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아슬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것이라니? 순간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묻고 말았다.
“…설마 영혼이라거나 그런 게 필요해요?”
그런 건 악마 같은 존재들이나 필요한 게 아니었던가. 아슬란이 바라는 것은 그의 새끼일 뿐, 그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는 자였다. 물론 다른 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돈이나 명예 같은 것이 아슬란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질문에 아슬란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손가락을 들어 가슴의 위를 눌렀다. 정확히 심장의 위를.
“인간들은 여기에 있다고 하던가.”
아슬란이 필요한 게 심장은 아닐 텐데.
내 가슴 위를 가볍게 꾹 눌렀던 손가락의 끝이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어느새 살짝 단단해진 끝을 톡톡 건드렸다.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 더 괴롭히기 전에 멈춰야 할 것 같았기에 한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잡아 내렸다.
이렇게 하면 분명 가만히 있으라는 듯 내 손을 밀어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슬란은 순순히 내 손길에 따랐다. 이렇게 고분고분한 아슬란은 처음인지라 신기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는 피하지는 않는군.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의 말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당신이 매번 이러다 보니까 익숙해졌…!”
내 말의 끝은 어느새 다가온 아슬란의 입술이 삼켜 버렸다. 진짜로 확 소리를 질러 버릴까 했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아슬란의 입맞춤은 하나같이 거칠고 난폭했다.
마치 그와 나누는 관계처럼. 큰 것이 들어와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헤집고 안을 탐하다 가장 깊은 곳까지 찌르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의 입맞춤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혀가 내 혀끝을 살짝 건드리더니 느릿하게 안을 더듬었다. 마치 처음으로 접하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이대로 한참을 하는 걸까 싶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아슬란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는 빠르게 나에게서 몸을 떼었다.
“너희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쓸었다.
“이 일은 마수가 최초로 인간을 위해 한 일이야.”
아슬란은 그렇게 말한 다음 그가 풀었던 단추를 잠가 주었다.
“…아슬란?”
정말로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슬란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그의 손에서 찢겨 나갔던 옷이 몇 벌인가. 그는 언제나 벗기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제는 곱게 잠겨 단정해진 옷을 바라보았다.
“…어디 아파요?”
내 물음에 아슬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웃어 봐.”
“네?”
“좀 웃어 보라고. 다른 인간들에게 하는 것처럼. 그러면 놔줄게.”
이건 또 무슨 수작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놔준다는 말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요?”
“…….”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됐어. 그만해. 보기 힘드니까.”
“…….”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표정이 된 채 아슬란은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뭐야. 이럴 거면 왜 시킨 거야? 그는 라트반이 서 있을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노란 털의 개새끼는 어디 갔지?”
***
미끼를 던지고 있지.
레온은 지금 제 상황을 그렇게 설명 하고 싶었다.
‘미리 작업을 해 두기를 잘했어.’
카를이 오기 전 신관들을 만나고 다닌 것이 헛된 일은 아니었다. 대신관의 자리를 두고 생각이 다를 순 있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레온에게 건네받은 여러 물건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온은 여러 신관의 허가를 얻어 문제없이 대신관 선출 회의에 참관인의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쉽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 중요한 회의에 완전히 외부인인 레온이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트반이 나타나 그의 신원을 보증 한 순간 모두가 군말 없이 레온을 허가했다.
“역시 라트반이라 이건가….”
그동안 무너져 가던 신전의 명예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라트반의 헌신 덕분이 아니던가. 심지어 그가 구해 준 변방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신의 이름 대신에 라트반의 이름을 기도의 끝에 말한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성녀보다 더 위세를 떨치는 라트반이었지만 그런 그를 누구도 음해하지 않는 것은 그가 그 누구보다 신을 따르며 제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대륙의 그 누구보다 강하기도 했고.
레온을 따라온 부관들 중에는 제국의 기사도 함께 있었다. 그는 멀리서 라트반을 보자마자 감동한 얼굴이 되었었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었다.
“황태자님은 본 적이 없어 모르실 겁니다. 저희 같은 기사들은 저분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영광임과 동시에 슬픔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으니까요.”
누가 들으면 제 월급과 지위를 라트반이 주는 줄 알 것이다. 황제에게 그런 표정과 목소리로 찬양을 하면 네 계급 정도는 특진할 거라며 핀잔을 주었지만 덕분에 라트반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지도 알았다.
‘지금은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는 방해다.
레온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발로 책상의 끝을 밀며 아슬아슬하게 의자를 흔들어 대었다. 레온은 조금만 삐끗하면 그대로 넘어질 것 같은 이 상태를 좋아했다. 위험한 흔들거림을 즐기고 있는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쓴웃음이 떠올랐다.
‘협력은 했지만 나눌 생각은 없어.’
레온은 세 남자가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는 상대를 떠올려 보았다. 카를 신관이 다가왔을 때 두려워하던 표정과 그들이 그녀를 붙잡았을 때 안도하던 얼굴이 차례로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걸 혼자만 보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그는 그전에 보았던 성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밀려오는 아쉬움을 달랬다. 대신전 밖의 마을에서 세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멈춰 서서 이것저것을 보던 성녀의 모습은 아마도 저만이 알고 있는 것이리라.
이제 다시 레온의 머릿속에는 라트반과 아슬란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신없이 끝나 버린 회의장에서 굳은 표정이 되었던 카를도 함께 떠올랐다.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고.”
기사와 마법사. 레온이 가지지 못한 힘을 가진 두 사람이니 성녀에게 필요한 사람들이긴 했다. 하지만 싸움이라는 것이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들판에서 마수와 붙는다면 모를까 여기는 대신전이고 검이 아닌 혀로 싸움을 하는 곳이다.
그가 가장 잘 날뛸 수 있는 전장에 레온은 감사했다.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은 자신이 될 것이다.
똑똑.
“들어와.”
노크 소리에 레온이 답하자 곧 그의 부관 중에 한 명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지금 밖에 카를 신관께서 오셨습니다.”
“…뭐?”
카를이라는 말에 레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탓에 흔들거리던 의자가 넘어질 듯 휘청거렸지만 레온은 재주 좋게 다시 중심을 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안으로 모시도록.”
“알겠습니다.”
부관이 나가자 레온은 재빨리 거울을 보았다. 저번에 카를을 만났을 때는 적당히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황태자의 모습을 선택했다. 오늘은 거기에 무엇을 더해 볼까. 고민은 짧았다. 만만치 않은 놈이니 되도록 거짓이 적은 모습을 선택하는 게 편했다.
거울을 보며 레온은 일부러 옷의 부분 부분을 흐트러트리고 표정을 손봤다. 잠시 후 거울 속에는 어딘지 초조해 보이면서도 짜증을 담고 있는 제가 서 있었다. 표정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라트반과 아슬란을 생각하면 저절로 지어지는 표정이었으니까.
일부러 카펫을 치웠기에 문 바깥에서부터 사람이 걸어오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난히 큰 소리인 탓에 다가오는 자가 정말로 카를임을 알려 주었다.
‘미끼를 던지긴 했지만 처음부터 원하는 놈이 걸려들 줄이야.’
회의가 끝난 후, 레온은 바쁘게 움직였다. 라트반과 아슬란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했으니까. 여러 신관을 만났고 그들에게 은근슬쩍 제가 원하는 것을 흘렸다. 그것은 카를이 원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면 반응이 올 거라 생각했지.’
같은 것을 노리는 자들은 상대의 손을 잡거나 상대의 손을 자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레온은 카를이 후자를 선택하는 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그 역시도 후자를 선택하는 자였다. 하지만.
‘손을 잡은 척을 해야 언제 자르려 드는지 파악하기가 더 쉽잖아.’
레온은 그를 완전히 멀리하며 경계하는 것보다는 자주 보며 어떻게 움직일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다. 조금의 움직임도 놓칠 수 없는 자다. 그러면 좀 멍청한 척을 하며 그를 향해 꼬리를 흔들어 주어야겠지.
부관과 카를이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고 반가운 척 가벼운 인사가 오고 갔다. 레온은 일부러 그를 세워 두었다 그의 몸이 휘청이며 떨리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조금이라도 그의 체력을 갉는 것이 실수를 불러일으킬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마침 잘 왔네. 사실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마치 제 부하를 대하는 듯한 하대의 말투였지만 카를의 웃는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황태자님께서 저 같은 평신관에게 부탁할 것이라니요. 제가 해 드릴 것은 이 대신전의 안내 정도밖에 없습니다. 그마저 오래 자리를 비워서 제대로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오랜 시간 대신전에 있었다 들었어. 바뀌어 봤자 얼마나 바뀌었겠나. 그보다….”
레온은 구석에 서 있는 부관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곧 부관이 물러가고 난 다음 레온은 일부러 안절부절못한 듯 다리를 떨고 손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하고 나서 확실히 알았네. 그대가 다음 대의 대신관이 될 거라는 사실을.”
“무슨 말씀입니까. 회의가 끝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겸손은 사양이야. 눈이 있는 자라면 모를 수가 없지. 갑자기 라트반 단장이 파면이네 뭐네 하는 바람에 회의가 중단되긴 했지만 어차피 이건 시간 문제야.”
“…….”
더 부정하지 말라는 듯 힘을 주어 말하는 레온에게 카를은 더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성녀님께 큰 관심이 있어.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몇 번이나 그분을 뵙기를 청했고 영광스럽게도 몇 번 뵐 기회가 있었네. 직접 뵈니 세상의 소문과 다른 점이 많더군.”
“세상의 소문이라면….”
“모르는가? 하긴 신관들이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야.”
좋지 못한 것이라는 듯 레온은 손을 저었다.
“어쨌든, 나는 좀 더 성녀님을 뵙기를 원하네. 단순한 만남이 아닌 미래의 대신전과 제국의 관계를 위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하고.”
거짓말이 아니다 보니 혀가 신나게 술술 잘도 움직였다.
“그런데 저에게 무슨 부탁을 하신다는 것인지….”
“사실… 최근 성녀님께서는 라트반 단장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 나에게 시간을 잘 내주지 않으시지. 그러니 말인데….”
레온은 일부러 카를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대신관이 되면 곧바로 라트반 단장에게 새 임무를 줄 수 있나? 되도록 좀 멀리 갔으면 좋겠어.”
레온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비열하고 속없는 멍청한 부탁이라고 생각했다. 신실한 믿음을 제 무기로 앞세우며 겸손한 척하는 자에게 나와 손잡고 신전 기사단장 좀 치워 달라는 부탁이라니. 절대로 카를이 들어줄 리 없는 부탁. 게다가 카를은 얻을 것도 없는 부탁이 아닌가. 그런데 역시 이것도 진심이 가득 들어가다 보니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제가 대신관이 될 리도 없을뿐더러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부탁을 들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역시나 카를은 무척이나 불쾌하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레온은 민망하고 수치스러우면서도 원망의 시선을 담아 카를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속없는 황태자답게.
그때 카를이 다시 말했다.
“…성녀님을 흠모하신다는 겁니까.”
조금 낮아진 카를의 목소리에 레온은 살짝 주먹을 쥐었다. 이 자식 미끼를 잘도 물었다고 생각하면서.
카를은 레온을 보았다. 젊고 잘생기고 튼튼한, 모든 것을 가진 자. 그가 갖지 못한 것을 다 쥐고 있는 존재였기에 카를은 레온이 싫었다.
‘어지간히도 몸이 달았나 보군.’
무리도 아니다. 이벨리나는 젊고 아름답다. 게다가 쉽사리 손을 뻗을 수 없는 성녀라는 점이 아무래도 이 젊은 황태자의 피를 자극한 모양이겠지.
카를은 조금 전 성녀와 함께 옆의 방으로 들어가던 라트반의 모습을 떠올렸다.
‘감히 방해를 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회의고 뭐고 필요 없이 곧바로 대신관의 자리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트반 때문에 그것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기다리면 곧 차지할 것이라고 해도 라트반의 문제가 처리된 후가 되겠지.
‘내가 없던 사이에 성녀와 붙어먹기라도 한 건가.’
분명히 성녀가 그를 끔찍이 싫어하고 있었을 것인데.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카를은 입술을 물었다. 라트반이 방해가 된다면 그 역시 끌어 내려야 할 것이다. 기왕이면 성녀와 함께.
카를은 다시 레온을 보았다. 정욕에 들떠있는 젊은 황태자는 읽기 무척이나 쉬운 사람이었다. 정말로 이 자가 그 유명한 레온 황태자인가 싶을 정도로.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카를은 옷 아래 있을 자국을 생각하며 팔을 쓸었다. 이 싫은 황태자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 줄 생각이었다. 욕정에 헐떡이는 성녀가 누군가와 뒹구는 모습을.
자신이 되면 좋겠지만 이번에는 라트반에게 한 번쯤 기회를 넘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슬란이 난리를 친 후 대신전은 바쁘게 움직였다. 일단 상급 신관들을 중심으로 정체 모를 마력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대신전을 중심으로 대륙 끝까지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있는 마력에 끊임없이 경악했다.
“마력도 마력이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 마력을 담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안정된 힘인 성력과 달리 불안정하고 거친 힘인 마력은 그 힘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담을 거대한 그릇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큰 마수가 큰 마력을 지니기 마련이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방대한 마력이었으니 그에 걸맞은 거대한 마수가 있어야 하건만, 대신전에 그런 마수가 보일 리는 없었다.
도저히 마수를 찾을 수 없다며 탄식하는 상급 신관들을 보며 나는 다시 창문으로 나가던 아슬란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의 본모습이 궁금해졌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강한 마수. 그 엄청난 힘을 담고 있을 그의 본체는 얼마나 거대하며 위압적인 모습일까.
‘그나저나 아슬란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 거지?’
그날 이후로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무척이나 지쳐 있던 아슬란의 얼굴이 머릿속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수가 최초로 인간을 위해 한 일이라 말하던 그의 목소리 또한 귓가에 남았다.
도대체 신전의 어디에서 먹고 자는 걸까. 마법으로 눈의 색을 바꾸고 기척을 숨겼으니 어딘가에서 신관인 척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차하면 마법을 쓸 것이고.
그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약해져 있을 때, 라트반을 만나는 것이 껄끄럽겠지.’
라트반은 아슬란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물론 아슬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다 나만 없었다면 당장에 검을 뽑아 들고 마법을 사용할 것 같은 기세이지 않았던가. 라트반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슬란이 제가 약해졌을 때 만나기 싫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창문 멀리 보이는 라트반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파면 심사 대기 중이라고는 하나 그는 기사단장의 검 대신 일반 검을 들고 있을 뿐, 하고 있는 일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예복에서 기사단장의 증표를 떼었다고는 하지만 그것 하나가 없다고 해서 라트반을 못 알아볼 자가 대신전에 있을 리 없다.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라트반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라트반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알아차린 거야?’
하긴, 기사이니 이런 시선을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나 먼 거리인데도 알아차리는 것이 역시 신기하긴 했다. 그가 정말로 나를 보고 있는지 궁금해 나는 가슴께에 손을 들어 올려 인사하듯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라트반은 대답이라도 하듯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옆에 있던 기사들이 그가 도대체 누구를 향해서 이러나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들키는 게 부끄러워 나는 곧바로 몸을 숙였다.
창문 아래에 앉아서 빠르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 조심스럽게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라트반이 있는 곳을 살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곧 그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이제 다른 곳으로 가나?’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걸어가던 그가 오른팔을 뒤로 돌리더니 조금 전 내가 했던 것처럼 살짝 손을 흔들었다. 내가 보고 있는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
라트반의 눈이 뒤에도 달린… 건 아니겠고. 이것도 내 시선을 알아차린 거겠지. 아무래도 조금 전처럼 고개를 숙이면 주변의 기사들이 알아볼 것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멀어지는 라트반의 모습을 눈에 담다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나를 보긴 봤겠네.’
처음 라트반을 보았을 때, 그는 멀리 있는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가 버렸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니 정말 많이도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본 척 무심히 외면하던 그가 이제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이렇게 원래의 흐름과 달라진 것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라트반뿐만이 아니었다. 레온도, 아슬란도.
‘계속해서 같이 지내면 좋겠는데.’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내 욕심만 가득한, 이루어질 리 없는 것이다. 언젠가 이리스가 나타나면 흔들리기 시작하다 깨어질 꿈같은 것. 물론 이리스가 나타난 후에도 여전히 세 사람과 친분을 이어 갈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나를 위해 주는 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간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싫어.”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스스로 내뱉은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차가워진 손끝을 볼에 가져다 대었다. 서늘한 기운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가물가물해지고 있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병이 깊어지고 입원이 길어지면서 병문안을 오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었다. 집에 있었던 내 물건들이 하나둘씩 병실에 쌓이기 시작하면서 매일 오던 부모님도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오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일주일에 한 번 오게 되었다. 그것도 점점 바쁜 일이 있다면서 건너뛰는 횟수가 늘었다.
점점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었던 탓에 어쩌다 오는 사람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교과서를 가져왔다는 새로운 담임 선생님을 몇 시간이나 붙잡고 이야기를 했었고, 몇 년 만에 본 친척 역시 붙잡았었다. 그러다 기억에 있는 학교 친구를 병원의 입구에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 말을 걸었다.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냥, 오랜만에 나를 아는 사람이 반가워서 그동안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한 것뿐이었는데. 그 아이는 곧 무슨 일이냐며 다가온 제 부모님을 붙잡고 모르는 아이가 놓아주지 않고 무섭게 말을 건다며 울먹였다.
그러자 그 아이의 부모님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거세게 내 손을 내려쳤다.
“너 누구니?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그제야 나는 내가 그 아이의 옷을 강하게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 손을 놓지 못했다. 모르는 아이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나는 기억하는데, 상대는 나를 잊어버렸다.
같이 복도를 뛰었던 것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도 오직 나만의 기억이 되었다. 나는 매일같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기억들인데 그 아이에게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 소란 후에 나는 복도에서 간호사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 1201호실 그 애. 너무 오래 입원한 탓에 새로운 사람이 오면 엄청나게 집착한다나 봐. 저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죽어도 잡고 안 놔준다니 신경 써 달라고 하더라고.”
“어쩌겠어. 원래 몸이 아프면 마음도 같이 병들기 마련이지.”
그 대화를 듣고 나서야 나는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날 밤, 한참을 울고 난 다음에 더 이상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그때와 같은 걸까.”
이제는 어릴 때와 다르다고, 그런 일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세 사람에게 매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더 살고 싶다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대면서. 내가 보내는 시간을 함께 기억해 주는 사람이 더 있기를 바라면서.
“…조심해야겠다.”
분명 처음에는 적당한 친분을 유지하면서, 이리스가 오면 떠나려고 했었는데. 자꾸만 그 마음이 흔들린다.
‘매달리면 안 돼.’
처음에는 다정했다가 점점 무심해졌던 시선들이 생각났다. 세 사람이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을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역시, 어느새 나는 세 사람에게 무척이나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세 사람을 떠올린 다음 멀찍하게 떨어져 선 나를 상상하고는 그 사이에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었다.
***
대신전의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 성녀의 업무는 잠시 중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신전이 이렇게 난리인데 마냥 놀 수는 없었다.
특히나 마력 때문에 뒤집어진 상황이라면 더욱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기사들이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신전 안을 경비하며 돌아다녔고 신관들 역시 마력의 흔적을 살피며, 거대한 마법의 정체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그만두겠다고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카를 신관이 돌아왔으니 이제는 그만 돌려주어야 한다면서 모두 자기 직위를 반납하기를 신청했습니다.”
나는 내 앞에 내밀어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한두 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두툼한, 전부 다른 필체로 쓰인 종이들이 한 다발이었다.
‘맙소사. 이게 다 카를이 했던 일이라고?’
신관 한 명이 여러 가지 직위를 겸하는 일이 희귀한 일은 아니라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도대체 몇 개의 직위를 갖고 있었던 거야?’
한 움큼 잡아 파라락 종이를 넘겨 보니 그것만 해도 얼추 열 장 정도였다. 이걸 보면 대략 삼사십 개 정도의 직위를 카를은 갖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카를 신관은 뭐라고 하나요?”
“이 일로 성녀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독대를 청한다더군요.”
“독대를…?”
카를이 나와의 독대를 신청했다는 말에 저절로 몸이 굳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되도록 빨리 그의 의견을 들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몇 개의 직위는 담당 신관이 없어지면 당장 문제가 생기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신관의 얼굴을 보니 당장이라도 카를과 독대를 하지 않고 뭘 하고 있냐는 듯한 눈치다.
‘어떻게 하지.’
전부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긴 하다. 하지만 카를을 일대일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슬쩍 옆에 서 있는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신관에게 말했다.
“대신전과 대륙 전체를 뒤덮은 마력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실해지기 전까지 성녀님과의 독대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라트반의 말에 신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카를 신관인데요?”
그렇게 말하는 신관의 목소리에는 카를을 향한 맹목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그런 것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저는 제 임무를 다할 뿐입니다.”
라트반이 도저히 물러설 것 같지 않자 신관은 알겠다며 다시 카를에게 물어보겠다 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카를은 라트반이 함께 있다면 오히려 다행이라며 다시 알현을 신청해 왔다.
라트반에게 넌지시 물어봤더니 그가 별다른 일정이 없다고 했기에 나는 되도록 빨리 카를을 만나겠다고 했다. 당연히 만날 장소는 내가 정한다고 했다.
‘만날 장소라고 해도 어차피 접견실이지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꽤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접견실을 골랐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밖에서 알 수 있도록.
내가 들어가기 전 라트반이 안에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카를 신관이 좀 늦는군요.”
꽤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계의 분침이 어느새 약속 시간보다 조금 지나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상합니다. 이건….”
라트반은 곧바로 접견실로 다가오는 그 기척을 살피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어? 레온?”
“어? 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레온이었다.
“여기에는 무슨 일인가요? 우리는 카를 신관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럴 리가. 저 역시 이곳에서 카를 신관을 만나기로 했기에 온 것입니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레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방, 방음은 괜찮습니까?”
“좋지는 않아요. 그냥 대화 소리라면 모르겠지만 큰 소리라면 밖에 들릴걸요. 맞나요, 라트반?”
라트반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온이 빠르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좀 가까이에서 말해야겠군요.”
그렇게 레온이 내 옆자리에 앉은 순간이었다.
“읏!”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감각이 내 허리를 타고 흘렀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내 몸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성녀님!”
“리나!”
라트반과 레온이 놀라 외쳤다. 그리고 앞에 있던 레온이 급히 나를 붙든 순간, 허벅지 안쪽, 자국이 있는 곳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흐읏!”
곧바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에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 사이로 미처 막지 못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예민해진 피부가 고통을 호소했다. 나는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모든 몸을 물어 대는 것 같기도 하며 핥아 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리나, 괜찮습니까?”
놀란 레온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동시에 나를 붙들고 있는 그의 팔이 느껴졌다. 크고, 두껍고 단단한 팔. 그대로 나를 안아 들어 정신없이 탐할 수 있는 남자의 것.
아랫배가 꽉 조여들며 다리 사이가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 몸을 알고 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미친 듯이 내 아래를 드나들던 그의 것을. 몇 번이고 내 안에 제 쾌락을 뱉어 내던 크고 딱딱했던 것을.
“레온….”
신음 소리를 내뱉던 입에서 느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입에서 떨어진 내 손은 나를 안고 있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대로 입을 맞추면 그때처럼 나를 안아 주겠지. 미친 듯이. 거칠게. 울면서 그만해 달라고 빌 때까지.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성녀님!”
가까워진 레온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라트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하려 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남은 힘을 모두 모아 당황한 레온을 있는 힘껏 밀었다. 다행히 나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멀어졌다. 소파의 끝을 잡고 휘청하는 몸을 뒤로 숨겼다. 다가오려는 레온과 라트반을 향해 나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리나?”
“가까이 오면 안… 하윽!”
그 순간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뜨거운 감각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손가락 끝이 감각이 시작되는 곳을 찾아 만졌다. 허벅지의 안쪽. 은밀한 곳에 낙인처럼 남아 있던 자국. 그곳을 누르자 마치 정답이라는 듯, 몸을 자극하는 감각이 폭발하듯 터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강렬함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신음을 삼켰던 입이 벌어지고 턱이 부딪혔다.
‘어째서?’
왜 하필. 왜 이런 때.
힘겹게 고개를 들자 나 못지않게 당황하고 있는 레온과 라트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레온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 했고, 라트반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고 있었다.
이 감각을 처음으로 겪었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미친 사람처럼 라트반에게 들러붙어 몸을 비벼 대었다. 그야말로 발정이라는 말 외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모습으로.
그때를 떠올리자 몰려오는 정욕조차 순간 잊어버릴 만큼의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다시 이 두 사람이 보게 된단 말인가.
“성녀님.”
라트반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미 내가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나를 향해 손을 뻗을까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웅크린 내 어깨를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으려고 했는데. 라트반이 닿는 순간에 내 각오는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쓸려 내려갔다.
“하, 아, 흐아…!”
입은 거칠어진 숨을 계속해서 뱉어 냈다. 그런 내 목소리에 점점 더 교성이 섞여 들었다. 탄식과도 같은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 또 이런…!”
“또?”
레온은 라트반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리나가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건가?”
레온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라트반은 대답하지 못한 채 레온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라트반의 행동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걸까. 레온의 손이 곧바로 라트반의 멱살을 잡았다.
“리나가 왜 이러는지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라트반. 이건 누가 보아도….”
레온은 말끝을 삼키며 입술을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라트반을 향한 경멸이 가득했다. 그 표정만으로도 레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라트반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레온의 오해를 알아차린 순간 나는 기어가 레온의 바지를 붙잡았다. 그러자 레온은 라트반을 붙잡았던 손을 놓은 채 나를 향해 몸을 숙였다. 나는 그런 레온의 팔을 붙들었다.
“라트반 때문이… 아니에요…. 이건….”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릿속이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말로 할 수 없다면 보여 주기라도 해야겠지. 나는 그의 손을 치마로 되어 있는 예복의 아래로 잡아끌었다. 크고 넓은 손이 치마의 아래로 사라졌다.
“……!”
레온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에 나는 더욱 그의 손을 내 다리에 붙인 채 더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아, 아, 하읏…!”
그의 손이 자국에 가까워질수록 허리가 들썩거렸다. 곧 그의 손이 허벅지 사이의 깊숙한 곳에 닿았다. 내 다리는 그의 팔 때문에 걷어 올려진 치마 아래 훤히 드러났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라트반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반대로 레온은 내 다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이 다리 안에 있는 자국을 향했다.
“이건….”
“이것 때문이에요. 이게… 나를… 이렇게… 그래서 저번에는 아슬란이 밤새 나를 안아서…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 아읏!”
힘겹게 말을 이어 가던 중, 아슬란의 이름이 나오자 레온은 다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이 자국 위를 덮었다. 그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번개라도 맞은 듯이 몸이 경련했다. 오싹한 쾌감이 몸의 힘을 모두 긁어 가 버린 것 같았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몸이 바닥을 향해 쓰러지려 했지만, 레온이 곧바로 나를 붙잡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정말로… 라트반은 아무런 잘못도….”
내 말에 레온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당신은 그가 걱정이 됩니까?”
레온은 나를 끌어안았다. 가라앉은 그의 눈 깊은 곳이 시퍼렇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레온이 다시 물었다.
“지금 당신이 괜찮아지는 방법이… 당신을 안는 것뿐입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누구든지 좋았다. 제발 아무나 나를 안아 줘.
다시 정신이 점점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끌어안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레온의 행동에 나는 애가 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레온의 뒤에 서 있던 라트반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시선을 느낀 순간 나는 강하게 입술을 물었다. 따끔하는 통증과 함께 다시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부탁입니다…. 두 사람 다… 제발 여기서 나가 줘요…. 어떻게든… 버텨 볼 테니까….”
하지만 밀려오는 욕망에 대한 저항은 잠시뿐이었다. 다시 자국에서 시작된 정욕이 몸의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몸 안에 불길이 번진다. 아랫배가 꾹 조여들며 손이 제멋대로 아래를 향한다. 보이지 않는 발톱이 피부를 긁어 대고 있었다. 다시 몸이 들끓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이 정염은 스스로 가라앉힐 수밖에 없다.
‘싫어.’
절대로, 절대로 두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만큼은 보이기 싫었다.
하지만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옷이 몸을 휘감은 사슬이라도 되는 듯이 답답했다. 지금 당장 이것들을 전부 벗어 던져야 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손이 움직이고 거의 뜯어지듯 예복이 아래로 흘렀다. 내 손이 차마 벗지 못한 속옷 위를 더듬었다. 그러다 결국 스스로 가슴을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읏….”
절망감에 가까운 수치가 몰려왔지만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얇은 천에 쓸리는 가슴의 끝이 뾰족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내 몸은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고 가슴을 주무르던 손이 솟아오른 유두를 잡았다. 그리고는 스스로 잡아 비틀었다.
“하으읏!”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입이 달뜬 숨을 내뱉었다.
더. 더 필요해. 이것만으로는 안 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른 남자가.
그때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빠르게 우리가 있는 방을 향해 다가왔다.
“이 접견실은 누가 쓰는 모양입니다만?”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옆을 사용합시다. 일단 다른 신관들을 기다리시는 분들은 잠시 복도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다가온 신관들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그런 그들의 목소리에 입을 틀어막았다. 라트반과 레온을 내보내고 어떻게든 버티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혼자서 이 정욕을 달래고 나면 조용히 돌아가려고 했는데 밖에 다른 자들이 있다니. 이제 이곳을 나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머릿속이 더욱 끔찍한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이것을 이겨 내지 못하고, 몸을 섞을 자를 찾아 신관들을 찾아가게 된다면.
“싫어….”
내 목소리에 두 사람이 다가왔다.
“이런 거 정말로 싫어…. 왜 이런….”
서러움이 한 번에 밀려왔다. 서러움과 수치심이 뒤섞인 눈물이 계속해서 시야를 가렸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도대체 왜, 이벨리나는 이런 것을 몸에 받아들인 걸까. 이런 모습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인간으로서의 아무런 이지도 없이 그저 짐승처럼 헐떡이고 몸을 비비며 상대의 것을 원하는 이런 모습이?
‘그럴 리 없어.’
절대로, 절대로 이 수치를 자진해서 얻을 리가 없었다.
나는 내가 벗어 던진 예복을 집어 들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끔찍하고 비참했다. 정욕에 덜덜 떠는 몸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자위를 하고 말았던 내가. 그리고 이제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숨을 죽여야 하는 이 상황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을 두 사람 앞에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 가장 버틸 수가 없었다.
틀어막은 입 사이로 흐느낌이 흘렀다. 나는 다시 손을 자국 위로 가져갔다. 이것 때문이다. 이것만 없으면….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손톱이 파고들었다. 살이 뜯기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것을 뜯어낼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참아 낼 수 있었다.
탁.
그런 내 손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레온과 라트반이 동시에 각기 다른 손을 붙잡은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놓으라는 듯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입에 물고 있던 예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발, 진정해요. 리나.”
그는 나를 안고 일어섰다. 그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젠장, 내가 당신을 원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바라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 말에 라트반이 레온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성녀님을 놓으십시오.”
낮은 경고의 목소리에 레온은 라트반을 노려보았다.
“그럼, 라트반 당신이 할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