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의무와 믿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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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의무와 믿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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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의무와 믿음 (8)
2022.04.13.
다시 한번 대마법사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고, 또 그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소렐 이드리스는 칼리에르 공비이자 헬레인 공주라기 보단 대마법사로 많이 불렸다.
소렐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고, 라이킨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수많은 시신을 전부 처리하는 작업을 소렐이 하는 게 몹시 못마땅하고 싫었으나, 이젠 다 끝나서 모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사이 한껏 만연한 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전하한테?”
비밀이 많고, 뒤에서 뭘 조종하는지 전혀 모르지만 뭔가 하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한 글래스턴 공작은 아내에게만큼은 모든 걸 다 말했다.
“왜 그랬어요?”
아름답게 피어오른 히아신스와 수선화를 보고 있던 소렐이 남편에게 물었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왕세자가 그럴 가치가 있나?
“……사람은 경고를 들었을 때와 듣지 않았을 때의 행동이 어쨌든 차이 나기 마련이니까요.”
“아하.”
“예.”
“경고한 걸 뭐라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예.”
소렐 앞으로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보며 편지가 날아왔다. 흑마법사가 우리 지역에 있는 것 같다, 집에 걸린 사술을 풀어달라, 우리 어머니가 미친 것 같다, 내 앞날에 대해 예언해달라 등등, 라이킨이 보기엔 온갖 쓸데없이 성가신 것들이다.
대마법사가 그러라고 있는 존재인 줄 아나. 그런 것들은 대마법사의 비서까지 자처하는 라이킨이 전부 다 벽난로에 집어넣어 활활 불태워버렸다.
“……알로인에 가실 겁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태울 수가 없는 편지가 있다. 대마법사의 의무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내용을 가진 편지라면, 마땅히 대마법사가 읽고 답해야 했다.
“그걸 신경 쓰고 있었구나.”
소렐이 환하게 웃었다.
“……아무리 봐도 헛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아서.”
“이미 다 조사해봤겠죠?”
“예. 알로인에서 붉은 안개가 끼고 있는 건 확실하답니다.”
하지만 알로인은 올센이 아니라 말 그대로 ‘외국’이지. 라이킨은 턱을 괴고 소렐이 꽃향기를 맡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주님께서는 좀 더 쉬셔야 하는데 말이다.
저렇게 봄도 즐기고, 그와 극장에 놀러도 가고, 손을 꼭 잡고 길거리를 걷다 질 좋은 가죽 제품과 신선한 꽃을 사는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해주니 고마워요.”
라이킨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그러곤 대뜸 뺨을 내밀었다. 소렐은 당연하다는 듯 입을 맞췄다.
“당연히 그거라도 해야지요. 공주님께서는 이미 바쁘시니까.”
그 말에 조금 불만이 섞인 것 같아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빠요? 내가?”
“편지를 읽자마자 서재에 틀어박히시니, 제가 뭐 때문에 저러시나, 하고 알아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보다 책이 더 공주님 얼굴을 많이 보겠습니다.”
슬쩍 쳐다보던 소렐은 이젠 관록이 붙어서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라이킨이 하는 말이 반은 농담이란 걸 알았다.
“아침에 날 좀 더 일찍 놔주기만 해도 내가 일을 훨씬 더 빨리 끝마칠 텐데.”
“그건…….”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힘들지요?”
“예. 힘듭니다.”
남편은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공주님은 아침에 더 예쁘십니다.”
“어, 이상하다. 아침보다는 지금이 더 예쁠 텐데.”
눈앞까지 바짝 다가와서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는데, 그가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라이킨은 일단 키스부터 했다. 너무 떨려서 숨 가빠 하면 약간의 틈을 주고, 또다시 한입 가득 삼켰다.
갓 피어난 꽃들 사이에서 몰래, 혹은 노골적으로 입을 맞췄다. 공작부부는 서로에게만 열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일도 게으르게 늘어지겠네.”
소렐은 그와 코를 맞대며 작게 투덜거렸다. 오늘도 아마 똑같을 거다.
“내일도 그러실 거고……, 매일매일 그러실 겁니다.”
굳이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아도, 그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꼭 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거나 아침을 먹으면서 함께 신문을 보기도 했다.
소렐은 아직까지도 남편이 어린 그녀를 아주 배려해주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곧. 아마 곧일 거다.
“신혼 기간은 한 오백 년 정도 가지는 게 좋겠습니다.”
“오백 년?”
“사실 천 년도 좋습니다.”
그는 말하는 사이사이 소렐의 뽀얀 얼굴에 닿는 대로 입맞춤을 점점이 뿌렸다.
공작저에서는 이미 익숙해진 광경이라 하녀든 시종이든 정원사든 알아서 피해 다녔다.
겨우 둘만의 시간을 오롯이 가지게 된 터라, 칼리에르 공은 원래도 공비전하와 함께 있을 때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요즘엔 아예 시간 감각을 상실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렇게나 길게?”
“공주님께서 지겹지 않으시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나는 지겹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신혼을 시작한 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작년부터 신혼이었잖아요?”
라이킨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닌가 보네. 소렐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그가 말을 하길 기다렸다.
“공주님.”
부르면 열심히 듣고 있다는 표정으로 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결혼할까요?”
*
“옘병…….”
같이 산 지가 근 1년인데 결혼식은 무슨, 옘병. 샤를렌의 중얼거림과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라이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빠 죽겠는 공주님 붙잡고 별…….”
“바쁘시니 얼른 해야지.”
“알로인 간다며?”
그런데 결혼식은 무슨. 외국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만 줄잡아 한 달은 걸릴 텐데, 무슨 결혼식 준비를 하나. 공주님이 피곤해서 또 녹초가 될 게 뻔했다.
저번 바실리스크 사건 때 소렐은 닷새 동안 푹 쉬기만 해야 했다. 그때 샤를렌은 아예 공작저에 머물면서 소렐이 반쯤 뜬 눈으로 복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걸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갔다 왔어. 손가락 하나면 바로 가는데 뭐 그렇게 시간이 걸린다고.”
라이킨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대답했다.
“벌써?”
“벌써.”
붉은 안개가 자욱하다기에 엄청나게 큰일인 줄 알았는데 별 거 아니었나 보다.
“……근데 웬 결혼식이야? 이제 와서?”
“이제 와서라도 해야지. 계속 못 해서 마음에 걸렸어. 남들 다했는데 우리 공주님은 안 하셨으니까.”
“그런 섬세한 것까지 신경 쓰는 줄 몰랐는데.”
“나도 그리 신경은 안 썼는데.”
아니, 처음에는 많이 무심했는데. 라이킨은 루겐버그 여사가 보낸 두터운 웨딩드레스 원단 모음집을 힘겹게 넘겼다. 그냥 데리고 와서 원하는 대로 학교에 보내주면 되겠거니, 안전하게만 해주면 어쨌든 성인이니까 알아서 하겠거니, 했다.
“공주님도 처음 하는 건 뭐든 다 좋아하시더라고.”
결혼반지도, 데뷔탕트도, 뭐든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안 해본 건 해보시게 하고 싶어.”
그것까지 놀릴 생각은 없었던 샤를렌은 색색의 드레스를 위한 카탈로그를 뒤적였다.
“그런데 너는 왜 그걸 보고 있어?”
“내가 신부 들러리 설 거니까.”
“……하객 없이 조용히 둘만 하려고 했는데.”
카탈로그 위로 여동생 특유의 오빠를 보는 한심한 눈빛이 쓱 올라왔다. 라이킨은 한숨을 쉬었다. 쟤 또 시작이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할 생각은 없어? 하객은 없어도 신부 들러리는 있어야 해. 내가 드레스라도 들어줘야지. 결혼선물도 줄 거야.”
“본격적인데?”
“아버지도 초대 안 했다간 두고두고 섭섭해하실걸? 버젓이 가족이 있는데 둘이서만 한다는 건 없어. 그 말에 공주님도 동의했다면 모를까.”
“너 신났구나.”
“당연하지! 염병이지만, 우리 집에서 처음 있는 결혼식이잖아. 처음부터 제대로 했으면 좋았지.”
라이킨은 그가 끼고 있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공주님은 뭐라셔?”
대답은 느닷없이 열린 문 밖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긴 약혼 기간을 가졌던 것 같아요!”
우와, 샤를렌이다. 요즘 부쩍 기분이 좋아진 소렐이 달려와서 샤를렌을 꼭 끌어안았다.
“공주님 왔어요? 오늘 기분 좋아요?”
“기분 좋아요!”
“아우, 우리 공주님 그냥 저 한심이랑 결혼하지 말고 나랑 살까요? 이렇게 예쁜데 무슨 결혼이야…….”
아하하하하, 샤를렌의 품 안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났다. 이미 소렐의 기분이 좋은 게 결혼식 준비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라이킨은 원단만 계속 들여다보았다.
저러다가도 소렐은 샤를렌을 놔주고 라이킨에게 와서 그를 꼭 끌어안는다. 결국엔 그에게 오게 되어 있다.
“예쁜 거 있어요?”
이거 봐라. 곧장 와서 답삭 안기지. 라이킨은 웃었다.
“다 예뻐서 못 고르겠는데요, 공주님.”
소렐이 알로인 일을 마무리하는 편지 몇 통을 쓰는 사이, 대신 웨딩드레스 원단을 골라주기로 약속했지만 그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다 예쁜 건 둘째치고, 소렐에게 무엇을 갖다 대도 어울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거 예쁘다.”
“이거?”
“네. 어, 그 옆도 예쁘네. 어? 이것도 예쁘네?”
어쩌지? 소렐은 신이 나서 원단 모음집을 열심히 넘겨보다가 나중엔 몹시 난감해져서 두 뱀파이어를 쳐다보았다. 물론 대답은 언제나 성실한 남편이 해주었다.
“……결혼식을 한 오십 번 하면 될까요?”
그럼 우리 공주님 입고 싶으신 거 다 입을 수 있으니까 되는 거지.
결혼식에 대한 대단히 자본가다운 태도에 샤를렌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을 호출했다.
“누구한테 뭘 바래……, 에벌린, 이대로 놔두면 오빠가 웨딩드레스 백 벌을 주문할 것 같아요! 와서 좀 도와줄래요?”
“아니, 결혼반지는 그렇게 고르고 고르시더니 드레스는 왜 그러신대요?”
이젠 에벌린까지 들어와서 응접실이 슬슬 북적이기 시작했다.
“결혼반지는 일생에 한 번이지만 드레스야…….”
몇 벌이나 갈아입는 게 뭐 어때서? 하지만 에벌린은 라이킨의 말허리를 딱 자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교수님. 웨딩드레스도 일생에 딱 한 번, 그래서 한 번만 입고 물려주는 소중한 물건이에요. 베일은 좀 튼튼한 걸로 해두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태어날 아가씨에게 드레스는 어찌어찌 물려준다지만, 베일은 가볍고 연약해서 잘 망가지거든요.”
“요즘 나오는 베일은 좀 괜찮지 않아요?”
“그건 그렇긴 하죠, 변호사님. 한 삼백 년 전에 만들어뒀던 건 다 삭았는데 요즘엔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택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족만 참석하는 조촐한 결혼식이라 해도 평생 함께할 것을 다시 맹세하는 신성한 자리이자, 칼리에르 공과 헬레인 공주의 결혼식이다. 그냥 넘어갈 수가 있나!
에벌린도 두 손을 걷어붙였고, 샤를렌은 당연하고, 로렌스마저 며느리의 드레스 길이와 베일 길이는 시아버지의 사랑 크기라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루겐버그 여사가 밥 먹듯이 드나드는 저택 한복판에서 소렐의 손을 잡고 앉은 라이킨이 웃었다.
“정신없네요.”
“그러게요. 재미있어요.”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여동생이 재미있겠다며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고, 에벌린이 아예 결혼식 오찬과 만찬, 중간에 먹을 간식 메뉴까지 짤 줄이야. 어째 점점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 같다.
“나는 큰 게 좋아요. 다들 가까이 지내는 친한 식구들이니까, 함께 즐거운 것도 좋고……. 에벌린은 라이킨이 공작위에 어울리지 않게 검소한 거라고 하던데요.”
“뭐……. 공작저에 나름의 규율과 기강이 잡혀 있는 것만으로도 됐다고 생각합니다.”
공작저에서 소렐은 헬레인 공주이자 공작저의 주인인 공비. 모든 고용인이 그녀에게 깍듯하기만 하다면 그 이상 바랄 것도 없고, 공작의 체면을 운운하면서 더 큰 결혼식을 벌일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공주님, 말씀하셨던 ‘긴 약혼 기간’이란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아내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은 남자가 조용히 물었다.
“별 거 아니에요. 라이킨이 지금 결혼식을 열겠다고 하는 이유랑 똑같죠. 나도 우리가 만났던 처음엔 결혼식 같은 건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한다고 했으면 오히려 조금 싫었을 수도 있겠어요. 부담스러우니까.”
“……제가 그때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건 싫어서 올리지 않은 게 아닙니다.”
“알아요. 근데 난 싫었을 거라니까요. 모르는 아저씨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많이 낯설고 어색했다고요.”
아저씨라는 단어에 또 꽂혀서 잠시 침묵하고 있는 그의 손을 소렐이 양손으로 감싸고 토닥였다.
“결혼은 둘이서 평생 함께한다는 약속이잖아요. 함께 있어도 좋겠다. 아니,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서로 죽을 때까지 돌보겠다, 뭐 그런 거.”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도 하더군요.”
“그냥 내 생각이에요. 그리고 라이킨이랑 그래도 좋겠다고 생각이 든 건, 처음 만났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해서 지금까지 흘러왔다.
“언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의식을 잃었다가 겨울에 다시 눈 떴을 때. 계속 곁에 있고, 어딜 가든 쫓아다니는 거 보고, 아, 못 떼어내겠구나, 하고 실감했어요. ……그리고 그때 내가 깨어날 때까지 한참 기다려준 거니까, 라이킨 말고는 아무도 날 기다려주지 않겠구나, 싶었고. 그러니까 결혼해야지.”
이런 사람이랑 결혼해야지.
“제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이군요.”
늘 그렇게 생각했지만, 또 새삼스럽게 확인받아 으쓱해진 라이킨이 웃었다.
“지겨워도 저와 함께 계시는 겁니다.”
소렐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지겹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