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회 첫날, 그가 노인의 모습으로 일부러 꾸몄다는 것은 눈을 마주친 순간 알아차렸다. 하지만 본모습이 이럴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다.
남자는 그렇게 손등을 핥던 입을 뗐다. 조금 길어진 손등의 입맞춤에 옆에 있던 자들이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조금 전 이 남자가 했던 짓은 그와 나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이 무례를 따져야 할까, 아니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넘겨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그가 몸을 일으켰다.
꽤 큰 키의 남자였다. 라트반의 옆에 서서도 작아 보이지 않는 체격의 사람이란 흔치 않았는데, 이 남자는 그와 비교해도 작아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기사인 라트반과는 꽤 다른 인상이었다.
적당한 길이의 밝은 금색의 머리카락은 꽤 화사한 인상을 주었다. 곧게 뻗은 눈썹 아래 짙은 푸른 눈, 날렵한 콧날과 잘 다물린 입술.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화려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모든 것이 단정하였음에도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을 것 같은 당당함이 보였다. 얼핏 그것은 오만함으로도 보일 수 있겠지만 이 남자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런 남자의 모습에 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 남자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미소 지었다.
“제 이름은 레온 하벨 아펠리우스.”
아펠리우스? 그 이름에 한 걸음 물러나려는 순간, 그가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와 말했다.
“아펠리우스 제국의 황태자입니다.”
그의 말에 연회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
몇 주 전, 레온은 황제인 그의 아버지의 호출에 불려 갔다.
노쇠했지만 젊은 시절의 날카로운 기백은 여전한 황제의 모습에 레온은 경외를 담아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이기 전에 제국을 이끈 정복 황제다. 제국민으로서 마땅히 존경해야 할 존재였다.
황제는 이제 그를 대신하여 제국을 이끌고 있는 아들에게 아주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대신전을 좀 살펴보고 오너라.”
아마, 이 자리에 누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레온은 눈썹 하나도 까딱이지 않은 채 여느 때처럼 옅은 미소를 지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황제와 그밖에 없었고, 레온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냉정하고 단호한 황제라지만 아들에게는 꽤 유한 아버지이기도 했기에, 황제는 그런 레온의 표정에 혀를 찰 뿐 꾸짖지는 않았다.
“그리도 싫은 것이냐.”
“지루해서 그렇습니다.”
곧바로 대답하는 레온의 말에 황제는 혀를 찼다. 확실히 레온에게는 따분한 명령일 것이다. 태어나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았을 것 같은 인상의 레온이다. 화사하고 우아하며, 거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외모. 하지만 황제는 제 아들이 저 얼굴 아래 흉포한 본성을 잘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피는 못 속인다고.’
그가 아닌 황후를 닮은 외모는 공작새와도 같지만 속에 있는 것은 굶주린 사자다.
“특별히 할 일도 없지 않더냐. 얼마 전 아스티아를 박살을 내어 놓았으니.”
아스티아. 제국의 끝에 있던, 꽤 강한 나라였다. 레온은 제국군을 이끌고 그동안 제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아스티아의 죄를 이자까지 쳐서 잘 갚아 주고 왔다. 이제 대륙 어디에도 아스티아라는 이름의 나라는 없다.
그때 들끓은 피가 식지 않아 다음 먹이를 찾고 있는 레온에게 겨우 대신전을 보고 오라 말했으니 실망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차라리 황궁에서 정무를 돌보겠습니다. 손봐야 할 것이 많….”
“성녀가 이상하다.”
“…무슨 말씀입니까.”
레온은 자세를 다시 바로 했다. 그의 수족들은 그런 정보를 가져오지 않았다. 황제의 정보망은 아직도 레온의 정보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쓰러진 다음 무척이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 말에 레온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의 정보망이 가져온 것과 같은 정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황제의 말이 그의 몸을 굳게 했다.
“그리고 신전기사단장의 밤 외출이 잦아졌다고 하더군.”
“…….”
레온은 마음속으로 졌다고 생각했다. 대신전 안에서 그의 정보망이 유일하게 들어가지 못한 곳이 신전기사단이었는데. 황제는 그곳에도 사람을 심은 것이다.
“자세히 알아보고 오거라.”
“명, 받들겠습니다.”
“가는 김에 살육에 대한 참회 기도도 좀 올리고.”
“아예 신관이 되라 하지 그러십니까.”
살육에 대한 참회 기도라니. 두 부자가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었다.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제 집무실로 돌아온 레온은 함께할 부관들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전장이 아니라 갑자기 대신전으로 가게 된 부관들은 레온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성녀에게 드디어 관심이 생기신 겁니까.”
“아, 성녀.”
부관의 말에 레온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황태자의 관심은 성녀가 아닌 신전기사단장인 라트반에게 더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를 말하라 하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라트반을 꼽았다. 그것은 제국기사단이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레온은 아직 라트반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소문으로 그의 무용담을 들었을 뿐이다.
축복을 받지 않은 검으로도 마수를 일격에 죽인다거나, 혼자의 몸으로 마을 전체를 뒤덮은 마수들을 상대했다거나 하는 그런 무용담 말이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성녀와 완전히 갈라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제국기사단으로 데려올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신전에 가면 라트반이란 자를 만나 봐야겠어.’
성녀와의 일이 진짜라면 신전기사단의 그 고고한 자존심이 박살이 났을 것이다.
‘잘 구슬려 보면 넘어올지 누가 아나?’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성녀의 태도가 달라지고 그 기사단장의 행동도 달라지고 있다니. 레온의 본능이 그 두 가지 일은 서로 얽혀 있다고 외쳤다.
그렇게 레온이 라트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서류를 챙기던 부관이 말했다.
“하긴, 황궁 안의 어지간한 영애들과 그리도 놀아나셨으니. 이제는 성녀를 노릴 때도 됐다 싶었습니다. 들어 보니 얼굴로는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라잖아요.”
“난 얼굴 보고 좋아하는 사람 아닌데.”
그건 사실이었다. 아름다운 여자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레온은 재미있는 여자들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위험하면 더더욱 좋아했고.
성녀는 어떤 여자일까. 레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보원들이 물고 오는 정보를 다 취합해 보자면… 멍청하고 방탕한 성녀는 그의 취향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먼 여자일 것이었다.
위장용 신분증을 쓰면서 레온은 사절단과 함께했다. 따로 움직인 데다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가 대신전으로 가는 사절단에 함께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렇게 대신전에 도착하고 나서, 레온은 황제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몇 가지 정도를 더 얻었건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결국 레온은 제가 직접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전기사단장을 한번 봐야겠어.”
하지만 레온이 대놓고 사절단과 함께 움직일 수는 없었다. 각국에서 온 사절단 중에는 레온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 많은 수가 그를 보면 칼부터 뽑고 싶어 할 것이고.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경호를 서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정보원들이 확인했더군요. 올해 성녀의 경호는 다른 자가 맡는다고 합니다.”
“하….”
대신전의 일에 대단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성녀의 경호를 신전기사단장이 선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걸 하지 않는다니.
‘제대로 갈라선 모양이군.’
레온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어떻게든 라트반을 신전기사단에서 나오게 만들 생각이었다. 이 정도로 금이 간 사이면….
‘그 자존심에 몇 번만 더 금이 가면 되겠어.’
완전히 대신전과 갈라서게 만들어야 데려오기가 편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레온은 눈을 성녀에게로 돌렸다. 어지간한 자들로 신전기사단장의 자존심에 상처를 낼 수는 없다. 그가 유일하게 복종해야 하는 성녀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성녀 말이야. 밤마다 남자를 갈아 치운다고 했잖아.”
레온의 말에 눈치 빠른 부관이 대답했다.
“금발에 푸른 눈의 남자도 꽤나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성녀님께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셔야 하는데.”
장난스럽게 말하는 레온의 행동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성녀에게 황태자를 밀어 넣어야 하는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 전에 성녀를 한 번은 보고 싶어.”
“그렇다면 기도회에 가시는 게 제일 빠른 방법 같군요.”
레온은 부관에게 기도회의 예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는 조금 재미있는 일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스스로 보기에도 고약한 꼴이었다. 피부병이 가득해 보이는 외양과 일부러 찾아 두른 마구간지기의 넝마에서 나오는 악취에 사람들은 레온으로부터 멀어졌다.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가짜 피부의 문제점은 눈까지 속이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들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한, 그에게서 이상함을 눈치챌 자는 없었다.
‘오늘 연극 좀 해야겠군.’
일부러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성녀가 나오는 길목에 자리 잡았다. 이제 축복의 기도를 내려 줄 시간이 되면 성녀가 제 앞으로 지나갈 터였다.
‘만지기는커녕 당장 끌어내라고 할 것 같은데.’
지금까지 들어 본 성녀에 대한 것을 종합해 보면 그럴 확률이 압도적이었다. 사람들에게 밀려 나동그라진 척 뒹굴어 볼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불쌍한 노인인 척하며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져 볼까. 그런 생각을 하던 레온은 성녀가 나온다는 소리에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
저절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누구라 말하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신전기사단장 라트반.
‘분명 경호를 서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성녀와 함께 서 있는 저 남자가 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 라트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녀의 손을 잡으며 에스코트를 하고 있었다. 레온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성녀의 손을 잡고 있는 라트반의 손을 살폈다.
그을린 피부의 크고 거친 손이, 제 손안에 있는 성녀의 손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쥐고 있는 것이 레온의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에스코트다. 저런 에스코트야 널리고 널린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저 둘 사이에서는 불가능해야 하는데.’
성녀의 앞에서 개처럼 기며 부하를 살려 달라 빌어야 했던 모욕을 겪은 라트반이다. 그런데 저렇게 에스코트를 한다고?
‘분명히 경호도 거부했었다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다시 성녀의 경호를 하고 있다니.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그동안 둘 사이에 무언가 관계가 변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설마 성녀가 기사단장을 침대로 끌어들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들은 정보에 따르면 라트반은 그런 것으로 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둘이 몸으로 엮인 사이라면 진작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것이다. 라트반과 성녀는 무척이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까.
‘성녀가 무슨 기적이라도 보여 준 건가?’
신에 대한 믿음으로 똘똘 뭉친 저 신전기사단장의 마음을 돌리는 방법으로 그런 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성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밀며 앞으로 나가려는 탓에 줄이 무너지면서 소란스러워졌다. 레온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일부러 넘어지는 척을 하며 최대한 성녀의 눈에 잘 보이는 위치로 굴렀다. 후드를 벗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크게 외쳤다.
“성녀님! 제발 저에게 축복의 기도를 내려 주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내치라고 할까, 아니면 데려오라고 할까. 어느 쪽이든 성녀를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었다. 곧 성녀가 라트반에게 뭐라 속삭이고 그가 성녀의 손을 놓은 다음 레온에게 다가왔다. 그때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더러운 창녀!”
그 말을 시작으로 난리가 났다. 달걀이 날아들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레온은 짜증 섞인 눈으로 그 소란을 바라보았다. 겨우 성녀를 좀 가까이서 보나 했더니, 이런 것들 때문에 기회를 놓칠 줄이야. 하지만 곧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이대로 신전 안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성녀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제 앞까지 온 성녀가 물었다.
“아직도 내 축복을 바라고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성녀는 무척이나 담담해 보였다. 주변의 소란은 뒤로한 채, 그를 위해 다가온 것이 레온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재미있네.’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녀는 그에게 짧은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다. 그러더니 징그러운 피부와 역겨운 냄새가 가득한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레온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태도가 아님을 알았다. 신관들도 한 걸음 물러설 정도였는데 대신전 안에서만 있었을 성녀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춘 성녀가 멀어지려 했다.
‘아쉬운데.’
이것으로 끝나기에는 아쉽다. 조금 더 만나 보고 싶었다. 그의 본능이 알려 주고 있었다. 이 여자는 재미있는 여자에서 끝나지 않을 것을. 레온은 손을 뻗어 그의 앞에서 흔들리던 긴 금색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손에 휘감기는 감촉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성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변장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레온은 손에 감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 성녀님을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다음번에는 다른 곳에도 입을 맞춰 보고 싶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며칠 후 레온은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나 오늘, 성녀가 제국의 사절단을 만나겠다는 편지를 보내온 다음부터는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드디어 다시 만나는군.’
그의 머릿속에 기도회의 예식 때 본 성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썩은 달걀이 뚝뚝 흘러내리는 가운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서 있던 모습이
***
얼음 위에서 식사를 하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느끼며 앞을 바라보았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식사 자리였어야 할 이 접견은 사실상 나와 황태자 두 사람의 식사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절단의 다른 두 명은 거의 말이 없는 대신 그 사람들 몫의 대화까지 전부 레온 황태자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황궁에 돌아가면 자랑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성녀님과 식사까지 함께했다는 것을 알면 부러워할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혼자만 밝다. 누가 보면 눈치 없고 속도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그런 사람. 적당히 과장된 몸짓과 웃음 그리고 농담이 섞인 가벼운 말들.
‘이 사람이 왜 벌써 나타난 거야?’
황태자 레온. 소설 속 남자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사람이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유난히 인상이 강하다 싶었더니 지금 생각해 보니 라트반을 처음 보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 말이다.
문제라면 그는 훨씬 후에 이벨리나와 접점이 생기는 사람이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대신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대신전에 올 때에도 정체를 숨기고 왔었고, 필요한 정보를 모으면 곧바로 제국으로 돌아갔다. 이리스를 만나고 나서야 본래의 신분으로 대신전을 방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황태자는 내 앞에서 즐거운 듯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그런 황태자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책에는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허술한 듯 보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치밀하게 머리를 굴리며 전쟁을 즐기는 자다. 웃으며 인사를 나눴던 자가 만약 제국에 위협이 된다 판단되면 그 즉시 베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살피자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는 조금 표정을 바꾸어 말했다.
“이런, 제가 너무 제 말만 했군요. 혹시 아직 몸이 편치 못한데 무리해서 맞이해 주신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황태자의 시선은 음식이 거의 줄어들지 않은 내 접시를 향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이신지라 접대에 소홀함이 있진 않은지 걱정이 되는군요.”
이건 예의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뜬금없이 제국의 황태자라니. 지금 옆에 서 있는 신관들의 표정이 딱딱해지다 못해 돌이 된 것 같다. 사절단에 황태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접견은 성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이가 좋은 게 아니잖아.’
호시탐탐 대신전을 제국의 발아래 넣으려고 노력하는 자가 황태자다. 그렇기에 대륙 곳곳에서 대신전과 제국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신전기사단이 출정하면 거기에는 제국기사단이 먼저 도착해서 마물을 처리했다거나, 돌림병이 퍼졌다는 소식에 신전의 신관들이 가 보면 제국의 의사들이 먼저 도착해 사람들을 돌본다거나 하는 그런 기 싸움 말이다.
제국은 어떻게든 대륙에 대신전이 미치는 영향력을 줄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다짜고짜 적진 한가운데 상대방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황태자가 오니, 신관들 역시 날이 서 있었다. 황태자는 그런 신관들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와인까지 더 주문하며 즐겁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미리 알려 드리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원래는 제국의 일로 기도회에 참석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일이 끝나 나중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급하게 온 자가 그렇게 변장할 준비까지 했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황태자를 노려보자 그는 여전히 웃으며 내 시선을 받아 냈다. ‘거짓말면 네가 어쩔 건데?’라는 그의 생각이 보이는 듯했다. 다시 한번 와인을 부탁한 그는 이제 식사에는 더 흥미가 없다는 듯 포크를 내려놓더니 물었다.
“그런데 무척이나 아쉽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그의 말에 바짝 긴장을 한 채 되물었다. 황태자가 나를 살피는 시선이 느껴진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거지?
“제국의 이름으로 성녀님께 바친 공물들이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성녀님의 높은 안목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기에 제국 최고의 장인들의 것으로 고르고 골라 가져왔습니다만… 아무래도 아직 저희의 정성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옆에 서 있던 신관 중에서 불쾌감으로 얼굴이 굳어 가는 자들이 보였다. 황태자는 지금 ‘네가 좋아하는 거로 갖다 바쳤는데 안 하고 나왔네?’라고 말한 것이다. 성녀면서 화려한 보석과 장신구 같은 개인의 사욕을 위한 공물을 바치라 했다고 비꼬아 말했다.
‘거기에 성녀를 사사로이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의 여성처럼 대하고 있고.’
내가 준 물건들 왜 안 하고 나왔냐는 소리는 성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나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주변이 어떤 반응이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나를 살폈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벨리나라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포크가 보였다. 그녀였다면 아마도 이걸 집어서 황태자의 이마에 내던지지 않았을까 싶다. 얼핏 스쳐 가는 기억 속에서 이벨리나는 황태자가 언급되면 그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말라며 무섭도록 화를 냈으니까.
그런 상대가 자신을 이렇게 취급한다면 당장 제국과의 관계고 뭐고 황태자를 잡아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 같다. 당연히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말이다.
‘어떻게 할까.’
지금 황태자는 어쩐지 장난감을 막 받은 아이처럼 보였다.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무엇 하나라도 더 건드려 보고 싶은 흥분이 가득한 그런 아이 말이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에서 그만하고 싶었다. 지금 내 머릿속은 이벨리나가 내건 조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다. 접견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슬슬 자리를 떠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황태자를 향해 웃었다.
“기도회의 일정이 바빠 제국에서 보낸 것들을 살펴보지 못했군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보내 주신 밀과 포도주는 감사히 받았습니다. 신께서 언제나 함께하시길.”
내 말에 처음으로 레온의 표정이 굳었다. 그 얼굴을 보니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하긴, 그렇게 엄청난 양을 보냈는데 아직 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자존심이 상하긴 상한 모양이다. 그때 마침 뒤에 서 있던 라트반이 말했다.
“성녀님, 이제 다음 일정을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그래요, 슬슬 일어나야겠군요.”
그렇게 대답하며 라트반을 보았다. 그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황태자만 거짓말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
라트반도 다시 봐야겠다. 사실, 이 접견 이후로 나에게 일정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라트반이 저렇게 말한 것은 신께서 언제나 함께하길 바란다는 헤어질 때의 인사를 한 것 때문이겠지.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해야겠군요, 후식까지 함께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레온 황태자 전하. 그럼 제국까지 가시는 길에 평안이 함께하길 기도하겠….”
그때 레온 황태자가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대신전에 조금 더 머물 예정입니다.”
“…네?”
“제국을 위해 일하며 피할 수 없는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마침 대신전에 왔으니 그 죄가 다 사해질 때까지 긴 기도를 올리고 가려고 합니다.”
황태자는 제법 신실해 보이는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그러니 다음에는 오늘 함께하지 못한 것을 같이 즐기고 싶군요, 성녀님.”
어쩐지 다른 의미로 들리는 말이었다.
“하아….”
연회장을 나오자마자 숨기지 못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거의 먹지도 못한 식사가 명치에 딱 걸려 있는 느낌이다. 그나마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공기에 숨을 좀 쉴 수 있었다.
‘지쳤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미친 듯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생각을 읽어 내야 했다. 거기에 예법까지 신경을 쓰며 대답을 해야 했고. 있는 기억 없는 기억을 다 끌어내고, 그동안 읽었던 책에 있었던 대화법들을 총동원해서 대답을 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럭저럭 나쁘진 않게 대답한 것 같은데.’
레온 황태자의 표정이 아주 살짝 굳는 것을 보았다. 원래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지 않았다면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한 방 먹인 것 같아서 속은 시원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겨우 무거운 기분을 털어 내었다. 한참을 걸으니 내 방의 문이 보였다. 나는 뒤로 돌아 내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라트반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 수고했습니다. 라트반 경.”
그러자 그 역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에 도와준 것도 고마웠고요.”
사실 이 말을 더하고 싶었다. 그가 눈치 빠르게 다음 일정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 덕분에 황태자를 포함한 제국의 사절단과 편하게 헤어질 수 있었다. 내 입으로 일이 있으니 그만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 그것도 라트반 경이 말을 했다면 피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일이 있어 가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물론 그 뒤의 일정이라는 것은 이렇게 방으로 돌아와 쉬는 것뿐이었다.
“…….”
두 번째 감사의 인사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역시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신전기사단의 의무에는 진실을 말할 것이라는 조항도 있긴 했던 것 같다. 물론 완벽하게 지킬 순 없지만 되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겠지.
‘내가 황태자와 오래 있어 봤자 대신전으로서는 좋은 일이 없을 테니 막아선 것이겠지만.’
그 이유 말고 라트반 경이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나를 나오게 해 준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라트반이 말했다.
“좋지 못한 자입니다.”
“네?”
“느낌이 좋지 못한 자입니다. 되도록 돌아갈 때까지 멀리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좀 더 길어진 그의 말에 겨우 그가 레온 황태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라트반이 내가 물어보는 것 외에 먼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심지어 그 내용이 타인에 대한 평가라는 것까지.
‘게다가….’
이렇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강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처음이다. 그 탓에 처음으로 라트반이 좀 사람답게 보였다. 그게 너무 신기했나 보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라트반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말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보아도 좋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경호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게 대답을 했는데도 그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에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던 그는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 처분은 언제쯤 결정하실 겁니까.”
“네?”
처분? 무슨 처분? 갑작스러운 말에 눈만 굴리다 곧 그가 기도회 첫날 경호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과오를 물을 생각이 없는데 어쩐다….’
기도회 날, 내가 노인, 아니 황태자를 데려오라 명령하지 않았으면 달걀 정도는 그가 가볍게 막아 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시킨 일 때문에 그가 임무에 실패한 것인데 거기에 대해 책임까지 묻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겨우 숨 좀 쉴 것 같단 말이야.’
처음 라트반을 만났을 때는 그 싸늘한 기운과 경멸 어린 시선 때문에 차마 바라보기도 힘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적어도 이런 대화를 무리 없이 나눌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그가 잘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이제 자신을 향한 경멸 어린 시선은 사라진 것 같다.
절대로 사이가 좋아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다. 그래도 이벨리나가 잔뜩 벌려 놨던 거리가 한 걸음 정도는 가까워진 것 같다고 하면 너무나 좋은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침에 들렸던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앞으로 4일.
4일이 지날 때까지 이벨리나가 내걸었던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아마도 이 몸에서 나는 사라질 것이다. 그 후에는 다시 이벨리나가 돌아오든지, 아니면 그녀가 새로운 사람을 집어넣을지는 모른다.
‘미안하지만.’
그동안 내가 노력해 가까워진 거리를 내 손으로 좁히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4일 후의 이 몸의 주인에게 그 처분을 넘기고 싶었다.
***
이제 3일 남았어.
이벨리나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내가 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침마다 알람처럼 나를 깨워 주는 정성에 감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옷을 입고, 움직일 준비를 마친 다음 곧바로 서재로 갔다. 거기에는 잠들기 전에 받았던 오늘의 일정표가 놓여 있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보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도 일이 많네.”
불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 단위로 가득한 이 일정은 전부 내가 부탁한 일이었으니까.
어제, 황태자와의 만남을 끝내고 온 다음 나는 일정을 관리하는 신관들을 불러 부탁했다.
“당분간 할 일들을 더 늘렸으면 좋겠습니다.”
“네?”
내 말에 신관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성녀가 제 일을 팽개친 것이 벌써 일 년이 넘어간다. 기도회 때는 그 중요함을 잠시 기억해 내서 다시 움직였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기도회가 끝난 후에도 열정적으로 일을 하려 하다니?
…라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잘 보였다.
“할 일이 없는 건가요?”
“아, 아니.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들은 황급히 달려 나가더니 곧 새로운 일정표를 들고왔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잠시 살펴본 다음 물었다.
“여기 시간이 많이 비는데, 왜 비워 둔 건가요?”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하실 듯해서….”
“괜찮습니다. 급한 일들이 있다면 이 시간에 하도록 하지요.”
일정을 더 추가해 달라는 내 말에 신관들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빈 시간마다 모조리 일정을 채워 넣기 시작하자 그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일정을 잡아 놓고 취소라도 되면 큰일이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네? 아… 아닙니다!”
아니긴. 맞는 것 같은데. 신관들이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게 숨 쉴 시간도 없이 일정을 채워 넣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벨리나가 싫어하는 것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그녀는 내가 성녀의 일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 마치 그동안 그녀가 쌓아 왔던 악명을 무너트리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어제 새로 잡은 일정표를 보며 중얼거렸다.
“반항이지.”
아침에 들었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벨리나의 얼굴도 함께 생각났다. 그녀는 나를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그 표정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의 표정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그 장난감을 부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다는 것이었지만.
이벨리나는 나를 싫어한다.
정확히는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내가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 싫은 것이다.
‘애도 아니고.’
싫어하면 차라리 빨리 나를 이 몸에서 내보낸 다음에 제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지.
‘이런 짓을 하는 게 재미있나?’
이벨리나가 기대하는 나의 모습이 어떤 것일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몸을 빼앗길 것이 두려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룻밤 보낼 남자를 찾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겠지. 그리고 뭐라 말하며 남자에게 함께 자 달라 말하는지도 구경하고 싶을 것이다.
‘휘둘리고 싶지 않아.’
이 몸에서 나가는 것은 두렵다. 하지만 생각을 할수록 그 두려움보다 이벨리나에 대한 분노가 커져 갔다.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기는 싫어.’
이 몸은 원래 그녀의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다시 가져간다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마음을 다스렸다. 억울해하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감정은 분노였다. 나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그녀에 대한 분노.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딱히 대단한 건 아니다. 그저 소심하게 이벨리나가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뿐. 그녀가 뭐라 나를 협박해도 나는 원래 너와 달리 이런 일을 하겠다고 보여 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는 짧지만 다른 인생을 맛보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마지막 날에는 후회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이벨리나의 조건을 들은 날 그냥 아무나 불러 침대로 들일 것을 그 얄랑한 자존심 때문에 버티다 죽게 된다고 말이다.
나는 다시 일정표를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로 바쁘면 분명 그럴 수 있을 것이다.
***
“조금 쉬었다 하시지요.”
한참이나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신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더니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시는 게 처음인지라 걱정이… 읍!”
신관은 급히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네가 이러는 꼴 보는 게 처음이네’라는 속마음이 너무 그대로 나와 버려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그가 주었던 서류에 서명을 하고 돌려주자 그는 눈치를 보다가 꾸벅 인사를 하고 재빨리 서재를 나갔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서둘러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었다.
‘대신관 후보에 관한 일이네.’
지금의 대신관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그래서 기도회 때도 임시로 다른 상급 신관에게 대신관의 자리를 맡기지 않았던가.
‘후보 목록인가?’
이름들이 가득 적힌 종이를 쭉 눈으로 훑어보고 있는데 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카를.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