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48)

대신전의 곳곳에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흰색의 깃발이 걸렸다.

그 깃발이 걸리는 것을 본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추모의 기도를 올렸다.

데일런 대신관의 죽음은 빠르게 알려졌다.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죽음이었기에 소란은 없었다. 모두가 추모 예복으로 갈아입은 대신전 안은 얼핏 보아서는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추모 예복은 신의 부름에 모두가 차별 없이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대신전 내 직급과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입었다. 게다가 얼굴을 덮을 수 있는 후드까지 달린 예복이었다.

평소라면 대신전 내의 예복으로 상대의 지위를 파악하여 고개를 숙이면 되겠지만,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었고 모두 똑같은 옷을 입자, 상대가 어떤 지위의 사람인지를 몰라 여기저기에서 작은 소란들이 있었다. 그 소란을 귀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은 반가이 여기기도 했다.

라디스 상급 신관은 이를 반가이 여기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깊게 후드를 눌러쓴 채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화려한 상급 신관복을 입고 있어야 했기에 그녀가 이렇게 대신전의 으슥한 곳을 걷고 있었다면 누군가 곧바로 알아차렸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덕분입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라디스는 오늘 낮에 보았던 데일런 대신관의 평온한 얼굴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곧 그녀는 구석진 건물에 도착했다.

대신전 외곽에는 이처럼 특별한 용도를 찾지 못한 채, 창고처럼 방치된 건물이 있었다. 평소라면 잠겨 있었을 곳이 오늘은 손잡이를 돌리자 곧바로 열렸다.

‘3층의 네 번째 방.’

꽤 오랜 시간 대신전에서 살아온 그녀도 잘 모르는 곳이었는데, 상대는 마치 제집처럼 그녀를 이곳으로 초대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복도의 소리가 잔뜩 긴장한 그녀의 마음을 대신해 소리를 내질렀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한 다음 그녀는 손잡이를 돌렸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녀는 방 안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사람을 보았다. 그들 역시 모두 추모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라디스는 그들이 대신전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문을 닫은 라디스가 살짝 고개만을 숙여 상대에 대한 예를 표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레온 황태자님.”

그 말에 앉아 있던 레온이 일어나 후드를 벗었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금발과 짙은 푸른 눈동자 그리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수려한 얼굴.

라디스는 저도 모르게 레온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하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렇게 바쁜 시기에 시간을 내어 주신 것만으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레온은 그렇게 말하더니 비어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편히 앉아서 시작할까요?”

***

확실히 대화는 레온의 말대로 길어졌다.

“은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상처 입은 자를 돌보는 것은 저희 모든 신관의 성스러운 임무 중 하나입니다.”

겸손을 담은 그녀의 말에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희 제국기사단의 중요한 인재들이 신관님 덕분에 다시 무사히 제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보답을 예전부터 꼭 하고 싶었습니다.”

“이것 참….”

라디스는 곤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꾸민 것이다.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것 아니니까요.”

레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에 서 있는 부관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부관은 작은 주머니 하나를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로 올렸다. 레온이 그것을 집더니 안에 있는 것을 손바닥 위로 올렸다.

“이건…?”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던 라디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레온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은 흙이 잔뜩 묻은 돌멩이었으니까. 레온은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는 듯 살짝 웃더니 돌멩이를 한 손에 쥐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겉에 묻어 있던 흙이 벗겨지며 그 사이로 반짝거리는 빛이 보였다.

“……!”

“신관님께서 치료해 주신 기사들은 모두 아스티아를 정복할 때 크게 다쳤던 사람들이지요.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 삼아 주워 온 것들입니다. 하잘것없는 돌멩이지만 색이 꽤 예쁘니 받아 주십시오.”

라디스는 아스티아가 무엇으로 유명했는지 알고 있다. 대신전에 바쳐진 가장 화려한 것 중 하나가 아스티아가 공물로 보낸 단백석이었다. 세상의 모든 빛을 다 품고 있다는 보석. 레온이 내민 것은 그것의 원석임이 틀림없었다. 라디스는 급하게 그의 손에 있는 원석의 크기를 보았다.

‘맙소사….’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자라 하더라도 이것의 가치는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라디스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 레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지 않고 꽤나 오래 머물고 있지.’

기도회가 끝나고 성녀와의 접견이 끝났음에도 계속해서 대신전 안에 머무는 제국의 황태자란 입 안의 가시만큼이나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그 가시의 날카로움이 자신이 다닌 다른 자들을 찌른다면…. 라디스는 레온이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동안 제국기사단의 치유를 도와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 은혜를 되도록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갚고 싶다는 편지였다. 각 나라의 왕족이나 기사들을 치료하면 심심치 않게 받는 편지였기에 처음에는 그저 황태자는 무엇을 주려나, 하며 조금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던 편지.

하지만 그 편지의 마지막은 ‘미래의 대신관님께’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지어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라디스는 크게 가슴이 뛰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자신이 대신관이 되기를 바란다.

‘왜? 어째서 나를?’

라디스는 바보가 아니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필요했던 것은 신실한 믿음뿐만은 아니었다. 적당한 때를 아는 눈치와 필요하다면 규율에 어긋나는 일도 할 수 있는 실행력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황태자가 왜 자신을 대신관으로 지지하겠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상급 신관 중에서도 무척이나 어중간한 위치였다. 특별히 적대 관계에 있는 상급 신관도 없지만 그렇다고 같은 편이라 부를 수 있는 자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신관들에 비해 존재감도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신관 같은 건 포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 앞에 한 줄기 빛이 내려온 기분이었다.

“부디, 이것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한낱 돌멩이인 것을 말입니다.”

레온의 말에 라디스는 웃으며 손을 뻗었다.

***

“후….”

제 처소로 돌아온 레온은 예복의 후드를 벗었다. 그의 얼굴에는 라디스를 마주할 때의 웃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부관들은 무표정한 레온의 얼굴에 재빨리 주변을 정리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저희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 도착한 편지는 책상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편지? 누가? 또 나를 죽이겠대?”

대신전에 오고 나서 다른 나라의 왕족들로부터 피로 쓴 편지를 받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 되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

그 말에 레온은 얼굴을 구기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알았어. 나가 봐.”

이럴 때 미적거렸다가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부관들은 재빨리 문을 닫고 사라졌다. 레온은 조용해진 방에서 몇 번 한숨을 쉬다가 일단 마실 것을 모아 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병에서 독한 술을 잔에 따른 후 한 번에 들이켰다.

“하….”

불을 삼킨 것 같은 느낌이 식도를 휘젓다 가슴속에서 퍼졌다. 그는 흘끔 테이블 위를 보았다. 부관들이 말한 대로 편지 하나가 은쟁반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곧바로 열어 보았겠지만 오늘은 그러기 싫었다.

‘뭐라 적혀 있을지 안 봐도 뻔하지.’

생각보다 그가 대신관에 체류하고 있는 날이 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부관들은 이미 그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낱낱이 황제에게 보고했을 것이고. 황제로서, 또한 아비로서 자식이 지금 성녀에게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에 대한 따끔한 소리가 있을 것이다.

‘바로 돌아오라는 말일지도.’

편지에 있을 가장 최악의 말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그는 제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돌아오라는 말이 제일 두렵다니.

‘나 미쳤나?’

레온은 스스로도 제 상태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멍청이는 아니었기에 인정은 빨랐다. 그래, 그는 분명 지금 성녀에게 빠져 있었다.

그는 잔에 남은 술을 마저 입에 털어 넣고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황제의 문양이 찍힌 인장이 붙어 있는 편지. 그는 한숨을 쉬며 그 인장을 뜯었다. 황제는 길게 말하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성격만큼이나 편지도 짧았다. 편지는 단 한 문장이었다.

결혼이라도 하려고 그러느냐?

한 문장이었지만 황제가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레온은 그 편지를 다시 곱게 봉투에 넣은 다음 소파에 드러누웠다.

문득 오늘 아침에 보았던 성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벨리나.”

레온은 조용히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대신관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추모의 기도를 올리러 온 성녀를 멀리서 다시 보았다는 것이 레온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수수한 추모 예복을 입고 온 성녀는 관으로 다가가 후드를 벗었다. 곱게 하나로 땋은 머리채가 그녀의 등을 따라 출렁였다. 수수한 흰색의 예복이었건만 찬란한 금색의 머리카락이 지금까지 본 그 어떤 화려한 금사의 자수보다 눈에 띄었다.

그렇게 추모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성녀를 보던 레온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그날 밤이 떠올랐다. 지금 저리도 단정하고 성스러운 그녀가 그날 밤에는 제 밑에서 교성을 지르며 흐트러졌었다.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아찔함을 떠올리는 순간 그는 입술을 물며 허리를 숙였었다.

‘미친놈.’

죽은 자를 추모하는 여자를 보며 발정하다니.

레온은 누구보다도 그런 제가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제국의 일이 우선이었다. 그렇기에 며칠을 침대 위에서 뒹군다고 하더라도 황궁으로 돌아가는 날짜를 어긴 적은 없었는데.

그는 오늘 만난 라디스 신관을 떠올렸다. 사실 라디스만 만난 것이 아니다. 지난 일주일간 그는 대부분의 상급 신관들을 만났다.

‘어떤 놈이라도 상관없어.’

레온은 대신관의 후보로 거론되는 모두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가 대신관의 자리에 오르면….

레온은 눈을 감았다. 짧은 상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끌어안고 싶다. 다시 그 몸을 탐하고 싶다. 밤만으로는 모자라다.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달빛 아래 드러났던 그녀의 몸을 떠올렸다. 그 몸이 아펠리우스 제국의 다음 황제를 품는 것이 보고 싶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대신전의 화장터는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흔치 않은 대신관의 장례식이었다. 이 대신전에서 성녀의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자의 장례식이 간단하게 치러질 리가 없었다.

다행히 장례식의 예복은 단순하고 편했지만 예식의 일정은 그렇지 못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추모의 기도가 이어지고 중앙 신전의 기도실에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초가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기도와 함께 계속해서 타오르게 될 것이다.

모두가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관의 주변으로 불이 붙었다.

“……!”

그 광경을 보던 나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거센 열기가 바람과 함께 얼굴을 스쳤다. 멀리 있음에도 느껴지는 그 뜨거움에 등 뒤로 땀이 흘렀다.

죽은 자는 이 불 속에서 안식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는 어떠할까?

책에 적혀 있던 이벨리나의 마지막이 생각났다. 그녀는 불길 너머에서 마지막까지 제가 성녀라고 외쳤었다.

책 속의 미래를 떠올리자 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지금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했다.

‘…달라진 게 있긴 있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레온 황태자였다. 지금까지 책의 설정과 가장 다르게 바뀐 인물이라면 역시 그였다. 황태자와 갑작스럽게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그는 나를 좀 더 알고 싶다며 아직도 대신전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다. 소설이 비해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변화였다.

‘하지만 믿을 수는 없어.’

책 속의 그는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제국의 일이 관련되면 무서우리만큼 냉철한 자였다.

‘이리스에게는 예외였지만.’

책 속에서 이리스를 대하던 황태자의 태도를 기억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읽은 부분까지 그는 이리스와 자기는커녕 손도 제대로 못 잡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반해 그의 인생 처음으로 제국의 이익보다 그녀를 우선하기 시작했다.

‘…나하고는 정말 다르구나.’

사실, 황태자와의 관계가 달라지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난 연인들에게는 꽤 다정한 편인 그였다. 그러니 한 번 잔 나에게도 조금은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거기에 솔직히 지금 황태자 쪽에서 매달리는 느낌이기에 이리스가 아닌 나에게 반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긴 있었는데.

‘아니, 완전히 달라.’

소설 속의 그를 생각하니 아무래도 틀렸다. 그에게 나는 잠자리를 함께하기 좋은 상대이지 보호하고 지켜 주고 싶은 상대는 아니다.

‘그래도 그나마 황태자는 낫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불길을 바라보는 라트반이 있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살짝 고갯짓으로 인사를 할까, 했었는데 그는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

최악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버렸어.’

그의 충고를 듣지 않고 레온 황태자를 방 안으로 들인 것이 이렇게나 후회가 될 줄이야.

갑자기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몸으로 들어오고 나서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었다. 웃기지도 않은 이벨리나의 조건을 들어줘야 했고, 성녀로서 일도 계속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일은 라트반과 황태자를 대하는 일이었다.

‘주인공들이니까.’

이벨리나의 죽음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대할 때마다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는데 다 헛수고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더 노력해야 할까?’

노력을 해도 다시 무언가 일이 생겨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녀의 평판이 여전히 바닥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타오르는 불을 보다 내 손을 바라보았다.

‘성력 사용도 제자리고.’

그사이 성력을 심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더 노력을 했지만 대신관의 기력을 잠시 회복시킨 것 이후로 이렇다 할 만한 성취는 없었다.

‘치유력도 좋긴 하지만 내가 진짜 원한 건 다른 힘이었는데.’

내가 성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내심 바란 것은 보호 결계를 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야 대신전 바깥을 돌아다닐 때 안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힘은 아직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치유력보다 좀 더 정교하게 사용해야 해서 그런가?’

서재에 있는 책들을 읽어 봐도 이렇다 할 만한 도움이 되는 책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불길 속에서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내가 불길 속에서 듣게 될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불은 이틀 더 타오를 것이라고 했다. 처소로 돌아온 나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문 앞을 지키는 신관들에게 잠시 잠을 잘 터이니 몇 시간 동안은 누군가 찾아오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한번 황태자의 일을 겪은 그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문을 닫은 나는 곧바로 구석에 있는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가장 밑의 서랍을 끌어당기자 그 안에는 곱게 개어진 신관복이 있었다. 레온과 관계를 가진 날 밤 빌려 입었던 라트반의 옷.

‘돌려는 줘야지.’

바빴던 탓에 아직까지 이것을 세탁하지 못했다. 대신관의 장례식이 끝나면 당분간 또 일정이 몰려 있으니 시간이 비어 있을 때, 빨리 세탁을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옷을 들고 욕실로 가서 물에 담갔다. 오래된 옷이기에 혹시나 너무 힘을 주어 비비면 찢어지지 않을까 싶어 조심조심 손으로 문질렀다.

‘특별히 더러워진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내가 입어서 더러워졌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화장터에서 보았던 라트반의 태도를 상기하니 그가 그렇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표정이라도 얼굴에 좀 나타나면 좋겠는데. 워낙에 무표정이다 보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 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라트반을 생각하다 다시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카를 신관에게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 명령을 내렸으니… 얼마나 걸리려나?’

그사이 나는 카를 신관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얻었다.

그는 40대 중반에 무척이나 온화하고 다정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어릴 적, 신전에 버려져 그를 거둔 신관들의 손에서 자라게 된 그는 커서 성력이 발현되어 무사히 신관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신관이 된 후로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학식이 늘었고 어린 나이에 이미 대신전의 어지간한 성서를 모두 섭렵했으며, 성서 외에 다른 분야들에도 깊은 지식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녀의 교육 담당이 되었다고 했지.’

아마 대신관이 말했던 과거는 그때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것저것 다 알아봤지만… 역시 그가 대신관으로는 제일 적합한 것 같은데.’

직접 만나 보고 결정을 해야 하겠지만 솔직히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를 점찍어 둔 상태다.

‘꼭 그가 대신관이 아니어도 상관없을 것 같고.’

이벨리나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니 계속 대신전 안에 머물게 하면 그녀가 더 이상 나를 불러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

그렇게 카를 신관에 대해서 생각을 하며 손을 움직이고 있을 때, 허벅지 안쪽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물기를 털어 내고 옷을 걷어 올려 보니 역시나 그 동그란 자국이 있는 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것도 분명… 카를 신관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를 생각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말이다. 자국을 손으로 쓱 눌러 보던 나는 살짝 성력을 사용해 보았다.

“……?”

순간 이상한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성력을 사용하고 나면 그 힘의 모양이 천천히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국 위에 일렁거리는 것 같던 성력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버린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뭐지?”

다시 성력을 사용해 보았다. 역시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이거… 뭐야?”

그냥 기억하지 못하는 자국이라 생각했었는데, 평범한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국을 만져 보고 다시 성력을 써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내가 계속 성력을 써 대고 있다 보니 피곤해졌을 뿐.

“…그만하자.”

이러다 라트반의 신관복을 다 빨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았다.

세제가 없기에 세면대 위에 놓인 비누를 썼더니 신관복에서는 진한 향기가 났다.

“이건 생각을 못 했네….”

그의 사택에서 보았던 평범한 비누가 생각났다. 향이라고는 아주 옅은 그런 것. 한참을 고민스러운 눈으로 옷을 바라보다 나는 그것을 다시 물에 담갔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물에 헹구자 향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도 나긴 나는데….”

그렇다고 계속해서 물에 담가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라트반은 기분 나쁘겠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조심스럽게 신관복을 비틀어 물을 짜낸 다음 방으로 갖고 돌아와 수건으로 물기를 더 짜냈다.

“조금만 걸어 놓으면 마를 것 같네.”

이제 이것을 어떻게 돌려주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비밀 통로를 열고 있었다.

‘문제없지?’

품 안에는 곱게 개어진 신관복이 있었다. 오랜만에 비밀 통로를 통해 후원으로 나가자 밤의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추모 예복의 후드를 더욱 눌러 쓰며 걸음을 옮겼다. 내일부터는 더 이상 추모 예복을 입지 않는다.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성녀가 기사단장의 사택에 간다며 온 동네에 광고를 하면서 라트반을 찾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후드를 써도 되는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라트반의 사택이 어느 쪽인지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곳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멀리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서둘러 갔다 돌아와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빠르게 걸었더니 얼마 있지 않아 곧 숨이 차올랐다.

‘저 숲 안쪽인데….’

익숙한 지리가 눈에 들어온 것은 좋았지만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음을 알게 되니 한숨이 나왔다.

‘그보다… 라트반이 집에 있나?’

듣기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사단에서 보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집에 찾아가도 아무도 없을 터.

‘그럼 이걸 어디다 놓고 오지? 문 앞에 두고 와야 하나?’

그날 너무 정신없이 방문했던 집이기에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집의 침대와 거실의 소파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라트반의 집이 멀리 보였다.

기사단장의 사택이라고 하면 경비가 삼엄할 것 같지만 오히려 이곳은 대신전 내에서 가장 경비가 허술한 곳이었다.

‘하긴 누가 기사단장의 집을 털겠어.’

일반인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구역이다. 물론 대신전 내라고 해서 불미스러운 일이 아예 안 생길 수는 없다지만 대신전 안에서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신전 기사단장의 집을 털지는 않을 것이다.

‘라트반의 집이라면 정말 털어 갈 것도 없을 테고.’

누가 보면 비어 있는 창고가 아니냐 싶을 정도로 휑한 모습이 생각났다. 놓여 있는 가구들은 전부 낡고 오래된 것들뿐이지 않았던가.

“조용하네.”

기사단의 사택 쪽으로 오자 멀리 걸어가는 사람 두셋 정도만이 보일 뿐,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오래된 숲 안에 자리한 구역이었기에 사택과 사택 사이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서로를 가렸다.

‘사생활은 완벽하게 보호되겠는걸?’

라트반의 집 앞에 서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그의 집은 나무들에 가려 주변 집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그날 나를 여기로 데려왔구나.’

이런 곳이라면 확실히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좋았을 것이다. 게다가 잔뜩 흐트러져 있던 상태인 나를 데리고 기사단 건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일단 나는 그의 집 앞을 살폈다. 하지만 곧 실망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려야 했다.

“역시나….”

무엇인가를 놔둘 곳이 없었다. 오면서 봤던 다른 집은 작은 장식이라거나 정리함 같은 것이라도 놓여 있었는데 라트반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놓고 가야 하나.’

다행히 현관 앞은 돌로 되어 있어 놓고 가도 크게 무리가 없었지만 세탁한 옷을 바닥에 그냥 던져두고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하나 가져올걸.’

급하게 나오느라 이런 것은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결국은 그냥 놓고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돌바닥의 흙이라도 좀 털어야겠네.’

조금이라도 바닥을 깨끗하게 한 다음 그 위에 놔두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허리를 숙였을 때였다.

턱!

“누구지?”

누군가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라트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경비를 서는 기사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어깨를 잡은 손이 거칠게 나를 돌려세웠다. 내 앞에는 신전 기사단의 옷을 입은 기사가 있었다.

“……!”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시델!’

저번에 데일런 대신관을 보러 나가다가 만났던 기사였다. 그때 주변의 기사들이 뜯어말렸던, 나에게 강한 적의를 보였던 젊은 기사.

‘왜 하필 이 사람이야!’

다른 기사라고 해도 내가 라트반의 집 앞에 있다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만은 정말로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후드를 벗어라.”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따르지 않으면 그대로 베어 버리겠다는 듯이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그의 기세에 나는 머뭇거리며 후드를 잡았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벗어야 하는 건가, 싶어 망설이고 있자 갑자기 시델이 손을 뻗었다.

“안 돼!”

황급히 후드를 붙잡았지만 그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후드가 벗겨지고 대강 묶어 후드 안으로 넣어 두었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드러난 얼굴을 보고 시델이 놀라는 것이 보였다.

“성녀…?”

중얼거리는 시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망했다.’

이제 그에게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나를 시델은 빤히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성녀께서 여긴 무슨 일이신지?”

“…….”

그는 경멸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잡았던 손을 떼고 마치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이 털어 냈다.

“난 옷을….”

거기까지 말하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어.’

사실 여기에 온 이유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니다. 난 정말로 그에게 빌린 옷을 돌려주려고 왔을 뿐이니까.

‘그런데… 어쩌다 이걸 빌렸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거지.’

그날의 일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황태자랑 자고 나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는데 그대로 처소로 돌아갈 수 없어서 라트반의 집에서 몸을 씻은 다음 옷을 빌려 입고 잠까지 잤다… 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사실만을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당장에 떠오르는 변명도 없었다.

그렇게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시델이 갑자기 나를 향해 팔을 뻗더니 내 멱살을 잡았다.

“큭!”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보나 마나 뻔하지.”

“무슨… 이것 당장 놓지 못해요?”

“당신이 우리 단장에게 수작질을 하는 것 다 알고 있어!”

“…뭐?”

도대체 시델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라트반에게 수작질을 한다고?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어. 당신이 도대체 뭘 했길래 단장이 요즘 저러고 다니는지 알아야겠거든.”

그렇게 말하는 시델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 사람이 라트반에게 갖는 감정은 동경 이상의 것이었다. 마치 그가 자신의 신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독한 인간 같으니. 단장에게 그 모욕을 준 거로도 모자랐나?”

시델은 내 멱살을 잡은 채 거세게 흔들었다. 그 역시 신전 기사단의 기사였다. 그의 손에서 나는 축 늘어진 솜 인형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졸린 목과 흔들리는 머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시야까지 빙글빙글 돌고 있었기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멱살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렇게 몸싸움을 하는 사이 품에 있던 라트반의 신관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시델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보더니 여전히 나를 잡은 채 그것을 집었다. 그러고는 그것이 누군가의 옷임을 확인하더니 더욱 분노한 표정이 되었다.

“신관복? 왜 이런 걸 갖고 단장의 집에 숨어든 거지?”

시델이 의아하다는 듯이 옷을 보더니 다시 바닥에 내팽개쳤다.

“안 돼…!”

겨우 세탁해서 가져온 건데! 나도 모르게 신관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제 시델은 아예 두 손으로 내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발이 땅에 닿지 않자 저절로 허우적거리는 꼴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어.”

“뭐, 뭐가….”

“시끄러워. 네년이 우리 단장마저 네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꼬리 치고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고! 그게 아니면 뭣 하러 이런 곳까지 왔겠어? 옷까지 들고!”

시델의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제멋대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에 대한 상상을 끝낸 모양이었다. 게다가 눈을 보니 이미 반쯤은 맛이 간 상태였다. 이런 사람에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나는 있는 힘껏 발을 들어 시델의 배를 걷어찼다.

“큭!”

갑작스레 공격을 당해서 그런지 그의 힘에 손이 풀렸다. 나는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쿨럭!”

잡혀 있던 목이 아파 왔지만 다행히 크게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뒤돌아서 달려가려는 순간 시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악…! 읍!”

비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뒤에서 다가온 시델의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벗어나야 해!’

내 입을 틀어막은 그의 힘에서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위험해질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한번 나를 놓쳤던 탓인지 이제 시델은 아무리 내가 발버둥을 쳐도 그저 몸으로 버틸 뿐, 손을 놓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나는 곧바로 성력을 끌어올렸다. 평소라면 어떻게 성력을 조절해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그사이 잠잠해진 내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시델의 손이 내 목을 잡았다.

“놔!”

그의 손이 내 목을 조르려는 순간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퍼벅!

그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튕겨 나갔다. 그러고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옆에 있던 나무에 부딪혔다.

“끄으….”

나무에 부딪힌 시델의 눈이 허옇게 뒤집혔다. 그러더니 나무에 기대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기대어 쓰러졌던 나무에는 어둠 속에서도 잘 알아볼 수 있는 액체가 묻어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서, 설마….”

나는 내 몸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푸른색의 빛이 내 주변을 감싼 채 빛나고 있었다.

‘이런 게 아니었어.’

보호 결계에 대해서는 책으로 많이 읽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격이 몸에 닿지 않게 해 주는 것일 뿐, 이렇게 누군가를 거세게 밀어낸다거나 하는 힘은 아니었다.

“서, 설마 죽은 건….”

다가가서 확인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쓰러지던 시델의 얼굴을 다시 떠올린 순간 눈물이 왈칵 나왔다.

어떻게 하지? 내가 사람을 죽인 거야?

“거기 누구지?”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사람처럼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가 여기서… 성녀님?”

“…라트반.”

나는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소파에 앉아 있는 내 몸 위에 두꺼운 모포가 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손에 들려 있는 찻잔이 계속해서 받침과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잠시 후, 라트반이 다가와 내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을 빼냈다.

“손은 괜찮으신 겁니까?”

“아….”

그의 말에 그제야 내 손이 어떤 꼴인지를 알았다. 찻물이 넘쳐흘러 손 여기저기에 얼룩을 만든 게 보였다. 그런 내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갑자기 보호 결계를 만들었고 그 힘에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던 시델.

“…죽었나요?”

떨리는 손을 바라보다 힘겹게 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죽지 않았습니다. 단지 뇌진탕이 왔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라트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

“무엇보다 성녀님의 힘으로 사람이 죽는 일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델은 깨어나는 대로 처벌이 결정될 것이고 동시에 기사단에서 퇴출될 겁니다.”

“…그렇군요.”

이런 꼴을 당했는데도 그에게 죄를 묻지 말라고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대신전 안에서 신전 기사단의 기사가 성녀를 공격했다는 것은 아마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조용히 처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일로 신전 기사단 전체가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었다. 내 말에 라트반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앞의 테이블에는 엉망이 된 라트반의 신관복이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시델의 발에 짓밟힌 모양인지 흙이 묻은 발자국과 옷의 일부가 찢겨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쩌지.’

그 모습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미안합니다, 라트반.”

“…….”

“미안해요. 난 그냥 저것만 놔두고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그때, 라트반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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