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를 배고 낳는 데는 몇 년이 걸리겠지. 물론 갖는 것부터도 힘들겠지만 그건 그대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그 몇 년이라는 말에 안심했던 것 같다. 일단 임신부터가 극도로 힘들다고 했고 태어나는 데도 몇 년이 걸린다면 적어도 내가 이 신전 안에 있는 동안에는 들킬 일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 탑의 종소리가 들렸다. 시각을 안내하는 종소리가 아닌, 마지막 대신관 후보가 대신전 안으로 들어온 것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도착했네.”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 후보는 카를 신관뿐이었다. 아마도 그를 데리러 갔던 라트반과 함께 도착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아…!”
갑자기 발밑이 훅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내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흣… 으읏….”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아찔한 느낌이 정수리를 타고 내려왔다.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내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교성이 손바닥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이 들렸다. 그러는 사이 아랫배가 꽉 조여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열기가 감도는 것도.
“왜… 갑자기….”
머릿속이 열기로 들뜨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입을 틀어막은 채, 아래에서부터 퍼지는 욕망을 필사적으로 누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점차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오늘이야.’
오늘 밤, 아슬란이 온다. 아직 밤까지는 시간이 남았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가 오면 분명….’
지난번 아슬란과의 일이 생각났다. 그는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내 옷을 벗기고 그의 것을 밀어 넣었다. 짐승의 교미와 다를 것 없는 격렬한 정사가 몰아쳤었다. 일주일 만에 돌아오는 그는 분명 저번과 같은 일을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다리 사이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있었다. 들뜬 몸이 아슬란과의 정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치심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어서 빨리 아슬란이 오기를, 그래서 저번과 같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라트반입니다.”
급하게 달려온 듯, 조금은 숨이 찬 듯한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의 목소리에 나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짓이겼다.
‘왜… 왜 라트반이?’
카를 신관의 일행이 조금 전 대신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과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무래도 그 혼자서 서둘러 이곳으로 온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다시 라트반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녀님?”
대답이 없자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더 커진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라면 곧 라트반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올 거라는 사실에 힘겹게 대답했다.
“무… 무슨 일인가요?”
그러자 잠시 침묵이 흐르고 라트반의 대답이 들려왔다.
“카를 신관님을 모셔 왔습니다. 들어가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안 돼요!”
들어온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안 된다. 지금 라트반이 들어왔다가는 분명….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다시 아랫배가 꾹 조여들었다.
“흐아… 읏….”
턱이 덜덜 떨리면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걸까.
“성녀님?”
당황하는 듯한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목소리에 내 몸에 퍼졌던 열기는 이제는 타오르는 불길이 된 것 같았다. 옷자락이 스치는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내려앉는 먼지 한 톨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몸이 예민해졌다. 점점 내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내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내 스스로 몸을 비틀고 있었다. 내 몸은 라트반을 원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들어오라 말하고 싶었다. 녹아내리는 것 같은 머릿속에서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어서 저 남자를 안으로 들이라고. 그리고 마음껏 안으라고. 그래야지 이 고통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라트반… 경?”
들어오라 말하지 않았는데도, 모습을 드러낸 그의 모습에 입 안이 바싹 말라 왔다. 힘겹게 더듬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라트반이 빠르게 다가와 나를 부축하려 했다.
“오지 말아요!”
그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왔을 때 급히 손을 내저으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훅 그의 체향이 느껴졌다. 그의 집 침대에서 맡았던 연한 비누의 냄새와 그의 향기가 섞여 있는 시원한 향. 하지만 지금은 그 향에 옅은 땀 냄새와 함께 말의 냄새, 바람의 냄새도 섞여 있었다.
고개를 들자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단정하며 흐트러짐 하나 없던 머리카락은 바람이 헤집은 흔적이 그대로였다. 예복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주름이 남은 예복이 눈에 들어왔다.
어지러운 정신으로도 그가 말을 타고 급하게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내 상태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괜찮… 습니다. 그보다 이만 물러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가 달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나의 말을 끊었다.
“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다음에….”
“아니요, 지금 대답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라트반이 한 걸음 나에게 다가왔다. 더욱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에 놀라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등에 차가운 유리창이 닿았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 당황하는 나에게 다시 라트반이 성큼 걸어왔다.
‘너무… 가까워….’
도대체 무엇을 물어보려 하길래 이렇게 막무가내로 다가오는 것일까 싶었는데, 어느새 그의 얼굴이 내 앞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우면 그가 무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라트반은 물러나기는커녕 그의 허리를 숙여 얼굴을 더욱 가까이 대었다. 어두워지는 서재 안에서 그와 나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황태자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
질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확신을 담은 말투였다. 내가 레온과 함께 돌아다닌 것을 그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마치 그 모든 것을 보았으니, 거짓말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물었다.
그의 질문에 나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도록 가라앉은 검은 그의 눈동자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왜 그자가… 당신의 이름을… 그렇게….”
라트반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떨리고 있는 그의 숨결에는 진득한 분노가 묻어나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긴 속눈썹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어깨도, 건장한 몸도. 전부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라트반을 만지고 끌어안으면 나를 괴롭게 하는 이 열기가 가라앉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라트반이 나에게 무엇을 물었는지도 생각하지 못한 채 손을 뻗었다. 다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
그의 숨결이 내 입술에 닿았다. 놀라는 그의 표정이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즐겼다. 그의 몸처럼, 입술도 단단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라트반의 것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으응….”
나는 투정을 부리듯이 굳게 닫힌 입술 위를 조르듯 문질렀다. 이제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라트반이 필요해.’
그가 있어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와 몸을 섞어야 했다. 그래야지 내 안에 들끓고 있는 불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사이에도 몸은 점점 더 괴로워졌다. 라트반의 몸이 닿은 곳에 기분 좋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땀에 젖어 있는 짧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끝에서 까끌거렸다.
나는 그의 체취를 느끼며 더욱 몸을 붙였다. 얇은 예복 너머로 그의 단단한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 손이 그의 가슴 위를 더듬었다. 그런 내 행동에 산처럼 서 있을 것 같은 라트반의 몸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물러서던 라트반의 다리가 소파의 끝에 닿았다.
“……!”
동시에 그와 내 몸이 소파 위로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지면서도 라트반의 팔이 나를 붙잡았다. 덕분에 나는 옆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얼굴을 들자 나를 보고 있는 라트반과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의 어지러움이 사라진 후 내가 라트반의 몸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다시 점점 흐릿해지는 정신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해야겠다는 생각뿐. 나는 넓은 그의 가슴을 더듬어 올라간 다음 다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 가슴이 그의 예복 위에서 부드럽게 뭉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읏….”
라트반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음으로 그가 보인 반응에 나는 더욱더 그에게 매달렸다. 여전히 그를 끌어안은 채, 필사적으로 내 몸을 그의 몸에 붙였다. 더 그의 반응을 끌어내고 싶었다. 눌린 내 가슴이 부드럽게 그의 가슴 위를 문질렀다.
가슴의 끝이 옷 너머에 느껴지는 라트반의 체온에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예민해진 끝이 다시 그의 가슴 위를 쓸었다.
“……!”
그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라트반의 얼굴에 소리 없는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이 모든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을 보다 아래를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맞추어 만들어진 것처럼 그와 나의 몸이 조금의 틈도 없이 달라붙어 있건만 나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다.
‘벗고 싶어.’
그와 나 사이에 있는 옷들이 거추장스러웠다. 이런 것 없이 단단한 그의 몸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몸을 상상한 순간 다시 다리 사이로 주르륵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로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그의 목을 감았던 손은 이제 그의 허리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단단하고 잘 잡힌 근육이 잔뜩 긴장한 채 딱딱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내려간 손이 차가운 그의 바지 버클에 닿은 순간,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를 밀어내려 하는 것일까. 라트반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제발…!”
그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상황이 그에게 얼마나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울까. 보고를 위해 들어왔던 성녀의 서재에서 갑자기 입맞춤을 당하고 이제는 몸을 희롱당하고 있다.
다른 남자라면 이 상황을 즐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트반에게는 달갑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필요한걸.’
어떻게 해야 라트반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가 나를 받아 줄까. 어떻게 해야 이 신실한 기사를 유혹할 수 있을까. 내 머릿속은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다.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 같은 것이라도 미리 봐 두면 좋았을까. 원하는 남자를 손에 넣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그래서 그저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어깨를 잡은 라트반의 팔을 끌어안았다.
“라트반.”
“…….”
“내가… 싫은가요?”
“…….”
라트반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나는 시선을 옮겼다. 방 한구석에 있던 거울에 라트반의 위에 올라탄 채, 옷을 끌어 내리고 있는 내가 보였다. 거울 속의 나는 웃고 있었다. 아니, 이벨리나가 웃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
그 순간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내가….”
나는 떨리는 눈으로 라트반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황망한 얼굴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난….”
그런 라트반의 표정에 나는 더듬거리며 변명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성녀님!”
뒤에서 라트반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버틸 수 없는 수치심과 혐오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렇게 라트반을 뒤로 한 채, 나는 서재를 뛰쳐나와 달렸다.
***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키는 신관들이 뭐라 소리치는 것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들의 외침을 무시한 채 모든 문을 걸어 잠갔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그리고 내가 나갈 수 없도록.
미친 듯이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나자 겨우 눌러 놓았던 열기가 다시 나를 휘감았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온몸이 떨렸다. 그때 바람이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힘겹게 침대 위에서 고개를 돌리자 창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어두운 하늘을 등지고 서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 굳게 닫힌 문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오는 사람.
“…아슬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힘겹게 손을 뻗었다. 이제 정말로 몸이 한계에 달했다. 달뜬 숨이 터져 나오는 것에 아슬란이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곧바로 나에게 다가와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나를 안아 올렸다.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즐거워 보이는 표정의 그가 품속의 나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핥아 올리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곧 조금 전과 다른 온기를 지닌 혀가 내 입 안을 휘저었다. 나는 그런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음란한 소리와 함께 젖은 살덩이들이 얽혔다.
드디어 누군가를 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미친 듯이 내 안으로 들어온 아슬란의 것을 물고 핥았다. 내 손은 더욱 힘을 주어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제, 그가 나를 탐할 것이다. 저번처럼, 아니 더욱 격렬하게.
달아오른 몸을 쓰다듬고 끌어안으며 끝없는 열락의 밤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그에게 매달린 순간이었다.
“읏!”
갑자기 아랫입술에 물어뜯기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놀라 몸을 떼고 아슬란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왜 그대에게 다른 수컷의 냄새가 나는 거지?”
아슬란의 붉은 눈동자에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찢어 죽일 듯한 분노가 번뜩이고 있었다.
비릿한 피의 맛이 입 안에 퍼지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뒤집혔다. 등 뒤에 출렁이는 침대의 매트리스가 느껴지기도 전에 나는 다시 붉은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핏빛의 눈이 이글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촤악!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가슴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나는 드러난 가슴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의 거친 움직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크고 두꺼운 손이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슬란은 그의 긴 손가락 사이로 솟아오른 유두를 끼운 채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아….”
조금 전과 다른 감각에 턱이 덜덜 부딪혀 오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느릿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떨고 있어야 했다. 애무에 가까운 행동이건만 극도의 공포가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극한의 분노가 터지기 직전의 고요함.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가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럽고 말캉한 살이 그의 손안에서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아, 아파…!”
잡아 뜯기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악력에 놀라 몸을 비틀었지만 그럴수록 가슴을 잡아 주무르는 손의 힘은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아, 흣!”
분명히 고통이라 생각했는데 내 입에서는 열기를 담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아슬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이 내 가슴 위로 내려앉았다. 젖은 혀가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날카로운 이가 한껏 흥분해 솟아오른 가슴의 끝을 물었다.
“아악!”
따끔한 통증에 도리질을 치며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지만 아슬란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밀어내려 하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 나쁘다는 듯 더욱 이를 세웠다. 예민한 살점이 그의 잇새에 짓이겨지는 감각에 분명 더욱 고통스러워야 했는데.
“흐, 흐읏!”
가슴 끝에서 시작된 통증은 쾌락이 되어 몸을 불태웠다. 그가 자비 없이 내 몸을 괴롭힐수록 점점 더 커다랗고 뜨거운 쾌락이 머리를 잠식했다. 그는 공평하게 굴어 주겠다는 듯이 곧, 다른 한쪽의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입에 물려 있던 가슴을 바라보자 흰 피부 위에 붉은 잇자국과 함께 한껏 괴롭힘을 당한 유두가 잔뜩 부어오른 것이 보였다.
반대쪽 가슴을 그가 다시 크게 무는 것이 느껴졌다. 같은 고통이 닥쳐올 것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찾아온 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아… 아읏….”
조금 전까지의 난폭함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혀의 놀림이 가슴 위를 더듬었다. 동시에 그의 손이 붉게 부풀어 오른 다른 가슴의 끝을 쥐었다. 그리고 한껏 예민해진 부분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서는 아이를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가 물었던 부분에 옅은 통증이 피어올랐다. 아픈 것인지 간지러운 것인지 모를 감각에 혼자 숨을 헐떡이자 츱,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강하게 가슴을 빨아올렸다.
“아…!”
마치 내 가슴에서 무엇이라도 나오는 듯이 그는 굶주리다가 젖을 찾은 아이처럼 계속해서 얼굴을 묻은 채, 핥고 빨아올리기를 반복했다. 곧, 그의 입 안에서 다시 솟아오른 살점이 느껴지자 이제 그는 입술로 그것을 물어 조였다.
“으응… 그, 그만….”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입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번들거리는 타액으로 그의 입술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 입술이 잔인함을 담은 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 새끼가 여기는 핥지 않았군.”
그는 잘했다는 듯이 손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그의 동작에 갑자기 수치심이 밀려와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미처 다 가리기도 전에 아슬란이 내 손목을 붙잡아 침대 위로 눌렀다.
“하지만 다른 곳도 확실히 확인을 해 보는 게 좋겠지.”
얼굴에 닿는 그의 숨결에 솜털 하나까지 바짝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분노를 삼키고 있는 짐승의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눈에서 입술을 지나 목, 가슴으로 내려가던 그의 시선이 배를 지나 다리 사이에 멈췄다. 내 시선도 그의 시선을 따라 내려갔다. 내 위에 올라탄 그의 아래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꿀꺽.
당장이라도 천을 찢고 나올 것 같은 그의 것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흉흉한 그의 기세에 잠시 눌려 있던 내 욕구가 다시 나를 지배했다.
‘그가 필요해.’
그가 오기 전까지는 라트반을 향했던 욕망이 이제 아슬란을 향했다. 머릿속은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을 그려 냈다. 잠시 후면 잔뜩 흥분한 그의 것이 거칠게 아래를 파고들어 올 것이다.
그리고 예전처럼 그만하라며 아무리 울고 매달려 빌어도 조금도 물러나는 것 없이 그가 만족할 때까지 끊임없이 박아 대겠지. 그리고 그의 아래에서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더욱 해 달라는 듯 엉덩이를 들고 흔들어 댈 것이다.
음란하고 저속한 상상이 머릿속을 채웠다. 동시에 다시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액체가 느껴졌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어서 빨리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나는 지금, 남자. 아니 그가 말한 대로 나를 끊임없이 범해 줄 수컷이 필요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잡았다. 딱딱하고 매끈한 근육이 내 손가락이 닿는 순간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
나른한 한숨을 쉬며 나는 그의 허리를 매만졌다. 그의 몸이 돌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내 손길 아래에 딱딱해졌다. 나는 더욱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은 다음. 그의 몸을 내 품으로 끌어안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내 몸을 덮었다. 그리고 내 아랫배에 뜨겁고 두툼한 그의 성기가 닿았다. 아직 다 벗지 않은 그의 옷이 나와 그 사이에서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워 몸을 슬쩍 움직이며 내 배로 그의 것을 문질렀다. 천 너머가 아닌, 온전한 그의 것을 느끼고 싶었다.
“큭…!”
내가 몸을 움직이자 그의 입 사이로 거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반응에 나는 더욱 과감하게 그에게 닿았다. 연신 그의 허리를 쓸어내리며 어서 빨리 그가 들어올 수 있게 다리를 벌렸다.
“아슬란… 빨리… 어서, 어서 해 줘요….”
몸 안의 열기가 이제는 뇌를 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바싹 마른입 사이로 흘러나오는 들뜬 숨에 내 스스로가 타 버릴 것 같았다. 아슬란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가 내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슬란…?”
하지만 그가 손목을 놓더니 몸을 일으켜 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내 양 발목을 붙잡았다.
“뭐, 뭘….”
“벌려.”
탁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자 하나하나를 짓이기고 씹은 듯한 목소리였다.
“네?”
“다리, 벌리라고.”
그렇게 말한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내 발목을 잡은 팔을 벌렸다. 힘없는 인형처럼 내 다리가 활짝 벌려졌다. 동시에 젖어 있는 아래가 쩌억, 하며 벌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서늘한 공기가 잔뜩 젖어 있는 밀부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감각에 나는 그에게 다리를 잡힌 상태에서 바르르 몸을 떨어야 했다. 다시 깊은 곳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슬란은 그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는 짐승의 눈에 나는 몸을 떨었다. 들어올 때부터 느꼈던 그의 분노가 더욱 거세지는 것을 알았다.
“그 새끼인가?”
“네…?”
“내가 오기 전에 네 입술을 맛본 그 새끼가 그대를 이렇게 젖게 만들어 놓은 거냐고.”
그의 말에 내 아래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라트반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아슬란이 무엇에 분노하는지도 알았다.
“아, 아니… 난… 아슬란!”
아슬란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내 두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올렸다. 그 탓에 허리가 한껏 올려진 채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뭘 하려는 거지?’
도대체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몸을 내리려고 한 순간이었다. 그는 내 허벅지 안쪽을 붙잡더니 더욱 있는 힘껏 벌린 다음 제 얼굴을 묻었다.
“아슬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음부에 닿은 그의 혀는 망설임 없이 달라진 살 틈을 파고들었다.
“아읏! 읏!”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내려쳤다.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경련하듯 몸이 떨렸다.
“아, 아아…!”
다물어지지 못하는 입 사이로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강렬한 감각에 나는 있는 힘껏 몸을 비틀어 빠져나오려 했지만 내 다리를 붙잡은 그의 손은 더욱 강하게 나를 붙잡았다.
혀가 잔뜩 벌어진 음부를 거침없이 탐했다. 츱, 하며 빨아 대던 그의 혀가 깊숙한 곳을 누르는 순간 눈앞에서 불꽃이 터졌다.
“하앙…!”
쉴 새 없이 교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그는 더욱 깊게 얼굴을 묻었다. 살 틈 사이로 그는 더욱더 파고들었다. 침입자를 맞이한 내 아래가 그 격렬함에 놀라 오므라들었다. 짧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그가 물러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 새끼가 그대의 입만 탐했나 보군. 아래는 당신 냄새만 가득하거든.”
그렇게 말한 아슬란은 나의 것으로 젖어 있는 입술을 핥으며 그의 옷을 잡아 뜯었다.
촤악,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걸쳐 있던 내 다리가 침대 위에 올려졌다. 겨우 한숨 돌렸다고 생각한 순간, 여전히 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그가 다시 내 다리를 잡아 들더니 그의 허리에 감았다.
“아….”
젖어 있는 틈 사이를 밀고 들어오는 뭉툭한 끝이 느껴졌다. 아슬란이 허리를 숙이자 길고 굵은 그의 것이 거침없이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아아….”
크다. 분명히 지난번보다 훨씬 더.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욱 큰 그의 남성이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 온 순간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파….”
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투둑, 하며 뭔가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도. 불에 달구어진 기둥이 아래로 들어오는 듯한 기분에 숨이 막혔다. 그런 나의 귓가에 아슬란이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암컷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알게 해 주지.”
동시에 그의 허리가 움직였다.
“으응! 읏!”
흰 등허리에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밝은 금발이 그 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슬란은 그 금빛 머리채를 한 손으로 쓸어 모았다. 그러자 그 아래에서 헐떡이고 있는 흰 목덜미가 보였다. 아니, 하얗던 목덜미라고 해야 할까. 조금 전만 하더라도 잡티 하나 없이 설원처럼 깨끗했던 성녀의 피부는 이제 얼룩덜룩한 자국들로 가득했다.
당연히 모두 그가 남긴 것이었다.
아슬란은 손안에 가득 잡히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며 다시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성기가 성녀의 가장 깊숙한 곳을 눌렀다.
“아흑…!”
쾌락의 절정에 닿은 몸이 바르르 떨며 그의 것을 조였다. 그 느낌에 아슬란은 있는 힘껏 제 몸을 그녀에게 붙였다. 희고 살집 있는 둥근 엉덩이에 짙은 피부색을 가진 단단한 그의 복근이 빈틈없이 닿았다. 땀에 젖은 살이 들러붙었다. 그것도 모자란다는 듯 아슬란은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하아….”
이윽고 맞닿은 아래를 더욱 꾹 눌러 붙이는 그의 행동에 성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신음을 내었다. 아슬란은 그 소리에 침대 위에 쓰러진 그녀의 몸을 안아 일으켜 자신을 마주 보도록 했다. 순식간에 그의 몸 위에 앉은 자세가 된 성녀의 눈이 커졌다. 제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슬란… 제발….”
아슬란은 애원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하며 성녀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긴 시간 동안 시달려 잔뜩 예민해진 끝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부드럽게 문지르자 곧 그녀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까지 겪었던 쾌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두렵다는 듯이.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끝을 잡아 비틀었다.
“아악!”
아래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몸에 다시 큰 자극이 오자 성녀는 도리질을 치며 몸을 비틀었다. 그 탓에 성녀의 턱 끝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거센 움직임과 함께 시트 위로 떨어져 자국을 내었다.
“아, 제발. 아, 아슬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절정을 맞이한 눈의 초점이 흐려지며 성녀의 몸이 천천히 그의 가슴팍으로 쓰러졌다.
“좀 더….”
그렇게 중얼거리던 성녀의 눈이 감겼다.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대로 기절하고 만 것이다. 아슬란은 힘없이 쓰러지려는 몸을 꼭 끌어안았다. 기절을 했음에도 그녀의 몸은 그의 아래를 꽉 조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몸을 묻고 있던 그가 품에 안았던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 위로 눕혔다. 아슬란은 단단하게 맞물려 있는 아래를 보았다. 짧게 혀를 찬 다음 그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리자 좁은 살 틈 안에 박혀 있던 그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씨물을 토해 냈음에도 그의 것은 조금도 수그러든 기색이 없었다. 제 몸을 빼낸 아슬란은 쓰러진 성녀의 다리를 벌렸다. 오랜 시간 그의 것을 물고 있었던 구멍이 채 다물리지 못한 채, 안에 가득히 품고 있었던 백탁액을 흘리고 있었다.
앞선 정사의 흔적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에는 그의 정액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아슬란은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굳은 얼굴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다음 침대 위에 누웠다. 다시 품을 채우는 따뜻함이 기분 좋았다. 그의 가슴 위에 올려진 그녀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힘들었겠지.’
그럴 것이다. 단 한 순간도 봐주지 않고 제 욕망을 마음껏 토해 냈으니까. 그녀의 울음소리와 신음 소리는 아슬란을 멈추게 하기는커녕 더욱 거칠게 만들 뿐이었다.
‘하지만….’
아슬란은 성녀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잡아 넘기자 눈물에 젖어 있는 눈가가 보였다. 손끝으로 닦아 내자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 모습에 그는 한숨을 쉬며 성녀를 끌어안았다. 제 위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던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체온에 잠시 몸을 떨더니 곧 떨어지지 말라는 듯 그를 끌어안았다. 이것이 문제였다.
‘이상해.’
분명 저번에는 몇 번이고 그만해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오늘 성녀는 그가 허리를 깊게 묻을 때마다 쾌감에 가득 찬 교성을 내뱉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게다가 더욱 해 달라는 듯 먼저 제 몸을 붙여 왔다. 저번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가 몸을 물리려는 순간 성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내가… 싫어요?”
그다음부터는 그도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그 어떤 자제도 없이 제 흉포한 마수로서의 본성과 후계자를 위한 본능을 마음껏 토해 내었다.
제 품 안에서 숨을 쉬는 작은 몸을 보던 그는 성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무어라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기분 좋은 향기가 그의 가슴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제 자국을 남긴 다음 오늘이 오기까지의 일주일은 셀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그에게 유독 긴 시간이었다.
공간을 넘어 바다의 끝에 있는 마법사들의 섬으로 돌아간 후, 얼마나 지루한 시간을 보냈던가. 겨우 얻은 제 암컷을 생각할 때면 당장이라도 다시 대신전으로 가 이 부드러운 몸을 마음껏 취하고 싶었다. 매 순간 생각나는 몸에 흥분하는 자신을 억누르며 아슬란은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었다.
아슬란은 몸을 일으켜 제 위에 있던 성녀를 침대 위로 내려놓은 다음 그녀의 몸을 살폈다. 정확히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동그란 세 개의 자국을 눌렀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변했군.”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손끝에 느껴지는 기운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자국을 누르자 성녀가 신음 소리와 함께 제 다리를 벌렸다. 어서 빨리 들어오라는 듯한 그녀의 몸짓에 아슬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역시나 그저 힘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었어.”
단지 성력이 연결되는 길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성녀의 몸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다리를 벌린 채, 늘어져 있는 성녀의 모습에 아슬란은 불쾌해졌다. 그녀가 제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비벼 올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난 일주일간 ‘내 수컷’이라는 그녀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렇기에 그녀 스스로가 저를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반응이었다니.
그는 자국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오랜 시간을 이 땅에서 살아오고 있는 그에게도 이것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수도 성력도 없던 고대에 이 땅에 있었던 힘을 이용한 사술임이 분명했다.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는데….’
아슬란은 대신전의 도서관과 성녀의 서재를 떠올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의 기록들은 아마도 이곳에 가장 많이 있으리라.
‘잠시 머물러야 하나.’
대신전에 그가 머문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일단 마법사들의 섬이 난리가 날 것이다. 그곳은 사람들의 말처럼 평화롭고 안락한 마법사들의 낙원이 아니다. 애초에 마수의 힘을 탐한 인간들이 정상일 리가 있나. 그곳은 힘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땅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는 것이 당연한 세계. 그는 그곳에서 수백 년을 왕으로 살아왔다. 그런 그가 섬을 길게 비운다면?
‘볼만하겠군.’
그가 잠시 비운 자리를 놔두고 전쟁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관심도 없는 것들끼리 싸우다 죽건 말건 그에게는 조금도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어디에 있나 추적하는 놈들이 나올 텐데.’
아무리 그가 원래 세계의 힘을 되찾지 못한 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수라고 해도 그의 힘은 숨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은 곧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쫓아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그놈들 중 하나는 그가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와 있는지를 눈치챌 것이고.
그는 제 옆에 누워 조용히 숨을 내쉬는 성녀를 바라보다 팔을 뻗었다. 그가 손을 가볍게 움직이자 허공에 붉은 마력이 잠시 빛나더니, 곧 그가 찢어 던졌던 옷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아슬란은 제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그것은 영롱한 빛을 자랑하는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오래전 그가 이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왕국을 쓸어 버렸을 때 유독 크고 빛나는 것이 눈길을 끌어 가져왔던 것이다.
‘보석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난 일주일 동안 그는 인간들 사이에서 도는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녀가 보석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1년에 한 번 있는 큰 행사를 열기에 앞서 각 나라에 빛나는 것들을 바치라 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것도 좋아하리라. 기뻐하는 성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져온 것이었다. 아슬란은 성녀의 손을 잡았다. 희고 가는 손가락에 제가 가져온 것을 끼우자 반지는 제 주인을 찾았다는 듯이 꼭 들어맞았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성녀의 모습에 아슬란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웃는 걸 못 봤는데.’
아직 아슬란은 성녀가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자신을 보는 그녀는 언제나 당황하거나 놀란 얼굴이었고 그 외에는 붉게 젖은 눈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리는 색스러운 표정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아슬란은 한 번쯤은 성녀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녀가 깨어 있을 때 이것을 주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다시 달콤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그를 끌어안고 제 수컷이라 불러 준 다음 웃어 주지 않았을까.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입을 탐했을 때 느껴졌던 다른 수컷의 흔적.
그는 몸을 일으켜 성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쉴 새 없이 물고 빨아 대었던 작은 입술은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보란 듯이 일부러 더욱 이를 세워 물어 댄 결과였다. 그녀의 입 안에서 느껴졌던 다른 맛을 떠올리니 이가 갈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아슬란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거지?’
이래서야 마치 인간 같지 않은가.
애초에 그가 성녀에게 바랐던 것은 제 새끼를 배는 일이었다.
성녀가 수많은 남자를 끌어들이며 밤을 보낸다는 것은 아슬란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마수의 정액을 받아들인 태에는 인간 수컷의 것이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성녀가 다른 인간 수컷의 것을 먼저 품었다 하더라도 마수의 것이 그것을 잡아먹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슬란은 처음 계약을 할 때도 성녀가 다른 인간을 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에 아무런 제약도 걸지 않았던 자신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인간의 수컷들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이 싫었다. 온전히 그 혼자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오직 그녀가 그만 품게 하도록.
“……!”
그때, 성녀를 바라보고 있던 아슬란은 성력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리고 빠르게 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인간들이 많은 길이 아닌, 건물의 벽을 넘어오는 기운을 보니 분명 이 건물에 있는 은밀한 통로를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이 대신전 안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저절로 긴장을 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 아슬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라트반이라고 했던가….”
마수를 혼자서 죽일 수 있는 인간. 신전 기사단의 단장. 성녀를 수호하는 자.
지금 이 방으로 다가오고 있는 기운은 그자가 분명했다. 그리고 아슬란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성녀의 입에 남아 있던 불쾌한 수컷의 맛은 분명 그놈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단장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라트반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바로 앞에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가 있었다. 멈추지 않았으면 그대로 부딪혀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던 기사가 다가오자 라트반은 괜찮다는 듯 가볍게 손을 들었다. 라트반은 손으로 나뭇가지를 쳐 낸 다음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자신을 향한 걱정 어린 시선을 느끼며 그는 이를 물었다.
대신전을 나온 후로 계속해서 이런 상태이다. 타고 있는 말도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연신 머리를 푸르륵 흔들어 대며 저를 보라는 듯이 머리를 들었다. 라트반은 그런 말의 목을 툭툭 가볍게 치며 쓸어 만졌다. 그제야 말은 다시 다른 기사들이 탄 말의 보폭에 맞추어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잠시 발걸음을 늦추었던 사이 함께 출발했던 상급 신관들의 말은 벌써 저 멀리 앞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신관들의 뒷모습을 보던 라트반의 목이 살짝 붉어졌다. 기사단장이 되어서 신관들의 뒤를 쫓아 달려가고 있다니.
부끄러운 마음에 라트반은 말을 재촉했다.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말이 속력을 내었다. 다른 기사들과 거리가 조금 벌어지자 그는 고삐를 쥐었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신 차려.’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쳤다. 하지만 곧바로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광경이 있었다.
황태자가 웃으며 성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가 그 부름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 장면이 마치 돌에 새긴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선명해졌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렇게 자신을 흔들어 놓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 순간부터 레온 황태자가 그의 마음속에서 적으로 구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녀를 보며 웃고 있던 얼굴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황태자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를 향해 이만큼의 적의를 품어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황태자를 향한 적의가 거세게 들끓었다.
성녀가 황태자를 다시 부를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불쾌하고 거슬린단 말인가.
“리나라고….”
머리보다 먼저 몸이 그 답을 내뱉었다.
황태자의 입에서 나왔던 그 말은 보이지 않는 발톱이 되어 그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 파냈다. 도대체 황태자는 언제부터 성녀를 그렇게 불렀을까. 성녀가 놀라는 기색이 없었던 것을 보면 분명 그 전에 이미 익숙해질 정도로 그렇게 불렀다는 말이다.
‘분명 황태자는 자리를 비웠었는데….’
신관이 들고 가던 세탁물이 생각났다. 역시 그날, 마음에 걸렸던 자가 성녀임이 틀림없었다. 그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황태자는 대신전 안의 그의 처소로 돌아왔었고.
‘그동안 성녀님과 함께 있었다는 건가?’
으스러지게 쥔 손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만난 거지? 처음부터 만날 것을 약속했었던 것일까?
한참 후,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움켜쥔 제 손을 라트반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
짧은 한숨과 함께 주먹을 푼 라트반은 고삐를 잡은 후 속력을 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의 끝에 큰 건물이 보였다. 언제인가 이 길을 지날 때 본 기억이 있는 여관이었다.
“저곳에 카를 신관님이 계신다고 합니다.”
앞서 달리던 기사가 소리쳤다. 라트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몰았다. 곧, 말에서 내리는 신관들과 함께 그도 말에서 내렸다. 건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몰려온 대신전의 신관과 기사들을 보고는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동경 어린 시선을 받고 있을 때, 건물 안에서 카를 신관을 데려오라 보냈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라트반을 보자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한 다음 반가움을 드러냈다.
“오셨군요, 라트반 님.”
기사의 입에서 라트반의 이름이 나오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라트반 님?”
“신전 기사단의 단장님? 정말로 그분이야?”
“맞아! 저번에 대신전에서 보았어! 라트반 님이 맞아!”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라트반을 향했다. 끝없는 경배와 신뢰가 가득한 시선이 거침없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중에 몇몇은 라트반을 보고 성호를 그으며 두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리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여관 앞에 있던 기사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떠올랐다.
성녀가 지난 몇 년에 걸쳐 대신전의 명예를 끝없이 실추시켰음에도 대륙 사람들이 여전히 대신전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라트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의 대리인인 성녀가 나타나고 나서도 오랜 시간 동안 대륙 곳곳에서는 아직도 마수들이 출몰하고 있다. 각 나라의 수도나 큰 도시라면 기사단이 출동해 마수를 상대하겠지만 변방의 작은 촌락은 마수가 나타나면 도망치는 것 말고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도와주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야 제국의 기사단이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 기사단이 큰 피해를 입지 않는 정도에서였다.
그런 그들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칠 각오로 도와주는 이들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라트반이 이끄는 신전 기사단. 그들은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마수들을 상대하며 힘없는 자들을 도왔다.
“그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마수를 상대하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그를 보내 준 신을 경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라트반은 덤덤히 그 시선들을 받아 내며 안에서 나온 기사들에게 물었다.
“일이 어떻게 된 건가.”
짧은 질문이었지만 많은 것이 담긴 질문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늦었는지, 그리고 카를 신관이 위중한 상태라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라는 말이었으니까. 라트반의 뜻을 알아차린 기사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우선 카를 신관님께서 머물고 계셨던 신전으로 접근하는 것부터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사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그런 곳에 신전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척박하고 험한 곳이었다. 땅도 땅이었지만 더 끔찍한 것은 그 주변에 나타나는 마수들이었다. 기사단 전체가 상대해야 할 강한 마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마수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늑대 무리처럼 들판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땅이라니. 그런 곳 가운데에 있는 신전이란 아무리 마수를 막아 낼 벽이 있다 하더라도 죽으라고 버려 둔 무덤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성녀님은 어떻게 그런 곳에 카를 신관님을 보내실 수 있는지….”
“개인적인 감상은 나중에 듣겠다. 보고를 우선으로 하도록.”
성녀를 원망하는 기사의 목소리에 라트반은 왜인지 모를 불쾌감을 느끼며 기사의 말을 잘랐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마수들을 처리하고 신전에 도착했을 때, 카를 신관님과 몇 되지 않는 병자들만이 신전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들어 보니 최근 마수들의 수가 늘어 근처에서 식량을 지원받지 못한 채 신전 안에 고립된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카를 신관님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몫을 병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조금만 더 버티라 격려하셨다고 합니다.”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인 기사는 빠르게 그가 도착했을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다음 카를 신관님께 저희들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설명 드리고 신관님과 함께 남아 있던 병자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안전한 마을에 병자들을 부탁한 다음 대신전을 향해 출발했지만 쇠약해진 카를 신관님의 몸 때문에 빠르게 속력을 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보고서에 적었던 대로….”
“…카를 신관님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었다고.”
“그렇습니다.”
라트반은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보았다. 먼저 들어간 상급 신관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들이 벌써 미친 듯이 성력을 사용해 치료를 시작한 것도.
마저 몇 개의 소소한 보고를 더 들은 그는 곧바로 카를 신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곧 신관들이 부산스레 드나들고 있는 방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의 끝에 앉아 있는 파리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보였다.
입고 있는 것은 낡고 해진 신관복이었다. 제대로 자르지 못해 길이가 제멋대로인 갈색의 머리카락. 가늘고 부드럽게 휜 눈꼬리에 웃고 있는 것 같은 인상. 그리고 누가 보아도 오른쪽의 다리와 확연히 차이가 드러날 정도로 휘어진 왼쪽 다리.
그사이 수척하고 말랐지만 그는 분명히 라트반이 기억하고 있는 카를 신관이었다.
“이런, 라트반 님.”
카를 신관은 안으로 들어온 라트반을 본 순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라트반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러지 말라는 듯 조심스레 팔을 잡았다. 그런 라트반의 뜻을 알겠다는 듯 카를 신관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라트반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앉아서 맞이하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카를이 말했다.
“무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는 길이 무척이나 험했을텐데 몸은 좀 어떻습니까?”
라트반은 그렇게 물으며 카를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먼 곳의 신전에서 보냈던 시간이 힘들었다는 것을 알려 주듯이 머리카락은 윤기 하나 없이 버석했고 몸 역시 고행을 하는 수도사들처럼 말라 있었다. 게다가 일어섰을 때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태어날 때부터 기형이었다던 그의 다리는 더욱 상태가 악화된 것 같았다.
라트반의 눈이 좀 더 자세히 그를 훑었다.
‘마수의 마력을 뒤집어쓴 것 같은 증상을 보였다고 했지.’
마수를 상대하다 보면 종종 마수의 피를 뒤집어쓸 때가 있다. 그나마 성력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신전 기사단은 그 영향을 덜 받지만 일반인들은 그대로 기절해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깨어난 후에도 고열에 시달리며 몸이 쇠약해지기에 사람들은 마수를 상대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상급 신관들의 푸른 성력이 계속해서 카를의 몸을 덮었다. 그러자 파리했던 카를의 얼굴에 점차 혈색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곧 한눈에 보기에도 그가 기력을 되찾은 것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라트반은 지친 상급 신관들을 정중히 밖으로 안내했다.
이제 방 안에는 라트반과 카를만이 남았다. 라트반이 문을 닫고 다시 카를에게로 다가가자 그는 더 밝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라트반, 나의 친구.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조금 전보다 더 허물없는 카를의 태도를 보며 라트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름 없는 기사였던 시절부터 늘 그에게 다정하고 친절했던 카를이었다. 그는 라트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친절했다. 그렇기에 대신전의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라트반이 과거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카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급 신관님들이 이렇게 많이 와서 지칠 때까지 성력을 써 주실 줄이야….”
미안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라트반이 부담 가지지 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성녀님을 바로 만났더라면 많은 분들이 이리 고생하실 일도 없었겠지요.”
그 말에 라트반은 입 밖으로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예전이라면 별생각 없이 넘어갈 말이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카를의 말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말은 그가 대신전으로 바로 도착했다면 성녀가 직접 그를 돌보았을 거라는 듯이 들렸다. 그럴 리가. 성녀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치료에 임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라트반을 눈치채지 못한 카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성녀님께서는 아무 일도 없으십니까?”
언제나 성녀를 걱정했던 카를이다. 그러니 성녀와 자주 마주하는 자신에게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예전에도 그가 대신전에서 라트반을 마주칠 때도 이렇게 종종 물어 오곤 했었다.
라트반은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예전과 변함없는 똑같은 웃음과 변하지 않는 질문.
하지만 라트반은 그런 카를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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