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 의무와 믿음 (7) (177/181)


177. 의무와 믿음 (7)
2022.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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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넨 후작에 관한 일을 수습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페르난데스 7세가 직접 파견한 조사관들은 지역 관리들의 안내를 받아 그 빽빽한 삼나무 숲부터 완전히 불타버린 슈토넨 후작의 저택까지 확인했다.

슈토넨 후작의 은혜를 입은 슈토넨 토박이이자 관리들은 반은 충격이고, 나머지 반은 엔버네스에서 파견된 모든 이들을 경계했다. 자칫 슈토넨이 흑마법사들의 근거지로 찍힐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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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에 땅을 판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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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다 녹고 있는데 겨울은 무슨, 팝시다.”

그래도 아직은 추워서, 삽이 아니라 모닥불부터 잔뜩 피워서 땅을 녹인 뒤 곡괭이부터 대야 했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흑마법사 시신 수십 구와, 슈토넨 후작의 짓밟힌 시신 곁에 있는 또 다른 흑마법사 하나의 시신으로 증거는 충분했다. 그건 페르난데스 7세도 동의하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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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하군.”

흑마법사들의 시신, 그리고 선명하게 그려진 마법진은 너무나 강력했다. 모든 사람이 혐오할 일이다.

그에 비하면 ‘흑마법사들이 사술을 부렸을 수도 있는’이라는 단서가 붙는 반역에 대한 내용과 칼리에르 공의 친필서명은 지나치게 약했다.

더구나 슈토넨 후작은 죽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누가 봐도 노련한 오블리앙 공과 칼리에르 공이 알아서 찜 쪄 먹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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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해.”

충분히 지금 왕세자가 즉위 전부터 저들에게 책이 잡힐 상황이었다.

페르난데스 7세는 한숨을 쉬었다. 흑마법사라는 어마어마한 증거 앞에서 안 그래도 다루기 힘든 칼리에르 공에게 반역죄를 묻기가 난감했다. 증거는 흑마법사와 결탁한 슈토넨 후작으로 인해 신빙성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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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넨 후작은 대마법사와 칼리에르 공이 처리했고, 성기사 카메론 셀레스트와 남은 엘펜하임의 신관 하나가 흑마법을 운용한 흔적을……, 슈토넨 후작의 시신 주변부터 상당히 광범위한 단위로 찾아냈다, 라.”

국왕은 돋보기를 들어 보안국장이 올린 보고서를 천천히 읽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흑마법이라는 천인공노할 짓만 제외하고 보면, 칼리에르 공은 제 손으로 정적인 슈토넨 후작을 제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상황이 칼리에르 공에게 아주 편리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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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넨 후작이 가지고 온 증거란 건 즉시 폐기하게. 거기 흑마법이 사용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주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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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의심스럽지만, 충분히 의심스럽지만 흑마법을 무시할 수는 없다. 더구나 흑마법사는 슈토넨 후작이 칼리에르 공을 고발하기도 전, 사냥대회에서부터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때도 슈토넨 후작이 손을 썼겠지. 페르난데스 7세는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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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라이오넬에게는 좋지 않은 시작일 텐데…….’

슈토넨 후작이 왕세자 라이오넬에게 증거를 건넸다는 걸 칼리에르 공이 알까? 페르난데스 7세는 그 사실을 차기 왕위계승자를 위해 영원히 은폐하기로 마음먹었다. 보안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모쪼록 왕세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저 뱀파이어들과 마찰이 없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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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넨 후작 건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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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 처리해야지.”

한때 나라를 지킨 영웅이기도 했고,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던 원로가 갑자기 죽은 일을 그냥 묻을 수는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흑마법사는 용납할 수가 없다.

엘펜하임 성기사 카메론 셀레스트의 증언까지 완성되었는데, 묵과할 수 없었다. 죽은 뱀파이어라도 확실하게 법대로 처리하는 게 모든 이에게 확실하고 분명하게 각인되길 바랄 뿐이다.

뱀파이어든 누구든 사람을 제물로 삼는 흑마법은 용서할 수 없으며, 나아가 뱀파이어라도 국법과 왕권에 의해 심판받는다는 지엄한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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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위를 몰수하고, 빼돌린 재산을 모조리 국가에 귀속시키며, 슈토넨 전체를 다시 왕의 관할 하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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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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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넨 후작위를 라이오넬에게 물려줘야겠군. 아주 쓸 만한 영지이니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될 거야. 흑마법사 건이야 대마법사에게 정화해달라고 부탁하면 그만 아닌가.’

뱀파이어가 잘 관리해온 알짜배기 영지가 통째로 왕에게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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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대마법사도 그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지. 마땅한 의무니까 말이야. 그럼 슈토넨에는 아무 일 없는 거군.’

국왕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이 사건으로 그도 거대한 땅과 그에 따르는 막대한 세금을 더 얻어냈다.

그래, 이 왕국은 오래도록 존속해왔고, 페르난데스 7세는 왕권을 틀어쥔 국왕이다. 그 누구도 감히 왕권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충분히 빛나는 왕관을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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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아마 이 일로 충분한 이득을 얻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칼리에르 공비는 당연히 슈토넨 후작의 불탄 저택을 전부 정화하겠다고 승낙했다.

소렐이 바실리스크 때문에 고생을 한 뒤 일을 또 해야 한다는 건 라이킨에게 지극히 불만스러운 일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대마법사가 해야 할 책무를 이행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앞으로도 대마법사와 연관되는 정치적, 군사적 문제들을 충실히 치워내는 일까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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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로렌스는 소렐이 불탄 저택 아래 묻힌 흑마법사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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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는 그저 왕세자만 지키시고 싶을 뿐일 테니까.”

모든 부모의 약점은 자식이기도 하다. 로렌스 역시 부모였기에 아주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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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야 무사히 해야겠지요.”

그리고 그편이 라이킨에게 더 편했다. 성격이 어떤지 검증되지도 않고 확인하지도 못한 새로운 계승자 대신, 그를 상대로 이미 여러 번 실패를 맛본 계승자가 더 다루기 편하다. 로렌스는 아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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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왕세자와 만나겠지?”

라이킨은 평소 하듯, 대답 대신 씩 웃는 것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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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연적이 싫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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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 축에도 못 끼는 것 같은데.”

소렐은 관심이 없고, 왕세자는 그저 지극히 왕세자라는 지위에 오른 자답게 그녀의 배경과 힘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연심은 들어 있지 않고, 상대도 되지 않으니 연적은 아니지 않냐는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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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공주님에게 눈독 들이는 놈들은 다 싫습니다.”

그래서 루벤 실베스터도 싫었다. 소렐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놈이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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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날 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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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렇지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다, 정화를 열심히 하고 있는 소렐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잘하고 계시다고, 여긴 걱정하지 마시라는 웃음이다.

물론 라이킨은 왕세자를 만날 거다.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라 해도 왕세자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다.

*

슈토넨 후작위가 추잡한 사술에 얽혀 결국 왕에게 돌아오고, 대마법사는 대마법사다운 행보를 하고 있다.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난 흑마법사 무리에 사람들이 경악했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대마법사가 지켜주겠지! 더구나 대마법사는 칼리에르 공비, 올센 사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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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서 칼리에르 공을 찾던데.”

보안국에서 마지막 절차를 다 마친 카메론 셀레스트가 폴리아나 그린 앞에서 웃었다.

폴리아나는 도대체 왜 라이킨이 그녀를 이 새끼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는 데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실수를 해왔는데도 왜 마스터는 그녀에게 또 기회를 주는 건가. 아니, 카메론 셀레스트는 이제 신경 쓸 가치도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폴리아나가 이놈에게 대단히 유감이 많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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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기로 한 거야, 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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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 올센 안에서는 네가 할 일이 없어.”

쓸데없는 말에는 대꾸해주지도 않는다. 폴리아나는 충실하게 전달할 말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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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께서는 엘펜하임 잔당에 대해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어. 본부를 신경 쓰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 이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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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야?”

이런 미친놈을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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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살던 것보다는 낫잖아. 저번에 봤던 것보다는 훨씬 행색이 괜찮은데. 당당하게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카메론은 뭐라 더 깐족거리려다가 관뒀다. 폴리아나를 필요 이상으로 긁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깐족거릴 것도 없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유부남을 넘보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일단 당당하게 다니는 게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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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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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또 만나면 안 되지.”

그때는 라이킨이 엘펜하임 잔당들마저 쓸어버리겠다고 결심했을 것이고, 그래서 적으로 만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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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또 만나, 폴린.”

카메론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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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게 잘 살다가 또 만나. 뱀파이어에게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라도 인간에게는 긴 시간 이후일 거야. 이 말 잘 기억해뒀다가 날 또 만나면 너무 박대하지는 말고.”

폴리아나는 빙긋 웃는 카메론을 물끄러미 보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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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도 지나치게 짧은 시간 후에 또 찾아올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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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술친구는 너밖에 없어서.”

언젠간 다시 만날 게 분명하다. 폴리아나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게 좀 짜증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는 라이킨과 소렐을 볼 때마다 예전의 감정이 자꾸만 되살아나서 더 씁쓸해지고 비참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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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같이 술을 먹어주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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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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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다음에.”

카메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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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말 제대로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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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혹시 내가 잊어버려도 틈만 나면 감시하면서 무섭게 할 거잖아?”

별로 무서워할 것도 아니면서 카메론은 그렇게 말했다. 폴리아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카메론 셀레스트가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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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시각, 모든 일을 다 끝내놓은 라이킨은 유유히 걸어갔다. 왕궁은 오늘도 겉보기에는 아주 평화롭다. 들려오는 소리도 거의 없었고, 널찍한 정원에는 어느새 새싹이 돋아났다. 그렇다. 어느새 봄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 계절이 온 것 같다고 농담을 하는 관리들의 목소리가 멀찍이 들린다. 관리들이 이쪽까지 오지는 않는다. 그저 뱀파이어의 청력이 예민할 뿐이다. 이곳은 왕궁에서도 아주 지체 높은 이들이 오고 가는 복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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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왕세자 전하.”

라이킨은 겉으로는 정중하게 마주 오는 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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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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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에르 공. 요즘 어떻습니까?”

이 건방진 애송이. 왕세자보다 훨씬 큰 라이킨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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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쁩니다. 전하께서는 요즘 어떠신지?”

라이킨은 왕세자 앞에서 겸양을 떨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건 왕세자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늙어 죽기까지 그럴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공작을 상대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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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만저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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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직은 한가하시겠지요. 준비를 하고 계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너는 아직 정치를 시작하지 못한 애송이이고, 너 빼고 모든 사람은 정치를 하고 있는 현역이라 바빠 죽겠다, 이건가? 왕세자 라이오넬의 귀에는 어쩐지 그렇게 들렸다.

그에게 피해망상이 있는 게 아니다. 이곳은 엔버네스,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이 격조 있고 수준 높은 정쟁을 펼치는 곳이다. 왕세자는 엔버네스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은근슬쩍 돌리는 공격을 듣고, 판단하는 데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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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쉬쉭, 어디선가 뱀이 혀를 날름대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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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이번 일을 잘 보시고, 후에 왕위를 계승하셨을 때 이번 경험을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왕세자는 칼리에르 공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람의 새카만 동공이 저렇게 세로로 좁아지던가? 세로로 가늘어진다고?

그는 황급히 눈을 깜빡이며 다시 라이킨을 보았다. 칼리에르 공의 푸른 눈은 여전히 똑같이 정상적으로 둥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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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보안국이 참 바빴습니다. 늘 바쁜 이들이고, 전하의 권속이 될 이들이기도 하니 칭찬 한번 해주시지요. 수고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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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하시겠지만 저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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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셔야지요.”

라이킨의 입가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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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국장이 이번에 전하 덕분에 일을 참 많이 했는데,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순식간에 왕세자의 피가 싹 식었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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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일을 많이 시키시겠지만, 그래도 보안국장은 좀 봐주십시오. 사람이 참 충실하고 괜찮습니다. 뭐든 과하면 잃는 법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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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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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는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영특하신 분이셨지요. 알현실에서 국왕폐하 무릎 위에 앉아 노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군사작전 회의 때 쓰던 모형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노셨지요.”

그냥 듣기에는 참 정겨운 어린 시절을 말하는 것 같았지만, 칼리에르 공은 웃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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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도 전하를 닮은 아이를 낳으시겠지요. 기대가 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더 강력해진 뱀파이어. 아버지의 치세도, 아들의 치세도, 손자의 치세도 지켜볼 자.

아직 있지도 않은 아들까지도 위협당한 왕세자는 고개를 정중히 다시 숙이는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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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내를 보러 가야 하는지라 바빠서. 거대한 남자가 왕세자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다 왕세자를 슬쩍 휘감은 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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