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벨리나는 하지 않았었지.’
그날 이벨리나는 갑자기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다고 하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 탓에 대신전은 처음으로 성녀가 아닌 대신관이 이끄는 기도회를 맞이하게 되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런 이벨리나의 행동에 크게 실망을 했고, 대륙 구석구석까지 향락에 젖어 제 의무를 던져 버린 성녀의 이야기가 퍼졌다.
‘이리스가 그 이야기를 접했고.’
사람들이 성녀에 대한 험담을 하는 것을 들으며 이리스가 대신전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장면이 나왔던 것 같다.
‘일단,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카루스 대신관이 무슨 일에 대한 확답을 받으려고 왔는지 알아야 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카루스 대신관에 대한 건 거의 없었다. 이벨리나의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해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성녀 행세를 하는 데는 다행히 크게 무리가 없었지만 사람들과의 사소한 대화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들은 남아 있어.’
그런데 카루스 대신관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일 것 같았다. 기억할 가치가 없거나, 아니면 기억하기 싫거나. 지금 카루스 대신관의 모습을 보면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상급 신관인 거지?’
사람에게는 인상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해도 본능적으로 꺼림칙함을 느낄 수 있고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끌릴 수 있다. 안타깝게도 카루스 신관은 아름답지 못하면서 꺼림칙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철이 든 다음 삶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냈다. 보험이 적용되는 가장 싼 12인 병실에 있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치기 마련이다. 온종일 하는 일이 없다 보니 그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하루 중 큰 일과였고 덕분에 이제는 첫인상만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높은 확률로 맞히게 되었다.
그런 내 감을 믿어 보자면 이 카루스 신관은 정말로 가까이해서 좋을 것이 없는 사람. 딱 그런 사람이다.
“성녀님?”
내가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고 있자 카루스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는 물어보았다.
“…아직도 제가 부탁드린 것을 고민 중이신 겁니까?”
도대체 카루스가 무엇을 부탁했던 것일까. 일단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나는 일부러 더욱 귀찮다는 듯 되물었다.
“글쎄, 그대가 부탁한 것이 무엇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정말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모른 척하는 듯한 모습을 꾸며 내자 카루스 신관은 애가 탄다는 듯 계속 입술을 핥았다. 그렇게 몇 번이고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다시 말했다.
“제가 저번에 간절히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쓰러진 데일런 대신관을 대신하여 기도회에 저를 세우는 게 어떠신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걸 부탁했었군. 이벨리나의 기억을 찾아보니 지금 대신관의 자리에 있는 데일런은 이미 고령으로 대신관의 일을 제대로 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신전 안에서는 그 대신관의 자리를 놓고 물밑에서 세력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고.
‘어차피 대신관을 임명하는 것은 성녀의 권한이니….’
그러니 상급 신관들은 이벨리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뭐라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덕분에 이벨리나는 더욱더 거리낄 것 없이 기세등등하게 지냈던 모양이고.
일단 이 사람을 대신관의 자리에 올릴 생각은 절대로 없다. 그렇기에 단호한 목소리로 카루스 신관에게 말했다.
“글쎄요, 아직 그대가 그 자리를 견딜 수 있을지 나에게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이러시면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성녀님!”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카루스가 더욱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분노와 흥분으로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내가 뭐라 다시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바친 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겁니까?”
“…바친 자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바친 자들?
“그렇습니다. 정말로 열심히 고르고 고른 자들이었습니다. 얼굴도 몸도 흠집 하나 없는 것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성녀님께 혹시 건방지게 굴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순종적인 것들로 골랐습니다. 혹시 둘만으로는 모자라신 겁니까? 그렇다면 다음번에는 수를 늘리겠습니다. 특별히 원하시는 게 있다면….”
“그만.”
손을 들어 카루스의 말을 막았다. 그의 말에 이벨리나가 그에게 무엇을 받았는지를 알았다. 라트반 단장과의 일이 있었을 때, 그녀의 침대 옆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앉아 있던 남자들. 그리고 지금 옷 아래에 붉은 자국을 남긴 남자들. 그 남자들을 카루스를 통해 받은 것이었다.
***
“하….”
카루스가 돌아간 다음 오늘은 정말로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후 나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지금 이리스와 남자 주인공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기도회와 이벨리나의 신변 문제라는 커다란 불이.
나는 슬쩍 예복을 들어 올려 이벨리나의 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몸에는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이런 피부의 자국 따위는 성력을 이용하면 곧바로 사라질 것들이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성력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지.’
그것이 성력의 문제점이었다. 힘을 베풀라는 신의 뜻 때문인지는 몰라도 성력을 가진 자는 타인을 치료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를 치료할 수는 없었다.
‘일단 남자들은 절대로 못 들이게 해야겠어.’
카루스에게도 남자는 필요 없으니 들이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 뜻을 오해한 듯 더욱 괜찮은 자들로 찾아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아무래도 전의 남자들로 만족하지 못해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꼭 대신관 자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며 재빠르게 물러가 버렸다. 물론 이번에 그가 고른 남자들 따위는 절대로 신전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할 생각이다.
‘주변 청소도 빨리하긴 해야겠지만… 일단은 기도회의 문제가 더 시급해.’
소설에서 기도회를 시작으로 이벨리나의 평판이 바닥을 쳤다. 우선 이 기도회를 무사히 치러 내야 했다.
***
준비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신전의 모든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벨리나의 기억을 모두 더듬어 기도회에 대한 정보와 관련된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다음 곧바로 밖으로 나가 기도회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하자 신관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그들은 곧바로 어딘가로 뛰어갔다.
한참 후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뒤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였다.
우선 내가 가장 놀랐던 사실은 기도회가 겨우 2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1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이벨리나가 단 한 번도 준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고.
내가 기도회를 준비하라 하자 신관들은 또 변덕을 부리기 전에 어서 빨리 모든 일을 끝낼 생각인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책상 위에 기도회의 일정이 적힌 종이들이 쌓였다. 그렇게 한참 설명을 듣고 나자 두 번째로는 기도회 때 입어야 할 예복을 담당하는 신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입어야 하나요?”
열 번째 예복을 입어 본 내가 지쳐 묻자 신관들은 왜 갑자기 그런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얼굴이 되었다. 나중에 전부 세어 본 결과 이틀 동안에 내가 갈아입어야 할 예복은 총 열다섯 벌이었다. 예복도 예복인데 기도회의 순서에 따라 들어야 할 것, 써야 할 것, 걸쳐야 할 것, 신어야 할 것들도 죄다 달랐다.
한참이나 그것들의 점검이 끝난 다음에는 또 다른 신관들이 다가와 말했다.
“성녀님, 괜찮으시다면 기도회의 동선을 한 번만 점검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작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번에 처음 참석하는 신관들을 위해….”
그렇게 말하는 신관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당연하다. 예전의 이벨리나는 신관들이 이런 부탁을 해 오면 곧바로 ‘귀찮으니 그만두겠어요.’라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으니까. 이번에도 그러면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이 신관들의 얼굴에 보였다.
“알겠습니다. 앞장서도록 하세요.”
사실, 이 일은 조금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벨리나의 몸에서 눈을 뜬 다음 계속해서 그녀의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만약 나가서 무슨 실수라도 해서 사람들이 이상함을 느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회의 준비로 신관들에게 둘러싸여 나간다면 이들이 알아서 날 안내할 것이고 쉽사리 접근할 사람도 없겠지.
곧 신관들과 함께 내 처소를 나섰다.
단지 대신전 안을 둘러보러 나가는 것뿐인데도 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수십 명이 넘었다. 가장 앞에서 걸어가는 신관들이 성녀가 지나가는 것을 알리자 각자 갈 길을 가던 대신전 안의 사람들은 황급히 옆으로 물러서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방 안에 있을 때에도 부담스러웠는데 밖으로 나오자 성녀라는 자리가 갖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더욱 와닿았다.
“가장 먼저 중앙 광장에서의 동선을 점검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가는 신관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안내했다.
중앙 광장.
그 말에 나는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대신전 안의 중앙 광장. 그곳은 소설 안에서 이벨리나가 화형에 처해지는 곳이었다. 흰 대리석 복도의 끝에 있는 테라스로 다가가자 거대한 광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
참으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테라스 아래로 펼쳐진 광장은 말이 광장이지 작은 도시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너비였다. 새삼 그 중앙 광장의 크기에 이 대신전이 얼마나 거대한 곳인지를 실감했다.
‘이런 거대한 곳이 오직 성녀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성녀가 가진 거대한 힘에 아찔함을 느끼는 순간,
“……!”
광장에 있는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마주친 상대의 눈이 검은색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에는 햇빛에 보기 좋게 그을린 조금 어두운 피부가 보였다. 곧게 뻗은 짙은 눈썹과 그 아래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시원하게 뻗은 콧날 아래로는 굳게 다문 입술이 보였다.
마치 철로 만들어진 조각상과 같은 느낌을 가진 남자였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 남자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선이 얽힌 채로 짧은 시간이 흘렀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그 남자였다.
“아….”
그런 남자의 행동에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탄식과 같은 소리가 나온 순간 내 옆에 있는 신관들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서, 성녀님. 결코 고의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 라트반 단장이 성녀님께서 이곳에 계신지 모르고 그냥 간 것 같습니다.”
“…라트반?”
신관들이 말하는 이름을 중얼거린 순간, 나는 조금 전 본 남자가 이벨리나의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보았던 라트반 기사단장임을 알았다.
‘맙소사.’
어쩐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누구보다도 강한 인상이다 했더니. 이 세계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하고 바라본 탓이었을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신관들은 더욱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는 이해가 되었다.
분명 라트반 단장은 신전의 규율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소설 내에서도 너무도 칼같이 규율을 지키는 탓에 여자 주인공인 이리스가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아니냐며 몇 번이나 놀리는 장면이 있었다. 신전의 규율을 어길 바에는 차라리 제 목숨을 끊어 버릴 사람. 그런 자가 라트반 단장이었는데.
‘모두의 앞에서 보란 듯이 규율을 어겼어.’
대신전 안에서 절대적인 사람은 성녀이다. 그렇기에 원래대로라면 라트반은 이벨리나를 보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모두가 보는데도 성녀를 무시하고 등을 돌린 것이다.
“저, 저런 무엄한…!”
신관 한 명이 멀어지는 라트반을 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신관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그중에서도 나를 안내하던 신관은 특히나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라트반 단장이 어찌 성녀님을 무시하겠습니까. 모르고 한 일이 분명하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신관의 표정을 보아하니 겨우 힘겹게 방에서 끌어낸 성녀가 라트반 단장의 행동에 분노하여 다시 돌아가 버릴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당장 라트반 단장을 끌고 오라 소리를 칠까 두려워하거나.’
이벨리나라면 당장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부하를 위해 엎드려 기었어야 할 그의 마음을 생각하니 당장에 달려와 그녀를 칼로 베어 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냥 가 줘서 다행이야.’
오히려 그가 찾아와 인사를 했다면 나도 불편할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라트반 단장이 사라진 길을 보고 있자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저런 무례함을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중히 책임을 물어 기사단장을 바꾸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그러자 다른 신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신전 기사단이 라트반 단장의 사병과 다를 바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그들이 누구를 섬겨야 하는지 더욱 혼란스러워하기 전에 어서 빨리 새로운 단장을 임명하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들으면 기사단장의 무례함을 꾸짖고 그에 따른 처분을 간곡히 바라는 목소리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들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라트반 단장 말고도 신전 기사단에는 유능한 자들이 많습니다. 성녀님께서 말씀하시기만 하면 곧바로 명단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저도 추천하고자 하는 이가 있습니다. 직접 보기를 원하신다면 곧바로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모두 자신과 인연이 있는 기사를 새로운 기사단장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머릿속에 담았다. 신전에서 치워야 할 사람은 라트반 단장이 아니라 이 사람들인 것 같으니까.
***
기도회의 동선을 점검하고 방으로 돌아온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나는 꽤나 들떠 있었다. 일단 대신전의 규모에 대해 체감할 수 있었고, 시시각각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곳이 다른 세상임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석양이 내리는 하늘과 주황색과 보라색이 섞인 하늘을 날아가는 거대한 새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옷을 입고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이곳이 책 속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연극의 무대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모두가 살아 있어.’
병원의 침대에 누워 있으면 옆의 다른 침대 사람들이 보고 있는 TV를 함께 봐야 할 때가 많았다. 점심이 조금 지난 오후가 되면 틀어져 있긴 해도 아무도 TV를 보지 않았다. 지루한 뉴스나 먼 나라의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제일 재미있었다. 밤이 되어 이불 속에서 간호사들 몰래 핸드폰을 볼 때도 언제나 먼 나라를 여행하는 영상들을 보았다. 언젠가 나도 그곳들을 여행하는 상상을 하면서.
그때 바랐던 것들을 지금 이루고 있는 것일까.
아픈 몸으로 병원 한 바퀴마저 도는 것이 힘들었던 것과 오늘 자신의 발로 대신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서 힘든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기분 좋은 피곤함에 식사를 하고 씻자마자 그대로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눈을 뜬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으로 다가갔다. 열려 있는 창문 너머에서 시원한 밤의 공기가 기분 좋게 불어왔다.
‘더 걷고 싶어.’
하루 종일 걸었음에도 더 걷고 싶었다. 혹시나 지금 당장이라도 이벨리나의 의식이 돌아온다면. 그래서 내가 사라지게 된다면. 두 번 다시 건강한 몸으로 걷는 그 감각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초조함마저 들었다.
조금 전 창밖으로 보았던 후원을 혼자 걷고 싶었다. 달빛 아래 홀로 고요한 저곳을. 나는 적당히 겉옷을 걸친 채 문을 열려고 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간다면 하루 종일 밖에서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신관들이 곧바로 달라붙을 것이 뻔했다.
‘분명 소설 속에서….’
이벨리나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신전 안에서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 장면이 나왔다. 그렇다면 혼자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였다. 재빨리 이벨리나의 기억을 살펴보았다.
“으음….”
다행히 그 방법은 금방 알게 되었다. 문제라면 원하지 않았던 것도 같이 보았다는 것이지만. 소설의 내용은 거짓이 아니었다. 얼핏 떠오른 기억은 하나같이 바로 눈을 돌리게 되는 민망한 것들뿐이었다. 기억 속의 장면은 죄다 장소도 달랐고 남자들의 얼굴도 달랐다. 아무래도 책 속에 적혀 있던 것보다 이벨리나는 훨씬 더 문란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살짝 살펴본 정도만 해도 여러 명이 떠오르는데,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으면 얼마나 많은 남자가 나올지 상상하기 두렵다.
‘그리고 어쩐지 미안하단 말이지.’
이벨리나가 어떤 삶을 살았던 그건 그녀의 사생활이다. 아무리 내가 이벨리나의 몸에 들어왔다지만 이렇게 남의 적나라한 기억을 보게 되는 것이 미안해졌다. 허가받지 않고 남의 일기장을 읽는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안 볼 수도 없지만.’
이벨리나의 기억은 내가 이 상황에서 믿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언젠가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돌아오게 되는 날이 오면, 말도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때는 멋대로 과거의 기억을 본 것에 대해서 꼭 사과를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안쪽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녀의 방이라고 하는 곳은 말이 좋아 방이지 하나의 궁전과도 같은 곳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방과 회랑이 계속해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력으로 만든 불빛 아래 복도를 걸어 더 안쪽으로 계속 걸었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작은 방의 모습이 나타났다. 얼핏 보면 잠시 쉬어 가는 방 정도로 보이는 곳. 벽에는 여러 개의 그림과 함께 큰 거울이 붙어 있고 한구석에는 큰 옷장도 놓여 있었다.
그림의 뒤도, 거울의 뒤도, 옷장의 뒤에도 전부 통로가 연결되어 있다.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든 통로인지는 몰라도 이벨리나는 이곳에 있는 통로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신전 안을 돌아다녔다.
‘대신전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없으려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까지는 없는 듯했다. 일단 가장 먼저 거울 가까이 다가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은 나인데 그 몸은 내 것이 아닌 이벨리나의 것이다. 나의 행동은 사람들의 눈에는 이벨리나의 행동으로 보이겠지.
그 사실이 슬프거나 서러운 것은 아니다. 다만 기묘한 감각이 들 뿐.
왜 나는 책 속의 세상으로 온 것일까. 그것도 왜 이벨리나의 몸으로. 그렇게 거울 속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자 어쩐지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일단… 거울과 연결된 통로가 바로 후원으로 연결되는 통로던데.’
거울을 슬쩍 밀어 보자 그 뒤로는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보였다. 아니, 이걸 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할 것 같다. 마치 벽에 금만 그어 놓은 것 같은 문은 어디에도 손잡이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남들은 이 문을 절대로 열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문 전체에 푸른색의 빛이 알 수 없는 복잡한 문양을 그리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문도 사라졌다.
“와….”
만화나 영화에서 보았던 마법 같은 힘이었다. 이렇게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 힘을 내가 사용했다는 것도 신기했다.
‘책에서 보니 성녀의 성력에만 반응하는 것 같던데….’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벨리나는 가짜 성녀 아니었어?’
분명 내가 읽었던 2권의 마지막에서 이벨리나는 가짜 성녀임이 밝혀지며 화형에 처해진다. 그런데 왜 성녀의 성력에만 반응하는 이 문이 이벨리나의 성력에 반응하여 열리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성력이 언제부터 완전히 사라졌던 거였지?’
책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보니 이벨리나는 성력이 완전히 사라져서 가짜 성녀라 불렸지 성력 자체가 부정당했던 적은 없었다.
‘그럼 지금은 진짜 성녀라는 건가?’
통로 앞에 서서 조금 전 문에 닿았던 손을 바라보았다. 잠시 맴돌았던 성력의 푸른빛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거울 뒤의 통로는 빛이 없었다. 그나마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몇 번이고 간 것을 보았기에 걸을 생각을 했지 그 기억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 안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거울 뒤의 길은 후원으로, 그림 뒤의 길은 중앙 광장으로, 옷장 뒤의 길은 대신전의 입구 쪽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
혹시나 오늘처럼 다른 길들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기에 이벨리나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내용들을 내 머릿속에 잘 넣어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벽을 마주하게 됐다. 방 안에서 벽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문을 만졌던 것처럼 손바닥을 그 벽에 올리자 다시 푸른빛이 돌면서 컴컴하게 막혀 있던 벽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앞에 나무가 울창한 후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통로에서 걸어 나와 뒤를 돌아보니 입구는 후원의 벽의 구석에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나오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그것은 다시 벽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도 성력이 제대로 운용되나 싶어 손을 올려보니 푸른빛이 돌며 벽이 사라지고 통로의 모습이 보였다. 뒤로 물러서니 잠시 후 다시 벽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방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나는 후원을 천천히 걸었다.
밤에 우는 새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렸다. 무섭다기보다는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방 안에서도 혼자 있긴 했지만 그곳은 언제나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기에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하루 내내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너무 많았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좋았지만 이내 지치고 말았다.
병원에 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가구나 다름이 없었다.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 당연하면서 누구 하나 대단히 신경 쓰지 않는 존재. 하지만 자리에 없으면 어디 갔냐고 물어보는 것 정도는 되는 존재.
그런 위치에 익숙해져 있다가 내가 걸음이 조금만 느려지거나 무엇에 관심을 보이기만 해도 옆에서 사람들이 반응을 하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무의 냄새가 가득한 밤공기를 들이마시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렇게 한참이나 아무도 없는 후원의 길을 걸었다. 시간이 지나자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밤의 고요한 정경을 즐기며 터벅터벅 혼자 후원을 걷다 보니 다시 조금 발바닥이 아파 왔다. 주변을 확인한 다음 나는 근처에 있던 벤치에 드러누웠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쏟아질 것 같은 별로 가득했다. 나는 그만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달이 두 개네.”
병원의 침대 위에서 읽었던 많은 소설들이 현실과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알려 주는 장치로 썼던 것을 이렇게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한참이나 두 개의 달과 하늘에 가득한 별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누운 채로 다리를 들어 보았다. 입고 있었던 옷이 잠옷이었던 탓에 천이 스르륵 흘러내려 길고 가는 흰 다리가 그대로 달빛 아래에 드러났다.
하루 종일 걷고, 지금 또 걸은 탓에 다리에는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이 재미있어서 더 걸으려고 했던 거지만.’
아무래도 이 통증을 즐기는 것은 오늘 밤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즐겁고 신나도 매일같이 이렇게 걸어 다닐 수는 없으니. 게다가 내 몸이 아닌데 마음대로 혹사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몸을 일으켜 조금 부은 것 같은 다리를 천천히 눌렀다. 그러던 중 허벅지의 안쪽을 바라본 순간 나는 당황스러움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게 뭐지?”
이상한 자국이 허벅지의 안쪽에 남아 있었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푸른 자국. 벌레에 물렸다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선명한 자국이었다. 혹시 이벨리나가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후 남은 자국인가 싶기도 했지만 몸에 남아 있는 다른 자국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다른 것은 이렇게 동그랗지 않아.’
마치 일부러 누가 동그란 물건으로 꾹 눌러 생긴 듯한 자국. 한 개여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자국인데 그것이 세 개나 연달아서 있었다. 일부러 만든 자국이 분명했다.
이건 또 무엇인가 싶어 이벨리나의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쩐지 좋지 못한 느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지우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자국을 손으로 눌러 보았다. 당연히 사라질 리는 없었다. 선연히 남아 있는 그것에 어쩐지 기분이 좋지 못해 나는 좀 더 힘을 주어 북북 문질렀다. 그러던 순간 손끝에 푸른빛이 맴돌았다.
“……!”
갑자기 생긴 빛에 놀라 손을 들어 올리자 그 빛은 곧바로 사라졌다.
‘성력.’
성력이라는 것, 생각보다 쉽게 쓸 수 있는 것이었나 보다.
‘생각해 보니 성력을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어.’
이 몸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 성력을 쓴 적이 없었다. 지금은 대단한 마수 토벌전이 진행 중인 것도 아니고 행사가 진행 중인 것도 아니니 당연한 일이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성력을 본 것은 조금 전 이곳에 오기 위한 통로를 열고 닫았던 순간뿐이었다.
‘왜 써 볼 생각을 못 했지.’
책의 내용대로라면 이리스가 각성하게 되는 1년 후부터 성력이 줄어들며 이리스가 대신전으로 오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성력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의 이벨리나에게는 성력이 넘치도록 있다.
‘당장 이것부터 사용해 봤어야 했어.’
그렇게 생각하며 이벨리나의 기억을 뒤진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허벅지에 남아 있는 자국에 대한 것을 떠올릴 때와 똑같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니, 떠오르지 않는 것은 똑같다 해도 더욱 짙은 어둠이 느껴졌다. 마치 성력에 대한 것은 조금도 제 안에서 두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왜 이러는 거지?’
이벨리나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성녀라 외쳤던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왜 성력에 대한 것은 조금도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뭔가… 이상한 점이 많네.’
이 자국도 그렇고, 성력에 대한 것도 그렇고. 책의 내용은 당연히 주인공인 이리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이벨리나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했던 것은 대부분 그녀의 악행에 대한 부분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것에 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계속 떠올리려고 노력하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성녀님, 여기 계셨군요!”
“……!”
갑자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평신관의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이런, 소개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카루스 신관님의 명을 받고 성녀님을 모시러 온 자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남자가 내뱉은 카루스라는 이름에 나는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카루스가 더 데려오지 말라던 내 말을 멋대로 오해하고 나가더니 기어이 또 새로운 남자들을 찾아 밀어 넣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고 돌아갈까 했으나 예전에 성녀님을 모셨던 자에게 들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후원에서 하는 것을 즐기신다는 말을요. 그 말에 조금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몰래 들어왔는데… 마침 성녀님께서도 여기에 계셨다니. 이건 필시 신이 저를 성녀님께 인도하신 것이겠지요.”
나는 신나게 떠들고 있는 남자를 살폈다. 역시나 신관이라 하기에는 너무 긴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신관복 너머로 일반인들이 입는 옷이 보였고. 기실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신관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가꾸어진 외모였다. 아픈 머리를 누르며 나는 그에게 손을 저었다.
“돌아가도록 해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 어서 돌아가도록 해요. 카루스에게 더 이상 사람들을 보내지 말라고 말도 전하고.”
내 말에 남자는 당황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윽고 남자가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뭘 하는…!”
“저번에 왔던 자들보다 훨씬 더 성녀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부디, 이대로 내치지 마십시오.”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다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순식간에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그 감각에 소름이 끼쳐 그대로 남자를 걷어차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이 내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불러 놓으신 다음 남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일이 잦다구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자들도 많았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애송이들과는 다르지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벤치에 앉은 내 양 무릎을 잡더니 옆으로 벌렸다. 그러고는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제 몸을 다리 사이로 끼워 넣었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루스 신관님을 통해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이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지요. 성녀님을 꼭 만족시켜 드리고 저 역시 다른 자들처럼 성녀님의 은혜를 받아가고자 합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요사스럽게 입술을 핥았다.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제는 성녀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곧바로 손을 뻗어 다가오려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 외쳤다.
“꺼져! 누구 없어요! 여기… 읍!”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정말로 싫으셨다면 성력으로 저를 벌하면 됐을 것을.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녀님께서도 저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성력을 쓰는 방법을 아직 모른다고!
남자의 손 아래 입이 틀어막힌 채 나는 다시 소리를 내었다. 동시에 손과 발 역시 필사적으로 휘두르며 남자의 몸을 때렸다. 그때였다.
“컥!”
내 위에 올라타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풀었다. 동시에 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저 멀리 날아가 후원의 나무에 부딪혔다.
콰직!
얼마나 거세게 날아간 것일까. 남자와 부딪힌 나뭇가지가 큰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남자 역시 땅으로 떨어져 굴렀다. 누가 지금 이 남자를 집어 던진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낮에 보았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라트반?”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 중의 한 명. 이리스에게 복종하는 성기사. 라트반이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