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48)

손끝에 닿는 온기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예복의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손을 닦아 주었다. 아무런 장식이 보이지 않는 흰 손수건으로 손에 남은 찻물을 닦아 낸 탓에 여기저기 갈색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의 행동에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조용히 그의 움직임만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꼼꼼한 손길이었다. 어쩐지 그런 행동에 미안한 기분이 들어, 나는 말을 돌렸다.

“어릴 적의 신관복이라 무척이나 소중했을 텐데….”

그 말에 라트반은 흘긋 테이블 위에 놓인 신관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는 짧게 대답했다.

“버려도 되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그랬다면 그의 성격에 이미 오래전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갖고 있을 만큼 아낀 것….”

“그보다 다행히 화상은 입으신 것 같지 않군요.”

정말로 옷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가 싫은지 라트반은 단호하게 말을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내 손 여기저기를 닦아 냈다. 잠시 후 그는 짧은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나는 무엇 때문인가 싶어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다.

“…아까 긁혔나 보네요.”

그곳에는 상처라고도 말할 수 없는 가늘고 긴 긁힌 자국이 보였다. 한 시간 정도 후면 가라앉아 언제 이런 게 생겼었는지도 모를 그런 자국. 아무래도 조금 전 시델에게 붙잡혀 있을 때, 반항하느라 생겼던 자국인 것 같았다.

그의 짧은 한숨이 손끝에 느껴졌다.

“왜 성력을 좀 더 일찍 사용하지 않으셨습니까.”

“…….”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이런 제 사과도 지겨우시겠지만… 죄송합니다.”

“…….”

“신전 기사단은 이 땅에 계시는 신의 대리인인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말한 라트반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모든 자를 치유할 수 있지만, 정작 당신 자신은 치유하지 못하시기에 우리는 대신 상처 입기 위해 존재합니다. 다만… 이래서야 과연 저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괴감이 묻어 나왔다.

그의 말대로 신전 기사단은 성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이야 마수 토벌이라는 더 큰 일이 있기에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성녀의 수호다.

그런데 기사단의 기사가 성녀를 겁박하고, 단장은 몇 번이나 경호에 실패하니 괴로울 법도 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내 손에 쥐여 주고 일어섰다. 내가 놀라 그것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려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가 망설이자 그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그건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

순간, 그를 보고 있던 나는 놀라움에 저절로 눈이 크게 떠졌다. 맙소사. 라트반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가 웃었다. 어쩐지 처음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표정에 나는 놀라서 물었다.

“라트반 경, 나에게 화가 났던 것 아니었나요?”

“……?”

내 질문에 그는 잠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아, 그게… 그때 황태자와의 접견이 끝나고 당신이 충고했었잖아요. 황태자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내가 그 충고를 듣지 않아서 화가 났던 것 아닌가요?”

그 말에 갑자기 라트반의 얼굴이 굳었다. 그 탓에 희미하게 걸려 있던 웃음은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갑자기 고장이라도 난 사람처럼 그대로 우두커니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대답했다.

“성녀님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레온 황태자가….”

“그러니까 화가 나긴 났었군요?”

“…….”

다시 묻자 그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마치 자신이 그랬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곧 그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내가 그에게 다시 말을 걸려 하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분은 언제쯤 결정됩니까.”

“네? 시델의 처분은 대신전의 규율에 따라….”

“아니요, 제 처분에 대한 것이 궁금합니다.”

“…….”

라트반이 말하는 처분이란 기도회 때의 일에 대한 것이다. 그 일 이후로 말을 돌리고 싶을 때면 그는 몇 번이고 이 처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안 되겠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 처분.”

마침 괜찮은 것이 생각났다.

“각오는 되어 있나요.”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이번에도 내가 적당히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일까. 각오가 되어 있냐는 내 말에 라트반이 바짝 긴장한 게 보였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전 기사단의 단장인 라트반 경. 그대에게 저번 경호의 실패에 따른 처분을 결정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대는 앞으로 일주일에 세 번, 나에게 검을 가르쳐야 합니다.”

“네?”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던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거냐는 듯한 당황스러움이 보였다.

“하지만 검은….”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아무리 배운다 한들 기사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요. 아니, 그 전에 검을 제대로 들지도 못 할 것 같군요.”

“그런데 왜….”

“검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호신술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나는 일부러 손으로 내 목을 한 번 매만졌다. 그러자 라트반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시델이 조금 전,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 낸 흔적이 아직은 목에 선명히 남아 있었으니까.

“신전 기사단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나에게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기본적으로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기르고 싶습니다.”

위급 시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정도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만약 2년 후에 내가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게 되면, 가장 나에게 도움이 될 기술들이기도 했다.

‘단지 그뿐만은 아니지만….’

고민하는 라트반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일단 그가 며칠 동안 화가 나 있었던 것은 황태자이지 내가 아니었다는 말에 그가 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라트반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성녀’인 나를 위하고 있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발전해서 ‘친구’라도 된다면 그의 성격상, 원작에서처럼 내가 비참하게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묵묵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라트반은 한참 후, 알겠다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

“하루가 너무 길었어….”

가볍게 옷만 전해 주고 돌아오려고 했었는데 일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그 탓에 내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시델이 쓰러지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무섭긴 했지만 다행히 라트반과의 관계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엉망인 것이 아님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럼… 라트반과도 어느 정도 친해졌고 황태자하고도 적대적인 상황은 아니고….’

소설의 이벨리나와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다.

노력했음에도 다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라트반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내 미래가 그렇게 절망적인 것 같지만은 않았다.

‘일단은 좀 자고 나서 생각하자.’

상처가 남지는 않았지만 시델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놀라고 운 탓에 정신적으로는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다. 그 덕분일까. 침대에 눕자마자 나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뜬 것은 덜컹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뭐지…?’

처음에는 잘못 들었거나 아니면 바람 때문에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끼익,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아차렸다. 지금 누군가 창문을 열고 내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떻게?’

내 방은 5층이다. 밖에는 이곳으로 타고 올라올 수 있는 나무 같은 것도 없다. 소리가 환청이 아님을 알아차린 순간, 한순간에 잠이 싹 달아났다.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성력을 끌어낼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손끝에 푸른빛이 생겨나는 것을 본 순간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가 들린 창을 향해 외쳤다.

“누구…!”

나는 말을 차마 다 끝맺지 못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창을 넘어 들어오는 달빛 아래에서 남자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나는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핏빛의 붉은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몸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며 그저 몸을 떠는 것뿐이었다.

번뜩이는 저 눈동자는 절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서 있는 것은 한 명의 남자인데 나는 거대한 맹수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한 걸음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흘러내린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맙소사.’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슬란….”

이 세계의 다른 남자 주인공 중 한 명이자 마법사들의 왕인 아슬란. 그가 분명했다.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왜, 왜 여기에….”

아직 이벨리나의 성력이 이리스에게 옮겨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마법사들의 섬에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치자 그의 눈이 빛났다.

“……!”

다음 순간, 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도 몸을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왜 왔냐니. 내가 보낸 편지를 받았을 터인데?”

편지라는 말에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때 서재에서 내가 읽자마자 타서 사라졌던 그 편지. 그때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슬란을 떠올렸었는데 정말로 그가 보낸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도 함께 생각이 났다.

‘분명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물릴 수는 없으며 곧 찾아가겠다고 했었지.’

문제라면 그 거래가 무엇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허리를 숙인 채 관찰이라도 하듯이 주저앉은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물었다.

“저기… 거래는….”

그가 나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내 무릎에 닿았다. 곧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려 무릎 위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래, 거래.”

아슬란의 눈이 위험한 빛으로 번뜩였다.

“성녀 네가 내 암컷이 되겠다는 거래였지.”

암컷.

그 말에 목덜미로 소름이 돋았다. 짧은 단어 하나가 거대하고 단단한 밧줄이 되어 온몸을 묶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나를 응시하며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보여 줬다.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에는 광포한 욕정이 담겨 있었다.

암컷. 그의 욕정을 받아 내야 하는 그의 암컷.

그 타는 듯한 시선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색이 짙은 피부였다. 볕에 그을린 라트반과는 다른 느낌의 이국적인 피부색은 대신전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이었으며 옷 역시 대신전의 것과는 다른 처음 보는 형태의 것이었다.

그의 머리색과 똑같은 진한 붉은색의 옷은 가슴을 여미지 않은 형태였기에 그가 움직일 때마다 꽉 짜여진 단단한 근육이 가림 없이 드러났다. 그런 몸 위로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나른하며 동시에 위험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거대하면서도 민첩한 짐승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

그 말이 목 안에서 맴돌았다.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벗어나야 해. 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더 멀리. 그의 손에서 벗어나야 해. 저 짐승이 너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어.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일까. 아슬란의 입매가 비웃듯이 올라갔다.

“안 돼.”

무엇이 안 된다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그의 몸이 움직였다.

내 다리를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저히 반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내 다리를 벌렸다. 그는 처음부터 그곳이 제 자리였던 것처럼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와 자리 잡았다.

이제 그의 시선은 내 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뜨겁고 진득한 시선은 내 아래에 쏟아지고 있다. 다리 사이가 조여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거칠고 사나운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가 몸을 숙였다. 그의 입술이 내 목에 닿았다.

“읏….”

힘겹게 토해 낸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자 아슬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맛을 음미하는 듯, 그의 혀가 느릿하게 목을 쓸어 올렸다.

“자, 잠깐만… 하읏!”

목에 닿는 혀의 느낌에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다리를 잡았던 그의 손이 내 배를 감쌌다.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큰 손바닥이 꾹 내 배를 눌러 왔다. 납작한 배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걸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의 움직임에 다시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단순히 취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제 것을 밀어 넣고 흔들고 싸지르는 것에서 끝나는 욕망이 아니었다. 그는 더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행위의 끝에 생겨나는 것. 그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이벨리나가 외치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이제, 짐승의 새끼를 배어야 할 거야.”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벨리나는 아슬란이 찾아와 무엇을 요구할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거래를 한 거지?’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도대체 이벨리나가 어떻게 아슬란과 만난 것인지 그리고 아슬란과 무슨 거래를 했는지, 그 거래의 대가로 무엇을 약속했는지.

머릿속을 스쳐 가는 수많은 의문에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아슬란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삭제 그에게 물어보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는 사이 목을 핥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갔다. 옷과 쇄골 사이를 파고들 듯 그가 얼굴을 묻다 짜증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투둑.

마치 짐승의 투레질과 비슷한 그의 움직임에 입고 있던 옷이 힘없이 뜯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드러난 내 가슴에 얼굴을 내렸다.

“아…!”

그의 손이 드러난 흰 가슴을 거세게 쥐어 주물렀다. 아릿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졌다. 말릴 사이도 없이 한껏 벌어진 그의 입술이 가득 쥔 흰 가슴을 힘주어 베어 물었다. 츱, 하는 젖은 소리와 함께 통증이 몰려왔다.

“아악!”

아픔을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에 물었던 곳을 뜨거운 혀가 꾹 눌러 왔다. 그리고 달래는 듯이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 흐윽!”

가슴께에서 젖은 살결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곳에서 무언가 흐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강하게 내 가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짐승에게 젖을 물리면 이런 느낌일까. 거칠게 빨려지는 느낌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날카롭게 세운 그의 이가 유두의 끝을 잘근잘근 물었다.

“으, 으, 읏!”

그럴 때마다 내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그가 물어뜯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무서워.’

짓눌린 공기에 소리는커녕 숨을 쉬기조차 어렵다. 내 몸 위에 올라타 있는 그의 몸은 단단하고 무거웠다. 반항하고 싶었지만 두려움이 목 끝까지 차오른 나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가 있는 공간에서는 모든 것을 그가 지배하는 것 같았다. 내가 내뱉는 숨까지도.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더욱 깊이 혀를 움직였다. 그의 입 안에서 유두가 짓이겨지며 눌렸다.

“아, 아파….”

그렇게 중얼거렸건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더욱 행위에 집중했다. 부드러운 살이 그의 입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일그러졌다. 그러는 사이 딱딱해진 가슴이 더욱 예민하게 그의 혀를 느꼈다. 이제 따끔함 대신에 다른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몸 저 깊은 곳에서 오싹한 쾌감이 밀려 올라왔다.

“으응….”

신음 소리에 그가 얼굴을 떼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 그가 희롱하던 것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가슴이 거친 숨과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그 끝에는 오뚝 솟아오른 분홍색의 돌기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큰 손으로 가슴을 감싸 쥐었다. 그 감촉과 무게를 즐기는 듯, 그의 손이 몇 번이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어 올렸다 떨어트렸다. 출렁이는 느낌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만족스럽군.”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서렸다. 그는 내 어깨를 밀어 바닥에 눕히더니 흘러내린 내 옷을 잡아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 필사적으로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빠르게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내 손을 쳐 내더니 내 옷을 잡았다.

지이익!

다음 순간, 그가 손을 휘두르자 내 옷은 마치 종이처럼 너무도 힘없이 찢겨 떨어졌다. 순식간에 아래의 속옷만을 남긴 채 알몸이 되어 버렸다. 몰려오는 수치심에 빠르게 몸을 가리려 했지만 아슬란은 한 손으로 내 두 손을 결박해 머리 위로 짓눌렀다. 그러더니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듯이 나는 이제 더 기다릴 여유가 없어. 약속한 대로 준비는 끝났겠지.”

그렇게 말하는 아슬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준비?”

되물어 보았지만 아슬란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쥐어 벌렸다. 나는 인형처럼 그저 그가 움직이는 대로 다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허벅지를 타고 올라온 그의 손이 아래에 있는 내 속옷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훤히 드러난 내 아래로 그의 얼굴을 내렸다.

“……!”

너무 놀란 탓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뜨거운 숨이 아래에 닿는 순간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조금 전까지 가슴을 한껏 탐하던 혀는 내 밀부 위를 핥고 있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젖은 혀가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제 것이었다는 양, 망설임 하나 없이 은밀한 내벽을 핥았다. 찔걱이며 츱츱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 하지 마! 거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그가 내 다리를 그의 어깨 위에 올린 채 몸을 일으켰다. 그 탓에 허리와 엉덩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주르륵.

음부에서 무엇인가가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선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민망함과 수치심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아슬란의 타액이 아니었다. 모두 내 몸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이 짐승 같은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탐해지면서도 내 몸이 흥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랫배의 안쪽이 욱신거렸다. 몸은 이제부터 제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 그만…!”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잠시 아슬란의 움직임이 멈췄다.

“왜 거부하는 거지? 너는 나와 약속을 했어.”

내가 아니야!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이벨리나와 거래를 했고 그녀에게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의 이벨리나는 나다. 그녀의 몸을 내가 차지한 이상, 어떻게든 이 상황을 감당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니 받아들여야 해. 네가 나의 새끼를 잉태할 때까지, 계속.”

“잠, 잠깐만….”

“무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는 여전히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손을 움직였다. 곧, 그의 하의가 흘러내렸고 그 아래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 아….”

황태자의 것도 받아들이기 버거웠는데 아슬란의 것 역시 그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한껏 발기한 채, 액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모습은 마치 짐승이 침을 흘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것이 지금부터 내 아래를 파고들 것이라 생각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 살려….”

“죽지 않을 거야. 그동안 네가 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었으니.”

모른다. 그런 준비 같은 것 나는 한 적이 없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것이 내 음부 위에 올려졌다. 순간 숨이 막혔다. 보이지 않음에도 그의 것이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크고 굵은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존재감에 떨고 있자 중얼거리는 아슬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역시 너무 좁군.”

그의 말대로였다. 그의 것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을 거야.’

아랫배를 문지르는 느낌에 입술을 물었다. 이것이 들어오면 죽는다. 분명 죽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품어야 할 것이 아닌 짐승의 것.

그것이 어느새 아래의 틈에 제 머리를 맞추고 있었다.

그의 허리가 내려왔다. 좁은 틈이 갈라지고 그의 것이 난폭하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찔걱이는 습한 소리와 함께 주르륵 애액이 흘렀다.

“아, 아아….”

좁은 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귀두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장 두꺼운 부분이 힘겹게 입구를 벌리고는 제가 가야 할 길을 넓히고 있었다.

깨진다.

나는 그런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래를 파고드는 거대한 기둥에 몸이 반으로 갈라질 것만 같았다. 아래에서부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격통이 타고 흘렀다.

그의 것은 이제 어려울 것 없다는 듯 나의 더욱 깊은 곳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놀란 내벽의 여린 살점들이 그것을 막아 보려는 듯이 강하게 수축했다. 하지만 침입자를 더욱 기쁘게 만들 뿐, 소용없는 짓이었다.

열기가 섞인 그의 신음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그는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붙잡고는 더욱 제 것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마치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나 시험해 보듯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아… 흑…!”

끝없이 밀려 들어올 것 같던 그의 성기는 몸이 완전히 맞닿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배 안쪽을 그의 성기의 끝이 툭툭 찔러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한 것인지 그가 내 다리 사이에 더욱 깊게 몸을 묻었다.

“아…!”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벨리나도, 거래도, 대가라는 것도. 그저 머릿속엔 지금 내 아래를 파고든 그의 존재뿐이었다.

“준비를 했을 텐데도 좁고… 작군.”

지독하게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준비…?’

도대체 무엇을 준비했다는 말일까.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가 다시 몸을 붙여 왔다. 끝에 닿았던 것이 꾸욱, 하며 내벽을 찔렀다.

“아, 흑, 흑!”

그 생경한 감각에 눈물이 흘렀다. 차라리 고통만을 느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 안을 휘저을 때마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슬란이 주는 감각에 휩쓸려 흔들리는 것만이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이었다.

몸을 물렸던 그가 다시 거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뒤이어 찾아온 감각은 내 아래를 잡아먹고 있는 거대한 고통과 쾌락뿐이었다.

퍽, 퍼벅! 그의 것이 나를 찍어 누를 때마다 이성은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죽을 거야.’

그가 날 짓밟고 죽일 것이다. 자비 없이 범하고 또 범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에게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사, 살려….”

나는 자비를 구하듯 두 손을 그를 향해 뻗었다. 하나 그는 내 손을 무시한 채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오직 그의 욕망과 목적을 채우기 위한 가차 없는 움직임이었다.

짓이겨지는 느낌에 울음이 새어 나왔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머리로는 이 모든 상황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문득 억울해졌다. 그와 거래를 한 것은 이벨리나다. 그런데 내가 왜? 그때였다.

이 몸을 원했잖아? 그렇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지.

“……!”

머릿속에서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 몸으로, 이벨리나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녀가 했던 모든 것을 이어받아야 함을 알 수 있었다.

내 아래를 범하는 그의 기둥이 더욱 거세게 움직였다. 철썩거리며 부딪히는 아래에 물이 튀어 오르는 소리가 섞였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몸이 덜덜 떨렸다. 허공을 젓던 손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다시 침대 위로 떨어졌다.

“으, 으읏!”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잇새로 차마 내뱉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을 미친 듯이 움직이던 그가 낮은 신음과 함께 있는 힘껏 찔러 올렸다. 깊숙하게 박힌 그의 것이 내 안을 가득 채운 채,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내 몸이 전율했다. 아래에 들어선 것을 잔뜩 조이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느껴졌다.

“아…!”

푸욱. 가장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흘렀다. 그 감각에 나는 몸서리쳤다.

그가 내 안에 그의 정액을 뱉어 냈다. 그것도 가득. 조금의 틈도 없이 아래를 틀어막은 것 같은 그의 물건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 순간, 다시 몸이 덜덜 떨려 왔다.

‘뜨거워.’

내 아랫배를 가득 채운 그것의 열기에 나는 몸을 떨었다. 불을 품으면 이런 기분일까. 내 안으로 들어온 것이 나를 태우고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경험했던 것도, 이벨리나의 기억에서도 남자의 정액이 이런 느낌을 준 적은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의 것이 퉁, 하는 느낌과 함께 나에게서 빠져나왔다. 나는 허겁지겁 손으로 내 배를 눌렀다.

어서, 이 안에 있는 뜨거운 것들을 빼내야 했다. 배를 꾸욱 누르자 안에 가득 차 있던 것들이 꿀렁이며 새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흐, 흐윽!”

음부를 따라 흘러내리는 그것은 여전히 뜨거웠다.

“…뭘 하는 거지?”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아슬란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그는 침대 시트에 얼룩을 만들고 있는 제 씨물을 보더니 이를 갈며 나에게 말했다.

“일어나.”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슬란은 너무나도 가볍게 나를 안아 들었다. 그러더니 침대의 끝에 걸터앉은 그의 몸 위로 나를 앉혔다.

“흐… 흐윽….”

여전히 맞닿아 있던 아래가 긁혀지고 비벼지는 느낌에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내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들어 올린 다음, 기립해 있는 그의 것에 내 아래를 맞췄다. 아직도 그의 것을 흘리고 있는 아래에 거대한 것이 닿았다. 나는 아슬란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안 돼…. 안 돼요….”

하지만 아슬란은 내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성기가 다시 아래에 머리를 들이민 순간, 그는 힘을 주어 내 허리를 잡아 내렸다.

“아아악!”

순간,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

“이런….”

아슬란은 기절한 성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몸이 엉망이 된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눈에 미처 오므리지 못한 다리의 깊은 곳이 보였다. 그의 것을 빼낸 후에도 아직 다물어지지 못한 음부 사이로 하얀 정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슬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얻었어.’

성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극한의 만족감이 떠올랐다. 그녀의 옆에 앉은 아슬란은 두 다리를 잡아 다시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왔다.

더 할까.

아직도 그의 아래는 꼿꼿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얼마 만에 얻은 암컷인가.

아슬란은 기절한 성녀의 발목을 잡아 벌렸다. 깊은 곳에 있는 활짝 벌어진 구멍에서 그가 쏟아 낸 씨물이 울컥거리며 쏟아져 흘렀다. 역시 저것들이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다시 제 것으로 박아 막아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제 새끼를 더 잘 밸 수 있을 테니까.

그럴 생각으로 성녀의 아래에 성기를 다시 밀어 넣으려던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툭 소리와 함께 시트 위로 떨어진 물방울 때문이다.

“…….”

아슬란은 성녀의 얼굴을 살폈다. 힘없이 뒤로 젖혀진 하얀 얼굴 위에 눈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한 손으로 성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은 다음 그는 다른 손을 뻗어 그 자국을 쓸어 만졌다. 그의 손바닥에 물이 묻어 나왔다. 그것을 보던 아슬란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성녀의 아래에 닿아 있던 제 몸을 물렸다.

“으읏….”

성기의 끄트머리가 반쯤 들어가 있었던 탓일까. 기절해 있는 성녀가 옅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누가 들어도 지쳐 있는 듯한 소리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흔들렸다. 아직도 그의 욕정은 해소되지 않았다. 제 것을 받아들이고 그의 씨를 품어 기를 수 있는 암컷을 찾아 헤맨 지가 몇백 년이다. 그동안 그의 안에 쌓여 있던 원시적인 욕망은 아직도 전혀 풀어지지 않은 채 그의 몸을 들끓게 만들고 있었다.

망설이던 아슬란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성녀의 몸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성녀의 몸은 너무도 가볍게 그의 품속으로 묻혔다. 그가 어깨 아래 걸쳐져 있던 제 옷자락을 끌어 올려 그녀를 덮으니 어지럽게 흩어진 황금색의 머리카락만이 보였다. 아슬란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의 품에 안겨, 오직 그만 볼 수 있는 성녀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성녀를 보던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듯 천천히 오르내리는 납작한 배 위를 그의 손이 더듬었다. 그 행동은 마치 제 것이 어디까지 닿았을까 가늠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드디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너무도 어렵게 찾았다.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암컷은 이 세계에서는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성녀의 배를 쓸어내리는 손끝에 잠시 붉은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그러자 곧 성녀는 다시 신음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렸다. 그 소리에 아슬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날 받아들일 수 있게 몸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니 제 마력을 버티게 해 줄 약을 차로 해서 마시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이리도 힘들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락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봤을 때 성녀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그는 몇 번이고 성녀에게 확인을 시켜 주며 다짐을 받아 냈다.

그의 새끼를 밴다는 것은 처음부터 성녀가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마력을 중화시키는 체질로 만들어야 했으며 새끼를 밴 후에도 계속해서 돌봐 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몇 번이나 확인을 받지 않았던가.

‘어차피 이젠 물릴 수 없어.’

그녀가 서명을 한 순간에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녀는 이제 그의 암컷이다.

성녀가 그냥 아무런 생각 서명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아슬란은 손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곧, 그의 손끝에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옷자락을 끌어 올리자 그의 눈에 세 개의 동그란 자국이 보였다.

“이거였군.”

성녀는 그의 새끼를 품겠다고 한 대가로 요구한 것들이 있었다. 그중에 첫 번째가 바로 이것을 없애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자국을 살폈다.

‘아주 오래된 사술인데.’

자국을 살피던 아슬란의 눈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성력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오래전에 사라졌던 사술이 어떻게 성녀의 몸에, 그것도 세 개나 박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이게 생길 동안 가만히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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