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48)

‘뭐야? 어떻게 돌아왔지?’

이제는 눈에 익숙해진 천장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몇 번이나 깜빡여도 그대로인 것을 보면 헛것을 보는 것은 아닐 터.

‘돌아온 기억은 없는데?’

분명 마지막 기억은 시원한 바람을 느끼면서 벤치에서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어떻게 내 방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내 몸을 살펴보았다. 입고 있었던 옷 그대로 나는 이불을 덮은 채였다. 그 이불을 더듬거리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좀 다른데?”

잠결에 얼핏 뭔가를 쥐었던 기억이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해서 놓치기 싫었기에 꼭 쥐었던 것 같다. 그것이 이불인가 했는데 서걱서걱한 감촉은 내 기억 속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뭘 쥐었던 거였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중을 드는 신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녀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요.”

내가 대답하자 곧 문이 열리고 그들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지금 일어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조금 부스스한 내 몰골에 그들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그보다 지금 시각이…!”

“성녀님께서 참가하시는 예식은 아직 한참 후입니다. 천천히 준비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말에 기억이 났다. 다행히 기도회 두 번째 날에는 내가 참석해야 할 예식이 오후부터 있었다.

“어제보다 훨씬 더 얼굴빛이 좋아 보이시네요. 간밤에 푹 주무신 것 같군요.”

그런가?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몸이 좀 편해진 것 같았다. 벤치에 누울 때만 해도 여기저기가 뭉치고 욱신거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기지개를 켜 봐도 특별히 아픈 곳이 없었다.

‘누가 나한테 성력을 썼을 리도 없고.’

사실 성녀인 이 몸에 다른 신관들이 성력을 써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꽤 강한 성력을 한참이나 쓴다면 아주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 없는 일을 누가 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어떻게 침대로 돌아왔었는지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어젯밤에 누가 나를 방으로 데려왔나요?”

“네? 어젯밤이라니요?”

“분명 밖에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성녀님께서는 어제 잠드신 이후로 나간 적이 없는데….”

그렇게 말하던 신관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 눈빛이 또 밖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다녔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신관의 얼굴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꿈을 꾸었나 봐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자 신관은 조금 의심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뒤따라 들어온 다른 신관들이 어서 오늘 예식을 준비하자는 말에 곧 표정을 지우고 그들을 따라 옆방으로 갔다.

“후….”

안도의 숨을 쉬고 나서 침대를 보았다. 적어도 누군가 나를 데리고 들어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방 앞을 하루 종일 지키고 있는 신관들이 모를 리가 없으니 말이다. 아무도 내가 나간 것을 모른다면 안쪽에 있는 비밀 통로로 돌아온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든 내 발로 돌아온 모양이야.’

그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통로로 향하는 문 역시 나만이 열 수 있는 것 같았고.

‘일단은 오늘 일에 집중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내 뺨을 두드렸다. 그래도 어쩐지 손에 남아 있던 느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

행사 참여가 오후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느긋하게 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복만 걸치면 바로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단장을 끝낸 다음 신관들과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이 몸에 빙의하고 나서 두세 번 정도 방문했던 곳이기도 했다. 문이 열리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내 기억과는 무척이나 달라져 있는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게 다 뭐야?”

여기가 집무실인지 창고인지. 분명 저번에 왔을 때는 정리가 잘되어 있는 길고 큰 방이었는데 지금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물건이라고 말하긴 했어도 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책상과 바닥 위에 가득 쌓여 있는 것들은 겉으로 보기에도 자신이 귀중품이라는 것을 말해 주듯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상자들이었다.

방 곳곳 가득한 물건들에 질려 가만히 서 있자 따라 들어온 신관들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많은 나라에서 작년보다 더욱 성대하게 기도회를 위한 공물을 보내왔습니다. 기도회가 끝난 후에 각국의 사절단이 알현하는 시간을 가질 터이니 한 번 둘러보시지요.”

신관의 말에 그제야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소설 내용에서도 가볍게 다루어진 적이 있었다. 기도회의 공물.

이것은 무척이나 오래된 전통이었다.

성녀가 있기에 이 대륙은 마수들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곳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대신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곳의 땅은 마수의 위협으로부터 취약했다. 그렇기에 대신전은 그런 곳으로 신전기사단을 보내거나 고위 신관들을 보내어 사람들이 마수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돌보았다. 아주 가끔은 성녀가 직접 갈 때도 있었고.

그런 나라들이 기도회가 시작될 때 그동안의 도움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대신전을 위해 보내던 선물. 그것이 기도회의 공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대륙 전체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 어떤 나라든지 기도회가 되면 대신전으로 공물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밖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위한 공물. 그 공물들은 대부분 이틀간 이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식량으로 쓰이는 것들이다. 꼭 식량이 아니더라도 약초나 과일 같은 것도 많았다.

또 다른 공물은 대신전의 주인인 성녀에게 보내는 공물이다.

‘많이도 보냈네.’

그중에서도 유난히 많이 보낸 나라들이 있다. 아무래도 신전의 도움을 기대해야 하는 변방의 나라일수록 더욱 많은 공물을 보내오곤 했다. 신전기사단이나 상급 신관들을 더욱 자주 자신들의 나라로 보내 달라는 뜻인 것이다.

‘원래는 이 정도로 많이 보내지는 않았다고 했지….’

책에서는 이벨리나가 성녀가 된 후 이 공물의 양이 몇 배로 늘어났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벨리나가 보란 듯이 더욱 많은 그리고 더욱 비싼 공물을 보내는 나라에 신전기사단과 신관들을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설마 성녀가 공물의 양으로 나라를 차별할까 했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그것이 확실해지자 공물을 보내는 것은 경쟁적으로 변했다.

‘그 결과가 이거군.’

짧게 한숨을 쉰 다음 근처에 있던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집었다. 상자 위에 ‘라루스’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기억을 찾아보니 대신전에서 무척이나 떨어져 있는 작은 나라였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보냈을까.

“이건….”

작은 상자이길래 별생각 없이 열었는데. 그 안에는 아이 주먹만 한 붉은색의 보석이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런 쪽에 지식이 전무한 나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엄청나게 비싼 거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려놓은 다음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더 큰 상자를 보았다. 단단하고 향이 나는 검은 나무 상자는 무척이나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열어 보기 전부터 느낄 수 있었다. 이 안에 있는 것은 조금 전에 보았던 보석보다 더 대단한 것임을.

그렇게 생각하며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본 순간 나는 눈을 깜박이며 말을 잃었다.

“와….”

그냥 순수한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이아몬드일까? 투명한 보석 수백 개가 박혀 있는 목걸이와 귀걸이가 세트로 안에 들어 있었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먼 나라의 박물관이 생각나는 것들이었다.

상자를 닫은 후 재빠르게 다음 것들도 열어 보았다. 모든 상자 안에는 보석과 장신구뿐이었다. 가끔은 금괴와 금화도 있었고.

“여기가 무슨 보석상도 아니고….”

차라리 금으로 만든 판에 성서의 문구를 새겼다거나, 아니면 과거 성녀들의 업적을 그린 그림을 화려한 액자에 담아 보냈다거나 하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바쳐진 공물들은 하나같이….

‘개인을 위한 거야.’

신앙심 같은 것은 조금도 관계가 없는, 누가 봐도 성녀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뿐이었다.

내가 여는 상자들을 옆에서 넋이 나간 듯 지켜보고 있던 신관 하나가 곧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올해에는 성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잘 챙겨서 보낸 것 같습니다.”

“…내가 말한 대로?”

그 말에 급하게 이벨리나의 기억을 뒤졌다.

‘맙소사.’

작년 기도회의 기억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 기억에서 이벨리나는 신앙심이 가득한 공물을 그대로 창밖으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그녀가 집어던진 것은 깊은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이 그곳의 방식으로 만든, 성서의 문구가 가득한 태피스트리였다.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 가기 힘들고 마수의 습격을 두려워하는 험한 곳에서 오로지 신앙심만으로 정성껏 만든 물건이었는데.

“누가 이딴 쓰레기를 공물이라고 보낸 거야?”

이벨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공물을 창밖의 연못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것을 보낸 나라에 그 어떤 기사도, 신관도 보내지 않았다.

그 나라가 라루스였다.

내가 처음 열었던 상자를 보낸 그 나라 말이다.

어쩐지 입 안이 모래를 씹은 것처럼 까끌거렸다. 라루스는 지난 1년간 잦은 마수들의 습격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렇기에 올해는….

‘…살려 달라고 보낸 것들이야.’

나는 조금 전과 달리 씁쓸한 마음으로 상자를 닫은 다음 옆으로 밀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일단은 기도회가 끝난 다음 라루스에서 보낸 사절단을 만나서 곧바로 기사단과 신관들을 보내겠다고 약속해야 할 것 같았다.

‘저 공물들도 돌려보내고.’

라루스는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저만큼 준비하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음속으로 이벨리나를 욕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건….”

그러자 조금 전 라루스에서 보낸 공물은 아이들 장난으로 보일 만큼 잔뜩 쌓여 있는 공물의 더미가 보였다.

‘여긴 또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니 이 나라가 제일 많이 보낸 것 같았다. 대륙에서 세력이 강한 나라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가장 가까이에 놓여 있던 상자를 집어 든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이럴 리가 없어.’

분명 책에 적혀 있었다. 모두가 공물을 보냈건만 오직 제국만이 성녀에게 공물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들린 상자에는 ‘아펠리우스 제국’이라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책에서는 분명 제국은 성녀에게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대신에 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물은 그 어떤 나라보다 많이, 그것도 가장 좋은 것으로 보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입이 마르도록 제국을, 정확히는 현재 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레온 황태자를 칭송했다.

‘당연히 이벨리나는 불같이 화를 냈지.’

그래서 기도회가 끝난 후, 제국의 사절단을 만나 주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국의 사절단은 레온 황태자에게 자신들이 본 사실들을 말했고 그렇기에 황태자는 이벨리나를 더욱 혐오하게 되었었다.

꼭 그 일이 아니더라도 제국과 대신전의 관계는 무척이나 미묘한 상황이었다.

아펠리우스 제국은 몇십 년 전, 현 황제가 즉위한 이후로 급격히 세력을 키운 국가였다. 그때는 제국이라는 명칭도 붙지 않았었다. 모두 황제가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얻어 낸 이름이었다.

신나게 몸집을 불려 나가던 제국은 드디어 대신전 주변에 있던 많은 나라들을 십몇 년 사이에 모두 제국의 아래로 집어넣었다. 덕분에 여러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대신전 주변은 이제 전부 제국의 땅이 되었다.

그런 제국에게 대신전은 눈엣가시였다. 마음 같아서야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쓸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신전은 대륙 모든 나라는 물론, 사람들의 존경과 숭배를 받고 있는 곳이기에 다른 나라들처럼 침략을 해 무릎을 꿇릴 수 없다.

그러는 사이 현 황제는 쇠약해지고 그의 아들인 황태자 레온이 전권을 위임받아 실질적으로 제국을 이끌었다. 레온에게 황제는 몇 번이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신전을 제국의 발아래 엎드리도록 해야 한다.”

제 아버지를 존경하는 황태자는 깊게 고개를 숙이며 꼭 그 모습을 보여 드리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기에 그는 대신전의 일에 무척이나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이리스의 소문이 돌고… 이벨리나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이리스를 이용하려 접근했다가 사랑에 빠졌지.’

책에서는 황태자가 마수의 습격을 받고 상처를 입었을 때, 이리스가 그를 치료해 주면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가 황태자라는 것을 몰랐던 이리스는 친근하게 대하며 그가 나을 때까지 돌보아 주었고 황태자는 낫고 나서도 이리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로맨스 소설의 정석다운 만남이었다.

어쨌거나 레온 황태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그때쯤이다.

‘1년은 지나야 제국에서 나와 움직인다는 소리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라트반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친해지는 것도 힘들 것 같고.’

친해지기는커녕 지금 이렇게 대신전과 제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만나자마자 검을 뽑아 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다시 공물을 향해 눈을 돌렸다. 제국에서 보낸 것들을 살펴보자 이것들 역시 무엇 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성녀만을 위한 것이 있었는가 하면 대신전에 놓을 수 있는 조각상이나 그림도 많았다.

‘이건 소설에 없던 전개잖아?’

분명 제국은 이벨리나에게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그래야 했는데.

쌓여 있는 것들을 보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기도회도 그렇고, 이 공물도 그렇고.

‘왜 책의 내용과 달라?’

그렇다면 아예 흐름도 달라질 것이지. 상황이 다를 뿐, 결국은 소설이 흘러가던 대로 가 버릴 것이다.

얼굴을 찌푸리며 제국의 공물을 보고 있자 신관들이 말했다.

“제국의 사절단이 기도회가 끝나면 꼭 성녀님을 뵙고 가겠다며 벌써부터 난리입니다. 예전에 제국의 사절단은 알현 신청을 거부하라 하셨지만 아무래도 만나 주셔야….”

“알겠습니다.”

“네?”

“제국의 사절단을 가장 먼저 만날 터이니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한 다음 손을 저었다.

“그리고 내가 부를 때까지 아무도 이곳에 들이지 말아요.”

“네.”

신관들이 나간 다음 천천히 공물들을 살펴보았다. 전부 다 성녀 개인을 위한 화려한 보석과 장신구들. 이렇게 보면 이벨리나가 탐욕에 젖어 각 나라에 사치품들을 바치라고 했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정작 이벨리나는 이런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방 안 서랍에는 귀찮은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이와 같은 많은 보석들이 쌓여 있다. 이벨리나는 그것을 착용해 보지도 않은 채, 가끔 그녀가 밤에 안았던 남자들에게 가져가라며 잡히는 대로 쥐여 주었다.

‘그런 용도로 쓰기 위해서 바치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차라리 금화가 더 편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왜 이벨리나가 이런 걸 요구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볼 수 없는 기억이었다.

“이벨리나가 무슨 생각이었든 간에 다 돌려줘야겠어.”

모든 나라가 무리해서 보낸 것들이다. 이것들을 받았다가는 대신전, 정확히 이벨리나를 향한 적대감이 얼마나 커질지 뻔한 일이다. 아니, 이미 신나게 욕을 하고 있겠지만.

그렇게 한참이나 돌려보내야 할 것들을 분류하다가 조금 지쳐 의자에 앉았다.

“편지도 많네.”

책상을 바라보자 각 사절단들이 보낸 친서들도 가득 쌓여 있었다. 이것들도 다 읽어 본 다음 기도회가 끝난 후의 알현에서 전부 다 대답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성녀라는 자리가 생각보다 할 일이 많구나.’

처음 빙의되었을 때는 적당히 기도나 하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어쩐지 밤낮없이 일만 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친서들을 하나하나 읽어 가다가 가장 밑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책상 위에 있던 친서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장식과 함께 각 왕국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가장 밑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색의 얇은 종이봉투가 있었다.

“섞여서 잘못 들어온 건가?”

성녀에게 보낼 친서를 이렇게 허술하게 하는 나라가 있을 리가 없다. 그대로 놔둘까 하다 일단 안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얇아 보이는 봉투였는데 열어 보니 정말로 종이 한 장밖에 없었다. 다시 봉투의 겉면을 살펴보았다. 누가 보냈는지, 누구에게 보냈는지도 적혀 있지 않은 봉투.

‘내용을 보면 알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꺼낸 종이를 빙글 돌려 보았다. 그곳에는 딱 한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거래는 이루어졌다. 물릴 수 없다는 것은 알겠지. 곧 찾아가겠다.

“…거래?”

역시나 잘못 들어온 편지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대신전 안의 그 누구도 이런 편지를 주고받을 것 같지 않았다. 이건 대신전이 아니라 어디 은밀한 지하 거래에나 어울릴 것 같은 편지가 아닌가. 종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위아래를 살펴보던 나는 따끔한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베었네.”

종이에 손가락 끝이 살짝 베인 것이 보였다. 곧 그 상처 위로 피가 슬며시 배어 나왔다. 장난치지 말걸. 종이에 베이는 게 제일 아픈데. 후회해 봐야 늦었다. 나는 편지를 다시 종이봉투 안에 넣어 책상 위에 올렸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게 여기에 있는 거지?’

그때였다.

“……!”

내려놓은 편지가 마치 불 속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화르륵 불타올랐다. 순식간에 타오른 편지는 책상 위에서 점점 작아지더니….

“…사라졌어?”

믿을 수 없는 일에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편지가 갑자기 불탄 것도 이상한 일인데 지금 책상 위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조금 전 내가 보던 편지는 세상에 없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리가….”

환상이 아니었다. 분명히 있었다!

혹시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손가락 끝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증거가 있었다. 봉투 속 종이를 갖고 흔들다 베였던 내 손가락의 상처가. 분명 그 편지는 내 망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지?’

이 세계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 힘은 하나뿐이다. 바로 마법이었다.

성력을 쓰는 신관들이 어디에서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과 달리 마력을 쓰는 마법사들이 대륙 어디에서나 경멸과 혐오를 받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력은 마수들의 기원이 되는 힘이다. 그렇기에 무척이나 강하고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임에도 사람들은 마법사들을 꺼렸다.

“마법을 계속 쓰면 마수가 된다.”

대륙의 사람들이라면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그 어떤 마법사가 사람들 사이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마법사란 인간인 척하는 마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강력한 마법을 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기에 대신전에서는 공식적으로 적대시하는 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들을 찾는 사람들은 많았다. 특히나 전쟁을 벌이는 나라의 경우 몇 명의 마법사를 데리고 있느냐로 그 승패가 이미 갈릴 정도라고 했다.

그렇게 마법사들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다들 못 본 척하는 그런 자들인데.

‘그런데 마법을 이용해 대신전 안에 이런 것을 넣었다고?’

그것도 성녀인 이벨리나에게?

‘도대체 누구지?’

어지간한 마법사는 대신전의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할 텐데, 직접 온 것도 아니고 편지만을 이렇게 대신전 안에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을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

“설마….”

책에 등장했던 세 번째 남자 주인공이 생각났다.

마법사들의 왕. 아슬란.

그는 대륙의 북쪽 끝에서 배를 타고 한 달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마법사들의 섬에 살고 있다. 워낙에 대륙에서 박해를 받다 보니 특별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마법사가 아닌 한, 마법사들은 대부분 그곳에 모여서 힘을 연구하고 발전시킨다. 책의 묘사에 따르면 마수들도 무척이나 들끓는 땅이라 대륙의 사람들은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했다.

책 속에서 그가 처음으로 마법사들의 섬을 떠나는 것은 이리스 때문이다. 이리스가 나타나면서 이벨리나의 성력이 그쪽으로 이동하자, 그 거대한 힘의 흐름에 흥미를 느끼고는 섬을 나와 이리스를 만난다.

‘그리고 아슬란도 이리스를 돕게 되었지.’

내가 본 부분까지는 그다지 등장이 많지 않았지만 나올 때마다 위험한 말을 해 대었던 것은 기억났다. 강한 마력을 사용하기에 거의 마수나 다름없는 그였지만 이리스의 압도적인 성력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던 것 같다. 입은 여전히 거칠었던 거 같지만.

“그런데 아슬란도 등장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일 년 후에야 마법사들의 섬에서 나올 사람이 지금 나에게, 아니 이벨리나에게 편지를 보낼 이유가 없다.

‘게다가….’

거래에 응하겠다고 편지에는 적혀 있었다. 이벨리나가 그에게 거래를 제안할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내가 집무실을 나온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것도 신관들이 나오지 않는 나를 걱정해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빠르게 준비한 예복을 입혀 주었다.

그렇게 준비하는 사이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사라진 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곧 찾아오겠다던 글씨가 잊히지 않았다

‘무슨 거래였던 것일까. 그리고 언제 오겠다는 것이지?’

자꾸 편지의 내용이 마음속에 걸렸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너무나 멍하게 있었던 것일까. 내 앞에서 설명을 하던 신관이 나를 불렀다.

“미안해요, 뭐라 말했었지요?”

“오늘 기도회의 마지막 예식은 생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아.”

신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기도회의 가장 핵심인 예식이 어제 그 난리가 났던 축복의 의식이다. 성력을 쓰는 것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몰려들던 그 의식 말이다.

‘더 하겠다 할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서야 오늘도 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누가 성녀의 축복을 바라나 싶었다. 어제 신관들의 대화를 훔쳐 듣고서 알았지만 행사가 그렇게 난리가 나서 끝난 후에 소문은 더욱 빠르게 퍼졌다고 한다. 게다가 이벨리나는 기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더더욱 열심히 남자들을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기도회 전에는 하던 것도 안 해야 맞는 거 아니야?’

창녀라는 소리에 발끈했던 마음이 오늘은 이벨리나를 원망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몸을 쓰고 있기에 웬만하면 좋게 이해해 보려 했지만 역시나 악역은 악역이다. 집무실에 있던 공물까지 떠올리니 정말로 동정할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

내가 어쩌다 이벨리나의 몸에 들어와서 이런 일을 겪는지. 그렇게 생각하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맙소사.’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행운에 감사했었는데.

‘내가 미쳤지.’

주어진 행운에 감사하기는커녕 이제 그것이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더 나은 것을 찾아 고르려 하고 있었다. 어느새 배부른 생각을 하고 있던 나를 꾸짖으며 서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신전기사단장 라트반, 성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라트반.”

라트반이 더 뭐라 말하기 전에 일부러 힘을 주어서 오늘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어제의 일을 말하며 또 벌해 달라고 할 것 같으니까. 라트반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그의 망토에 멈췄다.

“망토가 바뀌었군요.”

“아.”

어제 그는 분명 붉은색 안감이 붙은 예복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와 비슷한 붉은색이긴 했지만 어제의 망토와는 다른 색이었다.

‘일반 기사들의 색인데.’

좀 더 자세히 보니 크기도 좀 작아 보였다. 확실히 저 망토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왜 맞지도 않는 것을 걸쳤을까 생각하다 어제 그가 썩은 달걀 세례를 맞은 나를 망토로 감쌌던 것이 생각났다.

‘나 때문이었네.’

“미안합니다, 라트반 경. 저 때문이군요.”

“…….”

맞는 말이었는지, 라트반은 예의상으로라도 할 법한 아니라는 소리를 하지 못한 채 얼굴을 돌렸다. 그러더니 조금 전 인사에 비해서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있나. 얼핏 보면야 모르겠지만 조금만 자세히 그를 바라보면 망토가 어색하다는 것이 바로 보이는데.

“안심하세요. 오늘은 어제처럼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예식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망토가 또다시 더러워질 일은 없을 겁니다.”

“…….”

조금은 이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웃음을 섞어 한 소리였는데 라트반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 갔다.

‘쓸데없는 짓 말아야겠다.’

말을 걸면 걸수록 라트반이 더 나를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럴까, 하다가 옆에 서 있는 신관들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들은 나를 향해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

왜 그와 이벨리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잊고 있었던 걸까.

‘지금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어제 그가 감싸 준 일로 혼자서 멋대로 그가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그와 아무 일도 없다고 해서 라트반도 그런 것은 아닌데 말이다.

깨닫고 나니 민망함이 몰려왔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달래려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 어제 보았던 신관이 물었다.

“마실 것을 준비할까요?”

그 말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걸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신관은 빠르게 차를 준비해서 가져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뜨거운 차가 좋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이거라도 마시며 주의를 돌려야 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역시 직접 고르신 차라서 입에 잘 맞는 것 같네요.”

“……?”

그 말에 잠시 찻잔을 바라보았다. 신관들이 알아서 가져오는 차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벨리나가 직접 고른 차였다고? 향이나 맛은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 무엇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차를 마셨다. 다행히 내가 차를 마신다는 핑계를 대며 말하기 힘든 상황이 되자 신관들이 라트반에게 행사 진행에 대하여 말을 걸었고 그는 나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은 순간.

“어?”

어쩐지 머리가 핑, 하고 도는 느낌이 들었다.

“성녀님?”

차를 가져왔던 신관이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 나를 불렀다. 괜찮다고 말하려고 하자 다시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천장이 빙글 돌았다고 생각한 순간. 쨍그랑! 소리와 함께 세상이 어두워졌다.

***

“성녀님은 안에 계십니까?”

라트반이 묻자 신관들이 급히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네, 준비는 끝나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신관들의 대답에 라트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쩐지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문 앞에서 망설이던 그는 제 어깨에 두른 망토를 보았다.

“단장이 착용해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시델은 그렇게 말하며 라트반이 원한다면 속옷도 벗을 기세로 제 망토를 벗어 그에게 넘겨주었다.

라트반은 제 망토가 어디에 있는지를 떠올렸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그의 집무실의 옷걸이에 망토는 얌전히 걸려 있을 것이었다.

사실, 그의 망토는 못 입을 만큼 더러워진 것은 아니었다. 성녀를 감쌀 때,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던 썩은 달걀이 조금 묻어나긴 했지만 그 정도는 닦아 내는 것으로도 충분히 지워졌다. 라트반이 망토를 걸어 둔 것은 다른 이유였다.

그는 제가 착용한 망토를 보았다. 정확히는 오른쪽의 아래를. 시델의 망토는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옷걸이에 걸려 있는 그의 망토는 구김이 가득할 것이다. 그것은 전부 어젯밤 성녀가 만들어 냈던 자국이었다.

기도회의 첫날이 정신없이 흐른 다음, 깊은 밤이 되고 나자 라트반은 후원으로 향했다.

기도회 기간에 대신전에서 조용할 만한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가끔 후원을 찾는 신관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오래된 깊은 숲의 느낌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지 할 말을 나누면 곧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역시나, 그가 도착했을 때 후원은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라트반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낮에 있었던 일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이상해.’

성녀가 이상하다.

성녀를 싫어하는 제 감정과 그래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첨예하게 부딪혔었다. 처음에는 그 모욕을 참을 수 없어 경호를 거부했지만 결국 기도회 당일 아침 그는 마음을 돌려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찾아갔다.

작년까지 그가 계속해서 성녀의 경호를 맡았었기에 기사 배치를 바로 변경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성녀의 경호를 맡아야 했던 기사단의 상급 기사는 라트반의 번복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기사단이 성녀를 싫어하듯 성녀 역시 그들을 싫어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벨리나가 어릴 적에는 꽤나 사이가 좋은 편에 속했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그녀는 틈이 날 때마다 기사들이 궁금하다며 기사단에 놀러 오는 귀여운 꼬마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발걸음이 뜸해지더니 결국에는 완전히 끊어졌다.

‘언제부터였지?’

왜 갑자기 이벨리나가 그들을 향해 경멸의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그 이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성녀가 신전기사단을 적대시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후….”

잠시 과거의 일을 떠올리던 라트반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예전 일 따위를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기도회에서 잡아들였던 난동을 부린 자들은 지하 감옥에 집어넣어도 느긋한 얼굴이었다. 자기들끼리 ‘곧 나갈 수 있을 텐데’ 같은 소리를 하며 낄낄대고 웃기까지 했다. 왜 그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이들은 ‘용기 있게 성녀를 비판한 사람들’이라 불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신전 밖에서는 어서 빨리 이자들을 풀어 달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라트반은 쉽게 그들을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성녀에게 위해를 가한 자들이다.

‘그리고….’

성녀의 부정을 알리겠다는 정의로움에 취했다기에는 그들의 태도가 이상했다.

‘성녀님께는 좀 더 조사를 하고 말씀을 드려야…!’

성녀에게 뭐라고 말을 할까 생각하면서 후원 구석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라트반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구석에 있는 벤치 위에 하얀 물체가 길게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성녀였다.

‘왜 또 여기에?’

기도회의 첫날 일정이 끝났으니 방에서 조용히 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밤도 남자들과의 만남을 가질 생각인 건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라트반은 그녀가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멋대로 추측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일부러 발소리를 내 보았건만 성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가만히 있으니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런.’

아무리 대신전 안이라지만 이런 곳에서 저렇게 잠이 들다니. 성녀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라트반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

하지만 가까이 다가간 라트반은 생각과는 달리 쉽사리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벤치 위에서 잠이 든 성녀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냥 돌아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라트반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

그의 망토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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