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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Epilogue (3) (181/181)


181. Epilogue (3)
2022.04.23.


쏜살같이 흘러가는 인간의 시대에 비해 뱀파이어와 수인들의 시대는 느리게 흘러간다. 올센의 왕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으나 글래스턴을 다스리는 공작은 여전히 딱 한 사람이었다.

왕들이 바뀐 만큼 지도도 여러 번 다시 그려졌다. 글래스턴 공작저에는 여태까지 변화한 지도들이 회랑 한 켠에 나란히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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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뭐하고 있니?”

머리카락을 묶어놨던 리본은 회랑 복도에 툭 떨어져 있었다. 라이킨은 허리를 굽혀 리본을 주워 들었다. 복도에는 작은 의자 두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방향을 봐선 지도를 보려고 딛고 올라가기 위해 가지고 온 모양이다. 결국엔 의자도 팽개친 셈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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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

라이킨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와 아주 똑같이 생겼기에 사람들은 무조건 친탁이라고 말하는 아이는 멍하니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아이가 그와 똑 닮긴 했다. 눈이 시리게 푸른 눈에 금발이기까지 하니, 당연히 그렇지만 라이킨은 아이가 이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아내를 떠올렸다.

한 가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불러도 듣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마법을 써서 둥둥 떠다닌다. 그렇다. 칼리에르 공의 첫 아이는 토끼이자 마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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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나?”

그나마 라이킨이 대마법사의 가디언이라, 우여곡절 끝에 마법을 어느 정도는 아내의 힘을 빌려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뺨이 통통한 딸은 제 키보다 훨씬 큰 지도들을 둥둥 떠다니며 보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저건 암만 봐도 엄마랑 똑같다.

라이킨은 조심스럽게 딸을 아내와의 결합점을 이용해 슬슬 끌어당겼다. 앙증맞은 입술이 헤 벌어진 채 지도만 뚫어져라 보는 걸 보니 누가 업어가도 모를 지경으로 집중하는 게 분명했다.

그의 눈에 딸은 눈과 머리카락만 자신을 닮았지, 나머지는 아내를 닮은 걸로 보였다. 라이킨은 결국 아이를 허공에서 들어다 안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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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하길래 아빠 말은 듣지도 못했어?”

헉하고 깜짝 놀란 아이가 아빠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금발 머리카락 사이로 토끼 귀가 퐁퐁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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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빠란 걸 뒤늦게 안 율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가득 벌려 아빠를 꼭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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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율리아는 결코 얌전히 떠다니지 않는다. 무슨 옷을 입었든 허공에서 앞구르기를 해대며 멍하니 생각을 하는 통에 머리리본은 죄다 풀어지기 일쑤였다. 라이킨은 흐트러진 아이의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어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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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가 변해요.”

숨을 쌕쌕 내쉬면서 하는 말이 두서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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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서, 변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너무 높이 있어서…….”

한마디로 지도가 연도순으로 붙어 있는데 그게 너무 높이 있어서 결국 자그마한 레이디 칼리에르께서 직접 올라가셨다, 이거다.

열다섯 살 정도 되면 라이킨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작위 중에 니히르 백작위부터 물려받을 예정인 율리아는 아직 한참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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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지도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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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이 바뀌는 게 신기해요.”

하긴 급격하게 바뀌긴 했다. 이곳에 걸린 지도는 정확하게는 글래스턴, 발레시나스를 포함한 글래스턴 공국의 지도였다.

페르난데스 7세 시대까지 올센에 편입되어 있던 글래스턴 공국은 페르난데스 7세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을 때 독립해버렸다.

당연히 독립에는 대가가 따른다. 글래스턴 공작은 그의 지루하고 쓸데없는 특기인 전쟁을 선택했다. 발레시나스가 그의 아군이었고, 덕분에 올센은 글래스턴에 이어 발레시나스까지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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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커져요.”

‘커진다’라는 걸 팔을 하나 활짝 벌려서 표현한 율리아가 다시 아빠의 품에 파고들었다. 지금의 글래스턴 공국은 공국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수준으로 확장됐다. 칼리에르 ‘대공’은 왕을 자칭해도 우습지 않을 독립군주였고, 착실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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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커지고 있지.”

수백 년간 라이킨은 영토를 차근차근 확장했고, 내부는 아버지인 발레시나스 공작 오블리앙 공이 다졌다. 부자의 목적은 일치했다. 아이를 낳으려면 환경이 좋아야 하는 법이다. 어느 정도 공국의 모양이 완성된 후에야 대공 부부는 율리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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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모양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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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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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모양이 바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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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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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긴 왜 혼자 떨어져 있어요?”

율리아가 지도 한쪽을 가리켰다. 외따로 떨어진 영토와, 본디 글래스턴 공작령이던 곳까지 하나로 쭉 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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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합쳐졌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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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좋을 것 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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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으니까 쓸쓸할 거예요.”

아이다운 말에 라이킨은 픽 웃었다. 글쎄. 옛 엘펜하임의 본부이자 헬레인 왕궁이 있던 곳이 쓸쓸해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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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긴 가끔 엄마가 가시는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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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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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혼자 있으니까 엄마가 가끔 가시는 거야. 쓸쓸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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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아…….”

엄마가 가끔 가시는 곳이라니. 엄마가 자신을 두고 가는 건 싫었던 아이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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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서 도와줄 수 있는데.”

아이는 아빠에게 착 달라붙었다. 라이킨은 통통한 뺨에 입을 맞췄다. 앉혀놓고 머리를 다시 묶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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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거 좋겠다. 지도 더 볼래?”

대답이 더디게 나온다. 고민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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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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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율리아는 고개를 팍 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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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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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

회랑에 아이의 목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라이킨은 픽 웃으며 아이를 안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엉덩이를 들썩대는 딸을 데리고 바깥의 유리온실로 걸어가면 율리아는 온실 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보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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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릴래요!”

내려주면, 뽀르르 달려서 안쪽에 있는 테이블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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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할아버지!”

일단 우렁차게 부르고 냉큼 저를 가장 예뻐하는 할아버지에게 팔을 뻗으며 뛰어든다.

이 집에 근 천삼백 년 만에 태어난 아이는 어른들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했다. 할아버지에게 뽀뽀를 마구 하면 허허허 웃는 소리가 난다. 율리아는 자신을 꼭 안아주는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냉큼 앉았다.

사람들에겐 이 집안 어른들이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시대의 상징으로 보인다지만, 율리아는 그런 건 모른다. 할아버지의 무릎은 내 거, 아빠 무릎은 엄마 거, 그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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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뭘 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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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보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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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할아버지랑 가서 같이 볼까?”

율리아가 아기새처럼 짹짹대며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라이킨은 앉아 있던 소렐의 곁으로 얼른 다가왔다. 부부는 그냥 시선을 마주치고, 손을 마주 잡을 뿐이지 별말은 하지 않았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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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법 쪽은 걱정하지 말아요. 언제라도 왕국으로 자칭할 수 있도록 준비는 마쳤으니까. 그치, 그렇지, 우리 디엔? 고모가 다 해줬지요?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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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뺨이 포동포동한 둘째 디에나가 뭣도 모르고 고사리 같은 손을 펼쳐 고모의 곧은 코를 만지며 크게 대답했다.

샤를렌은 대답만 잘해도 예뻐 죽겠다며 손에 입을 쪽쪽 맞춰주고, 디에나가 환하게 웃으면 아예 껴안고 뺨을 비벼댔다.

첫째 딸이 친탁이라면 둘째 딸은 암만 봐도 외탁이다. 소렐을 똑 빼닮은 아이는, 그러나 재미있게도 뱀파이어였다.

그래서 자매를 본 사람들이 율리아나가 뱀파이어이고, 디에나가 헬레인 토끼인 줄로 착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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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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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저 대답 하나에 샤를렌은 또 좋아 죽어서 뒤로 넘어간다. 라이킨은 그쪽을 보며 픽 웃다가 품에 안고 있는 소렐의 손을 주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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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데?”

붓지도 않았고, 멀쩡한데. 소렐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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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래도 걱정이라서. 라이킨은 이제 제법 부푼 소렐의 배를 보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신혼을 너무 오래 가져서 그런가, 아이가 태어나는 게 기쁘면서도 늘 걱정이 앞섰다. 정작 소렐은 대마법사에 헬레인 토끼라, 체질적으로 출산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으니 무슨 걱정이냐고 하지만 라이킨은 늘 그녀를 걱정했다. 늘,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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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를 셋이나 가질 생각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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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듣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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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래놓고 낳으면 좋아 죽을 거면서 뭐래.”

한마디 하자마자 소렐과 샤를렌이 연달아 받아친다. 물론 라이킨은 소렐에게만 사과했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라곤 도움이 하나도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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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공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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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한테 사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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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물론 나오면 예뻐 죽을 거라는 건 알지만 아빠는 엄마가 너무 소중하고 걱정이야. 사실 널 가지자고 한 것도 엄마의 일방적인 주장이었거든. 아빠는 엄마한테 절대로 못 이겨. 이 집안의 규칙이야.

라이킨은 소렐의 배를 쓰다듬으며 조기교육을 잊지 않았다. 아가는 아빠의 말을 다 알아들을 거다. 엄마를 닮아 똑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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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건, 이를테면 이런 걸 두고나 하는 말이에요. 왕국을 세울 줄은 몰랐다던가.”

역시나 그의 소중한 공주님은 똑똑했다. 라이킨은 웃으면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소렐은 요즘 부쩍 뺨에 살이 올라서 참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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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던 정세가 복잡하게 얽혀들어 독립을 하게 되고, 또 어쩌다 보니 헬레인 왕국까지 부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원래 알짜배기 땅을 가지고 있는 공국은 어디에 편입돼든, 아니면 스스로 왕국이 돼든 결정을 해야 하는 법이니까.

이 문제에 관해 소렐은 ‘굳이 헬레인이어야 하냐’고 반문했지만, 라이킨은 완강했다. 그는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 여왕의 부군이라면 환장하게 좋지만. 전 세계에 삼백 년이 넘도록 대마법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소렐이라면 여왕 노릇은 얼마든지 잘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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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몰랐어도 헬레인 토끼들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 네가 예언을 들어놓고 잊은 건 아니냐?”

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로렌스가 물었다. 헬레인 왕국이 다시 이어진다는 걸 그 현명하고 정확한 예언을 하는 토끼들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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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중요한 예언을 제게 말해줄 리가 없지요. 왕궁에 갈 때마다 갑자기 걷어차이지 않으려고 애쓰기 바빴다고요.”

잘못 맞았다간 그대로 뼈가 부러진다. 헬레인 토끼들은 대단히 사나웠다. 그래봤자 소중한 공주님이 하자는 대로 가족 계획까지 충실하게 따라가는데 좀 봐주면 안 되는 거였나? 라이킨은 그때 고모와 놀다가 열심히 걸어와서 그에게 꽃반지를 보여주는 디에나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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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거!”

그였다면 예언이고 나발이고 일단 총으로 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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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주는 거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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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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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그럼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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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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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엄마한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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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렐이 웃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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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엄마한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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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는 아빠가 엄마한테 주는 거니까!”

대답은 정작 옆에 있던 율리아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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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언니 말이 맞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에 라이킨은 얼른 어설프게 만든 꽃반지를 소렐의 손가락에 걸어주었다. 그러자 디에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짝짝 쳤다. 소렐은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를 꼭 껴안았다. 좋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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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소중한 반지인걸. 고마워, 디엔.”

엄마가 뺨에 키스를 해주면,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기대에 찬 눈으로 아빠에게도 다가와서 뺨을 얼른 내민다. 아빠가 해주기도 전에 율리아가 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뛰어 내려오는 건 이젠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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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뽀뽀! 엄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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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받고, 아빠한테 받고, 고모한테 받고, 할아버지한테 받고, 두 녀석이 나란히 순서를 거쳐야 당연하다는 듯 다시 고모와 할아버지 무릎 위에 착 앉았다.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들은 온순하게 앉아 어른들이 읽어주는 동화책을 얌전히 듣다가, 또 정신없이 온실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어지질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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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그건 아니에요. 계속 우리가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엄격하게 제한해야죠.”

아이들이 다 자는 것을 확인한 밤, 소렐은 고개를 흔들며 침대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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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 녀석들은 이미 조랑말 하나씩 다 받았는데요. 아버지는 따로 작위를 더 승계하실 것 같고.”

칼리에르 공과 오블리앙 공, 두 대공이 가지고 있는 작위는 도합 열여섯 개가 넘는다. 딸린 영지도 그만큼에 재산도 어마어마하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녀들을 위해 이건 율리아 거, 이건 디엔 거, 이미 하나하나 골라놓으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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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라이킨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니히르 백작위를 따로 빼놓은 걸 내가 모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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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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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위에 오르면 바로 공작위도 만들어서 주자고 성화 부릴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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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적장녀면 당연히 공작이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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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은 안 하네.”

키득키득 웃던 소렐이 편안하게 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라이킨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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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러니까, 삼백 년쯤 같이 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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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공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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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을 세울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정치적 상황이란 건 늘 마음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세상이 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거대한 힘이 왕족과 결합한데다 독립한 대공까지 있으니 아무리 소렐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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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제가 계속 다스리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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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싫은 건 아니란 거 알면서.”

소렐은 중얼거리면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지난 삼백 년간 그녀도 배워온 게 있었고, 또 거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이젠 익숙해졌다.

하긴 대공국까지 되어버렸는데 왕국은 또 못할 게 뭔가. 이미 대공국은 공국이라고만 하기엔 덩치가 지나치게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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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삼백 년 만에 이렇게 되다니, 앞으로 또 뭐가 있을지 상상도 안 되네요. 나랑 사는 거 재미있었어요?”

소렐의 질문에 라이킨은 무슨 그런 질문이 있냐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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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재미로 사는 건 아니잖습니까. 재미는 순간이고, 함께 행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라이킨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만큼 소렐 역시 그에게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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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공주님과 함께 한 시간이 제가 혼자 보낸 시간보다 훨씬 더 즐거웠고요.”

그는 그녀의 깨끗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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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산실 앞에서 세 번씩이나 덜덜 떨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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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헬레인 토끼고, 출산은 나한테 그리 힘든 게 아니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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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지요.”

라이킨은 이마를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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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 큰 기쁨을 만나고요.”

소렐을 만나서 무척 부드러워진 라이킨이 아이들을 낳자 부드럽다 못해 사람이 바뀐 지경이라는 건 공작저에 있는 모두가 다 알았다.

저래놓고 도발해오는 적들과 전쟁을 치를 때마다 승리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지만, 돌아오면 아내를 몹시 사랑하는 남편이자 다정한 아빠였다. 소렐의 말에 순식간에 표정이 풀어지는 것만 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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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더 큰 기쁨.”

그 기쁨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존재를 향해 그는 몸을 기울였다. 잠자리에 누워서 내일을 기대하는 삶은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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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공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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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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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게 다.”

전부 다 그녀가 가져다준 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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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고마워요.”

소렐은 생긋 웃은 뒤 그의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 내일도 무척 행복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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