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48)

낮에는 멀리서 보았기에 그저 인상이 강한 사람이구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라트반을 앞에 둔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단단하고 거대한 강철의 검이 사람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목을 꺾어 올려다보아야 하는 큰 키와 함께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넓은 어깨가 보였다. 흰색 신전 기사단의 예복을 입고 있으나 그 옷 아래 극도로 단련된 근육이 있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두꺼운 팔뚝과 큰 손이 보였다. 내 머리 정도는 한 손으로 그대로 으스러트려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큰 손이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그를 보던 내 시선이 다시 그의 얼굴로 향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라트반의 시선에 짙은 경멸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

숨기려 들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강한 감정. 그런 그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렀다. 그래 보았자 어차피 벤치의 등받이에 막혀 더 물러날 수도 없었지만.

내가 그를 바라보듯 그 역시 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서둘러 내 모습을 살폈다.

‘맙소사.’

라트반이 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오기 전에도 다리 안쪽을 살피느라 한껏 올라갔던 잠옷의 치맛자락이, 남자가 덤벼드는 통에 더욱 구겨져 올라가 있었다. 그 탓에 내 다리는 달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그 다리 위에 남아 있던 흔적들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황급히 치맛자락을 내리자 고개를 돌렸던 라트반이 입을 열었다.

“보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라트반이 처음으로 나에게 한 말이었다. 밤공기 사이로 들려오는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는 날 바라보는 시선에 담고 있었던 경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라. 제 눈에 뜨이지 말라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뜻일까. 사실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남자 주인공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보겠다던 내 생각이 얼마나 안일하고 오만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책에서 본 라트반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신을 섬기며 명예를 중요시하는 고결한 기사다. 이벨리나는 그런 그를 모두의 앞에서 개로 만들어 조롱을 했다. 아마도 라트반에게는 그의 삶 전체가 조롱을 당한 것이리라. 그런데 지금부터 노력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던 일이 될까?

라트반은 절대로 이벨리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나무에 부딪히고 쓰러진 남자가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라트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어서 고맙습니다.”

“…….”

무엇이 되었건 일단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한마디라도 나와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라트반 단장이 아니었다면 좋지 못한 일을….”

“…방해가 아니라 하시니 다행입니다.”

그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였다.

“다음부터는 그냥 성력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보면 성력을 사용하는 법조차 잊으신 게 아닌가 할 터이니 말입니다.”

그의 말에 숨이 막혔다.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이벨리나가 성력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순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향해 라트반은 검을 겨누었다. 화형으로 죽기 전, 이벨리나의 등에 있는 긴 검상은 라트반이 만들었던 것이었다.

저 팔로, 저 손으로. 이 남자는 나를 죽인다.

언젠가 올 미래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

“단장님!”

신전 기사단의 기사들은 기사단의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라트반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저녁 경비를 대신해서 하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 버린 라트반이었다. 그러더니 돌아오는 길에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사람을 끌고 왔다.

처음에는 신관복을 입은 남자를 보고 모두가 놀라 소리쳤지만 이내, 라트반이 집어 던진 남자가 신관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기사들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신관이 아닌 자가 신관인 척을 하고 신전에 들어왔다. 그리고 라트반에게 잡혔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기사단 건물 안을 채웠다.

라트반은 그런 기사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짧게 말했다.

“아침이 되어 정신이 들면 밖으로 보내.”

“네? 그렇지만….”

신관을 사칭하고 신전 안으로 들어온 것은 중죄이다. 당장 구속하고 신분을 확인한 다음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신전 안으로 들어왔는지 철저히 밝혀야 했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그냥 내다 버리라니.

그때 기사단 중 누군가가 쓰러진 남자를 살피더니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반반한 얼굴이네.”

그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기사단에서 성녀가 밤마다 저잣거리의 남자들을 끌어들여 유희를 즐긴다는 것은 대단한 비밀이 아니었다. 아마 이 남자는 그런 남자들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기사들은 왜 라트반이 그냥 내치라 명령했는지를 알았다.

어차피 상급 신관 중 누군가가 성녀에게 바친 남자라면 털어 봤자 나올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제가 한 짓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기사단을 찾아와 쓸데없는 압박이나 해 댈 것이 분명했다.

기사 한 명이 라트반에게 말했다.

“취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라트반이 되물었다.

“왜 그래야 하지?”

여기 있는 모두가 이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데 왜 굳이 그런 짓을 해야 하는지 설명해 보라는 소리였다.

그러자 기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이런 놈은 십 분도 안 되어서 줄줄 다 말할 게 분명합니다. 제가 누구인지, 어떤 신관의 도움으로,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는지. 그러니 취조를 끝낸 다음 그 기록과 함께 신전의 앞에 묶어 두면 간밤에 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나가는 모두가 잘 알게 되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기사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이 남자를 끌어들였을 성녀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얻지?”

“네?”

“그래서 무엇을 얻냐 물었다. 그리고 뒤져 보면 나오겠지만 아마도 이 남자는 대신전의 임시 출입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신관복은 말도 안 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입고 있었다 할 것이고. 그러면 이자를 들인 신관들이 필사적으로 감싸 주겠지. 물건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다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

라트반이 잠시 말을 멈추자 기사들이 왜 그러느냐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아주 가벼운 죄나 물을 수 있겠지. 그러면 남는 게 뭐지? 신전을 향한 비웃음인가?”

라트반의 말에 남자를 잡아 밖에 묶어 두자고 말했던 기사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적어도 비웃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

“그 여자가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도….”

“시델.”

라트반의 차가운 목소리에 시델이라 불린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입을 조심해라. 너는 신전 기사단에 들어올 때, 맹세의 서약을 했다.”

“…….”

그 말에 시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트반은 다시 그를 불렀다.

“시델.”

어서 대답하라는 소리였다.

“…알겠습니다. 성녀님에 대한 제 언행을 더욱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델은 그렇게 말하며 라트반 앞에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곧바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옆에 서 있던 다른 기사들이 그렇게 시델이 나간 문을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장님 이해해 주십시오. 시델이 워낙….”

시델은 신전 기사단에서 그 누구보다 라트반을 동경하는 기사였다. 기사들이 농담으로 시델은 아무래도 라트반을 섬기기 위해 여기에 들어온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할 정도로. 그렇기에 시델은 얼마 전 라트반이 성녀의 앞에서 개처럼 기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당장에 성녀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런데 지금 입에 담기도 싫은 모욕을 받았던 라트반 본인이 시델에게 성녀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고 하니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그 남자의 처리를 부탁하지.”

“염려 마십시오. 날이 밝는 대로 깨워서 내보내겠습니다.”

대답을 듣고서 라트반은 몸을 돌렸다.

그는 한참이나 복도를 걸어, 복도의 제일 끝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호화로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역시나 문과 같이 화려한 조각이 되어 있는 천장과 벽이 보였다. 하지만 그 눈부신 모습은 거기까지였다. 집무실 안에는 오직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장과 서랍장 하나가 전부였다. 옆에 딸려 있는 작은 방 역시 가끔 오는 손님을 위한 낮은 테이블과 의자 몇 개뿐이다.

누가 보면 빈방이라 생각할 정도의 황량함이었다.

기사들이나 이곳을 찾는 신관들이 라트반에게 좀 더 집무실을 꾸며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해도 라트반은 모두 거절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닌 물건들은 신전의 기사가 멀리해야 하는 사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라트반은 입고 있었던 예복의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건 다음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평소답지 않게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뭐였지?’

후원에서 보았던 성녀의 얼굴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낮에 중앙 광장에서 성녀와 시선이 마주친 후로 하루 내내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그날의 일이 생각났다. 성녀가 일부러 그에게 온갖 모욕을 주었던 날이.

결국 야간 경비를 나가는 기사에게 제가 대신 경비를 돌겠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혼자서 걸으면 진정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혼자서 대신전 안을 걷다가 평소라면 들어가지 않았을 후원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곳보다 조용한 곳을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성녀와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제 선택을 이가 갈리게 후회했다.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의 가장 보기 싫은 꼴이 펼쳐지고 있을 줄이야.

곧바로 몸을 돌리려 하던 그의 귀에 사람들을 부르는 성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는 곧바로 후원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성녀 위에 올라타 있던 남자를 집어 던지고 난 후, 성녀는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라트반은 그 시선에 이상함을 느꼈다. 성녀는 마치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성녀의 시선에서는 언제나 그를 향했던 비웃음은 보이지 않았다. 그 탓에 라트반도 그녀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이벨리나 성녀가 맞는 것인가?

“후….”

라트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들어 마음이 흐트러진 모양이다. 이런 허튼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라트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그가 처리해야 할 서류 몇 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위에 있는 서류를 든 라트반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도회의 경호….”

당연하게도 기사단장은 성녀의 바로 옆에서 그녀의 경호를 담당한다. 하지만 올해 기도회에서는 그가 다른 일을 맡을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역시나, 서류는 그에게 성녀의 경호가 아닌 기도회장 전체의 관리를 부탁해도 되겠냐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할까.’

라트반은 한참이나 그 서류를 바라보았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라트반은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기도회의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기도회의 준비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성녀였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나서서 행사를 점검하고 돌보았어야 할 사람이 모든 일을 손에서 놓은 채 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그동안 신관들은 무척이나 속이 탔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신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가장 힘들 때…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내 앞에서 기도문을 읽던 신관은 내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벨리나라면 이젠 귀찮아졌다며 자리를 떠났겠지.’

이벨리나의 기억 속에는 작년 기도회의 모습이 있었다. 이틀간 진행되는 행사에서 성녀가 읽어야 하는 기도문은 그 분량이 엄청나다. 이벨리나는 작년, 기도문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도중에 피곤하다며 그대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고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며 돌아오지 않았다. 신관들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작년에는 거의 끝날 때쯤이라 어떻게든 넘겼다지만….’

올해 이벨리나는 기도문을 검토하는 일을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신관들은 혹시나 성녀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작년처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걱정인 것 같았다.

“피곤하시다면 잠시 쉬었다 진행할까요?”

내 얼굴을 살피던 신관은 이제 울 것 같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런 신관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관은 재빨리 종을 울려 시중을 드는 평신관들을 불렀다. 그러고는 다과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다과가 준비될 때까지 편히 계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혹시나 이 자리에 같이 있다가 성녀가 무슨 트집이라도 잡을 것이 두려웠던 걸까. 기도문을 검토하던 신관은 그렇게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 버렸다.

괜찮다고 말할까 하던 나는 뒤에 있던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피곤하긴 피곤하다.’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곧 미친 듯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지금 내 하루 일과는 시간 순으로 촘촘히 짜여 있다. 그것들 중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 기도문을 점검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에 이걸 다 외워야 한다고 했을 때는 어이가 없었는데.’

처음 책상 위에 쌓인 종이의 두께를 보았을 때, 진심으로 나는 벙찐 얼굴이 되어 신관들과 종이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것은 절대로 사람이 2주 이내로 외울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아니 2주가 무엇인가. 실제로 준비하는 시간은 10여 일도 채 남지 않았다.

신관들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지 작은 목소리로 가능하신 데까지만 해 주시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기도문을 검토하다가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있었다.

‘이벨리나가 생각보다 많이 외우고 있었어.’

처음 저것들을 다 외워야 한다고 했을 때, 정말 이벨리나처럼 그냥 하지 않겠다고 버텨야 하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신관이 들고 온 기도문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낯설어야 할 기도문들이 술술 읽히는 것이었다.

단지 글씨를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벨리나의 몸은 분명 그 기도문들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도대체 언제 외웠던 거지?’

이벨리나의 오래된 것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 속에 보이는 이벨리나의 몸은 무척 작았다.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신관들은 이상할 정도로 커 보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무척이나 어릴 적의 기억이었던 것 같다. 그 기억에서 이벨리나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기도문을 쓰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외웠던 것이라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이벨리나는 꽤 어린 시절에 신전으로 들어와 성녀 계승식을 치른 사람이라고 책에 쓰여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착실히 성녀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고 수업도 받았던 것 같았다. 어쨌거나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문 너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내 꼭 성녀님을 뵈어야 한단 말이오!”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무척이나 불쾌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곧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신관들이 나를 불렀다.

“성녀님, 카루스 신관님께서 알현을 희망하고 계십니다.”

이대로 돌려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 카루스 신관을 만나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앗!”

밖에서 들려오던 평신관의 목소리가 끊기는 순간 문이 벌컥 거칠게 열렸다. 그러더니 곧 카루스 신관이 쿵쿵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신관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오려 했다.

“모두 나가 있으세요.”

“하지만 성녀님….”

“어서요.”

단호한 명령에 다른 신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혹 명령하실 일이 있다면 불러 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 그렇게 신관들이 사라지자 카루스는 당장에 소리를 내질렀다.

“어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의 외침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례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루스는 상급 신관이다. 대신전 안에서 높은 지위일지는 몰라도 감히 성녀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위치는 절대로 아니었다. 게다가 밖에서 소리가 다 들릴 것을 알면서도 이러다니. 역시 이 사람은 되도록 빨리 내쳐야 할 것 같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어떤 이유로 카루스 신관을 멀리 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묻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이번 기도회에서 비어 있는 대신관의 자리에 다른 자를 앉히시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현재 노환으로 신전의 일을 하기 힘든 대신관의 자리에 카루스가 아닌 다른 상급 신관을 임명했다. 그냥 아무나 고른 것은 아니었다. 이벨리나의 기억을 뒤지고 뒤져 그녀에게 끊임없이 충고하던 상급 신관을 찾았다. 이벨리나가 대놓고 무시하며 대신전의 구석으로 내쫓았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벨리나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던 신관이었다.

내가 그녀를 대신관 대리에 임명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신관들이 놀랐다. ‘이럴 리가 없는데?’라는 듯한 그들의 표정에 내가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의 이벨리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임명이니 모두가 그런 표정을 지었겠지. 아마 이벨리나의 영혼이 그대로 이 몸에 있었다면 그녀는 분명 카루스를 대신관 대리로 임명했을 것이다.

‘책에서는 분명 기도회를 치러 낼 역량이 없는 신관들이 임명된 탓에 역대 최악의 기도회로 끝났다고 쓰여 있었으니 말이야.’

기도회를 준비하면서 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예전에 이벨리나가 정해 놓았던 사람들도 죄다 바꿔 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종적으로 변경하기 전 그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벨리나의 기억을 뒤질 필요도 없이 그들이 모두 부적격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들을 만나러 갔을 때, 신전 안의 자신들의 방에서 잔뜩 취해 있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이벨리나는 어떻게 이런 자들로만 골라서 임명을 해 둔 거지?’

마치 일부러 작정하고 기도회를 망치려는 것같이 말이다.

“제 말을 듣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 안 듣고 있었는데.

하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태도에 카루스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제가 성녀님께서 은밀하게 부탁하신 것들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 탓에 그 부탁들은 더 이상 은밀한 부탁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카루스 신관. 분명히 나는 저번에 그대에게 더 이상 그자들을 들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데 당신은 내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대신전에 외부의 사람을 집어넣었지요. 그리고 그자는 나에게… 대단한 무례를 저질렀고.”

역겨워서라도 차마 강제로 덮치려 했다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싫었다. 점점 내 목소리가 굳어 가는 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카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가… 그동안 나를 위해 노력한 것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을 데려와 이벨리나의 침대로 밀어 넣은 것도 노력이라면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카루스를 지하 감옥에라도 가둬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순 없었다. 뭐라 해도 과거 이벨리나가 카루스와 손을 잡고 낯선 남자들과 문란한 밤을 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지금부터 노력한다고 해서 지워지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해.’

물론 카루스는 처리할 생각이다. 하지만 시끄럽지는 않게, 큰 대가를 주어 적어도 이리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었다.

나는 분을 누르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카루스에게 명령했다.

“카루스 신관, 그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를 아무거나 집어 보세요.”

“무슨 쓸데없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요. 이제 더 이상 그대를 위한 인내심은 없으니.”

카루스에게는 대단히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차가운 목소리가 나갔다. 그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순순히 내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가 종이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고 명령했다.

“첫 줄을 읽어 보세요.”

“무슨 쓸데없는 짓을… 신께서 이 땅을 내려다보시더니 곧 인간들의 고통이 모든 곳에 넘쳐흘러….”

거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일어나 그의 손에 있는 종이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그대로 뒤로 던졌다.

“이제 이 뒤를 말해 보세요.”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보지 않고 뒤를….”

“카루스 신관. 저 종이에는 전부 기도회의 예식에 쓰일 기도문이 적혀 있습니다. 성녀인 나는 물론이고 그를 보좌하는 대신관 역시 모두 외워야 하지요. 그런데….”

책상을 바라보았다. 수십 장의 기도문이 그곳에 있었다.

“이곳에 있는 기도문 중에서 당신이 하나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것이 있습니까?”

“…….”

카루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외울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그는 고개를 숙였다. 분함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파르르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대가 지금까지 노력했던 것을 모른 척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니 빠른 시일 내로 그대에게 섭섭지 않을 만큼의….”

“필요 없습니다.”

갑자기 시야에 종이들이 흩날렸다. 카루스가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바닥에 집어 던진 것이다. 나를 노려보는 그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섬뜩한 눈을 한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대신관으로 저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아주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성녀님.”

카루스는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신관들이 갑자기 열린 문에 부딪혀 놀랐지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쿵쿵거리며 멀어졌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나는 조용히 바라보다 허리를 숙였다. 다른 신관들이 들어와 호들갑을 떨기 전에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조용히 치우기는 틀렸네.’

카루스 신관에게 적당한 재물을 쥐여 주고 멀리 보내려 했는데 아무래도 그는 내 생각보다 명예욕이 더욱 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종이를 치우고 있을 때, 기도문이 적힌 게 아닌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기도회의 경호 문제에 대한 서류였다. 그곳에는 그날 라트반이 기도회의 전체 관리를 맡기 위해 성녀의 개인 경호에서 빠진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럴 줄 알고는 있었지만.’

당연히 라트반이 개인 경호를 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벨리나의 곁에 서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모욕을 겪었고 후원에서의 일도 있었다. 그때 나무에 부딪혀 쓰러졌던 남자를 데려갔으니 어떤 경로로, 어떤 목적으로 들어온 남자인지도 다 알고 있을 테고.

그래도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지금부터 네가 노력한다고 해도 미래가 변하지는 않아.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기도회의 아침이 다가왔다.

“새벽부터 소란스럽군요. 편히 주무셨나요, 성녀님?”

나를 깨우러 들어온 신관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는 신관들은 다들 알만 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편히 자기는커녕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며칠 전부터 대신전의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새벽에도 담을 넘어 들려왔다. 신관들에게 물어보니 오늘 기도회를 기다리면서 대륙의 끝에서 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모두가 평생에 한 번은 참석하기를 원하는 행사니까요.”

“어린아이를 업고 온 사람들도 많고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을 모시고 온 사람들도 많다 들었습니다.”

“마지막 중앙 광장에서 성녀님께서 직접 해 주시는 축복을 받으려고 자리싸움이 엄청나대요.”

매일매일 신관들이 전해 주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점점 더 이 기도회가 얼마나 엄청난 행사인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신관들의 안내를 받으며 욕실로 가자 그곳에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나는 완벽하게 씻겨지고 다듬어진 채로 예복을 입을 수 있었다. 거울 속의 내가 점점 더 완벽한 성녀의 모습이 되어 갈수록 자꾸만 한숨이 나오려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 다짐했는데.

‘지금까지는 제한된 장소에서 한정된 사람을 만났지만….’

현실 세계에서 병원에 누워 있던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이벨리나의 기억으로 버티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천, 수만 명의 사람 앞에 서서 이 연극을 무사히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목이 굳는 것 같은 긴장감이 몰려왔다.

자꾸 좋지 못한 상상을 하게 된다. 갑자기 모여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저건 가짜야!’라고 외치는 그런 상상을 말이다.

2년 후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만약 내 노력에 따라 이벨리나의 미래가 변한다면. 반대로 생각지도 못하게 나빠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게 나을까.

나는 자꾸만 심연으로 빠져드는 생각에 몰두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끝내야 해.’

아무래도 큰일을 앞둔 탓에 마음이 긴장을 한 모양이다. 이 몸에 빙의하고 나서 지금까지 큰 실수 없이 잘 해내고 있다. 아직은 아무도 내가 이벨리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손가락 끝을 꾹꾹 눌렀다. 그러다 어느 신관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 행동을 보더니 안심시키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작년에도 무사히 끝났으니 올해도 별문제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긴장을 한 것이 보이는 모양이다. 어쩐지 속을 들켜 버린 것 같은 기분에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 신관이 잠시 나갔다 오더니 한 손에 찻잔을 들고 왔다.

“원래대로라면 되도록 아무것도 안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지만 따뜻한 걸 들이켜면 좀 긴장이 풀리실 겁니다.”

“고마워요.”

사실 어젯밤부터 기도회를 위한 가벼운 금식에 들어가 있던 참이다. 나는 신관이 가져온 차를 받고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 모금을 삼켰다. 따뜻한 기운이 몸 안에 확 퍼지며 겨우 떨리던 손이 멈췄다.

‘이건 겨우 시작일 뿐이야.’

이리스가 대신전으로 와서 성녀가 될 때까지 이벨리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물론 하나같이 그녀의 평판이 깎이는 일이었다. 규모는 이 기도회가 제일 클지 몰라도 더 골치 아프고 답답한 일들이 줄지어 있는데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잘할 수 있어.’

그렇게 마음속으로 수십 번 다짐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신관 하나가 곤란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주변에 있는 신관들에게 뭐라고 속삭였고, 그의 말을 들은 신관들의 얼굴이 굳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런 얼굴이 된 걸까. 나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신관들을 살폈다. 나에게 들리게 하지 않으려는 듯 계속 귓속말을 이어 가는 신관들의 모습에 나의 의문은 더욱 커져 갔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물어보려고 할 때, 한 신관이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녀님, 괜찮으시다면 기도회의 일정을 조금 변경하는 게 어떠한가 싶습니다.”

“…변경? 무엇을 어떻게 변경한다는 건가요?”

이럴 리가 없다. 지난 며칠간 기도회의 일정에 대해서 그렇게 외우고 몇 번이나 기도문 연습을 하며 보냈는데 당일 아침에 갑자기 일정 변경을 하겠다고?

“일단 중앙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을 생략하시고….”

그 말에 나는 숨을 삼켰다. 기도회의 마지막은 성녀가 중앙 광장으로 나가 신전을 찾아온 일반인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한다. 사실 이 행사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정을 생략한다니? 하지만 주변에 있던 신관들은 그 말에 오히려 안도가 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들어왔을 때의 표정도 그렇고, 소리 죽여 다른 신관들과 대화를 나누던 모습도 그렇고.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묻자 그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숨기지 말고 말하세요.”

“그것이….”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는 듯 머뭇거리던 신관이 눈을 질끈 감고 말문을 열었다.

“…대신전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헛소문이 퍼졌습니다.”

“헛소문?”

“성녀님께서 매일… 어떤 남성들과… 대신전 안에서….”

신관은 그렇게 말한 다음 고개를 푹 숙였다. 맙소사. 그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밖에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헛소문은 아니네.’

이벨리나는 정말로 그런 일들을 했었으니까. 문제라면 왜 하필 그것이 지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단 말인가. 왜, 하필이면 오늘!

“그래서 조금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조금이라.”

그럴 리가 있나. 예식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빼먹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굴었던 신관들이다. 그런 그들이 가장 중요한 절차를 빼자고 할 정도면 밖의 분위기가 정말로 좋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 조금이란 게 기도회의 가장 중요한 예식을 할 수 없을 정도군요.”

“…….”

“밖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그, 그것이….”

그가 망설이자 나는 주변에 서 있던 신관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다시 그에게 말했다.

“들은 대로 말해 주세요. 당신에게 책임을 묻거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신관은 그제야 다시 입을 떼었다.

“몰려든 사람들 사이로 무척이나 악의적인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중에서 자신들의 병이나 불운을 성녀님의 탓으로 돌리는 자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성녀님께서 신이 보시기에 좋지 못한 일을 하였기에 자신들이 아프다고… 그러니 성녀님에게….”

“…위해를 가하겠다 이거군요.”

“…그렇습니다. 분명 대륙 끝에 있는 이교도들이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면 마법사들일지도 모릅니다. 중앙 광장으로 들어오는 자들의 몸수색을 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숨기겠다 작정한 자들이 있다면 막기란 힘듭니다. 만약에 흉기를 들고 성녀님께 위해를 가하는 자가 나온다면… 게다가 올해는 라트반 단장도 없으니 더욱 위험….”

말하던 신관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실수로 내뱉은 이름에 스스로가 더 놀란 모양이다. 라트반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벨리나가 무척이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으니 놀라는 게 무리도 아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하나.’

저렇게 참석을 말릴 정도라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한 것이다.

‘이때 이미 이벨리나는 착실하게 악명을 쌓아 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라트반에게 모욕을 준 일도 슬슬 대신전 밖으로 퍼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쌓인 악명이 순식간에 대륙 전체로 퍼지게 된 것이 이 기도회였고.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이 기도회에 참석해도, 참석하지 않아도 결국 책의 내용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일까.

순간 내 안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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