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새끼…?”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게다가 좀 전의 이벨리나의 말과 편지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
“꺼져.”
이벨리나가 차갑게 말하며 나를 밀어냈다. 그러더니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다음번에도 네가 웃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되네.”
그렇게 말한 이벨리나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마치 발아래가 꺼진 것처럼 빠르게 내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심장이 철렁이는 낙하감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다음번이라는 말에 이벨리나가 언젠가 다시 나를 이 어둠 속으로 불러낼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떨어지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눈을 뜨는 순간, 나는 이벨리나를 향해 허우적거리고 있던 내 손을 보았다.
“……!”
그 순간,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익숙한 천장이 아니다. 공기도 낯설었다. 언제나 꽃향기가 가득했던 성녀의 방이 아니었다. 대신 옅은 비누 냄새와 함께 낮게 깔린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옆을 더듬었다. 역시나 평소에 잠들었던 내 침대가 아니다.
부드러운 시트 대신에 뻣뻣하고 거친 천이 만져졌다. 어딘지 서늘한 그 감촉을 느끼다 나는 이 공간의 향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트반?”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빠르게 잠들기 전에 있었던 기억이 전부 되살아났다. 그래, 레온 황태자와 잤고 라트반을 만났고 그의 사택으로 와서 씻었다가….
“…그대로 잠들었구나.”
맙소사. 그가 차를 가지러 간 사이에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것을 기억해 낸 순간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으….”
그러자 다리 사이의 묵직한 통증이 찌르르 퍼져나갔다. 잊고 있었던 가슴의 얼얼함도. 슬쩍 옷을 들어 바라보자 씻을 때보다 더욱 붉어진 흔적이 남아 있는 가슴이 보였다.
울었기 때문일까. 부은 눈을 힘겹게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넓고 큰 침대 위였다. 침대의 헤드를 보자 만들어진 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칠이 긁혀 벗겨진 자국에 오랜 세월 써 온 가구 특유의 반질거림이 보였으니까.
“이거 분명히….”
나도 모르게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얼굴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슬쩍 코를 묻었다. 역시나. 잘 세탁된 천의 냄새와 함께 욕실에 있었던 비누의 냄새와 조금 무거운 체향을 맡을 수 있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라트반의 침대다.
“…미쳤어.”
정말 골고루도 했다. 울고 매달리고 집으로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남의 침대까지 멋대로 사용했다. 미안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혀 보니 아직 하늘은 새벽의 새파란 빛이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돌아가야지.’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
조심스럽게 걸어 문을 열고 나왔다. 천천히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거실로 나온 순간.
“일어나셨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몰래 나가기는 틀렸군.’
민망하고 미안해서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이 집을 나가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기사단장의 집에서 몰래 나가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라트반은 그렇게 말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옷을 벗긴 했지만 그는 어젯밤 보았던 차림새 그대로였다. 이대로 설마 밤을 새운 건가?
“설마, 라트반 경… 저 때문에….”
이 집 안의 물건들을 보아하니 짐작이 갔다. 여분 따위도 없이 오직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놓여 있는 집이다. 아마도 이 저택 안에 내가 잠들었던 곳 말고 다른 침실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일어선 그를 보니 어쩐지 몇 시간 전보다 얼굴이 조금 수척해 보였다.
“아닙니다. 그보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 말했다.
“돌아가시려면 되도록 빨리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다행히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나는 무사히 성녀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밤에 나갔다는 사실은 문 앞을 지키던 신관들만이 알고 있었다. 라트반은 알아서 그들의 입단속을 시키겠다고 말한 다음 푹 쉬라며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덕분에 일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조금 더 잠들 수 있었다.
“이건 어쩐다….”
시중을 드는 신관들이 들어오기 전, 옷을 갈아입은 나는 그에게 받았던 평신관복을 곱게 개어 안쪽의 서랍장에 넣어 두었다.
‘세탁해서 돌려줘야 할 텐데.’
그가 아주 어렸던 시절에 받았던 예복이다. 아직도 누군가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보니 그에게 소중한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신관들에게 맡길 수도 없어.’
이 옷 안쪽에 너무나도 확실하게 수가 놓여져 있는 라트반의 이름이 보였다. 그의 옷이 내 방에서 나오면 무슨 소문이 퍼질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어차피 내 평판은 더 떨어질 것도 없지만….’
라트반은 아니다. 이 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에게 새로운 기사단장을 지명해 보는 것이 어떻냐며 자신들이 아는 이름을 들이밀던 신관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만약 그에게 나와 관련된 소문이 붙는다면 그것은 그가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방향의 소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
언젠가 틈을 봐서 내가 혼자서라도 빨아 돌려줘야 할 것 같다.
***
지난 밤, 황태자와의 정사 때문에 피곤하다 하더라도 일정을 물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른한 몸을 이끌고 서재로 가자 기다리고 있던 신관들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냥 잠을 좀….”
“이건 다음으로 미뤄도 될 것 같군요.”
적당히 말을 흐리자 신관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뭐라 수근대더니 곧 들고 온 서류들을 덜어 내었다. 그런 신관들 중에는 저번에 뒷부분 서류를 가져오겠다고 말한 신관도 있었다.
그런 신관들을 보면서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성녀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금 이렇게 일을 하는 것도 워낙에 저지른 잘못이 많아 수습을 해 보려고 성실하게 일하는 척한다는 말이 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문들이야 어떻든 지금 여기에 있는 신관들이 나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게 어디야.’
몇 명 되지 않지만 그래도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이 대신전 안에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다. 유치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벨리나에게 ‘넌 이런 사람들 없지?’라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물론 그녀는 그딴 건 필요 없다고 하겠지만.
다시 일이 시작되고 서류를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이벨리나가 기억을 닫지 않았어.’
꺼지라는 말과 함께 나를 밀었던 그녀다. 내가 힘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그녀일 텐데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기억을 볼 수 있었다.
‘나를 생각해서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다고 내가 성녀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아닐지 걱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내가 아무런 무리 없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대로 기억을 놔둔 것일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둠 속에서 이벨리나를 만났던 것이 다시 생각났다. 그녀가 마지막에 나를 밀었고 떨어지면서 보았던 내 손이….
“……!”
나는 곧바로 앞으로 팔을 뻗어 손을 살펴보았다.
“왜….”
분명 떨어질 때 보았던 손은 이 손이었다. 죽기 전에 보았던 주사 자국과 얼룩이 가득한 손이 아닌 바로 이 손.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처음 의식 저편에서 이벨리나를 만났을 때는 예전의 내 몸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왜 이벨리나의 몸이었던 거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다른 신관이 제 차례가 되어 새로운 서류를 가져왔다. 그것을 몇 번 뒤적이며 읽어 본 다음 나는 곧바로 서명을 했다.
“…어?”
그러다 알아차렸다. 조금 전 서류를 처리할 때, 한 번도 이벨리나의 기억을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 꽤 많이 알게 되었으니까.’
신기하게도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본 것들은 빠르게 외울 수 있었다. 덕분에 이제는 어지간한 기도문들도 보지 않고 전부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신전에 대한 다른 지식들도 마찬가지다. 불에 닿으면 뜨겁다는 것을 곧바로 배우듯이 그녀의 기억 속에서 본 지식들은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안에 남았다.
‘이 상태로만 계속 간다면.’
이벨리나의 기억이 없더라도 성녀의 일을 해내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그녀가 기억을 닫을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생각을 이어 가다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봤자 2년 후에는 다 필요 없잖아?’
계속해서 많은 일들이 생기는 탓에 잠시 잊고 있었다. 2년 후면 이 몸은 모든 성력을 잃는다. 그리고 이리스가 새로운 성녀가 된다. 2년 후까지 내가 살아 버티더라도 어차피 할 수 없게 되는 일인데.
‘이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나?’
물론 지금은 해야 하겠지만 다른 일도 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2년 후, 대신전을 나가서도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 말이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한번 상상을 하기 시작하니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역시 돈을 융통하는 일이었다. 돈만큼 확실하고 안정적인 것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돈이라면 이 대신전 안에 넘치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이 넘치는 것이지만.
‘공물들.’
소설 속에서는 이벨리나가 함께 밤을 보낸 남자들과 제 맘에 드는 신관들에게 펑펑 나누어 주던 물건들. 당연히 내가 이 몸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나눠 준 일은 없다.
‘그것들을 좀 빼돌리면 될 것 같은데….’
돈에 대한 것을 생각하자 머리는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금덩어리 같은 것은 오히려 무겁고 처분하기 힘들다. 아주 작은 보석이나 액세서리라면 밖에서 돈으로 바꾸기 쉽지 않을까. 물론 성녀에게 바쳐진 모든 것들이 나중에 나타날 이리스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쪽은 목숨이 걸린 문제다. 큰 것들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작은 것 몇 개 가져가는 정도라면 나중에 그것을 되찾겠다고 찾아오지는 않겠지.
제국에서 보냈던 거대한 공물의 더미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대신전 밖으로 나가 봐야겠어.’
이벨리나는 성녀가 된 후로 대신전을 나간 일이 거의 없다. 일단 성녀가 움직이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다. 마수들이 대규모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성녀는 대신전에 있는 것이 원칙이니까.
‘소설에서 상황이 몇 번 묘사가 되어 있긴 했지만 그걸로 정확히 알기는 힘들어.’
글에서는 대부분 이리스의 상황을 설명할 때, 바깥의 모습이 그려졌었다. 하지만 이리스는 대신전과 무척이나 먼, 대륙의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이 주변의 묘사 역시 대단한 것이 없었다.
‘마을을 찾지 못해서 위험하게 산을 넘어 다녔던 이야기들이 더 많았으니….’
그나마 드문드문 나왔던 이야기들도 당장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실, 잠들기 전에 가볍게 읽었던 책이었기에 자세히 기억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렴풋이 ‘대강 이런 분위기다’라는 식으로 기억할 뿐.
‘역시 밖으로 나가 봐야겠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먼저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비밀 통로 중의 하나가 대신전의 입구 쪽으로 연결이 되어 있긴 하지만….’
아마 옷장 뒤에 있는 통로가 대신전의 입구로 연결이 되었던 것 같다.
‘그걸 이용하기가 쉽지는 않겠지.’
후원으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는 이벨리나가 자주 이용을 한 상태였다. 게다가 통로가 있는 방에서 후원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도 않았기에 빛 하나 없는 통로라 하더라도 벽을 잡고 어떻게든 걸어갈 수 있었다.
건물의 안쪽에 있는 통로는 그래도 좀 괜찮았지만 밖이 가까워지면 벽에 스멀거리며 기어가는 벌레들이 몇 번이고 손끝에 잡혔던 데다가 물이 고여 있는 곳도 꽤 있었다.
자주 이용하고 가까운 통로가 그 정도인데.
‘이벨리나는 대신전의 입구 쪽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어.’
이벨리나 이전의 성녀도 그곳을 자주 사용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곳은 얼마나 오래 방치된 것일까.
‘사람이 거의 다닐 수 없는 상태일지도.’
한번 걸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전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와 같다. 그리고 내 방은 대신전의 입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 먼 거리를 빛 하나 없는, 관리되지 않은 통로로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부터 몰려왔다.
‘최악의 경우에는 어딘가 무너져 있을지도 모르고.’
마음 같아서야 신전의 인원을 동원해서 살펴보고 싶지만 성녀만이 알고 있는 곳이니 부탁을 할 수도 없다.
‘그럼 일단 그 통로를 사용하는 방법은 접어 두고….’
대신전 밖을 나가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공식적인 일정을 만들어 나가거나 아니면 평신관이나 신전을 방문하는 일반인으로 위장해서 나가거나.’
공식적인 일정은 내가 나가고 싶다고 해서 바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녀는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일단 웬만해선 대신전을 벗어나는 일이 없고, 혹여나 벗어난다고 해도 출정을 나간다거나 대신전 전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동원된다. 그렇다면 역시 남는 것은 일반인으로 위장해서 나가는 것뿐이다.
제일 편하고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안전.’
괜찮겠지, 라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변장만 하고 나갈 마음은 조금도 없다. 아무리 대신전에 익숙해지고 이 몸에 익숙해지고 있어도 이곳은 나에게 다른 세계다. 아직도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에 놀랄 때가 있다. 게다가 이곳은 마수들이 출현하는 세계. 사람들은 내가 있던 세상보다 더 죽음에 익숙해져 있다. 그만큼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세계라는 소리다.
‘그런 곳으로 무작정 나갈 순 없지.’
한숨이 나왔다. 나는 손을 바라보았다.
‘성력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성력은 쉽게 말해 보호하는 힘과 치유하는 힘이다. 특히나 성녀의 성력은 이 대륙 전체를 마수들로부터 지킬 정도로 막강하다. 그런 성력을 몸 하나 지키는데 사용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진짜 이벨리나라면 말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돈과 대신전 바깥을 생각하고 있을 때, 신관 하나가 큰 서류 더미를 들고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곧 드리겠습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더니 허겁지겁 서류 더미를 묶은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단단히 묶여 있던 끈이었는지 잘 풀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짜증이 났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 신관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주변의 신관들에게 혹시 단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냐 물었다.
곧 그들 중, 단검의 소지를 허가받은 자가 조심하라며 신관에게 단검을 건네주었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며 단검을 끈에 대고 힘을 주었다.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서류를 묶었던 끈은 쉽게 잘려 나갔다.
“어휴, 진작에 빌릴 걸 그랬습니다. 여기… 앗!”
신관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모두가 한숨을 쉬었다.
‘조심하라고 했는데.’
끈을 무사히 잘라 낸 것에 신나서 그것을 돌려주려 하다가 제 손을 베어 버린 것이다. 놀라 움켜쥔 손 사이로 금세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곧바로 일어서 그 신관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깊이 베인 것 같은데 지혈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괜찮습니까? 서두를 필요 없었는데 왜….”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잡은 순간이었다.
화악!
갑자기 내 손에 푸른빛이 폭발하듯 나타났다. 세차게 일렁이던 그 푸른빛은 다친 신관의 손을 휘감았다.
“……!”
서재에 있는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뚝뚝 흐르던 피가 순식간에 멈추더니 곧 신관의 손에 있던 깊게 벤 상처가 사라진 것을. 이제 그의 손에 남아 있는 것은 조금 전 흘렸던 피의 흔적뿐이었다.
“오….”
“이런, 이것 참 오랜만에 보는군요.”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불꽃 같지 않습니까?”
내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 서 있던 신관들에게서 감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이걸 보고 있던 내 스스로가 제일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성력?’
순식간에 타올랐던, 거대한 푸른 불.
거대한 일렁임과는 달리 뜨거움은 없었다. 다만 기분이 좋아지는 따스한 온기만이 손끝에서 맴돌았을 뿐이다. 나는 눈에 남은 불꽃의 잔상을 훑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불꽃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성력의 불꽃을 보고 나니 마음 어딘가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따뜻하고도 그리운 느낌.
‘이래서 사람들이 신을 믿고 성녀를 따르는 거였어.’
사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대신전과 성녀를 향한 사람들의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기도회에 몰려든 엄청난 인파를 보고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절실하게 만드는 것인가 싶었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어… 성녀님께서 제게 성력을 써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손을 다쳤던 신관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은 마치 오랫동안 사랑하던 사람을 만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긴, 신관들에게 성력은 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징표이니 신을 향한 길을 걷기로 맹세한 그들에게는 성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겠지.
그렇게 다른 신관들의 감격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손을 살폈다. 그리고 손끝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정신을 집중하며.
화르륵!
다시, 조금 전에 보았던 푸른 불꽃이 내 손끝에서 일렁였다.
성력을 쓸 수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미친 듯이 일을 끝낸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성력을 끌어내었다. 놀랍게도 그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성력이 손 위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저 모닥불과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불러내는 것을 반복하자 어느 정도 형태도, 그 크기도 조절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몇 번째인지 모를 성력을 불러낸 후, 나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느새 이마 위에 맺힌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거…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책에서 이리스가 성력을 쓸 때,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분명 내가 지금 무리해서 쓰고 있거나 아니면 성력을 쓰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새가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런 기분일까?
성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들떠 쿵쿵거리는 가슴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왜 갑자기 성력을 쓸 수 있게 된 것일까.’
이렇게 간단하게 쓸 수 있는 것인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쓸 수 없었던 걸까.
“모르겠다….”
어차피 혼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팔다리를 쭉 편 채로 누워 있다가 갑자기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성력을 잃기 시작한 이벨리나는 더욱 더 신경질적으로 되어 가며 난폭해졌다. 이리스가 나타나기 직전에는 제 시중을 들다 실수했다는 이유로 신관의 손을 부러트리라고도 명령했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혀를 자르라고도 했다. 그러다 이리스가 신전에 도착한 직후, 그나마 겨우 남아 있던 성력마저도 완전히 사라지자 이리스를 죽이려 달려든다.
어이없지만, 지금 왜 이벨리나가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다.
굉장한 힘을 넘치도록 갖고 있었다. 게다가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영원히 제 것이라 믿었겠지.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리스가 제 성력을 모두 가져갔다고 하면.
“하….”
확실히, 그 누구라도 이성적으로 대할 수는 없었으리라.
‘일단 힘을 쓸 수 있게 된 건 좋은데 아직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야.’
지금은 성력 그 자체로 발현시키는 것만이 가능하다. 이것을 좀 더 능숙하게 쓸 수 있어야 밖에 나갔을 때,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텐데.
‘연습을 해야겠는데 이 정도로 이렇게 지쳐 버리니.’
이제 2년 후, 성력이 나에게서 사라진다는 사실은 머리 한구석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어떻게든 성력이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만이라도 이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분명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일이지? 곧 다급한 신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녀님, 레온 황태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레온 황태자라는 말에 저절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손으로 아랫배를 눌렀다. 성력을 쓸 수 있게 되었던 탓에 까맣게 잊고 있던 통증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안 갔어?’
황태자쯤 되고 제국의 사절단도 와 있으니 곧바로 돌아가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 준비를 하려면 하루 이틀 정도는 걸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찌 되었든 황태자는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접견에서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을 때가 생각났다. 오직 나만 알 수 있게 혀로 쓸었던 그 감각. 그리고 그 후로 계속해서 보내왔던 편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건 어느 순간 그는 나를 여자로 대하고 있었다.
‘혹시….’
모욕이라고 느껴 따지기 위해 찾아온 것일까? 어젯밤, 내가 방을 나가려고 할 때 그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복도에서 라트반을 만났을 때는 더욱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신전이 짜고 자신을 함정에 빠트렸다고 생각했을지도.’
어제의 상황은 황태자를 궁지에 몰려고 하면 얼마든지 몰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일절 없었기에 그를 놔두고 오긴 했지만 복도에 홀로 남겨진 황태자가 어떤 상상이나 추측을 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사실 황태자의 입장에서는 모욕적인 일이다. 어제 내가 한 짓은 속된 말로 먹고 버리는 일이 아니었던가. 내 필요에 의해 끌어들인 다음 이득을 취하고, 그 이득을 취하자마자 곧바로 그를 두고 나와 버렸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곧바로 이곳을 떠나야 더 상황에 맞는 거 아닌가?’
황태자로 태어나 그런 취급을 당해 본 적이 없을 사람이다. 사실 처음 염려했던 건, 그가 대신전을 떠난 후 곧바로 제국의 군대를 끌고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그와 나의 문제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크게 떠들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 덕분에 그럴 확률은 적었지만 말이다.
“황태자님, 물러서 주십시오! 허가 없이는 이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사이 밖에서 들려오는 신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일단은 나가 봐야겠다.’
소리를 들어보니 이대로 가만히 있었다가는 레온 황태자가 큰일을 칠 것 같았다. 허가 없이 신관들이 있는 곳을 넘으면 성녀 그리고 대신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대신전의 규율 중 가장 엄격하게 지켜지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황태자가 그것을 모르고 그 선을 넘는다면 내가 괜찮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러는 사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커졌다.
“만나 주시기 전에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커진 레온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때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건 분명히….’
“라트반 님!”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어젯밤 복도에서 있었던 일의 재현이다.
‘이대로 놔둘 순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역시나, 밖에는 내가 생각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만 뽑아 들지 않았을 뿐, 당장이라도 불꽃이 튀길 것처럼 노려보는 황태자와 라트반이 서 있었던 것이다.
황태자 뒤에 있는 제국 사절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라트반 뒤로 보이는 신전기사들 역시 ‘지금 황태자를 잡아야 하는 거야?’라며 곤란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보더니 나를 보았다.
“…….”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둘을 번갈아 보던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일단 레온 황태자님과 이야기가 조금 필요할 것 같군요.”
***
테이블의 맞은편에 어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황태자를 보자 머리가 아파왔다. 조금 전까지 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하늘을 날 것 같았던 기분은 이제 내 안에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오늘 내내 무의식중에 잊으려고 했던 어제를 이렇게 마주하는 기분이란….
‘신을 찾고 싶다.’
당장이라도 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신에게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레온 황태자를 보던 나는 내 마음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생각만큼 자괴감이 든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조금 민망하고 미안할 뿐이다. 그렇다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어제 내가 한 행동은 살아남기 위해서 했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지나가는 남자를 잡아끌어 몸을 섞은 것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위협받아야 할 만큼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제로 몰아붙인 것도 아니고 나는 분명히 황태자에게 물어보았다. 원하지 않으면 말하라고. 그리고 그는 승낙했었다. 어디까지나 합의하에 이루어진 관계였다는 소리다.
‘마무리가 별로여서 문제였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다 그대로 굳고 말았다. 아직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인데 이렇게까지 편안히 그를 대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놀랄 지경이었다.
‘당분간 몸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서 그런 것일까?’
어제 그를 안을 때는, 죽기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은 없다. 어제 이벨리나의 태도를 보았을 때 그녀는 당분간은 나를 찾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면 또 뭔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거나 예전처럼 아침마다 뭐라 말이라도 했겠지.
고개를 드니 황태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제는….”
“어제는….”
그와 나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가 동시에 서로 입을 다물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황태자였다.
“죄송하지만 먼저 말하겠습니다.”
나보고 먼저 말하라고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가 먼저 말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괜찮습니다.”
당장이라도 어제 왜 그렇게 돌아갔느냐고 따지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과 다른 말이 나오니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하고 말았다. 나는 다시 황태자를 살폈다. 그의 시선은 내 예상과는 달리 차분했다. 동시에 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어젯밤 보였던 정염은 없었다. 다만 오싹할 정도로 차분히 가라앉은 냉정함이 고여 있었다.
“…….”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것이… 레온 황태자.’
지금까지 보아 왔던 모습과 달리 이제 그의 모습 어디에도 가벼운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새삼 그가 어떤 인물인지가 생각났다. 경박해 보이는 말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한 나라의 멸망을 명령하는 자가 레온 황태자였다.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잔혹하고 냉정해지는 자.
그 사실을 떠올리자 식은땀이 흘렀다.
‘실수한 것 같아….’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을. 내 생각보다 레온 황태자는 더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어제 성녀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어떤 목적으로 그러셨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만약, 다시 어젯밤과 같이 누군가를 찾게 된다면 그때는 곧바로 저를 찾아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네?”
전혀 상상하지 못한 말을 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가 말했다.
“이벨리나, 저는 좀 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
성녀의 방 앞에 서 있는 신관들은 손가락 끝만 만지작거리며 라트반을 보았다. 지금 그는 누가 보아도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다. 붉어진 얼굴로 성녀의 방 앞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신관들은 그런 라트반의 모습이 낯설었다.
언제나 무표정하며 차갑고, 무뚝뚝한 기사단장. 그것이 라트반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감정을 누군가에게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제 감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갑자기 황태자가 찾아오더니 뒤이어 라트반까지 찾아와서 이 난리를 피우고 있다니. 누가 보면 세 사람의 치정 문제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아주 잠시 어젯밤의 일이 생각나며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신관들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성녀와 황태자라면 둘 사이에 어떤 기류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라트반은 아니다. 이 기사단장은 그런 일에 끼어들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게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레온 황태자였다. 그는 들어갈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일부러 보란 듯이 만면 가득히 평소와 같은 웃음을 보인 채 나와, 노려보는 라트반에게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라트반 단장.”
“…….”
당연하다는 듯이 하대를 하는 황태자의 말에 라트반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뒤에 서 있던 신전기사단은 곧바로 흉흉한 기세를 보였다.
사실 황태자와 신전기사단장의 위치는 누가 위라고 하기 애매한 관계였다. 애초에 같은 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황태자라는 지위는 제국령 안에서 유효한 지위였고 신전기사단장의 자리는 대신전이나 신의 율법을 지키는 곳에서 유효한 지위다.
워낙에 서로 다른 곳에 서 있는 사람들이며 각각의 자리에서는 제 위로 오직 한 명의 사람만을 모시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암묵적으로는 비슷한 자리라 생각하며 상호 존대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었는데. 레온 황태자는 마치 제 부하나 아니면 오랜 친구를 상대하는 것처럼 말했다.
두 사람은 친구가 아니니 황태자가 신전기사단장을 대하는 태도는 전자에 속한 것이리라.
“성녀님께서 부르시네. 그리고 다음번엔….”
레온은 라트반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른 자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치라는 게 있으면 빠져 주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