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48)

“…라트반 경?”

아무 말이 없는 그를 다시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가져갔던 검을 재빨리 제 허리춤에 찼다. 칼 같은 그의 동작에 나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

그는 다시 검을 차고 나서도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일자로 다물린 그의 입과 굳은 얼굴의 표정에 나는 더 이상 그를 부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어색함을 안은 채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내가 그의 검을 받기 전에 내려놓았던 목검이 있었다.

‘일단 들어 볼까.’

목검이라고는 해도 대충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목검은 검신 부분에 여기저기 긁힌 흔적과 함께 손잡이의 부분이 손때로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정말로 기사들이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 사용감에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나는 두 손으로 목검의 손잡이를 쥐어 보았다.

‘이렇게 쥐는 게 맞나?’

처음에 라트반이 건넨 목검을 별생각 없이 두 손으로 들었을 때는 나름대로 들기 만만한 무게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래쪽에 있는 손잡이 부분을 제대로 잡자 목검의 무게가 조금 전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목검의 끝이 눈높이만큼 올라오도록 들어 보았다.

‘이런 쪽에 재능이 조금은 있으려나?’

현대에 살던 나는 몸의 상태 때문에 그 어떤 격렬한 운동도 할 수 없었다. 숨쉬기와 걷기가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힘든 운동이었다. 그랬기에 이벨리나의 몸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내가 시도해 본 격렬한 운동이라고는 달리기가 전부였다. 그 외에 내가 가쁘게 숨을 쉴 만한 운동은 한 번도 없었….

머릿속에 황태자와 아슬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의 품 안에서 미친 듯이 내질렀던 교성과 필사적으로 매달려 헐떡이던 내 몸도.

‘그건 운동이라고 할 수 없어!’

낯 뜨거운 생각들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 내었다. 민망함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목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잡는 게 맞겠… 지?’

TV에서 보았던 검도 선수의 자세를 흉내 내며 서 있을 때 라트반이 다가왔다. 나는 침묵만이 흐르는 어색함을 깨어 보고자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잡으니 생각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네요.”

“…….”

“손은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

라트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더욱 깊어지는 어색함에 내 입은 점점 더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이걸로 어느 정도 연습하면 밤에 갑자기 저를 덮치는 무뢰한에게도 저항할 수 있겠지….”

거기까지 말하는데 라트반의 손이 내가 쥔 목검을 턱 소리가 나게 붙잡았다. 놀라 고개를 들자 어느새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는 그가 있었다. 얼굴 또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어떤 놈입니까?”

“네?”

“어떤 놈이 감히….”

“아니! 그냥! 그냥 한 소리예요! 예시를 들었을 뿐이라구요!”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라트반이 씹어뱉듯이 말하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아슬란을 생각하고 한 소리긴 했지만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슬쩍 라트반을 살피자 그는 여전히 예민한 상태였다.

“밤이 아니라 낮에도, 혹시 누가 갑자기 덤벼들지도 모르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레온 황태자가 그러면 그냥 찔러 버리셔도 됩니다.”

“레온 황태자요?”

도대체 그 사람이 왜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데? 라트반의 말에 내가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자 그가 말했다.

“레온 황태자를 개인적으로 길게 만나실 것 아닙니까.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라트반은 레온이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나는 그렇게 죄 없는 문을 한참이나 노려보는 그의 박력에 눌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검을 제대로 배우는 것은 아니었다. 목검은 그저 아주 기초적인 동작을 보여 주는 것과 함께 왜 그런 동작으로 검을 잡아야 하는지 설명을 해 주기 위해 라트반이 가져온 것 같았다.

“보통 처음 검을 잡는 사람들은 이런 동작으로 잡게 되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처음 내가 목검을 잡았던 것과 똑같은 동작을 보여 주었다.

“그게 잘못된 동작인가요?”

“그렇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는데 가차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잡아야 하나요?”

내 질문에 그는 다시 자신의 검을 꺼내더니 다른 동작을 보여 주었다. 그런 그의 손을 보면서 나도 똑같이 검을 잡았다.

“이렇게… 맞나요?”

“왼쪽 손을 조금 더 밑으로 내리십시오.”

“이렇게요?”

“오른쪽 손의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어 잡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요?”

“두 손이 너무 떨어져 있습니다. 서로 떨어지지 않게 붙여서 잡으십시오.”

“…이, 이렇게요?”

이상하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데도 점점 더 동작이 엉망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물론 그만큼 라트반의 얼굴도 곤혹스러운 듯이 변했다. 마치 완전히 엉망으로 엉켜 버린 실타래를 본 사람처럼 변한 그의 표정에 나는 알 수 있었다.

‘…나 재능 없나 봐.’

하긴 원래의 나도 이벨리나도 검이라는 것을 잡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기대를 한 것일까. 

“음…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모처럼 시간을 내주셨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라트반 경의 귀중한 시간을 이런 일에 쓰는 것은 곤란하니 그만두는 것이 나을 것 같…!”

거기까지 말했을 때, 라트반이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등 위를 거친 그의 손바닥이 감쌌다.

“……!”

너무나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그만두지 마십시오.”

“네?”

“부디 그만두지 말고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아… 네!”

검을 가르쳐 달라 부탁한 사람은 나인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가 검을 계속 배울 것을 부탁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어딘지 모르게 필사적인 그의 모습에 나는 크게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쩐지 라트반이 크게 실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긴, 시작하자마자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좀 그렇고….’

시델의 일까지 들먹이며 그에게 부탁했던 일이다. 언젠가 닥쳐올 미래와 당장 대신전 밖을 돌아다닐 때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배우려 하기도 했지만 라트반과 조금 더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함도 있었다. 황태자나 아슬란도 그렇지만 라트반이야말로 친해지면 그 상대를 제일 신경 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그만두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의 안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더 안 좋아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게다가 라트반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꽤 재미있었다. 마수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그것들을 상대하는 방법 같은 것은 이벨리나는 모르는 이야기였으니까.

그가 싫지 않다면 나 역시 그만둘 이유가 없다. 검을 계속 배워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른 나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보았다.

“저기… 그런데 손은….”

그가 무의식중에 잡았으니 이렇게 말하면 곧 놓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라트반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

“…….”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 역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햇볕에 그을린 짙은 색의 피부 위로 튀어나온 핏줄이 보였다. 검을 잡는 손답게 큰 그의 손은 손가락 역시 길고 마디가 굵었다. 그런 손 아래에 박여 있는 굳은살이 내 손등 위를 스치는 거친 감각이 어쩐지 간지럽고 민망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다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상처가 많네?’

신관들의 성력으로 전부 치료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라트반의 손 위에는 여기저기 베이고 찢긴 상처의 흔적들이 보였다. 무엇인가에 물린 듯한 이빨의 자국도. 무척이나 큰 것을 보니 아마도 마수의 짓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신전기사단의 단장이다. 그가 출정할 때는 그를 위한 상급 신관이 따로 배정될 정도인데 왜 그들의 치료를 받지 않았는지가 궁금했다.

“…왜 치료를 받지 않았나요?”

나는 그와의 미묘한 어색함을 어떻게든 풀어 보고자 그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침묵을 고수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라트반은 순순히 대답했다.

“작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신관들의 성력을 낭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중에도 그의 손은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곧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내 손에서 떨어지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목검을 잡고 있는 내 손을 그의 손으로 움직였다.

조금 느슨해져 있던 손가락이 목검의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붙잡았고 각도가 비틀어져 있던 손이 제자리를 찾았다. 무척이나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손은 정확하고 확실하게 검을 쥐는 올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꿀꺽.

그는 분명 제대로 된 자세를 가르쳐 주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의 손이 내 손가락을, 손등을 쓸고 지나가더니 곧 손목을 잡았다.

“아….”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그의 온기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소리에 잠시 멈칫하던 그의 손은 천천히 멀어졌다. 잠시 후, 라트반이 말했다.

“…이게 올바른 자세입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일까. 어쩐지 낮게 가라앉아 갈라지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쨌거나 겨우 이 어색한 침묵이 끝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나는 그가 다시 고쳐 준 내 손을 보았다. 이제야 내 손은 확실히 조금 전 그가 말했던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가 고쳐 준 자세를 유지하며 나는 천천히 목검을 움직여 보았다. 아주 조금 자세가 바뀌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검의 무게가 조금 전보다 더 가볍게 느껴지며 손목의 통증도 사라졌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이래서 기초를 배울 때,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놀라움을 담은 얼굴로 몇 번이고 목검을 휘두른 다음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괜찮나요? 엉망은 아니지요?”

어쩐지 그에게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처음인데 그 정도면 훌륭하십니다.”

“좋은 선생님 덕분인 것 같아요.”

그 대답에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어색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그에게 나는 웃으며 다가갔다.

“라트반 경, 손 좀 주실래요?”

“손… 말입니까?”

그가 내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내밀었다. 나는 조금 전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내 손으로 그의 손등을 덮었다. 내 손바닥 아래 우둘투둘한 상처의 흔적이 느껴졌다. 곧 그의 손 위로 푸른색의 성력이 빛나기 시작했다.

“……!”

그러자 그가 놀라며 나에게 잡힌 제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그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손을 휘감은 성력은 잠시간 머물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손을 뗀 다음 그의 손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 길게 긁혔던 상처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상처가 있던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상처가 사라진 깨끗한 그의 손을 보면서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라트반을 향해 웃었다.

“잘 알려 주신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

내 말에 라트반은 제 손을 천천히 앞뒤로 살펴보더니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맙다고 하거나 아니면 이럴 필요 없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다른 그의 반응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예상과 다른 라트반의 표정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예전에 다른 신관을 치유했을 때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는데 혹시 오래된 상처를 치료할 때는 조금 아프기라도 하는 걸까? 여전히 침묵하는 그의 태도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살펴보고 있을 때, 라트반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연신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한참 후에 다시 말했다.

“…일단 검을 잡는 것은 지금 당장은 안 되겠습니다.”

뜸을 들이며 말하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힘들게 입을 여는 것 같았다.

“…네.”

처음인데 이 정도면 훌륭하다 하더니 아무래도 적당히 한 말이었나보다.

“그럼 뭘 하는 게 좋을까요?”

라트반이 그만두지 말라고 했으니 더 이상 검 쓰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겠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다른 것을 가르쳐 줄 것이 분명했다. 라트반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곧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카일레스의 단검을 갖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당장 검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타격을 입히려면 시간이 걸릴 터이니 호신을 위해서라면 일단은 그 단검을 쓰는 법을 익히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공격을 위한 검이 아니니 단검을 쥐는 법과 다치지 않게 주의할 점만 알려 드리면 되겠군요.”

…카일레스의 단검? 처음 듣는 말에 나는 빠르게 이벨리나의 기억을 뒤졌다.

‘있다!’

다행히 그녀의 기억 속에 카일레스의 단검에 대한 것이 있었다.

카일레스의 단검은 오래전의 성녀가 그 당시 신전기사단장과 함께 잡았던 마수 카일레스의 뼈로 만들어진 단검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단검을 만든 후 나머지 뼈는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바람에 단 한 개만 만들 수 있었다는 그 단검에는 마수가 갖고 있던 특수한 능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상처를 대갚음하는 능력이라니….’

놀랍게도 그 단검은 제가 받는 것만큼의 타격을 상대방에게 되돌려 주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확실히 그것 이상으로 몸을 지키는 데 좋은 것이 없…!’

단검에 대한 기억을 보던 내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한 라트반이 말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 단검을 가져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어쩌지….”

라트반이 돌아가고 하루가 지났다.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을 처리했지만 방에 돌아온 순간부터 나는 죄 없는 쿠션을 끌어안고 쥐어뜯으며 방 안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걷고 있는 중이었다.

계속해서 라트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번에는 그 검을 가져오라고….”

대신전의 보물 중 하나인 카일레스의 단검은 성녀의 서재 안쪽의 방에 보관되어 있었다. 다른 보물들은 중앙 신전의 건물에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것은 위급한 순간 성녀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 중 하나였기에 이곳 성녀의 처소에 보관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수수한 단검이었다. 마수의 뼈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신기하게도 검신 자체는 조금 날이 무딘 단검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검집 역시 무척이나 수수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낡은 단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그 단검은 당장에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잡동사니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전의 보물인 만큼 단검의 끝에는 그것을 장식하는 보석의 줄이 달려 있다.

그 단검은 성녀의 처소에 있었다. 몇 달 전까지는.

“어떻게 해….”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침대에 쓰러져서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발버둥을 치며 소리쳤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무 생각 없이 줘 버린 거냐고! 미친 거 아니야?”

당연히 이건 이벨리나를 향해 외치는 말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턱턱 막혀 왔다. 카일레스의 단검에 대해서 떠올렸을 때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함께 생각이 났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얼마 전, 이벨리나는 밤을 함께 보냈던 어전 남자에게 그것을 가져가라며 쓰레기 던지듯 던져 준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 장식의 보석을 준 것이었지만….”

그것을 받은 남자는 처음에는 낡아 빠진 단검의 모습에 실망한 눈치였다가 손잡이에 길게 붙어 있는 보석 장식을 보고서는 다시 이벨리나의 발아래 머리를 숙였었다. 그 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새벽에 신관들의 눈을 피해 이벨리나의 방을 빠져나가던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이었다.

“찾아야 해.”

신전의 보물이다. 게다가 다음 주에 라트반이 그것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어떻게든 둘러대면 라트반은 그럭저럭 속여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때뿐이다. 만약 다른 이유로 신전에서 그것을 찾는 날이 왔을 때는 ‘찾아보니 없네?’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좀 더 정신을 집중하고 이벨리나가 남겨 둔 기억을 보았다. 모르는 남자와 그녀가 정사를 나누는 것부터 봐야 했지만 민망함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그 기억을 처음부터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격렬한 움직임과 교성, 신음 소리가 지나고 나서야 이벨리나와 낯선 남자의 대화를 볼 수 있었다.

오늘은 정신이 없어서 쥐여 줄 금화를 넉넉히 챙기지 못했다는 이벨리나의 말에 남자는 성녀님이 주시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영광이라며 그녀에게 다른 물건으로라도 제 화대를 챙겨 주기를 기대했다.

그런 남자의 말에 이벨리나는 꽤나 건방진 놈이라며 웃더니 침대의 머리맡에 두었던 카일레스의 단검을 남자의 발치에 던졌다. 처음에는 낡고 투박한 단검에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남자는 곧 그것에 매달려 있는 장식을 발견하고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남자에게 이벨리나가 말했었다.

“그 단검은 버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렴. 워낙 낡은 거라 팔리지도 않겠지만.”

이벨리나는 남자에게 그 단검이 어떤 값어치를 지닌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이벨리나의 말에 남자는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보석을 정신없이 바라보며 대답했었다.

“아닙니다. 이런 것도 사들이는 곳들이 있습니다. 아르벨 뒷골목의 상점들이라면 밥값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요.”

그다음 남자는 재빨리 옷을 챙겨 입더니 방을 빠져나갔다. 기억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아르벨 뒷골목….”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책 안에서 몇 번이고 언급이 되었던 곳이었으니까. 대신전의 높은 벽 너머로는 꽤 큰 규모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워낙에 대륙 전체에서 대신전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많은 탓에 그들을 상대하는 장사가 오래전부터 번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느 도시가 그렇듯이 대신전 밖의 도시에도 어두운 곳이 존재했다. 그곳이 아르벨 거리, 보통 아르벨 뒷골목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거길 어떻게 가지?”

한 번도 대신전 밖을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책에서 나왔던 곳이라고 해도 단번에 찾아갈 자신은 없었다. 이벨리나도 신전 밖을 나간 적이 없으니 그곳에 대한 기억 따위는 없었고. 일단 대신전을 나가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닌데 나가서 거기를 찾아가 카일레스의 단검을 찾아온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하지만 찾아와야 해.’

카일레스의 단검은 꽤나 유명한 신전의 보물이다. 아직까지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니 그 단검의 능력을 누군가 발견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대로 쿠션에 얼굴을 묻은 채 머리를 굴렸다. 언젠가 비밀 통로를 이용해 신전 밖으로 나가 보려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날이 조금 빨라질 것 같았다.

“일단 통로도 확인해 보고, 나가기 전에 대신전의 일도 다 처리해 놔야 할 것 같은데.”

후원으로 나가는 통로보다 몇 배나 긴 통로다. 게다가 이벨리나는 그 통로를 이용한 적이 없으니 수십 년간 제대로 쓰지 않은 통로가 멀쩡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밤보다는 되도록 낮에 나가는 것이 안전하기에 평소라면 신전의 일을 할 시간에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신관들이 나를 찾는 일이 없도록 급한 일들만이라도 빠르게 처리해 두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럴 일들이 무엇이 있나 생각하다가 레온 황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편한 날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지….’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내가 과연 그를 편하게 여길 날이 올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날이 쉬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답장을 주긴 줘야 할 텐데.’

그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공무에 속하니 다른 일정들을 미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는 다시 밖의 일을 떠올렸다.

‘다행히 수중에 금화가 남아 있으니 밖에서 쓸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고….’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지식으로 추측해 본 바 금화가 무척이나 큰 단위가 돈이긴 해도 밖에서 아예 쓰이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한참이나 쿠션에 얼굴을 묻다가 나는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서랍장 중 하나를 열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 있는 것들이 보였다. 나는 그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거면 나갈 때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내가 꺼낸 것은 과거 이벨리나가 남자들을 신관으로 위장시키고 방에 들일 때 썼던 신분패였다. 꽤나 등급이 높은 것들이었기에 이것만 있으면 대신전의 안쪽까지 문제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대신전 밖을 나갔다 들어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었고.

나는 신분패를 다시 서랍장 깊숙이 밀어 넣고는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이제는 자연스럽게 푸른색의 성력이 은은히 내 손을 감싸는 것이 보였다.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시델처럼 날려 보내 버리면 될 테다. 그동안 성력을 쓰는 법을 꾸준히 연습했으니 내 몸에 직접적으로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 보자.’

어차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대신전 밖의 세상을 볼 생각이었다. 조금 두렵긴 해도 더 이상 주저할 이유는 없다.

‘이번 주말.’

다행히 내가 기억하기로 특별한 일정은 없었다. 나는 창으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대신전의 흰 벽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가서 대신전의 보물을 되찾아 와야 해.’

마음을 먹고 나자 지금까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는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 무엇보다 내 안전이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들키지 않을 것.’

이제는 성력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유사시에 다른 사람이 다치면 다쳤지 내가 다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문제가 생겨서 시끄러워진다면 내가 대신전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숨기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나가 보고 싶다고 할 때는 라트반이나 다른 신전 기사들을 대동하고 움직여야 할 게 분명해.’

어떤 모습일지 뻔히 보였다. 기도회 때처럼 내 주변을 호위하고는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밖에 나가서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싶었다.

언젠가 성력이 다 사라지고 이리스가 나타나 그녀가 성녀가 되면, 나는 곧바로 대신전을 나갈 생각이다. 아니, 나가야 했다. 지금부터 노력을 해서 이벨리나가 했던 나쁜 일들을 최대한 지워 나간다 하더라도 성력이 사라진 성녀가 얼마나 불길한 취급을 받을지는 이미 책에서도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태워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하 감옥에는 갇힐 게 분명해.’

내가 읽었던 이리스의 등장 부분을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새로 나타난 이리스를 사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성녀에게 바라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으니까. 착하고 상냥하며 자애롭고 헌신적인,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넘치는 성력을 갖고 있는 성녀.

“…후우.”

긴 한숨이 나왔다. 어느새 나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이리스를 생각하며 그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아마 이리스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세계는 그녀를 위한 세계니까. 나는 그 옆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연일 뿐이고.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두 손으로 찰싹 소리가 나게 얼굴을 때렸다.

“정신 차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한 뒤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이벨리나, 아니 내 모습이 보였다. 이벨리나가 내건 조건을 이행했기에 당분간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완전히 내 것이 된 몸. 힘들게 얻은 두 번째 삶이다. 이벨리나의 운명이 정해져 있든 아니든 나는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했다.

***

나가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대신전의 입구와 연결되는 비밀 통로였다. 후드가 달려 있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작은 방에 있는 옷장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옷장 안쪽의 나무판에 손을 대자 성력이 빛나고 알 수 없는 푸른색의 글자들이 나타나면서 곧 옷장 뒤쪽에 있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통로가 열리자마자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공기의 냄새에 목이 아파 왔다. 역시나 오랫동안 쓰지 않고 방치된 것이 분명했다. 따로 챙겨 두었던 램프를 들고 안을 살펴보자 아주 작은 벌레들이 불빛에 놀라 도망가는 것 말고는 별다를 것이 없는 통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통로의 안은 전부 돌로 만들어져 있어 생각만큼 먼지가 날리지는 않았다. 문제라면 가끔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이나 옷 위로 떨어지는 벌레 정도가 전부였다.

‘무너진 곳도 없네.’

과거 위급 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라더니, 아주 튼튼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덕분에 적당히 살펴보기만 할까, 했던 생각을 접고 갈 수 있는 곳까지 가 보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다리가 아파 오기 시작할 때, 들고 있던 램프의 불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숨을 쉬기에는 문제없다 했더니 통로 곳곳에 바람이 통하는 구멍이 있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사람들의 소리도 들려왔다.

‘벽이 얇아지고 있어.’

아무래도 출구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곧 나는 길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벽에 귀를 대고 바깥의 소리를 확인한 다음 후드를 잡아당겨 더욱 얼굴을 숨겼다. 출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를 모르니 섣불리 벽을 사라지게 했다가 혹시나 나를 알아보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곤란하니 말이다.

곧 밖의 인기척이 뜸한 틈을 타 나는 통로의 끝을 열었다. 푸른 성력이 빛나고 벽이 사라지자 바깥의 모습이 보였다.

“…여긴.”

곧바로 길이 나올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눈앞에는 잔뜩 쌓인 물건들이 보였다. 슬쩍 몸을 내밀어 보니 아무래도 창고로 쓰이는 곳 같았다. 램프를 끄고 물건들 사이를 빠져나와 밖을 바라보았더니 처소에서 멀리 보였던 대신전의 정문이 창고의 창문 옆에 떡하니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자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모두 이 창고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창고의 문으로 다가갔다.

‘다시 왔을 때 잠겨 있으면 곤란하니 지금 확인해 보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슬쩍 밀어 보자 걱정과는 달리 아무런 무리 없이 문이 열렸다. 내가 창고에서 나오자 근처를 지나가던 몇몇이 아주 잠시 시선을 던졌지만 곧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이 창고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 같았다.

쿵쿵대는 가슴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대신전의 정문이 보였다. 이 몸에 빙의하고 나서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야 대신전의 입구를 제대로 보게 되다니.

좀 더 정문의 근처로 다가가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정문은 하루 내내 열려 있다고 하더니….’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뜻을 담아 대신전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닫히는 것은 오직 대신전이 공격받을 때뿐이라고 했던가.

그렇기에 꽤 늦은 시간임에도 정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에, 환자를 부축한 가족들, 밖에 용무가 있는 듯한 신관들. 그리고 이 모두를 상대하는 장사꾼들까지.

그렇게 드나드는 사람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걸음을 내디딜 뻔했다. 다행히 곧 정신을 차리고 멈추었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대신전의 정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 보고 싶어.’

대신전 안도 낯설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지만 대신전 밖의 세상도 궁금했다. 거의 평생을 병원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바깥의 세상은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새로운 것, 신기한 것, 재미있는 것, 흥미로운 것. 그 모든 것이 있는 곳들.

한참이나 대신전의 정문을 바라보다가 경비병이 나를 흘끔거리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창고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놓여 있던 램프를 들고 비밀 통로를 통해 처소로 왔다.

“하아… 하아….”

어찌나 빨리 걸었던지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급히 옷을 갈아입고 씻은 다음 침대에 누워도 쿵쿵거리는 가슴은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주말….’

나는 손가락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 보았다.

“3일 남았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긴 3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역시나 그다음 날부터 나는 툭하면 창밖을 확인하고 시계를 바라보며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 내 모습에 다른 신관들이 혹시 기다리는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말이다.

많지는 않았지만 주말이 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준비가 거의 끝나고 있구나….”

새로운 대신관을 뽑기 위한 준비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류에는 현재까지 대신전에 도착한 후보들의 이름이 가득했다.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카를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륙의 가장 끝에 있는 신전에 있는 사람인 데다가 몸이 불편해서인지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좀 늦는데?’

카를이 머물렀던 신전에서 대신전까지는 보통 2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도착은커녕 어디까지 왔다는 연락조차도 없는 것을 보면 아직도 그가 당도하려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일단 그가 도착하는 대로 만나 보긴 해야겠어.’

다른 후보들도 만나긴 하겠지만 일단은 카를이 제일 궁금하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책상 위에 올려 둔 편지들을 살펴보았다.

“어?”

편지들을 뒤적이던 내 손이 멈췄다. 어제 레온 황태자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그것에 대한 답장이 돌아왔는데 문제라면 레온 황태자의 이름이 아닌, 그와 함께 왔던 제국 사절단의 이름으로 답장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급히 편지를 열어 읽어 보았다. 길고 긴 인사를 빠르게 넘기자 곧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황태자가 현재 부재중이라고… 답장이 늦어질 것 같다… 라.”

레온 황태자가 자리에 없다는 말에 어쩐지 마음속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라트반과 함께 찾아왔던 황태자였다. 그는 나에게 남은 아슬란의 흔적을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꼭 다음번에는 길게 만나 달라며 부탁하고 자리를 떠났다.

‘연락을 받기 전에는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기세였는데….’

그런 그가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부관들에게 물어봐도 대답해 줄 리는 없고….’

결국 황태자가 돌아와야 답을 들을 수 있는 일인데 그라고 해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물어볼 이유도 없는 일이고.

그렇게 사절단이 보낸 답장에 황태자가 돌아오면 다시 편지를 보내겠다는 의례적인 답장을 보낸 다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신분패, 옷, 금화 그리고 혹시 모르니 단검도 하나….”

그렇게 챙긴 것들을 점검하면서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저번에 통로를 지나가다 보니 쉽게 옷이 더러워진 것을 알았다. 그대로 나가면 아무래도 눈에 뜨일까 봐 창고에서 갈아입을 옷까지 준비한 다음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아무래도 눈에 너무 뜨이긴 한단 말이지.”

거울 속 얼굴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익숙해진 지금도 이 모습에 가끔 감탄할 때가 있다. 햇살로 만든 것 같은 부드럽고 반짝이는 금발에 투명하고 짙은 푸른 눈동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들어찬 예쁜 얼굴과 그저 완벽하다는 말만 나오는 몸까지. 새삼 이 세계에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후드가 달린 로브가 모두가 흔히 입는 옷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밖으로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으리라.

가슴 안쪽에 있는 깊은 주머니 속의 금화와 허리의 단검을 확인한 다음 나는 비밀 통로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 창고에 도착한 후, 더러워진 로브를 사람들이 흔히 입는 회색의 로브로 갈아입은 후, 창고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저번처럼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대신전은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신분은 확인하지만 나가는 자들은 확인하지 않는다. 문 가까이로 다가가자 나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걷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슬슬 가까워져 가는 문을 바라보며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고 있을 때였다.

“거기, 멈춰라!”

갑자기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

나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왜 라트반이 여기 있어?’

놀랍게도 목소리의 주인은 라트반이었다. 그의 호령에 사람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라트반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내가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설마… 들킨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곧, 서 있던 라트반이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손이 덜덜 떨리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세상에, 대신전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는데 들켰다니? 아니, 그보다 도대체 내가 나갈 걸 어떻게 알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지? 설마 저번에 나왔을 때 이미 들킨 건가?

많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갑자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남자가 문을 향해 뛰었다.

“잡아!”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변의 경비병들이 그 남자를 둘러쌌다. 곧, 짧은 도주가 실패로 끝나고 라트반이 경비병들에게 붙잡힌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내가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딱딱하게 굳었던 몸에 겨우 숨이 돌았다. 꽉 쥐었던 손과 떨리던 어깨가 아파 올 지경이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뭔가 있으니 도망갔겠지. 역시나 라트반은 남자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명령했다.

“몸을 수색하도록.”

“네!”

라트반의 옆에 서 있던 신전 기사들이 재빨리 남자의 몸을 더듬었다. 곧, 남자의 품 안쪽에서 무척이나 큰 주머니 하나가 나왔다. 기사들이 그 주머니를 열어 보자 그 안에는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일반적인 책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가죽과 화려한 장식으로 보아 기도문이 적힌 예식용의 책이 분명했다. 그리고 당연히 저런 책은 개인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 저건….”

“신전의 성서가 아닌가요?”

드러난 책의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라트반은 기사들로부터 그 책을 건네받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곧 남자의 앞에 다가와 말했다.

“신전의 물건을 사욕을 위해 멋대로 빼돌리다니.”

라트반의 목소리에는 숨기지 않는 분노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끌고 가.”

차가운 명령에 남자를 붙잡고 있던 신전 기사들은 고개를 숙인 다음 곧바로 남자를 잡아끌었다. 이대로라면 중죄를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남자가 라트반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라트반 님!”

끌려가는 남자는 필사적으로 라트반을 향해 소리쳤지만 라트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남자를 보았다. 라트반의 손에는 신전의 성서가 무척이나 소중한 듯이 들려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순간 가슴 위에 거대한 바위가 올라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큰일 났다.’

카일레스의 단검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걸 화대로 줘 버린 것을 라트반이 알게 되면….’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그 보물을 찾도록 노력하자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못 찾으면 적당히 둘러대며 시간을 벌면 되겠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신전의 물건을 대하는 라트반의 태도를 보니 확실해졌다. 나는 지금 당장 카일레스의 단검을 찾아와야만 했다.

소란이 조금 진정되자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라트반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사람들의 무리에 섞였다. 조금 전 두근거리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나는 대신전을 나섰다.

***

“……?”

라트반은 저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을 바라본 것인가 찾기 위해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마주치는 시선은 없었다. 단지 잠시 멈춰 있었던 사람들이 대신전을 나가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라트반의 시선이 그들을 훑던 중 눈에 걸리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무언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대신전을 나서는 사람이었다.

후드를 깊게 쓰고 로브를 입은 탓에 얼굴은커녕 성별조차도 잘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어쩐지 라트반은 그 사람을 불러 세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라트반이 한 걸음 내디디려는 순간 신전 기사 한 명이 그를 불렀다.

“단장님! 공범들도 지금 잡았다고 합니다.”

“그래? 그자 역시 곧바로 기사단으로 압송하도록.”

빠르게 지시를 내리고 난 다음 라트반이 다시 사람들이 있는 쪽을 돌아봤을 때, 그의 눈에 들어왔던 사람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그런 라트반의 모습에 기사가 물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

라트반은 대답하지 않은 채, 조금 전 그가 알아차렸던 시선을 떠올렸다. 분명 익숙한 느낌이었다. 라트반의 시선이 제 손에 닿았다. 이제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진 손이 보였다. 순식간에 라트반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쳤지.’

아무래도 제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이제는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성녀를 떠올리다니. 부끄러운 듯이 손을 예복 아래로 감춘 라트반은 빠르게 표정을 다잡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시선이 뒤를 향했다. 어쩐지 조금 전에 봤던 사람을 붙잡지 못한 것이 계속해서 그의 마음 어딘가를 불안하게 긁고 있었다.

***

시끌벅적한 광장의 모습이 보였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힘차게 솟아오르는 분수대와 함께 그 주변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 그리고 늦은 시각인데도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언제나 고요한 대신전과 다르게 떠들썩하고 활기찬 분위기의 광장은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이 세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모습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아르벨 뒷골목이 어디야….”

대신전을 나오자마자 그곳을 찾아다녔다. 대신전에 붙어 있는 이 도시는 다행히 건물 위에 길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르벨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런 골목의 이름은 처음 들어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긴… 소설에서 보면 아는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 했었지….’

나는 광장 구석의 벤치에 앉아 아픈 발을 툭툭 두드렸다. 털어 내려고 해도 책을 훔친 도둑을 보던 라트반의 표정과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단호하고 차가운 그 모습과 그의 허리춤에 있던 검의 모습이 생각났다.

“책에 적혀 있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 더 나쁜 쪽으로….”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어쩐지 가슴을 누르고 있는 바위가 더욱 커진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 풀린 다리를 두드리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앉아 있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돌아다니며 이곳의 지리를 익히고 아르벨 뒷골목이 어딘지 찾아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광장 옆으로 이어진 길들을 보는데 한눈에 보아도 다른 길들과 달리 무척이나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가게가 늘어선 길이 보였다. 역시나 가게들 앞에 서 있는 마차들 또한 화려하고 거대했다.

곧 어느 가게에서 돈이 많아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꽤 잘생긴 남자 한 명이 연신 그녀의 말에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곧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떠났고 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그런 모습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

남자들을 유심히 보던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물었다.

‘그 남자다!’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는 남자 중에 이벨리나에게서 카일레스의 단검을 받아 간 남자가 있었다!

“요즘 저 녀석 잘 나가네. 부러운걸?”

누가 마차를 보며 중얼거리자 단검을 받아 간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쳇, 그래 봤자 며칠이나 가겠어. 저 녀석의 언변은 처음에나 좋게 들리지 곧 지겨워질걸? 곧 버려질 거라고.”

그 말에 옆에 있던 남자들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더니 말했다.

“그래, 마치 자네처럼 말이야. 좋은 물주를 물었다더니 한 번 자고 나서는 버려졌다며? 게다가 받은 것이라고는 싸구려 단검뿐이고. 그나마 보석 장식이 있었다지만 솔직히 그거 하나로 뭘 하겠어.”

…아무래도 좋은 물주라는 게 나를, 아니 이벨리나를 말하는 것이 확실한 것 같았다. 단검을 받았던 남자는 다른 자들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곧 뒤돌아서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남자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비웃다가 곧 다른 가게로 자기들끼리 들어갔다.

남자의 일행도 없어졌겠다 나는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았다. 이런 일을 해 보는 것이 처음인지라 혹시나 남자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연신 욕을 하고 침을 뱉으며 걸어가는 남자를 보니 주변에 신경 쓸 정신은 없는 듯했다.

계속해서 남자를 따라가는 동안 내 머리는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말을 걸어? 단검을 어디에다 두었냐고 물어봐야 하나? 아직 갖고 있으면 돌려 달라고 해? 그런데 순순히 돌려줄까? 그보다 아예 찾을 수 없게 어딘가에 버렸다거나 하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남자가 건물 사이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골목을 따라가면 들킬 것 같아.’

워낙에 좁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기에 나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남자가 골목 안의 어느 문으로 들어가는지를 살폈다. 곧 남자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곳이 어딘지를 확인하던 나는 골목 입구에 문이 닫힌 지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가게의 간판을 보았다.

아르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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