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48)

아침부터 성녀의 방은 분주했다. 기도회 이후로 정식 예복을 입을 일이 없었기에 그동안 대신전 내에서 가볍게 입고 다니는 평상복을 입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다시 오랜만에 의상을 담당하는 신관들이 왔고, 그들은 예복을 입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진 않은지 꼼꼼하게 점검했다.

“조금 살이 빠지신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내 얼굴이 굳었다.

“예복을 수선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 팔을 벌려 주시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자 의상 담당은 손을 재빨리 놀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조금 당기는 느낌이 들더니 예복의 주름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잡혔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기도회 때 예복을 입을 때는 처음부터 다 벗고 새로 입느라 난리도 아니었는데 오늘은 제일 편한 실내복 위에 그대로 입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

‘흔적이 아직 다 사라진 게 아니니….’

황태자가 남겼던 자국들은 희미해지긴 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이벨리나의 피부가 너무 흰 데다가 약한 것이 문제인 것 같지만, 황태자의 악력이 생각보다 세기도 했다.

사실, 이 자국들만 아니면 그날 있었던 일이 정말로 일어났던 일인지도 잘 모를 정도로 가물거리긴 했다. 워낙에 정신없었던 탓에 지금도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다.

‘꿈치고는 좀 생생하지만.’

최대한 떠올리려고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가끔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서늘한 공기 속에 내뱉던 숨이라거나, 힘껏 쥐었던 시트의 촉감이라거나, 끼익거리던 침대의 소리. 그리고 몸 깊숙이 들어왔던 타인의 존재감. 그리고 체온.

이벨리나에겐 처음이 아닐 테니 의미를 두려 하지 않았는데, 내게 처음이라는 것은 역시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네.’

황태자가 찾아왔던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다. 그 후로 오늘까지 내 일상은 매우 평화로웠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대신전 내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편지도 없고, 꽃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좀 더 편하게 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이벨리나, 저는 좀 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그 말을 다시 상기하자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역시… 경험이 많다더니 이런 부분에서는 프로네.’

아무래도 일부러 나에게 부담 갖지 말고 생각할 시간을 준 것 같았다.

황태자의 일을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예복이 전부 입혀졌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신관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기다리고 있던 다른 신관들과 방을 나섰다. 내 앞으로 열 명, 내 뒤로 열두 명. 기도회에 비해서는 적은 숫자지만 이 정도면 행차라는 말을 써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다.

“먼저 어제 말한 대로 대신관에게 찾아가고 싶군요.”

건물을 나오자 혹시나 그들이 잊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말했다. 내 말에 제일 선두에 서 있던 신관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그쪽도 준비를 마치고 성녀님을 기다리고 있다며 조금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내가 가려 하는 곳은 다름 아닌 지금 몸져누워 있는 대신관의 자택이다.

‘데일런 대신관이라고 했지.’

몇 달 전에 갑자기 쓰러진 이후로 계속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 탓에 기도회에서 그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하여 상급 신관들이 얼마나 눈치를 보며 전쟁을 벌였던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카루스도 그중에 하나였었다.

‘그러고 보니 카루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후로 들은 적이 없네.’

카루스의 일은 전부 라트반이 담당하고 있다. 그를 만나서 물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라트반도 일주일 전부터 보이지 않아.’

레온 황태자를 돌려보낸 다음, 어지러운 머리를 좀 정리하고 나왔을 때 라트반은 이미 돌아간 후였다. 그가 황태자를 꺼려 해서 나에게 레온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었는데, 보란 듯이 그와 관계를 가졌으니 속으로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싶다.

‘일부러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문밖에서 황태자와 마주하고 있던 그의 표정을 생각하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사택에 갔었을 때는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냥 참고 있었던 것뿐이었나.

그렇게 복잡해지는 머리를 누르며 걷고 있을 때,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멀리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몸을 돌려 자신들의 길을 가려했다.

“잠시만요!”

그런 그들을 황급히 불러 세웠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기사들은 지금 자신들을 부른 거냐는 표정으로 확인을 바라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신관들 사이를 빠져나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미안하지만 혹시 라트반 경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단장님라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계속해서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럼 기사단으로 가면 만날 수….”

그때, 뒤에 서 있던 젊은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더니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만나서, 뭘 하려고?”

“시델!”

성녀에게 반말을 했다는 것도 큰 무례였지만 시델이라고 불린 기사의 시선에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적의가 담겨 있었다. 시델이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기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 뒤에 있는 신관들도 헉! 하며 놀라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었다.

“당신이 우리 단장님을 왜 찾는데? 네가… 읍! 읍읍!”

시델이 더 말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기사들은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리고 등을 눌러 그를 땅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부디 한 번만 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기사는 조용히 하라는 듯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시델의 옆구리를 걷어찬 다음 나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바닥에 있는 시델을 바라보았다. 다른 기사들이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누르려고 해도 계속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그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벌레도 이보다는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볼 것이다.

‘이게 보통 사람들이 날 보는 감정이겠지.’

오랜만에 보는 날것 그대로의 적의에 새삼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실감이 났다.

옆에 있는 기사들은 계속해서 시델을 제압하며 내 얼굴을 살폈다. 그들은 이벨리나가 그녀를 향해 무례한 말을 했던 자들을 어떻게 처벌했는지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대강 기억을 뒤져 보니 그들 대부분 지위가 박탈되어 내쫓겼다. 그냥 내쫓긴 것도 아니고 다들 지하 감옥에 오래 가두어 사람 꼴이 아닌 상태로 말이다.

나는 시델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둘만 있었을 때였다면 모를까, 이렇게 보는 사람이 많은 가운데서 성녀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면 그에 따른 처벌이 필요했다.

‘적당히 넘어가야겠어.’

마침 쓸만한 핑계도 있었다.

“조금 전의 무례는 처벌받아 마땅하나 지금은 데일런 신관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이제 곧 신의 곁으로 갈 사람을 만나기 전에 되도록 부정한 일은 피하고 싶군요. 그러니 시델 경에게는 한 달간의 검을 들지 못하는 처벌과 함께 기사단 구역에서 나오지 않고 근신할 것을 명령하겠습니다.”

그 말에 시델의 얼굴이 붉어졌다. 처벌 자체는 가벼웠지만 한 달간 기사가 검을 들지 못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멍하니 서 있는 신관들을 재촉했다.

“어서 데일런 대신관에게 가도록 하지요.”

“네…? 네!”

신관들은 서둘러 나를 안내했다. 이렇게 조용히 끝난 것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바라보건 말건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라트반을 만나려면 기사단으로 가야 하나.’

결코 그의 말을 무시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겨우 관계를 좀 회복하나 했었는데….’

이래서야 다시 원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힘이 쭉 빠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노력해야 다시 그와의 관계를 되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

“미친 새끼야!”

시델이 일어나 손을 털고 있자 옆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퍽 소리가 나도록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네가 성녀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드러내 놓고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아니면 기사단 그만두고 싶냐? 그러면 당장 옷 벗고 나가! 단장님께 폐 되는 일 하지 말고!”

단장에게 폐가 되는 일이란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뭘 잘못했냐는 듯이 기세등등했던 시델이 푹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새끼, 이제야 네 일이 단장에게도 영향이 간다는 걸 안 거냐?”

“아니, 그냥 내가 처벌받으면 되니까….”

“시끄러워. 단장에게는 우리가 보고하겠어. 그러니 너는 빨리 네 숙소로 돌아가.”

기사들은 그렇게 말하며 시델의 등을 거칠게 내려치고는 그의 검을 든 채 먼저 걸어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시델은 마저 기사단 정복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그러다 조금 전 자신을 내려다보던 성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젠장….”

여전히 고운 낯짝이다. 요즘은 성격을 죽이고 사는지 예전처럼 표독하고 서늘한 표정이 아니었다. 조금 초췌해진 것 같지만 어딘가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모습. 그런 성녀의 얼굴을 떠올리던 시델은 최근 라트반의 모습을 떠올렸다.

목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정 표현이 없는 라트반이었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간, 라트반은 시델이 기억하는 그가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얼굴에 그렇잖아도 짧은 말이 더욱 짧아졌다. 비는 시간에는 언제나 기사단 건물에 있었는데 이제는 곧바로 사택으로 돌아가 버린다.

‘성녀의 방에 다녀오신 이후로 그렇다고 들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함께 간 기사들에게 물었지만 그들은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은 말할 수 없다는 규율을 지켜야 한다며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델은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망할 계집이 도대체 우리 단장님에게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그저 심증만으로 하는 생각이 아니다. 조금 전에도 성녀는 분명 가는 길까지 멈추고 라트반의 안부를 물어 왔다. 그럴 사이가 아닌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설마 성녀가 단장님을 제 더러운 밤일에 끌어들이는 건….’

시델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성녀가 유혹한다 해도 넘어갈 라트반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혹하는 중인 건가?’

그렇다면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성녀의 방에서 돌아온 이후로 계속 기분이 나쁜 라트반. 기사들에게 그가 괜찮은지,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성녀.

시델은 성녀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입술을 물었다. 그의 눈에 이미 사라진 자를 향한 날카로운 빛이 서렸다.

데일런 신관의 처소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대신관의 처소인 만큼 성녀의 방에 못지않은 화려함이 있었으나 그의 방 안은 얼핏 보면 라트반의 방이 아닌가 싶을 만큼 최소한의 필요한 물건들만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데일런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는 충분했다.

“그럼 잠시 모두들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내가 말하자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문을 닫고 물러갔다. 이제는 가느다란 숨소리만 들리는 방 안에서 나는 대신관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병자 특유의 냄새가 훅 코를 찔렀다. 익숙한 냄새였다. 죽음이 가까워져 오면 나는 체취. 이것은 아무리 깨끗하게 씻는다 해도 사라지는 냄새가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대신관을 살펴보았다. 데일런이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남자가 아닐까 했었지만 대신관은 여자였다. 그녀를 보살피는 신관들의 말을 들으니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오늘은 물조차도 거의 넘기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알 수 있었다.

‘오래 버틸 수 없어.’

병원에서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식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곧 죽는다는 것을. 의사들은 그것을 확인하면 가족들에게 마지막을 준비하라 조용히 일러 주었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주름이 가득한 거친 손. 그녀는 내가 손을 붙잡았음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지금은 잠에 빠져 있으리라. 그리고 이 잠은 곧 아주 길고 깊게 이어질 것이다.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크게 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나는 마음속으로 대신관에게 용서를 빌었다. 굳이 오늘 곧 세상을 떠날 대신관을 찾아온 것은 그저 마지막 인사를 하고픈 생각으로만 온 것이 아니었다.

‘…알고 싶어.’

성력을 사용하게 된 후로 나는 밤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성력을 사용했다. 아마 살이 빠진 것도 분명 그것 때문이리라. 그 덕분에 처음 사용했을 때와 비교해 어설프게나마 어느 정도 성력의 크기나 형태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이 성력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칼에 깊게 베인 상처를 한 번에 치유하는 것을 보니 내가 갖고 있는 치유의 성력은 과연 얼마만큼의 힘을 보여 줄 것인가.

‘정말, 정말 죄송해요.’

사실 대신관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노화로 인한 쇠약함에는 성력이 거의 듣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성녀의 성력이라면 조금 호전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태가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결국 내가 하는 것은 성력의 힘을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그렇기에 대신관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대신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쥔 다음 정신을 집중했다.

곧 손 아래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크게 숨을 쉰 순간.

화르륵!

내 손을 타고 거대한 푸른 불길이 일렁였다. 최대한 침착하게 그것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내가 원하는 형태를 그렸다. 그러자 불길은 그 기세를 누그러트리더니 곧 형태를 바꾸었다. 이제 성력은 더 이상 불길이 아닌 푸른빛의 두꺼운 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것은 내 손에서 퍼져 나가 천천히 대신관의 몸을 감쌌다.

“……!”

순간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내 힘이 모조리 손으로 통해 흘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 차려.’

오늘 힘을 처음 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깊은 피로가 몰려왔다.

서재에 있던 책 중에서 성력에 대해 쓰인 것이 있었다. 무척이나 긴 책이었지만 지금의 내게 필요한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성력은 신이 준 힘이기에 신이 정한 법칙을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성력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없고, 늙어 가는 자를 젊게 만들 수는 없었다. 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상처와 독과 전염병.

그 외에 성력은 몸을 지키는 힘이 있다. 성녀와 대신관 그리고 일부의 상급 신관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성력을 이용해 보호 결계를 만든다. 그것은 어지간한 무기 정도로는 절대 깨어지지 않으며 마수들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대륙은 성녀의 성력으로 만들어진 보호 결계 아래 지켜지고 있는 땅이다. 그렇기에 성녀가 쇠약해질 때는 마수들이 그 결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사람들을 사냥했다.

그렇기에 성녀는 대신전 안에서 지정된 날 외에 사람들의 치료를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대륙 모든 부상자들을 성녀가 감당해야 했고 그렇게 되어 성녀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쇠약해지면 대륙 전체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아직 괜찮겠지.’

그간 틈틈이 연습할 때 힘이 들긴 했지만 자고 일어나면 다시 성력은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 대륙을 지키는 힘은 멀쩡할 것이다.

다행히 곧 어지러움은 사라졌다. 그리고 대신관을 덮었던 성력도 차분하게 진정이 되었다. 그 빛을 보며 나는 새삼 감탄했다. 성력은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안도감과 차분함을 주었다. 동시에 저것은 절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힘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덕분에 신앙심이 생길 정도야.’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크게 둘로 갈린다. 미친 듯이 신에게 매달리는 사람과 신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며 격렬하게 부정하는 사람. 나는 후자였다. 나중에 들어 보니 젊은 나이로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후자가 많다고 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성력을 보며 짧게라도 기도를 올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

조용히 대신관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녀의 손이 움찔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곧,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보더니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 녀님?”

“좋은 아침이에요, 데일런 대신관. 몸은 좀 어떤가요?”

내 인사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제 몸을 감싼 빛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저에게 성력을 쓰셨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왜 쓸데없는 짓을 했냐고 웃으며 가볍게 타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

‘이게 성력이 가진 힘이구나.’

조금 전까지 의식도 차리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이 눈을 뜨고 또렷한 정신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놀라운 힘인 것은 틀림없었다.

대신관은 그렇게 말하고 나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변하신 것 같군요.”

“……!”

그 말에 몸이 움찔 떨렸다.

“…무엇이 변한 것 같나요?”

혹시 대신관은 내가 이벨리나가 아닌 것을 바로 알아차린 것일까? 나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일단… 저에게 왜 아직도 죽지 않았냐고 물어보지 않는 것을 보니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만.”

“…….”

대신관의 말에 급히 이벨리나의 기억을 뒤졌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기고 나서야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것 같은 대신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은 이벨리나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신전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일까? 대신관도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이다. 기억 속의 대신관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이벨리나 역시 그녀를 잘 따르고 있었다. 대신관과 이벨리나의 사이가 좋은 것은 그녀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도 계속 되었다.

‘그런데 왜 이런 대신관과 사이가 틀어진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기억을 뒤적였다. 그러다 갑자기 대신관의 모습이 바뀌었다. 바로 그 전의 기억과 달리 대신관의 얼굴에는 주름이 늘어났고 몸은 부쩍 쇠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벨리나는 그런 대신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대신관께서 이리도 제멋대로이신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 허가도 없이 신전기사단을 보내려 했다구요?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더니 이제 당신이 성녀의 머리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 말에 무척 당혹스러워 하는 대신관과 신관들이 보였다.

“하지만 성녀님! 그곳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모두 죽고 말 겁니다.”

“…그렇다면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녀님!”

“나는 절대로 그곳에 기사단을 보내지 않을 터! 거기서 죽는다면 그것이 신의 뜻이니 알아서 버티라고 하세요!”

어딘가를 도와야 하는 문제로 성녀와 대신관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 장면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 후로 드문드문 남아 있는 대신관과의 기억은 하나같이 차갑기 그지없는 것들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중간에 몇 년 치의 기억이 없다. 마치 책의 가운데를 찢어 낸 것처럼 말이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처럼 따르던 대신관에게 이렇게 소리를 칠 정도로 사이가 나빠진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이벨리나의 기억을 보고 있을 때, 대신관의 손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제가 누워 지내던 사이에 기도회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모두가 힘들었을 텐데 제가 게을러 아직 신의 곁으로 가지 못한 탓에 많은 자들이 고생을 하고 있군요, 어서 이 자리를 비워야 할 텐데 말입니다.”

“…….”

“…다음 대신관은 누가 될지 정해졌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대신관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진심으로 대신전과 성녀를 걱정하는 마음을 그녀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후보는 많지만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요….”

대신관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 순간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중에서 카를 신관을 추천하는 목소리가 많더군요.”

그러나 갑자기 대신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오오, 신이시여. 드디어 카를 신관과 화해하시는군요. 그가 대신전으로 돌아오는군요. 그 험한 땅에 버려졌던 그 불쌍한 신관이!”

처음 듣는 카를에 대한 정보였다. 대신관에게 그에 대해서 더 물으려는 순간.

“……!”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의 반응이 아니다. 전에 카를 신관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이벨리나가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최대한 평정을 가장해 대신관에게 물었다.

“그가 다음 대신관이 되기를 바라나요?”

“물론입니다. 그 이상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녀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저는 이제 당장 신께 불려 가도 여한이 없습니다. 비록 저는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부디 예전의 그 모습을 성녀님과 카를 신관이 되찾았으면 합니다.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절을 말입니다.”

나는 잡고 있던 대신관의 손을 놓았다. 이제는 숨길 수 없을 만큼 이벨리나의 몸이 떨려 오고 있었다.

‘왜?’

왜 이벨리나는 카를 신관의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반응하는 거지? 도대체 그가 누구길래?

나는 떨리는 몸을 부여잡았다.

어쩐지 멀리서 이벨리나가 울부짖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신관이 있는 방을 나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울며 잘되었다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성력을 거두었다. 그리고 처음 만난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 내일쯤이면 대신관은 숨을 거둘 것이다.

‘성녀의 성력으로도 죽어 가는 자를 붙들어 놓는 것은 이 정도가 한계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내 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저번처럼 이벨리나의 몸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사람과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벨리나와 카를은 사이가 좋았어.’

대신관은 무려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절’이라고까지 말했다. 그 후로도 대신관은 간간히 카를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몸이 불편하고, 무척이나 조용하고 차분하며, 어려서 신전에 들어온 이벨리나를 무척이나 아꼈던 신관. 그리고 이벨리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를 험한 곳으로 보냈다.

고개를 들자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대신관은 좀 전에 다시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신의 곁으로 보낼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내 말에 신관들은 짧게 성호를 그리고 기도를 하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오늘 처음 만났고 오늘 이별하는 자를 위해 짧은 성호를 그었다.

***

다시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중앙 신전이었다. 기도회를 했던 곳이기에 낯이 익은 곳이기도 했다. 그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의 입구에 들어서자 돌로 지어진 건물 특유의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안쪽으로 드시지요.”

그들을 따라가자 곧 문부터 거대하고 화려한 곳에 도착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중앙 신전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방이며, 상급 신관 이상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문을 열자 길게 이어진 테이블이 보였고 그 앞에 서 있는 신관들이 있었다.

내가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그들은 모두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중요한 날에 입는 예복을 말이다. 금실로 수놓은 섬세한 자수가 모두의 옷 위에서 반짝이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대신전 안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인지를 보여 주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다음 서 있는 신관들에게 말했다.

“모두 앉도록 하세요.”

카펫 뒤로 의자가 밀리는 소리들이 들리며 서 있던 모든 이가 착석했다. 그러자 저 멀리 방의 구석구석에 서 있는 중급 신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중급 신관이 절대로 낮은 위치인 것은 아니다.

대신전은 한 명의 성녀와 한 명의 대신관, 서른여섯 명의 상급 신관, 백십 명의 중급 신관, 천오백 명의 하급 신관 그리고 나머지 수를 세기 힘든 평신관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 안에 상주하는 사람들은 어림잡아도 4만 명 이상. 그중에서 백십 명이니 대신전 어디를 돌아다녀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위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니었다.

중급 신관들은 의자도 받지 못한 채, 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착석한 자들은 대신전에 있는 상급 신관들이었다. 게다가 평소 상급 신관의 일부는 대신전을 떠나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하면서 돌아다닌다. 그렇기에 모든 상급 신관이 모이는 모습은 무척이나 보기 힘든 것이었다.

기도회 때에도 다 모이긴 했지만 그때는 각각 맡은 바 위치에 나누어져 있었기에 이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앉아 있는 상급 신관들을 보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하지.’

이렇게 모든 상급 신관이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새로운 대신관을 뽑기 위해서였다.

대신관은 종신제이기에 한번 임명이 되면 보통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는다. 물론 나이가 많은 자가 대신관에 오르면 다음 대신관을 뽑기까지 그 기간이 짧아지기도 한다.

나는 다시 앉아 있는 상급 신관들을 살폈다. 몇 명이 흘끔거리며 내 시선의 끝을 살폈다. 그곳에는 주인이 없는 의자가 있었다.

‘카루스의 자리군.’

어쩐지 그곳을 바라보는 상급 신관들의 얼굴이 웃음을 참는 것 같더라니.

카루스는 아직 대신전의 지하 감옥에 있다. 상급 신관이 작정하고 성녀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것이 알려져 봤자 좋은 일이 없기에 그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외부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려지겠지만 아마 한참 후가 될 것이고, 카루스라는 상급 신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때일 것이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상급 신관들은 카루스가 사라진 것을 반갑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름대로 강력한 대신관 후보였으니.’

카루스는 이벨리나에게 열심히 엎드려 긴 덕분에 그녀의 부름을 꽤나 자주 받는 신관이었다. 그와 이벨리나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다른 상급 신관들의 불안은 커졌다. 그만큼 자신들이 대신관이 될 기회가 멀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카루스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즐겁겠는가.

‘어차피 다 카루스와 비슷한 사람들이야.’

이벨리나는 대부분의 상급 신관들을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자들로 채웠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상급 신관들의 많은 수가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전부 다 엉망이면 아무래도 일이 곤란했던 모양인지 다행히 몇 명 정도는 멀쩡한 상급 신관을 앉히기는 했다.

그들은 그저 침통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덕분에 구분하기가 편하네.’

데일런 대신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침통해하는 자들과 어서 빨리 그 자리가 비기를 바라는 사람들. 필사적으로 표정을 숨긴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를 읽어 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상급 신관의 자리에 남길 사람들과 갈아 치울 사람들을 기억하고는 말했다.

“오늘 이렇게 모든 상급 신관을 소집한 이유는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조금 전 데일런 대신관을 만나고 왔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제 곧 우리와 함께할 시간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있습니다. 곧 신의 부름을 받고 떠나겠지요.”

“오, 이런….”

“신이시여. 부디 그녀에게 평안을.”

표정에서 읽히는 감정과 달리 그들은 능숙하게 애도의 말을 뱉었다. 그런 모습을 더 보는 것도 어쩐지 기분이 나빠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대신관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었기에 그동안 신전의 많은 일이 쉽사리 처리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최대한 빠르게 대신관의 임명을 진행하고 싶군요. 일단 얼마 전 조건에 합당한 사람들의 명단을 받았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상급 신관들의 얼굴에는 아직 여유가 보였다. 상급 신관들은 무조건 대신관의 후보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일단…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와 함께 나눌까 합니다. 물론 여기 계신 분들에 대한 대화는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한 분들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거짓말이다. 이벨리나의 기억을 다 본다 해도 어떤 사람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데일런 대신관의 소식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 자들 외에는 알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제가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분들은… 대신전 외부에 있는 분들입니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제야 상급 신관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

“에이든 신관은 좋지 못한 소문이 많습니다. 가는 신전마다 언제나 많은 불평이 섞인 편지가 오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것이 대부분 신전의 규율을 엄격히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생긴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니 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조용히 상급 신관들의 열띤 토론을 구경하고 있다.

명단이 돌아가고 위에서부터 이름을 읽자마자 상급 신관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열심히 열을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화의 패턴은 비슷했다. 이러이러해서 명단에 올랐다고 말하면 누군가가 그에 대한 결격 사유를 말하고 다른 또 누군가가 그것이 검증된 사실인가에 대해서 반박하고.

‘앞으로 한 40명은 있는데….’

한동안은 계속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지쳐 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겨우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다음은 카를 신관입니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왔다. 자세를 바로 하고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는데.

“…….”

“…….”

대신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행동에 내가 물었다.

“카를 신관에 대해 하실 말씀들은 없나요?”

“카를 신관이라면야….”

“저희보다 성녀님께서 더욱 잘 알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상급 신관들의 얼굴에는 거북함이 가득했다. 신기한 일이다. 그들에게 탐탁지 않은 사람이라면 먼지만 한 단점이라도 찾아서 이래서 부적합하고 저래서 부적합하다 하는 소리를 할 텐데. 카를 신관을 분명 꺼려 하면서도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뒤쪽에서 대신관을 위해 진심으로 추모의 기도를 올렸던 상급 신관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번 기도회 때 내가 임시로 대신관의 대리에 지명했던 중년의 여성이었다.

“솔직히… 카를 신관님이라면 지금까지 명단에 있었던 분 중 가장 적합한 분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께서 대신전을 떠난 지도 벌써 7년이 되었던가요? 대신전에 머무를 때도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분이고 지금은….”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마수들의 땅이나 다름없는 대륙 끝의 신전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돌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도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사실 그분께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당분간이라도 대신전으로 일단 돌아오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처음 듣는데. 일단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실 편지에 그분께서 무척이나 성녀님을 그리워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대신전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내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그 말에 나는 손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또다. 또 이벨리나의 몸이 반응하고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주먹을 쥐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도록 해요.”

이쯤 되면 꼭 대신관의 임명에 관한 일이 아니더라도 그 카를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왜 이벨리나가 그의 기억을 다 지워 버린 것인지 알고 싶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은 이벨리나를 공격할 무기가 될 수 있어,’

그러니 최대한 빨리 대신전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이벨리나가 다시 나를 부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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