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이를 가지는 것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위험한 일임을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나는 그만큼 많은 것을 당신에게 요구할 생각입니다.
이벨리나의 편지를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일기 같은 것은커녕 공식 문서의 서명 외에는 그 어떠한 기록도 남겨 놓지 않았던 이벨리나였다.
‘차분하네.’
편지는 내가 생각한 것과 무척이나 다른 느낌이었다. 기억 속의 이벨리나는 이해가 가지 않을 행동만을 골라 했다. 언제나 미쳐 있었고 또한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나에게 하는 행동을 보아도 그랬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쓴 편지 역시 무례하고 오만하며 광기에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읽고 있는 편지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읽어 내릴수록 그것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아슬란이 보낸 답장은 없었기에 그가 무어라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벨리나의 편지만으로도 그녀가 어떠한 강요나 압박 없이 그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젠 좀 기억이 나나?”
내가 편지를 다 읽자 초조해하던 아슬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역시 기억나지 않아요. 게다가… 왜 이 편지 어디에도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대가가 적혀 있지 않은 건가요?”
나는 그것이 이상했다. 편지 그 어디에도 이벨리나가 원한 대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둘 중 한 가지이다. 아슬란이 숨겼거나, 아니면 이벨리나가 적지 않았거나.
내 질문에 아슬란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낡아 보이는 석판이었다. 갑자기 왜 그가 이런 것을 내미는 것인지 의아해하던 나는 석판의 아래쪽에 ‘이벨리나’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단지 적혀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건… 뭔가요?”
석판 위에 쓰인 글씨는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글씨 위에 손을 올린 순간,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너와 계약을 하기로 했을 때, 내가 이 석판에 이름을 적기를 요구했지.”
그렇게 말한 아슬란은 내 이름 옆에 적힌 그의 이름 위에 손을 올렸다.
“여기에 서명을 한 이상 계약은 무조건 지켜지게 되어 있어.”
그 말에 나는 다시 석판을 바라보았다. 잘 모르는 내 눈으로 보기에도 이것은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성력도 마력도 아닌, 다른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직감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책 내용 중에 아주 가끔 다른 세계로부터 흘러들어 온 신기한 것들이 있었다. 나중에 이리스가 얻게 되는 물건들로 등장하는 것들은 ‘아티팩트’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에 존재했다. 그 아티팩트들은 각기 다른 특이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 석판은 아마도 그런 물건 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아슬란은 내 이름 위에 그의 이름 위를 가리켰다. 나와 그의 이름 위에는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내 이름 위에 있는 글씨들의 밑 공간에는 점이 두 개가 찍혀 있다는 것뿐.
“무어라 적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그가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말했다.
“‘내 암컷이 되어 후계자를 낳을 것’이라고 적혀 있어. 서명 외의 글자는 이 석판이 제가 만들어졌던 곳의 언어로 마음대로 변형시켜 버리니 읽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아냐고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야.’
아슬란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대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그의 눈에는 여전히 욕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언제든지 다시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그것은 짐승의 욕정이었다.
‘…마수.’
마법을 계속 사용하면 마법사는 마력에 삼켜져 마수가 된다고 했었다. 나는 내 배를 쓸어 만져 보았다. 새벽이 될 때까지 그가 끊임없이 내 아래에 부어 넣었던 뜨거운 정액의 느낌에 다시 몸이 떨렸다. 이종(異種)의 새끼를 밴다는 것, 그것도 인간이 마수의 새끼를 밴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다시 석판을 보며 물었다.
“그럼 내 이름 위에는 뭐라 적혀 있는 건가요?”
그렇게 물은 다음 나는 한숨을 쉬었다.
“물어봤자 의미가 없군요. 당신이 뭐라 말한들 내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 말에 아슬란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날 새도 없이, 그는 내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얹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짐승이 응석을 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도 잊어버린 것 같아서 말해 주지만.”
그는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면서 말했다.
“그대가 내 암컷이 되었으니 나는 그대에게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없어.”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짓말은 못 한다… 라.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있겠군요.”
말을 고르는 틈을 타 내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으려는 아슬란의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 말에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렸다.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다시 물었다.
“…내가 이 계약을 파기할 방법이 있나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법은 있다는 소리였다. 그 방법을 알려 줄 수 있겠냐고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저런 석판까지 준비해서 계약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는 절대로 무를 생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결국 처음 물어보려 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알려 줄 수 있나요?”
“…그대는 나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지. 더 들어줄 수 있다고 했는데도 딱 세 가지만을 원했어.”
그의 대답에 나는 의문이 생겼다. 이벨리나가 상대를 생각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제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아슬란을 부려 먹었을 사람이다. 그런데 딱 세 가지? 세 번째 요구가 끝나면 마치 더 필요 없다는 듯이?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아슬란은 또다시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밀어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내 옷을 끌어 올린 다음 훤히 드러난 다리에 입을 맞췄다. 정확히는 내 허벅지 안쪽에 있던 세 개의 둥근 자국의 위에.
“그대는 가장 먼저 이것을 없애 달라고 했어.”
“……!”
그의 말에 나는 자국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 후로도 이것이 생긴 데에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벨리나가 그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과 관련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뭔가요? 그리고 어떻게 생겨나게 된 거죠?”
그렇게 묻자 아슬란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그것마저도 잊어버린 건가?”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내 허벅지의 깊은 곳을 입술로 쓸었다. 희고 예민한 속살이 자극에 놀라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안쪽에서부터 입술로 다리를 쓸던 그의 입이 다시 자국 위에 멈췄다. 그러고는 조금 힘을 주어 그것을 베어 물었다.
깜짝 놀라 그의 머리를 잡아 밀었지만 아슬란은 마치 바위라도 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자국 위에 마치 불이라도 떨어진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내가 다리를 오므리려는 찰나 아슬란이 만들어 낸 마력이 그 위에 일렁이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도대체 누가 그대의 힘을 빨아먹고 있는 거지?”
“……!”
그 말에 몸이 굳었다. 굳이 아슬란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자국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성력이 사라졌던 거였어?’
그저 너무 오래되어 치유하지 못하는 상처 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을 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성력을 삼키고 있었다.
“당신의 힘을 먹는 게 뭔지는 몰라도 조금 전 내가 보낸 것은 꽤나 아팠을 거야. 일부러 마력 중에서도 더러운 것을 골라 보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슬란의 얼굴에는 난폭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뒈질 정도로 보내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그대의 몸도 견디지를 못할 테니…. 어서 이것을 지울 수 있도록 노력하지. 당신이 아무리 성녀라 하도 이런 것을 계속 지니고 있다면 언젠가 성력은 바닥이 날 거야. 그러면 내 새끼를 배는 것에도 무리가 갈 것이고.”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성력이 바닥이 난다.
문득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이벨리나는 점점 성력을 잃어 갔었다.
‘하지만 그건 이리스 때문이었어.’
진짜 성녀인 이리스가 나타났기에 이벨리나의 성력이 이리스에게로 갔었던 것인데.
‘이런 건… 책에 없었단 말이야.’
아슬란의 말대로라면 이벨리나의 성력이 없어지게 되는 것은 이리스가 아닌 이 자국 때문이다. 누군가 이것으로 힘을 받는다고 하면 혹시 이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책 어디에도 이리스에 대한 묘사 중 그런 말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알고 있던 사실들과 전혀 다른 상황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두 번째 요구 사항은….”
똑똑.
아슬란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려고 할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방 앞을 지키는 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곧 라트반 님께서 성녀님과 약속한 것을 이행하러 오신다고 합니다.”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라트반, 약속, 밤.
‘오늘이었지!’
시델이 나를 공격했던 날, 나는 라트반에게 매달리듯이 졸라 검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었다. 그리고 그 수업의 시작이 오늘이었다!
‘아슬란 때문에 잊고 있었어.’
그가 미친 듯이 나를 탐하는 바람에 하루가 지나 버린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세요!”
급히 외친 나는 재빨리 침대의 옆으로 갔다. 걸을 때마다 아래에 욱신거리는 둔통이 느껴졌다.
‘이래서야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그것도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더 급했다.
‘아슬란의 냄새가 너무 가득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느꼈다. 아슬란이 내 온몸에 뿌리듯이 발라 놓은 정액의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재빨리 다 씻어 내고 침구도 전부 말아서 다른 방에 가져다 두었지만 그 냄새가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법으로 혹시 없앨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아슬란은 왜 제 냄새를 없애야 하나며 으르렁거렸다.
‘어서 빨리 지워야 해.’
그렇게 생각하며 급히 침대 옆에 있는 향로에 불을 붙였다. 그다음 향로의 옆에 놓여 있던 향료를 한 움큼 집어 뿌리자 곧 방 안에는 기분 좋은 향이 퍼졌다. 그리고 재빨리 창문을 더욱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나는 옆으로 다가온 아슬란에게 부탁했다.
“일단 지금은 돌아가 주세요.”
밖에 라트반이 기다린다는 것 말고도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벨리나가 그와 한 거래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다리 안쪽에 새겨진 자국으로 이벨리나의 성력을 빼앗아 가는 이가 누구인지도 알아내야 했다.
그렇게 창가로 아슬란을 떠밀었건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왜 돌아가야 하지? 이제 겨우 그대를 안았어. 그대의 배 속에 내 새끼가 들어설 때까지 나는 쉬지 않고 박을 거야.”
“…….”
놀랍도록 저렴한 아슬란의 단어 선택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는 사이 바깥쪽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라트반의 걸음 소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며 입 안이 바싹 말라 왔다.
아슬란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다물렸다. 그는 내가 다른 자들을 신경 쓰며 그를 내보내려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라트반입니다!”
라트반답지 않은 다급하고 큰 목소리였다. 그가 이곳에 다다르면 다시 신관이 와서 말을 전하리라 생각한 나는 라트반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그래서 더욱 힘을 주어 아슬란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돌아가….”
“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그의 모습에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곧 문이 열리고 라트반과 신관들이 들어오면 나는 아슬란을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평범한 남자였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벨리나인 내가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침실에 다시 남자를 끌어들였다 말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아슬란은 아니야.’
누가 봐도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 것이다. 마법사라는 것도 아주 쉽게 알아차릴 것이고 아슬란 스스로가 자신이 누군지를 말해 버릴 것 같기도 했다.
‘그건 곤란해!’
성녀가 대신전에 마력을 쓰는 마법사를 들였다는 게 알려지면 이건 골치 아픈 수준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거기에 새끼니 뭐니 그런 소리까지 하면….’
그때부터는 내가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게 된다.
‘아슬란을 어떻게 돌려보내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나는 조금 전 아슬란이 내 무릎에 제 머리를 얹고 애교를 부리듯 비벼 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나를 제 암컷이라 불러 대었던 것도.
‘일단 이 위기를 넘기려면 어서 그를 달래서 돌려보내야 해.’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그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높이 있는 그의 목을 감았다. 그런 내 행동에 아슬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동요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나는 있는 힘껏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슬란.”
그러자 그는 홀린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슬란은 제 손을 들어 내 손을 덮었다. 그러고는 더 해 달라는 듯 제 얼굴을 비벼 대었다.
“아슬란, 난 성녀예요. 대신전의 사람들에게 곤란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요. 당신의 목적을 무탈하게 이루고 싶다면 내가 좀 더 편하게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한 나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해 줘요. 알겠나요…?”
그리고 회심의 말을 덧붙였다.
“…내 수컷.”
내 입에서 그 단어가 흘러나온 순간 아슬란의 숨이 멈춘 것이 보였다. 크게 뜨였던 그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지며 부드럽게 휘었다. 그 눈매에 담긴 달콤함에 놀란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아슬란의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무슨 일인가 생각할 틈도 없이 나를 제 품에 끌어안은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박았다.
곧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깨물었던 목 위를 눌러 핥는 뜨거운 혀의 느낌도.
“흐읏!”
하루 사이에 그에게 익숙해진 몸이 멋대로 신음 소리를 뱉었다. 그 소리를 황홀하다는 듯한 얼굴로 듣던 아슬란이 곧바로 창틀을 밟고 올라섰다.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 그동안 나를 받을 준비를 더 하고 있기를 바라.”
아슬란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진 순간, 문이 열렸다.
***
“두 분께 심려를 끼쳐 미안하군요.”
“…….”
“…….”
필사적으로 웃으면서 말을 건넸는데도 라트반과 레온의 표정은 한겨울의 들판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역시… 알아차린 거겠지?’
억지로 웃음을 짓느라 얼굴이 욱신거릴 정도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던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식은땀이 흘렀다.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얼마 전, 그와 보냈던 밤이 생각났다.
‘아슬란하고 비교해 보면 확실히 부드럽고 잘 대해 줬….’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비교하고 있었던 거지?
순간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멋대로 이용한 사람을 마음속에서 비교까지 하고 있다니.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레온 황태자를 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그 말에 황태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내 중얼거림을 듣고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워 보였다. 잠시 후, 겨우 평정을 찾은 얼굴이 된 황태자는 옆에 있던 라트반을 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라트반 경과 선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약속하지 않고 이렇게 불쑥 찾아온 제가 물러나는 것이 맞겠지요.”
생각보다 쉽게 나온 물러나겠다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황태자는 그다지 좋지 못한 기분일 것이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슬란이 자국을 남기고 간 목덜미를 다시 손으로 쓸었다.
아슬란은 문밖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남자인 것을 알고 일부러 이것을 보란 듯이 남긴 게 분명했다. 황태자를 바라보자 역시나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경멸하겠지.’
관계를 맺고 난 후에 그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매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꽃 같은 간단한 선물을 보내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황태자에게 나는 아무런 거부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사과하고 그를 멀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황태자와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연결된 끈을 남겨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 언젠가 닥쳐올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끝났네.’
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한 것을 알고서도 황태자가 나에게 계속해서 접근할 것 같진 않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필이면 최악의 방법으로 관계가 끊길 줄이야….’
이제 황태자는 대신전을 떠날 테고 1년 후, 이리스가 나타나면 그녀에게 갈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게 책의 내용대로 다시 흘러가는구나,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태자가 허리를 숙였다.
“대신에 성녀님께서 편하신 날에 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네? 대화?”
그가 경멸의 말 한마디를 던지고 곧바로 방을 나설 거라 생각했던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꼭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난히 약속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습게도, 황태자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 기뻤다. 레온이 나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기쁠 수 있다니.
황태자는 그런 나를 보더니 어느새, 평소와 같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럼 성녀님의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후 빠르게 방을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문을 보면서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아닌데….’
황태자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책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그가 나와 잔 사실을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마치 그와 나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무척이나 싫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내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그가 무엇이 괜찮냐고 묻는 건지를 깨닫고 나는 슬쩍 목을 가렸다. 황태자도 황태자였지만 라트반 역시 이상했다. 그 역시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무척이나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 중에 혐오와 경멸은 없었다.
‘…차라리 욕을 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하겠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두 사람의 반응에 나는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
다행히 라트반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검술은 배우고 싶다고 바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호신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오늘은 기본적인 것들만 설명해 드릴 생각입니다.”
내 처소 안쪽의 넓은 방으로 간 다음, 그는 자신이 들고 온 길쭉한 것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천으로 감싼 형태를 보자마자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다. 역시나 천을 풀자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목검이 있었다.
“목검이군요.”
검술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진검을 가져올 거라 기대했었던 탓일까. 내 입에서는 나도 알아차릴 정도로 실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검은 아직 무리십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후 제 허리춤에 있던 검을 풀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한 손으로 들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들고 있던 목검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고 그거 건네는 것을 받았다. 척 보기에도 크고 무거워 보이는 검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내가 검을 붙잡는 것을 확인한 그가 손을 떼었다.
“읏!”
그 순간 검을 든 내 몸이 휘청였다. 철의 무게에 한쪽 어깨가 내려앉자 검집 안에 있던 검이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빠져나오려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는 순간 라트반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두 손으로 들어도 휘청이는 무게의 검을 그는 너무도 가볍게 한 손으로 붙잡더니 곧바로 다시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곧바로 라트반이 다시 검을 잡아 올렸기에 망정이지 만약 내가 저것을 붙잡는다고 어설프게 손을 뻗었다가는 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무거워하실 줄 몰랐습니다.”
라트반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얼굴이 그 역시 꽤나 놀랐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무겁군요. 이런 걸 어떻게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거죠?”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새삼 라트반의 체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신전기사단의 예복이 미처 숨기지 못하는 넓은 어깨와 두꺼운 팔뚝, 꽉 짜인 근육도. 누가 보아도 극도로 수련하며 만들어진 몸이다. 저 정도의 몸이니 이렇게 무거운 검을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있겠지.
‘라트반이 아니더라도 신전기사단원들 대부분 저 정도의 검을 갖고 있었는데….’
새삼 내가 검을 배우려 했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다시 깨달았다. ‘할 수 있다, 그러니 무조건 가르쳐 달라’ 같은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던 것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이 정도 무게가 아니면 마수를 상대하기 힘듭니다. 가벼운 검들은 대부분 마수의 비늘이나 두꺼운 가죽을 베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가끔 세검을 써서 찌를 요량으로 공격을 하는 기사들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보조의 검으로 사용할 뿐, 주로 사용하는 검은 이 정도의 무게를 가진 대검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야 마수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지요. 또한 공격뿐만이 아니라 넓은 검신은 방어구로서의 역할도 함께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검을 만드는 철의 종류 또한 다양합니다. 무게가 있어야 위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좀 더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 위력을 포기하는 대신, 더 빠르게 휘둘러 단시간에 더 많은 상처를 내는 것을 선택하는 기사들도 있습니다. 그런 검들은 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어지지요.”
갑자기 라트반은 검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옆으로 다가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것?”
“철에 다른 광물을 섞거나 아주 예외적으로… 마수의 사체를 이용할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년 전, 신전기사단이 잡았던 마수 에시오스는 무척이나 단단한 뼈를 가진 마수였습니다. 그때, 그 뼈를 가져와 만든 단검은 대부분의 신전기사들이 하나씩은 지니고 있습니다. 워낙 단단한 탓에 연마가 힘들긴 하지만 에시오스의 뼈로 만들어진 검은 가볍고 날카로우며 날이 거의 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몸집이 작고 지능이 낮은 마수들은 기사들이 그것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동족이라 인식할 때가 있어서 도움이 되는 일도 많지요.”
처음 듣는 이쪽 세계의 지식에 나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신전기사단의 주 임무가 마수를 상대하는 것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이벨리나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기사단은 아직 출정을 나선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것을 상대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라트반의 말을 듣자 처음으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의 기능도 있다면 검이 무척이나 중요하겠군요. 모두가 소중히 들고 다니겠어요.”
“물론입니다.”
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진지함과 동시에 다정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저 차가운 날붙이가 아닌 전장을 함께한 전우를 바라보는 눈빛이기도 했다.
“꼭 그런 기능이 아니더라도 검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습니다. 생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기 때문이지요. 기사들은 언제나 아침저녁으로 날을 확인하며 스스로 손질하는 것은 물론이며 절대로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도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소중할 줄은 몰랐어요.”
라트반의 말을 듣던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잡아 보라며 쥐여 주기까지 했는데 바닥에 떨어트릴 뻔하다니.
“…….”
“…라트반 경?”
내 말에 라트반이 살짝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맙소사.’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는 듯 바라보는 성녀의 얼굴에 라트반은 조금 전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는 제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보았다. 그가 기사단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받게 되었던 검이다. 명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검은 무척이나 예리하고 단단했다. 처음 받은 날 이후로 그와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검. 라트반 역시 다른 기사들처럼 이 검을 목숨처럼 대했다. 그렇기에 그 누구에게도 이것을 쥐어 보라 준 적이 없었는데.
‘…넘겨주었어?’
조금 전 그는 성녀에게 너무도 쉽게 자신의 검을 넘겼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목검임을 알고 조금 아쉬워하는 듯한 성녀의 얼굴에 어쩐지 가슴이 철렁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라트반은 필사적으로 제가 그녀에게 검을 넘겨주었을 만한 다른 이유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성녀가 실망하는 것을 보기 싫었다는 이유만으로?’
만약 다른 기사가 누군가에게 그런 이유로 검을 넘겨주었다면 한심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라트반은 조금 전과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겠다는 듯이 서둘러 손에 들려 있던 검을 다시 허리춤에 찼다.
그가 충격으로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있었던 사이 성녀는 어느새 그의 곁에서 멀어졌다. 같은 방 안에서, 그저 몇 발자국 떨어졌을 뿐인데도 라트반은 그 거리가 무척이나 먼 것 같다고 느꼈다.
순간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멋대로 이용한 사람을 마음속에서 비교까지 하고 있다니.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레온 황태자를 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그 말에 황태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내 중얼거림을 듣고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워 보였다. 잠시 후, 겨우 평정을 찾은 얼굴이 된 황태자는 옆에 있던 라트반을 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라트반 경과 선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약속하지 않고 이렇게 불쑥 찾아온 제가 물러나는 것이 맞겠지요.”
생각보다 쉽게 나온 물러나겠다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황태자는 그다지 좋지 못한 기분일 것이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슬란이 자국을 남기고 간 목덜미를 다시 손으로 쓸었다.
아슬란은 문밖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남자인 것을 알고 일부러 이것을 보란 듯이 남긴 게 분명했다. 황태자를 바라보자 역시나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경멸하겠지.’
관계를 맺고 난 후에 그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매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꽃 같은 간단한 선물을 보내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황태자에게 나는 아무런 거부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사과하고 그를 멀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황태자와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연결된 끈을 남겨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 언젠가 닥쳐올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끝났네.’
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한 것을 알고서도 황태자가 나에게 계속해서 접근할 것 같진 않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필이면 최악의 방법으로 관계가 끊길 줄이야….’
이제 황태자는 대신전을 떠날 테고 1년 후, 이리스가 나타나면 그녀에게 갈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게 책의 내용대로 다시 흘러가는구나,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태자가 허리를 숙였다.
“대신에 성녀님께서 편하신 날에 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네? 대화?”
그가 경멸의 말 한마디를 던지고 곧바로 방을 나설 거라 생각했던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꼭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난히 약속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습게도, 황태자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 기뻤다. 레온이 나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기쁠 수 있다니.
황태자는 그런 나를 보더니 어느새, 평소와 같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럼 성녀님의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후 빠르게 방을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문을 보면서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아닌데….’
황태자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책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그가 나와 잔 사실을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마치 그와 나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무척이나 싫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내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그가 무엇이 괜찮냐고 묻는 건지를 깨닫고 나는 슬쩍 목을 가렸다. 황태자도 황태자였지만 라트반 역시 이상했다. 그 역시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무척이나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 중에 혐오와 경멸은 없었다.
‘…차라리 욕을 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하겠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두 사람의 반응에 나는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
다행히 라트반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검술은 배우고 싶다고 바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호신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오늘은 기본적인 것들만 설명해 드릴 생각입니다.”
내 처소 안쪽의 넓은 방으로 간 다음, 그는 자신이 들고 온 길쭉한 것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천으로 감싼 형태를 보자마자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다. 역시나 천을 풀자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목검이 있었다.
“목검이군요.”
검술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진검을 가져올 거라 기대했었던 탓일까. 내 입에서는 나도 알아차릴 정도로 실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검은 아직 무리십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후 제 허리춤에 있던 검을 풀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한 손으로 들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들고 있던 목검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고 그거 건네는 것을 받았다. 척 보기에도 크고 무거워 보이는 검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내가 검을 붙잡는 것을 확인한 그가 손을 떼었다.
“읏!”
그 순간 검을 든 내 몸이 휘청였다. 철의 무게에 한쪽 어깨가 내려앉자 검집 안에 있던 검이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빠져나오려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는 순간 라트반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두 손으로 들어도 휘청이는 무게의 검을 그는 너무도 가볍게 한 손으로 붙잡더니 곧바로 다시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곧바로 라트반이 다시 검을 잡아 올렸기에 망정이지 만약 내가 저것을 붙잡는다고 어설프게 손을 뻗었다가는 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무거워하실 줄 몰랐습니다.”
라트반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얼굴이 그 역시 꽤나 놀랐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무겁군요. 이런 걸 어떻게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거죠?”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새삼 라트반의 체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신전기사단의 예복이 미처 숨기지 못하는 넓은 어깨와 두꺼운 팔뚝, 꽉 짜인 근육도. 누가 보아도 극도로 수련하며 만들어진 몸이다. 저 정도의 몸이니 이렇게 무거운 검을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있겠지.
‘라트반이 아니더라도 신전기사단원들 대부분 저 정도의 검을 갖고 있었는데….’
새삼 내가 검을 배우려 했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다시 깨달았다. ‘할 수 있다, 그러니 무조건 가르쳐 달라’ 같은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던 것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이 정도 무게가 아니면 마수를 상대하기 힘듭니다. 가벼운 검들은 대부분 마수의 비늘이나 두꺼운 가죽을 베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가끔 세검을 써서 찌를 요량으로 공격을 하는 기사들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보조의 검으로 사용할 뿐, 주로 사용하는 검은 이 정도의 무게를 가진 대검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야 마수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지요. 또한 공격뿐만이 아니라 넓은 검신은 방어구로서의 역할도 함께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검을 만드는 철의 종류 또한 다양합니다. 무게가 있어야 위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좀 더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 위력을 포기하는 대신, 더 빠르게 휘둘러 단시간에 더 많은 상처를 내는 것을 선택하는 기사들도 있습니다. 그런 검들은 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어지지요.”
갑자기 라트반은 검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옆으로 다가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것?”
“철에 다른 광물을 섞거나 아주 예외적으로… 마수의 사체를 이용할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년 전, 신전기사단이 잡았던 마수 에시오스는 무척이나 단단한 뼈를 가진 마수였습니다. 그때, 그 뼈를 가져와 만든 단검은 대부분의 신전기사들이 하나씩은 지니고 있습니다. 워낙 단단한 탓에 연마가 힘들긴 하지만 에시오스의 뼈로 만들어진 검은 가볍고 날카로우며 날이 거의 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몸집이 작고 지능이 낮은 마수들은 기사들이 그것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동족이라 인식할 때가 있어서 도움이 되는 일도 많지요.”
처음 듣는 이쪽 세계의 지식에 나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신전기사단의 주 임무가 마수를 상대하는 것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이벨리나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기사단은 아직 출정을 나선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것을 상대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라트반의 말을 듣자 처음으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의 기능도 있다면 검이 무척이나 중요하겠군요. 모두가 소중히 들고 다니겠어요.”
“물론입니다.”
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진지함과 동시에 다정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저 차가운 날붙이가 아닌 전장을 함께한 전우를 바라보는 눈빛이기도 했다.
“꼭 그런 기능이 아니더라도 검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습니다. 생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기 때문이지요. 기사들은 언제나 아침저녁으로 날을 확인하며 스스로 손질하는 것은 물론이며 절대로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도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소중할 줄은 몰랐어요.”
라트반의 말을 듣던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잡아 보라며 쥐여 주기까지 했는데 바닥에 떨어트릴 뻔하다니.
“…….”
“…라트반 경?”
내 말에 라트반이 살짝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맙소사.’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는 듯 바라보는 성녀의 얼굴에 라트반은 조금 전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는 제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보았다. 그가 기사단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받게 되었던 검이다. 명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검은 무척이나 예리하고 단단했다. 처음 받은 날 이후로 그와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검. 라트반 역시 다른 기사들처럼 이 검을 목숨처럼 대했다. 그렇기에 그 누구에게도 이것을 쥐어 보라 준 적이 없었는데.
‘…넘겨주었어?’
조금 전 그는 성녀에게 너무도 쉽게 자신의 검을 넘겼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목검임을 알고 조금 아쉬워하는 듯한 성녀의 얼굴에 어쩐지 가슴이 철렁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라트반은 필사적으로 제가 그녀에게 검을 넘겨주었을 만한 다른 이유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성녀가 실망하는 것을 보기 싫었다는 이유만으로?’
만약 다른 기사가 누군가에게 그런 이유로 검을 넘겨주었다면 한심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라트반은 조금 전과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겠다는 듯이 서둘러 손에 들려 있던 검을 다시 허리춤에 찼다.
그가 충격으로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있었던 사이 성녀는 어느새 그의 곁에서 멀어졌다. 같은 방 안에서, 그저 몇 발자국 떨어졌을 뿐인데도 라트반은 그 거리가 무척이나 먼 것 같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