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48)

라트반은 숨을 죽인 채 제 망토를 붙잡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그 손의 주인은 벤치에 누워 있는 성녀였다.

‘깨어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는 성녀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조용하고 규칙적인 숨소리도 그대로였다.

“으응….”

아무래도 그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닿았던 것을 무의식중에 잡았던 모양이다. 라트반은 한숨을 쉬며 조심스레 자신의 망토 윗부분을 잡아끌었다.

“…….”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성녀의 손에 잡힌 망토가 쉽사리 빠져나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길수록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손에 잡힌 촉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성녀는 손에 쥔 그의 망토를 마치 이불처럼 끌어당겨 제 얼굴을 덮었다.

“응….”

그러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살짝 미소 짓더니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런 성녀의 행동에 라트반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무슨 생각인 거지?’

이 후원은 얼마 전, 그녀가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제게 들켰던 곳이다. 그런 곳에 잘도 다시 나와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깊이 잠들다니. 라트반은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다시 밤바람이 불었다. 서늘한 공기에 성녀는 더욱 몸을 웅크리며 떨었다.

차라리 마수의 공격이라면 성력으로 막아 낼 수 있겠지만 몸을 파고드는 밤바람을 성력으로 막아 낼 수는 없다. 게다가 치유의 능력은 스스로에게 쓰지 못한다. 이런 곳에서 계속 잠을 청했다가는 내일 아침에 성녀의 몸이 편할 리가 없다.

‘깨워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라트반은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

지금 자신이 성녀를 걱정한 건가?

“…….”

얼마 전만 하더라도 그는 성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었다. 대신전에 들어올 때, 신을 두고 한 맹세가 아니었다면 그는 곧바로 신전기사단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맹세했었다.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신의 대리인인 성녀를 섬기고 지키겠다고. 게다가 하필이면 신전기사단장의 자리는 종신직이다. 당장 이 자리를 그만두고 싶다면 제 발로 마수에게의 소굴로 가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라트반이 지난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후원의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기도회가 진행되고 있으니 그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는 신관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라면 성녀가 밖에서 잠든 모습을 다가오고 있는 자들이 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좋지 못한 소문이 퍼지겠군.’

이미 대신전 안에는 성녀를 향한 소문이 가득 차 있다. 그녀와 자신이 같이 있는 모습이 보이면 소문이 어떤 형태를 갖추게 될까. 라트반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성녀가 남자들과 만남을 가진다고 알려진 이곳에서, 밤에 두 사람이 있으면.

“…….”

머리가 아파 왔다. 성녀가 더 이상 밖에서 남자들을 들이는 것이 힘들어 대신전 안, 그것도 신전기사단의 단장을 끌어들였다는 소문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차마 머릿속에 담고 싶지도 않은 역겨운 생각이건만 최근 잡아들인 놈들이 떠들어 대는 소문을 듣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상상이 되어 버렸다.

깨워야 해.

그리고 내일의 기도회를 위해서라도 빨리 그녀의 방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다급한 마음이 문제였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어서 빨리 붙들린 망토 자락부터 빼내야 한다는 생각에 성녀의 손을 잡았다.

“……!”

제 손에 닿은 손의 감촉에 라트반은 멍하니 성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그에게 기어 오라 명령하던 손가락이다. 그때는 성녀고 뭐고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이 손가락을 꺾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작고 가늘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손에 잡힌 성녀의 손가락은 차갑고 딱딱한 그의 손바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감촉에 라트반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가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인기척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트반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성녀님.”

“…….”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성녀님, 일어나십시오.”

“…….”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불렀건만 여전히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흔들어서라도 깨워야 하나? 하지만 성녀의 허락 없이 그녀에게 닿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 규율을 생각하던 라트반은 제 손을 보았다. 그가 잡고 있는 희고 가는 손이 보였다.

규율은 이미 한참 전부터 어기고 있었다.

잠시 후, 조용한 대화를 위해 후원 깊숙이 들어온 신관들은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

라트반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복도를 걸었다.

성녀의 방 안쪽은 밤이 되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 그것이 그에게는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이렇게 그가 성녀를 안아 들고 걷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할 테니 말이다.

‘비밀 통로를 이용한 건 처음이군.’

성녀의 방에서 대신전 여기저기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는 것을 라트반도 알고 있었다. 그가 차기 기사단장으로 확정되었을 때, 전 단장이 그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이건 기사단장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이지. 성녀님은 아마도 본인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실 걸세. 그러니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절대로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하게나.”

전 기사단장은 그렇게 말하며 라트반을 후원 한쪽 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여는지도 알려 주었다.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사용하지 말고 알고 있는 척도 하지 말라고 하셨었지.’

하지만 지금 그 비밀 통로를 잠든 성녀를 방으로 데려가는 데 사용하고 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은 벽을 더듬지 않고서도 부딪힘 없이 길을 찾았다. 한참을 걸으니 바람이 멈추는 곳이 있었다.

그는 성녀를 품에 안은 채, 벽에 손을 대었다. 푸른빛이 돌며 벽이 사라지고 건너편에는 작은 방의 모습이 보였다.

‘성력을 쓰는 건 오랜만이군.’

신전 기사단 역시 신전의 신관들처럼 어느 정도의 성력은 지니고 있다. 하지만 마수와의 전투 외에는 거의 쓰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단장을 향해 마음속으로 사죄의 기도를 한 라트반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라트반은 품 안에서 여전히 잠들어 있는 성녀를 보았다. 이 정도로 몸이 흔들리고 있는데도 성녀는 깨지 않았다. 축 늘어져 있는 몸은 숨을 쉬는 것만 아니었다면 죽었나 생각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기도회의 마지막 예식 때 있었던 일 때문에 피곤한 탓에 깊게 잠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복도가 끝나자 성녀의 침실이 보였다. 라트반은 침대 위에 성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제야 그는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뭘 한 거지?’

제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잠이 든 성녀를 안아 들고 비밀 통로까지 이용해서 침실에 데려다 놓다니. 자신이 한 일이 스스로 믿기지 않아서 라트반은 연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돌아가자.’

아무래도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모양이다. 어서 빨리 조금 전 이용했던 통로를 통해 돌아가야 했다. 그럴 리는 없어도 성녀와 함께 그녀의 침실에 있는 이 상황이, 인식하고 나니 무척이나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 걸음 발을 옮겼던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하….”

성녀는 여전히 그의 망토를 붙잡고 있었다.

그냥 확 잡아채 버릴까.

아무리 강하게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놓지 않을 리가 없다.

“…….”

하지만 라트반은 제 망토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침대의 옆에 조용히 섰다. 강하게 잡아채면 되는데, 그렇게 하기가 어쩐지 싫었다.

라트반이 비밀 통로를 이용해 성녀의 방을 나온 것은 새벽하늘이 밝아 올 때쯤이었다. 서둘러 기사단이 머무는 곳으로 가는 그의 망토 한쪽은 구겨진 자국이 가득했다.

***

그게 지난밤의 일이었다.

라트반은 일부러 성녀로부터 몸을 돌려 섰다. 어쩐지 지금 그녀를 보기가 민망했다. 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더라도 허락을 받지 않고 성녀의 몸에 손을 대었으며, 그녀의 침실에 들어갔고, 잠들어 있는 사람의 곁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라트반은 다시 생각해도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녀를 향했던 혐오감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왜.’

한 번 쓰러졌다가 일어난 후, 성녀는 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일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녀가 했던 일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라트반은 어쩐지 지금의 성녀는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마침 신관들이 그에게 다가와 기도회의 남은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사이 성녀는 신관들에게 부탁해 차를 받아 마셨다. 더 이야기할 일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신관들과 한참이나 일 이야기를 나눈 다음, 라트반은 몸을 돌렸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신관들과 이야기하며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다.

‘정신 차려.’

성녀는 성녀다. 갑자기 안 하던 일을 하면 오히려 더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다시 예전처럼 거리를 두고 그녀를 상대해야 한다.

그렇게 그가 다짐한 순간.

“성녀님!”

찻잔을 떨어트리며 성녀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

나는 눈을 떴다.

‘깜깜하네.’

마치 검은 종이처럼 다른 색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짙은 어둠이 보였다. 처음에는 빛이 없는 방인가 했지만 확인을 위해 들어 본 내 손은 무척이나 잘 보였다. 물끄러미 손을 바라보던 나는 어색함을 느꼈다. 이 손은….

‘원래의 내 몸이야.’

병원의 침대 위에서 죽었던 그 몸이다. 깡말라 비틀어진 손목과 주사 자국이 가득한 팔. 그리고 약 때문에 여기저기 변색된 피부까지.

그사이 이벨리나의 몸에 익숙해졌던 탓일까. 십수 년을 보아 왔던 내 몸에 어색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긴 어디야?’

온통 검은 이 공간은 어디일까.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내 뒤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보기 위해 몸을 돌려 눈을 깜박거리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벨리나!”

이벨리나. 그녀가 서 있었다. 익숙한 존재를 보게 돼서 그런 것일까.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이벨리나를 향해 다가갔다. 지난 몇 주간 언제나 거울을 볼 때마다 서 있던 모습이었다. 긴 금발에 하얗고 혈색 좋은 피부. 가는 목과 길고 쭉 뻗은 팔다리에 성인 여성의 굴곡이 완연한 몸.

이렇게 보니 새삼 이벨리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소설에서도 이벨리나의 미모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으니.’

그때,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벨리나가 나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

맑은 가을 하늘이 생각나는 파란색의 눈동자가 천천히 깜박거렸다. 진짜 이벨리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안녕하세요?”

마주치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벨리나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에는 이게 무얼까, 하며 살피는 것 같았던 얼굴에 보는 것만으로도 움찔할 정도의 차가운 빛이 서렸다.

그러더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뭘 하는 거지?”

“네? 아…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나는 일단 사과를 했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누가 보아도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저런 표정을 지을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멋대로 몸을 쓰고 있으니.’

이벨리나로서는 황당한 일일 것이다. 갑자기 몸에 들어온 영혼이 멋대로 제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 얼마나 끔찍할까.

“저도 어쩌다가 이렇게 당신의 몸속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당신의 의식이 돌아오는 날까지 다치지 않고 조심히 있을….”

“내가 집어넣었으니 있는 거지.”

“…네?”

순간, 이벨리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묻자 그녀는 나를 보며 비웃었다.

“내가 너를 내 몸속에 밀어 넣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

이벨리나가 나를 자신의 몸속에 넣었다니.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대꾸도 않고 가만히 서 있자 그녀가 한 걸음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내 몸을 보고 다시 그녀의 몸을 보더니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죽은 다음에 좋은 몸을 얻었으면 좀 더 마구 살면서 즐겨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즐길 생각?”

“그래, 달려 나간다거나 하는 그런 거 말고.”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걸까. 이벨리나가 하는 말이 귀로는 잘 들리는데 머리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이벨리나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면 그녀가 나에게 무척이나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그녀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두려워하면서 울지 않을까도 생각했었고. 하지만 정작 만나게 된 진짜 이벨리나는 그저 나에게 짜증을 낼 뿐이다.

“나 사실 좀 기대했었거든. 일부러 보이는 것 중에 가장 불쌍한 영혼으로 골랐어. ‘아, 이런 애가 내 몸을 쓴다면 나보다 더 확실하게 망가질 수 있겠구나. 어차피 한 번 죽은 인생이니 덤으로 얻은 인생은 마구 써 버리겠구나’ 하고 말이야. 그런데….”

다가온 이벨리나가 내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이벨리나의 몸은 내 원래의 몸보다 훨씬 키가 컸다. 그렇기에 한껏 고개가 꺾인 채 그녀를 바라보아야 했다.

“쓸데없이 부지런하게 살더라? 장난하니?”

그렇게 말하는 이벨리나의 눈에는 이제 분노마저 일렁이고 있었다.

“몸 안에서 네가 뭘 하는지 계속 보고 있었어. 그런데….”

“잠깐만요.”

계속해서 말하려는 이벨리나를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녀의 얼굴에 지금 감히 자신을 막은 거냐는 짜증이 가득했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나를 데려왔다구요…?”

“그래.”

“우연이 아니라… 골랐다고?”

“그래. 고맙지 않니?”

지금까지는 알 수 없는 우연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갑자기 몸을 빼앗긴 셈이 된 이벨리나에게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게 전부 다 그녀가 원하던 일이었다니.

“왜… 그랬어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단지 왜 이벨리나가 이런 일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내 질문에 이벨리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책 속, 그것도 어차피 죽는 운명의 몸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절망했었다. 그나마 이벨리나의 기억을 볼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것마저도 없었다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해서 편한 것도 아니었잖아.’

최악의 상황이다. 모두가 성녀를 싫어하며, 접근하는 자들이라고는 제 사욕을 채우기 급급하다. 거기에 모르는 남자에게 겁간까지 당할 뻔 했다. 그런 상황 속에 던져 두고 고마워하라고?

“네가 살아 있을 때, 언제 그런 좋은 몸으로 돌아다녀 봤겠니. 그러니….”

“몸은 좋았지만.”

결국 화를 누르지 못한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뱉고 말았다.

“상황은 전혀 좋지 못하잖아요!”

불만을 가득 담은 내 말에 이벨리나가 깔깔거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이 몸은 성녀야.”

“…….”

“모두 다 불만은 있어도 생각만 할 뿐이지 성녀에게 대단한 위해를 가할 순 없어. 무슨 짓을 해도 그저 불평만 할 뿐이야. 성녀란 그런 자리란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수들로부터 대륙을 지키는 존재니까.”

순간 못된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이벨리나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잘난 척할 것 없다고, 여기는 책 속이고, 당신의 것이라 굳게 믿는 그 성녀의 자리는 이리스가 나타나면 빼앗길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책 속에서 모든 성력을 잃고 더 이상 성녀가 아니게 되었을 때, 이벨리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미친 것처럼 자신은 성녀라고 외치며 죽었던 모습이. 지금 이 상황에서 이벨리나를 굳이 자극해서 좋을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기에는 화가 났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하고 싶었다.

“달걀은 던지던데요.”

뭐라 딱히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렇게 말했더니 이벨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왜 라트반을 벌하지 않았지? 신전기사단장이 성녀를 지키지 못했어. 그것도 가장 엄중히 경호했어야 할 기도회에서. 그렇다면 그 목으로 죄를 갚아야지.”

그렇게 말하는 이벨리나의 목소리에는 한마디, 한마디 증오가 배어났다. 목을 베어 버리라는 그녀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로 왜 그 좋은 기회를 놓쳤냐는 아쉬움이 느껴져 나는 몸을 떨었다.

“…왜 그렇게 라트반 경을 싫어해요?”

라트반에 대한 이벨리나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책에 나오지 않았던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라트반의 모습을 보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원한을 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벨리나가 그에게 뭔가를 요구하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싫어하는 것이면 모를까. 하지만 그 정도로 이렇게 격렬한 분노를 보일 수 있을까?

“그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런 식으로 모욕을 주고… 큭!”

갑자기 이벨리나가 내 목을 잡았다.

“그래 그는 잘못이 없어.”

“이, 이것… 놔….”

“‘그’는 잘못이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한 이벨리나는 곧 손을 풀었다. 강하게 목을 조른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의 내 몸은 조금의 충격에도 뼈가 쉽게 부러질 정도로 약했다.

“쿨럭!”

이벨리나가 쥐었던 목을 주무르자 눈앞이 흐려졌다.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이던 나를 바라보던 이벨리나가 지루하다는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내가 크게 잘못 골랐군.”

그러더니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재미있을 줄 알고 일부러 너 같은 걸 골랐는데. 너 말고 다른 불쌍한 영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좋겠다. 좀 더 솔직하게 욕망대로 사는 영혼으로 말이지.”

그 말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이벨리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몸에 들어갈 다른 영혼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언제나 생각은 하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들어간 몸이니, 언젠가 아무 이유 없이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그런 각오를 해 두어야 정말로 이벨리나의 몸에서 떠나게 되었을 때 억울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매일 나름대로의 각오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벨리나가 다른 영혼을 고를 거라고 말하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운 좋게 받았던 여분의 삶이 이런 식으로 끝을 맺을 줄이야.

‘이제는 정말 죽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 이벨리나가 다가오더니 내 앞에 앉아 싱글거리며 웃었다.

“역시, 이 몸이 마음에 들긴 했나 봐? 아쉬워 죽겠다는 얼굴이네.”

놀리는 듯한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벨리나가 하는 말들은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누리던 건강한 육체가 눈앞에서 빛나고 있다.

지난 몇 주간 누렸던 일상들이 생각났다.

어딘가를 가고 싶을 때, 아무런 걱정 없이 갈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걸은 다음에 느껴지는 노곤한 피로감이 신기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뛸 때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낯선 세상에서 낯선 일들을 겪으면서도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즐거움 때문이다.

이제 그것을 다시 누릴 수 없다.

내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주인이 가져가겠다 하니 돌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억울하고 아쉬운 것일까.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어느새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모습을 이벨리나에게 보여 주는 것이 민망하고 짜증 나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웃었다. 그러더니 내 머리채를 붙잡고 얼굴을 들게 했다.

“이 몸, 갖고 싶지?”

“…….”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답을 알고 있으면서 물어본 것이니까.

“그 몸 네가 가져도 좋아.”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벨리나의 입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2년 뒤면 죽을 운명이다. 그래도 나는 이벨리나의 몸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

“뭔가요?”

초조한 마음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했다. 바싹 마른 손목이 이벨리나를 붙잡았다. 버석버석한 내 피부와 달리 부드럽고 흰 그녀의 피부를 느끼는 순간 더욱 욕심이 생겼다.

다시 이 몸을 갖고 싶다. 끝이 있는 몸이라도, 다른 몸이 아닌 이벨리나의 몸을 원했다.

“네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뭐든지 할게요.”

그렇게 대답하자 이벨리나의 얼굴에 삐딱한 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나를 비웃으며 갖고 놀 생각이다. 분명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겠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었다. 이벨리나가 나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자 조급한 마음에 내가 먼저 물어보아야 했다.

“혹시… 사람이라도 죽여야 하나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이자 어려운 것은 역시 살인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이벨리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불가능해. 성녀는 타인을 죽일 수 없어. 자살도 할 수 없지.”

“…….”

마치 시도해 본 사람처럼 이벨리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리고 그건 재미도 없잖아. 기왕이면 즐거운 게 낫지. 그러니까… 그래, 네가 하기 힘들어 보이는 걸로 하자.”

“…내가 힘들어하는 것?”

이벨리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와 몸을 섞으렴. 일주일 내로.”

“…뭐?”

황당한 이벨리나의 제안에 나는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보았다. 남자와 자라고? 그것도 일주일 내로? 드디어 원하던 반응을 보았다는 것처럼 이벨리나는 더욱 즐거운 듯한 얼굴이 되었다.

“일주일 내로 네가 하지 못하면 그 즉시 몸을 빼앗을 거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무언가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지금 단지 내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아니, 내가 아니었어도 이벨리나는 똑같은 조건을 내걸었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누군가가 제 몸을 마구 굴려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건 네가 알 것 없어.”

이벨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무척이나 다정하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을 축복 한다는 듯이.

“무척이나 쉬운 일이란다. 네가 옷자락만 들어도 사내들은 쉽게 흘레붙을 거야.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이 몸은 꽤나 그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이벨리나의 얼굴이 아주 잠시 일그러졌다. 자세히 보고 있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

그렇게 말한 이벨리나가 내 몸을 밀었다. 순간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저 멀리서 이벨리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곳이었다. 언제나 내가 잠들었던 성녀의 침실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성녀님!”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자 옆에 있던 신관들이 비명처럼 나를 불렀다. 그들은 허겁지겁 물을 가져다주고 다른 신관들을 부르며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죠?”

“기억나지 않으세요? 기도회 두 번째 날 준비를 하다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3일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셔서 모두가 크게 걱정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무사히 일어나시다니, 신께서 언제나 성녀님을 보살펴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니, 일어난 건 이벨리나가 나를 돌려보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말이 있었다.

“…3일?”

“그렇습니다. 일단 속이 많이 허하실 터이니 소화하기 쉬운 수프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신관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들끼리 바쁘게 돌아다니며 소란스러웠다. 그때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4일 남았네. 힘내.

“이벨리나!”

그 목소리에 무심코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신관들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 지금은 내가 이벨리나지. 쏟아지는 시선들을 무시한 채 두 손을 바라보았다. 희고 깨끗한, 상처 하나 없는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이라 하더니.’

쓰러져 있던 시간을 포함한 조건이었나. 조금 전 키득거리며 귓가에 속삭였던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4일. 4일 내로 누군가와 자라고?

나는 다시 내 손을 보았다. 4일 후에도 이것이 내 손이려면 이벨리나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

다행히 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3일이나 쓰러졌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는 없는 법이다.

일어나서 그동안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들었다. 쓰러진 직후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던 것 같다. 차를 마시다가 쓰러졌기에 가장 먼저 나에게 차를 가져다 바쳤던 신관이 감옥에 갇혔다.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얼마 전 성녀님께서 직접 주신 차입니다! 앞으로는 이것을 올리라고 주셨었어요! 전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신관들은 그 말에 주방에 남아 있던 찻잎을 모두 가져와 살펴보았다. 몇 번이고 우려서 마셔 보기도 하고 씹어 보기도 하면서 혹시나 그 신관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닌가도 조사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 끌려 나오는 이름이 있었다. 카루스였다.

얼마 전, 성녀의 방으로 들어와 밖에서 다 들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윽박지르던 것을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신관들이 죄다 고해바쳤다. 그 탓에 카루스 신관은 곧바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문제는 거기서 일어났다.

“이것 놔!, 감히 지금 상급 신관을 지하 감옥에 넣겠다는 건가!”

카루스가 신전기사단에게 거칠게 반항하며 지하로 끌려왔다. 그러자 그 안에 갇혀 있던 자들이 그의 목소리에 놀라 철창에 달라붙어 그를 불렀다.

“어? 카루스 신관님!”

“뭐, 뭐야. 왜 카루스 신관님이 여기에….”

그리고 라트반은 그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아는 사이였군.”

그의 목소리에 카루스와 남자들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서… 기도회에서 달걀을 던지고 소란을 일으킨 것이 카루스 신관의 사주였다 이거군요.”

“그렇습니다.”

라트반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무슨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이런 거였나. 문제라면 그는 정작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들어 보니 다른 남자들에 대한 것도 더 퍼트릴 거라면서 협박을 하려 했던 모양이다.

‘멍청하네. 이벨리나는 그런 것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쓸 것 같지 않은걸.’

의식 저편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생각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벨리나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라면 카루스에게 오히려 재미있으니 더 해 보라고 했을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지금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결국 기도회의 둘째 날은 불참하게 됐네.’

쓰러졌는데 참석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밖에는 조금 다르게 이야기가 퍼진 것 같았다. 성녀가 전날에 습격 위협을 느끼고 쓰러졌다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 말에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간 열심히 외운 기도문이 몇 개였는데. 발이 아프도록 걸어 돌아다니면서 기도회의 준비를 착실하게 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소설의 내용이 생각났다.

기도회에서 이벨리나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물론,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었다.

‘어…?’

소설에서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시간 동안 이벨리나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적어 주면 독자들이 악역인 그녀를 더욱 싫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벨리나는 정말로 아팠던 것이 아닐까. 마치 지금의 나처럼?

“성녀님?”

“아, 미안해요.”

라트반이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상세한 보고 고마워요. 이제 그만 돌아가 보아도 좋습니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 이후로, 보이는 곳 어디에서나 라트반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신관들에게 들어 보니 쓰러진 이후로 거의 잠도 안 자고 진상 확인을 위해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결국 원인은 모르지만.’

이쯤 되니 사실 차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벨리나가 불러내고 싶을 때, 나를 불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깨어났던 것도 이벨리나가 그 어두운 공간에서 나를 밀었을 때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라트반을 배웅하려고 할 때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평소처럼 인사하고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던 그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제국의 사절단을 만나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쓰러져 있던 사이 기도회는 끝났고, 접견을 기다리고 있던 각국의 사절단들은 대부분 돌아간 상태였다.

3일도 못 기다린 것이냐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대부분의 사절단은 이벨리나가 쓰러졌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은 것 같다. 그냥 성녀가 자신들을 만나기 싫으니 둘러대는 핑계로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모두가 피하는데 눈치 없이 남아 있어 봤자 좋은 일이 없다고 판단했겠지.’

그 탓에 사절단들은 대부분 빠르게 접견을 포기하고 대신전을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다 떠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떠나지 않을까 했던 아펠리우스 제국의 사절단은 아직도 남아 성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접견은 힘들 것 같으니 돌아가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만나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정확히는 다시 성녀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기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이벨리나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이 몸을 갖고 나를 비웃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굶주린 거지에게 먹을 것을 흔들면서 잡아 보라고 장난하는 듯하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런 대접을 받아도 아무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몸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이 몸에서 더 살고 싶으면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하지만 이벨리나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따르고 싶지 않아.’

무엇이라도 좋았다. 이벨리나에게 반기를 들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성녀의 일을 하는 것에 짜증을 내었다.

‘쓸데없이 부지런하게 산다고 했지.’

그 말이 생각난 순간 나는 신관들에게 말했다. 아펠리우스의 사절단을 만나고 싶다고. 그것도 당장.

그녀의 말에 휘둘려서 벌벌 떨다가 남자를 찾으러 나가고 싶진 않았다. 분명 그게 이벨리나가 바라는 모습일 테니까.

***

시간이 되자 나는 몇 명의 신관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갔다. 내 주변을 라트반과 다른 몇 명의 신전기사가 바짝 날이 선 상태로 경호했다. 문이 열리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아펠리우스의 사절단이 일어나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사절단은 세 명이었다. 되도록 접견을 조용히 하고 싶다고 했더니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 세 명 중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동작에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는 내 손등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에게서 나는 익숙함을 느꼈다. 부드러워 보이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낯이 익었다.

그럴 리가. 이 세계에서 내가 만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사이 남자는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보통 이런 인사는 아주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야 하는데, 남자는 한참이나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 조금 당황하고 있을 때, 손등 위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

분명 손등 위를 훑는 것은 혀의 감각이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움찔거리는 순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기억에 남아 있는 눈이었다. 어디서 봤지? 어디에서….

그때 남자가 입을 열어 말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성녀님.”

“…당신은.”

기도회의 예식에서 나에게 축복을 받았던 노인. 그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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