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48)

카를의 웃음을 본 순간 라트반은 아득한 옛일이 생각났다. 그가 대신전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검을 받고 사냥에 나섰던 날이. 대신전 근처의 숲에서 거친 산짐승과 마주했을 때 그의 스승이었던 기사단장이 했던 말이 라트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적에게 네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라.”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스승이 가르쳐 주었던 수많은 검술보다 그 말 한마디가 라트반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었다.

왜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것일까.

그가 더 깊게 고민을 하기도 전, 그의 몸은 오랜 시간 훈련한 대로 능숙하게 마음을 감추고 무표정한 가면을 썼다.

“성녀님께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무탈하십니다.”

가벼운 물음에 어울리는 가벼운 대답. 그렇게 물 흐르듯 대화는 다음으로 흘러갔다.

“잠시 휴식 후 다시 치료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먼 길 힘들게 오셨는데 제 반가움만을 우선해 카를 님의 회복을 방해할 수 없지요. 대신전에서 카를 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긴 이야기는 대신전에서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트반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카를은 그런 라트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저를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니 다행이군요.”

대화를 더 이어 가려는 노력이 보였지만 라트반은 모른 척 그의 말을 넘겼다. 어쩐지 그와 길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조금 더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다시 카를이 뭐라 말하기 전에 꾸벅 인사를 한 다음 라트반은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여관의 밖으로 향했다.

“어딜 가십니까?”

라트반이 카를과 긴 대화를 나눌 거라 생각했던 기사가 여관을 나서는 라트반을 향해 당황한 듯 물었다.

“먼저 돌아가겠다. 누군가가… 아니, 카를 신관께서 행방을 묻거든 대신전에서 급히 기사단장을 찾기에 먼저 돌아갔다고 대답하도록.”

“알겠습니다.”

라트반의 말에 기사는 더 묻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라트반은 나무 아래에서 숨을 돌리고 있던 그의 말을 찾아 올라탔다. 그러고는 곧바로 대신전을 향해 말을 몰았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던 바람과 간간이 들리던 말의 울음소리뿐이었다.

대신전으로 돌아오자마자 라트반이 향한 곳은 그녀가 있다고 한 서재였다.

황태자의 목소리와 성녀의 대답 그리고 카를의 미소가 그의 마음속에서 어지러이 섞이고 있었다.

곧 서재에 도착한 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듯한 신음 소리에 더 생각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

“허억… 허억….”

인기척이 없는 조용한 방 안에서 라트반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릿속에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를 쓰러트리고 올라탄 다음 거침없이 살을 맞대 오던 성녀는 갑자기 이성이 돌아온 듯이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서재를 뛰쳐나갔다. 급히 그녀를 불렀지만 성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모습을 감추었다.

곧바로 그녀를 뒤따라 가려던 라트반은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 아래를 바라보았다.

모든 욕망을 눌러 살고 있다고 해도 몸이 자연적으로 보이는 현상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 역시 아침마다 괴로울 정도로 욱신거리며 부풀어 오른 제 하체에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잠들 때뿐이었다. 제정신으로 깨어 있을 때는 단 한 순간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아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부풀어 올라, 당장이라도 바지를 찢을 듯이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읏….”

무서울 정도로 예민해진 곳이 고통을 호소한다. 이럴 때 어떻게 했더라? 새벽에는 곧바로 욕실로 가서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전날 지은 죄를 속죄하고 오늘 새롭게 지을 죄를 속죄하는 기도문을 읊었다. 그러다 보면 이성을 되찾은 몸이 곧 진정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그런 방법들이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물에 흘려보냈던 목적 없는 욕망이 아니었다.

라트반은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만졌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따뜻하고 말랑한 입술의 감촉이 낙인처럼 그의 입술에 들러붙었었다. 이어서 떠오른 기억은 제 위에 올라왔던 작은 몸의 감촉이었다. 그의 위에서 부드럽게 짓눌리던 가슴의 느낌. 성녀의 손길이 그다음 어디를 향했던가.

“윽…!”

라트반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털었다. 더욱 욱신거리는 하체의 느낌에 스스로에게 환멸이 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대신전에 들어왔던 어린 소년에서 신전 기사단의 단장이 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그는 언제나 스스로의 욕망을 훌륭히 통제했고 또 억제해 왔다. 하지만 지금, 어릴 적보다 더 광포한 욕정에 휩싸이는 자신이 있었다.

살면서 처음 느끼는 그 감정에 라트반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성은 답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본능을 따랐다. 큰 손이 머뭇거리며 아래를 향했다. 제 것임에도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든 꼴이 끔찍하게 느껴져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숨이 차올랐다. 망설이던 손이 천 아래의 것을 쥐자 헉하는 소리와 함께 숨이 멎었다.

손안의 제 것에 라트반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 삿된 욕망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더럽다. 추잡스럽다.

평생을 금욕 속에서 살아온 그였다. 그렇기에 이처럼 날것 그대로 접하게 된 욕망이 그저 끔찍하고 또 끔찍했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 그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되는 상대를 향한다는 것도 끔찍했다.

“아, 하아, 흣!”

하루 종일 검을 연습했을 때보다도 더 흐트러진 숨이 그의 잇새로 빠져나왔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짓이지만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욕망을 제 몸에서 빼어 내는 수음의 행위에 라트반은 부끄럽고 참담했다. 그렇다면 당장 이 행위를 멈춰야 할 것인데.

“읏….”

왜 멈출 수가 없는 것일까. 왜 여전히 제 위에서 흐트러지던 성녀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하늘에 걸린 달이 조금 기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나마 주머니에 갖고 다니던 손수건 덕분에 적당히 정리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서재의 구석에 있던 물병의 물을 머리에 쏟아부은 라트반은 제 손을 닦고 또 닦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마수보다도 스스로가 가장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그가 거칠게 머리를 털어 내자 남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향기가 느껴졌다. 제 가슴 위를 덮었던 밝은 금색의 머리카락에 가득했던 그 향기였다. 코끝을 스치는 아찔함에 라트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형체 없이 감각만이 느껴지는 바람이 그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라트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들떴던 숨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라트반의 손이 다시 허공을 저었다. 또다시 그의 손은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만나야 해.’

단지 카를의 말이 걸려서만은 아니다. 라트반은 지난 몇 달간의 일을 떠올렸다. 그의 인생에 이토록 혼란스러운 감정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대신전에 들어온 이후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보며 살아왔다. 신을 섬기고 신의 대리인인 성녀를 따르며 마수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울 것. 그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좋아하는 것도 없으며 싫어하는 것도 없었다. 다만 제 인생과 사명에 대한 자부심은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을 부수며 짓누르려 하는 성녀를 멀리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그 감정은 희미해지고 있다. 아니,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쓰러졌다 깨어난 이후로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성녀도, 그도.

예전에는 그녀가 있는 곳을 피해 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나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다. 예전에는 목소리조차 듣기 힘들어 귀를 닫았었는데 이제는 그녀가 흘리는 숨소리마저 아쉬울 지경이다.

라트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잊어야 하는 것들이 다시 그의 안에서 되살아났다. 숨소리, 향기, 체온.

“하….”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평생 성서를 읽고 검만을 잡고 싸우는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에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성녀를 향한 제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쉬이 그 단어를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신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성녀에게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었다.

섬기고 따르고 존경할 것.

그것이 오직 그에게 허락된 감정이었다.

“왜 나는….”

채 삼키지 못한,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르는 원망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곧 라트반은 그 원망의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게 허락된 것은 기사단장이 될 때 스스로가 신에게 맹세한 것들이었다.

‘정신 차려. 그리고 네 자리로 돌아가.’

날뛰던 본성에 잠시 눌려 있던 이성의 목소리가 차갑게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은 그 이성에 따라 움직였다. 이성의 다른 이름은 신의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일에 실수 없이 완벽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언제나 그 목소리를 따를 것을 다짐하며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라트반은 이성의 목소리에 등을 돌리고 싶었다.

제 목을 끌어안았던 가는 팔의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

제 얼굴 위에 내려앉던 뜨거운 숨을 다시 마시고 싶었다.

제 몸에 닿았던 부드러운 몸을 다시 만지고 싶었다.

제가 품었던 원초적인 욕망을 확인하면서 라트반은 죽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스스로가 이토록이나 저열한 욕망을 품을 수 있는 존재임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품어 보지 않았던 것들이, 왜 이제야 성녀를 향해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

‘잊어.’

라트반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욕망을 필사적으로 제 안의 구석에 눌렀다.

하지만 잠시 후 또 다른 욕망들이 생겨났다.

검을 쥐는 법을 알려 주었을 때, 저를 바라보던 그 반짝이던 눈빛을 더 보고 싶었다. 별것 아닌 제 이야기를 재미있다는 듯이 들으며 이것저것을 물어보던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그리고 더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싫어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성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라트반은 서늘함만이 남아 있는 서재를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성녀의 처소를 향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금 우선하는 욕망이 있었다.

“…이벨리나.”

조용한 복도를 걷는 그의 입에서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라트반은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다.

라트반이 처소 앞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지키는 평신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재를 뛰쳐나갔던 성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반쯤 울먹이던 표정을 떠올리자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 그대로 가 버렸으니 신관들이 당황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라트반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더욱 당황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모른 척 그가 말했다.

“성녀님을 뵙고 싶습니다.”

무척이나 늦은 시간이다. 게다가 아무리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고 해도 젖고 흐트러진 것을 완벽히 숨길 수는 없었다.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오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지금 당장 성녀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를 만나서 제 감정도, 그리고 그녀의 감정도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역시나 그의 말에 신관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됩니다. 문을 완전히 닫아거셨습니다.”

문을 닫아걸었다는 말에 라트반의 얼굴이 굳었다. 신관들은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라트반 님도 아시다시피 예전에도 자주 이러셨으니까요. 저희도 좀 오랜만이라 당황했을 뿐입니다. 아마도….”

신관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더니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이번 주말은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라트반은 잘 알고 있었다. 성녀가 쓰러지기 전 툭하면 그녀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 신관일 리가 없는 남자들과 함께 들어갔으니까. 그 시간은 방해하지 말라는 듯 어떤 이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고 문이 열려 신관들이 들어가면 그들은 성녀와 남자들이 남긴 난잡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남자들은 그길로 나갈 때도 있었고 그 방에서 오래 머물 때도 있었다.

그때를 떠올린 순간 라트반은 그대로 문을 걷어찰 뻔했다.

다행히 그렇게 하기 직전 그는 분함을 추슬렀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게 될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번 문을 밀어 본 그는 정말로 단단히 잠겨 있다는 것을 알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뒤에서 신관들이 그를 불렀지만 라트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그는 후원의 구석에 서 있었다.

그가 벽의 한 곳에 손을 올리자 푸른빛의 글자가 나타나며 통로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트반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빛 한 점 없는 어둠을 걸으며 그는 생각했다.

미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머릿속 한구석이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를 덮치며 제가 싫으냐고 울먹이며 묻던 성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성녀에게 아무런 일도 없냐던 카를의 말도 함께 생각이 났다.

만약 카를이 말한 그 ‘아무 일’이라는 것이 만약 성녀의 문란한 모습을 말한 것이라면.

어둠을 더듬어 가던 그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라트반은 자신을 향한 깊은 혐오를 느꼈다.

그는 신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다. 신을 믿고 신의 대리자인 성녀를 섬기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렇다면 성녀에 대해서 걱정을 해도 모자랄 것을, 서재에서 저를 탐했던 성녀의 모습이 진심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끼고 있다니.

도대체 언제부터 제가 이리도 이기적인 인간이 되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안쪽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서둘렀던 탓일까. 전보다 훨씬 빠르게 그는 통로의 끝에 도착했다. 익숙한 방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는 달리듯 복도를 걸었다.

“……!”

저 멀리 복도의 끝에 성녀의 방문이 보인 순간 라트반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목 뒤가 쭈뼛해지며 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손은 당연하다는 듯 허리의 검을 잡아 빼었다. 스치는 공기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라트반에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이 대신전 안에서 느껴서는 안 되는 감각이기도 했다.

‘…마력?’

대신전이 어떤 곳인가. 성녀가 거주하는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안정된 땅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성력이 넘쳐흐른다. 마력과 성력은 상극이기에 대신전의 주변에 마수는 접근조차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수와 같은 힘을 쓰는 마법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 성녀의 방에서 느껴지는 것은 강한 마력이었다. 그리고 저 안에 있는 마력의 주인은 분노하고 있었다.

라트반은 그대로 내달렸다. 전장에서의 그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주변을 살피고 상대를 파악하기 전까지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검을 잡은 후로 그 조심스러움과 신중함을 잊어 본 적이 없는데, 저 안에 성녀가 있다고 생각한 순간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쾅!

노크를 대신한 발길질에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읏…!”

훅 밀려드는 미지근한 공기에 라트반은 이를 악물었다. 비릿한 냄새가 그를 덮쳤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일주일 전, 황태자와 함께 성녀의 방을 찾아왔을 때 같은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났다.

‘설마.’

몇 번이고 손을 들어 목의 흔적을 가리려 했던 성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의 그놈이…!’

라트반의 눈이 빠르게 방을 훑었다. 찾을 필요도 없었다. 성녀의 침대에 앉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라트반과 시선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

“…….”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 처음 만난 사이였음에도 둘 사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적의의 강이 흘렀다.

그리고 곧바로 서로를 향한 감정이 폭발했다.

아슬란의 손이 움직였고 라트반의 검이 그를 향했다.

카강!

아슬란을 향했던 검이 번쩍이는 빛에 부딪혀 큰 소리와 함께 움직임을 멈췄다. 창문의 유리 몇 군데는 두 사람의 충돌에서 튀어나온 힘에 부딪혀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

“……!”

두 사람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라트반은 제 검이 마법에 막혔다는 사실을, 아슬란은 제 마법을 막아 내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상대에 대한 탐색 따위는 없었다. 진심으로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를 담아 한 공격이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한 것은 두 사람에게 흔치 않은 일이었다.

라트반은 저릿한 손에 힘을 주며 남자를 살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붉은 머리카락에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붉은 눈.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색의 눈에는 자신을 향한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이 대신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혼자 제멋대로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대신전 안의 누군가가 저것을 끌어들인 것이다.

“…보니까 알겠군.”

계속 이어질 것 같던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아슬란이었다.

“네가 감히 주인의 입을 탐한 개인가.”

그 말에 라트반의 몸이 움찔했다. 아슬란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들은 적이 있다. 대신전에 무척이나 훌륭한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네놈이 그 사냥개군.”

라트반이라는 이름을 기억함에도 아슬란은 계속해서 라트반을 개라고 불렀다.

성녀의 입에 남아 있던 저 개의 냄새가 다시 기억났다.

발정 난 듯이 남성을 갈구하던 성녀의 모습으로 보아 분명 그녀가 가까이 있던 저 개를 끌어들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성녀는 그 이상을 저 개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아슬란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짜증 나게 만들었다.

그녀의 상태로 보면 이미 저것을 잔뜩 취했어야 했는데 더 하지 않고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가능성은 두 개였다. 저 개를 정말로 취하기 싫었다거나… 아니면 저 개를 특별히 여겨 그만두었다거나.

아슬란의 눈이 라트반을 살폈다. 굳게 다물린 입술 위에 작은 잇자국이 보였다. 그것을 누가 남겼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아슬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는 손을 뻗어 제 옆을 덮었던 이불을 걷었다.

그러자 그 아래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봐도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제 흔적을 가득히 담은 채 제 옆에서 안식을 취하는 모습이라니.

아슬란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제 품에 안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채, 자국이 잔뜩 남은 흰 등허리가 라트반의 눈에 아찔하게 담겼다.

“…네놈.”

순식간에 낮게 갈라진 라트반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슬란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성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성녀가 어떤 마음으로 저 개를 잠시나마 취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는 자신에게 안겼다. 일단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저를 노려보는 모습을 보아하니 저 개는 그녀가 어떤 얼굴로, 어떤 목소리로 수컷을 받아들이는지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슬란의 손이 성녀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끌었다. 그의 짙은 피부 위에서 눌리는 흰 가슴의 감촉에 다시 아래가 뻐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데려가 버릴까.’

그러면 저런 귀찮은 사냥개가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모습 따위 보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마법사들의 섬으로 가서 그의 거처에서 하루 종일 그를 기다리며 그만을 보고 그만을 품에 안을 성녀의 모습을 생각하니 손이 떨릴 정도로 극한의 만족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렇게 아슬란이 성녀를 끌어안고 있을 때, 라트반이 물었다.

“넌 누구지?”

신전의 기사는 상대를 죽이기 전, 이름을 묻는다. 그래야 죽이고 난 다음 속죄의 기도를 올릴 수 있으니까.

“아슬란.”

“…들은 적 있다. 마법사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놈이 그런 이름을 갖고 있다지.”

라트반은 다시 검을 쥐었다. 다음번에는 저놈을 죽일 것이다. 그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아슬란 역시 한 팔을 들어 허공에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흑….”

죽은 듯이 아슬란의 품에 안겨 있던 성녀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에 즉시 두 사람의 시선이 성녀를 향했다.

처음에는 그저 짧은 신음 소리라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슬란은 라트반이 다가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제 품에 안겨 있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굳게 감겨 있는 눈 아래의 속눈썹이 젖어 드는 것이 보였다.

곧 볼을 타고 투명한 물방울이 툭, 시트 위로 떨어졌다.

흐느낌은 곧 울음이 되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서러움이 가득한 가는 울음소리에 아슬란도, 라트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성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를 신관님.”

대신전의 정문을 통과하자 카를을 기다리던 신관들이 몰려들어 반갑게 인사했다. 카를은 일일이 그들에게 인사말과 감사의 말을 건네었다. 그러다 잠시 고개를 들었다. 카를의 눈이 저 멀리 있는 성녀의 처소를 향했다.

“그러게요….”

부드러운 웃음이 카를의 얼굴에 걸렸다.

“저도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쁩니다.”

먼 곳을 향한 그의 말이 바람에 섞여 사라졌다.

나는 눈을 떴다.

몇 번을 깜빡이고 나서야 눈앞의 어둠이 익숙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하….”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반가운 것은 아니었기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이걸로 세 번째인가?’

이 어둠은 이벨리나의 의식 속이다. 그녀가 나를 불러낼 때 데려오는 그곳. 다시 눈을 감은 채 비웃음을 담아 나를 부를 이벨리나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이벨리나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자 여전히 암흑만이 가득했다. 이벨리나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벨리나가 나를 부른 게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곳은 이벨리나의 의식 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마음대로 끌고 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부르지 않았음에도 내가 이 의식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니.

이벨리나가 없는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이곳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었다. 의식 속이라서 그런지 온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기절하기 전의 일이.

“아….”

짧은 신음과 함께 나도 모르게 배로 손이 갔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은 화가 난 것 같던 아슬란의 모습. 그리고 아래를 가득 채우던 그의 것과 계속해서 흘러내리던 체액의 느낌이었다. 의식 속이라서 그런 걸까. 다행히 몸에 그 흔적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처음 이 암흑 속으로 왔을 때 내 몸은 병들어 쇠약해진 나의 원래 몸을 가진 채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들어와 떠밀리듯 깨어났을 때 마지막으로 본 내 손은….

“분명히….”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흰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이 몸은 분명 이벨리나의 몸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완전히 이벨리나의 몸과 동화라도 된 것일까. 그녀의 의식 속에서도 내가 그녀의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옷자락을 슬쩍 들어 보았다. 세 개의 동그란 자국이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들을 꾹 눌러 보았지만 지금은 다행히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분명 이것 때문이었어.’

갑자기 의식을 완전히 장악했던 참을 수 없는 욕정. 그것은 분명 이 자국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벨리나가 이걸 지워 달라고 부탁했었지.’

이벨리나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내가 본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그녀가 ‘왜’ 남자들을 그리 끌어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잔뜩 남자들을 탐했으면서도 애정은 없었다. 그 남자 중 누구 하나 이벨리나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자도, 하다못해 식사를 함께한 자들도 없었다. 그저 안고 또 안은 다음 적당한 대가를 쥐어 내보내는 게 전부였다.

‘설마 이벨리나가 남자들과 그렇게 밤을 보낸 게 이것 때문인 건가?’

그렇다면 의문은 더욱 생겨난다.

‘아슬란이 말했었지.’

그는 이것이 고대의 사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이런 것이 몸에 자리 잡는 동안 모를 수 없다고 했었고. 이것이 어떻게 내 몸에 자리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무엇 하나라도 기억이 나면 곧바로 알려 달라고 했고.

‘성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지금이야 나도 어느 정도 성력을 사용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었지만 이벨리나라면 더욱 간단한 일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녀를 겁박해서 강제로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 게다가 아슬란의 설명을 들으니 이것은 하루 이틀 만에 완성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이것은 이벨리나의 동의를 얻어 새겨진 것이다. 그런데 이벨리나는 이제 그것을 지우려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것에 관한 기억을 볼 수 없을까.’

꼭 이 자국에 관한 기억이 아니더라도 이벨리나가 숨겨 놓은 그녀의 기억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

어디에 서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발아래 어둠 속의 한구석에 빛이 도는 것이 보였다. 암흑만이 가득한 곳이었기에 가느다란 빛이었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존재가 선명했다.

나는 주저앉아 아래를 만져 보았다. 허공에 떠 있지만 발은 단단한 바닥을 밟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손을 뻗자 내 손은 발을 지나 더 밑을 만졌다.

‘바닥이 형체가 있는 건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원하면 위치를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냥 걸어 내려가듯 가면 될까?’

하지만 생각만큼이나 간단히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은 이벨리나의 의식 속이다. 그런 곳에서 내가 과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은 이 몸속이잖아?’

나는 다시 내 손을 바라보았다. 이벨리나의 의식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내가 지금 얻은 이 몸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몸이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해졌고.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이 의식 속에서 내가 예전보다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이벨리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금이라면 더욱더.

“후….”

몸을 일으킨 다음 숨을 크게 마셨다. 그러고는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악!”

그 순간 절벽에서 떨어진 것처럼 내 몸이 쑥 아래로 떨어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낙하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사이 내가 보았던 빛 조각은 어느새 내 머리 위로 멀어지고 있었다.

‘안 돼!’

저 빛에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러자 끝을 모르고 떨어지던 몸이 그대로 멈추었다.

“허억… 허억….”

미친 듯이 가슴 아래에서 심장이 뛰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바닥으로 쿵쿵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숨을 가다듬었다. 한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오래전 병원에서 가끔 이런 적이 있었다. 약이 맞지 않았거나, 아니면 병이 악화되었거나. 가끔은 정말로 아무 이유도 없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면 의료진이 달려와 처치를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몇 번씩이나 의식이 끊어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잠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하는 말이 들렸었다.

“한 번 더 이러면 그때는 정말 끝일 것 같은데….”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그 말은 새긴 것처럼 내 귀에 박혔다. 그 후로 나는 조금이나마 하려고 했던 운동조차도 그만두었다. 다시 그렇게 심장이 거칠게 뛰면 나는 죽는다. 그 생각이 언제나 머리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 지금은… 다른 몸이잖아….”

나는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의식 속이니 진짜 몸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벨리나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안심이 되었다.

얼마나 가만히 있었을까. 고개를 한껏 꺾어 위를 바라보자 너무 멀어진 탓에 점처럼 희미해진 빛이 보였다.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떨어진 것처럼 다시 올라가는 것도 조금 전처럼 빠르게 몸이 움직이는 걸까. 아찔했던 낙하감을 생각하며 가슴을 눌렀다. 언제나 내 머릿속에 웅크리고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깨어나 퍼져 나가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면 그 목숨을 이어 갈 수 있어.

오랫동안 함께했던 공포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웅크리고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으면, 이 삶을 계속해서 이어 갈 수 있다.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웅크리려고 할 때 다시 저 멀리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지금 웅크리면 저기에 닿을 수 없겠지.’

주저앉으려던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이나 위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잡고 한 걸음 위로 올라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는 것처럼 내 몸은 허공을 천천히 기어 올라갔다.

그러다 떨어지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다시 공포가 속삭였다. 나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그렇게 약한 몸이 아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 것이라면….

‘병원에서 죽어 가던 때와 뭐가 다르지?’

병원에 있었을 때 나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기적처럼 새로운 몸을 얻어 새로운 기회를 얻었는데.

‘…또 그렇게 살긴 싫어.’

나는 이를 악문 채 다시 손을 뻗었다. 빛은 끔찍하리만큼 먼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식 속이라고 해도 결국 몸은 지치고 말았다. 분명 이 안에서 편하게 움직이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것을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 아득해서 도저히 닿을 것 같지 않았던 빛이 어느새 가까이에 있었다. 땀이 흐르는 이마를 한 손으로 닦아 내며 다시 천천히 위로 올라가자 곧 그 빛이 있는 곳에 닿았다.

“이게… 뭐야…?”

빛에 다가간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솔직히 그냥 반짝이는 것이 전부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빛의 너머에 다른 광경이 보인 것이다. 마치 어두운 벽 한가운데에 작은 TV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밤이 되면 이불 속에서 혼자 조용히 보았던 핸드폰의 영상들이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나는 빛 너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아는 얼굴을 찾아내었다.

“…대신관?”

이제는 세상을 떠난 데일런 대신관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젊고 건강한 모습의 그녀는 얼굴 한가득 웃음을 띠며 말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리 하나를 알려 드리면 열을 깨우치시니. 이러다 곧 성녀님께서 저를 가르쳐 주실 것 같군요.”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뿌듯하다는 듯한 얼굴은 행복이라는 단어 그 자체였다. 좀 더 자세히 바라보자 그 배경도 익숙하다는 것을 알았다. 뒤에 보이는 곳은 분명 성녀의 서재였다.

‘그런데….’

책상이 내가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러다 휙 시선이 바뀐 순간, 구석에 있는 거울이 보였다.

“…이벨리나.”

거울 속에는 큰 의자에 앉은 채 환하게 웃으며 펜을 들고 있는 어린 이벨리나가 비쳤다. 이제 여덟 살쯤 되었을까? 조금은 끝이 곱슬거리는 밝은 금발을 하나로 질끈 묶은 채, 별다른 장식이 없는 흰색의 예복을 입고 있는 이벨리나의 모습은 보고 있는 내가 저절로 미소를 지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깨달았다.

‘이건 이벨리나의 기억이야.’

그것도 지금까지 숨겨 둔 채 그녀가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기억. 홀린 듯 빛 너머의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앉아 있던 이벨리나가 기다렸다는 듯 폴짝 의자에서 뛰어내리더니 문으로 도도도 달려가며 외쳤다.

“카를! 카를 왔어요?”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곧 서재의 문이 열리고 신관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귀 아래까지 오는, 신관치고는 조금 긴 듯한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무척이나 선해 보이는 인상을 가졌다. 그는 안아 달라는 듯 팔을 펴고 콩콩 뛰어오르는 이벨리나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의 몸이 크게 앞뒤로 흔들렸다.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리가….’

왼쪽 다리가 헐렁한 신관복 아래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기이하게 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탓에 멀쩡한 다리와 길이 차이가 많이 나 걸을 때마다 크게 몸이 흔들리는 것이다.

“카를, 저 다 맞았어요!”

이벨리나는 다가온 카를에게 말했다. 그러자 카를은 두 팔을 벌려 이벨리나를 안아 올렸다.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 까르륵 어린 웃음소리가 방을 채웠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분. 누구보다도 뛰어난 영민함을 갖고 계시는 게 당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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