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48)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얼굴이라도 한 대 갈겨 버렸을 텐데.’

레온은 네가 할 거냐는 질문에 그대로 굳어 버리는 라트반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의 머리가 이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다.

성녀는 그녀의 몸에 있는 이상한 자국 때문에 욕정한다고 했다. 그녀의 의지와 관계없이 몸이 쾌락을 얻기 위해 남자들을 원하는 것이다.

레온은 처음 성녀를 안았던 날이 생각났다. 혼자서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오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의 상황과는 달리, 그때는 이렇게 이성을 잃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그때도 성녀는 울고 있었다.

만약 그때, 안아 달라는 그녀에게 왜 울고 있냐고 한 번만이라도 물었다면 지금까지 그녀가 이런 일을 겪어 온 것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레온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그때는 그저 조금 흥미를 가진 여자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에 그저 즐거웠을 뿐이었다. 분명 많은 자와 관계를 했을 몸이 긴장으로 덜덜 떨며 서투른 척하는 것을 보고 꽤 재미있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수가 뻔히 보이는 짓을 한다 생각하며 일부러 더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아마 성녀도 이런 걸 원하지 않았을까 짐작하면서.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서투른 척이 아니라 서투른 것이었고 괴로운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더 흥분해 박아 대었던 저를 생각하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온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성녀는 그를 원해서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안 순간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레온은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제 몸을 스스로 그에게 비벼 대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손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잔뜩 젖은 천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 그 너머가 얼마나 따뜻하고 황홀했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어찌할 새도 없이 제 아래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레온은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손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내렸다.

“……!”

끝까지 올라간 예복의 치마 아래 아찔할 만큼 흰 다리가 활짝 벌려져 있었다. 그 다리 위에 기분 나쁜 색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국이 보였다. 그 자국 위에는 어느새 방울방울 맺혔던 피가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성녀가 제 손톱으로 뜯어내려 했던 흔적이었다.

이로 물어뜯는 것과 달리 사람의 손으로는 저렇게 깊은 상처를 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저런 흔적이 남을 정도로 성녀는 진심으로 저 자국이 싫은 것이다.

레온은 다시 그녀를 살폈다. 다시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악물고 벌벌 떠는 그녀가 보였다. 이제 그의 목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기 직전 그녀가 필사적으로 했던 일은….

레온은 성녀를 끌어안은 다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굳어 버린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라트반이 서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레온은 자신과 달리 아직까지 그와 성녀가 아무런 육체 관계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사실이 전혀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라트반이 성녀와 아직 몸을 섞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뻤다. 하지만 그 말은 라트반 혼자 그녀에게 특별하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저에게는 다가와 안아 달라 한 성녀가 라트반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거절했을 가능성도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굳어 있는 라트반을 살핀 순간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아래도 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성녀를 원하듯, 라트반 역시 그녀를 원한다. 하지만 그는 가지지 못했다. 성녀는 라트반을 다른 남자들보다 더 소중히 생각한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치졸함은 더 큰 분노가 되었다. 레온은 그 분노의 화살을 라트반에게 돌렸다.

“눈 감고, 귀 막고, 돌아서.”

서슬 퍼런 레온의 목소리에 라트반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뭐라고 했습니까.”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

레온은 성녀를 끌어안은 손을 움직였다. 긴 손가락이 예복 뒤의 단추를 빠르게 풀었다.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간 손은 매끈한 등허리를 거침없이 쓸어내렸다.

“아, 으, 으읏!”

그런 레온의 손길에 성녀는 도리질을 치면서도 들뜬 숨을 뱉었다. 이제 레온이 그녀를 끌어안을 필요는 없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듯 성녀가 필사적으로 레온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기 때문이다. 레온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성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고는 라트반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할 수 없는 방법이지. 해서도 안 되고. 의무도 다하지 못한 주제에.”

레온은 라트반의 의무를 떠올렸다. 신전 기사단의 단장. 단순히 기사들을 통솔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의 의무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성녀를 수호하는 것이다. 저 명성 높은 고결하고 강한 기사는 가장 중요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런 자에게 성녀를 맡길 수 없다.

“머리라는 게 있다면 이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밖에는 신관들이 득시글거린다. 우연히 이곳에 온 자들이 아니다. 카를이 자신을 보냈던 것처럼 저 신관들도 일부러 이곳으로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교활한 새끼인데 눈치도 빠른 새끼야. 당신과 내가 뭘 원하는지 그놈은 정확하게 알고 있군.”

우연히 만난 척을 하며 이곳에서 만나자고 할 때부터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는데. 카를은 아무래도 성녀를 두고 그와 라트반이 재미있는 꼴을 보여 주며 신관들이 그것을 감상하길 바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새끼가 아무래도 성녀를 이렇게 만들 수 있나 보군. 이 모든 게 우연일 리는 없으니 말이야.”

“…….”

그 말에 라트반은 침묵을 지켰다. 그런 라트반을 노려보는 레온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자신의 말에 라트반은 크게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걸 다 숨기고 있었다 이거지.’

성녀의 말을 들으니 아슬란도 다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레온은 그것이 더욱 화가 났다. 알고 있는 놈들이 막지 못했다고?

다시 그가 라트반에게 날 선 소리를 하려는 순간, 성녀가 그러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들어 그에게 입을 맞춰 왔다. 내뱉으려던 말은 입 안으로 들어온 작고 부드러운 혀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제 안을 더듬는 감각에 레온은 잠시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잊어버린 채, 본능을 따랐다.

그의 손이 성녀의 머리 뒤를 받치며 그녀가 물러설 수 없도록 했다. 혀가 얽히고 타액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계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슬란이 그와 라트반에게 개새끼라고 불렀던 것이 갑자기 기억났다. 그 재수 없는 마법사가 부르는 그 호칭을 지금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친 듯이 저에게 매달리던 작은 몸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레온의 눈에 눈물로 범벅이 된 성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와 닿는 순간 다시 잠깐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함정에 빠진 이상 성녀를 안아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울고 있는 그녀를 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라트반에게 맡길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레온은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엉망이 된 얼굴을 한번 닦아내 주었다.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눈으로 성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레온, 레온… 제발… 더….”

제가 원하지 않는 말을 내뱉고 있는 성녀의 모습에 레온은 갈등했다.

‘어떻게 할까.’

이것은 기회다. 이렇게 이성이 흐려져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말을 속삭이며 원하는 것을 주면, 그는 무척이나 손쉽게 성녀와의 다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저기서 망연한 얼굴로 성녀에게 손조차 대지 못하는 저 라트반까지 완벽하게 쳐 낼 수 있다. 성녀와 라트반의 마음에 말로 된 쇳덩어리를 던져두면 된다. 그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레온은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은 손에 넣어야 하니까. 하지만.

“리나.”

레온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당신이 원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 말에 다시 성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 미안함을 읽은 레온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시간이 그저 당신에게 끔찍함만으로 기억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레온은 성녀를 안아 들고 접견실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대신전의 방치고는 화려한 곳이었기에 한쪽 창 아래 푹신한 긴 의자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 성녀를 내려놓은 다음 그는 고개를 돌렸다.

“성녀께서는 자네가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 것 같은데.”

그보다 더한 조롱을 할까도 싶었지만 레온은 이 정도에서 멈추기로 했다. 그를 공격해 보았자, 결국 성녀가 그 말을 더욱 곱씹으며 상처를 입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서로를 가려 주는 벽 따위는 없는 방이다. 라트반은 저곳에 서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온은 라트반이 그러지 않을 것을 알았다.

레온은 있는 힘껏 긴 의자를 잡아 돌렸다. 적어도 등받이가 그녀의 모습 정도는 가려 줄 것이었다. 의자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는지 문밖에서 신관들의 말소리가 잠시 멈추는 것이 들렸다.

곧 다시 이어지는 신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온은 제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곧 셔츠까지 벗어 던진 그는 의자에 앉은 다음 눕혀 두었던 성녀를 안아 올렸다.

“으, 으응….”

몸부림을 치는 사이 성녀의 옷 또한 거의 벗겨지다시피 흐트러져 있었다. 레온이 그 옷들을 조심스럽게 풀어 내리자 성녀가 그의 맨살에 제 몸을 가져다 대었다. 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맨살에 닿으며 모양을 바꾸었다. 그 가슴을 거칠게 잡고 싶은 욕망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레온은 천천히 제 몸을 움직였다. 그것은 몸 전체로 하는 애무였다.

그의 몸에 닿은 따뜻한 피부에 땀이 송골 맺히며 젖은 피부가 들러붙었다.

“아, 읏!”

성녀는 제가 뱉은 신음에 놀라는 것 같더니 다시 입술을 물었다. 그러잖아도 붉었던 입술에 피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레온은 작게 한숨을 쉬며 성녀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그녀가 제 어깨에 얼굴을 묻도록 조심스레 이끌었다.

그녀의 입술이 제 어깨에 닿은 것이 느껴지자 레온이 다정하게 말했다.

“소리를 못 참을 것 같으면, 그냥 나를 물어요.”

레온은 저를 물라 말한 후 천천히 손을 내렸다. 어느새 열기로 달아오른 부드러운 살결이 끈적하게 그의 피부에 달라붙었다. 살면서 이보다 더 뜨거운 것을 겪어 본 적이 있을까. 닿은 곳이 전부 녹아 흘러내리는 것 같다.

밑으로 내려간 손이 성녀의 아래에 닿았다. 이미 그녀의 안에서 잔뜩 흘러나온 것은 그녀를 마지막으로 지켜 주는 얇은 천 조각을 푹 적신 채, 다리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온은 이를 악물며 천의 옆을 묶은 끈을 풀었고 그것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온의 손이 다시 성녀의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그 순간 따끔한 통증이 그의 어깨에 느껴졌다.

“……!”

제 어깨를 꽉 무는 성녀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도대체 얼마나 예민해져 있는 것일까. 그저 닿은 것뿐인데도 성녀는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레온은 망설였다.

답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라트반도 성녀도 이 자국이 불러일으킨 욕정을 없애는 방법이 관계를 맺는 것뿐이라 이미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선택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것이 단지 성녀를 위해서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레온은 고개를 돌려 라트반을 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제 눈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안긴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는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눈이 타들어 가고 사지가 잘리는 듯하며 속에서는 삼키지 못한 불덩어리가 돌아다니는 느낌이겠지.

‘네가 선택한 거잖아.’

성녀의 위기는 곧 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회는 놓치지 않고 잡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 기회는 라트반이 아닌 자신이 잡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레온의 눈이 가만히 서 있는 라트반을 향했다.

멍청한 자다. 성녀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자. 그 알량한 신전 기사의 체면이 무엇이라고 다가오지조차 못하고 저리 멍청하니 서 있는 걸까. 레온과 시선이 마주친 라트반의 얼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참담함이 가득했다.

레온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하의가 내려갔다. 그의 것은 이미 한참 전부터 잔뜩 부풀어 성이 나 있는 상태였다. 제가 곧 맛볼 느낌을 기억이라도 하는 것인지 그의 아래는 침을 뚝뚝 흘렸다. 제 아래를 꺼내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활짝 벌려진 성녀의 밀부에 가져다 대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살덩어리가 잔뜩 젖어 있는 틈 사이를 문질렀다.

“읏….”

그의 어깨에서 잔뜩 짓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끌어안고 있는 성녀의 몸이 들썩이며 떨렸다. 분명 지금 세상의 모든 참담함은 라트반이 짊어지고 있을 것 같은데, 레온은 자신 역시 그 못지않게 속이 썩어 가는 것을 느꼈다.

이벨리나, 당신이 지금 이 순간 나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가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도구로 그를 선택한 것뿐이다. 그의 선택이 아닌 성녀의 선택이었다.

이대로 그만두어야 할까.

하지만 레온은 그것이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님을 알았다. 어찌 되었거나 성녀의 이성을 되찾게 해 주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레온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적어도 이 시간이 그녀에게 수치스러운 고통으로 기억되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녀를 안는다는 것을 선택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

레온은 크게 숨을 마신 뒤 그녀의 아래에 자신을 맞췄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힘을 주었다. 성기의 끝이 부드럽고 연약한 살 틈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감췄다.

“……!”

성녀가 아닌 그가 신음을 참아야 했다. 잔뜩 흥분되어 있던 성녀의 몸이 허겁지겁 그의 침입을 반겼다. 예전이라면 그런 그녀를 즐기며 거침없이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조금이라도 쾌락을 느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온은 천천히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더욱 거세게 어깨를 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따뜻한 물방울이 그의 어깨로 떨어지는 것도.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이다. 레온은 다시 성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깨에 더욱 얼굴을 묻게 한 다음 제 몸을 뒤로 빼내었다.

성기의 가장 굵은 부분이 입구에 걸렸다. 그가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챈 그녀의 몸이 움찔 떨리며 안을 꽉 조여 왔다. 제 것을 붙잡는 그녀의 몸에 레온은 이를 악물었다. 다시 그의 허리가 움직였다.

더 빨리, 거칠게 움직이라는 본능을 거부하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일 줄이야. 더 해 달라 조르는 듯한 성녀의 움직임에도 그는 속도를 올리지 않은 채, 그저 천천히 드나들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레온은 계속해서 본능을 누르고 그녀를 위해 움직였다.

‘죽여 버리겠어.’

성녀의 허벅지에 있던 자국이 떠올랐다. 그리고 제게 이곳에서 만나자 말하던 카를의 얼굴도.

그저 움직임에 불과한 몸짓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으응….”

성녀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제 몸을 미친 듯이 문질러 대던 움직임도 멈췄다. 레온은 그녀가 정신을 차렸음을 알았다. 그녀를 감싸 안고 있던 손을 떼자 성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렸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잠시 몸을 비틀더니 아직도 깊게 이어져 있는 아래를 보았다. 레온은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성녀는 자신을 어떻게 볼까. 레온은 그것이 두려웠다. 그녀를 위해 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웃긴 변명인지 그 역시 알고 있다.

게다가 저기 제 앞에는 결국 끝까지 스스로를 억눌렀던 라트반이 서 있지 않은가. 성녀로부터 원망을 들을 각오를 하고 있던 레온의 귓가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그 목소리에 레온은 입술을 물었다. 첫날 밤에도 그녀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무엇이 미안하냐고는 물을 수 없었다. 그러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레온은 말없이 성녀를 끌어안았다. 뭐라 더 말하려던 성녀의 몸이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어느새 정신을 잃은 것이다. 힘을 잃은 몸에서 레온은 천천히 제 것을 빼냈다. 꼭 맞붙어 있던 자리에는 뿌연 정사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렇게 비참하고 허무한 정사는 처음이었다. 분명 원하던 사람을 안았음에도 공허함만을 느꼈다.

레온이 일어나기 위해 제 하의를 올리는 사이 라트반이 다가왔다.

“…….”

“…….”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입도 열지 못할 자괴감에 눌리고 있었다. 이런 일에 승리자 따위는 없었다. 두 사람 다 그녀를 지켜 내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허우적거려야 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레온과 라트반은 고개를 돌렸다.

“안에 계시는지요, 성녀님.”

문밖에서 카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온과 라트반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

“안 계시는 것 아닙니까?”

카를의 뒤에 서 있던 신관이 대답이 없는 문을 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여기에서 뵙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카를은 일부러 불편한 다리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몇 번이나 알현을 요청해 겨우 허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장소와 시간을 잘못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신관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카를을 향했다.

카를이 떠나기 전 이상하리만큼 그를 피하고 꺼리던 성녀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카를에게 가혹하게 굴었던 성녀를 떠올리자 신관들의 얼굴에 의심의 빛이 떠올랐다. 혹시, 성녀가 일부러 오지 않은 것인가, 하는 의심이.

“저기… 조금 전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긴 했습니다만.”

문 앞에 모인 이들이 웅성거리던 중, 옆 접견실에서 나온 신관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도 들었습니다. 의자 끌리는 것 같은 소리하고… 어… 숨소리 같은 게 들렸던 것 같기도….”

목소리가 작아지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신관의 말에 다시 몇몇 신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설마….”

“아니, 그래도 한동안은 조용하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성녀님의 처소 외에서 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요.”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누는 신관들을 향해 카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었다.

“한동안 조용했다니? 무슨 말입니까?”

“아, 그게… 카를 신관께서는 모르셔도 되는 일입니다.”

신관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혹시나 카를이 더 물어볼세라 급히 자리를 피했다. 카를은 다시 몸을 돌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제가 원한 대로 잘된 모양이었다.

‘어떻게 되었으려나?’

이 안에 성녀는 물론이고 라트반과 레온이 함께 있다. 라트반과 했을 것이다. 어쩌면 레온과 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셋이 했거나.

신관이라면 꿈에서라도 생각하지 못할 장면들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카를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상상들이기도 했다. 이미 그가 모두 해 본 것들이 아니었던가.

이벨리나는 관계를 가지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덕분에 꽤 재미있는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다는 존재가 제 책상 아래에서 덜덜 떠는 모습은 저 혼자만 보기에는 무척이나 아까운 광경이었다.

오래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카를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안에 없는 척해 보아야 쓸데없는 짓이다. 게다가 이곳은 꽤 높은 곳이기도 했다. 창을 통해서 도망칠 수도 없는 그런 곳.

카를은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화려하고 두꺼운 나무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라트반일까, 레온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한 놈이라도 성녀의 곁에서 쳐 내고, 성녀의 명성이 더욱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이다. 그래야 예전처럼 다시 제게 매달릴 테니까.

그때 안쪽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언가 이질적인 힘이 아주 잠시. 이와 비슷한 것을 얼마 전 느낀 적이 있었다. 대신관 선출 회의가 미뤄졌던 그 날, 대신전 전체에 퍼졌던 마력.

“허가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소리가 들렸다 하여….”

급히 들어선 카를의 얼굴이 굳었다.

접견실 안에는 레온이 앉아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새를 한 그가 카를을 보더니 반갑다는 얼굴로 웃었다.

“아, 카를 신관. 기다리고 있었네.”

웃는 얼굴이었는데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카를은 급히 방 안을 살폈다. 숨을 곳도 없는 방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녀와 라트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열린 창문의 커튼만이 바람에 펄럭였다.

***

톡. 톡.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따뜻해.’

기분 좋은 따스함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나른함에 이제 막 정신을 차렸음에도 다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들었었나? 지금이 몇 시지?’

좀처럼 머리가 맑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를 바라보던 라트반과 레온의 모습이. 두 사람의 일그러진 얼굴이.

“허억!”

놀라 번쩍 눈을 뜬 순간 촥!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여긴….”

눈을 뜨자 내가 물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확히는 욕조 안에. 내 처소가 아니었다. 익숙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곳도 아니었다.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단출한 공간. 몇 개 되지 않는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곳.

여기는 분명 라트반의 저택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장소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곧 밀려오는 현기증에 그대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며 욕조 안의 물이 부딪혀 튀어 올랐다.

“으….”

눈앞이 순간 까맣게 변했다. 아무래도 따뜻한 물에 잠겨 있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욕조의 가장자리를 잡은 다음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러자 조금씩 다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지막은 분명….’

기억의 끝을 살펴보았다. 접견실에서 욕정에 휩쓸렸고 그런 나를 레온이 안았다. 몸 안을 가득 채웠던 그의 느낌과 함께 일그러져 있던 레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표정에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도 함께 생각이 났다. 하지만 기억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정말 어떻게 된 거야?’

그 접견실은 꽤 높은 층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그러니 쉽게 뛰어내릴 수도 없다. 게다가 나를 안고 뛰어내리는 것은 라트반이라 해도 큰 무리가 있을 터였다. 밖에 있는 신관들을 피하겠다고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할 리도 없다. 오히려 더욱 이목을 끌 테니 말이다.

‘설마….’

그냥 신관들이 있는 복도로 나온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따뜻한 물 속에 있는데도 오한이 들었다. 사람들이 내 그런 모습을 봤단 말인가? 이성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은 채 그저 성욕에 잠겨 헐떡대는 꼴을?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몰려왔다. 저절로 턱이 덜덜 부딪히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점점 더 아득해지려 하던 정신은 라트반과 레온을 떠올린 순간 겨우 다잡을 수 있었다. 내가 발정하기 시작하자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이를 갈던 두 사람이다. 밖에 있는 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이 노력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신관들이 나간 다음에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고 다리에 손을 올렸다. 자국의 옆에 내가 손톱으로 냈던 상처가 만져졌다. 조금 더 손을 움직여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얼얼한 감각이 내가 레온과 관계를 나누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자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신관들의 눈은 피했을지 몰라도 라트반의 눈은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삼 당황스러웠을 상황에도 긴 의자를 돌려 준 레온의 행동에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의자의 등받이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끼익,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평상복을 입은 라트반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라트반? 어떻게 된 건가요? 왜 내가 여기 있나요?”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라트반이 대답했다.

“나오신 다음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단 수건과 옷을 가져오겠….”

“거기에서 어떻게 나온 건가요? 설마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나온 건…!”

거기까지 말한 내가 일어나기 위해 욕조 끝을 잡은 순간 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다시 힘주어 팔을 뻗었지만 이번에는 미끄러지고 말았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성녀님!”

물 너머로 웅웅거리는 것 같은 라트반의 외침이 들려왔다. 곧 물속에 가라앉은 나를 큰 손이 잡아 끌어냈다.

“쿨럭! 쿨럭!”

물을 삼킨 탓에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라트반은 그런 내 등을 두드리려 하다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완전히 붉어진 얼굴을 최대한 옆으로 돌린 다음에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더니 라트반이 그대로 나를 안아 올렸다.

“자, 잠깐만! 라트반!”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잊은 채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핑, 하고 눈앞이 도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에 잠겨 있던 몸이었기에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흠뻑 젖어 있었다. 당연히 그런 나를 안아 든 라트반의 옷도 흠뻑 젖기 시작했다. 게다가 지금 알몸으로 그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은 혼란스러운 내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난 괜찮, 쿨럭!”

내가 듣기에도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라트반은 계속해서 쿨럭거리는 나를 안고 어디론가 향했다. 문이 열리자 그곳 역시 내 기억에 있는 곳임을 알아차렸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넓은 침대. 라트반의 침실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내려놓더니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

“수건과 입을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라트반은 곧바로 방을 나갔다. 아직도 내 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탓에 침대 위의 시트가 푹 젖는 것이 보였다. 미안한 마음을 접어 둔 채, 떨리는 손으로 침대 위의 얇은 시트를 집어 몸을 감쌌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미안함과 민망함이 섞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라트반이 돌아왔다. 그는 문을 살짝 열어 둔 채, 수건과 옷을 든 손만 안으로 내밀더니 말했다.

“여기에 두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잠깐만, 라트반. 설명을 좀… 읏!”

문을 닫으려는 그의 모습에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을 감고 있는 시트에 걸려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부딪히는 큰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나무 바닥을 굴렀다. 무릎과 몸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일어나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몸을 감은 시트가 마치 사슬처럼 내 움직임을 막았다. 일어나려고 꿈틀거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일어나야 하지?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왜 내가 일어나려고 노력해야 하지? 일어나면 달라질 것이 있을까? 일어나서 무엇을 하려고? 내가 하는 것들에 의미가 있을까?

꿈틀거리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차라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해도 결국은 엉망일 뿐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누군가에 의해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운명을 피하려 발버둥 쳐도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죽고 싶어.’

눈을 뜬 다음 처음으로 다시 죽음을 생각했다. 그동안은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감히 할 수 없었던 죽음을. 이벨리나의 몸에서, 이벨리나로 살아가면서 몇 번이고 가슴을 졸여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때는 내가 진짜 이벨리나가 아님을 들키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고 책 속의 내용과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볼 때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다가온다는 사실에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죽음 앞에서는 아주 사소한 감정의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죽었던 순간의 끔찍함을 기억하고 있기에 절대로 두 번 다시 그것에 삼켜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마주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대로 살면 다시 마주해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이 자국이 있는 한, 나는 언제든지 다시 이성을 잃고 타인에게 매달려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구걸을 할 것이다.

남은 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도 모르게 시트를 움켜쥐었다.

“싫어….”

한 번 겪은 것만으로도 비참함의 바닥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런 일을 두 번, 세 번, 아니 앞으로 계속 겪을 거라고 생각하니 손이 떨려 왔다.

‘죽고 싶어.’

다시 죽음을 떠올린 순간 이벨리나의 의식 속에서 보았던 기억이 생각났다.

“왜 죽을 수 없는 거지?”

그렇게 말하던 이벨리나의 손에는 깨진 꽃병의 조각이 들려 있었다.

성녀에 대한 것도 함께 기억이 났다. 성녀는 죽을 수도, 누군가를 죽일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죽을 수 없다. 지금은 내가 이벨리나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도 못하지만 성녀이기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묻었다. 오래되고 거친 나무의 냄새가 부스럭거리는 시트의 아래에 가득했다.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어.’

이대로 바닥의 작은 무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일에도 초연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쳤다. 모든 걸 그만하고 싶었다.

이젠 다 포기하고 싶다.

어차피 내가 있던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잊었을 것이다. 가끔 오는 부모와 기계적으로 내 이름이 적힌 차트를 확인하던 의사와 간호사들을 제외하면 그 세상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사람은 없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성녀인 이벨리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어느 날, 그 이벨리나로 살기 시작했던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나는 먼지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일어나서 옷을 입고 빨리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빨리 내 처소로 돌아가야 라트반이 귀찮지 않겠지. 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싫었다. 혹시나 내가 사라지면 그의 기억 속에 나는 그저 성가신 존재로 남아 있게 될까 봐.

움직여야 하는데 계속해서 눈물만 흘렀다. 서두르자. 서둘러야 해. 어서 옷을 갈아입고….

“……!”

그때 갑자기 내 몸이 들렸다. 놀라 고개를 들자 눈물 때문에 흐릿한 시야에 굳은 라트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더욱 눈물이 났다.

그토록보기 싫으면서 왜 일으켜 주는 것인지.

“내려 줘요.”

울음에 잠긴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을까. 라트반은 내 말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꽉 잠긴 목에 힘을 주며 다시 그에게 말했다.

“내려 달라니까요.”

이번에는 확실히 말했다. 그가 다시 내려 줄 것을 기다리며 나는 그가 가져온 옷이 어디에 있나 살폈다. 하지만 바닥에 닿을 것을 기다리던 내 생각과 달리 라트반은 품에 안은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럴 수 없습니다.”

“…….”

잠시 그가 무어라 말한 건지 이해하지 못해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라트반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놓을 수 없습니다.”

놓을 수 없다.

라트반은 성녀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제 품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에 젖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시리도록 흰 피부 위를 덮고 있다. 좁고 동그란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의 품을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움직임에 라트반은 가슴 깊숙한 곳이 무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두려운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은 상처 입은 작은 짐승이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라트반은 자신 역시 성녀에게 안정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전의 기사단장은 성녀를 지키기 위해 있는 존재다.

역대 수많은 기사단장들이 모두 훌륭히 그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점점 더 성녀의 힘이 공고해지고 대신전이 커 나가면서 기사단장의 임무는 주로 성녀를 대신해 마수를 토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기사단장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녀의 수호.

라트반은 자신이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성녀의 곁을 떠나야 할까.

‘안 돼.’

그의 본능이 강하게 그것을 거부했다. 지금 그가 이대로 성녀를 보내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라트반은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니, 단지 두려움이라는 말로는 그 공포를 설명할 수 없었다.

수백, 수천의 마물을 상대해 온 그였다. 덕분에 죽음의 공포를 라트반은 셀 수 없이 경험했었다.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발톱이 그의 목을 노렸을 때도, 집채만 한 크기의 마수가 저를 향해 자비 없이 발을 내려찍을 때도 라트반은 계속해서 공포와 맞서 싸워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위협이 없는 대신전의 제 저택에서 단지 한 사람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몸이 떨려 왔다. 그러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품의 성녀를 끌어안았다.

수호라는 말은 너무도 거창하여 정작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성녀가 제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기를, 떨지 않기를 원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것을 막을 벽이 되고 싶었다. 젖어 떨리는 몸을 녹일 수 있는 모닥불이 되고 싶었다.

기사단장이 된 이후, 처음으로 라트반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았다.

그사이 성녀의 발버둥이 멈췄다. 아무래도 그가 자신을 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때 성녀가 그에게 물었다.

“…왜 하지 않았나요?”

라트반은 잠시 그것이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성녀가 입을 열었다.

“…내 모습이 그리도 꼴불견이던가요?”

“……!”

그제야 라트반은 성녀가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

왜 접견실에서 그녀가 욕정에 몸부림을 쳤을 때 안지 않았냐는 말이었다. 성녀는 그가 가장 대답하기 괴로운 것을 물었다.

***

내 질문에 나를 안은 팔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때도 그랬었다. 레온이 라트반을 향해 ‘그러면 네가 하겠냐.’라고 묻는 순간 라트반은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것은 차마 할 수 없다는 듯이.

이 질문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신전의 기사다. 그 누구보다도 대신전의 규율을 따라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 도와준다는 이유로 여자를 안을 리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가오지 않던 그를 생각하면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의 행동이 내 오만함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정도 내 안에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던 세 사람과의 관계를 바꾸었다는 자신이. 세 사람에게 가졌던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고 예정되어 있던 미래를 잘 지워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가오지 않는 라트반의 모습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묻는 것 같았다.

나에게 호감을 보였으니 당연히 그도 나를 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짓일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스스로 세 사람에게 그은 선을 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나는 모두에게 그 선을 넘어 나에게 와 달라고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끝까지 선을 넘지 않았던 라트반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런 마음이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다는 것을 안다. 혼자서 멋대로 생각하고, 기대하고,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부리고.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다 좌절하고 제 수치를 보였다는 사실에 그저 도망가고 싶은 그런 어리고 유치한 마음. 그러면서도 날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대로 영원히 굳어 있을 것만 같았던 라트반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시트를 감은 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아마도 그는 입을 것을 찾아 오겠다며 방을 나가겠지.

나에게서 멀어진 라트반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을 때,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트반?”

생각하지 못했던 그의 행동에 놀라 그를 불렀다. 도대체 왜 그가 무릎을 꿇는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것에 신경을 쓴 탓에 그가 사죄의 말을 했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무엇을….”

“괴로워하실 때, 가까이 가지 못한 것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할 수 없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아래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른 나무 바닥을 적신 자국은 천천히 커져 나갔다. 그 자국이 희미해지기도 전에 다시 또 다른 자국이 생겨났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명령을 하셨어도 저는 따를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신께서… 진심으로 원해서 하시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라트반.”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그가 울고 있었다.

수많은 전투에서도, 팔이 날아가고, 눈을 잃을 뻔한 상처를 입었어도 그는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들었다. 나는 가만히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아무도 내 마음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상처 받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라트반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세상에서 더없이 슬픈 일이라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조차도 대단히 여기지 않았던 것을 위하여.

“…고마워요.”

꿇어앉은 라트반을 향해 중얼거리자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당신께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라트반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죄를 고백하는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께 품어서 안 되는 것들을 욕망합니다.”

“…….”

“욕정, 아니 발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보고 있으면….”

그가 눈을 감으며 고백을 이어나갔다.

“당신을 만지고 싶습니다. 당신께 입을 맞추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을 보는 순간마다 탐하고 욕정을 합니다.”

날카로운 칼이 그의 속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라트반이 뱉어 내는 말 하나하나에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에 진저리 치는 그의 표정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황태자가 당신을 안았던 순간 저는….”

라트반이 내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 누구보다도 고고하던 성기사는 더 아래를 찾아 제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모든 자존심과 고결함은 바닥에 내던진 채 그가 고백을 이었다.

“…그가 부러웠습니다.”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는 것처럼, 그의 몸이 잘게 떨렸다.

아마 라트반은 모를 것이다. 그의 죄가 나에게는 기쁨인 것을. 시트를 끌어당기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를 바라보는 라트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내가 왜 이러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도대체 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느냐는 듯한 그의 눈빛에는 경계를 하면서도 숨길 수 없는 기쁨의 빛이 보였다.

그가 미처 감추지 못한 기쁨을 확인하며 나는 입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왜… 어째서….”

망설이면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답을 구하려 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고 싶은 것 같았다. 나를 보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곧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았다. 시트 사이로 드러난 다리에는 불길한 색의 자국이 보였다. 곧, 라트반의 얼굴이 흐려지며 그가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에요, 라트반.”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아차린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젖은 옷 너머로 단단히 긴장한 그의 몸이 느껴졌다.

“이것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내가 하고 싶은 거예요.”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는 원하지 않고 떠밀려 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이벨리나라고 속이기 위해. 또는 자국이 불러일으키는 욕정에 의해서. 그나마 상대가 레온과 아슬란이었기에 정사에 대한 기억이 끔찍하지 않을 수 있었다. 거칠고 성급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나를 상처 입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과의 관계를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내가 원해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두 손으로 라트반의 얼굴을 감쌌다. 그는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저 따르겠다는 듯,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대로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조심스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그저 얇은 살결이 닿는 단순한 행위에 불과한데, 느껴 본 적 없는 열기가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하아….”

내 입술 아래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신음 소리였다. 소리와 함께 새어 나오는 라트반의 뜨거운 숨결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눈을 깜박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워진 그를 살폈다. 그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시선은 숨결보다도 더욱 뜨거웠다.

나는 답을 찾았다.

내가 원해서 누군가와 닿았을 때는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겪어 보지 못했던 놀라운 것이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 달리 정말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다 지워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잊을 수 있었다. 자국에 대한 것도, 카를에 대한 것도, 그 외에 나를 짓누르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나와 라트반 뿐이었다.

***

끝이 없을 것 같은 서투른 입맞춤이 겨우 끝을 맞이했던 것은, 잔뜩 젖었던 내 몸이 한기를 느낀 탓이었다. 파르르 떠는 나를 알아차린 라트반은 곧바로 몸을 떼었다. 그나마 닿아 있던 온기가 아쉬운 탓이었을까.

일어서는 그를 붙잡으려다 몸에 걸치고 있던 시트가 그대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던 라트반은 곧바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가 내 옷을 들고 왔다. 하지만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저 몸을 돌린 채,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왜 나가지 않느냐 물어보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도, 그도 지금은 같은 공간에 있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내 옷은 곱게 개어져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자 안쪽에 깨끗하게 세탁된 속옷이 툭 떨어졌다.

“어…?”

하루가 지난 것 같지는 않으니 분명 빨아서 마를 시간은 부족했을 것인데. 게다가 내 속옷이 함께 개어져 있다는 것에 머릿속이 멋대로 많은 장면을 상상해 버렸다. 순식간에 목 아래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라, 라트반. 왜 이게….”

“처음 오셨을 때… 정리해 두었던 것입니다….”

나만큼이나 라트반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라는 말에 이것이 어쩌다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인지 생각이 났다.

‘맞아, 그때 분명 수건에 감아서 갖고 나오다가… 베고 잠들었고….’

내가 처음 레온과 잤던 날에 물이 아닌 것으로 잔뜩 젖어 버린 속옷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수건에 감아 들고 나왔었다. 그리고 그 수건을 머리맡에 두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고, 그 후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리고 라트반은 그걸 세탁해서 여기에 놔두었던 모양이고.

“어… 아… 고마워요….”

내가 생각해도 고마움보다는 당혹스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말에 라트반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얼핏 보이는 그의 목덜미 역시 벌겋게 변한 것이 보였다. 나는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재빨리 손을 움직여 옷을 입었다.

사락거리는 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던 꼴로 입을 맞출 때보다 더한 민망함이 몰려왔다. 자꾸만 단추를 잠그는 손이 미끄러졌다. 그렇기에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다 입었어요.”

내가 말하자 그제야 그는 몸을 돌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열기가 묻어 나왔다. 몇 번이고 손을 쥐었다 펴며 숨을 고른 그가 나에게 말했다.

“감히 하나 청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

욕망한다는 것조차 죄스럽게 고백했던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원하는 것이 있다 말하는 모습에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의 입맞춤이 생각났다. 그저 닿는 것에서 끝났던 아주 가벼운 접촉이었다.

혹시 그는 그보다 더 깊은 관계를 원하는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망설이며 원한다 할 일이 무엇이 있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무엇을….”

그는 몇 번이고 입술을 들썩이더니 힘겹게 말했다.

“저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습니다.”

“네?”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요구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러자 라트반의 몸이 크게 움찔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 아니. 그러니까. 싫다는 게 아니라… 이름은 왜….”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라트반은 언제나 나를 성녀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었다. 하긴, 기사단장인 그가 성녀의 이름을 마구 부를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려다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이벨리나라고 부르는 건 싫어요.”

“그럼….”

“리나라고 불러 준다면 언제든지 환영할게요.”

대신전을 나갔을 때, 레온이 적당히 줄여 불렀던 그 이름이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이벨리나가 아닌 리나. 진짜 이벨리나와 나를 구분해 주는 것 같은 다른 이름.

내가 말하자 라트반은 한 걸음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리나.”

짧은 그 이름을 한번 불러본 라트반은 정말로 제가 그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작은 소리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부르고만 있어도 좋아다는 듯이 말이다.

그의 부름에 나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트반의 얼굴에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

채비를 한 후, 라트반의 저택을 나와 내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교대 시간을 잘 알고 있는 덕분이었을까.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그와 나는 밤길을 걸어 후원까지 올 수 있었다. 걷는 내내 라트반은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은지 몇 번이고 나를 바라보다 입술을 들썩였다. 하지만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러다 어느새 후원에 도착했다. 안쪽에 다른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서둘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 후원 한쪽의 벽에 다다랐다. 비밀 통로가 시작되고 있는 곳이었다.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향한 그의 걸음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라트반도 알고 있었군요.”

나만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도 알고 있었다니.

그러다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이벨리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후원에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떴더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던 일이.

“설마… 예전에 벤치에서 잠이 들었을 때 라트반이 옮겨 준 거였나요?”

“…그렇습니다.”

라트반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벽 위에 손을 올리자 푸른빛이 돌면서 들어가는 입구가 생겨났다.

‘하긴, 라트반도 신전의 기사니 성력이 있겠지.’

신전 기사들 역시 어느 정도 성력을 갖고 있다. 일반 신관들처럼 그 성력의 크기에 따라 직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단장이 될 정도라면 중급 신관 이상의 성력을 갖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의 성력을 바라보다가 이벨리나의 의식 속에서 보았던 기억이 생각났다.

창문 하나 없는 거대한 공간에 불길처럼 일렁이던 거대한 성력. 그 성력이 순식간에 줄어들던 모습.

‘그러고 보니….’

최근에 성력을 쓴 일이 없었다. 아마도 그사이에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그걸 찾으면 나에게 남은 성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지.’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간이었고 대신전을 멀리 벗어날 수 없는 이벨리나를 생각해 보면 그 공간은 분명 이 대신전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지하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성녀님?”

내가 가만히 있자 라트반이 나를 불렀다. 그가 성녀님이라 부르는 목소리에 조금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고 한 것 아니었나요?”

“그렇긴 하지만….”

내 말에 라트반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벌겋게 변했다. 그는 마치 고백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결심한 듯 힘겹게 입을 열어 내 이름을 불렀다.

“…리나.”

그가 홀린 듯이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몇 번이나 다시 말하는 그의 행동에서 이름조차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황홀한 듯 말하던 라트반은 곧 제가 뭘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듯, 멋쩍은 얼굴로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안쪽에 생긴 거미줄을 손으로 걷어 내었다.

“조심하십시오.”

이미 몇 번이고 지나다닌 길이었기에 크게 위험할 리는 없었건만, 어둠 속으로 안내하는 라트반은 세상에서 더없이 위험한 곳으로 인도하는 사람처럼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저택에서의 고백 이후 계속해서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모습에 어쩐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의 손을 잡고 어둠 속을 걷자 곧 통로의 끝이 나왔다. 익숙한 작은 방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았다. 숨기지 못한 아쉬움 섞인 작은 탄식 소리가 라트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방을 나서 복도에 나온 순간, 멀리서 날카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

라트반과 나는 놀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복도의 끝, 내 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이었다. 놀라기는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미 익숙한 기척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멀리 있는 내 방문을 바라본 다음 라트반에게 부탁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라트반. 미안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 주었으면 해요.”

“하지만….”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으려다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를 붙잡고 싶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자와 함께 있을 시간이 싫겠지. 하지만 라트반은 결국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것이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는 복도의 끝을 노려보았다.

“제가 감히 당신께서 다른 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모든 것은 당신께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만….”

먼 곳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조금이라도 다시 그들이 당신을 상처 입히거나 힘들게 하는 순간, 제가 움직이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가 다시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날을 세우고 있는 아슬란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을 하는 것이다.

입술을 짓씹고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참이나 내 위에 있는 그의 얼굴을 힘겹게 양손으로 잡자 그가 허리를 숙였다. 나는 가까워진 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다시 그의 입에서 나른한 탄식이 흘렀다.

그 소리가 마음에 들어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눈썹 사이를, 콧등 위를, 그리고 이 거대한 남자가 갖고 있다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입술을 내 입술로 눌렀다. 급하게 숨을 멈추는 그가 느껴졌다. 잠시 그렇게 라트반과 나는 가만히 있었다.

“이만 돌아가세요.”

“…….”

입술을 뗀 다음 말하자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몇 번이나 나를 다시 바라보면서 통로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차마 그에게 잘 자라는 인사는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러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나는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라트반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굳게 닫힌 문이 있을 뿐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라트반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슬란과 레온을 싫어하는 것도 아님을.

내 방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일렁이는 기운을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익숙한 내 방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아슬란의 모습도. 그런 아슬란의 앞에 무엇인가가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어둠에 익숙해진 다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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