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48)

톡. 톡.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멍하니 젖은 내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천장이나 벽은 화려하다. 하지만 내부는 이제 막 만들어진 저택처럼 황량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내가 몸을 담그고 있는 이 욕조와 단순한 수납장이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장식을 위한 것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오직 실용성만 생각한 공간.

‘어울리네.’

집은 역시 주인을 닮는 것일까, 라트반의 집은 그와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이곳은 라트반의 집, 정확히는 대신전 안에 있는 기사단장의 집이었다. 도시 하나와 같은 크기를 가진 대신전이었기에 신전기사단에 속한 기사의 대부분은 대신전 한쪽에 있는 그들의 개인 처소에 머물렀다.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기사들은 신전기사단의 건물에 있는 기숙사를 나눠 써야 했지만 어느 정도 직위를 받은 기사들은 개인을 위한 사택을 받는다.

라트반 역시 기사단장이었기에 그 사택 중 하나를 받았다. 직위가 직위인지라 다른 사택들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위치한, 저택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큰 집. 그는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하긴, 그 꼴로 어디를 갈 수 있겠어.’

욕실에 들어와서 본 내 꼴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울어서 잔뜩 부은 눈. 벌겋게 된 코. 거기에 너덜거리는 잠옷은 아슬아슬한 부분을 가려 주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후….”

따뜻한 물에 잔뜩 굳었던 몸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라트반이 쓰는 것이겠지?’

내가 들어가고도 남자 한 사람쯤은 충분히 더 들어올 정도의 큰 욕조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옆을 바라보니 투박한 비누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그가 몇 번이나 부족한 곳이라 죄송하다며 말하고 욕실을 나간 것이 생각났다. 하긴 성녀의 처소에 있는 그 수많은 향유와 향수들에 비하면 비누 하나만 덜렁 있는 욕실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누를 집어 드니 시원한 향이 연하게 풍겼다.

‘아까 그 향이다.’

조금 전 라트반의 품에 안겨 이곳으로 왔을 때, 계속해서 그의 품에서 나던 향이었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몸의 구석구석을 씻어 나갔다. 그러다 손이 가슴 위를 스쳤을 때,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황태자에게 물리고 빨린 가슴이 퉁퉁 부어 있었다. 특히나 유두는 살짝 스치기만 해도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잔뜩 성이 나 있었다.

‘만약 그때 거기를 나오지 않았다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시 제 것을 넣을 준비를 하던 황태자가 생각났다. 정사를 하고 나면 꽤 지친다고 들었는데, 그 어디에서도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면 분명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 그와 몸을 섞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남아나질 않았겠네.’

가슴도 가슴인데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던 혀 안쪽도 얼얼한 기분이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오던 그 느낌이 생각나자 다시 소름이 돋았다. 끔찍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깊숙이 타인을 받아들인 것이 처음인지라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었다.

한참이나 여기저기 자국이 남은 가슴을 바라보다가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손을 아래로 내렸다. 황태자의 것이 드나들었던 다리 사이에는 여전히 옅은 통증이 남아 있었다.

‘이벨리나의 몸이면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달빛 아래에서 보았던 그의 하체가 생각났다. 민망하지만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그녀가 몸을 섞었던 남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한참 후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엄청 큰 거였구나….”

그러니 나름대로 익숙할 그녀의 몸도 힘들어하는 모양이었다.

허벅지 안쪽에 말라붙은 그의 정액을 문질러 닦았다. 사실 아직도 내가 레온 황태자와 몸을 섞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난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도대체 왜 이것을 그토록 두려워했었는지, 못 하겠다고 버틴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잘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갖고 있었던 혐오감과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레온 황태자가 급하게 밀어붙이는 것 같긴 했어도 그는 곧, 마치 가르쳐 주기라도 하는 듯이 부드럽게 대했다. 마치 처음인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됐어. 어차피 내가 처음인 거지 이 몸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게다가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이제 레온 황태자는 어쩌려나.’

그곳을 떠나왔을 때, 황당한 듯이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필요에 의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용한 다음에 멋대로 도망쳐 버렸다.

‘불쾌했겠지.’

그것뿐인가 어이도 없고, 화도 났을 것이다. 먼저 하자고 잡아끈 건 언제고 멋대로 휙 사라졌으니 말이다. 어쩌면 아침이 되기 전에 대신전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그는 황태자다. 이런 취급을 받고 가만히 있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로 대신전에 선전 포고를 하지는 않겠지.’

그나 나나, 어디에 가서 당당하게 말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밖에 갈아입으실 옷을 놔두었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그가 멀어지는 발소리와 함께 바깥쪽의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몸을 씻었다. 이곳은 내 방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마냥 이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순 없다.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이런 꼴로 오게 된 것도 모자라 남의 집에서 욕실까지 빌려 쓰고 있다니.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슬쩍 문을 열어 보니 그곳에는 평신관의 것으로 보이는 옷 한 벌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재빨리 물기를 닦고 몸에 걸쳤더니 다행히 품이 넉넉해 편하게 입을 수 있었다.

욕실 안쪽에 두었던 엉망이 된 잠옷과 나와 레온 황태자의 액으로 더러워진 속옷은 잠시 고민하다가 수건 안으로 넣어 접었다. 민망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 놔둘 수는 없잖아.’

성녀의 방이었다면 어떻게든 내가 몰래 버리기라도 했을 텐데. 여기에 놔두었다가는 라트반 경에게 그 무슨 실례란 말인가. 성녀가 남자랑 뒹굴고 난 흔적을 버리고 간 것을 보게 된다면 내가 돌아간 다음 그것들을 다 불태워 버리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옷을 입고 수건을 들고 나가자 거실의 투박한 소파에 그가 굳어 있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라트반 경. 이렇게 늦은 밤에 멋대로 남의 집 욕실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는 나를 보더니 물었다.

“적당한 옷이 없어 죄송합니다.”

“아니요. 이런 시간에 옷을 구해다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옷을 빌려준 신관이 누구인가요? 나중에 다른 자의 이름으로 사례를 해야겠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라트반의 눈이 흔들렸다.

“…….”

“라트반 경?”

옷을 보니 나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체구를 가진 사람일 텐데. 그렇다면 기사는 아니다. 혹시 내가 곤란한 내용을 물은 것일까?

‘누구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 그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여자 신관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옷이 이렇게 그의 집에 남아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그러는 사이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동시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내가 무척이나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라트반 경? 말씀하기 곤란하시다면….”

“…것입니다.”

“네?”

“제 것입니다. 그러니 사례 같은 것을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에 나는 한 번 더 옷을 바라보았다. 이게 라트반의 옷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작은데….”

“신전기사단에 처음 들어와 수련하던 시절 때 받았던 것입니다.”

“…….”

다시 그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슬쩍 옷깃의 안쪽을 보았다. 정말로 그곳에는 라트반이라는 이름이 엉성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기사들은 신전기사단으로 들어올 때, 몇 개월간 평신관들과 함께 성서 공부를 하며 대신전의 교리를 익힌다. 아마도 그때 그가 입은 옷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내 얼굴도 어쩐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게 라트반 경의 옷이라고….’

저렇게나 큰 체구의 남자가 나와 비슷할 정도로 작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신기한 마음에 계속해서 옷 여기저기를 살펴보다 고개를 돌리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라트반이 말했다.

“그럼 이제 방으로 모시겠….”

“라트반 경.”

나는 곧바로 그의 말을 잘랐다.

“괜찮다면 차 한 잔만 마실 수 있을까요.”

뜬금없는 내 말에 그는 잠시 굳더니 곧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손님이 왔는데 차 한잔도 없네요.’라며 무례를 지적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재빨리 일어나 거실과 이어지는 복도의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후….”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지금 돌아가긴 싫어.’

내가 멋대로 뛰쳐나갔을 때, 나를 따라오려던 신관들이 생각났다. 대신전으로 돌아가면 당장 무슨 일이시냐, 괜찮으시냐며 묻겠지. 언제 돌아가든 그들이 내게 자초지종을 묻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일로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여긴 편하네.’

라트반의 처소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다른 사람이 없을뿐더러, 그가 나에게 황태자와 관련된 일은 전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도 절대로 묻지 않을 것이다. 아니, 묻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욕실에서 들고 나왔던 수건을 소파의 옆에 놓은 다음 머리를 베고 누웠다. 아직 밖은 깊은 한밤중이다. 평소라면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거기에다 레온 황태자와 정사를 나눈 일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곤했다. 그런 몸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더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라트반 경이 돌아오면 일어나자.’

차를 끓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만, 잠깐은 눈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순간이지만, 이벨리나에 대한 것도 잊어버리면서.

라트반은 급히 주방으로 향했다. 정해진 시간의 정해진 섭취량 이외에 무엇인가 먹는 일이 거의 없는 그였다. 그렇기에 주방이라고 해 보았자 놓여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루 대부분을 기사단 건물에서 보내니 오히려 이곳보다는 그곳의 탕비실에 놓여 있는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어디에다 두었지?”

급히 물을 올린 그는 여기저기를 뒤졌다. 그러다 구석에서 찻잎이 들어 있는 봉투를 찾았다. 어떤 기사 하나가 제 고향에서 보내 준 것이라며 쥐어 준 탓에 어쩔 수 없이 받아 든 것이었다. 적당히 안에다 놔두고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필요하게 될 줄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내부 관리를 하는 신관이 찾아오는 것 말고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집이다.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기사단 건물에서 맞이한다.

예민한 탓도 있지만 라트반은 누가 제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천천히 끓기 시작하는 물을 보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

뭘 어쩌자고 성녀를 덥석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는 성녀를 데려오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

최근 황태자의 처소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오늘도 그 주변을 중심으로 특별히 경비를 강화했다. 기사단에 맡겨도 충분했을 것이지만 오늘은 그가 직접 경비에 나섰다.

‘거슬려.’

접견 때 이후로 라트반은 황태자를 계속해서 감시했다. 느낌이 좋지 못한 자다. 분명히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시탐탐 대신전을 노리는 제국이다. 이곳에서 뭔가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

그렇게 황태자의 경호 상태를 점검하고 기사단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오늘 오후 일정이 다 취소되어 지금은 방에서 쉬고 계신다고 했지.’

어느 신관이 전해다 준 말이 생각났다. 잠시 후, 라트반은 성녀의 방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라트반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도대체 왜 당연하다는 듯 성녀의 방으로 향하고 있단 말인가. 왜 자신이 그곳을 찾아가는지 그는 한참이나 그 이유를 생각했다.

‘처분.’

아직 기도회 날 있었던 일에 대한 처분을 명령받지 못했다. 그러니, 그 처분에 대해서 다시 물어보아야 했다. 이윽고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핑계야.’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처분에 대해 묻겠다는 것은 그저 그가 성녀의 방으로 향하는 것에 대한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지금 그곳으로 향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돌아갈까.’

한참이나 멈춰 서 있던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딱히 갈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가지 않는 것이 옳았다. 지금 기사단으로 가면 중요한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들을 하는 것이 옳았다.

성녀의 방으로 향할 때와 달리 돌아선 그의 발걸음이 느렸다. 그때였다.

타다닥!

건너편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신관들이 급할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라트반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하자 곧 신관 한 명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낯이 익은 신관이었다. 성녀의 방 앞을 지키는 신관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라트반을 보고는 곧바로 그를 향해 달려왔다.

“라트반 단장님! 성녀님께서!”

“성녀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가, 갑자기 나오시더니 따라오지 말라고 하며… 어디론가 가 버리셨습니다! 잠옷만 입은 채로요!”

그 신관의 말에 라트반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아무리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하더라도 그렇지. 신관들의 일은 성녀를 보필하는 것이다. 큰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라트반은 물었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그 말에 신관은 서둘러 그를 안내했다. 가는 도중에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이 두려웠던지 신관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 아시잖습니까. 성녀님께서 마치 예전처럼 무섭게 말씀하시는데 그럴 때 그분 말씀을 어겼다가는….”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성녀는 제 말을 어기는 신관에게는 가차 없이 처벌을 내렸다. 특히나 그 처벌의 수준은 별 힘이 없는 평신관들에게 더욱 가혹했다. 아침에 문을 두드렸다고 감옥에 갇힌 이도 있었으니, 신관들이 성녀의 말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참이나 성녀의 상태와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던 신관은 성녀의 방 근처의 복도에서 그에게 말했다.

“저쪽으로 달려가셨어요! 그리고 복도를 돌아섰을 때는 이미 모습이….”

“알겠습니다.”

그는 신관이 가리킨 곳으로 달렸다. 대신전의 구조라면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그였다. 카펫에 아주 살짝 남아 있는 족적을 따라갔다.

‘신발도 신지 않으셨군.’

갑자기 성녀가 잠옷 바람으로, 그것도 맨발로 뛰쳐나갈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곧 카펫이 깔린 복도가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성녀의 흔적을 따라서 추적할 수 없었다. 카펫이 끝난 곳에는 계단이 있었다. 라트반은 몸을 내밀어 계단의 아래를 바라보았다.

대신전의 본관이나 다름없는 건물이다. 하루 종일 문이 열려 있는 곳이며 많은 신관들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늦은 시각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누군가 돌아다니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밑으로 가셨을 리는 없어.’

만약 성녀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면 이미 밑에서 누군가가 와서 알렸을 것이다. 게다가 신관들의 말을 들어 보니 성녀는 누구도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을 리는 없었다.

라트반은 고개를 들어 계단의 위쪽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암흑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 위로는….’

사실상 성녀의 처소와 다른 건물이다. 대신전을 방문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 기도회가 끝난 지금은 많은 수가 빠져나가 잠시 비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라트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을 성녀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눈을 뜬 그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다.

사절단들이 돌아간 텅 빈 건물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성녀가 이곳 어딘가에서 혼자 숨을 죽이고 있다면 그녀를 찾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걱정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왜 갑자기?’

지난 며칠간 이상하리만큼 일에 몰두한 성녀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처음에는 얼마나 가겠냐고, 또 무슨 못되 먹은 장난을 치려고 이러시는 거냐던 신관들은 며칠이 지나자 입을 다물었다. 성녀는 그들이 가져온 일을 꼼꼼하고 확실하게 처리해 나갔다. 덕분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일들이 빠르게 해결되었다.

물론 그 일들이 미뤄지고 있었던 것은 그동안 일을 완전히 팽개친 채 남자들을 데리고 침실에 틀어박혔던 성녀 때문이었지만 신관들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먼지만 쌓여 가던 성녀의 서재에는 다시 신관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렸다. 그 옆을 지날 때 어떤 신관 하나가 낮게 말하던 것이 라트반의 귀에 꽂혔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굳고 말았다. 이상하게 자꾸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지난 며칠간 성녀가 보여 주었던 모습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녀의 태도를.

빈 시간에도 모두 일정을 채워 넣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다급해 보였고 또한 초조해 보였다.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그 모습.

물론 성녀가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성녀는 신의 제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모든 성녀들은 나이가 들어 신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해진 수명을 무사히 다 지내고 신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성녀가 갖고 있는 특권 중에 하나다. 그러니 이벨리나 성녀도 분명히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갑자기 목이 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엎드려 기어 오라 명령하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경멸을 가득 담았던 눈에 그 역시 혐오를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라트반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보았다. 신관의 말에 한달음에 여기까지 올라온 자신의 모습이 어이없었다. 경호의 의무를 지녔기에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성녀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런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

모두의 앞에서 개처럼 기어 그녀의 발아래 엎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성력을 구걸했다. 이벨리나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그를 비웃었었다. 그 후로 신전기사단을 그만둘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는데.

라트반은 자신의 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대접을 받았음에도, 그는 분명 성녀를 향해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라트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빨리 성녀를 찾아 다시 그녀의 처소로 데려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흐읏!”

복도의 끝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숨을 죽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귀를 기울이던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아! 읏! 흐응!”

들리는 소리는 교성이었다. 그것도 성녀의.

순간 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라트반은 곧바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소리의 근원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큰 교성과 함께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남자의 거친 목소리도.

성녀의 교성과 함께 섞이고 있는 목소리는 분명 레온 황태자의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라트반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개새끼. 튀어나오지 못한 욕이 그의 입 속에서 불이 되었다. 마른침과 함께 삼킨 그 불은 순식간에 그의 속을 태워 나갔다. 식도에서부터 가슴까지 불길이 일었다. 난생처음 겪는 감각에 라트반은 제 손이 떨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읏! 그, 그만!”

들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너무도 쉽게 상상이 되었다. 지금 이 방 안에서, 성녀와 레온 황태자가 정사를 나누고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는 순간 라트반의 발이 움직였다. 당장 이 문을 걷어차고 저 자식을 베어야 한다.

하지만 발이 문에 닿기 직전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무슨 권리로?’

성녀와 레온 황태자가 몸을 섞고 있는 것에 그가 무슨 권리로 개입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있다면 딱 한 가지 이유뿐이다. 성녀가 원치 않았는데 황태자가 강제로 그녀를 안고 있는 경우. 그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 흘리셨군요.”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으응, 하는 성녀의 옅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다시 가득 넣어 드리면 될 터이니.”

으드득. 그 말에 라트반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덜그럭!

끓어 오는 물 때문에 주전자의 뚜껑이 소리를 내었다. 덕분에 라트반은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전자를 잡으려다가 그는 제 손을 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게 손을 쥐었던 것일까. 그의 손바닥 안쪽에 깊게 팬 손톱의 자국이 보였다. 따끔거리는 것으로 보아 피만 나지 않았을 뿐, 다치긴 한 모양이었다.

“하….”

가득 넣겠다는 레온 황태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개새끼. 그 방종한 하반신을 황궁에서 놀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신전에서까지 놀릴 생각인가.’

황태자를 향한 격한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의 감정은 이제 다른 사람을 향했다.

‘도대체 왜.’

쓰러졌다 일어난 후로 더 이상 남자들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당분간 성녀가 남자와 만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라트반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지금 제가 성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배신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제라면 도대체 무엇에 대한 배신감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바로 살 거라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 정말 그것 때문인가?

라트반은 다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요즘은 계속해서 이상한 생각이 든다.

‘어디서 마수라도 나타나면 좋겠군.’

그러면 이런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

접시 위에 놓인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처음 이 사택을 받았을 때 놓여 있었던 찻잔을 그는 아직도 쓰고 있었다. 이럴 때는 보통 집 주인인 자신과 상대의 것. 그렇게 두 개의 찻잔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옳았지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한 개뿐이었다.

언제나 그 외에 다른 사람이 온 적이 없으니 특별히 불편할 일은 없었는데.

‘하나 더 둬야 하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성녀가 이 집에 더 올 일은 없을 터이니. 거실로 나간 그는 성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

어디로 간 거지?

‘설마.’

그가 부엌에 들어가 있던 사이에 혼자서 그녀의 처소로 돌아간 것일까? 하지만 곧 소파 아래쪽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등받이 너머를 바라보자 소파 위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성녀가 보였다. 그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받았던 예복이기에 놔두었던 것인데.’

아주 어릴 적, 대신전으로 들어왔을 때 받았던 옷이다. 지금은 절대로 입을 수 없이 작아져 버린 옷. 버릴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새로 들어오는 평신관에게도 주기 어쩐지 아쉬웠다. 물건에 특별히 애착을 갖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이 시간에 어디 가서 성녀가 입을 만한 옷을 구한단 말인가. 기사단에서 가장 체구가 작은 자의 옷도 성녀에게는 이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그런 것을 구하러 다니면 기사단원들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할 것이었고. 그래서 결국 저 옷을 꺼내 온 것인데.

어릴 적 그의 옷은 다행히 성녀가 입을 만한 크기였다. 틈틈이 관리를 했기에 다행히 오래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라트반은 물끄러미 제 옷을 입고 있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가 자신의 집에서 그의 옷을 입고 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목 아래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라트반은 그 기운을 뱉어 버리려 하는 듯 입을 열었다.

“성녀님.”

제 속의 열기를 담은 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를 내어 불렀지만 성녀는 대답이 없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후원 벤치에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던 성녀가 생각났다. 그때도 여러 번을 부르고 안아 올리기까지 했지만 성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달그락.

라트반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다음 소파의 앞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처소로 데려가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성녀를 안아 올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축 늘어진 팔의 모습에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의 그녀는 정말로 죽은 것 같이 보였기에. 라트반은 제 품에 있는 성녀를 살폈다. 숨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이 보인다. 그리고 온기가 느껴졌다.

라트반의 걸음이 그의 방을 향했다. 오늘 아침 침대를 정리해 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

나는 눈을 떴다.

한 번 보았기 때문일까.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어둠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벨리나….”

예상한 사람이 그곳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와 다르게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비틀린 웃음이었다.

그녀가 왜 저리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끝까지 안 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가 어색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것은 내 목소리였다. 이벨리나였던 나의 목소리. 원래의 주인은 그녀였음에도 어쩐지 내 목소리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할 만했나 봐?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네.”

“그래, 각오했던 것만큼 최악은 아니더라.”

“……!”

내 대답에 이벨리나의 몸이 잠시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웃음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럴 법도 하다. 저번과는 다르게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높여 부르지 않는다.

“이런, 화가 많이 났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니 다행이야. 내 덕분에 그런 경험도 해 본 것 아니겠니?”

이렇게 나오면 화도 나지 않는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한참이나 그녀를 노려보다 물었다.

“왜 나타났어? 네가 말한 조건 지켰잖아.”

“그래,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해냈더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빨리해.”

이벨리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에서 느껴졌던 어색함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더욱 심해졌다. 이제는 어색함이 아닌 불쾌감마저 들었다. 저 몸을 얻기 위해 황태자를 방으로 끌어들였던 내 행동이 생각났다. 나는 이벨리나의 조건에 따랐고, 성공했다. 그러니 이제 저 몸은 내 것이어야 한다.

“…재미없어. 울고 불며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그걸 보고 싶었다니 유감이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이제 돌려보내 줘.”

그 말에 이벨리나가 다가왔다.

“성녀 놀이가 그렇게 재미있니? 본 적도 없는 남자를 끌어들여 다리를 벌리고 밑에 깔려서 헐떡여야 할 만큼?”

“…….”

순간, 이벨리나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잔 사람은 레온 황태자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를 향해 본 적도 없는 남자라고 말했다. 그럴 리가.

‘이벨리나는 내 몸속에서 전부 보고 있다고 했었어.’

그렇다면 저런 표현을 쓸 리가 없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이벨리나는 정말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침을 삼켰다. 또 다른 것이 생각났다.

“그래, 재미있더라. 너와는 달리 제대로 된 성녀 노릇을 하니까 사람들이 잘 대해 주더라고.”

“…….”

“그래서 말인데, 기왕 제대로 하는 김에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네 기억 속에서 보이지 않더라구. 마치 네가 일부러 숨기는 것처럼 말이야.”

내 말에 이벨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지금 그녀가 약속이고 뭐고 몸을 빼앗아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하는 행동 전부 이벨리나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이벨리나가 이 몸을 다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대로 계속 이벨리나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은 많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친절하게도 며칠이 남았는지 알려 주었던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그것만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며 사사건건 비웃었을 것이다. 특히나 내가 황태자의 팔을 잡아끌었던 순간이라면 더욱더.

얼마 전 그녀의 몸이 거칠게 반응했던 이름이 떠올랐다. 어쩐지 그것이 그녀를 상대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벨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를.”

“……!”

역시나. 내가 내뱉은 이름에 이벨리나가 그대로 얼어 버리기라도 한 듯 굳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카를. 그 사람이 누구야? 왜 아무리 기억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 건데? 네가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따랐던 사람이라며?”

“네가 왜 그 이름을 알아!”

순식간에 무서울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마주한 사람과도 같았다. 혐오, 경멸, 공포.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이벨리나의 얼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내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카를이라는 자는 분명 이벨리나에게 위협이 되는 자였다. 그리고 이벨리나가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다.

황태자의 일뿐만이라면 말 실수를 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카를은 아니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명단을 받았고 신관과 그에 대해서 이야기까지 나누었었다. 그런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왜?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데 그래?”

처음으로 이벨리나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그때 이벨리나가 손을 뻗어 내 목을 잡았다.

“큭!”

이벨리나는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반항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어차피 이 몸으로는….

그 순간 생각이 났다. 이 공간에 들어오고 나서 내가 내 손을 본 적이 있었나? 그때 다시 이벨리나가 나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고는 거칠게 외쳤다.

“닥쳐. 당장이라도 내가 몸을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나 보지?”

“…할 수 있으면 하지 그래? 왜? 또 다른 조건이라도 걸려고 그래?”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겼다. 지금 여기서 다시 이벨리나에게 엎드리면, 그녀는 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며 나를 괴롭힐 것을 알았다. 더 이상 물러서면 안 된다.

이벨리나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조건을 걸 필요도 없지. 너… 편지를 받았지?”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편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마법을 이용했던, 읽자마자 타 버려 흔적도 남지 않았던 편지.

이벨리나는 내 표정을 보고 내가 그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녀는 더 묻지도 않은 채 목을 조르던 손을 풀고 내 멱살을 잡아당기며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는 이제, 짐승의 새끼를 배어야 할 거야. 그 몸으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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