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성녀니까 문제없어.”
바꿔 말하면 성녀가 아니면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성력이 사라지면… 마수가 머물 수 없다고 했지.’
애초에 일반적인 인간에게서는 새끼를 거의 볼 수 없다고 했다. 죽지 않는 것이 성력으로 약속된 성녀의 몸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버틸 수 있다고 했던가.
서재의 책에서 읽었던 마수의 특징대로 아슬란은 제 새끼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는 관계 도중 셀 수 없을 만큼 내 안에 사정했고, 잠시 쉬는 틈에도 제 것을 빼지 않고 비벼 대었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연신 내 배를 쓸었었다. 그럴 때마다 들었던 걱정이 다시 생각났다.
‘만약 이리스가 나타나고 성력이 사라지면….’
어쩌면 아슬란이 라트반보다 더 빨리 이리스의 앞에 무릎을 꿇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성녀가 나타나면 지난 시간 동안 제가 공을 들였지만 쓸모없게 된 것에 대해서는 결코 좋은 감정을 갖지 못할 것이다.
머리가 아파 왔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 번에 몰아치고 있었다. 이벨리나의 일부터, 허벅지의 자국, 그리고 라트반과 아슬란의 문제까지.
하나씩 처리해도 힘들 일들이 한꺼번에 나에게 다가와 답을 요구하고 있다. 어깨가 무거워지고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왜 이런 일들을
‘자고 싶어.’
지금은 조용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푹 잠든 다음에 천천히 문제를 생각해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 눈앞의 두 남자가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시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이 두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침실에서 도저히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니었던지라 서재로 왔더니 여기까지 신관들이 온 모양이었다.
‘저들도 다 물러가라 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짚는 순간이었다.
“리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밝은 레온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라트반과 아슬란이 서로를 노려보는 것을 멈춘 채 시선을 문으로 돌렸다.
어쩐지 두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 답을 찾은 것 같았다.
***
레온은 제 손에 들려 있는 두꺼운 책을 고쳐 쥐었다. 저번에 성녀와 함께 이야기할 때, 그녀가 관심을 보이던 대륙의 신기한 장소에 대한 삽화가 잔뜩 들어간 책이었다.
오늘은 저번에 다 설명하지 못했던 곳들을 이야기하며 슬쩍 다시 대신전 밖의 도시에 함께 또 놀러 가지 않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성녀가 반갑게 맞이한 것을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선 순간 그는 그대로 멈춰 섰다. 안에 라트반이 있는 것은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긴 적발을 가진 낯선 남자가 오만방자한 태도로 소파에 앉아 있더니 레온을 향해 말했다.
“이건 신전의 개새끼가 아닌데?”
레온은 저를 노려보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말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제가 좀 가볍게 행동하나 그의 지위는 제국의 황태자다. 대신전 안에서는 세속의 모든 자가 평등하다는 소리를 해도 그의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자객조차도 그에게는 존댓말을 하는 판인데, 이것? 개새끼?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리려던 레온은 남자를 살펴보다 얼굴을 굳혔다. 어쩐지 이 남자가 저번에 라트반과 함께 성녀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에게 흔적을 남겼던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레온은 필사적으로 다스려야 했다. 낯선 남자는 그런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순간 저절로 숨을 가다듬어야 할 정도로 방 안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그것만으로도 레온은 낯선 남자가 무척이나 강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절대 친해질 수 없는 놈이라는 것도 알았고.
“지금 뭐라고….”
“자꾸 이러면!”
레온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성녀가 소리쳤다. 그러더니 레온의 옆으로 다가와 그의 팔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레온 황태자에게 도움을 받겠어요!”
성녀가 외치자 라트반과 남자가 그대로 굳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은 입을 다물었다.
성녀가 자신에게 무슨 도움을 받는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닥치고 있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어 침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내 눈은 다른 풍경을 보았다.
어둠이 가득했던 방. 네 번의 노크. 겁에 질렸던 울음소리.
“성녀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보았던 것과 다른, 밖에서 들려오는 신관들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순식간에 주변은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에는 그 어떤 과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과 별다를 바 없는 이벨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표정만큼은 그때와 달랐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이벨리나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그저 지난 이틀간의 휴식을 누리고 조금 편해진 모습의 ‘내’가 보일 뿐이다.
“들어오도록 해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의 소리에 대답을 하자 곧 예복을 든 신관들이 들어왔다. 그녀들에게 옷 시중을 받으면서 나는 지난 이틀간 내가 고민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레온에게는 어쩐지 또 빚을 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방을 나서면서 그는 내 귓가에 ‘이런 용도라면 얼마든지 사용해 주세요’라며 속삭이고 나갔다. 그는 무척이나 신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내 가슴은 무거워졌다. 방을 나서던 라트반과 아슬란의 표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답을 얻지 못하고 방을 나서는 라트반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성녀인 내가 신전 기사인 그를 유혹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긴 했을지언정 그 후에 그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 경멸과 혐오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도 덩달아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라트반이 지금의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호감의 깊이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슬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와 계약을 했다. 정확히는 성녀와 계약을 했다. 그가 제 새끼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는 그와 밤을 보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힘들어하는 나를 보면서도 다시 몸을 묻어 오지 않았던가.
사실 그는 이렇게 나를 매번 찾아오고 다른 인간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잠자리에서도 말하곤 했다. 그냥 이대로 마법사들의 섬으로 데리고 가 버리고 싶다고. 그 말에 내가 몸을 움츠리며 그에게서 멀어지자 아슬란은 어깨에 입을 맞추며 그냥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방을 나서기 전, 아슬란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당장이라도 레온을 죽일 듯이 다가오던 그를 막아서다가 몰려오는 두통을 느끼고는 신음 소리와 함께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슬란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설마 아픈 게 나 때문인가.”
“…아니라고는 못 하겠어요.”
머리가 아픈 것에 아슬란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몸의 상태가 엉망인 것도 전부 그의 탓이 아니던가. 게다가 그전에도 아슬란 때문에 벌어졌던 민망한 상황들을 생각하니 표정이 좋아질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아슬란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가 버렸다. 생각보다 순순히 퇴장하는 그의 모습에 라트반마저 놀랄 정도였다.
‘…내가 아파서?’
침대 위에서는 힘들다고 매달려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머리 좀 아프다고 이렇게 쉽게 물러섰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아슬란이 나가고 성녀님을 쉬게 해 드리자며 라트반을 끌고 나가던 레온은 문을 닫기 전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세 명이 나가고 난 다음에 드디어 좀 조용해졌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세 사람은 내가 이 세계에 처음으로 떨어졌을 때, 가장 두려워하던 존재들이었다.
언젠가 나를 쫓아 죽음으로 밀어 넣을 자들이었으니까. 2년이 지나기 전에 어떻게든 관계를 개선해 보자고 마음먹었을 때도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비틀린 관계도 있었고 접점조차도 없는 관계도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친분이라도 만들어 보자고 노력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세 명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잘 대해 주고 있다니.
‘이게 좋은 일일까.’
이벨리나인 내가 책 속의 흐름과 다르게 움직였기에 이 세계도 바뀐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라면 바뀐 방향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지도 몰라.’
내가 제일 두려운 것은 그것이었다. 그저 조금 돌아가는 것일 뿐, 끝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2년 뒤, 그저 그들이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정도의 호감이었다.
물 한 방울도 없는 사막에서, 죽지 않을 한 통의 물을 바랐던 것뿐인데 내 앞에 발목을 적실 정도의 강이 나타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저 반가워하며 그 강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만약 이 강이 발목 정도의 깊이가 아니라면. 한 걸음 내디뎠을 때 그 강의 깊이가 허리, 아니 가슴을 넘어 나를 완전히 삼켜 버릴 깊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면.
그럼에도 나는 기뻐하며 뛰어들 수 있을까. 심지어 언젠가 다시 말라 버릴지도 모르는 강에 말이다.
그사이 예복을 입혀 주던 신관들의 손이 멀어졌다. 거울을 보니 예전 회의 때 입었던 화려한 예복이 다시 내 몸에 걸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카를 신관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대신전에 모든 대신관 후보들이 모였다. 그러니 이제 대신관을 선출하기 위한 긴 회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드디어 그 카를 신관을 직접 만나겠구나.’
문으로 향하며 나는 그를 생각했다. 정확히는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본 그의 모습을. 기억 그 어디에서도 그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벨리나는 물론이고 모두가 그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가 하는 말은 대신전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단 하나,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목소리만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힘을 가졌으니 가지지 못한 자에게 베풀라던 목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젖은 소리. 그리고 이벨리나의 신음 소리. 머릿속이 어떤 장면을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벨리나는 성녀였다. 그 어느 누구도 이벨리나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했다면 그녀 스스로가 원해서 한 일이다.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 만지며 문을 열고 나섰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다 짧은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신관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방 앞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느끼는 자신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왜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라트반, 아슬란, 레온. 왜 그들 중 누군가는 앞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내가 그들을 밀어내 놓고 지금은 곁에 있기를 바라다니. 스스로에게 웃음이 났다.
‘이게 당연한 건데.’
원래 없었던 인연이다. 그리고 없어질 인연이기도 하고. 지금에 취해서 멋대로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되었다.
‘익숙해져야지.’
한동안 있고 잊었던 이리스의 존재가 생각났다. 라트반도 아슬란도, 레온도 ‘성녀’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가짜 성녀이며 가짜 성녀가 될 내 곁에 계속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의 빈자리를 다시 한번 바라본 다음 나는 걸음을 옮겼다.
***
내가 중앙 신전으로 들어가자 앞에 서 있던 상급 신관들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하게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이 대신관의 후보였다.
‘다들 긴장하고 있겠네.’
지난 회의에서 모두가 대신관 자리를 두고 첨예하게 날을 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대신관 선출 회의였으니 아마 오늘은 시작부터 그 기 싸움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관들이 건네는 인사를 받으며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당분간 대신전이 무척이나 바쁘겠군요. 대신관이 정해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터이니 말입니다.”
다들 동의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말에 몇몇 상급 신관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잘하면 당장 오늘 정해지지 않을까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있나. 후보자들의 자격을 다시 검토하고 자질에 대해 의논을 하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기록을 보면 가장 길었던 대신관 선출 회의는 한 달을 넘긴 적도 있다고 했다. 아무리 빨리 끝났을 때라고 해도 일주일은 걸렸다고 했는데 당장 오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오늘 살펴볼 후보만 해도….”
내 말에 상급 신관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 아직 전달받지 못하셨군요.”
“무엇을 말입니까?”
“대부분의 후보가 자진 사퇴했습니다. 물론 저도 사퇴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순간, 그가 뭐라고 말한 것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요?”
믿을 수가 없었다. 대신관을 향한 상급 신관들의 욕망은 저번에 질릴 만큼 잘 봤었다. 물론 그 욕망이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언제나 더 큰 것을 가지려고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대신전의 상급 신관은 손을 뻗으면 하늘에 닿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높은 자리이다. 애초에 이 대륙에서 수십 명에게만 허락된 자리였으니까. 상급 신관이라는 자리가 사람들의 존경은 물론 물질적으로도 모자람이 없는 자리임에도 그들은 하늘을 향해 한 계단을 더 오르기를 바랐다.
성녀는 신이 정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가질 수 없는 명예다. 하지만 대신관은 아니다. 노력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 물론 그 노력이란 단어에 아주 많은 것들이 포함되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대신관 자리를 향한 그들의 격렬한 욕망을 보았었는데 그 자리를 도전하지도 않고 포기했다고?
“어떻게 된 일인가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내 질문에 상급 신관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카를 신관님께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솔직히 그분께서 돌아오시기 전에는 저희들도 조금 욕심을 냈었습니다. 신을 따르고 성녀님을 섬기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저희들이 조금이라도 헌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신관의 목소리에 점점 열기가 깃들었다.
“하지만 카를 신관님이 돌아오시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눈 순간 깨달았습니다. 감히 저 같은 존재는 그런 영광을 누리기에 무척이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당장이라도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상급 신관들도 그가 충분히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나는 모두가 대신관 후보에서 사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감히 제가 잠시 제 주제를 알지 못하고 만용을 부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저도 카를 신관님을 만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제 부족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답니다.”
신관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럴 리가 없다. 그토록 대신관의 자리를 원하며 집착을 보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카를 신관과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 그 욕망을 버릴 수 있었다고?
그때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 저기 카를 신관님께서 오시는군요.”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복도의 끝에서 소박한 일반 예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심하게 절뚝거리는 몸 위에 제대로 자르지 못한 빛바랜 갈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부드럽게 휜 눈꼬리는 그의 얼굴이 언제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나를 보는 눈빛은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무서워.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기억 속의 이벨리나처럼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그를 피해 당장이라도 뒤돌아서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가고 싶었다. 도망가야 해.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무서워, 살려 줘. 제발 누구라도….
그 순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들’이 내 뒤에서 들렸다.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라트반과 레온, 아슬란이 서 있었다.
“어떻게…?”
라트반이야 이 자리에 있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레온과 아슬란은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보니 그제야 평소와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레온과 아슬란 두 명 다 신전의 예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슬란은 마법을 썼는지 형형하게 빛나던 붉은 눈동자는 평범한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평소 느꼈던 날카로운 기운도 지금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제 마력도 함께 숨긴 모양이다.
내가 두 사람을 바라보자 레온은 다른 신관들의 시선을 피해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지만 아슬란은 누가 보아도 기분이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채 선 채였다. 옷이 바뀌고 모습이 바뀌어도 그대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성격에 나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잊은 채 웃어 버릴 뻔했다.
나는 둘을 바라보다 라트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와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물으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틀 전, 그를 어떻게 내보냈는지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라트반을 내보냈었다. 그래서 오늘 내 처소를 나오면서 평소라면 항상 서서 나를 기다렸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당연하다고 생각했었고.
미안함을 섞은 무안함이 내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보내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라트반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고 있자 라트반은 한 걸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말을 맺음과 동시에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덤덤히 말하는 그의 어조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뒤에서 다가오는 카를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언제나 불안 속에 살았다. 내가 믿을 것이라고는 이벨리나가 버리듯 던져둔 기억이 전부였다. 그 기억을 뒤적이며 얻은 정보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 가며 그들이 나에게서 이상함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거기에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밀려드는 일까지 처리해야 했고. 몇 개월 사이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나는 언제나 세차게 흐르는 거친 강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무사할지라도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그대로 휩쓸려 내려가 버리는 그런 위태로운 강을.
그리고 지금 내 뒤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거센 물살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 손을 잡아도 될까.
내가 여전히 망설이고 있을 때 라트반이 먼저 움직였다. 바람결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례를 용서해 달라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
크고 단단한 손이 내 손을 그러쥐었다. 동시에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넘어질 듯 휘청이는 몸을 굵은 팔이 단단히 잡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나를 붙잡아 준 것은 라트반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레온과 아슬란의 손 역시 흔들렸던 내 몸을 붙잡고 있었다.
그 순간, 흔들리지 않도록 어딘가에 단단히 묶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어떤 거세고 세찬 것이 몰려와도 서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붙들고 있는 손들을 보았다. 나는 한 명인데 붙잡아 주는 사람이 세 명인 탓에 손을 잡아 주는 일반적인 에스코트와는 전혀 다른 엉망인 꼴이었지만 어쩐지 그 모습에 웃음이 나고 말았다.
“성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카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벨리나의 기억 속에서 들었던 것과 변함이 없는 목소리. 그의 목소리에는 살짝 들뜬 즐거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그가 진심으로 반가워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다시 들려온 그 목소리에 나는 신기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못 할 만큼 두려웠는데 지금 나를 잡은 손들을 느낀 순간, 막연했던 불안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웃음을 띤 채 서 있는 카를이 있었다.
그가 과거에 이벨리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계가 왜 어그러졌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카를을 그토록 따르던 이벨리나가 그를 혐오하고 두려워 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겪은 것이 아니었다. 잠시 모든 기억을 주지 않은 이벨리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는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군요. 오랜만입니다, 카를 신관.”
나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반가움은 없는 웃음이었다.
***
라트반은 회의실로 향하는 성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손에는 조금 전 그녀를 잡았던 감촉이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한눈에 알아차릴 정도로 공포에 질린 얼굴과 떨리던 몸이었다. 잠시 그 흔적을 느끼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카를을 노려보는 레온과 아슬란이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슬란이었다.
“역겨울 정도로 성력을 뒤집어쓴 탓에 뭘 제대로 느낄 수가 없군.”
“그 입을 조심히 놀리라고 했을 텐데.”
대신전의 예복을 입었다 해서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아슬란은 애초에 조심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그나마 원래 모습 그대로 머물면 성녀에게 피해가 갈 거라는 말에 겨우 눈의 색을 바꾸고 마력을 갈무리해 담아 두긴 했다. 아슬란을 섬기는 마법사들이 알면 기절할 일이었지만 라트반에게는 크게 감흥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성녀에게 그 어떤 작은 피해라도 주면 즉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라트반은 그 다짐을 기억하며 아슬란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레온과 아슬란의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 말이다.
셋이서 사이좋게, 아니 정확히는 어쩐지 레온이 이긴 것 같은 분위기로 세 사람이 성녀의 방에서 내쳐진 다음 셋은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하지만 다음 날 밤, 세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세 사람은 여전히 단단히 잠긴 방문을 보고는 말없이 그곳에서 일단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후원에서 다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온이었다.
“라트반 단장. 카를 신관이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그 질문에 아슬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도 묻고 싶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트반 역시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질문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카를 신관에 대해서 물어보는 겁니까.”
예전이라면 신전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 황태자가 무슨 꿍꿍이인가, 하며 날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상해.’
라트반이 다시 이상함을 느낀 것은 돌아온 그에게 인사하러 온 신관들을 오전에 보았을 때였다.
카를은 특별한 지위가 없는 평신관이었다. 그를 먼 신전으로 보낼 때, 성녀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신관의 올바른 마음가짐이 아니겠냐며 그의 모든 지위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녀가 카를에게 너무하다며 안쓰러워했지만 정작 카를은 성녀님의 뜻이라면 자신은 기꺼이 따르겠다며 아무런 불평 없이 순순히 제 지위를 내려놓았다.
그가 갖고 있었던 신전의 지위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성녀의 교육 담당관을 시작으로 신전 도서관의 고서 담당자까지.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곧 그가 내려놓은 자리를 이어받게 될 신관들이 정해지자 카를은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그동안 그가 정리해 왔던 것들을 넘겨주고 주의해야 할 사항을 알려 주었다.
카를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무거웠던 신관들은 여전히 웃으며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 주는 카를에게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카를이 떠날 때, 마지막까지 배웅했었고 그가 돌아온 지금, 누구보다도 먼저 나와 그를 반겼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카를 신관님. 언제나 카를 신관님이 돌아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카를의 앞에 울며 무릎을 꿇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제는 모두 그 지위가 올라 상급 신관에 이른 자까지도 평신관인 카를의 앞에서는 허리를 숙였다.
‘이게 당연한 일인가…?’
예전이라면 카를의 명망에 신관들도 모두 존경을 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라트반은 이제 그런 신관들의 모습에서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가 카를을 믿고 따른다. 신관이어도 다스리지 못하는 질투의 감정이 하나쯤은 보일 법함에도 모두가 그저 카를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그가 모두에게 친절을 베풀고 다정하며 겸손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모두에게 열광에 가까운 신뢰를 받을 이유가 된단 말인가.
그리고 다음 날, 성녀의 방 앞에서 만난 레온이 카를에 대해서 물었다. 왜냐고 묻자 레온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신관의 화법이 아니니 묻는 거야. 그는 신전에 들어오기 전에 어디에 있던 사람이지?”
농을 걸며 너스레를 떨던 레온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제 앞에서 수상한 이에 관해 묻는 자는 영민하고 날카롭다는 제국의 황태자였다.
“카를 신관은 태어나자마자 대신전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그럴 리가.”
레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아침, 레온 역시도 움직였다. 대신전을 들썩이게 만들고 있는 그 카를 신관이 누구인지 아무래도 직접 만나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대신관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자라고 했지.’
하나같이 그에 대해서는 칭찬만 가득한 탓에 더욱 그가 궁금해졌다. 일단은 친밀하게 지낼 생각이었다. 성녀를 이 대신전에서 데리고 나오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대신전을 제국의 아래에 두겠다는 생각도.
‘성녀가 없는 대신전을 지탱할 만한 사람인지를 봐야 할 것 같은데.’
곧 주인이 없는 집을 지켜야 할 집사를 살피는 마음으로 그는 카를의 처소로 갔다.
제국의 황태자라는 것은 길게 늘어선 방문객들을 제치고 먼저 카를을 만날 수 있는 위치였다.
“귀한 분께서 이런 곳까지 찾아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카를의 모습에 레온의 표정이 굳었다.
‘이 자는….’
레온은 천천히 고개를 드는 카를을 보았다.
레온은 어릴 적부터 많은 것을 교육받았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그가 흥미를 가지고 또한 많은오래 교육을 받았던 것은 화술이었다. 언젠가 그의 스승이 말했다.
“사람에게 호감을 끌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무척이나 사소한 것들이 무의식 속에서 호감을 불러일으키지요. 예를 들어 목소리의 크기, 말하는 속도, 인사를 하는 동작의 각도 그런 것 말입니다.”
레온은 그런 모든 것을 배웠다. 그렇기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카를은 계획적으로 사람의 호감을 끌어내고 있는 자라는 것을.
레온은 곧바로 어떻게 카를을 대할지 정했다. 그는 방의 주인인 카를이 권하기도 전에 먼저 의자에 앉은 다음, 마치 그가 주인인 것처럼 말했다.
“그만 앉도록 하지, 보아하니 다리도 불편한 것 같은데.”
레온의 말에 카를과 그 주변에 있던 신관들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몇몇 신관들은 노골적으로 레온의 말에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레온은 빠르게 그 표정들을 살폈다.
‘이상하군.’
신관들이 드러내는 불쾌감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대신전의 신관들은 아무리 세속의 지위라 해도 황태자인 그를 높여 대했다. 그렇기에 조금은 불쾌할 수 있는 일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었다. 아마 지금 그가 이 자리에서 신을 모욕했다 하더라도 이것보다는 부드러운 시선을 받았으리라.
레온은 좀 더 카를이라는 자를 살펴볼 필요를 느꼈다. 그렇기에 상대가 좀 더 쉽게 감정을 드러낼 만한 제 모습으로 자신감과 오만함이 적당히 넘치는 황태자를 선택했다.
카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자 마침 들어오던 상급 신관 하나가 옆의 신관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전해 듣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히 대놓고 카를을 경계하던 신관이었는데.’
그가 포섭했던 상급 신관 중에서도 카를에 대한 경계를 유독 강하게 드러냈던 사람이었다. 그가 돌아오면 대신관의 자리는 무리일 거라면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 그가 지금은 레온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의자에 앉은 카를을 바라보았다. 레온도 카를이 돌아오고 나서 많은 신관이 인사를 하기 위해 몰렸다는 것을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 지금도 이 방 안과 밖에 카를을 만나기 위해 온 신관들이 가득했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과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을 텐데.’
레온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적의 어린 시선을 못 본 척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사람들을 이 정도로 홀려 놨다고?’
아무리 상대방의 호감을 끌어내는 일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마법 같은 것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게다가 상대가 날을 세워 경계를 하고 있으면 제대로 통하지도 않는 기술이고.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맹목적으로 자신의 편에 서도록 만들었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에 대한 답은 곧 레온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준비된 거야.’
의자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레온은 입 안이 바싹 말라 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정신을 더욱 맑게 하는 흥분을 느꼈다
이곳에 있는 신관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카를은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듣기로 그는 변방의 신전으로 쫓겨나기 전 대신전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처음 대신전에 들어왔거나 아직 일이 익숙하지 못한 신관들의 옆에서 가장 많은 조언을 해 주며 밤늦게까지 그들과 함께 일을 했겠지. 사람이란 함께 고생을 한 자, 그것도 자신을 도와준 자에게는 깊은 동지애를 갖기 마련이다. 자신과 상대를 ‘우리’라는 말과 함께 하나로 묶을 정도의 동지애가.
‘그게 이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는 건… 먼 곳에 가서도 계속해서 관리를 했다는 건데….’
카를이 대신전에 있을 때라면 이 호감과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그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간은 옆에 있지 않으면 쉽게 잊는다.
‘편지 같은 걸로도 그에게 필요한 자들과 계속해서 연락을 했겠지.’
레온은 이 자리에서 나가면 지금 저를 노려보고 있는 신관들이 카를에게 받았을 편지를 어떻게든 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보면 제 생각에 확신을 얻을 수 있으리라.
레온은 다른 신관들에게 잠시만 자리를 물러 달라 양해를 구하는 카를을 살펴보았다.
무해하다는 말을 인간으로 만들면 이런 모습일까. 특별한 점을 찾기 힘든 외모다.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얼굴이지만 굳이 다른 점이라면 그의 얼굴에는 그 나이대의 중년 남자가 가질 수 없는 평온함이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화라는 것을 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인상에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와 살짝 올라간 입매가 언제나 그를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마치 ‘대신전의 존경받는 신관에게 어울리는 얼굴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
‘재미있는 놈이군.’
그저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대신관 후보라길래 얼마나 따분한 신관인가 싶어 보러 왔더니 속이 시커먼 뱀이 똬리를 틀고 양의 가죽을 둘러쓴 채 재롱을 부리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레온은 재미있는 것을 좋아했다.
‘이놈 목적이 뭐지?’
대신전에 있는 모든 자의 호감을 사고 이제는 제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 하는 카를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대신관?’
그것이 목적이라면 이제 카를은 곧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것이다. 주변은 이미 그가 대신관이 된 것처럼 대하고 있지 않은가. 대신관 후보들의 자격을 살펴보았을 때도 카를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렇게 사람들의 지지까지 손에 넣는다면 결과는 볼 필요도 없이 뻔하다.
오랜 시간 주변 신관들에게 공을 들였던 카를이다. 그러다 몇 년 전, 성녀의 명령으로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나듯 변방의 신전에 버려지다시피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불평 하나 없이 제게 닥친 시련을 견뎌 냈고 결국은 대신관 후보의 자리를 얻어 대신전으로 돌아왔다.
눈물이 날 정도의 노력이 담긴 그의 여정에 손뼉이라도 쳐야 할까.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부관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부관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포장된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이건 제국에서 그대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이야.”
“…저에게 말입니까?”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묻는 카를을 향해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는 척 되묻는 얼굴이 참 자연스럽기도 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자연스러움에 저도 질 수는 없었다.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길 바라.”
“제가 이런 선물을 받을 이유가….”
“과거 그대가 대신전에 있었을 때, 우리 제국의 기사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들었어. 부디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기를.”
아직 방을 다 나서지 않았던 신관들의 시선이 부관이 들고 있는 포장된 상자를 향했다. 이렇게 거리낌 없이 바라보는 것이 실례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상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물욕이 있든 없든 열어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것이 있다면 내용물을 궁금해하기 마련이다. 그게 본능이니까.
카를은 어느 정도의 반응을 보일까.
레온은 기대를 하며 카를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카를은 놀라는 것 같은 얼굴을 하며 부관을 잠시 바라보더니 슬쩍 시선을 레온을 향해 돌렸다. 레온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시선을 피하며 카를을 훔쳐보았다. 카를의 불편한 쪽의 다리가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미처 숨기지 못한 조급함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카를이 제게 말을 거는 것을 보며 레온은 느긋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선물보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더 급하다니. 황태자인 그에게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나 알고 싶은 것이 있는 눈치다. 카를은 이제 그리움을 담은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황태자께서 우리 성녀님과 친분이 있으시다지요.”
그 순간 레온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카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친분이라니.”
당치도 않다는 듯한 얼굴로 레온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큰 동작이 가능하도록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지은 것이었다. 얼굴 앞에서 내젓는 손끝이 차가웠다. 하지만 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매끄럽게 움직였다.
“내가 일방적으로 성녀님을 귀찮게 하며 뵙기를 청하는 것뿐이지.”
무언가를 숨기기 힘들 때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좋다. 그렇기에 사실을 말한 레온은 자연스럽게 제 동작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레온은 재미있는 것을 좋아했다. 위험한 것은 더욱 좋아했고. 위험한 것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그 서늘함이 언제나 몸의 모든 감각을 깨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레온은 처음으로 위험한 것에 대하여 그 어떤 때보다도 짙은 불쾌감을 느꼈다.
카를이 원하는 것은 성녀였다.
***
회의장은 대부분의 신관들이 착석을 끝내 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카를을 찾았다. 대신관의 후보라고는 하나 지금 이 자리는 신전 내 지위의 고하로 앉는 자리가 결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평신관인 카를의 자리는 나와 제일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야 겨우 보일 정도로 먼 자리라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러다 카를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참관인의 자격으로 앉아 있는 레온이 보였다. 그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쯧.”
그런 레온의 태도에 내 옆에서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라트반이 못마땅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레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슬란은 여기 없어서 다행이다.’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카를이 다가와서 인사할 때까지만 해도 내 뒤에 있던 아슬란은 지금 이 안에 없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는 듯한 내 눈빛에 그는 신관들의 눈을 피해 인상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그 자국을 지울 때까지 이곳에 머물 거야. 그대에게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지.”
그렇게 말한 아슬란은 카를을 한 번 노려본 다음에 그를 지나쳐 나가 버렸다. 도대체 왜 왔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 버린 그였지만 멀어지는 아슬란의 뒷모습에 이유 모를 든든함이 느껴졌다.
카를에게는 짧은 인사를 한 다음 더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을 스칠 때, 카를이 뭔가 나에게 말을 걸어 붙잡아 세우려고 하는 듯했지만 못 본 척을 하며 지나쳐 버렸다. 사실 내 머릿속은 카를보다는 어쩌다 라트반과 레온과 아슬란이 함께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카를을 스쳐 지나가자 신관들이 나와 카를을 번갈아 보며 뭔가 속삭이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 라트반은 내 옆에서 함께 걸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회의장 안에 착석하고 나서도 그는 계속해서 내 곁에 서 있는 중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제는 워낙 시간이 지난 탓에 가물거리는 내용이었지만 라트반과 레온과 아슬란이 처음으로 싸우지 않고 함께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 순간 내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리스….”
세 명의 남자가 싸우지 않고 처음으로 협조를 했던 것은 이리스의 앞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