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낡은 간판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여기가 아르벨 뒷골목이었어!’
남자가 단검을 팔아 버리겠다고 말했던 곳. 정말로 이곳에 있을지는 몰라도 단검을 찾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다. 나는 골목 안을 살피다 남자가 들어간 문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간판이 없는 가게였다. 낡아 빠진 나무 문은 아래가 썩어 너덜거렸고 앞에 붙어 있는 작은 쇼윈도의 유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는지 먼지와 흙탕물이 튀어 안에 뭐가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 너머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무렇게나 던져둔 듯 엉망으로 쌓여 있었다. 사실 말이 좋아 물건이지 쓰레기나 다름없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싸게 팝니다….”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에 써진 말을 중얼거리던 내 시선이 그 종이의 옆에 굴러다니는 물건을 본 순간.
“있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더러운 유리 너머에 카일레스의 단검이 있었다!
재빨리 유리창 안쪽의 인기척을 확인했다. 안으로 들어간 남자의 모습도 가게 주인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금 더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안쪽에 있는 단검을 살폈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카일레스의 단검이 확실했다. 기억 속의 모습과 달라진 것은 끝에 달린 보석 장식이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보석을 팔아 치운 다음에 헐값에 넘겼나 봐.’
다행히 이 단검의 값어치는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알았다면 이런 곳이 아닌 어딘가의 왕실이나 귀족가의 저택에서 소중히 보관되고 있었을 것이니까.
제가 입은 피해를 돌려주는 능력도 있지만 마수의 뼈로 만들어졌기에 다른 마수들이 소유자를 잠시나마 동족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도 있다. 마수를 두려워하는 대륙 변경 국가의 사람들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손에 넣고 싶은 물건이 카일레스의 단검이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하지? 들어가서 사고 싶다고 말하면 되나?’
혹시나 가격표가 붙어 있나 살펴보던 사이 가게 안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곧 유리 너머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이자 나는 재빨리 골목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낡은 나무 문이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던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다시는 오나 봐라!”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침을 뱉자 가게 안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따라 나오더니 느긋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놈 저번에도 그런 소리 하고 돌아갔었지. 어쨌든 더 이상 한 푼도 줄 수 없어. 우리 집에 올 시간이 있으면 길에 나가서 돈 많아 보이는 아가씨에게 애교라도 한 번 더 떨라고. 혹시 알아? 또 저번처럼 괜찮은 물주를 잡을지.”
낄낄거리는 주인의 말에 남자는 다시 거칠게 침을 뱉더니 골목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가게 주인은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더니 문을 닫고 들어가려 했다. 나는 남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주인을 향해 다가갔다.
“뭐, 뭐야!”
그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경계하더니 자신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금세 느긋한 얼굴이 되었다.
“팔 물건이라도 있나? 누구 소개로 왔어?”
주인의 말에 나는 유리창 너머의 단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얼마죠?”
“뭐야… 설마 사러 온 거야?”
내 질문에 주인은 놀란 얼굴이 되더니 잠시 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저 단검? 50디아르만 줘.”
50디아르는 금화 반 개의 가격. 금화 여러 개를 가져왔으니 그 정도 지불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50디아르라니, 그건 너무하잖아?”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그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맙소사. 그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내가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나와 비슷하게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서 있었다. 그 후드 아래에서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흥미로움을 가득 담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황태자가 왜 여기에 있어?’
가게 주인만 아니었다면 당장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내가 입을 뻐끔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황태자는 나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끌어안고 그의 품 안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짧게 속삭였다.
“말 맞춰요.”
말을 맞추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도대체 그가 뭘 하려는 건지 몰라 바라보고만 있자 황태자는 가게 주인을 향해 다시 말했다.
“우리 아가씨가 딱 보기에도 어리숙해 보이긴 하지만 단검 하나에 50디아르는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이거 도둑이 따로 없으시네. 여기서 저렇게 던져 놓은 거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건데 어떻게 그걸 50디아르나 받아먹을 생각을 해요?”
그렇게 말을 쏟아 낸 황태자는 평소와 달리 과장된 목소리와 행동으로 주인을 향해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아가씨가 이런 곳에서 물건 한번 사 보는 게 소원이란 말만 안 했으면 바로 모시고 나갔을 텐데…. 아가씨, 저런 단검은 오래되어서 쓰지도 못한답니다. 50디아르라니. 5디아르도 비싼 거예요. 이만 돌아가시죠.”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 아니… 난!”
돌아가면 안 된다고! 카일레스의 단검을 겨우 찾았는데 왜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를 하려는 거야! 내가 있는 힘껏 그가 잡은 손을 빼려고 몸을 비틀자 황태자는 가게 주인을 등지고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이제는 화가 나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주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5디아르에 사다니….”
잠시 후, 아르벨 뒷골목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어느 건물의 구석에서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카일레스의 단검을 보며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황태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만 더 흥정했으면 3디아르까지도 가능했을걸요?”
“…….”
즉, 가게 주인은 이것을 3디아르보다도 낮은 가격에 사들였다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하니 주인이 나에게 얼마나 비싸게 팔려 했었는지 실감이 났다.
‘어리숙해 보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기껏해야 한 두세 배 정도로 팔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이쪽 세계의 상식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도.
‘어쨌거나 단검을 되찾았어.’
그렇게 생각하자 긴장했던 몸에 겨우 숨이 돌았다. 나오기 직전 보았던 라트반의 무서운 얼굴이 드디어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당장 이 단검 때문에 그의 검이 나를 향할 일은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 덕분이었다.
나는 단검을 로브의 안주머니에 소중히 넣은 다음 황태자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황태자께서는 무슨 일이신가요? 그리고 어떻게 나를….”
황태자라는 단어에 그가 말했다.
“여기서는 그냥 레온이라 불러 주십시오. 어차피 제 이름은 이 대륙에 수만 명 정도는 있을 테니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성녀님께서는….”
“…….”
알고 있다. 이벨리나라는 이름은 아마도 나 혼자뿐일 것이다. 새로운 성녀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제 이름을 바꾸곤 했으니까. 그러니 이벨리나라고 이름을 부르면 곧 성녀라고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황태자는 곤란해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리나라고 부르겠습니다. 흔한 이름이지만 성녀님 이름의 절반이기도 하니 이 정도의 무례는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괜찮지?’ 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황태자에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라 반박할 말도 이유도 없긴 하니까.’
“그럼 리나 님, 도대체 왜 이런 시각에, 그런 곳에 계셨습니까?”
“그건….”
“게다가 그 단검은… 아니, 됐습니다. 서로가 대답하기 곤란한 건 물어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군요. 하지만 당신께서 혼자서 이렇게 나와 있는데 라트반 단장은 도대체 뭘 하고…. 아니, 함께 나오는 것도 짜증이 나긴 하지만….”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황태자는 연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몇 번 더 그의 입에서 라트반의 이름과 함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황태자는 겨우 중얼거림을 멈췄다. 그런 황태자의 모습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어쩐지 저번처럼 황태자를 이용만 하고 도망가는 것 같은 꼴이었지만 일단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몸을 돌려 재빨리 걸음을 옮기려 한 순간 나는 큰 문제점을 깨달았다.
“…어?”
아르벨 뒷골목을 빠져나올 때 카일레스의 단검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그저 황태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더니 여기가 어딘지를 알 수 없었다.
물론 대신전의 높은 흰 벽은 이곳에서도 잘 보였지만 어디로 가야 정문으로 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정문까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당황한 채 길에 서 있었더니 짐마차 한 대가 빠르게 덜그럭거리며 내 앞을 지나갔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길에 고여 있던 흙탕물이 튀어 올랐다.
“……!”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어느새 내 앞에는 황태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옷은 흙탕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황태…!”
“레온입니다.”
황태자라고 부르려는 내 말을 빠르게 자른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 옷에 묻은 흙탕물을 툭툭 털어 내었다. 후드 아래에 있던 그의 밝은 금발과 조금 드러난 얼굴 역시 더러운 물을 뒤집어쓴 채였다. 짜증을 내지 않을까, 하는 내 생각과는 달리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털어 내더니 소매로 얼굴을 쓱쓱 닦았다. 그러더니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등을 돌려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그대로 흙탕물을 뒤집어쓴 자신이 부끄럽다는 듯한 말투였다. 내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그는 무사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보면서 물었다.
“…왜 막아섰나요?”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좀 더 확신을 얻기 위한 질문일 뿐이었다. 내 질문에 황태자가 웃음을 지었다.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내가 눌러쓴 후드 위를 가볍게 손으로 털어 내었다. 흙탕물 몇 방울이 튀는 것이 보였다.
“…다 막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아쉽다는 듯이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다음번에는 제대로 막겠습니다.”
“…….”
“더러운 것이 당신께 조금도 닿지 않게 말입니다.”
그저 희망 사항이 아닌 확신이 가득한 말투였다. 정말로 다음에는 더러운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완전히 지켜 내겠다는 듯한 확신이. 그런 황태자의 말에 나는 조금 전 그를 시험하기 위해 했던 질문을 후회했다.
이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것을 깨닫자 다시 복잡한 감정들과 생각들이 내 안에 휘몰아쳤다. 책에서 보았던 그의 성정이 떠올랐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황태자다. 그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상대의 호감을 얻으며 방심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니 성녀인 나를 향해 보이는 관심과 호감은 대신전을 종속시키기 위한 계획 중의 하나이며 또한 그가 만족했던 육욕에 대한 욕망이 섞여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들뜬 목소리로 조금은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다른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저 병원에만 갇혀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였던 내가 수많은 일을 겪어 온 황태자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가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이 보였다. 이런 모습까지도 전부 계산된 것일까?
손끝에 모래가 묻은 그의 얼굴이 만져졌다. 나는 그의 얼굴에 남아 있는 자국을 내 옷소매로 닦아 내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
“…레온.”
단지 이름을 불러 준 것뿐인데 그의 얼굴에 지금까지의 웃음과는 전혀 다른 밝은 미소가 퍼지는 것이 보였다.
“와….”
황태자를 따라 옮기던 내 발걸음이 어느 가게 앞에서 멈췄다. 그곳은 그림을 파는 가게였다. 현대의 갤러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리창 너머로 꽤 넓어 보이는 가게 안쪽에는 벽의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이라면 대신전에도 가득하지만 이곳에서 파는 그림들은 대신전의 것과는 달랐다. 대신전에 있는 그림들은 대부분 과거의 성녀들이나 그녀들의 업적, 또는 대륙에서 일어났던 기적에 대한 종교화였다면 이곳에서 파는 그림들은 대륙 여기저기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의 모습,그리고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었다.
“리나, 그림에 관심 있었습니까?”
그런 내 옆으로 어느새 다가온 레온이 물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내 이름 뒤에 ‘님’이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서로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자고 한 것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와 타협한 것 중의 하나였다.
나 때문에 걸음을 멈춰 선 레온을 보면서 나는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처음 보는 풍경들이 많아 신기했을 뿐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 레온의 얼굴을 살폈다. 벌써 몇 번째 그가 나 때문에 걸음을 멈추는 것인지 이제 세는 것도 포기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걸….’
서로 뒤집어쓴 흙탕물을 닦아 준 다음 조금은 어색한 웃음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온이었다. 그는 대신전의 정문으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서 걸었다. 그런 레온의 모습에 이제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조금 전까지 긴장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단검을 찾기 전까지는 그저 낯설고 두렵고 경계해야 했던 도시의 모습이 이제는 흥미롭고 즐거우며 신나는 곳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레온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주변의 것에 눈이 갔다.
다행히 레온은 앞장서서 걸으면서도 자주 뒤돌아 내가 잘 따라오는지를 확인했다. 그 덕분에 내가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면 지금처럼 곧바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가 보던 그림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긴 대륙 북쪽에 있는 헤벨만의 숲입니다. 가운데 솟아 있는 거대한 나무를 보니 알겠군요.”
“…헤벨만의 숲?”
처음 들어 보는 이름에 중얼거리자 레온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큰 숲은 아니지만 숲의 어느 곳으로 들어가더라도 나오는 곳은 모두 똑같은 신기한 숲이지요.”
그의 설명에 나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동그란 분지 안이 모두 나무로 뒤덮여 있었고 그 가운데 혼자서만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자라 있는 나무가 있었다. 그림만으로도 흥미가 생기는 곳인데 그런 신기한 일이 가능한 곳이라니.
“언젠가 가 보고 싶네요”
이리스가 나타나고 내가 대신전을 나오게 되면, 그때는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머릿속에 헤벨만의 숲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헤벨만의 숲은 꽤 여러 번 갔던지라…. 뭐, 어차피 저곳은 안내도 필요 없는 곳이긴 하군요. 헤매다 보면 결국 출구에서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요.”
레온은 그렇게 말하며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탓에 안내해 주겠다는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물어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거 같이 가자는 말 맞지?’
내가 생각하는 사이 그는 옆에 걸려 있던 다른 그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끝까지 함의를 물어보지 못한 채 다시 그의 설명을 들었다.
***
“이제 더 못 먹어요….”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정체불명의 먹거리를 보면서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꽤나 맛있는 먹거리였다. 돼지고기를 잘라서 긴 꼬챙이에 끼운 다음 온갖 향신료를 뿌려 구운 것이니 말이다. 잘 구워진 겉은 적당히 바삭바삭했고 기름이 잘 빠진 고기는 쫄깃했으며 골고루 뿌려진 양념 덕분에 느끼함 없이 계속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라면 이게 내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게 다섯 개… 아니 여섯 개째인가?’
문제의 시작은 사탕이었다. 걷다가 칸칸이 나눠져 있는 큰 나무 판에 아이들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인가 해서 바라보니 온갖 색의 사탕이었다. 나 역시 예쁜 색깔에 반해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자 레온은 어느새, 내가 보고 있던 것들을 사 들고 와서 내 앞에 내밀었다.
그렇게 둘이서 사탕을 입에 물고 오도독거리며 다시 걷다가 그다음에 보인 것은 과일을 파는 수레였다. 처음 보는 과일들이 신기해서 바라보자 레온이 다시 그것들을 손에 가득 들고 왔다. 그렇게 계속해서 내 발걸음이 멈출 때마다 레온이 사 오는 것이 늘었다.
덕분에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작고 반짝거리는 유리구슬이 알알이 엮여 있는 목걸이부터 시작해서 아이들이 손에 들고 다닐 것 같은 바람개비에 꽤 섬세한 자수가 놓여 있는 덮개 형식의 모자 등 많은 물건으로 가득했다.
“이게 다 오늘의 기념품이 될 테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망설임 없이 내 시선이 닿은 것들을 샀다.
어쨌거나 물건도 많이 샀지만 먹는 것도 만만치 않게 많이 샀다. 맛있기도 했고 남기는 것이 아까워서 레온이 사 주는 대로 전부 먹었더니 정말로 이제는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진심으로 힘들다는 얼굴을 하자 레온은 그런 내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벌써요? 몇 개밖에 드시지 않았는데…? 하긴, 접견식의 연회 때도 그다지 많이 드시지 않았지요.”
…그건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긴장해서 먹지 못했던 거였지만 그냥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사이 레온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꼬챙이의 고기를 크게 베어 물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남아 있던 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식욕에 새삼 다시 그를 살폈다.
‘하긴… 레온도 꽤 키와 덩치가 있는 편이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집중하다 보니 그가 꽤 큰 체격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비어 버린 꼬챙이를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레온의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묻고 말았다.
“괜찮다면 제 거라도 드실래요?”
그 말에 레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믿지 못할 말을 들은 것 같은 놀란 그의 표정에 나는 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니 입 거의 안 닿았는데 아까워서….”
괜스레 머쓱해진 내가 그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려 할 때 그가 곧바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
그러더니 그대로 내 손에 들려 있던 것을 그의 입으로 가져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먹어 치웠다. 순식간에 고기가 사라졌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내 손을 놓은 다음 옆에 있는 다른 먹거리를 보더니 물었다.
“저것도 드시겠습니까?”
“아, 아니 정말로 더는 못 먹어요.”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대답했다.
“먹기 힘들어서 남기시면 제가 다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저것도 사러 갑니다.”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떠올랐다.
***
그 후에도 한참 동안 도시 안을 걸어 다녔다. 레온은 신기해하며 구경하는 나에게 마치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나와 레온은 서로를 좀 더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레온, 저건요?”
“빗물을 받게 만들어진 지붕입니다. 수도 설비를 갖추지 못한 채 우물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집들이 주로 지붕을 저렇게 만들죠. 아, 리나. 그건 저에게 주십시오.”
“괜찮아요. 지금도 제 가방 다 들어 주고 계신데…!”
그 탓일까. 신기하게도 대신전 안에서 서로 황태자라거나 성녀라고 불렀을 때보다 레온과 나 사이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그렇게 어색했었는데….’
얼마 전에 그와 만날 생각을 하면서 그가 편해질 날은 평생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마주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이만큼이나 가까워진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떠들며 걷는 사이 대신전의 정문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아….”
이제 이 외출을 끝낼 시간인 것이다. 레온은 나의 미련이 가득한 소리를 들으며 그 마음을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내가 산 것들을 보면 얼마나 내가 신이 나서 밖을 돌아다녔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자 칠흑 같은 어둠이 보였다. 이렇게 새카맣다는 것은 아마도 곧, 새벽빛이 밝아 온다는 소리였다. 하루 종일 떠들썩한 도시라더니 이 시각에도 워낙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닌 탓에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레온은 내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더니 말했다.
“곧 새벽하늘이 밝겠군요.”
레온은 말을 맺음과 동시에 들고 있던 내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내가 그것을 받으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의 얼굴이 내 이마 위로 내려왔다. 가볍게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 위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며 레온은 환하게 웃었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리나.”
“…….”
“오늘은 아침이 밝기 전에 이렇게 헤어지지만….”
그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이어 말했다.
“저는 언젠가 당신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
“후….”
레온은 도망치듯 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성녀의 뒷모습을 보며 상의 단추를 풀었다. 제가 한 말에 붉어진 얼굴이 아직도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성녀에게 한 마지막 말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정말로 오랜만에 그가 내뱉은 진심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유치한 소리였다. 함께 아침 해를 보고 싶다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녀도 모르지는 않았는지 그렇지 않아도 동그랬던 눈이 더욱 동그랗게 변하고 곧바로 제게서 물건들을 받아 든 채 정문 안으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레온은 돌아선 성녀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워했을 뿐이지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게 어디야.’
첫 만남 후로 계속해서 그에게 벽을 치고 선을 그으며 멀리 떨어져 있던 성녀다. 몸을 섞고 나서는 다시 불러 주지 않을까, 아니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더욱 멀어졌었고. 하지만 오늘 반나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정말로 노력했는걸.’
길거리에서 파는 것들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몇 번이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지금까지의 데면데면했던 거리가 별것 아닐 정도로 성녀는 멀리 도망가 버릴 게 분명했다.
계속해서 오늘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아 레온은 거칠게 고개를 털었다. 자꾸 제 이름을 불러 주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미 성녀가 사라져 버린 정문을 보며 그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함께 들어갈까, 싶기도 했지만 성녀는 분명 그녀만이 아는 길을 통해 드나들 것이 자명하다. 지금 곧바로 뒤따라 들어가면 뒤를 밟는 것이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온은 정문 앞을 몇 번이나 맴돌다가 경비병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고 정문에서 멀어졌다.
다시 혼자가 되어 길을 걷던 레온은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
그렇게 중얼거린 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급하게 대신전을 나가야 했던 이유가 생각났다.
“…이리스라고 했었지?”
대륙 끝에서 성녀라고 불리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소식 때문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편지에는 그 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끝까지 읽었을 때, 레온의 얼굴에는 더 이상 웃음기는 없었다.
그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대신전에서 앉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성녀의 답변을 기다리는 즐거움을 누릴 시간도 없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다. 물론 보좌관들에게 성녀에게서 연락이 오면 잘 답변하라고 신신당부를 해 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보원과는 대신전 밖의 도시에서 만났다. 훔쳐 듣는 귀가 많은 대신전 안에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내용이었으니까.
“작은 마수 한 마리가 습격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 지역의 기사들이 쫓아내기는 했지만 독을 가진 마수였기에 다들 이제 끝이려니 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이리스라는 여자가 성력을 써서 모두를 치료했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정보원이 하는 말을 들으며 레온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저 상처를 치료했다, 정도면 성력이 있는 누군가가 그 힘을 사용했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류에는 이리스라는 여자가 치료했다는 사람들의 인원수와 그들의 부상의 심각성 그리고 사람들을 공격했던 마수의 종류도 적혀 있었다.
마수 트란테.
레온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마수였다. 크기도 작고 파괴력도 약하지만 그 마수가 나타나면 모두 경계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란테는 무척이나 강력한 독을 가진 마수였다. 그것은 위험한 상황이 되면 입 안에서 가시를 뱉어 내었고 그 가시에 찔리면 대부분의 생명체는 피부가 빠르게 썩어 들어가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 독은 약으로는 치료가 절대 불가능하며 오직 성력으로만 치료가 가능했다. 게다가 어지간한 상급 신관들의 성력으로도 트란테의 독은 쉽사리 해독되지 않았다. 그러니 변방의 지역에서 트란테가 나타나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빠른데.
“그 트란테의 독을 해독시켰다고…. 그것도 수십 명이나….”
레온의 입에서 저절로 끄응, 하는 신음 소리가 나왔다. 이것은 상급 신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정도의 성력은 오직 성녀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쪽의 상황은?”
“‘진짜 성녀님’이 나타났다며 난리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성녀라고 부르자 당황해서 그곳을 떠났구요.”
정보원이 말한 진짜 성녀라는 말에 레온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난 몇 년간 이벨리나의 행실이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게다가 얼마 전, 기도회의 일로 또 새롭게 좋지 못한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성녀가 성스럽고 고결하기를 바랐다. 대신전과 성녀의 오랜 역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타락한 성녀. 사람들이 그런 이벨리나를 가짜 성녀라고 부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러나 성녀는 오직 한 명. 두 명의 성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에게 사랑받는 신의 대리인은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오직 한 명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짜 성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레온의 마음속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벨리나는 기도회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야유, 그리고 위협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다가와 축복을 내렸다. 그 모습은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위해서 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제 정체를 알아채기 전까지 이벨리나가 보여 준 모습은 진심으로 아픈 자가 낫기를 바라는 성녀의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던 레온은 정보원에게 명령했다.
“그 여자를 계속 추적하고 발견하면 놓치지 말라고 해. 그리고 그 여자의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내도록.”
“알겠습니다.”
레온의 명령에 정보원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만남은 끝났다. 홀로 대신전으로 돌아오는 레온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대신전에 와서 보았던 성녀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타락한 성녀라….’
기도회 때 각 나라가 바친 공물들이 생각났다. 신의 힘을 제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쓰고 있는 성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레온은 타락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사람들은 정작 성녀가 금은보화를 긁어모은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밤마다 남자를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더욱 꺼렸다. 정작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이상한 사람이 눈에 보였다.
“……?”
아르벨이라는 낡은 가게의 간판이 붙어 있는 골목길의 초입에서 안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주변에 다른 자가 없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있었다면 ‘도대체 저 사람은 뭔데?’ 라며 구경을 했을지도 모른다.
‘뭐 하는 사람인데 저렇게 티 나게 얼쩡거리는 거지?’
이 골목에서 많은 물건이 어둠의 경로로 처분되는 것을 안다. 도대체 뭘 팔러 온 것일까, 하며 레온은 그 사람을 구경했다. 그러다 곧 그 사람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 어느 가게의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는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후드 아래로 살짝 드러난 얼굴은 그가 걸어오는 내내 생각하고 있던 얼굴이었다.
‘성녀가 여기서 뭘 하는 건데?’
그는 골목으로 다가와 성녀의 행동을 살폈다. 그러다 곧 알게 되었다. 성녀가 가게 주인에게 속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무엇을 사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저리 필사적인 것을 드러내면 안 된다. 저랬다가는 값도 값이지만 가게 주인이 성녀가 사려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알고 넘겨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 보다 못한 레온은 그 일에 끼어들고 말았다. 성녀가 사려는 것이 무엇인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도와주고 싶은걸.’
그것은 레온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감정이었다.
어느새 하늘 저편에는 새벽의 빛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 빛에 레온은 그제야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가짜 신분이 적힌 신분패를 내밀고 대신전으로 들어온 그는 제 처소로 가며 이리스란 여자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만약 그 여자 때문에 이벨리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여자였건만 이벨리나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생각을 한 순간 그는 이리스에 대한 적대감이 제 안에 생기는 것을 알았다.
***
새벽이 가까워져서야 처소로 돌아온 탓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지만 그와 반대로 몸과 마음은 무척이나 편했다.
‘카일레스의 단검을 찾아서 그런가 봐.’
그동안 계속해서 불안하게 만들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라트반이 오면 바로 보여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신나게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을 때, 신관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라트반 경?”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라트반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다른 신관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오늘 수업이 약속되어 있었나요?”
서랍장 안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카일레스의 단검을 떠올리며, 혹시나 내가 그와 약속을 하고 잊어 먹었던 것인가 싶어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외출의 허가를 받고자 해서 왔습니다.”
라트반은 신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기에 대신전을 벗어날 때 내 허락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조금 전 카를 신관을 모시러 간 기사들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 드디어 연락이 왔군요. 곧 도착한다고 하던가요?”
“그렇습니다. 다만….”
“다만?”
“도착이 늦어졌던 이유가 오는 길에 갑자기 원인 불명의 이유로 카를 신관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허가해 주신다면 상급 신관들과 함께 카를 신관을 맞이하러 가려 합니다만….”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카를 신관을 대신전으로 데려오세요.”
내가 허락을 내리자 라트반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간 후 나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이제 카를 신관이 오면 대신관 후보 대부분이 대신전에 모이게 된다. 그러면 또 긴 회의를 거쳐 새로운 대신관이 선출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다음 조심스럽게 거울에 손을 대었다. 이제는 이 얼굴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내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울 뿐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벨리나.”
그녀를 불러 보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들었던 날 이후로 마치 사라지기라도 한 듯, 이벨리나로부터는 어떠한 말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녀가 제 패배를 인정하고 더 이상 나를 괴롭히기를 포기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너무 조용해.’
이벨리나의 성격을 알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조용한 것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안 뺏길 거야.’
나는 두 팔을 끌어안았다. 나는 지금의 삶이 좋았다. 평판은 아직 바닥일지라도 내 자리가 있고 내 일이 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있으며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이 삶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제발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으면.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라트반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쉽게 허가가 났군.’
그가 지금까지 성녀에게 외출의 허가를 구하러 갔던 것 중 가장 빠른 시간에 이루어진 허가였다. 예전에는 며칠을 부탁해서 겨우 받은 적도 있었는데 오늘은 뭘 그런 걸 물어보고 나가냐는 듯한 눈으로 너무도 쉽게 허가를 내렸다. 물론 라트반은 그런 성녀의 변화가 반가웠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만나는 날이 괴롭지 않다. 오늘도 그렇다. 성녀를 기다리고 있는 신관들 사이를 헤치고 그녀를 보았을 때, 하마터면 먼저 소리를 내어 성녀를 부를 뻔했다. 그런 제 마음에 라트반은 자신이 성녀를 만나는 것을 꽤나 기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신관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제 귓가에 오늘 수업이었냐고 물어보는 당황하는 얼굴은 이상하게도 빤히 바라보게 되는 힘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라트반은 거칠게 머리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어서 빨리 대신전을 이끌 대신관을 선출해야 한다.
‘서둘러 카를 신관님을 모셔 와야겠군.’
연락에 따르면 그는 마치 마수의 마력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한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상급 신관들에게 부탁을 해 그를 치료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상급 신관에게 부탁을 할까, 그가 고민하던 중, 복도를 걷는 평신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들의 손에는 성녀의 처소로 가져가는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얼핏 보아하니 세탁을 마친 세탁물들 같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라트반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집에도 성녀가 남기고 간 것이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그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둘러 상념을 털어 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사이 평신관들이 그에게 인사를 하며 그의 옆을 지나쳤다. 그 순간 라트반의 눈이 빛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저희 말씀입니까?”
평신관들은 라트반이 자신들을 불러 세웠다는 것이 영광임과 동시에 혹시나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인가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라트반은 그녀들이 들고 있는 옷을 보았다. 그것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을 본 그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얼마 전, 그가 도둑을 잡기 위해 신전의 정문에 갔을 때 유독 그의 마음에 걸리던 사람이 입고 있었던 로브였다. 그것이 성녀의 처소에서 나온 옷이라고?
라트반은 발길을 돌렸다. 성녀에게 그날, 혹시 변장을 한 채 밖으로 나간 것인지 확인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평신관들을 뒤로 하고 그가 급히 성녀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방문 앞에 서 있는 황태자를 보았다.
“…….”
저자가 왜 또 여기에 온 것이지, 라고 그가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성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반갑게 말했다.
“리나!”
…리나? 순간 라트반은 황태자가 누구를 부른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라트반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지금 저자가 성녀를 마치 제 친구를 부르듯 부른 것인가?
그 무례함을 항의하기 위해 그가 한 걸음 내딛으려는 순간, 성녀가 웃으며 황태자에게 말했다.
“레온, 왔어요?”
성녀의 목소리에 라트반은 걸음을 멈췄다. 황태자를 반기는 성녀의 목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가슴을 찌른 것 같았다.
복도의 모퉁이에 서서 기척을 감추었기에 두 사람은 그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신관들도 친밀한 듯이 서로를 부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놀란 눈치였다. 라트반은 계속 숨을 죽인 채 성녀와 레온을 살폈다. 뭐라 짧게 이야기한 두 사람은 곧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문 너머로 성녀가 황태자의 손을 잡아끄는 모습이 라트반의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라트반 경?”
잠시 후, 복도를 걸어오던 신관들이 석상처럼 서 있는 라트반을 보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한 듯이 성녀의 방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
“모레턴강의 모든 물고기는 1년에 단 하루 몸이 황금색으로 변합니다. 그때는 그 어떤 어부도 물고기를 잡지 않고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지요. 저도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아주 작은 물고기들까지 모두 다….”
내 앞에 앉은 레온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는 중이었고.
그와 헤어져 대신전 안으로 돌아온 후, 나는 다시 레온에게 정식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는 곧바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대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각오하고 있었던 내용이 아니었다.
‘도시에서의 일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는 나와 밖에서 만난 이야기는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나는 마음이 놓였다. 사실 그가 ‘그 단검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절실하게 사려 했느냐.’ 또는 ‘마지막 말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다.’ 같은 말을 했으면 무척이나 그를 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보았던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들을 말해 주기 시작했다. 신기하고 아름다운 먼 세상의 것들. 덕분에 나는 홀린 듯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해 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내가 언젠가 경험해 보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제국의 황궁도 꽤 재미있는 곳입니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기 때문에 수백 년에 걸쳐서 건물이 새로 생겨났지요. 시대별 특징을 가진 건물들이 제멋대로 세워져 있습니다. 대륙 건축사가 종합된 곳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보기 난잡하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어느새 레온의 이야기는 그의 고향인 제국에 대한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제국의 중앙 시장은 대륙 여기저기서 올라온 모든 물건들이 모이는 곳이지요. 워낙에 크고 복잡한 곳이라 그 안에서는 매일같이 길을 잃는 사람들이 속출한답니다.”
그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 같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겠군요. 초행길이면 분명 길을 잃을 테니 말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저는 그곳의 길을 잘 알고 있거든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거기까지 말한 다음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도 모르게 잘 부탁한다고 말할 뻔한 것이다. 레온은 그런 나를 보면서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다.
“…….”
뭐라고 다시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던 중, 탑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알리는 것과 다른 박자로 짧게 세 번이 울리는 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레온 역시 내 옆에 서서 밖을 보았다.
“또 새로운 대신관 후보께서 들어오신 모양이군요.”
그의 말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부분의 대신관 후보들이 대신전 안에 모였다.
“그러고 보니 카를 신관이라는 분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더군요. 그분이 대신전으로 오시면 저도 꼭 한번 뵙고 싶습니다. 성녀님과 친분도 깊은 분이라 들었는데….”
“아, 그게 워낙 어릴 적의 일이라….”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카를에 대해서 물어도 나는 잘 모른다고!’
이벨리나의 기억에 그에 대해서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다. 레온이 더 이상 카를 신관에 대해서 물어보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 순간이었다.
“……!”
쨍그랑!
내 손이 놓친 찻잔이 그대로 테이블 위로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평신관들이 밤의 기도문을 읊으며 방을 나서자 나는 재빨리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잠옷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흰 허벅지 안쪽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는 세 개의 자국이 보였다.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그 자국 위를 눌러 보았다. 낮의 일이 생각났다. 카를 신관에 대해 말을 얼버무리며 찻잔을 들었던 순간, 알 수 없는 감각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흘렀다. 그 강렬함에 나도 모르게 찻잔을 놓쳤다.
“분명히 여기였어….”
그 감각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나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히 이 자국에서부터였다. 나는 더욱 힘을 주어 그 자국을 눌렀다. 아슬란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성력을 삼키고 있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책의 내용에서 이벨리나가 성력을 점차 잃어 갔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벨리나는 이걸 지우는 대가로 아슬란에게 후계자를 낳아 주겠다고 약속했고….’
마수의 새끼를 인간이 배는 일이란 보통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벨리나는 아슬란에게 그것을 약속하면서까지 이것을 지우고 싶어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
꺼림칙한 자국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이것이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힘을 삼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도 아슬란이 보여 주었을 때 이후로는 특이한 움직임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피부 위에 남아 있는 자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흐읏….”
낮에 느꼈던 감각을 떠올리며 자국을 누른 순간 내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나는 놀란 입을 틀어막았다. 신음? 아니다. 이건….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던 나는 깨어진 찻잔 조각으로부터 재빨리 나를 물러서게 하려던 레온의 모습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그의 몸이. 그의 숨소리가. 그 순간, 나는 어둡던 방에서 나를 안았던 그의 몸을 생각하고 있었다. 단단하던 그의 몸과 쉴 새 없이 나를 탐하던 그의 아래를.
“…….”
신관들이 들어와 깨어진 찻잔을 치우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레온을 덮쳤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몸을 끌어안으며 다리의 자국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건 뭐지?”
다시, 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까지와 다른 불안감이 나를 감쌌다.
***
“하….”
뻑뻑해진 눈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다리의 자국에 대해 걱정하며 잠들지 못했던 탓인지 머릿속이 멍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눈을 누르다 나는 다시 내가 펼쳐 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오늘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은 혼자서 일을 처리하겠다며 다른 신관들을 서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두었다. 그다음 재빨리 올라온 서류들을 처리하고 나서는 서재 안쪽의 책장을 뒤졌다. 혹시나 이 자국에 대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것을 지우기 위해 아슬란과 거래까지 한 이벨리나다. 분명 그녀는 자국을 지우기 위해 많은 것들을 살폈을 것이다.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아슬란에게 부탁한 것이고.
하지만 결국 관련된 책은 찾을 수 없었고 서재를 둘러보던 내 눈에 띈 것은 마수에 관련된 책이었다.
‘아슬란에 대한 것도 있을까?’
나는 책을 넘기다 마수의 생태에 관한 부분을 발견했다. 징그러운 마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빽빽하게 적힌 글씨가 보였다. 그것을 따라 읽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수들은 제 새끼를 무엇보다 아낀다라….”
나는 좀 더 자세히 그 부분을 읽어 보았다.
“마수에게 새끼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식의 개념이 아닌 또 다른 자신에 가깝다고….”
처음 만났던 날, 미친 듯이 나를 안았던 아슬란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살려 달라고 애원에 가깝게 부탁했을 때에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셀 수 없을 정도로 제 씨물을 내 안에 뿌렸다. 그때를 감각을 떠올리며 나는 내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그때는 그가 내 안에 쏟아붓는 정액 때문에 배가 터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울었었다.
‘임신… 이라.’
그것에 대해 아직까지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슬란의 말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