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48)

01. 이벨리나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왜 내가 49대 성녀인 이벨리나의 몸에 빙의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나는 그녀의 몸에 빙의하기 전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있던 병동은 장기 입원하는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하루 내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정해진 시간에 진찰을 받고 주사를 맞고 밥을 먹는 똑같은 일상. 게다가 대부분 자유롭게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이 많았기에 환자들은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낼 것을 찾았다.

가장 적합한 것은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치면 책을 보거나.

나 역시 그런 식으로 하루를 보냈다. 입원한 지 오래되다 보니 부모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찾아오고 학교도 가지 않은 지 오래되어 찾아오는 친구들도 없었다. 입원 초기에는 심심함에 이것저것을 했다. 핸드폰을 보며 SNS 앱을 설치하는 나에게 옆 침대의 사람이 말했다.

“그런 거 어차피 오래 못 해. 하고 나면 기분만 나빠져.”

왜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루 종일 병원 안에만 있는 내가 올릴 수 있는 게시물은 언제나 똑같은 것뿐이었다. 대신, 나는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매 순간 보았다.

친구와의 약속에 늦었다며 전철을 찍어 올리는 사람. 드디어 기다리던 가수의 콘서트에 오게 되었다며 공연장의 사진을 올리는 사람. 집에 새로 데려온 고양이가 너무 예쁘다며 사진을 올리는 사람 등등.

틈만 나면 홀린 듯이 그렇게 남들의 일상을 보았다. 그러다가 한번, 내가 원인 모를 발작으로 급히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나오게 되었다. 의식을 되찾고 병실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을 켠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나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아무 알림도 없는 핸드폰을 보던 나는 그동안 즐겨 사용하던 SNS 앱을 켰다. 그리고 곧 허탈함을 느꼈다. 내가 죽다 살아나는 동안 밖의 세상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일상을 올리고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사진을 올렸다.

나는 그대로 그 SNS 앱을 지워 버렸다. 그제야 나는 옆 침대의 환자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분만 나빠져. 그 말이 맞았다.

그 후로 나는 책만 보았다. 그곳에는 일상이 아닌 특별한 이야기들이 쓰여 있었고 그 이야기는 언제나 끝을 맞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끝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나보다 더 먼저 끝을 맞이하는 인물들. 끝을 맞이하는 세상. 부끄럽지만 그런 점이 좋았나 보다. 병동에 머물러야 하는 내가 안쓰럽게 여길 수 있는 그런 삶들이 말이다. 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한 자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저런 삶에 비하면 나는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사이 내 몸은 점점 더 약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 보던 부모님의 얼굴은 더욱 보기 힘들어졌다. 탓할 마음은 없었다. 언젠가부터 그들의 얼굴에는 병원에 있는 나보다 더욱 짙은 피로감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부모님이 오지 않는 쪽이 더 마음이 편했다. 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병원비를 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몸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중, 나는 내 병실이 있는 층의 휴게실에서 책 한 권을 주웠다.

처음에는 휴게실에 비치되어 있는 책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책은 무척이나 깨끗했고 병원의 것임을 알리는 어떤 표시도 붙어 있거나 적혀 있지 않았다. 이대로 테이블 위에 놓고 돌아갈까, 하던 나는 책을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그냥 한번 읽어 본 다음 간호사에게 부탁해 주인을 찾아 줘야겠다 싶었다.

침대에 누운 나는 책 표지를 살폈다. 제목은 <이리스>. 그리고 그 제목 뒤에는 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가운데 권인가?’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1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핸드폰으로 앞 권을 찾아볼까, 하던 나는 곧 귀찮아져서 다시 책을 들었다.

‘그냥 여기서부터 읽어 보자.’

어차피 꼭 읽고 싶었던 책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이리스>의 2권을 읽기 시작했다. 앞 권을 읽지 않아도 앞부분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리스>는 제목 그대로 이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이야기였다. 2권은 이리스가 제가 가진 힘이 성력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했다. 동시에 대신전에 있는 이벨리나라는 성녀의 힘이 사라지는 모습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이벨리나가 벌이는 악행들이었다. 제 성력이 사라지는 것에 불안해진 이벨리나는 더욱더 제멋대로인 행동을 했다. 성력을 보여야 하는 기도회에 나가지 않고 달콤한 말만 하는 남자들을 그녀의 처소로 끌어들여 밤을 보냈다.

바른 소리를 하는 신관들을 멀리 내치며 아첨하는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 성녀의 이름 아래 멋대로 신전의 보물과 재산들을 선물했다.

사실 책 제목이 이벨리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앞부분은 이벨리나의 이야기가 더 많았다.

이리스는 그런 이벨리나의 악행에 반하여 제힘으로 사람들을 도와 나갔다. 그러면서 이리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친해졌다.

‘어디 보자… 기사단장에, 황태자에, 마법사들의 왕에. 역시 여주인공이구나.’

이벨리나에게 끌려가기 전, 이리스는 이미 남자 주인공들과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이리스가 위험에 처하자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내용은 이벨리나가 화형당하는 부분까지 와 있었다.

…그것이 가짜 성녀의 마지막이었다.

2권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났다. 큰 위협이 되던 악역을 처리했으니 이어지는 책에서는 이리스의 행복한 이야기가 펼쳐지겠지. 세 남자 주인공과의 아슬아슬한 연애 이야기가 주가 될 것 같았다.

‘굳이 뒷부분을 읽지 않아도 되겠어.’

그래 봤자 책 속의 주인공을 부러워하기나 할 것이다. 나는 커튼을 치고 불을 끈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회진 때 사람들이 오면 책의 주인을 찾아 달라고 해야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비상벨을 눌렀다. 간호사가 달려왔고 그녀는 다시 의료진을 불렀다. 정신 차리라는 큰 소리가 들렸고 내 몸에 몇 번이고 큰 충격이 가해졌다. 하지만 정신이 들기는커녕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순간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잠들기 전에 읽었던 책이 보였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죽었다.

그래, 분명히 그렇게 죽었는데.

“하아….”

나는 긴 한숨을 쉬면서 방 안을 바라보았다.

아주 넓은 방이었다.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몇십 걸음을 걸어야 할 정도로.

단지 넓기만 한 방이 아니었다. 벽과 천장에는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세밀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들이 가득했다. 거기에 금색과 붉은색의 화려한 장식들이 방의 곳곳을 꾸미고 있었다.

높은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고 큰 창문마다 화려한 문양의 커튼이 쳐져 있었다. 게다가 한쪽에 있는 침대는 외국의 성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했다. 침대뿐만이 아니다. 놓여 있는 장식장. 테이블. 의자. 그리고 도자기 등등.

한마디로 엄청나게 화려한 방이었다.

한참이나 그 방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입이 떡 벌어진 나는 잠시 눈을 깜빡여야 했다. 그곳에는 조금 전에 보고 있던 방의 화려함을 한순간에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물건들이 있었으니까.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조각상. 온갖 보석이 박혀 있는 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비단 등등…. 온갖 사치스러운 것들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렇게 살았으니 그렇게 죽었지….”

그렇게 중얼거리다 장식장 위에 놓여 있던 조각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순금의 조각상은 거울에 비친 금발에 푸른 눈의 여인과 꼭 닮아 있었다. 나는 조각상의 받침대에 적힌 글씨를 보았다.

이벨리나.

“이벨리나….”

나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하필 얘가 되어 버린 건데…!”

***

일주일 전, 나는 눈을 떴다. 병원에서 의식이 흐려지던 것이 기억났기에 나는 이곳이 사후 세계라고 생각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성녀? 누구를 부르고 있는 거지? 당황해서 내가 눈을 뜨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신을 찾으며 무릎을 꿇었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뭣들 하는가. 어서 다른 신관들에게 알리게!”

“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서 뭐라 소리 지르더니 자기들끼리 기도를 하고 난리가 났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보던 의사들과 간호사가 아닌 난생 처음 보는 옷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나 쓰러지신 탓에 모두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벨리나 성녀님!”

…이벨리나? 성녀?

그렇게 깨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이제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한 것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잠들기 전 읽었던 책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화형당할 것이 예정되어 있는 악역의 몸으로.

“왜 하필이면 이벨리나야….”

죽어서 책 속에 들어왔는데, 다시 얼마 있지 않아 죽을 운명이라니. 일주일 사이에 나는 최대한 내가 읽었던 것들의 기억을 더듬어 지금이 언제인지를 알았다. 지금은 죽음으로부터 2년 전이다. 이제 1년이 지나면 세상에 이리스의 소식이 퍼질 것이고, 다시 일 년 후에 나는 죽는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일주일 내내 그 생각만 했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절대로 그렇게 죽을 순 없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일을 생각해야 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당연히 하는 생각이겠지만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절박한 마음이라 자신할 수 있다.

‘이미 한 번 죽었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을 정도로 죽는 순간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달려오던 의사들의 발소리와 기계들의 소리, 주변에서 어떡하냐며 수군거리던 소리까지. 그러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삐, 하며 낮아지는 기계의 소리가 들리면서 의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다음에 찾아온 것은 소리조차 없는 완벽한 무(無)의 세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날 것 같은 두려움과 먹먹함의 순간이었다.

‘게다가….’

나는 자리에서 가볍게 뛰어 보았다. 이리저리 팔과 다리도 움직여 보았다. 몸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그것은 나에게 너무도 생소한 감각이었다.

그동안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조심스레 움직여야 했고 뛰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이벨리나의 몸은 건강함 그 자체였다.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즐겁고 또 소중했다. 병원에서 언제나 바랐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발로, 내가 원하는 곳에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는 것.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그 움직임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나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밝은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벨리나가 보였다.

내가 이 몸에 멋대로 들어온 불청객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아마도 언젠가는 내쫓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쓸 순 없어.’

매 순간 숨을 쉬기 편안한 것조차도 전부 감사한 몸이다. 아무리 2년 후에 죽을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대로 쓸 수는 없다. 이벨리나의 의식이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그녀가 돌아올 때 무사히 몸을 돌려주고 싶었다. 기왕이면 살아 있는 채로 말이다.

‘다행히 책의 내용도 어느 정도 기억에 있고 이벨리나의 기억도 남아 있어.’

불행 중 다행으로 나에게는 이벨리나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신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여기는 어디? 당신은 누구?’ 같은 말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어.’

기억이 남아 있어도 너무 잘 남아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내가 이 몸에 빙의하기 전, 이벨리나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도 잘 알게 되었다.

“이를 어쩐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쉰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무척이나 차분하고 정결하며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성녀의 일반 예복이다. 순백의 로브에 황금색의 화려한 문장이 로브 여기저기를 수놓고 있다. 나는 그 예복의 목 부분을 잡고 내려 보았다.

예복 위로 보이는 곳들은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흰 피부였건만. 예복 아래의 피부는 그렇지 못했다.

울긋불긋한 정도가 아니다. 여기저기 손자국이 분명한 푸른 멍이 몸 전체에 있었다. 그것뿐인가. 가슴 위에는 누가 보아도 잇자국이 분명한 것들이 가득했다.

나는 몸에 이런 것이 남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벨리나’는 아니었다.

“…너 정말 무슨 생각이었니?”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눈을 뜬 다음 사람들을 죄다 물리고 나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했었다. 그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며 이벨리나의 기억이 떠올랐었다. 내가 빙의하기 직전, 이벨리나는 잠자리에 들었었다. 혼자가 아니라 다른 여럿과 함께. 정확히는 이벨리나와 남자 두 명이 함께.

“미쳤어….”

그 세 명은 내 도덕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머리를 눌렀다. 소설을 읽을 때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는데 이렇게 생생한 흔적을 보게 될 줄이야.

물론 본인이 어떤 생활을 하건 자유라고는 하지만 이벨리나는 성녀였다. 이 소설 속 성녀가 남자와 눈도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의 답답한 규율 아래 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벨리나는 그런 삶과는 무척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고.

‘이러니 나중에 제 편이 하나도 없지.’

시간이 흘러 진짜 성녀인 이리스가 나타났을 때, 이벨리나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함께 여러 밤을 함께했던 남자들도 말이다. 책을 읽을 때는 그저 악역의 비참한 말로라고 생각하며 무심하게 읽었었는데, 정작 내가 그 이벨리나가 되어 보니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기억을 짚어 보니 이벨리나는 그들과 밤만 보내고 끝낸 게 아니었다.

‘보석에 저택에 지위에….’

그녀가 안았던 남자들에게 온갖 것들을 함께 안겨 준 것이 기억났다. 그것도 꽤나 많이.

‘그런데 한 놈도 편들어 주지 않고 도망갔군.’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읽은 내용에서 보면 이벨리나의 연인이었던 사람들도 후에 나타나는 이리스에게 ‘이제야 진실한 사랑을 만났다’라며 매달리기도 했다. 물론 그런 남자들은 남자 주인공 세 명이 곧바로 처리했지만.

나는 다시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도 참 불쌍한 삶이네.”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큰 거실로 보이는 방에 붙어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책이 가득한 서재가 보였다. 말이 좋아 서재지. 뒤로 죽 이어지는 책장들을 보니 도서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규모였다. 이게 성녀가 누리는 것들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일단 정리 좀 하자.”

서둘러 종이와 펜을 찾았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려면 아무래도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지금의 상황을 한번 정리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어느 정도 상황이 파악이 된 다음에 나는 곧바로 도망을 가려고 했다. 그러면 책에서 봤던 미래로부터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만약 이대로 도망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골칫덩어리라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지금의 성녀는 이벨리나다. 신전이 발칵 뒤집힐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 세계를 잘 아는 건 아니잖아.’

이벨리나의 기억은 어디까지나 신전 안의 생활에 국한되어 있다. 워낙 어린 나이에 대신전으로 들어온 그녀였기에 바깥세상의 일은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도망친다고 한들 얼마나 잘 도망칠 수 있을까? 아마도 며칠 지나지 않아 신전 기사단이 나를 찾아내겠지.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릴지 상상이 되었다. 제멋대로 굴던 성녀가 드디어 이제는 신전 밖을 나가서까지 일을 저지르고 다닌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잖아도 바닥인 평판이 더욱 바닥으로 추락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도망간다고 해서 지금까지 이벨리나가 했던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소설에서 읽었던 이벨리나의 악행들을 떠올려 보았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벨리나가 한 좋지 못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 마음대로 구는 성녀였기에 조금이라도 직언을 하는 신관은 곧바로 위험한 지역의 신전으로 멀리 내치고, 자신이 머무는 신전의 재물을 제멋대로 사용했다. 거기에 시중을 드는 평신관들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대로 손이 올라갔고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상대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벨리나는 성녀였으니까.

‘그나마 아직 사람은 안 죽여서 다행이다.’

지금은 이리스가 나타나기 2년 전이다.

이벨리나가 온갖 트집을 잡아 사형을 명령하는 것은 이리스의 소문이 퍼지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노력하면 어떻게든 이벨리나가 했던 일을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도망친다고 지금껏 그녀가 한 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이곳에 남아서 지난 일들을 최대한 수습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는 이벨리나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 그 어느 누구도 그녀를 위해 나서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돌릴 수 있다면 2년 후에는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리스와 세 명의 남자 주인공들….’

나는 종이에 네 명의 이름을 적었다.

이리스. 라트반. 레온. 아슬란.

‘이 네 명하고의 관계도 노력하면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책에서 이벨리나는 이리스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발작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이리스가 신전으로 왔을 때, 당장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만약 이리스가 나타나고 내가 곧바로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면 어떻게 될까.

‘…무사히 잘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책 속에서 이리스는 이벨리나를 마지막까지 이해하려 노력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유일한 이벨리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였으니 이쪽에서 노력한다면 분명 좋은 관계로 남을 것이다.

‘남자 주인공 세 명도 마찬가지야.’

책 속에서 이벨리나를 죽인 것은 이 세 명이었다. 이벨리나가 이리스를 죽이려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이 세 명과 친해진 다음 이리스가 나타나면 성녀고 뭐고 전부 다 넘겨주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문제없을 것 같아.’

이리스를 위해 움직이는 세 명이다. 그러니 내가 그녀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그녀와 괜찮은 사이로 지낸다면 그들도 굳이 날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라면….’

나는 세 명의 남자 주인공 이름을 근심을 담아 바라보았다.

‘이미 이 세 명과 사이가 별로라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가장 먼저 신전 기사단의 단장인 라트반. 이 세 명 중 현재 상태로서는 그가 제일 이벨리나를 싫어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라트반은 규율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성녀를 섬겨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모두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신의 힘을 써야 할 성녀가 온갖 타락에 절어 있으니 좋아 보일 리가 있나.

‘그리고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것이 얼마 전 일이었지.’

나는 기억을 더듬어 소설에 적혀 있던 이벨리나와 라트반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 일을 떠올려 보았다.

얼마 전 신전 기사단은 대륙 변방에 나타나는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기사단 전체가 출정을 나섰다. 대신전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 둔 채, 단장인 라트반까지 나선 큰 규모의 토벌전이었다.

신전 기사단이 대륙 곳곳을 돌며 신의 이름을 드높였다. 그렇게 몇 개월간 무사히 마수 토벌을 마친 기사단이 대신전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문제가 터졌다. 갑작스러운 대형 마수의 출현으로 기사단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라트반 단장의 활약으로 다행히 마수는 쓰러트렸지만 부단장이 큰 상처를 입었다.

기사단과 함께 있었던 상급 신관들이 그를 치료하기 위해 달라붙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를 태우고 라트반 단장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아 대신전으로 달려왔다. 그다음 이벨리나의 방으로 한걸음에 와 빌었었다.

“성녀님께 말해 주시오! 어서!”

피범벅이 된 기사를 들쳐 업고 달려온 라트반을 보고 신관들이 놀라 성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벨리나는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신가!”

문밖에서 살려 달라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벨리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라트반은 점점 더 평정을 잃어 갔다. 그때, 성녀의 방 안에서 신관 한 명이 나왔다. 이벨리나의 시중을 드는 신관이었다. 그녀는 라트반에게 허겁지겁 다가와 물었다.

“혹시… 출정을 나가기 전에 성녀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 말에 라트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출정을 나가기 전, 이벨리나는 그에게 대신전에 남기를 요구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 모를까, 이벨리나가 말했던 이유는 제가 대신전을 나갈 때, 다른 수준 떨어지는 기사들을 호위로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라트반은 곤란하다 말했다.

그때 이벨리나는 그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다.

“감히! 성녀를 섬겨야 할 의무를 가진 자가, 지금 나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겁니까!”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던 이벨리나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 화를 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화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벨리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웃음에 모두 한 걸음 물러섰다. 이벨리나가 저렇게 웃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요, 출정하도록 해요. 라트반 단장.”

“…감사합니다, 성녀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출정을 허가할 수 없다며 난리를 피웠던 성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게 꺼림칙했지만 라트반은 서둘러 인사를 하고 성녀의 처소를 나섰다. 그런 라트반을 바라보며 이벨리나가 말했다.

“…언젠가 이날을 죽도록 후회하도록 해 줄 테니까.”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신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분명 오늘 일로 이벨리나가 라트반 단장에게 좋지 못한 짓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성녀의 방 앞에 초조하게 서서 그녀가 나오길 바라는 라트반의 모습에 모두가 알아차렸다. 성녀는 그날의 복수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성녀님께서 그날의 일로….”

라트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을 섬기고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써야 하는 것이 성녀다. 그런데 지금, 마수에 당해 신전 기사단의 부단장이 죽어 가는데 그날 그와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고?

그는 이벨리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성녀라는 칭호가 무색할 정도로 표독스럽고 독하며 냉정하다. 그래도 신전 기사단의 일원이기에 그는 성녀를 섬겼다. 이벨리나가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녀는 신이 선택한 성녀이고 제가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고개를 숙였건만,

어린애가 떼를 쓰는 것 같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해서 이렇게 사람 목숨을 버리려 하다니.

라트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신관이 황급히 그를 말렸다.

“제발, 제발 지금 성녀님께 따지시는 것은 안 됩니다. 그저 잘못했다고 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나오지 않으실 겁니다!”

“…….”

그사이에도 부단장의 숨은 가늘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둘 것이 분명했다. 라트반은 이를 갈며 옆의 신관에게 물었다.

“무엇을 원하시는지 여쭤 주십시오.”

“네?”

“성녀님께… 내가 저번의 무례를 어찌 사죄드려야 부단장을 치료해 주실지 여쭤 주십시오.”

그 말에 신관은 허겁지겁 성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 돌아온 그녀가 라트반에게 다가와 머뭇거렸다.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저기… 그게….”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는 신관에게 라트반이 다시 다급히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저를 용서한다고 하셨습니까!”

그 말에 신관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두,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침대 아래까지 기어 오라 하셨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면 기사단장님의 진심을 믿을 수가 없다며….”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헉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기어 오라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두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 그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두 무릎을 꿇는 것은 오직 신에게만 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성녀에게, 그것도 침대 아래까지 기어 오라니.

기사단장인 그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간신히 의식을 붙잡고 있던 부단장마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단장… 그것은… 오직 신을… 위한….”

힘겹게 말을 내뱉던 부단장이 피를 토하며 거친 숨을 내쉬자 라트반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

신관들에게 그렇게 말한 그는 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열린 문 저 너머로 보이는 성녀의 침대를 향해 개처럼 기었다. 이벨리나는 그 침대 위에서 웃으면서 그런 라트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트반의 부름에 대답이 없었던 이벨리나의 옆에는 아름다운 청년들이 흐트러진 복장과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벨리나의 복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너무도 알기 쉬운 상태였다.

이벨리나는 침대의 발치까지 기어 온 라트반을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역시 신전 기사단의 단장님답군요. 부하 하나를 위해서 두 무릎을 꿇으시다니. 그 마음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입니다.”

“…부단장을 살려 주십시오.”

“그래요, 그래야지요. 단장님께서 이렇게 개처럼 기어 오셨는데 그 정성을 어찌 제가 무시하겠습니까.”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이 즐거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한 이벨리나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날, 다행히 부단장은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이벨리나의 성력으로도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했다. 목숨만 건졌을 뿐, 더 이상 검을 잡을 수 없게 된 그는 기사단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로 라트반은 더 이상 이벨리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벨리나 역시 그를 부르지 않았다. 이 대신전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두 사람이 완전히 갈라서게 된 것에 신관들은 우려를 표했지만 그 누구도 두 사람 사이의 골을 메울 순 없었다.

***

“도대체 왜 그랬어….”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자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라트반 기사단장은 성기사의 교과서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개인의 욕심 따위는 조금도 없는 오직 고결한 명예로움을 추구하는 기사. 그런 그에게 신전의 규율을 어기고 모두의 앞에서 바닥을 기어 오라는 모욕을 주다니.

‘노력한다고 해서 그와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까?’

내가 처음 생각했던 ‘남자 주인공들과 사이좋아지기’라는 계획은 말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당장 같은 신전 안에 있는 라트반과의 관계도 이 모양인데. 황궁에 있을 레온과 마법사들의 탑에 있는 아슬란과의 관계는 또 얼마나 복잡할까.

그렇게 고민하며 종이 위에 쓴 남자 주인공들의 이름에 멍하니 동그라미만 계속 그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후에 밖에 서 있는 신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녀님, 카루스 신관이 알현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직 이벨리나의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되도록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 문을 지키는 신관들에게 어지간한 알현 신청은 모두 거부하라 일러두었다. 원래도 이벨리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 후로 나에게 누군가의 방문을 알려 오는 일이 없었는데.

‘카루스 신관이라.’

책에서도 몇 번 보았던 이름이었다. 접견 거부 명령을 내렸는데도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꽤 중요한 인물이겠지. 카루스 신관을 만나야 하나 돌아가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일단 들여보내라 말했다.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들이라면 한 명씩 천천히 만나서 파악을 해 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이리스와 남자 주인공들의 이름을 적었던 종이를 치우고 카루스 신관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곧 문이 열리고 큰 덩치를 가진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상급 신관이네.’

예복을 보아하니 대신전에서도 그 수가 많지 않은 상급 신관이었다. 신전은 성녀를 가장 위로 두고 그 아래에 대신관, 상급 신관, 중급 신관, 하급 신관, 평신관으로 나누어지는 구조다. 라트반 단장이 있는 신전 기사단은 신관들과는 또 다른 계급을 갖고 있고.

어쨌거나 지금 들어온 카루스라는 남자는 꽤 신분이 높은 자였다. 그는 서재로 들어와 신전의 예법에 따라 고개를 깊게 숙였다.

“세 번째 계단에 서 있는 신의 종 카루스가 성녀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이벨리나의 기억 덕분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하나, 이렇게 사람들을 만날 때는 긴장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나를 향해 ‘가짜 성녀다!’라고 외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다행히 카루스 신관은 그런 말을 하는 대신에 허리를 세우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알현을 신청했습니까? 당분간 사람들을 물리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요.”

이 정도면 평소 이벨리나의 말투와 비슷하려나. 거만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귀찮다는 듯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오래 쓰러져 계셨던 터라 몸이 불편하신 것을 알고 있으나, 기도회의 담당 신관 문제 때문에 되도록 성녀님의 확답을 듣고자….”

“…기도회?”

기도회라는 말에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아….”

잠시 후 나는 이마를 짚었다. 라트반과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다음 이벨리나가 얼마나 무책임한 성녀였는지 보여 주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것이 기도회였다. 신전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거대한 행사로 그날에는 대신전의 중앙 광장까지 일반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고 그 행사에는 성녀인 이벨리나가 모두와 함께 신에게 기도를 올려야 한다.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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