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Epilogue
(17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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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Epilogue
2022.04.16.
칼리에르 공이 공비와 만난 지 1년 만에 올린 결혼식은 원래 생각대로 조촐하지도, 또 간단하지도 않았지만 훨씬 더 즐겁고 행복했다.
초대받은 이들은 성심성의껏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초대에 응했다. 선별된 하객의 수는 아주 적었지만, 연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결혼식이었다. 오직 축복하고, 또 축하하기 위한 자리라 로렌스도 말은 길게 하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 산 늙은이의 말이라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지만, 사실 남이 해주는 말은 전혀 소용이 없단다.”
그는 손을 마주 잡은 아들 부부를 보며 웃었다.
“초심을 잃지 말라고들 하지만, 함께 겪어나가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 더 값질 수 있어. 특히 너희 둘은 지난 1년간 소중한 경험을 함께 쌓았으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생각한다.”
소중하다 못해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린 끔찍한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겨냈고, 이겨냈기에 더 가까워졌다.
“그저 서로에게 감사하렴. 나도 너희가 맺어져서 무척 감사하고, 고맙단다.”
결혼식 크기에 비해 말도 안 되게 길게 늘어뜨린 드레스와 베일에 준보석이 박혀 반짝거렸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규모의 결혼식에서나 등장할 법한 신부의 드레스였지만, 그게 시아버지의 사랑이라고 주장한 로렌스는 아주 큰 일을 해치운 표정이었다.
발레시나스 산 와인 창고를 열어젖혔고, 며느리에게는 결혼식 선물이라며 또 엄청난 규모의 증여가 이어졌다.
“공작합하께서 아주 기분이 좋아 보시는데요.”
기꺼이 초대에 응한 사람 중 하나인 조슈아가 에벌린에게 소곤거렸다.
“안 그래도 마음에 걸린 일이셨는데 이제라도 제대로 결혼식을 올린 거니까요. 옛날 분이시잖아요. 내색은 않으셨지만, 교수님이 느닷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공주님을 모셔온 걸 아주 못마땅해하셨어요.”
그건 평소 예법을 칼같이 지키던 라이킨이 저지른 일 중 가장 파격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흠, 그런 점은 마스터께서 합하를 그대로 닮으셨군요.”
“암요. 빼다가 박았지요.”
에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함께 지낸 시간이 짧다 해도 부자지간은 부자지간. 어째 기분이 좋아서 웃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그리고 에벌린은 지금 라이킨이 소렐을 보는 눈이, 먼 옛날 로렌스 오블리앙 공이 자신의 아내를 보던 눈과 똑같다는 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똑같이 애정이 가득했지만 전자는 파국이 예정되어 있었고, 후자는 모든 걸 극복했다. 그저 사랑은 비슷할 뿐이다.
“……오래 살길 참 잘했지요. 이런 날도 오고.”
“예. 그러길 잘했지요. 그건 그렇고 송어찜이 기가 막히네요, 부인.”
“입맛에 맞나요? 아주 신선한 걸 골라서 오늘 새벽부터 부지런히 요리했답니다.”
호호호호, 에벌린이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부드러운 선율에 실려 흘러갔다.
“라이킨, 라이킨.”
소렐은 남들이 보지 않을 때 그의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예, 공주님.”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남편의 눈이 커진 걸 보자마자 웃었다. 놀랄 줄 알았다. 그러곤 좋아하겠지. 아, 좋아한다.
“저도요, 공주님.”
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시작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소렐은 그런 건 의미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함께 겪어서 애정은 견고해지고, 마음은 깊어졌다.
“저도요.”
라이킨은 연신 웃기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또 웃었다. 소렐은 그를 웃게 하는 데 성공해서 뿌듯했다. 1년 만에 올리는 결혼식이라면 서운할지도 모르겠지만, 신부는 내내 방싯방싯 행복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내 선택은 앞으로도 쭉 라이킨일 거예요.”
의문이 있었고, 정말 그가 최선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던 때가 있었기에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스스럼없이 장담할 수 있었다. 끝까지 단 한 사람, 라이킨일 것이다. 웃으면서 한 말에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울어요?”
“……안 웁니다.”
떨리는 목소리에 소렐은 응,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울지 않는다면 울지 않는 거지.
“있잖아요, 보통 결혼선물은 주고받는다고 하잖아요?”
“그건 다른 집안 이야기고, 우리 집안은 신랑이 신부에게만 합니다.”
라이킨은 울컥 올라왔던 것을 간신히 삼키고 차분히 대답했다.
“음, 그래도 나는 라이킨한테 뭔가 해주고 싶어요. 받기만 잔뜩 받은 것 같아서. 뭐 가지고 싶은 거나, 나한테 바라는 거 없어요? 뭐든 해줄게요.”
헬레인 왕조의 유산 상속자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주 많았다. 아니, 많은 게 아니라 무궁무진했다.
대마법사니까 가장 귀한 물건을 찾아다 줄 수도 있었고, 대단한 약을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 라이킨에게 어울리는 검을 하나 구해다가 신비한 힘이 서리게 할 수도 있었다. 뭐든 해줄 수 있었다. 아니, 뭐든 해주고 싶었다.
“바라는 거…….”
응! 뭐든 해줄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소렐을 물끄러미 보던 라이킨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네!”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 지나치게 대마법사의 책임감에 매몰되실 필요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 소렐이 지난 바실리스크 일을 잊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그랬듯, 그녀도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늘 그래야만 했다. 설령 그러지 못하는 때가 기어이 온다 해도.
“제가 바라는 대로 해주십시오. 아시겠지요?”
소렐은 할 말이 조금 있는 눈치였지만, 강렬한 남편의 눈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그는 깨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을 어루만지듯 소렐을 살살 쓸었다.
“건강하세요, 공주님.”
지금도 흡수해놓은 바실리스크의 힘을 죄다 아내에게 보내고 있는 남자는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듯 꾹꾹 눌러가며 강조했다.
“저랑 한 만 년만 함께 사시면 되는 겁니다. 쉽지요?”
펠릭스 이드리스는 아내와 자식을 지키다가 너무 빨리 죽었다. 메리 공주는 나라가 멸망하는 꼴을 계속 본 탓인지, 헬레인 토끼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단 하나만 남긴 채 요절했다.
소렐은 그러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만들지도 않을 거지만, 불안과 공포는 늘 이유 없이 남아 있다.
“쉬워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쉬운데, 그거면 되는 거예요?”
“예, 충분합니다.”
“결혼선물인데?”
“……예, 결혼이라서.”
결혼식에서 하는 서약이라서.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어렵고, 또 귀한 선물이지요. 공주님도 제게 같은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까?”
오랜 시간, 함께 오순도순 늙어가다가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하길.
“맞아요.”
“그런데 왜 눈이 슬퍼지실까요, 왜 우세요, 공주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금세 울먹울먹한 소렐을 달랬다.
“나 꼭 라이킨이랑 할머니 될 때까지 같이 살 거예요, 절대로 혼자 살 거나 먼저 죽지 않을 거야.”
“예, 압니다.”
전투라곤 겪어본 적이 없는 공주님은 혼자 싸워야 했을 때 무척 무서웠다. 무서웠고, 영영 남편을 잃은 줄 알았지만, 그래도 이미 잃어버렸다 해도 그를 믿었다. 차라리 나란히 파멸한다 해도 끝까지 함께 있을 거다.
“울지 마세요, 공주님. 행복한 날에 왜 우십니까.”
“안 울어요!”
소렐은 그를 황급히 올려다보며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썼다. 자,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다른 생각.
오늘은 즐거운 결혼식이고, 라이킨은 이젠 바실리스크를 완전히 흡수했으니 더 강해진 채로 그녀와 함께 살아갈 거다. 재미있고 행복하며, 또 평범한 일을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사실 좀 더 거창하고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걸 해주고 싶었는데.”
“거창하고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건 도대체 뭘까요.”
라이킨은 웃어버렸다.
“하긴 라이킨은 그런 건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까…….”
“의미가 없습니다, 공주님. 공주님께서 오셔서 저와 함께 그런 것들을 누리시고, 기뻐해주셔야 의미가 있는 거지요.”
어머니가 죽고 나서 겉으로는 자유로워졌지만, 거대한 공작저며 수많은 별장을 다 버려두고 타운하우스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던 라이킨은 그게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알았다.
타운하우스에 용감하면서도 경계를 많이 하는 토끼가 들어온 후에나 의미가 생겼다. 관리인들에게 맡기고 내버려두었던 저택이 갑자기 쓸모 있어졌다.
소렐에게 더 편안한 자리,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부와 행복을 안겨주고 싶었으니까.
“자, 어서들 와요! 부부는 가서 옷을 갈아입어요. 지금 그 드레스 안 벗으면 다음 드레스는 입지 못할지도 몰라요, 공주님. 아버지가 이번에는 50년산 샴페인을 여셨다고요!”
라이킨이 오늘을 위해 몇 벌의 드레스를 맞췄는지 잘 알고 있는 샤를렌이 다가와서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글래스턴 공작저에서 조그마하게, 하지만 어마어마한 상을 차려놓고 열리는 즐거운 연회의 시작이다.
“내가 도와줄게요.”
“아니, 됐어. 공주님은 내가 모시고 가지.”
라이킨은 샤를렌의 도움을 거절하고 소렐의 허리를 잡았다. 아낌없이 떨어트린 베일과 드레스자락이 허공에 살짝 떠올랐다.
마법인가? 아니, 공주님이 웃으시는 걸 보니 아니다. 샤를렌은 저 드레스와 베일을 챙기는 것마저 소렐이 하지 못하게 할 오빠놈이라는 걸 아주 잘 알았다.
‘보나마나 바실리스크의 힘을 대충 응용한 거겠지.’
꼭 저런 데에 힘을 쓴단 말이야. 오늘 충실하게 신부 들러리 노릇을 하고는 있지만, 신랑이 너무 극성이라 상대적으로 할 일이 없는 샤를렌은 픽 웃으며 본격적으로 술이 돌고 있는 자리로 갔다.
*
“공주님?”
“응?”
“밖에선 다들 신이 난 것 같은데 우리는 좀 늦게 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연회용 드레스로 갈아입던 소렐은 말문이 막혔다. 저 노골적인 남편의 말은 가정이나 추측도 아니고 단정이었다.
“공작전하.”
“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다들 이미 취해서 제정신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라이킨의 희망사항일 뿐이지요. 반 이상이 뱀파이어들이라 아주 멀쩡해요. 매우 멀쩡하고 취하지도 않아요. 괜찮아, 고마워. 이제 됐어.”
하녀들을 내보낸 소렐은 할 일이 없어서 이상한 말만 하는 남편을 불렀다.
“와서 이거나 좀 도와줘요.”
창밖으로 아래를 내다보며 커프스를 채우던 라이킨은 씩 웃었다. 아, 저 목소리만 들리는 가림막 너머로 들어가서 도와달라는 거야 언제나 환영이다.
“기꺼이.”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요! 진짜 바쁘니까 얼른 가서…….”
쫑알거리던 도톰한 입술이 뱀파이어에게 그대로 먹혔다. 뒤엉키는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소렐은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둘렀다. 바깥에서 신나게 연주하는 바이올린이며 첼로, 샤를렌이 기분이 좋아서 두드리는 피아노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있잖아요.”
소렐은 한참 만에 라이킨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예.”
그는 짧게 대답하며 연신 입을 맞췄다.
“우리 조금 늦어도 상관없겠죠……?”
그러니까 좀 더 시간을 보내도 괜찮겠지?
“이미 조금 늦었습니다.”
“응?”
“조금만 있으면 에벌린이 체면 불고하고 올라와서 문을 두드릴 겁니다.”
라이킨의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했다.
“어, 나 리본 더 묶어야 하는…….”
“다 묶었습니다.”
“응?”
뒤를 돌아보니 드레스도 정리가 다 되어 있었고, 완전히 다 입혀졌다. 아주 깔끔했다.
“입술만.”
그는 입술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소렐은 얼른 거울을 보며 황급히 수습했다. 그런 뒤에 조금 수줍게 그를 향해 돌아섰다.
“나머지는 이따가 밤에.”
“응, 이따가 밤에.”
남편의 말을 따라 한 신부가 또 방긋 웃자, 라이킨은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를 또 꽉 끌어안았다.
전혀 평범하지 않은 길을, 아주 힘들여 지나오면서 마침내 맺어진 이 기적 같은 일에 대한 감상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무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쌓여가는 세월은 또 다른 힘과 애정을 함께 만들어낼 것이고, 그건 뱀파이어가 지나온 어떤 시간보다 더 값질 것이다.
그가 앞으로 맞이할 모든 시간은 더 이상 회색으로 희뿌옇게 물든 의미 없고 무가치하며 허무한 어떤 것이 아니다.
“가실까요, 공주님?”
손을 내밀면 당연히 그 위에 손을 얹고, 아예 안아 올리면 곧장 그의 목에 팔을 두른다.
“이 드레스도 잘 어울리십니다.”
“고마워요. 내가 고른 건데 특별히 잘 어울린다고 하니……, 으, 부끄러워.”
으쓱거리며 잘 말하다가 결국 얼굴이 빨개져서 그를 꼭 안아버리는 소렐은 여전하다.
그녀의 반응에 큰 소리로 즐겁게 웃으며 걸어가는 라이킨도 똑같았다.
문을 열면 훈훈하고 따뜻한 공기가 환영한다. 정원사가 정성을 들여 가꾼 정원은 알록달록한 봄꽃이 가득 피어났다. 마치 소렐을 데리러 시골로 가던 그날 같았다.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마저 기분이 좋은 날이다.
“어서 와요!”
그들이 등장하면 환호소리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작년의 봄날은 홀로 외로이, 아주 고요하게 보냈던 소렐의 주위에 어느새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졌다. 혼자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하는 게 아니다.
“샤를렌 쟤가 피아노를 치는 건 또 오랜만에 보네요, 아버지.”
“아주 기분이 좋을 때 아니면 절대 안 치지.”
느긋하게 앉아서 피아노를 치는 딸을 보는 로렌스도, 제멋대로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사비나와 에벌린도, 신나게 와인마개를 따느라 여념이 없는 조슈아를 비롯한 라이킨의 수하들도 모두가 웃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햇살이 너무 밝고 환해서 눈이 시릴 정도였다. 시려서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공주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왔다.
“예.”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안다는 눈으로, 라이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렐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웃으며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실로 화창한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