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그는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
성녀의 명성은 더욱 바닥을 향해 추락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벨리나는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긴 했어도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관계는 그녀의 방 안에서, 혹은 무척이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벨리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으나 보지 못했다. 그런 것을 이제는 드러내 놓고 한다 수군거렸겠지.
‘어쩐지….’
예전에 그 기억들을 보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던 것인데. 이벨리나가 숨겼던 기억들을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벨리나는 그런 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다시 자국을 더듬었다.
이벨리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녀에게 강제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어.’
성력은 공격을 위함이 아닌 지켜 내기 위한 힘이다. 그렇기에 마수가 아닌 사람을 쓰러트릴 수는 없어도 위해를 입히는 존재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어 강제적으로 굴복당할 일은 없다.
언젠가 아슬란이 스치듯 했던 말이 다시 기억났다.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이게 이벨리나의 몸에 남아 있게 된 것일까. 곧바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벨리나가 이 자국이 무엇인지 몰랐다면….’
소름이 돋았다. 내가 본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그녀가 카를을 향해 웃으며 달려가던 것이 떠올랐다. 두려움은커녕 한 점의 주저함도 없는, 어찌 보면 맹목적인 절대적인 신뢰. 그 신뢰가 모두 이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머릿속에 퍼즐의 조각들이 모여들었다. 내가 본 기억. 카를의 태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 아슬란이 말해 준 지식들. 나는 그 조각을 하나씩 맞춰 보았다.
‘이벨리나가 언제부터 타락하기 시작했지?’
어릴 때는 아니었다. 남아 있는 기억을 책을 넘기듯 뒤적여 보았다. 빠르게 뒤로 넘긴 기억 속에서 이벨리나가 처음으로 어긋나기 시작한 때를 찾았다.
‘있다!’
다행히 그 기억은 남아 있었다. 그 기억을 찾아낸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역겨운 장면이라고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억 속의 주변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신전의 모두가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한 성녀를 축하하며 신전의 곳곳을 흰색의 꽃으로 장식했다. 이벨리나는 그런 신전 내부를 경쾌한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며 그녀에게 인사하는 모두에게 밝은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기억에서 그날 밤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다만 다음 날, 이벨리나는 제 방 앞과 안을 장식한 꽃들을 멍하니 잡아 뜯었다. 이벨리나가 이상해진 것은 그날부터였다.
머릿속을 떠다니던 퍼즐의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며 불쾌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만약 부모이며 스승임과 동시에 친구인 존재가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 있을까? 그것이 자신을 해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중에 이 자국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된 순간 이벨리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벨리나는 보란 듯이 제가 한 일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사람들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비웃었고 제 마음대로 신전의 것을 탕진했으며 기분이 내키는 대로 누군가를 올리기도 하고 끌어내리기도 했다.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부름에도 이벨리나는 신전 기사단을 보내지 않았다. 그해 겨울, 그 나라에서는 얼마나 많은 수가 마수들의 공격 앞에 목숨을 잃었을까. 이벨리나는 직접 죽이는 것보다 더욱 많은 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벨리나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복수일까? 하지만 카를은 살아 있다.
‘게다가 이벨리나는 아슬란을 불러들였어.’
도대체 성녀인 그녀가 마수까지 불러들여 가면서 무엇을 부탁하려 했던 것일까. 처음에는 카를을 죽이려 하나 싶었지만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아슬란을 불러들였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슬란이 가져왔던 석판이 생각났다. 이곳에 새겨진 것은 지켜야만 한다고 했던가.
이벨리나가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채 비어 있다. 이벨리나는 그곳에 무엇을 적고 싶었던 걸까.
일의 시작은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벨리나가 원했던 결말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돌아왔다는 것을 말하지도 않았네.’
예전부터 이벨리나가 워낙에 비밀 통로를 이용해 모습을 감추거나 멋대로 들어왔기에 신관들이 크게 당황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젯밤 돌아오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을 터이니 내가 안에 있는 것을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어나 몇 개의 문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자 웅성이는 소리가 좀 더 확실하게 들려왔다.
“그럼 안에 계시는지 알 수 없다 이건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문을 열려 했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들려온 것이 레온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어제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레온의 얼굴이 생각났다. 일그러진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그의 얼굴이.
나는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저희는 안쪽의 문으로 가서 부름이 있으실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성녀님!”
“리나!”
문을 열고 나가자 신관들과 레온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그가 나를 살펴보더니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어제….”
거기까지 말한 레온은 말을 얼버무렸다. 자신이 무엇을 했었는지 떠올린 모양이다. 나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어….”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레온은 멍한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에게 물었다.
“레온, 지금 시간 있나요?”
***
“…없다고 할 걸 그랬습니다.”
레온은 맞은편에 앉은 라트반과 아슬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레온의 말에 아슬란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레온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자리에는 라트반과 레온 아슬란이 모두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거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고.
레온을 붙잡은 다음 라트반을 불렀다. 그리고 아침 식사가 전부 차려지기도 전에 예상대로 아슬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사이에 그도 어느 정도 회복을 했던 것일까, 전날 밤에 보았던 짐승의 팔은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먹으라고 차려 놓은 것인데 세 명 모두 손도 대지 않은 채 나만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아무래도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어서 이 자리에 모이게 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 모였으니 와 달라고 한 이유를 말해야겠지요. 아슬란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기억의 많은 부분을 잃었어요.”
내 말에 아슬란은 어쩐지 이겼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고 라트반과 레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직 모두에게 나는 진짜 이벨리나가 아니고, 이곳이 내가 읽었던 책 속의 세계라는 것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말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있을 말실수를 조심하며 나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어떻게 이 자국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어요.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내 몸에 생기는데 카를 신관이 크게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카를 신관이 대신관이 되려는 이유는 물론… 내가 목적인 것 같습니다.”
“…….”
내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는 것에는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도와주세요.”
나는 세 명의 남자에게 말했다.
“…나는 카를 신관에게 벗어나고 싶어요.”
물어볼 수는 없지만 이것이 이벨리나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부탁에 세 명의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죽이길 원합니까?”
내 말에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은 레온이었다. 그의 말투는 마치 식사 메뉴를 고르는 사람처럼 아무런 감흥이 없이 덤덤했다. 대신전 안에서 가장 유력한 대신관 후보를 죽이는 일이 별로 대단치 않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 새삼 그가 어떤 위치였는지를 깨달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저 호감을 보이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기에 잊고 있었지만 그는 대신전 밖에서는 이미 여러 개의 나라를 무자비하게 굴복시키고 수천, 수만의 사람의 목숨을 명령 하나로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아슬란이 세상에 더없이 멍청한 놈을 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죽이는 걸 못 해서 내가 그놈을 가만히 놔두었다고 생각하나?”
아슬란의 말대로였다. 내가 그저 카를이 죽기를 바랐으면 아슬란에게 먼저 부탁을 했을 것이다. 아슬란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이유를 알고 있지?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그런 아슬란의 시선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카를 신관이 내 다리에 있는 자국을 만들었을 거라 추측하고 있어요. 문제는 이것이 근원을 알 수 없는 복잡한 사술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렇기에….”
“…카를 신관이 죽으면 영원히 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레온이 신음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요.”
레온의 말대로였다. 아슬란은 이것이 성력과 마력이 있기 훨씬 전인 무척이나 오래된 고대의 사술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이 신전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과 그의 마력에 대한 지식으로도 아직 이 자국에 대한 것은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 알아낸 것이라고는 이 자국이 내 성력을 삼키고 있다는 것과….”
그 말에 라트반이 놀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나를 통제… 아니, 정확하게는 발정에 가깝도록 비이상적인 성욕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말에 세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분노하는 그 소리에 어쩐지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모두가 그 사실에 대해 분노해 주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벨리나는?’
문득 그녀의 생각이 들었다. 이벨리나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아니면 카를에 대해서 알았을 때 지금처럼 털어놓을 사람이 있었을까?
“성력을 삼킨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벨리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라트반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하긴, 대신전의 소속인 그에게는 꽤 충격적인 일일 것이다.
“말한 그대로입니다. 내 성력은 줄어들고 있어요. 아마도 이… 사라진 듯합니다.”
순간 이리스의 이름을 말하려다 급히 말을 돌렸다. 숨기려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성력이 더 사라지고 이리스의 이름이 오르내리면 세 사람 역시 곧 그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굳이… 내가 먼저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슬란조차도 사라진 성력을 찾기 위해 저렇게 거대한 마법을 쓰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사라진 성력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도 다른 누군가가 갖고 있단 걸 어떻게 아는지 물어본다면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다.
라트반이 더 물어보기 전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자국을 계속해서 이용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도… 정상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번 이상해졌을 때를 생각해 보면 다시 이 자국이 힘을 발휘하기까지 2주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요.”
말을 끝내자 이번에는 레온이 물어보았다.
“저번이라는 것은… 어제 제가 들었던, 그러니까 아슬란과….”
“그래요. 저번에 제가 이상해졌을 때, 아슬란이… 도와주었어요.”
다른 놈의 냄새가 난다며 몇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나를 안아 댄 것을 도와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슬란 덕분에 성욕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 말에 레온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뭐라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것인지 들리지 않아 그를 바라보자 레온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저자를 원해서 했던 것은 아니란 말이군요.”
그러자 앉아 있던 아슬란이 그의 앞에 놓여 있던 빵 하나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레온에게 집어 던졌다. 도저히 빵이 날아가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레온의 얼굴에 부딪힌 빵은 그대로 터지듯 부서졌다.
“아슬란!”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아슬란은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에는 놓여 있던 포크를 집었다. 나는 곧바로 레온의 앞을 막았다.
“제발, 좀!”
내가 막아서자 아슬란은 내 뒤에 있는 레온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포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소리도 없이 포크가 휘어지는 모습에 내 등골이 섬뜩했다. 지금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어젯밤 저 손이 내 턱을 잡아 올렸던 것이 생각났다.
‘레온을 봐준 거야.’
아슬란이 정말로 레온을 죽이고자 했으면 처음부터 빵이 아닌 포크를 던졌을 것이다. 아니, 던질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마법을 쓰면 끝날 일이었으니까.
아슬란은 휘어진 포크를 내던지고는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다. 어젯밤, 나를 끌어당겼던 그 마법을 쓰려는 것이 분명했다. 눈을 감고 끌려갈 것을 각오했는데.
“……?”
한참을 기다려도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떠 보니 아슬란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리 와.”
“…….”
“빨리.”
“…….”
내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아슬란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들었다.
“그놈에게 더 이상 손대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아슬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의 품으로 이끌었다. 고개를 돌려 레온을 보자 그는 얼굴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아슬란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는 중이었다.
‘레온도 참 레온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이라면 기겁을 하고 물러섰을 법도 한데, 아슬란이 어쩐 존재인지를 알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이다. 레온을 신경을 씀과 동시에 나는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레온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참으라는 내 손짓을 보고서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라트반이라도 이성을 차리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어쨌거나 그놈에게 알아낼 것이 많은데….”
아슬란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라트반이 대꾸했다.
“마법 중에 정신을 지배하는 것도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런 마법은 할 수 없나 보군.”
…아니다. 비아냥이 섞인 목소리인 것을 보니 라트반도 레온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나는 끙끙거리며 허리를 잡고 있는 아슬란의 손을 풀어냈다. 다행히 아슬란은 더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허전한지 내가 빠져나온 손을 몇 번 쥐었다 폈지만.
계속해서 대화가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셋이서 으르렁거리는 모습만 보게 될 것 같았다.
“그것도 이미 아슬란에게 물어봤어요. 그런 마법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저 단순한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는 거라고 하는군요.”
내 말에 라트반은 아쉽다를 듯 혀를 찼다. 나는 레온에게 물었다.
“레온, 우리가 떠난 다음에 어떻게 되었나요? 카를이 왔나요?”
내 물음에 아슬란도 라트반도 다행히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 역시 그 후에 일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카를 신관이 들어왔습니다. 뒤에 신관들을 주렁주렁 이끌고서 말입니다. 만약 그때 당신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좀 곤란했을 것입니다. 아, 그가 당신이 있었던 흔적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그건 적당히 둘러대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레온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정신을 잃었다 하더라도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짐작이 갔다. 만약 그 모습을 그대로 보였다면 무척이나 복잡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일단 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겠지. 그리고 그런 사람을 안고 있는 레온 역시 무시무시한 지탄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라고 하더라도 신관들의 눈에는 그저 정신을 잃은 성녀를 안고 제 욕구를 채우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었던 라트반에 대해서는 뭐라 말이 나올 것인가. 기사단장이 정신을 잃은 성녀를 취하는 황태자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사실은 설사 내가 깨어 있어 그를 변호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신관들에게 용납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 명 다 위험해질 뻔했던 거야.’
그 자리에서 라트반이 나를 안았어도, 레온이 나를 안았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온은 신전의 규율뿐만 아니라 온갖 세상의 지탄을 받으며 손가락질 당했을 것이고 라트반은 보류할 것도 없이 즉시 신전기사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 했을 것이다. 성녀의 명성은 더 이상 걱정하는 게 의미 없을 만큼 바닥을 파고 들어갔을 것이고.
고개를 돌리자 나를 보고 있던 아슬란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잘했지?’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나는 손을 뻗어 아슬란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이미 한번 했던 감사의 인사였지만 그 위험을 깨달으니 한 번으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의 대신관 후보 자격을 박탈시킬 거예요.”
“어떻게?”
아슬란의 질문에 나는 웃어 보였다. 카를은 곤란한 상황을 만든 다음에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려 했다.
나라고 해서 못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
“카를 신관님!”
카를이 안으로 들어서자 몇 명씩 나뉘어 대화를 나누던 신관들이 반갑게 그를 불렀다. 카를은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짧은 신전의 인사가 오고 가고 모두가 그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이려 노력하는 모습에 카를은 더욱 진심으로 웃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이 상태라면 대신관의 자리를 얻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가 오래전에 뿌려 두었던 씨앗들은 그가 멀리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훌륭하게 싹을 틔웠다.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 그가 오래전 성녀에게 가장 공을 들여 뿌렸던 씨앗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훌륭하게 싹을 틔웠었다. 가장 심혈을 기울였기에 그 어떤 자들보다도 빠르고 단단하게 자라났던 그 싹이 가지를 만들고 열매를 맺은 순간에 카를은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따서 먹었다.
어릴 적부터 매일매일 제 본성을 숨겨 가며 길러 왔던 것인지라 그 순간의 쾌감은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었다. 어찌나 공들여 길렀는지 거칠게 열매를 딴 후에도 가지는 부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카를은 더욱 즐거웠다. 제가 기른 것을 부러트리고 파헤쳐 말라 죽게 만드는 재미는 오직 그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지.’
카를은 그가 변방의 신전으로 떠나기 직전 성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도 믿지 못하며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기에 홀로 부서지고 있던 성녀였다. 제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완전히 깨닫고 나서 홀로 말라비틀어지던 성녀는 그를 죽이지 못한 채 멀리 쫓아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녀인 그녀는 타인을 죽일 수 없다. 그 사실에 카를은 진심을 다해 신에게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당신이 내리신 자비에 제가 많은 뜻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성녀에게 내려진, 죽일 수 없고 죽지 못하는 신의 축복이 어떤 족쇄가 되었는지 신은 알고 있을까. 모를 것이다. 알고 있다면 자신 같은 자가 아직 살아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존재하되 무심한 존재에게 카를은 다시 한번 감사드렸다.
신관들과 인사를 나누는 도중에 카를은 제가 있는 곳에 다가오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는 신관을 발견했다. 키가 크고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수더분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신관들 중에서도 가장 급이 낮은 평신관의 예복이었다.
카를은 잠시 주변 신관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알릭.”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를.”
알릭이라 불린 청년은 카를이 자신을 부르자 얼굴을 굳히며 바라보았다. 그 어디에도 반가워 보이는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모두가 평신관인 그에게 신관님이라는 말을 붙이며 고개를 숙이거늘 알릭은 고개를 숙이지도, 신관님이라 높여 부르지도 않았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아직 어떠한 지위도 공식적으로 회복되지 않은 카를이었다. 그러니 알릭과 카를은 같은 평신관이었고 높여 부를 이유가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카를은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알릭이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알릭은 키가 조금 크다는 것을 제외하면 참으로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름을 들어도 그게 누구더라? 하며 잠시 생각을 했다가 ‘그 키가 큰 신관 말입니다’라고 해야 한참 후에 ‘아아, 이제 알겠군. 그 조용한?’이라는 답변이 돌아오는 그런 존재감이 없는 신관.
그래서 카를은 성녀가 왜 이런 남자를 좋아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녀는 카를을 부모이자 스승이자 친구라 생각했지만 그를 연인의 자리에는 두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성녀는 모두가 모이는 기도회에 참석하는 날에 유난히도 머리를 열심히 빗기 시작했다. 조금은 지루해하던 기도문을 열심히 외우고 마지막까지 남아 모든 신관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했다.
그런 변화를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축복의 인사가, 유독 알릭이라는 한 평신관에게 길었던 것을 알아채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성녀가 멀어지는 알릭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린 카를은 입술을 한번 문 다물었다. 그리도 다음 날부터 그를 제 수행 신관으로 임명했다. 알릭과 함께 들어서자 성녀는 들고 있던 펜을 떨어트렸다. 그가 서 있는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던 성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하는 서투름이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카를은 알릭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그의 손길에 알릭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
“멀리 있는 동안에도 당신을 걱정했습니다. 떠나기 전 유독 기운이 없던 모습이 계속 마음속에 걸리더군요. 무슨 큰 고민이 있….”
탁!
카를의 말에 알릭은 거세게 그의 손을 쳐 냈다. 알릭은 파르르 떨며 카를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더니 곧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카를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날도 알릭은 저랬다.
“카를 신관님? 저 신관은….”
“아, 예전에 친분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럼 이만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아마도 이 대신전에서 성녀를 제외하면 제 본모습을 눈치챈 유일한 자가 알릭일 것이다. 하지만 카를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신관들과 대단한 친분이 있는 자도 아니며 그는 저런 상태로 있어 주는 것이 그에게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알릭보다 오늘 회의나 신경 쓰는 게 낫지.’
오늘의 회의는 지금 멈춰 있는 대신관 선출을 하루빨리 진행시키기 위한 회의였다.
‘마력의 근원을 찾는 건 금방 끝날 일이 아니야.’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먼 곳에서 얼마나 성녀를 다시 만나기를 고대했던가. 어서 빨리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제가 키운 것을 다시 마주하고 또다시 짓밟고 싶었다.
자신과 다른, 신에게 사랑받는 존재를.
‘남은 자들은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고….’
그렇게 한 카를이 안으로 향하던 도중 맞은편에서 그에게 반갑다는 듯 손을 들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레온 황태자였다.
“좋은 아침이군, 카를 신관.”
레온 황태자는 저번과 달리 웃는 얼굴이었다.
신관들과 함께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저를 보던 레온 황태자를 본 순간 카를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있어야 할 성녀와 라트반이 없었다. 대신 잠시 차가운 표정을 지었던 레온이 뒤의 신관들에게 문을 닫으라 손짓한 다음 홀로 남은 카를에게 말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분명 성녀님을 뵐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 않았나. 젠장, 게다가 신관들은 왜 저리 줄줄 끌고 온 건가? 하마터면 추한 꼴을 보일 뻔했어.”
그런 레온을 바라보던 카를의 얼굴이 굳었다. 활짝 열린 창문 덕택에 옅어지긴 했지만 희미한 정사의 흔적을 그는 맡을 수가 있었다. 그러자 그런 카를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듯, 황태자는 제 아래춤을 툴툴 치며 민망한 듯 말했다.
“워낙에 오지 않으시길래 혼자 좀 달래고 말았지.”
“…….”
그런 황태자에게 카를은 드물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제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소리가 들리기에 오시나 싶어 좀 급하게 옷을 추스르는 바람에 꼴이 이렇지만…. 그보다 성녀님은 어디에 계신 거지? 왜 오지 않으시는 건가?”
그건 카를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성녀와 라트반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없다니? 열려 있는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들어오기 전 희미하게 느꼈던 이상한 기운도.
카를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레온에 대해서 파악해야 했다. 황태자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성녀와 라트반을 어디에 숨겼단 말인가?
카를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황태자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카를 신관, 난 정말로 성녀님을 원해. 이런 시답잖은 장난에 어울려 줄 시간이 없단 말일세.”
분노가 섞인 낮은 목소리는 분명히 진심이었다. 황태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카를의 어깨를 장난이었다는 듯 가볍게 툭 치고는 문으로 향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즐거운 기분으로 만났으면 하는군.”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방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카를은 접견실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녀와 라트반은 보이지 않았다.
“카를 신관?”
“아, 죄송합니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은근하게 무례를 비꼬는 황태자의 태도에 카를은 습관과도 같은 웃음을 지었다.
“뭐, 그대도 마음이 복잡하겠지. 대신관이 되기 직전에 이런 문제가 생겼으니 말이야.”
“아직 저는 후보일 뿐, 차기 대신관으로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곧 되긴 하겠지만. 카를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뭐,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네. 일단 저번에는 내가 좀 아쉬웠던 마음에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간 것이 걸려서 이렇게 찾아왔어. 앞으로도 제국과 대신전이 돈독한 관계를 이어 나가야 하는데 좁은 마음으로 큰일을 망칠 수야 없는 것 아닌가. 앞으로 잘 부탁하네.”
카를은 황태자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여전히 성녀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 쪽으로 끌어들여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대신전 안이야 그의 세상이지만 밖은 제국의 것이 아닌가. 대신전이라는 세계를 공고히 유지하려면 제국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를이 황태자의 손을 잡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카를 신관님!”
멀리서 한 사제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쉰 사제가 그의 앞에 멈추자 카를이 물었다. 달려온 사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크, 큰일입니다. 지금 신전 기사단이 숙소를… 카를 신관님의 숙소를….”
“제 숙소를 어찌했단 말입니까?”
답답한 마음에 카를이 되묻자 달려온 신관이 외쳤다.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 숙소로 돌아온 카를은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신관의 말대로 신전 기사단이 그의 숙소를 발칵 뒤집어엎고 있었다. 기사들을 보던 카를의 눈이 낯익은 사람을 찾았다.
“라트반 경,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 오셨군요. 카를 신관. 수색에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수색? 무엇에 대한 수색을 말하는 겁니까?”
그때 안쪽에서 기사의 외침이 들렸다.
“단장님! 수상한 것을 찾았습니다!”
“수상한 것…?”
카를이 중얼거렸지만 라트반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명령했다.
“이곳으로 가져오도록.”
그러자 곧 기사 하나가 작은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무언인가가 들어 있는지 덜그럭거리는 소리는 내는 상자는 아무 무늬도 없는 단순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본 사람들은 곧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안에 물건을 넣어두는 상자라면 당연히 어디엔가 여는 곳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상자는 마치 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덩어리와 같은 형태였다. 그 어디에도 종이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으며 이어 붙인 흔적도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상자의 안에서 들려오는 덜걱거리는 소리에 섬뜩함을 느꼈다.
“혹시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나는 모르는 물건입니다.”
정말로 모르는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카를은 제가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군가가 일부러 그의 숙소에서 저 물건이 발견되도록 한 것이다.
카를은 뒤를 돌아보았다. 신전 기사단이 제 숙소를 뒤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는 일부러 신관들을 잔뜩 끌고 왔다. 모두 그의 편을 들며 기사들의 도를 넘은 행동에 목소리를 높여 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트반을 본 순간 카를은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대신전에서 자신만큼이나 견고하고 단단한 명성을 쌓은 유일한 사람은 라트반이었다. 게다가 그는 신관들의 신뢰는 물론 기사단의 절대적인 충성을 얻은 자였다. 또한 대신전에 한정된 자신과는 달리 대신전 밖에서도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 그리고 그가 떠나 있던 시간에 착실하게 대신전을 지탱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 막 돌아온 자신이 라트반에게 신뢰와 명성으로 이기기는 쉽지 않다.
카를은 보이지 않게 이를 물었다. 라트반은 상자를 가져온 기사에게 물었다.
“이것이 어디에 있었나.”
“서랍장 안쪽에 있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라트반이 다시 몸을 돌려 카를에게 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로 모르는 물건입니까?”
“정말 모릅니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 숙소를 이리 허락도 없이 들어와 난장판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군요. 미리 말을 해 주었다면….”
그때 라트반의 뒤에 있는 젊은 기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리 말을 했으면 숨겼겠지.”
반쯤은 들으라고 하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 소리에 카를은 젊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그가 떠난 사이에 새로 기사가 된 자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젊은 기사는 카를을 무척이나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라트반 단장, 당신이 허튼 이유로 이렇게 찾아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말해 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제 숙소를 뒤지는 겁니까.”
그때 라트반의 뒤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곧 기사들이 옆으로 갈라서며 한 사람이 등장했다.
“성녀님.”
라트반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자 뒤이어 신전 기사단이 따라 고개를 숙였다. 성녀는 그들의 인사를 받은 다음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를과 그 뒤의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느냐는 듯한 시선에 신관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카를은 잠시 성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이지?’
라트반을 움직이게 한 것이 성녀임을 알았다. 이제 궁금한 것은 저 상자가 무엇이며 왜 제 방에서 발견이 되게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모두 고개를 들어요.”
성녀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 명령하는 것처럼 들렸다. 카를 역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성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웃었어…?’
아주 잠시 성녀의 입가에 미소가 스친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 예전에 성녀는 자국을 이용할 때마다 며칠간은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접견실의 일이 그제의 일이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제 처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있다 들었다.
그러니 며칠간은 더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오늘의 회의도 진행시키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 눈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숙소를 뒤진 무례를 사과하겠어요, 카를 신관. 하나 촌각을 다투는 사항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요.”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것입니까. 제 방에는 제가 가져온 몇 개 안 되는 짐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요. 가져온 짐이라.”
카를은 제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떠올려 보았다. 몇 권의 책은 모두 성서들이었으며 옷이라고 해 보았자 두세 벌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펜이나 종이 같은 잡동사니들뿐이다.
“라트반 경. 그것을 잠시 줘 보겠어요?”
성녀의 말에 라트반은 깍듯히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나무 상자를 건넸다. 성녀는 그것을 집어 들더니 몇 번 흔들어 보고서는 다시 라트반에게 돌려주었다.
“라트반 경, 주변의 사람들을 물리도록 하세요. 그리고 그대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것을 반으로 잘라 주세요.”
라트반은 곧 성녀의 명령을 수행했다. 신전 기사단이 신관들과 함께 건물을 나와 뒤로 물러 세웠다. 카를 역시 그들과 함께 나와 건물을 나오는 라트반과 성녀를 바라보았다.
“모두 물렸습니다!”
사람들을 뒤로 물러서게 한 다음 기사 한 명이 외치자 라트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는 나무 상자를 하늘로 집어 던지더니 재빨리 허리춤에서 검을 빼내어 휘둘렀다.
탁!
잔상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휘두른 검에 닿은 나무 상자는 공중에서 큰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렸다. 그때였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악!
귀를 찢을 것 같은 비명 소리와 함께 상자 안에서 시커먼 것이 튀어나왔다.
“저게 뭐야!”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상자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검은 연기로 만들어진 흉측한 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중을 빙빙 돌더니 곧 목표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
카를은 숨을 멈췄다. 하늘을 날던 그것이 그의 어깨 위에 올라앉았기 때문이다.
“이, 이 무슨…!”
마치 제가 정말로 새인 것처럼 날개를 퍼덕이던 그것은 카를의 어깨에 앉은 채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나 했더니 머리가 다시 한 바퀴를 빙 둘러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또다시 사방을 빙 둘러 보았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동작에 모두가 소름이 돋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더니 그것은 카를 주변에 서 있는 신관들을 향해 제 적을 찾았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쳤다.
캬아아아아악!
다시 공기를 찢는 끔찍한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소리에 모두가 귀를 틀어막았다. 개중에 나이 어린 신관은 공포에 질려 그대로 주저앉기도 했다. 그런 신관들의 반응이 흡족하다는 듯, 그것은 몇 번이나 더 소리를 지르더니 카를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은 마치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마, 마수다!”
“마수가 어떻게 대신전에!”
마수라는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비명도 함께 들려왔다. 대신전은 대륙에서 가장 안정된 땅이며 성력이 넘쳐흐르는 곳이다. 단지 마력을 빌려 쓰는 것에 불과한 마법사들도 대신전 가까이에 오는 것을 꺼리거늘 마력 그 자체인 마수가 대신전에 나타나다니.
신관들의 비명 소리에 저도 놀란 듯 마수가 날개를 퍼덕였다. 그 모습에 모두가 그것이 곧 날아올라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라트반!”
그 난리 사이에 날카로운 성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신호가 되었다. 다들 무엇이 움직이는지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저 눈을 잠시 깜빡인 것뿐인데, 찬란한 은빛의 궤적이 생겨났다.
퍽!
무언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카를의 귓가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마수의 비명은 미처 다 울리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사라졌다. 새의 형태를 지녔던 것이 천천히 반으로 갈라지더니 녹아내리듯 무너져 내렸다. 카를의 어깨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검은 웅덩이처럼 고이더니 곧 먼지가 바람에 날리듯 흔적을 감췄다.
신관들이 놀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라트반은 이런 일은 일상이라는 듯, 검을 거두고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는 검은 웅덩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발치에 라트반이 잘라 낸 나무 상자의 조각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카를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성녀가 하는 행동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곧 나무 상자 조각을 집어 든 성녀의 손에서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성녀가 성력을 쓰는 모습에 신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성녀님께서…!”
성녀는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성력을 가진 신의 대리인이지만 그녀가 성력을 사용하는 모습은 쉬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녀 역시 인간이었기에 한 번에 너무 과한 성력을 쓰게 되면 회복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그사이에는 대륙을 지키고 있는 성력이 불안정해진다. 그렇기에 되도록 성녀의 성력은 운이 좋지 않은 다음에야 매우 중대한 일이거나 정기적으로 하는 예식 외에는 보기 힘든 것이다.
푸른빛의 성력이 잘린 나무 조각을 완전히 감쌌다.
화르르륵!
그러자 그 안에서 숨어 있던 것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듯이 붉은색의 마력의 불길이 거세게 일어났다. 주변의 나무들보다 더 높이 솟아오른 붉은 마력을 본 순간 신관들은 나무 조각에서 솟구친 마력이 얼마 전, 난리가 났던 거대한 마력과 비슷한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험합니다!”
“막아!”
마력이 성력을 뚫고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듯 타오르기 시작하자 다시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기세등등했던 마력의 주변을 성력이 휘감기 시작한 것이다. 어지럽게 날뛰는 마력을 덩굴처럼 성력이 감기 시작하자 마력은 그 안에서 더욱 날뛰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그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마력의 난동이 끝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력이 일렁이나 싶더니 순식간에 마력은 흔적 하나 남김없이 사라졌다. 마치 큰 짐승이 작은 먹잇감을 한 번에 삼켜 버린 것처럼.
“맙소사….”
“성녀님의 성력이….”
위협적이던 마력을 순식간에 잠재우는 성녀의 모습에 모두가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모두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신의 대리인이라는 자격에 걸맞지 않다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던 성녀가 신으로부터 받은 위대함을 모두에게 보인 것이다.
“성녀님이 마수를 물리치셨다!”
“마력도 한 번에 해치우셨어!”
외침은 곧 환성으로 바뀌었다. 기쁨을 숨기지 못한 감탄사들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그 소란 속에서 성녀가 제 손에 들린 나무 조각을 다시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곧바로 숨을 죽이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마력을 막을 수 있는 나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래전에는 많았지만 사람들이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 베어 내면서 이제는 무척이나 희귀해졌지요. 아주 가끔 대륙의 변방 지역에서나 발견된다고 하더군요. 카를 신관, 그대가 머물렀던 그 신전의 주변에서 말입니다.”
성녀의 말에 카를의 옆에 서 있던 신관 하나가 한 걸음 그에게서 멀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를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더 붙여 보고자 했던 자였다.
“…저는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군요.”
성녀의 말에 카를은 이를 물었다. 성녀의 말대로 그런 나무가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는 이미 오래된 전설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성녀의 손에 들린 것이 그 나무라고?
성녀는 카를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들려 있던 것을 라트반에게 넘기고는 카를을 향해 다가갔다
“당신의 숙소를 뒤진 것은 투서가 붙었기 때문입니다.”
“…투서?”
“그대가 변방에서 무척이나 위험한 것을 가져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대가 변방의 신전에 머물며 마수를 길들였고, 그 마수를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이 대신전까지 끌고 왔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카를이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성녀는 가차 없이 그의 말을 잘랐다.
“어찌 당신이 그러하겠습니까? 말도 안 된다 생각하고 곧바로 그 투서를 떼어 내 불태우라 말했지요. 하나 이미 본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투서에는 그대의 처소에 있는 나무상자를 찾으라 쓰여 있더군요. 먼저 그대를 불러 이야기를 나눌까 했지만 오히려 그사이에 더 좋지 못한 소문이 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쁜 것을 알면서도 급히 라트반 경에게 일을 부탁했습니다. 라트반 경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신관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기사단의 단장인 라트반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의혹 한 점도 남기지 않고 제대로 일을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게다가 라트반은 카를이 떠나기 전에 그와도 친분이 있지 않았던가. 카를을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을 할 터였다.
“그런데….”
성녀는 유감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라트반의 손에 들린 나무 상자를 보았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성녀의 태도에 사람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무례하다 생각했던 성녀의 행동은 사실 카를 신관을 위해 급히 움직인 것이었다.
과거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근에는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던 성녀였다. 그 증거로 성녀를 피해 다녔던 라트반 단장이 이제는 그녀의 곁을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성녀는 카를 신관과도 그렇게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 라트반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과라니.
안쓰러운 눈으로 성녀를 보던 시선들이 카를을 향했다.
“누명입니다!”
카를은 그답지 않게 큰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성녀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카를 신관.”
성녀는 다시 한 걸음 카를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카를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성녀가 제게 다가오다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내 모든 힘을 다해서 꼭 그대의 무죄를 증명하려 하니….”
그렇게 말하며 성녀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 순간 카를은 소름이 돋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성녀의 시선이 지독히도 낯설었다.
분명히 이벨리나인데, 이벨리나가 아닌 것처럼.
그사이 카를의 앞에 똑바로 선 성녀가 모두가 보는 가운데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카를 신관, 그대는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의 일을 나에게 맡겨 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