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48)

나는 신관들이 오가는 복도와 연결된 첫 번째 문을 열면서 방 앞을 지키는 신관들에게 명령했다.

“오늘 피곤한 일이 많아 푹 쉬고 싶으니 라트반 경의 방문 외에는 모두 물리도록 해 주세요. 되도록 안쪽에 가까이 오는 일도 없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성녀님.”

대답을 들은 나는 첫 번째 문을 닫았다. 신관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안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여러 개의 문을 급하게 벌컥 열며 달리듯이 안으로 들어간 나는 드디어 마지막 문을 연 순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아슬란, 성공했어요!”

내 외침에 침대에 누워 있던 아슬란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 나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약한 떨림이 멈추지 않는 것이 보였다. 두려움이나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이게 바로 무언가를 성공시켰을 때 느낀다는 희열인 것이다.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경험해 본 것은 처음이라 나는 몇 번이고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방을 이리저리 걸었다. 그러다 소파 위에 높인 쿠션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제야 겨우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여기까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것은 일그러진 카를의 얼굴과 그에게서 물러서는 신관들. 그리고 이곳은 이제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했던 라트반의 목소리뿐이었다.

“그게 그렇게 기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아슬란의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사실 이 모든 것은 아슬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벽에 붙었다는 투서는 그가 마법으로 적당히 붙여 둔 것이었으며 카를의 숙소에서 나온 나무와 마물 역시 전부 아슬란의 작품이었다.

“그 마수 어떻게 한 거예요? 정말로 카를이 주인인 것처럼 고개를 숙였어요!”

나무 상자 안에서 마수가 나타났을 때, 내가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어제 아슬란이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가둔 나무 상자 역시 보여 주었고. 하지만 그가 나에게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남아 있는 마력은 별것 아니라고 했는데 엄청나게 크게 솟구쳤어요. 그런 것치고는 성력에 너무 쉽게… 설마 그것도 전부 당신이 일부러 그렇게 보이도록 한 건가요?”

마력이 성력에 눌려 사라지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내 성력이 압도적이고 위대하게 보였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것처럼 말이다.

“당연하지.”

아슬란은 턱을 괴고 그런 걸 왜 굳이 묻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어쨌든 생각만큼… 아니, 생각 이상으로 잘되었어요. 신관들이 다른 숙소로 안내되는 카를에게 다가가지도 않았고 남은 신관들의 분위기도 좋지 못해요. 아니라고는 하지만 다들 대신전에서 마수와 마력을 본 충격 탓인지 여기저기서 모두 이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당연하게도 이 일은 처음부터 전부 계획된 것이었다.

당한 만큼은 돌려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카를 신관의 방식으로 똑같이 그에게 돌려주었다.

곤란한 상황을 만들고 그것을 모두가 보도록.

당연히 그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은 신관이라는 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신을 섬기는 신관의 몸으로 가장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마력이었다. 성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세상을 안정시키는 힘이며 마력은 그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세계의 끔찍한 존재들을 구성하는 힘이니까.

하지만 가끔 성력의 온화함과는 다른 마력의 거친 강함에 이끌린 신관들이 나타나고는 했다. 대신전의 규율은 그런 신관들을 그 어떤 중죄인보다 엄격하게 처벌했다. 차라리 색을 탐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이 낫지, 한 번이라도 이런 마력과 관련한 구설수에 얽히면 사실상 그 신관은 신관으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대신관 후보 자격은 박탈이지.’

라트반은 신전 기사들에게 카를을 정중히 안내하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혐의에 대해 확실히 수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마치 이 일에 대해 이미 확실한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말이다.

게다가 라트반은 카를이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뜨고 나서는 마치 혼잣말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렇게 사람을 따르는 마수라니… 도대체 어떻게 길들인 것인지 모르겠군.”

혼잣말이라고는 해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는 충분히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하나둘씩 신관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셀 수 없는 수많은 마수와 싸워 온 라트반이다. 그렇기에 대신전의 그 누구보다도 마수에 대해서는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그였다. 그런 그가 당황스러워할 정도로 길들여진 마수. 게다가 그 마수가 누구에게 복종하는지는 너무도 확실하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왜 그러냐는 듯 그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하아….”

곧바로 한숨이 나왔다. 사실 카를에게 뒤집어씌운 죄는 지금 내가 저지른 죄다.

‘물론 시작이야 이벨리나가 한 것이지만….’

작은 마수 한 마리를 어깨에 얹은 것만으로도 카를의 명성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마수 한 마리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가장 강대한 마수가 지금 내 침대 위에 앉아 있다. 심지어 그 마수와 몸까지 섞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만약 나와 아슬란의 관계가 알려지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라트반과 레온이 얼마나 엄청난 사실을 눈감아 주고 있는지 다시 실감했기 때문이다. 또 아슬란이 정말로 얌전히 있다는 것도 느꼈고.

쿠션을 끌어안은 채 소름이 돋은 팔을 쓸며 이벨리나를 떠올렸다.

아슬란을 불러들였을 때, 이벨리나는 라트반과 레온이 이런 도움을 줄 것이라 예상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슬란을 끌어들였다. 신의 성소에 악마와 같은 존재를 끌어들인 성녀라니. 다시금 아슬란이 보여 줬던 석판에서 아직 다 적지 못했던 이벨리나의 칸이 생각났다.

단지 카를을 상대하기 위해서 아슬란을 불러들였을 거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카를은 내가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돌아올 수 있을리도 없는 자였다. 물론 이벨리나가 첫 번째로 적었던 것처럼 자국을 없애기 위해서 부른 것을 안다. 하지만 아슬란을 부른 이유가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카를도 그렇고 이벨리나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건 뭐였던 거지?’

물어본다고 해서 의식 속에 잠겨 있을 이벨리나가 대답해 줄 리가 없었다. 그때 아슬란이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지?”

그 말에 나는 생각하느라 구겨진 인상을 황급히 풀며 대답했다.

“고마워서요.”

진심이다. 지금 이 순간 아슬란의 뒤에 후광이 보일 정도로 그가 도와준 것들이 고마웠다. 물론 아슬란뿐만이 아니라 라트반도, 레온도 도와주긴 했지만 이번 일에 아슬란이 가장 수고한 것은 두 사람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아슬란은 내 대답에 조금 얼굴을 찌푸리더니 내가 끌어안은 쿠션을 노려보았다.

“널 도와준 건 그 솜덩어리가 아닐 텐데.”

그의 말에 나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그에게 보란 듯이 품에 안았던 쿠션을 소파 위로 휙 던진 다음 그의 옆으로 다가가 팔을 끌어안았다. 비단과 비슷한 재질의 그의 옷 아래 느껴지는 그의 팔이 움찔 굳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아슬란.”

“…….”

아슬란은 제 도움의 대가로 고맙다고 말해 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하루 내내 그에게 수백, 수천 번도 더 말해 줄 수 있었다.

“진심이에요. 살면서 이렇게 뭔가를 성공한 건 처음이에요.”

아직 내 흥분은 다 가라앉지 않았다. 그 쓰임새가 한정된 성력과 달리 마력은 많은 것들이 가능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간단하게 계획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니.’

투서를 붙이고, 마력을 상자 안에 가두고, 마수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보란 듯이 마력이 성력에 눌려 사라지는 것까지 연출했다.

‘이쯤 되면 만능에 가까운 것 아니야?’

왜 많은 사람들이 배척받는 것을 각오하면서도 마법사의 길을 걷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토록 편한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공격이 가능하니 많은 왕국들이 지탄을 받는다 해도 필사적으로 마법사를 확보하려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나도 마법을 쓸 수 있을까?’

들뜬 기분 탓에 나는 곧바로 아슬란에게 물었다.

“아슬란, 나도 마법을 쓸 수 있을까요?”

그런 내 질문에 아슬란은 세상 최고의 헛소리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대가 마법을? 어떻게?”

“어떻게라니….”

“그대 안에 있는 성력이 마력을 받아들일 것 같아? 지금 내가 가만히 있으니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대가 손을 대기만 해도 하급 마족들은 그대로 튕겨 나갈 거야.”

거기까지 말한 아슬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입가에 어딘지 심술궂은 웃음을 지으며 그는 무릎 위에 마주 보게 한 자세로 나를 앉히더니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얇은 천 너머로 가슴과 가슴이 닿자 인간에 비해 훨씬 느린 그의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허리를 잡았던 그의 손이 어느새 예복 사이로 파고 들어왔다.

“아슬란. 자, 잠깐만… 으응!”

서늘한 손이 가슴 위를 맴돌다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계속해서 즐기듯 가슴의 끝을 어루만지는 손길 때문이었을까, 아슬란은 어느새 솟아오른 끝을 손가락으로 잡아 비볐다.

“으, 응! 그, 그렇게 잡으면…!”

한동안 이런 자극 없이 시간을 보냈던 탓일까.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에 빠르게 반응했다. 계속되는 아슬란의 손장난에 숨이 빠르게 거칠어졌다.

허리를 들썩이며 벗어나 볼까 했지만 아슬란은 다른 팔로 단단히 내 허리를 휘감았다. 이제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팔인데도 어쩐지 거대한 짐승의 발에 감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몸을 움직이다 나는 그냥 힘을 풀고 아슬란의 가슴에 기대었다. 어차피 내가 벗어나려 할수록 그가 놓아주지 않을 것은 분명했으니까.

그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조금은 짓궂게 가슴을 희롱하던 그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제 것처럼 멋대로 가슴을 주무르며 즐기는 것 같던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하아….”

잠시 숨을 돌리려고 할 때, 아슬란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품을 수 있는 마력은 오직 하나뿐이야.”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아슬란은 살짝 몸을 떼더니 내 예복을 끌어 내렸다. 옷이 힘없이 떨어지고 드러난 피부에 서늘한 공기가 닿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아슬란은 그런 내 몸을 쓸어 만지다 손가락을 세웠다. 납작한 내 배 위에 그의 손가락이 크게 원을 덧그렸다.

“이곳에, 오직 내 것만.”

피부 위를 닿을 듯 말 듯 스치고 지나가는 손가락의 느낌에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욱 숨이 차올랐다. 게다가 내가 품을 수 있는 하나뿐인 마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자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숨이 거칠어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내 다리 사이에 당장이라도 찢고 들어올 듯이 흉흉하게 솟아오른 그의 것이 느껴졌다. 그와 단둘이 남겨졌을 때 어렴풋이 이런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천 위로 선연하게 닿아 오는 그의 것에 놀란 내 몸이 다시 들썩였다.

“…일부러 이러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러자 아슬란이 필사적으로 참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내 움직임이 그에게서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극만 한 것 같았다. 그는 배 위를 지분거리던 손을 거두고는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천 너머로도 그 위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그의 아래가 꾹 맞닿아 아래를 눌러 왔다. 그 모습에 어쩐지 몸을 섞을 때보다 더 민망해진 내가 고개를 돌려 버리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옷을 입고 있기에 그의 성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것을 받아들이기 직전처럼 잔뜩 몸에 힘이 들어갔다.

옷이 문질러져 사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방을 울렸다. 아래를 눌러 대는 그의 것이 점점 더 커져 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붉은 눈이 위험한 빛을 띠었다. 이대로라면 당장이라도 옷을 찢고 아침까지 그가 날 놓아주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기에 나는 황급히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그래도 마법을 배워 보고 싶어요!”

거의 외침에 가까운 내 목소리에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래도 내가 지금 이 이상을 하고 싶지 않음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더니 한참 후에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 성력이 완전히 사라지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성녀인 그대에게 그럴 일이 있을 리가 있나.”

성력이 완전히 사라지면….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다행히 그 순간 아슬란이 내 목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덕분에 나는 내 놀라움을 그의 행동 탓인 것처럼 숨길 수가 있었다. 아슬란은 살짝 문 곳을 입술로 지분거리더니 물었다.

“왜 자꾸 마법에 관심을 갖는 거지?”

“그냥… 배워 두면 무척이나 편리하고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사실이었다. 미래에 내가 성력을 다 잃었을 때, 마법을 쓸 수 있으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슬란이 아니더라도 혹시 마법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는데.’

생각에 잠겨 있자 그가 다시 물었다.

“마법으로 뭘 하고 싶은 건데?”

그의 질문에 뭐라 대답할 것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그에게 나중에 내 성력이 사라질 텐데 그때 도움이 될 것 같다고는 말할 수 없고.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던 내 눈에 석양이 내리고 있는 창밖의 하늘이 보였다.

“어… 당신처럼 하늘도 날아 보고 싶고….”

언젠가 아슬란에게 왜 굳이 창문으로 들어오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자신은 하늘에 떠 있는 것이 편하다고 했었다. 물론 사람들에게 모습은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게 그렇게 해 보고 싶었나?”

내 대답에 아슬란은 조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더니 곧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나에게 말을 해 주지 그랬어.”

다음 순간 아슬란이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상태였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시야가 차단되었기에 다른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단단한 그의 가슴과 바람에 묻어오는 먼 산의 향기와도 같은 그의 체향이었다. 그다음에는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거친 바람과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아찔한 낙하감이었다.

“……!”

심장을 토해 낼 것 같은 감각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떨어지고 있다.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살고자 하는 본능에 나는 필사적으로 아슬란을 끌어안았다. 바람에 미친 듯이 옷이 펄럭이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도대체 아슬란이 뭘 하는 거지? 왜 이러는 걸까?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온몸으로 받아 내던 낙하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괜찮아, 얼굴 좀 들어 봐.”

여전히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 사이로 다정한 아슬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쉽사리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런 내가 안타깝다는 듯, 그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한 팔로 더욱 힘주어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다른 손이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달래듯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느릿한 그의 심장 고동이 생각나는 그 두드림에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탓에 저릿할 정도로 굳었던 몸이 천천히 펴졌다. 슬쩍 얼굴을 들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왜 이런 짓을 한 거냐는 내 원망 어린 시선을 알아차린 것일까. 아슬란은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고개 돌려 봐, 당신이 보고 싶어 하던 것이니까.”

“도대체 뭐가… 아….”

그의 말대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다시 말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는 대륙 전체에 빛을 뿌리며 사라지는 태양이 있었다. ‘타오른다’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짙고 강렬한 붉은색이 대륙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그 장엄하고 압도적인 광경에 나는 숨 하나조차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푸르기만 한 하늘이 아니었다. 붉고, 노랗고, 푸르른 빛이 층을 이루며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의 반대편에는 작은 별빛을 담은 검푸른 밤의 하늘이 또 다른 색을 몰아오고 있다. 모두 하늘의 색이었다.

나는 아슬란을 붙잡은 채 멍하니 내 머리 위와 발아래 펼쳐져 있는 자연의 위대함을 보았다.

그저 책 속의 세계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하고 경이로는 세상이.

그 아래로 까마득한 곳에 대신전이 보였다. 땅에 있을 때는 한눈에 담을 수 없었던 거대한 공간도 하늘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그저 손톱보다 조금 더 큰 흰색의 자국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저 안에서만 있었던 거구나.’

나가 보았다고 해도 단검을 찾으러 나갔던 것뿐이다. 그때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 가득했는데, 저 지평선 너머에는 또 얼마나 새로운 것들이 있을까.

“어때?”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나에게 아슬란이 물었다. 빛이 퍼지는 지평선과 땅 위에 인간들의 흔적을 살펴보던 나는 어쩐지 목이 메어 대답했다.

“…부러워요.”

“응?”

생각하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가 잠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부러워요. 당신은 매일… 이런 걸 볼 수 있잖아요. 매일 아침에, 매일 저녁마다 항상…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슬란이 부러웠다. 무척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있을 그였다. 아슬란은 그 시간 동안 언제나 이런 것을 보아 왔단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부러웠다. 아무런 걱정 없이 원하는 곳을 가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살 수 있는 그가.

저물어 가는 태양을 보고 있던 내 눈이 붉어졌다. 눈부신 태양의 빛과 어지러운 바람 때문이라 탓하고 싶지만 그런 것 때문이 아님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장엄한 아름다움 앞에서 결국 갖는 것이 질투의 감정이라니.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 가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광경이다. 그러니 단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슬란의 손이 내 눈을 가렸다. 그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언제나처럼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리지 말아요.”

조금 화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슬란은 여전히 내 눈을 가린 손을 떼지 않았다.

“하지 말라니까요.”

결국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태양은 매 순간 다른 색을 만들어 내며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데,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놓친다는 사실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왜 이래요?”

결국은 짜증 섞인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자 아슬란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건 내가 물을 말이야. 도대체 왜 이렇게 초조해하는 거야?”

“그거야 지금이 아니면 못 보니까요. 당신이야 매일 보니 알 수 없겠지만 나는….”

“그대도 매일 볼 수 있어.”

“네? 어떻게…?”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슬란은 그제야 내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려 주었다. 석양빛을 받은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태양을 담은 붉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잊지 마, 그대는 나를 가졌어. 그러니 내가 가진 모든 것 또한 그대의 것이야. 내가 누리는 것은 그대도 누릴 수 있지.”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원하는 때 언제나 그대는 이 하늘을 가질 수 있어.”

아슬란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평선 너머로 잠기기 직전의 태양이 그 어느 때 보다 강렬한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그 풍경을 아슬란의 품속에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어쩐지 이 하늘을 손에 넣은 것 같았다.

***

“흐음….”

레온은 제 손에 들려 있는 편지를 바라보았다. 온갖 화려한 장식이 그려져 있는 그 편지는 누가 보아도 대단한 자가 보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래야 마땅한 편지였다. 편지의 발신인은 그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황제였으니까.

레온은 이 편지가 제 손에 들어오기까지 몇 명이나 이것을 훔쳐보았을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보안이 철통같다 하더라도 열지 못할 자물쇠가 없듯 그것은 뚫리기 마련이다. 염탐꾼은 황제의 옆에 있을 수도 있고 전령 중에 있을 수도 있으며 제 옆에 있을 수도 있다.

누구도 믿지 말아라. 그것이 황제가 그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이었으며 또한 황제의 가장 큰 가르침이기도 했다.

레온은 그런 제 아버지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솔직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을 낳은 채, 아직도 칩거 중인 황후의 앞에서만큼은 황제는 진솔한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그게 아름다운 꼴은 아니지만.’

솔직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황후에게 빠져 버린 황제는 그녀의 약혼자의 목을 자른 후, 그녀를 제 옆자리에 앉혔다. 그 사랑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황제는 한 달에 한 번,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궁전에 홀로 지내는 황후를 찾아간다. 사람들은 첩 하나 들이지 않으며 여전히 황후를 찾는 황제의 모습을 칭송하며 그 사랑을 받는 황후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레온은 단 한 사람만이 그 사랑에 저주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용케 자살은 안 하신단 말이지.”

황제가 찾아올 때마다 비명을 지르거나 울면서 도망가려 하던 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 레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행이면 다행이랄까, 어머니는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태어난 것에 고마워했다. 황후는 황제의 시선을 자신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이든 기뻐할 것이다. 레온이 태어나고 그가 자라는 동안 황제는 많은 시간을 제 아들에게 투자했다. 그만큼 황후는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레온이 크게 앓았던 해, 황제는 레온의 병이 황후에게 옮을 것을 두려워했다. 또한 하나뿐인 제 후계자를 잃을 것을 걱정해 황후궁을 한 달간 찾지 않았다. 병이 낫고 나서 레온이 다시 제 어머니를 찾았을 때, 황후는 그를 붙들어 안고 울면서 덕분에 한 달이나 자유로울 수 있었다며 크게 고마워했다. 문제라면 그날 밤 병든 하인이 쓰던 이불을 가져와 레온을 덮었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황제가 웃으며 황후에게 말했었다.

“황후, 황태자가 저리 아파서야 제국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러니 아무래도 후계자가 한 명 더 필요할 것 같군.”

그때 레온은 시체보다 더 파리하게 질려 버린 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황제는 황후가 아닌 여자에게서 후계자를 볼 생각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 후로 레온은 황후궁에서는 더 아프지 않았다.

예전 일을 떠올리던 레온은 끼익 소리를 내는 의자 다리의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의 눈이 다시 편지를 향했다.

대신전에서 잘 지내고 있느냐? 황후가 너를 그리워하는구나.

정말로 자식을 걱정하는 것 같은 편지에 레온은 실소를 흘렸다. 물론 편지에 적힌 것은 진실이었다. 제가 없으니 황제는 더 많은 시간을 황후에게 쏟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황제가 단지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님을 안다.

‘꾸짖음인가.’

지금까지 황제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 제가 성녀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터이니 황제는 레온이 보낼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언제나 승리를 거머쥔 제 아들이 이번에도 분명히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돌아올 것을 말이다.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낸 레온은 몸을 일으켜 불이 피워진 벽난로에 편지를 찢어 넣었다. 편지는 곧 새카맣게 타오르더니 재가 되어 바스라졌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레온은 방을 나섰다. 그의 부관들이 그를 뒤따랐지만 레온은 손을 저어 혼자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대신전 안을 정처 없이 걸으며 레온은 생각에 잠겼다.

계속 대신전에 머무를 수는 없다. 그는 황태자이고 언젠가는 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이야 대륙 전체적으로 전쟁이 소강 상태이기에 이런 여유도 가능하지, 만약 또 다른 왕국과 분쟁이 생긴다면 아마도 한동안 그 일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이곳의 일을 끝내야 하는데….’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재미 삼아 온 대신전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생길 줄 누가 알았을까. 지금까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렵지 않게 손에 넣어 온 레온이었기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성녀에게 허덕이는 이 생경한 기분이 불쾌함과 동시에 즐겁기도 했다.

높은 대신전의 건물을 훑던 레온의 시선이 신전의 벽 위에 멈췄다. 걸음을 조금 서둘러 성벽 위로 올라가자 그곳에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라트반이 서 있었다.

“하늘을 감상하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름답긴 하군.”

레온은 석양이 내리는 하늘을 보며 라트반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위를 바라보았다.

저기에 뭐가 있길래?

레온은 라트반이 바라보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불어오는 바람 탓에 제대로 보기는 힘들었지만 한참을 바라보자 아주 멀리서 점인 듯한 무엇인가가 보였다. 처음에는 새인가, 싶었지만 저렇게 한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새가 있을 리 없다.

“하아….”

라트반이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그것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라트반이 저리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라면 뻔한 일이다.

“…리나가 아슬란과 함께 있는 건가.”

성녀를 친구처럼 부르는 레온의 목소리에 라트반은 그를 한 번 노려보다니 다시 하늘을 보았다. 레온도 성벽 위에 턱을 괸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으면 뭐라고 쏘아붙이기라도 하겠는데 저 멀리 있으니 제가 끼어들 수가 없다.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는 점을 바라보다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슬란이 마음을 먹으면 그는 언제든지 성녀를 데리고 가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슬란이 단지 성녀의 몸만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 아슬란뿐이던가. 자신도, 라트반도 모두 그녀의 마음을 바라고 있지 않던가.

“읏차.”

거기까지 생각한 레온은 성벽에 기대었던 몸을 돌렸다.

마음을 얻으려면 노력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번 일에 자신은 아슬란과 라트반보다는 좀 더 성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리한 위치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레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성녀가 부탁한 일을 해야 했다. 때마침 성벽을 순찰하는 기사들과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신관들이 보였다.

‘이 정도면 구경꾼들은 충분하겠지.’

사람들을 바라본 레온은 곧바로 라트반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주먹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망설임 없이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던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붉어지는 뺨을 손등으로 쓸며 자신을 노려보는 라트반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레온은 다시 슬쩍 하늘을 보았다.

이건 다 성녀가 부탁한 일이었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나는 놀라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그의 왼쪽 뺨에는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아차릴 정도로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차라리 마수의 상처라면 모를까 신전 기사단장의 얼굴에 이렇게 손자국을 낸 남자는 아마도 레온이 처음일 것이다.

내 말에 레온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카를에게 의심 사지 않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해요, 리나.”

그러더니 레온은 라트반에게 어서 너도 말하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나, 라트반 경?”

레온의 말에 라트반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말았다.

‘물론 내가 레온에게 카를과 같은 편이 되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라트반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런 방법을 선택할 줄 몰랐던 거지만!

나는 라트반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숙여 보라고 손짓하자 라트반은 망설임 없이 허리를 굽혀 제 얼굴을 나에게 내밀었다. 가까이서 보자 더욱 확실하게 보였다. 도대체 레온이 얼마나 온 힘을 다해 때린 것인지 그을린 그의 피부가 붉어진 것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시퍼런 멍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라트반의 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라트반은 살짝 몸을 굳히며 눈을 감았다. 숱이 많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생각하지 못했던 라트반의 외모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내 손끝에서 푸른빛이 돌았다.

“……!”

손끝에 맺혔던 성력이 라트반의 다친 뺨을 감쌌다. 어루만지듯 일렁이던 푸른빛은 곧 사라졌다. 성력이 사라진 자리에는 언제 다쳤냐는 듯 말끔한 라트반의 얼굴이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게 마음에 들어 그의 뺨을 만져 보려 할 때 레온이 소리쳤다.

“나도 다쳤단 말입니다!”

그렇게 외친 레온은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흰 편인 그의 손 아래쪽이 벌겋게 변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 역시 라트반처럼 이대로 두면 곧 멍이 올라올 것 같았다.

“정말이네요.”

내 말에 레온이 풀 죽은 표정이 되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때린 사람이 이렇게 다칠 줄은 몰랐거든요.”

“그거야 라트반 경이 무식하게 튼튼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라트반은 그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하긴, 기사에게 튼튼하다는 게 욕은 아니다. 여유로워 보이는 라트반의 표정에 레온은 어쩐지 더 짜증이 난 듯한 얼굴이 되었다.

“저도 치료해 달라고 하고 싶지만… 안 되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레온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라트반을 치료할 수는 있어도 레온을 치료해 줄 수는 없다. 그는 라트반을 때리느라 생긴 저 흔적을 가진 채 카를을 만나러 갈 예정이니 말이다.

카를을 끌어내리기 위해 나는 세 남자에게 각각 다른 일들을 부탁했다.

아슬란은 카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증거들을 꾸며 내 주었고, 라트반은 아슬란이 준비한 것들을 모두에게 보여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온은 혼란스러워하는 신관들을 포섭하는 일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신관에는 카를도 포함된다.

이 모든 일에 라트반과 아슬란이 빠져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레온의 부담이 제일 크다는 것은 다른 두 사람도 동의한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레온만이 할 수 있다는 것도 나머지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다고 이런 방법을 쓸 줄은 몰랐지만….’

레온은 자신이 라트반과 대립하는 것을 보여 준 다음에 카를에게 붙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적당히 사람들 앞에서 말다툼 정도를 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렇게 치고받을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하지만 레온을 탓할 수는 없었다. 확실히 라트반의 얼굴을 보고 나니 누구라도 라트반과 레온이 같은 편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어쩐지 진심이 좀 섞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제 손을 보면서 억울한 표정을 짓는 레온을 의심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온은 더욱 보란 듯이 제 손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을 다루듯 호호 불기까지 했다. 그런 레온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고 말았다. 레온은 잠시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라트반에게 말했다.

“그럼 성녀님께 은혜를 입은 기사단장 씨는 그만 나가 보시지 그래? 다 나은 얼굴을 대신전 여기저기에 보여야 할 것 아닌가.”

레온의 말에 라트반은 나를 보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라트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레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별말 없이 방을 나섰다.

“라트반 경이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군요?”

“라트반도 알아차린 거겠죠.”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레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라트반이 없는 자리에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죠?”

내 말에 레온은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지금까지 레온은 언제나 은근히 돌려서 말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한 번에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그가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고백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나에 대한 그의 감정을 말했을 때뿐이었다.

그런 그가 다소 무심한 라트반도 한 번에 알아차릴 정도로 돌려 말하지 못했다. 도대체 라트반이 없는 자리에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나는 조금은 긴장한 채 두 손을 모아 잡고 레온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러자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알릭이라는 신관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

카를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와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기사들의 목소리에서 라트반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카를은 이를 갈았다.

‘네놈이 감히.’

저를 끌고 가라 명령하던 라트반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라트반은 카를이 꽤나 오래전부터 공을 들인 자였다. 하지만 여느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는 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시시한 기술 따위는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트반이 기사가 되기 전, 수습 신관일 때부터 카를은 그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각오를 하고 대신전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와 절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렇기에 그리움에 울 때도 있었고 가끔은 돌아가겠다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어린 수습 신관들 사이에서 라트반은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대신전이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후로도 라트반은 언제나 흔들림이 없는 올곧은 모습을 보였다. 행동뿐만이 아니었다. 대신전 안에서 가장 신실한 자를 뽑으라면 대부분이 라트반의 이름을 댈 정도로 그는 신전의 규율 그 자체였다.

그런 사람에게 어차피 제 기술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카를은 라트반의 앞에서는 더욱 신실하고 성실한 신관의 얼굴을 해야 했다. 그것이 제법 잘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던 놈이 성녀에게 붙었단 말이지.’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밖에서 기사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곤란합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모든 면회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떤 신관이 자신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다 다시 멀어졌다. 아무래도 기사들의 단호한 거부에 그냥 돌아간 모양이었다. 다시 카를은 이를 악물었다. 찾아오는 자들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제 방 안에 구금된 지 사흘이 지난 오늘, 그를 찾아오는 신관들의 숫자는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그것이 카를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직접 만나야 하는데.’

처음으로 그에 대한 모든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 명 한 명씩 직접 만나서 그들의 믿음을 다잡아 놔야 하거늘, 그러기는커녕 다른 자들과는 말 한마디 섞을 수 없는 상태다.

‘실수했어.’

돌아오기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금은 느긋하게 움직였었다. 어차피 자신이 대신관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었고 다른 것들은 대신관이 된 이후에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으니까.

실수는 그것 한 번뿐만이 아니었다.

제가 구금되고 난 이후에 계속해서 그에게 불리한 물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꼭 그 물건들이 아니더라도 그가 돌아오고 난 다음에 마력에 관한 일들이 터진 것이 신관들의 마음속에 있을 의혹을 빠르게 키우고 있다.

‘내가 없을 때 중심을 잡을 자가 필요했어.’

카를은 저를 따르던 상급 신관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를 향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신관들은 많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중심이 될 인물 하나는 필요했다. 하지만 누구를 그 중심으로 삼느냐 고민하다가 확실히 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젠장, 황태자를 잡았어야 했나.’

오만해 보이기는 했으나 약삭빠르다던 세간의 평가가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던 듯, 황태자가 짧은 시간 동안 대신전의 신관들을 꽤나 포섭했던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에게도 다음 대의 대신관과 친분을 쌓고 싶다며 넉살 좋게 접근해 오지 않았던가.

만약 그와 제대로 손을 잡았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쓸데없는 장난질은 하지 말 것을 그랬어.’

재미있는 꼴을 보기 위해서 황태자를 성녀와 라트반이 있는 방으로 집어넣었는데 결과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그 방을 나서던 황태자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었는지는 자신이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그 꼴을 보아하니 황태자가 다시 제게 접근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카를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다음 저를 향해 안쓰럽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던 성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으드득. 숨기지 못한 이가 갈리는 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그녀가 자신을 다시 대신전으로 불러들였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그는 확신했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게 틀림없어.’

성녀는 필사적으로 자국을 없애고 싶어 했다. 당연히 그는 그 방법을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제가 성녀를 손에 넣고 흔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를 왜 스스로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이 변방의 신전으로 유배되듯 쫓겨나고 나서 성녀가 매일 밤 남자들을 끌어들인다는 소식을들었을 때는 웃음이 나왔다.

‘이성을 잃고 매달리는 것이 그토록 두려웠나 보군.’

그럴 만도 했다. 언제나 고고한 성녀가 숨을 헐떡이며 스스로 남자의 아래를 벗기며 저에게 박아 달라 말하는 꼴이 되는 것은 쉽사리 받아들일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 높은 자존심에는 더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성녀는 자국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억누를 방법 하나를 찾아내긴 했었다. 바로 자국이 힘을 쓰기 전에 먼저 남자들과 몸을 섞는 것이었다. 무엇이 다르냐 싶었지만 아무래도 성녀는 모두의 앞에서 제가 무너지는 꼴을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성녀는 그를 유배 보낸 후에 거의 매일같이 남자들을 방으로 들였다고 했다. 제가 자국을 사용하는 것이 어지간히도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카를이 지난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기사들을 제외하고 카를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지금처럼 식사를 가져오는 신관들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단출한 식사가 올려진 쟁반을 든 신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신관을 본 순간 카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들어온 신관은 알릭이었다.

알릭은 들어와서 눈을 맞추지 않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제 손에 들려 있던 식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다음 곧바로 다시 나가려 했다. 카를은 급히 그런 알릭을 불러 세웠다.

“알릭, 당신이 올 줄이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쁘군요. 저번에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섭섭했습니다.”

“…….”

알릭은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 말을 걸어오는 카를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괜찮다면 부디 조금 더 머물다….”

“식사를 전달하러 왔을 뿐입니다.”

알릭은 빠르게 카를의 말을 잘랐다. 카를은 그런 알릭의 반응에 속으로 웃었다. 아예 무반응이었다면 모를까 이렇게 자신을 어떤 감정이든 강하게 갖고 있는 자는 이용하기 쉬운 법이다.

“알릭, 오래 전의 일로 아직 우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태도를 보아하니 제가 떠난 다음에 성녀님께서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부디 나에게 해명을 할 시간을….”

“…오해?”

알릭은 주먹을 쥐었다.

“성녀님에 대해 오해를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고?”

이런. 카를은 속으로 혀를 찼다. 둔하고 멍청한 신관이라 생각했었는데 제가 없는 사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어쩐단 말인가. 이제 와서 알아차려 봤자 늦은 것을. 그 사이 다시 알릭이 말을 이었다. 카를은 몸을 떠는 알릭을 바라보았다. 알아차렸을지는 몰라도 알릭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리라.

하긴, 어디 이 대신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알릭이 아닌 성녀가 말 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는 성녀를 강제로 취할 수 없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그건 성녀가 선택한 일이다. 모든 것이 성녀가 판단하며 성녀가 선택해야 할 문제다. 만약 그것에 문제가 있다면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꼴이 된다. 만약 저와의 일을 누군가에게 말 한다면 성녀는 반드시 ‘당신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닙니까?’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이 그녀를 다시 한번 죽이는 것임을 카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성녀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릭은 한참이나 카를을 노려보다 방을 나섰다. 뒤에서 카를이 부르는 소리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한 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나오자 기사들이 재빨리 문을 닫았다. 알릭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몸을 돌렸다. 기사들이 저 안에 있는 악마를 절대로 나오지 못하게 해 주길 바라며.

“알릭 신관?”

그때, 그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들자 라트반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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