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48)

왜 그렇게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건데?

한 번 죽었던 삶이다. 이벨리나의 몸에서 눈을 뜬 지금의 내 삶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선물과도 같다.

그렇다면 그냥 끝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도 되잖아?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면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이벨리나가 죽기까지는 2년이 남았다. 병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내던 시간들에 비해서 건강한 몸으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2년은 천국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성녀님….”

신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마지막 절차를 뺀다면 기도회에서 내가 참석할 부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책에서 이벨리나는 기도회 당일 몸이 좋지 않다며 참석을 거부했어.’

그 때문에 의무를 팽개친 성녀라는 것이 전 대륙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벨리나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리스가 나타날 때까지 이벨리나는 대신전의 안에서 성녀로 살았다. 그러니, 지금 내가 이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소설 속 내용 그대로 산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하게 살며 끝을 기다리면. 조용히 책의 결말대로 살아간다면.

‘싫어.’

그렇게 살기는 싫었다.

그렇게 살다 갈 것이라면 굳이 내가 이 몸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한 번 죽었던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기회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행운을 주어진 것만큼만 누릴 생각은 없었다. 언제 다시 놓치게 될지 모르는 행운이라도 내 손에 쥐어져 있는 한, 최대한 오래 붙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었다.

나는 걸어가 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쏠렸다. 그들의 사이로 내가 걸어가야 할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복도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 내가 가야 할 미래처럼 보였다.

이제 저 길을 혼자서 걸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모시겠습니다.”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큰 손이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그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올렸다. 그곳에는 나 못지않게 화려한 흰색과 금색의 예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라트반이 서 있었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모습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왜 여기에….”

분명 라트반은 이번 기도회에서 성녀의 경호를 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가 왜 손을 내밀고 있는 거지?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성녀님의 경호를 서는 것은 제 의무입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라트반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 일들을 겪고 그렇게나 성녀를 경멸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돌아오다니.

그가 내민 손을 보았다. 검을 잡는 큰 손에는 성력으로도 다 치유하지 못한 거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내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곳을 한참이나 바라본 다음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아마도 언젠가 이 손이 이벨리나를, 나를 죽일 것이다.

천천히 그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향해 살포시 웃었다.

“잘 부탁합니다, 라트반 경.”

언젠가 나를 죽이게 되더라도, 이 복도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는.

***

성대한 나팔 소리와 함께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열린 대신전의 문 안으로 사람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한가롭던 중앙 광장은 어느새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륙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온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대신전과 가장 가까운 제국의 옷을 입을 사람들은 물론, 아직 시원한 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잔뜩 털옷을 껴입은 사람. 반대로 헐벗은 것처럼 보이는 가벼운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일행을 놓친 사람들이 서로를 찾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벌써부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 높여 성가를 부르는 자들도 있었다.

그 소란스러움은 첫 번째 예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며 겨우 잦아들었다.

‘대단해.’

닫힌 창문 너머로 몰려든 사람들을 보자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신전을 처음 둘러보았을 때도 그 크기에 놀랐고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듣고 상상 이상의 규모에 놀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안을 가득 채워 버릴 정도로 몰려든 사람들에 한 번 더 놀라고 있었다.

이 기도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대신전이 그들에게 돈이나 물건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저들은 모두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 그러니까 넘치는 신앙심으로 이곳에 제 돈을 들여 찾아온 사람들이다.

‘저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제 발로 찾아온 거라니.’

이런 인파를 세 본 적이 없어서 몇 명인지도 모르겠다. 뉴스에서 보았던 많은 인파의 수를 기억해 내고 어림잡아 내 마음대로 세어 보니 못해도 10만은 넘는 숫자였다.

‘게다가 대신전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 기도회에 온 사람이 몇십만 명은 된다는 소리였다. 곧 성가대의 노래가 시작이 되었고, 그들의 노랫소리는 파도처럼 사람들에게 퍼졌다. 대륙 전체가 알고 있다는 기본 성가라서 그런지 모두가 하나 되어 노래를 부르는 광경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웅장했다.

모두가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감고 성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며 이 세계에서 신, 그리고 성녀와 대신전이 가지는 위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대륙에 살고 있는 자들의 절대적인 믿음과 존경.’

그것이 성녀를 향한 대륙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이다. 제 삶에 현실적으로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 신 따위를 왜 믿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신의 힘이 확실히 나타났다.

‘이교도들의 땅에는 마수들이 나타난다고 했으니까.’

신을 섬기지 않는 자들의 땅에는 끊임없이 마수가 나타난다. 신을 섬기는 자들의 땅에도 나타나긴 하지만 이교도의 땅에 비하면 그 수가 급격히 차이가 났고 그럴 때마다 신전 기사단이 그곳으로 가 마수들을 처리한다.

‘마수들이 성력을 싫어하기에 기사들의 검에는 모두 신관들이 축복을 걸어 준다고 했지.’

비밀 통로의 문을 열 때 보았던 성력이 생각났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확실한 신의 힘이 있으니 이 세계에서 신을 향한 믿음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힘이 자신들의 목숨과 관계가 있으니 더더욱.

새삼 이벨리나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려 하기 마련이다. 나만 해도 그렇게 살았었다.

“너는 다른 아이들답지 않게 얌전하구나. 이렇게 긴 입원에도 투정을 부리지 않는 건 네가 처음이야.”

나를 담당했던 의사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칭찬했을 때, 부모님은 자랑스럽다는 듯 옅은 웃음을 보였다. 그 후로 죽는 순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투정을 부리지 않았었다.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싫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내가 그렇게 행동을 해서 주변 사람들이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하며 자랑스러워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잘못된 행동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벨리나는 왜….’

나는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의 기대를 벗어나는 것도 두려웠다. 그런데 이벨리나는 저 많은 사람들, 아니 대륙 전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대를 외면했다. 어긋난 기대가 실망과 분노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고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아니, 더욱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참 용감하다 싶었다. 지금 저기에 모인 자들이 모두 나를 욕하며 비난한다고 생각하면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를 텐데 말이다.

그렇게 한참 아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밖에서 두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함께 방 안에 있던 라트반이 문을 열었다. 밖에 기다리고 있던 신관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예식이 곧 시작됩니다.”

“…알겠어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신관들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는 별문제 없었지만.’

테라스에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당장이라도 멀리서 화살 같은 것이 날아오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럴 일이 없는데도 말이지.’

성녀의 성력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보호 결계는 성력의 가장 기본적인 힘이기도 했다. 만약 공격이 있다면 성녀는 자신의 성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에 검이나 활 따위의 무기를 통한 암습 따위는 성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진짜 이벨리나였을 때의 이야기고.’

이상하게도 이벨리나의 기억에 성력의 사용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동으로 나타나는 성력 외에 나는 아직도 그 어떤 힘도 쓰지 못하고 있다. 만약 지금 누군가 나를 공격한다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사람들이 그걸 모르니 공격은 없을 거야.’

마지막 예식에 참석하겠다고 한 것도 그것을 믿고 한 소리였다.

“이동하겠습니다.”

라트반은 신관들에게 말하고는 다시 내 옆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 라트반의 행동에 몇몇 신관은 놀라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모욕을 겪고 나서도 제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는 라트반에게 감동받은 눈치였다.

다시 손에 닿는 라트반의 체온을 느끼며 그에게서 반걸음 정도 떨어져 섰다.

‘되도록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지.’

그러자 라트반이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물러서는 것이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반걸음 물러서려 할 때 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 탓에 더 멀어지지 못한 채 그와 함께 나란히 걸어야 했다.

***

“성녀님! 성녀님! 제발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두 달이나 걸려서 왔습니다! 대신전 앞에서 이 주일을 기다려 겨우 앞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제발 제 아이에게 축복의 기도를 내려 주십시오!”

중앙 광장으로 내려가자 사람들의 외침이 천둥소리처럼 귀에 울렸다. 기사들과 신관들이 필사적으로 막아 내고 있지만 성녀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무섭도록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 막아 내기란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 라트반이 나를 둘러싸고 서 있는 기사들에게 경호를 강화하라 다시 명령을 내렸다.그러자 기사들이 알겠다며 힘차게 대답을 하더니 조금 전까지 피로했던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이 바짝 긴장을 한 채 다가오는 사람들을 막았다. 덕분에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생겼다.

그 길을 걷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기사들 사이로 손을 내밀며 다시 축복의 기도를 바란다고 외쳤다. 그 손을 보며 망설이고 있자 앞서 걷던 신관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원치 않으신다면 작년처럼 그냥 걸어서 지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저들은 성녀님을 직접 뵌 것만으로도 인생의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할 터이니….”

“…아닙니다.”

닿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사람들 중, 많은 이가 병색이 짙은 자들이었다. 성력은 외상이나 독을 치유하지만 병은 일시적으로 상태를 호전시켜 줄 뿐, 완벽하게 낫게 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나이가 들어 생기는 병은 더더욱. 신이 만든 섭리에 따라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을 거역할 수 없기에 그렇다고 했던가.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매달리고 있었다.

언젠가 병원에서 옆 침대에 있었던 언니가 생각났다.

“내 병은 못 고친대.”

덤덤하게 말하던 언니는 항상 듣던 라디오 방송에 메일을 보냈다. 운이 없었던 것일까. 몇십 번을 보냈는데도 언니의 사연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드디어 언니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언제나 무기력했던 그 언니는 그 순간만큼은 눈을 반짝이며 홍조 가득한 얼굴로 그 방송을 들었다.

투병 생활 중이시라구요. 언젠가 다 털고 일어나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딱히 대단한 내용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언니는 녹음한 DJ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돌려 들었다. 집중 치료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웃으며.

그 방송이 병을 낫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 언니에게 희망을 주었고 평안함을 주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향한 손들이 보였다.

‘진짜 성녀가 아니더라도 저들에게 그런 평온을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가려는 순간 줄의 끝이 무너지며 누군가 땅을 뒹굴었다. 그 탓에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벗겨진 후드 아래로 주름 가득한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우둘투둘한 것들이 가득 나 있는 피부도. 그 노인은 나를 보고는 엎드려 빌었다.

“성녀님! 제발 저에게 축복의 기도를 내려 주십시오!”

그 노인을 바라보다가 라트반에게 말했다.

“라트반 단장, 저분을 제게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상황을 보아하니 내가 바로 다가갔다가는 주변의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어 소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 라트반은 내 말에 다른 기사를 부르려 하다 마땅히 부를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더러운 창녀!”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무엇인가가 내 얼굴로 날아들었다.

콰직!

부딪힌 것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이라고는 해도 당장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을 정도의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툭. 머리카락에서 점액질의 액체가 흘러내렸다. 동시에 고약한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는 길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발밑에 박살이 난 달걀 껍질이 뒹굴고 있었으니까. 냄새가 고약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썩은 달걀이었나 보다.

그렇게 멍하니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는 사이 다시 외침이 들렸다.

“네년이 밤마다 신전에서 남자와 뒹굴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다고!”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어쩐지 이번에는 달걀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려는 찰나 붉은 것이 시야를 덮었다. 그리고 따뜻한 체온이 나를 덮쳤다. 멀리서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잡아라.”

머리 위에서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뱉듯이 짧게 말한 그의 말에는 한껏 누른 분노가 가득했다.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알 수 있었다. 라트반이 그의 예복 망토로 나를 감싸고 끌어안은 것이다. 그의 망토 아래에서 그의 팔에 잡혀 있었기에 밖의 상황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기사들의 고함 소리와 사람들의 짧은 비명 소리. 뒤이어 이어지는 놓으라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네년 사타구니에 밤마다 남자 신관들이 머리를 박는다지!”

달걀을 던졌던 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 몸이 굳었다. 아니라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매일 밤은 아닐지라도 이벨리나가 그런 일을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닥치게 해.”

다시 라트반이 말하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욕을 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멈췄다. 대신 이제는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문이 진짜였던 거야?”

“나도 듣긴 했어. 성녀가 준 성물들을 팔아 치우는 남자들이 그리 많다던데.”

“대신전 안에서는 대단한 비밀도 아니라던데. 대신전의 신관들이 직접 말하고 다닌다니까!”

작은 수군거림은 곧 큰 웅성거림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축복을 바란다던 외침이 거짓말인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다들 듣긴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신전에서, 그것도 자신들의 눈앞에서 큰 소리로 성녀를 창녀라 욕하며 썩은 달걀을 던지는 자가 나온 순간, 사람들에게 소문은 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남자가 더 외칠 필요는 없었다. 그 대신에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으니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망토 아래 있는 나에게 라트반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무섭다. 지금 밖을 보면 나를 향해 쏟아질 시선들이 두려웠다. 내가 한 일이 아닐지라도 이벨리나로 살고 있는 한 모두 내가 받아 내야 할 경멸과 혐오의 시선들이다.

“더러운 창녀! 네년이 신전 기사단의 뒤에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겠어! 기사님들! 당신들도 알아야 해! 내 친척이 그러는데…!”

이번에는 라트반이 움직인 것일까. 나를 끌어안고 있는 몸이 흔들린 다음 둔탁한 소리가 나고 창녀라 외치던 사람의 목소리가 멎었다.

“모시겠습니다.”

라트반은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그대로 나를 이끄는 순간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

그렇게 대답하자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덮고 있는 망토를 걷어 내었다. 그러자 머리카락에서 뚝뚝 썩은 달걀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내가 대신전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조금 전까지 신나게 소리를 치던 사람들은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이 소문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해도 소설의 내용대로 가는 건가.’

소설과는 달리 이벨리나가 예정대로 참석했어도 기도회는 성녀에 대한 더러운 소문을 대륙 전체로 퍼트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경멸의 시선을 뒤로 한 채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잠시 모두가 존재를 잊은 사람이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가 거세게 떠밀려 넘어진 노인이었다. 내가 노인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조금 전과는 달리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내 축복을 바라고 있습니까?”

노인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고약한 냄새와 함께 흉측하게 일그러진 피부가 보였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더욱 끔찍한 것들도 자주 보았기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가장 힘든 순간에도, 가장 기쁜 순간에도 신께서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시기를. 당신이 원하는 순간에 그분은 곁에 계실 것입니다.”

축복의 말은 여러 개가 있다. 이 예식을 위해서 수십 개의 축복의 문구를 외웠건만 쓰이는 것은 이것 하나로 끝날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노인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아무것도 아닌 라디오 방송이 한 사람의 버팀목이 되었듯이, 이런 가짜 성녀의 축복이라도 이 노인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때 노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

눈이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노인이 아니야!’

나를 보고 있는 푸른 눈은 무서우리만큼 맑았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병으로 인한 무기력함이나 피로함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에는 재미있는 것을 찾은 듯한 즐거움과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놀라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거칠지는 않았으나 강한 힘이 들어간 손에 나는 일어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는 잡은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부드럽게 입을 맞춘 후 나를 보며 말했다.

“다시 성녀님을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

기도회 첫날, 마지막 의식은 그렇게 끝났다.

처음 이벨리나를 창녀라 외치며 소란을 일으킨 자들은 신전 기사단이 모조리 찾아내 기사단의 감옥에 가두었다. 신관들은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며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굳이 들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들의 목소리가 덤불 숲 아래에 있는 내 귀에 잘 들려왔다.

“이렇게 일이 터질 줄 알았습니다!”

“이제 그 망측한 소문들이 한 달 내로 대륙 전체에 퍼지겠지요.”

“사람들이 대신전을 향해 무어라 하겠습니까! 망신도 어찌 이런 망신이!”

신관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정말이지 우리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합니까. 이게 모두 다 성녀님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온갖 문제를 저지르다가 쓰러진 다음에 정신을 좀 차리셨나 했더니… 다 틀렸습니다.”

그렇게나 한참을 떠들던 그들은 이벨리나를 더 험담하는 일에도 지쳤는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신전의 창녀라 불린다고 하니… 이젠 나도 모르겠습니다. 내일 남은 기도회 준비나 마저 하러 가야겠군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신관들은 곧 자리를 떠났다. 다시 후원은 고요해졌다.

모두가 간 다음에 몸을 일으킨 나는 더 이상 다가오는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벤치에 누웠다. 젖은 머리카락이 벤치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것을 집어 코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진한 꽃향기가 났다. 이제 더 이상 썩은 달걀 냄새는 나지 않을 터인데도 어쩐지 마지막 예식에서 맡았던 그 냄새가 코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피곤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전날부터 깊게 잠들지 못하고 새벽부터 움직였다. 거기에 하루 내내 기도회의 예식은 이어졌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피곤하게 만든 것은 역시 마지막 예식 때의 일이었다.

‘라트반이 무릎을 다시 꿇을 줄은 몰랐는데.’

방으로 돌아온 다음 그는 내 앞에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의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그 말에 나는 왜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는지를 알았다. 오늘 내 경호를 책임지는 사람은 라트반이었다. 그런데 내가 모두의 앞에서 보기 좋게 사람들이 던진 달걀을 맞았으니.

“그대의 책임이 아닙니다, 라트반 경. 경에게 다른 일을 시킨 제 실수입니다.”

만약 내가 라트반에게 노인을 데려와 달라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문제없이 달걀을 막아 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라 말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성녀님께서 다치신 것은 곧 저의 책임입니다.”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누가 그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이상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경호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묻긴 하겠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내일 기도회가 끝날 때까지 임무는 변동 없이 수행해 주세요.”

“하지만…!”

“명령입니다. 이만 물러가세요.”

그가 단호한 만큼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게 책임을 묻든지 묻지 않든지 당장은 뭐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고.

명령이라 말하자 그는 마지못해 물러났다.

“이제 어쩐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려 보았지만 딱히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벨리나의 기억 내에서 어떻게든 가장 가벼운 처벌을 찾아보려 했지만 생각나는 건 하나같이 가혹한 것뿐이었다.

“모르겠다.”

일단 라트반의 처벌에 대한 것은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 문제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머릿속을 떠도는 의문이 있었다.

‘그 남자는 누구지?’

노인인 척을 하며 축복을 해 달라 말하던 남자.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는 다시 머리카락을 잡아 들어보았다. 그 남자가 입을 맞췄던 부분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다시 뵐 날을 기다리겠다라….’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반드시 다시 나를 만날 생각이라는 것을.

그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서 남자는 즐거워 보였을 뿐, 적의는 느낄 수 없었다.

‘위험하다면 차라리 그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더 위험하겠지.’

문득 그들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다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 이벨리나가 창녀야?’

창녀라면 돈을 받고 몸을 팔았겠지. 하지만 이벨리나는 그 반대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찾아온 남자들을 안았고 돈이나 귀중품을 쥐어 돌려보냈다. 물론 그 행동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내일 있을 기도회 준비도 해야 하는데….”

씻은 다음 시원한 밤바람 속에 누워 있으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다시 비밀 통로를 이용해 방으로 돌아가야 했건만 축 늘어진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빠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방의 침대 위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