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48)

누군가 뒤통수를 거세게 내려친 듯한 느낌이었다.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카를이라는 이름뿐. 가슴이 거세게 쿵쿵거리며 식은땀이 흘렀다. 덜덜 떨리는 손을 본 순간 알았다. 이것은 내가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벨리나의 반응이었다.

일단 천천히 숨을 쉬며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조금 시간이 지나자 곧 시야가 돌아오고 쿵쿵거림도 진정이 되었다. 그렇게 손의 떨림이 멎을 때까지 기다리던 나는 다시 종이를 바라보았다.

‘카를이 누구길래 이러는 거지?’

이벨리나의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이름에 대한 기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루스에 대한 기억이 없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분명 기억은 있건만 거대한 벽 너머에 있는 느낌이다. 절대로 그것에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떨림이 진정이 되고 난 후, 다시 위에서부터 목록을 훑어보았다.

“이 서류를 가져온 신관을 불러 주겠어요?”

그렇게 부탁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온화해 보이는 노신관 한 명이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그 역시 기도회를 준비하면서 몇 번 만났던 상급 신관이었다. 그는 평소와 같은 대신전의 인사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후보 목록의 일로 저를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회 전에 뽑았던 목록과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기도회 전에 급하게 대신관 대리 목록을 받았었다. 그때는 목록에 카를이라는 이름은 분명히 없었다.

“아, 그때는 기도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조건에 맞는 신관들 중 대신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목록만 전달해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지방의 신전에 있는 신관들 중에서도 자격이 충분하다 여기는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올렸습니다.”

그 말에 왜 예전보다 많은 이름들이 추가가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노신관이 왜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피고 있는지도.

‘이벨리나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이겠네.’

이벨리나는 그녀에게 바른말을 하는 상급 신관들을 죄다 먼 곳의 신전으로 보내 버렸다. 그중에는 직급이 높지 않다 하더라도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신관들도 많았다. 아마 그 사람들도 전부 이름이 올라갔을 것이다.

“특별히 마음에 둔 신관이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대답하며 카를이라 써진 이름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시선이 닿는 곳을 알았는지 노신관이 환하게 웃었다.

“카를 신관님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하긴, 그분이라면 대신관의 자리에 부족함이 없으시지요. 나이가 젊다는 것이 문제라고는 하나 카를 신관이라면 능히 해낼 것으로 생각합니다.”

노신관의 목소리에는 카를이란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카를 신관이 대신전으로 슬슬 돌아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성녀님께서도 어릴 적부터 그렇게 따랐던 신관이 아닙니까. 물론 카를 신관 본인이 원해서 대륙 변방의 신전으로 갔다고 해도 이제 슬슬 불러들이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문제라면 그쪽 신전에서 카를 신관을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노신관은 그렇게 말하며 웃음 지었다. 정말로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신뢰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런 노신관의 표정에 다시 목록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누구지?’

이벨리나가 따랐던 사람인데 저렇게 좋은 평가를 한다고? 그럴 리가 없다. 이벨리나가 곁에 두었던 자들을 떠올리면 변변찮은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카루스 같은 자들 말이다. 그런데 이벨리나가 따르면서 다른 신관이 저토록 칭찬을 하는 사람이라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아도 좋아요.”

그러자 노신관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다시 조용해진 서재 안에서 나는 몇 번이고 카를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다.

“…….”

서류를 꽉 쥔 손이 보였다. 천천히 주먹 쥐었던 손을 펴자 땀이 흥건한 손바닥이 보였다.

‘왜 이러는 거지?’

도대체 카를이 누구길래 이벨리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허벅지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라 옷자락을 걷어 보았다.

“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보였다. 허벅지 안쪽에 있던 세 개의 동그란 자국.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그 자국이 아니라 가슴에. 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를이란 신관은 이 자국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

2일 남았어.

오늘도 알람처럼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제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오늘 이벨리나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게다가 어쩐지 초조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도대체 왜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짜증도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내 기분은 좀 좋아졌다. 아마 내일은 뭔가 더 독한 말을 할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카를에 대한 말은 없네.’

꿈에서 분명 그녀는 몸속에서 전부 다 보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서류에 적힌 이름을 보자마자 몸으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던 카를이라는 자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자를 데려오라거나, 아니면 당장 명단에서 그자의 이름을 빼라고 한다거나.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벨리나는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다 보고 있긴 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를 하고 나가자 오늘도 많은 신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다가 깨달았다. 어제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잠드는 순간까지 이벨리나가 말한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도 그럴 수 있겠는걸.’

이렇게 일이 쌓여 있으면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또다시 하루가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 위에 놓인 많은 일감을 보았다.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뜨이는 것이 있었다.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편지 봉투였다. 단지 고급스러워서 눈에 뜨인 것은 아니다. 그 위에는 제국의 문장이 큼지막이 박혀 있는 밀랍 인장이 붙어 있었다.

“이건….”

나도 모르게 끄응, 하는 신음 소리가 나왔다. 편지를 뒤집어 보자 역시나 생각했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레온.

이름만 적은 편지라. 이 세계에서는 무척이나 친밀한 사이일 때나 그렇게 적었다. 가족이라거나 아니면 유독 친한 친구라거나 하는 그런 사이 말이다. 그것도 아니면 연인이거나.

당연하게도 나와 레온 황태자의 사이는 그 셋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봉투를 살펴보던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더 찾았다. 다른 편지 봉투들과 비교하니 쉽게 알 수 있었다. 안에 도대체 뭘 넣었는지 다른 것들보다 유달리 두툼한 것이다.

사실 어제도 레온 황태자로부터 편지가 오긴 왔었다. 어제는 그저 평범한, 대신전 안에 있을 때 한 번 더 만나 뵙기를 바란다는 그런 상투적인 내용의 편지였다. 그래서 나도 뻔한 답장을 보내라고 했다. 직접 쓰기도 귀찮아서 아예 필기를 담당하는 신관들이 미리 적어 둔 종이로.

‘그랬더니 이렇게 보낸다 이거지.’

어제의 답장은 마치 못 받은 사람처럼 오늘 또다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어제는 그래도 격식을 차려서 보내더니 오늘은 아예 보란 듯이 친근하게 말이다. 일부러 이러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냥 놔두고 다음 일을 할까 싶었지만 두툼한 두께가 영 신경이 쓰였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채 밀랍 봉인을 뜯었다.

“이게 다 뭐야?”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두툼한 편지였다. 그 편지지 사이사이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봉투에서 빼내어 보니 붉고 동그란 것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나는 한숨이 나왔다.

“꽃잎…?”

그냥 꽃잎이었으면 옅은 풀 냄새만 났을 텐데 하나를 집어 코에 가져다 대어 보니 진한 향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이런 식의 특별한 용도를 위해 특수 처리된 꽃잎인 것 같았다.

“난리네.”

순식간에 꽃밭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책상을 보며 두툼한 종이를 펼쳐보았다.

“…….”

그리고 말을 잃고 말았다. ‘친애하는’으로 시작된 편지는 그 장수가 무려 열 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대충 휙휙 넘겨 마지막을 보았더니 역시나. 나를 부르는 호칭은 성녀에서 이벨리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다시 편지의 앞장으로 돌아가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황태자가 뭐라고 적었는지 구경이나 해 볼 생각이었다.

한참 후, 나는 편지의 마지막 장을 내려놓았다.

“…재미있네?”

의외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보자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나는 편지에 빠져들고 있었다. 간단한 안부로 시작했던 편지는 그가 대신전에 와서 있었던 일과 제 주변의 소소한 일상을 유머스럽게 채우고 있었다.

편지가 아니라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집어 들었을 때는 벌써 끝났나,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편지를 갈무리한 나는 레온 황태자에 대한 것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대단하다고 했던가.’

그에 대한 것은 책에도 꽤 많이 적혀 있었다. 남자 주인공 중 한 명인 그는 책 내에서 가장 여성 편력이 심한 자였다. 많은 여성들과 화려한 연애를 하던 그가 이리스에게 반해 끙끙 앓는 부분을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 후계자가 안 생긴 게 더 무서웠다고.’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밤을 함께했지만 황태자에게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아이가 없었다.

‘그만큼 철저한 인간이라는 소리지.’

짧게 언급되고 끝났지만 관계를 맺을 때 절대 뒷말이 나오지 않게 준비하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온 황태자랑 하는 건 어떠려나.’

만약 그렇게 해서 이벨리나가 내건 조건을 달성하고 계속해서 내가 이 몸으로 살아남게 되면, 나중에 이리스가 나타나고 내가 신전을 떠나게 될 때 그가 조금은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스를 괴롭히지도 않고 예전에 자신과 관계가 있던 여자라 하면 그래도 태워 죽이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하던 거나 마저 하자.”

나는 다시 종이를 봉투에 넣고 책상 위에 있던 꽃잎들도 전부 봉투 속에 넣었다. 오늘도 레온 황태자는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편지를 받아야 할 것이다.

***

레온은 초조했다. 그는 오늘 열 번이나 넘게 물어본 것을 부관들에게 또 물어보고 있었다.

“답장 안 왔어?”

그런 레온의 말에 부관들은 대답하기도 지쳤다는 듯 짧은 한숨을 쉬었다.

“성녀가 꽤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오래된 부관 하나가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레온의 모습에 그렇게 말했다.

“응, 무척이나.”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레온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이 시각 즈음에 성녀에게서 답장이 돌아왔는데 오늘은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제와 조금 다른 답장이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 안을 빙빙 돌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어 초조한 이 느낌이 그는 즐거웠다.

‘이러는 거 꽤 오랜만인데.’

레온은 제가 황태자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대신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괜히 밝힌 건가….”

그의 중얼거림에 부관들은 딱 잘라 말했다.

“분명 저희는 말렸습니다.”

정말로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레온을 말렸었다. 일단 그의 신분이 알려지면 당장에 경호의 문제부터 골치 아팠다. 이곳은 대신전이다. 이 안에서 날붙이와 피는 오직 신에게 맹세를 한 신전 기사단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륙에 있는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 전쟁에서 입은 상처의 치료를 위해 각국의 주요한 인사들이 대신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제국에 거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대신전에 떡하니 나타난 황태자라니.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다. 역시나, 제국의 사절단에 레온이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그날부터 밤에 수상한 손님들이 늘어났다.

‘뭐, 쉽게 당하실 분은 아니지만….’

그나마 그 사실이 부관들의 애타는 속을 조금 달랬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황제가 아들을 약하게 키웠을 리가 없다. 최강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도 어지간한 기사단장 정도는 맞설 수 있는 실력이다. 덕분에 부관들은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찾아든 밤손님을 찌르며 ‘답장을 가져온 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는 황태자를 볼 수 있었다.

“나갔다 올게.”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언제 올지 모르는 성녀의 답장을 기다리며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방문을 나서는 황태자의 모습에 모두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황태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한동안 전쟁이 없어 황태자는 황궁 안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불같던 연애도 한참을 몰두하나 싶더니 곧 거짓말처럼 다 정리했다. 그 후로 심심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아무래도 이번에는 성녀를 공략 대상으로 삼은 모양이다.

부관들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복도로 나선 레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맡은 일도 하긴 해야겠고.”

성녀에 흥미가 생긴 것과는 별개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신전기사단의 단장인 라트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대신전이 제국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가장 처음 생각한 방법은 역시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방법이었다.

제국의 군대는 정복전에 특화된 군대다. 군대의 수 또한 그 어떤 나라보다 많다. 그런 제국이 기껏해야 하나의 도시 정도 크기인 대신전을 상대하지 못할 리는 없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제국은 대신전을 굴복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성녀 때문이다. 가장 강한 성력을 갖고 있으며 대륙을 마수로부터 수호하는 성녀. 그녀의 성력은 외부의 공격을 막는 보호 결계를 만들 수 있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요새와도 같은 대신전에 성녀가 그 힘을 사용한다면 제국의 군대는 평생을 그 바깥에서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그리고 설사 붙게 된다 하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

신전은 성녀라는 최고의 방패를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전기사단은 대륙의 마수를 상대하는 최강의 기사단이며, 그 기사단을 이끄는 라트반은 대륙에 있는 모든 기사들이 존경하며 언젠가 한 번은 검을 맞대어 보기를 염원하는 존재이다.

몇 년 전, 대륙의 끝에 헤베론이라는 이름을 지닌 거대한 마수가 나타났다. 아주 오래전, 첫 번째 성녀가 봉인했다던 마수들 중 하나였다.

헤베론은 대륙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수십 개의 마을을 박살 내며 살육을 이어 나갔다. 그 기세에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숨을 죽였다. 맞서 싸울 생각보다는 어서 빨리 저 마수가 원하는 만큼 죽이고 다시 잠들기를 바랐다. 그렇게 지켜 줄 사람이 없는 마을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헤베론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이 라트반이었다.

‘그리고 쓰러트렸지.’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한 기사가 전설의 마수를 쓰러트렸다. 그것만으로 라트반의 이름은 대륙 전체에 퍼졌고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만약 그런 라트반이 이끄는 신전기사단이 제국기사단과 붙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수가 많다 하더라도 제국기사단의 주 병력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피해를 입고 대신전을 굴복시킨다면 그 후는 어떻게 될까?

다른 모든 나라가 좋은 대의명분을 찾았다며 동시에 들고 일어설 것이다. 병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제국이 수십 개의 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들 멍청해서 대신전을 안 건드린 건 아니라니까.’

과거에도 대신전을 굴복시키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레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안에서 무너트려야 하는데….’

대신전을 지탱하는 힘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성력 그 자체인 성녀. 두 번째는 대륙의 사람 모두가 그 성녀와 대신전을 향해 갖고 있는 굳은 신앙심이다. 이것은 지난 몇천 년간 굳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49대 성녀인 이벨리나가 처음 성녀의 자리에 올라갔을 때는 누구나 칭송하는 성녀였다. 누구나 다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는 아름다운 외모에 신을 향한 굳은 믿음. 그리고 성녀로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까지. 하지만 그것은 길지 않았다. 성인이 죄다 이벨리나의 이름 앞에는 온갖 더러운 수식어가 붙었다.

‘이건 기회야.’

레온은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걸었다. 지난 긴 대신전의 역사 속, 수많은 성녀 중에서 이렇게 신성하지 못한 성녀는 이벨리나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대신전은 멋대로인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우리가 심어 놓은 자들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고.’

기도회에서 있었던 일은 더욱 악의적으로 대륙 곳곳에 퍼져 나갈 것이다. 제국이 심어 놓은 자들은 그날 있었던 사실에 더욱 살을 붙여 이벨리나를 세상에 둘도 없을 악녀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필요가 없지.’

두 개가 떠 있다면 하나를 끌어내리면 되는 것. 레온은 창가로 다가가 대신전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도시이며 성채인 이곳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제국의 발아래 두고 싶었다.

“그냥 다른 나라였으면 이렇게 복잡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지.”

대신전을 바라보던 그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의 아버지가 정복을 거듭하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버티던 나라의 공주가 그녀의 어머니였다. 두 나라의 통합은 결혼이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청혼서가 보물을 가득 담은 상자가 아닌, 전쟁 포로들의 목과 함께 갔다는 게 조금 다르긴 했지만.

‘대신전도 그런 방식으로 흡수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을.’

그렇게 생각하던 레온은 턱을 매만졌다.

“성녀가 결혼할 수 있나…?”

생각해 보니 성녀의 조건 중에 육체의 순결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벨리나도 저렇게 남자들과 놀아나면서도 계속해서 성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시도해 볼까?”

대신전의 규율을 좀 더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성녀의 결혼을 막는 규율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복도를 걷는 레온의 발걸음이 조금 전보다 빨라졌다. 그러다 복도의 끝에서 그는 제가 찾으려 하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는 라트반이 서 있었다.

“이것 참, 마침 경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신께서 저를 보살펴 주고 계시나 봅니다.”

그렇게 웃는 얼굴로 다가간 레온은 라트반의 얼굴을 보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라트반이 적의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돌아오셨습니까!”

라트반이 기사단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 있던 기사들이 그에게 재빨리 경례를 했다. 원래도 느슨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기합이 바짝 들어간 상태라 그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그들의 경례에 라트반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곧바로 몸을 돌려 복도 안으로 사라졌다.

“후….”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경례를 했던 기사들이 안도의 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방으로 들어온 라트반은 곧바로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거칠게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단정하게 정리되었던 짧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엉망이 되었다.

“왜 그랬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왜 자신이 레온 황태자에게 적의를 드러냈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자다. 그가 황태자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황태자는 대신전을 향한 욕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자다. 그러니 대신전을 지키는 임무를 가진 그가 그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언젠가 틈이 생기면 대신전을 향해 검을 들이댈 사람을 어떻게 웃으며 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손님의 자격으로 대신전에 와 있는 사람이다. 황태자를 향한 감정이야 어떻든 대신전의 손님으로 맞이해야 하는데.

왜 레온이 그렇게 싫을까 생각하던 라트반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제국 사절단을 성녀가 만나러 갔을 때, 황태자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트반은 황태자의 움직임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순한 경의의 입맞춤이 아니다. 황태자의 혀가 성녀의 손등 위를 질척하게 훑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황태자의 행동에 라트반은 그를 둘러싼 온갖 소문을 떠올렸다. 남의 소문에 무관심한 그도 황태자의 여성 편력에 대한 것은 자주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버릇을 대신전 안에서까지 고치지 못했군.’

그 후 라트반은 성녀의 경호에 더욱 신경을 썼다. 다행히 성녀는 제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황태자를 더 부르지 않았다.

‘다행히…?’

라트반은 제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 왜 성녀가 그를 만나지 않은 것을 제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이상하다. 얼마 전부터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였지?

그의 눈이 방구석에 있는 옷걸이를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한 곳이 잔뜩 구겨져 있는 예복의 망토가 걸려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이제 이벨리나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 그래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어쩐지 불안해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어이가 없었다. 그녀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것은 이쪽이다. 누가 들으면 이벨리나가 나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는 줄 알 것 같다.

‘마지막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쉽사리 일어나지지 않았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고 바쁘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눈을 감고 느긋하게 그것들을 즐겼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다. 그리고 내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했다.

한참 후, 간단한 예복을 입고 서재로 가니 이제는 꽤 얼굴이 익숙해진 신관들이 당연한 듯이 서류를 든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일을 본 것이 며칠이나 되었다고.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이 고개를 숙여 나를 반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를 하자마자 책상 위로 온갖 서류들이 쌓였다. 그리고 옆에서 신관들이 서로 먼저라며 잠시 목소리를 높이더니 곧 줄을 서 제 순서를 기다렸다. 일단 재빨리 첫 번째 서류부터 살폈다.

한참이 지나고 서명이 끝난 서류를 돌려주자 그것을 받아 든 신관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일 마저 남은 부분을 가져오겠습니다.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그렇게 웃으면서 허리를 숙이고는 곧 서재를 나갔다. 즐거워 보이는 신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일이라.’

내일은 내가 여기에 없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힘주어 참았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일 여기에 앉는 사람은 누구일까. 원래의 이벨리나일까? 아니면 이벨리나가 나 말고 새로이 찾아 넣은 영혼일까?

다시 조금 전 돌아간 신관이 생각났다. 내일이면 나머지 일을 다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새 정이라도 들은 것일까. 나는 서재를 둘러보았다. 무척이나 거대한 공간이다. 뒤로는 도서관이나 다름없는 책장들이 늘어서 있고 반대편의 다른 책상에는 일에 관련된 서류들이 쌓여 있다. 이제 한쪽 벽에 놔둔 의자에는 신관들이 앉아 제 차례를 기다리며 서로 대신전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왜 쓸데없이 열심히 사냐고 그랬었지.’

꿈에서 만난 이벨리나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이걸 꿈꿔 왔거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며 SNS 앱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볼 때, 가장 부러워했던 건 특별한 게 아니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 경치가 예쁜 곳으로 놀러 가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 그중에 우습게도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건, 출근길에 손에 쥔 테이크아웃 잔을 찍어 올리며 ‘오늘도 힘내자!’라는 코멘트를 단 게시물을 볼 때였다.

하루하루가 쉽진 않겠지만 제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한 사람 몫을 인정을 받고 있는 것. 그 모습이 내가 제일 부러워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나 봐.’

덤으로 얻은 이 삶에서 그런 것까지 누려 보게 된 것이 무척이나 신났던 것이다. 소설의 내용을 바꾸어 더 살아 보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런 내 욕심이 더 컸을 것이다.

***

“이걸로 끝이라구요?”

마지막 순간까지 바쁘게 살며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내 계획은 끝이라는 말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분명 표를 가득 채웠던 일정 중 하나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취소된 것이다.

“그럼 다른 일을 하도록 하지요. 내일 할 일을 미리 당겨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아닙니다.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신관들이 재빨리 내 말을 막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뭐라 이야길하더니 아예 내 책상 위에서 서류를 들고 재빨리 나가 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던 다른 신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번에 너무 일을 몰아 하다 다시 쓰러지시면 곤란합니다.”

“그렇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아직 쓰러지셨던 원인이 확실하지 않으니 지금은 좀 더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썼다며 저녁 식사는 이른 시간에 준비되었다. 테이블에 앉으니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저녁 식사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최후의 만찬, 그런 건가?’

이게 마지막 이라는 생각을 하자 내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사형수가 마지막 식사를 받아 든 것처럼 나는 차례대로 테이블에 올라오는 것을 그 어느 하나 빼먹지 않고 전부 맛보았다. 그렇게 일부러 음식을 느리게 먹었음에도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제야 겨우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은 조용해졌다. 그렇게 홀로 남자 나는 침대로 올라가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이제 오늘이 끝나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이벨리나가 다시 의식 저편으로 부르는 걸까? 그러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로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일까?’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벨리나의 성격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말을 걸 것 같은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이유는 뭐지?’

그녀라면 분명히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 거라 생각했다. 아직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거냐며. 지금 네가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으면 되는 일이라고. 그러니 어서 나가서 하룻밤을 구걸하라고. 그렇게 놀려 댈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이벨리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 외에는 나에게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성녀라면서 성력을 제대로 쓴 적이 없네.’

비밀 통로의 문을 열 때, 자동적으로 써지는 것 외에 성력을 쓴 기억이 없다. 아니, 한 번 더 있기는 했다.

나는 조용히 잠옷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허벅지 안에 있는 동그란 세 개의 자국이 보였다.

‘이게 뭐였는지 궁금했는데.’

누군가가 일부러 남긴 자국. 누구에게 보여 줄 만한 자리도 아니고 이벨리나가 이것에 관계된 기억은 볼 수 없게 해 두어서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것을 처음 발견하고 문질렀을 때, 아주 잠시 성력이 빛났었다.

‘마치 이걸 치유라도 해야 하는 것 같았어.’

치료해서 지우고 싶었다는 듯 성력이 빛났었다. 그래 보았자 어차피 자신의 몸을 치료할 수 없었으니 소용없었겠지만. 그 외에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카를이라는 신관이 누구인지, 그를 따랐다면서 왜 그에 대한 기억은 없는 것인지 하는 그런 것들이 말이다. 한참이나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우다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래 봤자 다 이벨리나에 대한 것이네.’

지금 나를 이 상황으로 몰아넣은 사람에 대한 것이나 궁금해하고 있다니. 문득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왜 이벨리나는 그렇게 사는 거지?’

지난 몇 주간, 내가 이벨리나의 몸에 들어온 후의 변화를 떠올렸다. 그렇게 심한 짓을 많이 했는데도 근래 일을 열심히 하고 친절하게 대해 준 것만으로도 대신전의 신관들은 나에게 무척이나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이벨리나를 향한 원망의 마음도 함께 느꼈다.

이 세상은 이벨리나에게 상냥하다. 성녀인 그녀가 조금만 손을 뻗으면 웃으며 몇 배로 돌려주려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런데 왜 이벨리나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짓밟으면서 사는 것일까.

‘너무나 당연해서?’

어린 나이에 성녀가 되었던 그녀였다. 그래서 세상이 자신에게 다정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이벨리나가 싫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성력까지 갖추고 성녀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쉽사리 던져 버리다니.

‘그래도 모두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했겠지.’

다시 좋지 못한 마음이 스멀스멀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이벨리나가 나에게 그러하였듯이 만약 이 몸에 다시 이벨리나가 돌아온다면 내가 속삭여 주고 싶었다. 네가 가진 것은 조만간 다 잃게 될 거야. 넌 죽을 거야. 넌 그래도 싸. 네가 가진 걸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잖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래서 바쁘길 바랐는데….”

혼자 가만히 있으면 이런 어둡고 나쁜 생각만을 하게 된다. 병원에 있었을 때처럼 말이다. 책을 보면서 나보다 불쌍한 사람을 찾았던 저열한 본성의 바닥이 다시 드러나는 것이다.

‘싫어.’

마지막을 이런 생각만 하다 사라지기는 싫었다. 나는 곧바로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복도에는 하루 종일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신관들이 보였다.

“성녀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걸어 나왔다.

“성녀님? 옷이….”

잠옷을 입은 채 복도를 걸어가는 나를, 그들은 허둥지둥하며 따라왔다.

“따라오지 마세요.”

“네? 하지만….”

“따라오지 말라고!”

거칠게 소리를 지르자 그들이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그런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복도를 달렸다.

***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차가운 벽을 짚고 한참이나 숨을 고른 채 서 있었다. 얼마나 미친 듯이 달린 것인지 내뱉는 숨에서는 단내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좋았다. 건강한 몸으로 느끼는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삐, 하는 기계 소리와 함께 나를 덮쳤던 거대한 암흑.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완벽한 무의 세계.

‘싫어. 무서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 왔다. 그동안 필사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공포가 다시 몰려왔다. 그때 멀리 신전의 탑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종소리를 세던 나는 숨을 멈췄다.

‘한 시간 남았어.’

이제 오늘은 앞으로 한 시간뿐이다. 그렇게 자정이 지나면 덤으로 얻었던 삶은 끝난다.

“이벨리나.”

나도 모르게 그녀를 찾았다.

“…나, 더 살고 싶어.”

이대로 계속 살고 싶다. 좀 더 이 몸에 남아 있고 싶다. 어차피 이벨리나가 제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고 제 몸 또한 버리듯이 갖고 노는 것이라면 나에게 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면 누구보다도 소중히 쓸 수 있다. 비록 이벨리나가 원하지 않더라도.

방법이 있잖아.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아닌, 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그래, 방법이 있었다. 이벨리나가 내걸었던 조건. 아무라도 좋으니 남자와 밤을 보내라던 그 조건. 그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이라고 내가 하지 않겠다 했었을까.

나는 몸을 돌렸다. 누구라도 좋았다. 아무나, 당장 보이는 남자에게….

“성녀님?”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레온 황태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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