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48)

이것을 없애 달라는 것을 보면 이 자국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성녀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는 손끝에 제 마력을 모았다. 성력과는 전혀 다른, 위험하고 두려운 느낌을 주는 붉은색의 빛이 빠르게 타올랐다.

그는 그것을 둥근 자국 위에 올렸다. 그러자 성녀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몸 위를 맴돌던 그의 마력이 자국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아슬란은 혀를 차며 그 자국을 눌렀다. 죽은 듯이 기절해 있던 성녀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를 내었다.

“젠장.”

제 마력이 닿은 탓임에 틀림없었다. 역시 성녀는 그의 마력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아슬란의 얼굴에 처음으로 초조한 빛이 서렸다. 그는 성녀를 다시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왜 울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그의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녀가 인간치고는 아무리 특별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버티기 힘든 고통과 쾌락이 수반되는 일이다.

아슬란은 안절부절못하며 성녀를 살폈다.

그의 암컷.

한번 관계를 맺고, 그의 씨를 품은 암컷이란 이제 그에게는 목숨과도 같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번 한 번으로 새끼를 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제부터 끊임없이 그녀를 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길 때까지 하면 된다.

‘하지만 이래서야….’

생길 때까지 하기는커녕 다음이 가능한지 걱정될 상황이다.

‘…인간은 너무 약해.’

그렇게 생각하며 아슬란은 멀리 떨어져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인간 남자가 있었다. 수백 년을 보아 온 제 모습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스스로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던 아슬란의 입에서 그르르 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에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것은 오직 마수만이 갖고 있는 기운이었다.

그는 성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제 품 안에 있는 성녀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가 맴돌았다. 그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아슬란은 다음번에는 이곳에 제 것을 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 냄새를 머금은 암컷이라니,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아슬란은 신음 소리를 내며 성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 참기 힘들다. 오늘 처음으로 직접 만났건만 그는 이미 성녀의 짐승이 되어 있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를 거부하는 것만 빼고.

제 눈앞에서 탐스럽게 흔들리는 가슴을 핥아 올리며 아슬란은 성녀와 한 거래를 떠올렸다.

‘제일 먼저 자국을 없애야 하고.’

성녀는 이것이 어떻게,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지워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꽤 복잡하겠는걸.’

직접 보고 나니 왜 성녀가 저에게 이것을 대가로 부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척이나 복잡하게 얽힌 사술이었으며 또한 강력했다. 보호나 정화하는 힘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어 다시는 자라지 못하게 태워 버리는 파괴적인 힘만이 이것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이라면 마수인 그에게 넘쳐 흐르고 있다.

‘문제라면…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

성녀의 몸이 상하지 않게 이것을 지우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이것이 힘을 잡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성녀의 몸 위에서 그녀의 성력을 실컷 빨아 먹고 있으니 얌전히 있겠지만, 그녀의 힘이 사라지고 저를 뽑아내려는 것을 알면 분명히 이것은 성녀의 생명 자체를 노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설계되었고.’

죽기 전에는 지울 수 없게 만들어진 것이다. 아슬란의 입술 사이로 분노에 찬 낮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성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 쪽으로 눌렀다. 아직도 잔뜩 성이 나 있는 것이 부드러운 피부 위에 비벼졌다. 울컥거리며 나온 액이 그녀의 배 위에 그가 지난 흔적을 남겼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의 접힌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무엇이 그녀를 누르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아슬란은 입술로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제 암컷은 위에서 흘리는 것도, 아래에서 흘리는 것도 황홀할 정도로 달콤했다. 평생 이것만을 마시며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할 만큼.

남김없이 그녀가 흘리는 것을 받아 마신 아슬란은 두 번째 대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것은 이 자국을 지우는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대신전을 모조리 파괴시켜 달라고 했었지.”

그것이 성녀가 그에게 바란 두 번째 대가였다.

***

“아….”

정신이 들자 내 입에서 잔뜩 갈라진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 물….”

뜨거운 몸이 느껴짐과 동시에 목이 타는 듯했다. 팔을 뻗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일어나기는커녕 힘을 주는 것조차 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나를 안아 올렸다. 곧 입술에 말랑한 것이 닿나 싶었더니 차가운 물이 버석하게 마른 입 안을 적셨다.

그 청량함에 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려 그것을 받아 마셨다. 꿀꺽거리는 큰 소리와 함께 마신 물의 시원함이 몸속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얼굴에 닿은 것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저 핥을 때였다.

“이제야 눈을 떴군.”

“……!”

나른하게 늘어진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 낯선 목소리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흐렸던 주변이 점차 초점을 찾아 가고 나는 그제야 나에게 말을 건 이가 누군지, 내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아슬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그는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겨우 머리에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뒤늦은 수치심이 몰려왔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뒤틀던 나는 곧 아래에서 퍼지는 격한 둔통에 움직임을 멈췄다.

“읏….”

거대한 몽둥이가 내 아래를 두들긴 기분이다. 아니,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다. 아래가 완전히 망가진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덜덜 떨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

이렇게나 아픈데 놀랍게도 내 아래는 멀쩡했다. 믿을 수가 없어 손을 뻗어 아래를 더듬자 내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듯한 아슬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끝이 허벅지 사이에 말라붙은 정액에 닿은 순간 신음 소리가 나왔다.

“흑….”

참을 사이도 없이 울음이 터졌다. 아래를 파고 들어오던 느낌과 공기를 짓누르던 아슬란의 기운이 다시 내 숨을 막히게 했다.

“…성녀?”

당황한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어쩐지 더 서러워졌다.

“흐윽… 흑….”

눈물과 울음이 동시에 쏟아졌다. 그렇게 아슬란을 앞에 둔 채, 나는 한참이나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

“왜 그렇게….”

그가 입을 연 순간 나는 내 옷자락을 단단히 여미며 침대 끝에서 몸을 웅크렸다. 아슬란은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어쩐지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충격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나는 입술을 물었다. 화가 치밀었다. 정말로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서 저러는 것인가? 선뜻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벨리나와 거래를 했다고 했어.’

도대체 무슨 거래를 했는지 알아야 했다.

‘어떻게?’

기억을 잃은 척을 할까? 당장에 떠오른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상황도 아니다. 내가 이벨리나의 몸에 들어가면서 나는 그녀가 남긴 기억만 볼 수 있다. 아슬란과의 거래는 그녀가 남기지 않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분명 이벨리나는 아슬란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 그녀가 웃으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짐승의 새끼를 밸 거야.”

어제 나를 암컷이라고 부르던 그의 행동을 생각하면 분명 이 모든 것은 사전에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이기고 있을 때, 나를 살피던 아슬란이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몸이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던데. 차를 제대로 마시고 있긴 한 건가?”

“차…?”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도회 둘째 날 일정을 준비하다가 쓰러졌던 날, 내가 마시고 있던, 이벨리나가 직접 골랐다고 했었던 그 차. 아슬란은 분명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던 거였구나.’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향이 취향이라고 한들 이벨리나가 굳이 특정 차를 지목해 올리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아슬란을 보면서 물었다.

“그 차가 도대체 뭘 위한 건가요?”

“…뭐?”

되묻는 그를 보며 나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기억을 잃었다. 그러니 당신과 내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오고 간 거래가 무엇인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라면 내 질문에 그가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것인가였다.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 수 없어.’

만약 그가 내 질문에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대답한다면? 나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아슬란을 살펴보았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다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가 거짓을 말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와 거리를 조금 벌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당신과 무슨 사이였는지, 무슨 거래를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뭐?”

대번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기사단은 아침부터 우렁찬 함성으로 가득했다.

모두가 이를 악문 채, 구호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아침마다 있는 기사단의 훈련이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모두가 바짝 기합이 들어간 상태였다.

연무장을 뛰는 그들의 시선이 아주 잠시 대열의 빈자리를 향했다가 곧 앞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의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갑자기 기사단에서 시델이 사라졌다.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다. 기사단복과 검을 놔두고 사라진 것이다. 그 사실에 놀란 기사들이 라트반에게 달려가자 그는 시델의 기사단복과 검을 받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그 이름은 기사단에 없다.”

그리고 정말로 다음 날부터 기사단의 모든 기록에 시델의 이름이 사라졌다. 그 사실에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델이 기사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어쩌다가 시델이 기사 자격을 박탈당한 것인지도 궁금했지만 기사들이 정말 궁금해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

이런 일이 있으면 그렇지 않아도 내내 무표정한 라트반의 얼굴이 더더욱 냉기를 풀풀 풍기며 굳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라트반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가 있나.’

아무래도 라트반이 극도로 화가 나면 오히려 인상이 부드러워지는 것인가, 고민하던 기사단원들은 곧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라트반이 연무장의 구석에 쌓여 있는 연습용 목검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기사단에서는 아무도 쓰지 않는, 아주 가끔 점심 내기를 할 때나 들고나오는 가장 단순한 목검이다.

그런데 지금 라트반은 그것을 아주 꼼꼼하게 살피며 골랐다. 그러더니 곧 그중에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는 것을 들고는 기사단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모두가 의문을 가졌다. 라트반은 연습용 목검을 잡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목검은 누구를 위한 건데?’

그것이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라트반은 몇 번이나 보고 또 본 책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누군가 지금 그의 곁에 있었다면 그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라트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그가 볼 일이 전혀 없는 책이었다.

초급 검술 교본

그것은 라트반이 쓴다면 모를까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 혼자서 거대 마수도 상대하는 대륙 최고의 기사가 이제 와서 검술 교본을 볼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그 자체가 검술 교본이다. 신전 기사단의 신입들은 모두 라트반의 동작을 따라 배운다.

그는 교본을 읽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책을 만지던 라트반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해는 슬슬 붉은 빛을 내며 대신전 저 멀리 있는 산맥의 너머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완전히 지려면 아마도 몇십 분은 더 걸릴 것이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나?’

그의 손가락이 이제는 초조히 책상 위를 두드렸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그의 집무실 여기저기에 머물다 곧 책상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천에 감싼 목검이 놓여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건만 라트반은 다시 목검을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천을 풀어 안에 있는 목검을 확인했다.

제일 가벼운 것으로 골랐다. 그러면서도 무게의 균형이 잘 맞는 것, 손때가 덜 탄 것 등등. 무척이나 까다롭게 고른 목검이다.

그는 목검을 손에 들고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부웅! 하며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기사들은 있는 힘껏 휘둘러야 겨우 시늉이나 낼 것이다.

그렇게 몇 번 휘두르며 자세를 잡던 그는 곧 목검을 내려놓았다.

‘이건 역시 무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라트반은 제가 무척이나 들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신전 기사단에 들어온 이래 무언가를 이토록 기다린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해가 산의 끝에 닿고 하늘이 주황색과 보라색으로 물들자 라트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단 밖으로 나와 성녀의 처소로 향하는 길에 많은 신관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건만 라트반은 평소와는 다르게 재빨리 고개만 살짝 숙이고 매우 급한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성녀의 처소로 향하며 라트반은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검을 가르쳐 달라고.’

시델과 일이 일어났던 날 성녀는 그에게 부탁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며 안 된다고 하려 했지만 성녀의 목에는 시델이 목을 졸랐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 위험을 겪었는데 성녀는 덤덤하게 대처했다. 그러더니 그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 말했다.

무리라고 간곡히 말하자 성녀가 말했었다.

“검을 배워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게 아닙니다, 간단한 호신술이라도 배우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 말에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하지만 성녀를 처소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라트반은 이상함을 느꼈다.

‘성력을 쓰면 되었을 터인데.’

성력 그 자체인 성녀이다. 그 성력으로 보호 결계를 만들면 성녀는 대부분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시델에게 당하고 있었던 거지?’

대신전 안이니 누군가 공격을 할 거라 생각하지 못해 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처음 한 번뿐만이다. 그녀가 보호 결계를 사용했으면 그가 올 때까지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 않았을 터인데, 성녀는 그때까지 보호 결계를 치지 않았다. 게다가 또 그럴 상황을 대비해 호신술이라니.

‘누가 보면 성력을 쓰지 못하는 줄 알겠어.’

성녀는 중얼거리듯 ‘성력을 쓰지 못할 상황’이라는 말을 했다. 마치 그녀의 성력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럴 일도 없고. 그러니 검을 가르쳐 달라는 것은 성녀가 일부러 핑계를 대어 그에게 부탁하는 일이 틀림없다.

‘어째서?’

라트반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궁금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시델은 성녀에게 위해를 가했다. 그 일을 대신전 내에서 그 어떤 이유를 든다 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하는 중죄였다. 그렇기에 그 즉시 그는 기사단복을 벗고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마수들보다 더 깊은 층에 갇힌 시델은 정해진 날까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알려진다면 기사단 전체가 심한 문책을 면하지 못하는 큰일이었음에도 성녀는 그것을 덮었다. 예전이라면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며 곧바로 대신전의 모두를 호출해 신전 기사단을 완전히 해체했을 그녀가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성녀가 처음 쓰러졌던 날 이후로 태도가 바뀐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제야 성녀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좋아했지만 라트반은 다른 생각이었다. 그가 모욕을 당하던 날, 자신을 바라보던 성녀의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쓰러졌다 깨어난 성녀의 눈 그 어디에도 그 깊은 감정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라트반은 깨어난 성녀가 낯설었다.

이제는 더 이상 성녀를 보아도 예전처럼 경멸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그는 성녀의 처소에 도착해 있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위로 올라가려고 할 때, 그는 반갑지 않은 사람을 보았다.

“이런, 라트반 단장. 이상하게 우리는 여기서 자주 만나는군요?”

레온 황태자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라트반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이 남자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감히 대신전의 성녀를 두고 마치 제 애인이라도 되듯 굴고 있는 남자이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라트반은 레온에게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물었다. 누가 들어도 불청객이 왜 여기에 있느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라트반은 계속해서 레온이 거슬렸다. 예전부터 대신전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성녀를 노릴 줄이야. 최근에는 은밀히 여러 신관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신관의 자리가 빈 신전이니 황태자가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일 거슬리는 이유가 그것이 아님을 라트반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라트반을 제일 짜증 나게 하는 사실은 성녀와 몸을 섞은 후로 황태자가 더욱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가 특별한 것처럼 구는군.’

할 수만 있다면 황태자에게 너는 성녀가 안은 널리고 널린 남자 중 하나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 헛물 켜지 말고 어서 제국으로 꺼지라고도.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입술을 씹었다. 성녀가 안았던 옛 남자들을 생각한 순간 본능적인 불쾌감이 몰려왔던 탓이었다. 라트반은 그런 제 감정이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들에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굳이 가진 감정이라면 대신전 안에서는 좀 더 정숙하기를 바란다는 것 정도.

하지만 지금은 지하 감옥에 카루스와 함께 갇힌 남자들에게 그는 깊은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황태자를 향했다.

‘성녀와 관계를 해서?’

그 남자들과 황태자의 공통점이라면 그것인데. 왜 그 사실에 제가 이런 불쾌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라트반이 노려보고 있을 때, 황태자는 마치 제가 이 건물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앞서 걸어가며 라트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건가? 올라가도록 하지.”

여전한 하대의 말에 라트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라트반은 그런 황태자를 지나쳐 앞서 걸어 나갔다.

곧 두 사람은 성녀의 방에 도착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신관들이 조금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라트반이 먼저 말했다.

“성녀님께 약속한 것을 이행하러 왔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모르게 약속이라는 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그 단어에 황태자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라트반은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제 입꼬리를 느끼며 황급히 표정을 다잡았다.

‘왜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요즘 큰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탓에 정신이 해이해진 모양이었다. 라트반은 깊게 숨을 쉬었다. 신전 기사단이라면 제 사적인 감정 따위는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아니, 아예 느끼지 않는 것이 더욱 좋다.

신관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라트반과 레온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곧 신관이 돌아오더니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머뭇거리며 입을 여는 신관의 모습에 라트반과 레온이 동시에 말했다.

“어디 편찮으신가?”

“어디 편찮으신가?”

그렇게 같은 말을 내뱉은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그렇게 미묘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신관이 마저 말했다.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신관의 말에 다시 입을 연 것은 레온이었다.

“아니라고 하셨다… 라는 것은 그대가 직접 성녀님의 안위를 확인한 것이 아니란 소리군.”

레온의 말에 신관은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오늘은 하루 종일 나오지 않고 계셨던지라…. 그래도 식사는 전부 드셨습니다!”

혹시나 제가 문책을 당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지 신관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라트반은 그 말에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신관의 뒤에 있던 문을 열었다.

“라트반 님!”

그런 그의 행동에 신관이 놀라 외쳤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해서 곧바로 성녀의 방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두 개의 문을 더 거쳐야 닿을 수 있는 곳이 성녀의 방이었다. 라트반은 다시 하나의 문을 열었다. 안쪽에도 다른 문이 보였다. 저 너머부터는 성녀의 방이다.

라트반은 그 앞에 섰다. 신전 기사단장에게는 이곳까지는 허락이 되었으니까. 문을 두드리려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레온이 왜 그러냐는 듯한 얼굴로 라트반에게 말했다.

“뭘 하고 있지? 어서 성녀님의 안전을 확인하지 않고.”

문제라면 뒤따라 들어온 레온 황태자였다. 라트반이 두드리면 위급 상황에 대한 정당한 조치지만 레온이 두드리면 침입이다. 그런 신전의 규율을 그사이에 배우고 왔는지 황태자는 뒤쪽의 문이 있는 곳에서 더 넘어오지 않은 채 라트반을 재촉했다.

뭐라고 말하려던 라트반은 혀를 짧게 차고는 문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좋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안에 뭔가가 있어.’

성녀의 방에서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라트반은 제가 마수와 사투를 벌였을 때를 떠올렸다.

레온도 그것을 느낀 모양인지 방의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트반은 서둘러 문을 두드렸다.

“성녀님, 라트반입니다!”

조용히 부를 생각이었는데 입은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라트반이나 레온이나 성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하읏!”

문의 너머에서 짧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이 아닌 교성에 가까운 신음 소리. 그것은 분명 성녀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라트반과 레온은 제가 지금 들은 것이 사실인지 확인이라도 해 달라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다음 순간 둘은 동시에 문을 걷어찼다.

콰직!

나무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문은 부서지듯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성녀를 찾았다. 사실, 찾을 것도 없었다. 그들의 앞에 곧바로 보였으니까.

“하….”

성녀의 모습을 확인한 두 사람의 입에서 짧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선 성녀는 무사했다. 활짝 열린 창문 옆에서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녀가 혼자 있다는 사실에 다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소리는 뭐지?’

그렇게 생각하며 라트반이 성녀를 향해 한 걸음 내딛으려는 순간, 그는 이상함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에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향의 가느다란 연기가 보였다. 그렇기에 성녀의 방 안에는 시원하고 맑은 향기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레온은 다른 향을 맡을 수 있었다.

향기에 눌려 있는 텁텁하고 비릿한 냄새가 그의 코끝에 닿았다. 레온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 어떤 냄새인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곧 레온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것은 짙은 정사의 냄새였다. 한두 번이 아니다. 상대를 밤새 내내 탐하고 또 탐하며 미친 듯이 제 것을 흘렸을 때 나는 그런 진득한 냄새였다.

레온은 다시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아직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듯한 젖은 머리카락. 라트반과 그를 바라보는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목덜미를 가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자국.

레온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젠장.’

옆을 돌아보니 라트반도 알아차렸는지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어떤 놈이지?’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눈에서 불이 튀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문제없는 연애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상대가 저 외에 다른 상대를 만나는 것을 알면 곧바로 깔끔하게 물러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먼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

심장이 갈비뼈 아래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뛰었다. 아마도 지금 입을 열면 목소리 대신에 심장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라트반과 레온을 흘끔거리며 살폈다. 그들은 방에 들어온 다음 나를 보더니 갑자기 침묵했다.

‘들킨…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손이 목을 향했다. 한곳을 누르자 욱신욱신하는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라트반과 레온이 들어오기 직전 아슬란이 물고 간 자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두 사람이 들어오기 직전 아슬란은 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내쫓았다.

그가 분하다는 듯이 깨물었던 자리를 매만지며 나는 어제부터의 일을 떠올렸다.

***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후, 아슬란의 반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격렬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이 되더니 내가 그와 한 거래에 대해서 묻자 빠르게 평정을 잃었다. 그는 방을 이리저리 걸으면서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곧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허공에 손을 뻗었다.

쉬익,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허공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 주변에 붉은 마력이 일렁이더니 곧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그 구멍 너머에는 다른 풍경이 보였다.

‘이게 마법….’

쓰임새가 한정된 성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가능한 마수들의 힘의 원천.

처음 이 몸에 빙의되고 나서 성력에 대해 알아볼 때, 마력에 대한 책도 함께 읽었었다. 그 책에서는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다른 세계의 강한 힘을 인간의 몸으로 끌어내 오는 것이기에 사용하고 나면 약한 인간의 몸은 오염되며 상하게 된다고.

그래서 마법사들은 마법을 사용한 후에는 무척이나 약해지며 다시 기력을 되찾는 일에 필사적이라고 했다.

‘그 기력을 되찾는 방법이라는 게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 믿는 바람에 더더욱 배척받았다고 했지….’

책에서는 물론 그 방법은 마법사들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도 그런 것을 믿는 마법사가 소수 남아 있기에 자신의 능력을 크게 넘은 마법을 사용하고 완전히 망가진 마법사들이 그런 헛된 방법을 시도한다고도 했다.

그런 사실들과 함께 책은 간단하게 어떤 마법들이 더욱 어렵고 많은 마력을 써야 하는 마법인지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거기에 저런 마법이 적혀 있었어….’

허공에 생긴 구멍 너머로 연결된 다른 공간. 저렇게 공간을 뛰어넘는 마법은 수많은 마법 중에서도 극상위의 마법이라고 책에 쓰여 있었다. 그렇기에 과거 전쟁을 벌일 때, 적진에 잠입하기 위해서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저런 마법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아슬란은 그것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구멍 너머의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찾은 다음, 마법을 소멸시킨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힘들어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수십의 마법사가 힘을 모아 시전 후에 며칠을 쓰러진다는 마법을 제 혼자서 이렇게나 자유자재로 사용하다니.

‘공간을 넘는 마법 하나가 도시를 불태우는 수십 개의 마법보다도 어려운 것이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읽었던 책에 아슬란에 대한 내용은 상세하게 실려 있지 않았다. 이런 마법의 설정도 나오지 않았기에 그저 주인공 중의 한 명이니 강하긴 하겠지 생각했는데.

‘마법사들의 왕….’

그저 강한 이에게 붙는 칭호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압도적인 자에게 붙는 말이었다. 이런 것이 이리도 쉽게 가능하다면 아슬란은 혼자서 왕국 하나 정도는 손쉽게 멸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그는 다른 공간에서 가져온 것 중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그가 나에게 내민 것은 편지 뭉치였다. 받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전부 이벨리나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정말로 이벨리나가 그와 연락을 한 것이었다. 가장 위에서부터 편지를 읽어 나가던 나는 이벨리나가 생각보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슬란과 협상을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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