 아주 잠시 머물렀다. 그가 넘치는 힘으로 제 다리를 똑바로 서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도 잠시, 성력은 곧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듯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카를은 다시 미친 듯이 자국을 발동시켰다. 다시, 한 번만 더, 성녀의 성력이 자신에게 깃들기를 바라며. 하지만 두 번 다시 성력이 그의 몸에 깃드는 일은 없었다.

분명 성녀의 성력은 줄어들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성력은 어디로 갔을까.

카를은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성녀에게서 사라진 성력은 분명 또 다른 몸을 찾아 깃든 것이다.

“이리스….”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또 다른 성녀. 분명 이벨리나의 사라진 힘을 품고 있을 여자.

카를은 몸을 일으켰다. 휘청이는 몸을 가누는 그의 얼굴은 기괴할 정도로 일그러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카를은 문을 거세게 두드리며 외쳤다.

“신관들을 불러 주십시오! 내 죄를 인정하고 그에 따른 벌을 받을 것이니!”

아슬란이 성녀의 처소에 찾아간 시각, 레온은 긴 한숨을 내쉬며 제 방의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하아….”

참아 보려 해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피곤한 것도 있지만 답답한 마음과 짜증이 더욱 컸다.

또 다른 성녀.

낮에 들었던 그 소식이 레온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사실 그는 이미 알고 있던 소식이었다. 변방에서 이리스라는 여자가 성녀 소리를 듣고 있다고 했던가. 그 후로 두어 번 정도 더 보고가 들어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곧 자취를 감추었다는 내용일 뿐, 별다른 것은 없었기에 그저 변방에서 흔히 있는 성녀 사칭 건이라 생각하고 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파문당하고 신전을 떠난 신관이 조잡한 술수를 부리는 일은 흔하지는 않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다. 이리스라는 그 여자 역시 그런 신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파문당한 신관과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이려나.’

레온은 그런 조합을 생각해 보다 혀를 찼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지 몰라도 대신전이 그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미약한 존재들은 대신전이 움직이는 순간 곧바로 바람처럼 쓸려 나가겠지. 그들은 아주 좋은 사냥감이 될 것이다.

레온은 이리스에 대한 생각을 거두고 당장 상대해야 하는 적을 떠올렸다.

“…개 같은 놈. 얼마나 오랜 시간 대신전을 휘젓고 다닌 거지.”

물론 그가 말하는 개 같은 놈은 카를이었다.

지난 며칠간 레온은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최대한 많은 신관들을 만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들을 떠봤으며 그중에 흔들릴 가능성이 있는 신관들과는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관들은 그가 상대하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굳은 믿음을 갖고 있으며 세상과 어느 정도는 떨어진 채, 자신들만의 규율을 강하게 지켜 나가는 사람들.

‘이만큼 꼬드기기 쉬운 존재들도 없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이런 사람들일수록 작업은 쉽다. 자신들의 선택이 신이 인도하는 길이라 생각하며 설사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것조차 신께서 주신 시련이라 생각하기에 묵묵히 순응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러니 그놈이 이리도 난리를 칠 수 있었겠지만.’

신관들과 이야기하면서 레온은 카를이 제가 가진 약점을 얼마나 잘 이용했는지를 보았다. 카를은 제 몸의 장애를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다.

레온이 만난 신관들은 하나같이 카를에 대해서 안쓰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관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흔히 갖는 착각이었다. 약자가 선할 것이라는 착각.

심지어 그는 모두에게 헌신적인 신관의 얼굴까지 하고 있었으니 그 효과가 몇 배로 강했을 것이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떨쳐 낸 것 같은데.’

아슬란과 라트반이 합작해서 뒤집어씌운 누명 덕분에 신관들은 크게 동요했다. 덕분에 레온은 더욱 쉽게 신관들을 뒤흔들 수 있었다. 이대로 카를이 계속 구금되어 있는 한, 이 일은 어렵지 않게 끝날 것이다.

“어차피 그놈이 당장 그곳을 나올 일은 없고….”

신관들은 마력과 관련한 추문이 따라붙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고 끔찍한 일이라 여겼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제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소리와도 같다. 그래서 카를 역시 저리 버티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대신전에는 카를에게 헌신적인 신관들이 많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더 큰 사건이 하나 더 필요할 것이다.

그놈에게 무슨 짓을 더 해야 할까, 고민하다 레온은 다시 혀를 찼다.

‘여기가 황궁이었으면 일도 아니었을 문제들인데.’

대신전은 이 대륙에서 거의 유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제 권력이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이다. 물론 제국의 황태자이기에 다른 자들보다 좀 더 대접을 받는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신전의 호의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레온의 행동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황태자 위에 대신전의 규율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이 대신전에서 좀 더 그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녀를 좀 더 편하게 도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레온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제가 대신전에, 정확히는 성녀의 일에 영향력을 가질 방법이 있긴 했었다. 문제라면 그 방법은 성녀의 동의를 받아야만 실행할 수 있고 그녀가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게 분명한 것이다. 아니, 영원히 하지 않을지도.

“결혼이라….”

레온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방으로 다가오는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전하!”

노크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온은 잠시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행복한 상상 좀 하려 했더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들어와. 무슨 일인… 젠장.”

들어온 부관의 손에 들린 검을 보는 순간 레온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부관의 손에는 장식이 달린 아름다운 검 하나가 천에 싸여 들려 있었다. 대신전으로 올 때, 그가 황궁에 놔두고 온 검이었으며 제국 기사단의 단장들에게만 주어지는 검이기도 했다.

이것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제국에서 그에게 기사단장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레온은 곧바로 황궁이 있는 쪽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 몸을 돌려 부관이 내미는 검을 받아 들었다.

“몇 기사단이 이곳으로 온 거지? 무슨 일이고?”

“폐하께서 3기사단을 보내셨습니다. 현재 대신전 근처의 람즈렌이라는 마을 근처에 주둔 중입니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페르벤의 기사단과 대치 중에 있습니다.”

“페르벤이라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레온은 그제야 어찌 된 일인지를 알아차렸다. 페르벤은 1년 전, 그가 정복한 왕국의 이름이었다. 페르벤의 국왕은 레온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을 했다. 하지만 페르벤 국왕은 물론 그 뒤에서 눈물을 흘리는 기사들의 눈빛에는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신전으로 온 다음 그가 정체를 밝힌 그날 밤, 페르벤의 기사들이 야심한 시각에 그의 방을 습격했다. 날카로운 단검과 스치기만 해도 몇 분 내로 목숨을 잃는 독을 들고.

다음 날 아침,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의 페르벤 기사들을 대신전에 넘기면서 레온은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더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것이 지금 터진 것이다.

“페르벤의 병력은?”

“팔백입니다.”

“3기사단의 두 배군.”

수십만의 병사들이 충돌하는 전쟁을 생각하면 팔백은 별 것 아닌 숫자라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 병사가 아니다. 훈련된 기사 한 명은 수십 명의 일반 병사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 기사 팔백 명이라.

“신전 기사단 때문에 대신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도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들어오면 골치 아픈 일이지.”

그렇기에 제국에서는 3기사단을 보냈을 것이다. 대신전 안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전에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으로 말이다.

“기왕 보내실 것, 좀 더 많은 수였으면 좋았을 텐데.”

페르벤은 팔백. 제국 기사단은 사백.

숫자를 헤아리고 람즈렌의 지형을 떠올리던 레온은 검을 허리에 찼다.

“이틀 정도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페르벤의 기사들이 들었으면 당장 노성을 질렀을 말이었다. 두 배에 달하는 기사단을 상대하는 일이 마치 귀찮은 파리 떼를 쫓는 것과 다름없다는 듯한 말투였으니까.

“아.”

방을 나서려던 레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더니 골치 아프다는 듯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전하?”

“먼저 준비해. 곧 나갈 테니.”

그렇게 말한 다음 레온은 책상으로 달려가 펜을 집었다. 조금 망설이는 듯했던 그의 손이 곧 빠르게 움직였다. 종이 위에 짧은 문장이 쓰여졌다.

잠시 대신전을 떠납니다. 길어도 나흘 안에 돌아올 겁니다.

무슨 일로 떠나는지 적을까 하다가 레온은 손을 멈췄다. 이미 카를의 일로 정신이 없는 데다가 또 다른 성녀의 일로 심란할 이벨리나였다. 거기에 괜히 제 일을 더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성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이곳에는 라트반이 남아 있다. 그리고 카를은 당분간 제 방을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제 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오는 것이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전하!”

밖에서 그를 부르는 부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밖에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모든 출발 준비를 마쳤음이 분명했다. 레온은 재빨리 짧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밖으로 나오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부관이 왜 이렇게 미적거리냐는 듯한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레온은 편지 봉투를 부관에게 넘겼다.

“지금 당장 성녀의 처소로 가져가. 그리고 성녀께서 직접 받으시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이곳을 출발하도록 해.”

“네? 하지만….”

“시끄러워. 불만은 나중에 들을 테니 어서 출발하도록,”

단호한 레온의 말에 부관은 고개를 숙이고는 곧 복도를 달려갔다. 그런 부관의 뒷모습을 보다 레온 역시 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성녀에게 직접 말을 하고 떠나고 싶었지만 이것은 촌각을 다투는 문제였다. 제가 도착하기 전 두 기사단이 충돌하게 된다면 제국 기사단의 피해가 훨씬 커질 것이며 더욱 시간을 잡아먹게 될 것이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말 위에 빠르게 올라탔다. 옆구리를 지름과 동시에 고삐를 잡아당기자 거센 말 울음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렸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에 익숙해질 때쯤, 레온은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성녀의 처소가 보였다. 달리는 말 위에서 레온은 태어나 처음으로 진심을 담은 성호를 그었다.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성호를 그은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마음에 들진 않지만 라트반이 당신을 무사히 지켜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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