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스?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대신전의 신관입니까?”
내 중얼거림을 들은 것일까. 옆에 서 있던 라트반이 나에게 물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이리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라트반의 모습에 이제는 희미해지고 있는 책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가 읽었던 2권의 마지막에서 라트반은 이리스에게 절절한 고백을 한다. 그리고 그녀를 성녀로 인정한 후 처음으로 이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성녀를 지키는 기사. 그에게 성녀는 신과 같은 의미이며 언제나 존경과 경배를 올리는 대상이다. 어떠한 인간적인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되고 감히 그런 감정을 가질 수도 없는 존재.
‘하지만 이리스를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지.’
그렇기에 그는 이리스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스는 제 이름이 불렸다는 것이 신기해서 어색한 웃음을 흘렸을 뿐, 그것이 라트반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는 몰랐다.
그가 제 모든 감정을 담아 절절하게 부르게 될 이리스의 이름을 아무런 감정 없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내뱉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 그에게 그 이름은 언젠가 당신이 새로이 섬길 사람의 이름이라고 말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그를 시험해 보고 싶은 내 얄팍한 심술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변화를 확인했다. 원래의 흐름대로라면 생길 리 없었던 나를 향한 호감이 그에게는 있었고 나는 그가 가진 그 감정의 크기가 흐름을 뒤틀 수 있는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 그렇게 서 있으면 힘들 것 같은데 좀 앉는 것이 어때요?”
“괜찮습니다. 서 있는 것도 하지 못하면 어찌 신전 기사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근처에 있던 상급 신관 하나가 옆자리에 앉은 다른 신관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대신 안쓰러움을 담은 시선이 라트반을 향했다는 것도.
고개를 돌려 다시 라트반을 보자 그 역시 그 신관들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라트반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들리나요?”
“네?”
“저들의 대화가 들리는 건가요?”
내 질문에 라트반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라트반의 표정을 보니 신관들의 대화가 그다지 좋은 내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라고 하던가요?”
“…….”
“라트반?”
“…들으실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대답에 곧바로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저쪽의 신관들이 내 험담을 한 모양이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전 내가 라트반에게 한 말 중에서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있었나? 나는 그저 그에게 앉기를 권유했을 뿐인데.
‘쉽게 말해 줄 것 같지 않은데.’
아무래도 부탁을 하면 들어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나는 손짓으로 라트반에게 가까이 올 것을 부탁했다. 그가 무슨 일인가 싶어 앉아 있는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좀 더 가까이.”
“…….”
고른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거리에서 하는 건 대화지 귓속말이 아니지 않은가. 망설이던 그가 조금 더 허리를 숙였다. 두 뼘 정도 떨어진 그를 보니 아무래도 이보다 더 가까이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의자를 살짝 뒤로 밀어낸 다음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가까워진 나를 피해 그가 허리를 세우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명령입니다. 저들이 무어라 말했는지 말하세요.”
내 말에 라트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
미칠 것 같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인가. 다행히 조금 전 성녀와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던 신관들조차도 이제는 다시 카를을 바라보고 있는 탓에 지금 그와 성녀를 신경 쓰는 자들은 주변에 없었다. 그러니 어서 빨리 성녀에게서 멀어져야 하는데.
“말 못 할 정도로 심한 험담인가요?”
귓가에 다가오는 숨결에 그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향기 어린 작은 숨결은 대륙 제일의 기사를 너무도 간단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순간 온몸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낀 라트반은 정말로 평생의 모든 인내심을 다 끌어와 평정을 가장했다.
이보다 더 가까이 닿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랬기에 가끔 꿈이 아니었나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머리 위에는 신의 위대함을 알려 주는 장엄한 장식과 함께 수많은 전대 성녀들과 성인들의 모습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마수들과의 싸움에서 숨을 거두면 그 역시 자리를 받게 될 성스러운 곳. 그런 곳에서 성녀가 이만큼이나 제게 다가와 속삭이고 있다는 게 라트반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라트반은 고개를 돌렸다. 아주 가까이, 하지만 닿지는 않은 입술이 그의 옆에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서 빨리 성녀의 명령을 따르고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으니까.
“별다른 것은 아닙니다. 성녀님께서 제 체력을 비웃는 것 같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내 말이 그렇게도 들릴 수 있나 보군요.”
성녀는 제 명령을 수행한 그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 성녀의 모습에 아쉬움이 들었다.
라트반은 주먹에 힘을 주며 다른 생각을 했다. 제가 빠르게 정신을 차릴 만한 생각을. 곧 그의 머릿속에 아슬란이 떠올랐다. 성녀를 탐하는 마수가.
‘제대로 하는 게 없군.’
마음 같아서는 대신전 안에 부정한 마물이 들어왔다며 당장이라도 그를 베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성녀의 부탁으로 그녀의 안위를 위해 들어온 상태였다. 그리고 라트반 역시 그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 있었다.
‘황태자도 말했지.’
레온은 그에게 곧바로 카를에 대해서 물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제 안에서 생긴 카를에 대한 꺼림칙함이 점점 더 크기를 키워 나갔다. 물론 황태자의 말을 전부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는 대신전을 오랜 시간 동안 호시탐탐 노렸던 자다.
둘의 대화를 듣던 아슬란이 말했다.
“그놈이 어디 있는지나 말해. 당장 죽일 거니까.”
당장이라도 카를의 목을 잡아 뜯을 기세인 아슬란의 모습에 한숨을 꾹꾹 누르며 아직까지는 추측이니 그를 좀 더 살펴보고 다시 말하라 했다. 그때 아슬란이 뭐라고 했던가.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주제에 카를을 보고 나서 하는 말이 뭐? 성력을 너무 뒤집어써서 느낄 수가 없다고?
라트반은 그런 아슬란에게 무능력한 개새끼라는 말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도 뭔가 알아차릴 수는 있나 보군.’
라트반은 자신과 함께 카를을 데리고 오기 위해 떠났던 상급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카를을 위해 자신들의 성력을 얼마나 아낌없이 퍼부은 것인지 그들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성력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물론 바닥이 난다 하더라도 쉬면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한번 바닥을 드러내면 다시 차오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성력이라는 것은 신이 허가한 힘이자 축복이기에 신관들은 되도록 일정량 이상의 성력을 남겨 두려 했다. 그것이 신이 자신을 선택해 주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거니와 신에게 하는 의식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다 무시할 정도로 카를에게 넘기다니.
아마도 지금 저들에게 성녀와 카를 중 한 사람에게만 머리를 숙이라 하면 카를에게 숙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라트반은 어쩐지 그들이 신과 카를 둘 중 한 곳에 머리를 숙여야 된다 하더라도 카를을 선택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라트반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제 직감을 믿는 편이긴 했지만 카를에게 그 어떤 것도 물을 수는 없었다. 모든 추측은 심증을 기반으로 할 뿐 물증이라 할 것이 없었다. ‘내가 당신에게서 꺼림칙함을 느끼니 당신이 무엇인가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일단 제대로 알아봐야 해.’
카를에 대한 좋지 못한 생각을 하는 것은 그 후에 해도 충분한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심증의 증거를 찾는 데 힘을 모아야 했다.
***
내가 라트반에게서 떨어져 멀리 카를을 바라보는 사이 종이 울렸다.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카를 주변에 모여 있던 신관들은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짧은 기도와 성가가 끝나고 나자 의장을 맡은 상급 신관이 회의를 진행했다.
“그럼 대신관 선출에 대한 안내를 드리기에 앞서 크게 변동된 것들이 있기에 알려 드립니다. 우선 대신관 후보로 등록하신 분들 중 사퇴를 알려 온 분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상급 신관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곳에 적힌 이름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죄다 사퇴한 건 아니지?’
나는 앉아 있는 후보들과 종이에 적힌 이름의 수를 비교하며 책상 아래 두 손을 꼭 쥐었다.
“많은 분들이 사퇴 의사를 표명하였기에 남은 후보들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호명하면 일어서 주십시오.”
곧 상급 신관은 종이의 반대편에 적힌 이름을 불렀다. 불리는 순서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일어서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카를 평신관.”
제 이름이 불리자 카를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옆에 앉았던 다른 신관들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지만 그는 괜찮다는 듯 거절하며 자리에 섰다. 그러자 앉아 있던 다른 신관들 사이에서 작은 박수 소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는 듯했던 박수 소리가 누구 한 명이 크게 치기 시작하자 갑자기 폭발적으로 커졌다. 마치 개선한 장군을 반기는 듯한 거대한 박수 소리였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카를은 곤란하다는 듯 손을 저어 사람들을 말리려 했지만 그런 그의 표정에 신관들은 이제 일어서서까지 손뼉을 쳤다.
누가 보면 지금 이 순간 그가 대신관으로 선출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남아 있는 다른 후보들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빠른 체념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카를과 맞서 대신관의 후보로 남으려 할까. 그래 봤자 돌아오는 것은 초라하고 민망한 지지일 뿐인데.
‘안 돼.’
나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카를을 바라보았다. 이런 기세라면 회의고 뭐고 필요도 없이 그가 대신관이 될 것이다.
‘그가 대신관이 되면….’
그는 아주 많은 의무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또한 큰 권한도 손에 쥐게 된다.
‘막아야 해.’
이벨리나와 맞서기 위해 그를 불러들인 것은 나인데, 이제 나는 그를 막으려 하고 있다.
이벨리나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모든 것이 완벽한 신관. 그야말로 신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자. 어린 이벨리나를 아끼고 사랑하며 그녀에게 신의 가르침을 전했던 자.
하지만 내가 보지 못했던 단 한 개의 기억이 나를 붙잡아 말리고 있었다. 괴로워하던 이벨리나의 목소리와 헐떡이던 카를의 목소리가 절대로 그가 대신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지금 이 흐름을 바꾸고 그가 대신관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대신전에 대한 모든 지식을 다 긁어모아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회의만이라도 연기를 시킬 수 있었으면….’
그렇게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초조해하고 있을 때였다.
“카를 신관이 대신관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까?”
“……!”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라트반이 물어 왔다.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라트반은 그런 내 시선에 확신을 얻은 듯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마치 내가 명령을 하면 그 어떤 것도 해내겠다는 듯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걸까.
라트반은 가만히 옆에 서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사이에도 박수 소리는 귀 아프게 회의장 안을 가득 채웠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소리가 끝나면 카를은 대신관이 된다.
대신관이 선출되기까지 수많은 절차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카를을 대신해서 빠르게 그 절차들을 처리해 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 나와 달리, 그는 어째서 명령을 내려 주지 않느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명령을 내려 달라고.’
아니, 이것은 명령이 아니다. 나는 그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라트반은 명령이라는 말을 했다.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긴, 신전의 기사인 그와 성녀인 나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의 말대로 내가 그에게 하는 모든 요구는 명령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라트반이 그것을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부탁이라는 것은 일종의 빚과 같다. 내가 도움을 받으면 언젠가 도움을 준 상대에게 그 대가를 돌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명령은 다르다. 그저 일방적인, 갚아야 할 것이 없는 것.
그가 무슨 방법을 써서 이 흐름을 바꾸려는지 몰라도 무엇이 되었든 간에 쉽지 않을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라트반은 나를 위해 그것을 해 주려 하면서도 아무런 부담이 없는 형태를 취하라 말한 것이다.
나는 먼 곳에 서 있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가 대신관이 되면 이제 내 옆자리에는 그가 라트반보다 더 가까이 설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던 나는 입을 열었다.
“라트반, 나를 도와주세요.”
그는 나에게 명령을 내리라 했지만 나는 그것을 거부했다. 대신, 그에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
내 말에 그는 잠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회의실을 채운 박수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곧 눈을 뜬 라트반은 제 허리춤에 있던 검을 잡아 올렸다. 정확히는 검집째로. 그러더니 그것을 내 앞에 있는 책상에 던지듯이 올렸다.
쾅!
나무와 쇠가 부딪히는 큰 소리가 회의장을 때렸다. 순식간에 박수 소리가 멎었다. 회의장 안에 있는 모두가 놀란 얼굴로 나와 라트반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한번 들어 본 적이 있기에 그의 검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음에도 나 역시도 그 소리에 놀라 몸이 굳을 정도였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라트반의 검을 보았다.
박수 소리를 끊어 버리는 것도, 카를에게 향하던 모든 시선을 거둬들이는 것도 성공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 거지?
단지 소리를 낼 생각이었다면 이것보다도 더욱 간단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라트반이 왜 저러는지 답을 구하는 시선이 되자 그는 신관들을 향해 말했다.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좋은 일이 있기 전, 문제가 처리되기를 원하기에 이런 무례를 저지른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라트반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전 기사단장 라트반. 주어진 임무와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기에 지금 파면을 청하는 바입니다.”
파면.
그 단어가 라트반의 입에서 나온 순간 술렁이던 회의장에는 끔찍하리만큼 무거운 고요가 내려앉았다. 사람이란 충격이 너무 크면 곧바로 반응을 하지 못한다. 아마, 지금이 그런 순간일 것이다. 박수 소리가 사라진 회의장에 경악이 폭풍을 업은 파도처럼 몰아닥치고 있었다.
저 멀리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진 카를의 얼굴이 보였다.
***
아슬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신전의 중앙 건물의 위였다. 가장 높은 곳에 서자 거센 바람에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약한 것들이 못 올 만하군.”
그의 입에서 조금은 감탄이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지금 아슬란의 시야에 가득 차 있었다.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르른 성력은 대신전을 중심으로 시야가 닿는 곳 끝까지 넓게 펼쳐져 있다. 그 힘은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을 덮은 커튼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아슬란은 짧게 혀를 차며 제 어깨를 털어 내었다. 그의 위에 머무르고 있던 푸른 성력이 그의 손짓에 거세게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다시금 놓치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아슬란은 조금 전까지 무거웠던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지금껏 살면서 이런 무게를 느낀 적이 있었던가.
“역시 대신전이야.”
제힘과 상극인 힘이 시작되는 곳. 그곳이 가진 힘의 위력에 그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이 거대한 힘이 성녀라는 작은 인간 여자 하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야 모르겠지만 이 대륙은 무척이나 불안정한 곳이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걸쳐 있는 곳. 그렇기에 여기저기가 갈라지고 부서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역시 그런 틈을 통해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그가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 그 틈은 닫히고야 말았다.
‘성녀 때문이었지.’
첫 번째 성녀가 나타나자 불안정한 대륙은 하루아침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 말은 그가 돌아갈 문이 사라졌다는 소리였다. 물론 성녀는 신의 대리인일 뿐, 신 그 자체는 아니기에 완벽하지는 못했다. 대륙의 변방은 아직도 작은 틈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지금도 여기저기 출몰하는 마수들이 그 증거였다.
세계의 틈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또는 먹이를 찾아 넘어왔다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
그중에 운이 좋은 마수는 인간들과 짐승들을 먹으며 버티다가 제힘이 다하기 전에 다시 열린 틈으로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슬란은 무척이나 운이 없는 편이었다.
‘그딴 틈으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그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 제 원래의 모습이 흐릿해질 지경이었다. 아슬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산 하나 없는 너른 평야 위로 끝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이 하늘을 완전히 찢어 놓아야 그가 넘어갈 수 있는 틈이 생길 것이다.
‘지금은 불가능하지.’
그의 세계가 아니다. 그 말은 이곳에 머물면 머물수록 힘을 잃어 간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공간을 찢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발톱에 찢긴 공간은 그가 넘어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으며 오히려 다른 세계의 마수들만이 쏟아져 들어오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가 만든 그 틈들은 성녀의 성력에 의해 모두 닫히고 말았다.
날뛸수록 그의 힘만이 헛되이 낭비되었다. 그렇기에 아슬란은 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다.
‘새끼가 필요해.’
마수에게 새끼란 특별한 존재다. 제 생김새와 힘을 그대로 물려받는 존재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식이 아닌 또 다른 자신에 가까웠다. 물론 독립된 개체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무척이나 흡사하다 할지라도 다른 인격을 지니고 있다.
자신과 같은 존재가 하나 더 늘어난다면 그때는 제 본체가 넘어갈 수 있는 크기의 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의 세계에서도 만들기 힘들었던 새끼를, 그와 걸맞는 동족이라고는 하나 없는 이 세계에서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몇 번 헛된 시도를 해 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결과를 볼 것도 없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 애초에 생겨나는 순간부터 거대한 힘의 덩어리인 마수의 새끼를 버틸 만한 태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강한 존재가 이 세상에 있을 리가.
그러다 아슬란은 깨달았다.
한 명이 있었다. 그와 너무나 반대되는 존재였기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뿐.
성녀.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알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새끼를 온전히 세상에 내보내는 일은 전적으로 성녀에게 달려 있는 문제였다. 그를 버티고, 계속해서 제 몸 안에 마수의 새끼를 품어 주는 것은 성녀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제 마력을 사용해서 굴복을 시킬까, 생각도 했지만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단 성녀의 성력은 제가 쉽사리 덤빌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그의 마력이 그녀의 정신을 붙드는 데 실패하면 성녀는 이 세계에 거대한 상처를 입힐 마수의 새끼를 곧바로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고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아슬란은 성력의 변화를 느꼈다. 갑자기 성력이 약해지며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거대한 힘이 모조리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그가 궁금해하던 중, 먼바다를 건너 마법사들의 섬으로 전언이 도착했다. 그것이 도착하는 순간 누가 보낸 것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닌 편지. 그러나 그것은 아슬란 정도의 마력을 가진 자가 아니면 찢을 수 없을 만큼 성력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편지를 열어 보았을 때, 아슬란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도움을 원하며, 그 대가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성녀의 뜻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뭔가 이상하게 귀찮은 것들이 들러붙더니 귀찮은 일이 생긴다. 무엇보다 자신과 약속을 한 성녀는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고.
‘석판에 서명을 요구하길 잘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완전히 없던 일이 될 뻔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슬란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폭발하듯 붉은색의 마력이 터져 나와 하늘을 덮었다. 푸른색의 성력을 뚫고 올라간 그것은 구름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더니 빠르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밑에서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성력을 가진 것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니 이런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이곳에 있는 동안 얌전히 있으라는 건방진 말을 하던 검은 털의 개새끼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옆에서 성녀에게 방해가 되지 말라고 말을 거들던 노란 털의 개새끼도. 그것들이 이 아래에서 제 욕을 하며 뛰어 댈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지금 그가 마력을 펼치는 것은 단지 그것들이 기분 나쁘라고 한 짓은 아니었다.
‘찾아야겠어.’
그 자국이 성녀의 힘을 빼앗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사라진 성녀의 힘은 어디로 간 것일까. 개새끼 두 마리가 이상하다며 짖어 대던, 역겨울 만큼 이놈 저놈의 성력을 둘러쓰고 있던 신관 놈에게는 성녀의 성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그의 마력은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얇게, 그러나 끊어지지 않게 그의 마력은 이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사라진 성력을 찾아낼 것이다.
***
뒤집혔다.
오늘 회의는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는 회의가 파한 후 카를은 혼자 그의 방에 앉아 있었다.
으드득.
보는 눈이 없는 좁은 방 안에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
“왜?”
이럴 리가 없었다. 라트반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혐오가 가득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신전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절망이 가득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시선에는 공포가 담겨 있어야 했고.
하지만 성녀는 그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저 순수한 놀람만이 가득했다.
“…변하셨군요.”
카를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이러면 안 된다. 얼마나 공을 들여 만들어 냈던 것인데.
“그러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도와드려야지요.”
다시 성녀가 제 가르침을 기억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의 팔 안쪽에 성녀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자국이 있었다. 카를은 그것을 쓸어 만졌다. 그리고 이다음 성녀가 사람들의 앞에 나오는 날이 언제인지를 떠올렸다.
라트반이 그의 검을 놓으며 파면을 요청했었다.
파면.
그 단어가 대신전 안에서 갖는 무게란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다. 단순히 맡은 일을 그만두게 하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책의 내용에서도, 그리고 이벨리나가 남겨 두었던 기억 속에서 본 파면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제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내려지는 처벌. 그 대상이 평신관이어도 파면을 당한 자는 주변으로부터 좋지 못한 시선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 어떤 지위로도 다시 올라가는 것이 힘들다. 한마디로 이 대신전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처벌이 파면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파면이라는 것이 요청한다고 해서 바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평신관 하나를 두고 파면하는 일에도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야 하는 일인데 그 대상이 신전 기사단의 단장이라니. 그 자리는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무려 당사자가 파면을 요청한 만큼 거기에 합당하는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 그저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을 요청하기란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라트반 단장.”
회의를 이끌어 가던 상급 신관이 급히 라트반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 신관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신관들도 라트반에게 다가와 그를 말리려는 듯 말을 걸었다.
순식간에 카를에게로 몰렸던 자들이 라트반의 곁으로 모였다. 다가온 신관들은 하나같이 진심으로 라트반을 걱정하고 너무나 갑작스런 그의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
그렇게 모여든 신관 중 몇몇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적의를 담은 시선이었다.
“아….”
그들이 왜 나를 그렇게 노려보는지는 금방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네.’
라트반과 내가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좀 가까워졌다고 생각해 주기를 바랐는데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일이 있다 보니 그런 내 행동들이 오히려 더욱 저들의 경계를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하긴, 자주 보는 사람들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건가.’
그사이 몇몇 신관들은 은근슬쩍 나를 언급하며 라트반을 달래고 있었다.
“라트반 단장께서 많은 일을 짊어지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더 성심껏 돕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경호 임무는 다른 기사들에게 맡기고 조금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하지만 그런 신관들의 말에 라트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라트반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얼마 전, 부정한 것이 대신전에 침입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이제야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군요.”
그렇게 말한 라트반의 입 사이로 진심으로 부끄럽고 분하다는 듯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라트반의 모습에 신관들은 그가 헛된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아슬란을 말하는 건가.’
라트반이 말한 부정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리를 짚었다.
“하, 하지만 신전에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일순간 신관의 말이 끊겼다. 회의장에 있던 모두가 본능적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머리 위에서 섬뜩할 정도의 힘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이게 무슨…!”
“마력입니다!”
기사들과 함께 마수가 출몰하는 곳으로 자주 나갔던 신관들이 힘의 정체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마력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여기저기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라트반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위를 바라보는 라트반의 얼굴이 전에 본 적 없이 험악해졌다. 나는 그런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아슬란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의자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슬란이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에게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었다. 가만히 있어도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에 처음부터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았던가. 그때 어느 정도 아슬란의 힘을 엿보았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하늘 위에서 퍼져 나가고 있는 마력을 체감한 순간, 정말로 그가 감히 대적하기 힘들 정도의 위압적인 마수임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터져 나간 힘은 시간이 지나자 천천히 그 기세가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점점 느끼기 힘들 만큼 미약해졌다.
“설마… 이것이…?”
굳어 있던 신관들 중 먼저 정신을 차린 자가 라트반에게 물었다. 라트반은 어딘지 짜증이 묻어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나는 회의실의 옆에 붙은 방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성녀님?”
“네?”
라트반이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까지 웅성거리던 밖이 조용해져 있었다. 어느새 회의실에 있던 신관들이 모두 나간 모양이었다.
‘좀 더 있다 나가야지.’
지금 나가 보았자 어쩐지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라트반을 끌고 이 방으로 들어가던 나를 향한 여전히 좋지 못했던 시선들을 생각하니 더욱더.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라트반을 보았다.
우연이긴 하지만 아슬란이 때맞춰 그의 마력을 개방한 탓에 라트반이 파면을 요청했던 이유는 사실이 되었다. 그 누구도 라트반의 이유에 증명하라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회의장을 순식간에 뒤집었으면서도 라트반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다. 나는 서 있던 라트반의 옷자락 끝을 잡았다.
“그만두면 안 돼요.”
제일 먼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도움을 바라긴 했지만 기사단장이라는 지위를 걸고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이럴 의도였음을 알았다면 절대로, 절대로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라트반은 옷을 잡아당기는 내 손을 잠시 바라보더니 물었다.
“…걱정되셨습니까?”
“당연히….”
“감사합니다.”
라트반이 허리를 숙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내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였다.
“떨어져.”
“아슬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창문에는 어느새 아슬란이 걸터앉아 있었다.
“꼬리 좀 작작 흔들어 대고 꺼져.”
아슬란의 목소리에는 잔뜩 가시가 박혀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박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아슬란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특별히 다른 것은 없었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마력을 사용한 것 때문인가?’
무시무시할 정도의 힘이었다. 아무리 아슬란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마력을 쓰고 나서는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일어나 다가왔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옆에 앉더니 그대로 내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내 목에 묻었다. 그런 아슬란의 행동에 라트반이 허리춤을 더듬었으나 그의 검은 이미 회의실에서 내던졌기에 잡히지 않았다.
“괜찮아요, 라트반.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어요? 곧 나갈 테니까요.”
“하지만….”
“아슬란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그래요.”
내 목덜미에 웃음 섞인 아슬란의 숨결이 닿았다.
“몸으로?”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고는 그를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아슬란은 내 허리를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농담이야.”
그렇게 말하는 아슬란의 목소리에는 이제는 더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나는 당장이라도 아슬란을 걷어찰 듯한 라트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소리칠게요.”
그다음 나는 아슬란의 시선을 내 몸으로 가리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검 수업. 주말 밤. 당신 집.
다행히 라트반은 내 입 모양을 보고 한 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무척이나 복잡한 얼굴이 된 그는 내 등 뒤의 아슬란을 쏘아보더니 말했다.
“문 앞에 있겠습니다.”
그는 곧 방을 나갔다. 닫히는 문을 보며 아슬란이 피식 웃었다.
“별일이군. 저 개새끼가 이렇게 순순히 물러설 줄이야. 다루는 솜씨가 좋아.”
“개새끼라고 그만 좀 불러요. 그리고 일단은 당신에게 도움을 받긴 했으니까요.”
“도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신이 마력을 신나게 쓴 탓에 라트반이 내민 파면의 이유가 정당한지 아닌지 신관들이 따질 필요도 없게 되었거든요.”
게다가 정말로 마력을 가진 자가 대신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확실시되면서 라트반은 파면 심사를 대기하는 동안에도 내 옆에 있게 되었다. 이만한 위험이 대신전 안에 있는데 누가 뭐라 해도 라트반 이상으로 나를 잘 지킬 수 있는 자가 신전 내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가 그를 대신해서 기사단을 통솔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는 라트반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라트반도 그걸 알고 한 거겠지?’
그만 둘 생각이 없다고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흐응.”
신관들을 발칵 뒤집었던 대신전의 위험은 내 품에서 심드렁한 소리를 내었다. 나는 피곤해 보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바람 냄새를 담은 서늘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자 정말로 바람을 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쓸어내렸다. 그러자 기분 좋은 듯한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누가 누구더러 개새끼라고 하는 건지.’
이런 걸 보면 세 남자 중 아슬란이 제일 그가 말하는 개에 가까워 보인다. 사실 마수니까 짐승에 제일 가깝기도 하고.
“뭘 한 건가요?”
“뭐? 내 힘?”
“그래요.”
그의 마력은 단지 퍼져 나간 것뿐만이 아니었다. 규칙적인 듯하지만 복잡한 움직임을 갖고 있는 것을 느끼는 순간 어떤 마법 또한 함께 발동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물을 쳤지.”
“…그물?”
“그래. 그대의 자국이 삼킨 힘을 찾아내기 위한 그물. 대륙 전체에 쳤는데 완전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사라진 힘은 이 대신전 안에서는 느껴지지 않아. 분명히 다른 어딘가에 모여 있을걸.”
그 말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성력이 모여 있다.
‘…이리스.’
책에서는 분명 이벨리나의 성력이 줄어들수록 이리스의 성력이 늘어 갔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이벨리나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성력의 덩어리를 떠올렸다. 순식간에 그 크기가 줄어들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만큼의 성력이 이리스에게로 가 있는 건가.’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아슬란의 마법이 완벽해지면….’
그는 곧바로 이리스를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호감을 느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이리스니까.
‘안 돼.’
너무 빠르다. 언젠가 그가 이리스에게 간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 아슬란이 필요했다.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일까. 나도 모르게 아슬란을 내 품 안으로 끌어안고 말았다. 잠시 그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예복의 단추를 풀어낸 그의 손이 곧 흰 가슴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라트반을 부르겠어요.”
“마음대로 해. 그 새끼도 보고 싶어서 안달일 텐데 뭐.”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슬란은 라트반이라는 말에 가슴을 쥔 손에서 힘을 빼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듯한 그의 행동에 물었다.
“내 몸이 그렇게 좋은가요?”
그 질문에 아슬란이 손을 거두었다.
“어떻게 싫을 수 있겠어. 그대는 내 암컷이야. 그런데….”
그러더니 지금껏 본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가 몸 말고 다른 걸 나에게 준 적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