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의무와 믿음 (6)
(176/181)
176. 의무와 믿음 (6)
(176/181)
176. 의무와 믿음 (6)
2022.04.06.
해가 뜨고 나서 페르난데스 7세는 보안국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카메론 셀레스트, 갑자기 나타난 성기사가 슈토넨 후작이 흑마법사들을 여럿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증언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거 좀 난감한데…….”
칼리에르 공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증거를 제시한 건 슈토넨 후작이지만, 이 모든 혐의를 왕에게 고한 건 다름 아닌 왕세자였다.
아들이 끼어 있는 난감한 상황에 오히려 슈토넨 후작의 범죄가 드러나다니, 여러 정황이 영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사후에 왕위를 이을 아들이 유력한 권력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칼리에르 공이 공작저에 없어?”
칼리에르 공 일가가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한다. 그것도 오블리앙 공까지 함께.
“……가족끼리 어디 외출이라도 했겠지.”
현재 라이킨에게 반역 혐의가 걸렸기에, 보안국에서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보고를 해온 것이지만 페르난데스 7세는 예민하게 반응할 거 없다고 생각했다. 뭐든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
“……뱀 맛있어?”
“……왜 그런 표정으로 묻는 건데?”
한참 꼭 껴안고, 울고, 웃고, 모든 감정을 다 나눈 뒤 이제 슬슬 이성이 돌아온 여동생은 미묘한 표정으로 오빠를 보고 있었다.
“으, 별걸 다 주워 먹어, 진짜…….”
질색을 하는 샤를렌의 말에 라이킨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내가 먹고 싶어서 먹었냐?”
“그럼 이제 오빠 뱀이야?”
“……너 몇 살이니, 진짜…….”
말 그대로 동생을 업어서 키웠다는 자부심이 있는 오빠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언제 클래?”
“뭔 소리야, 다 컸거든?”
“요즘 애들도 너처럼 유치하지는 않아.”
“오빠가 요즘 애들 봤어? 키워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아는 척이야?”
보자마자 싸워대는 남매 때문에 오늘도 늙어가는 아버지가 보다 못해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만두지 못하니, 내가 소렐 앞에서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다 키워놨으니 알아서 결혼한 줄 알았더니, 이건 사춘기 애들만도 못해.”
이미 소렐은 옆에서 킥킥 웃어대고 있었다.
“이걸 수습부터 해야 할 거 아니냐.”
“수습은요, 이미 다 수습되었는데요.”
죽어라 고생한 라이킨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몸 안에서는 바실리스크의 힘이 녹아내려 결국 그와 융합되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몹시 피곤했다.
그건 지금 웃고는 있는 소렐도 마찬가지일 거다. 밤을 홀딱 새운 소렐의 눈이 약간 풀려 있었다.
“내가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니.”
“뭐, 아버지께서는 다 생각해두셨겠지요.”
발레시나스 공작이 안 그랬을 리가 없었다. 라이킨은 허공에 오도카니 앉아서 멍하니 아래를 보고 있는 소렐을 다시 들어 안았다.
“지금쯤 국왕에게 카메론 셀레스트의 ‘적절한’ 증언이 들어갔을 겁니다. 그때까지 이 현장은 보존해놓지요. 적당히…….”
“슈토넨 후작이 데리고 있던 흑마법사가 바실리스크를 불러낸 것으로 하고 말이지?”
그리고 바실리스크는 대마법사와 가디언이 적당히 없앤 것으로 끝내면 될 거다. 듣고 있던 샤를렌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걸 왕이 믿을까?”
“저기 흑마법사의 시체가 하나 있고, 불탄 저택 아래를 파보면 수십 구가 나올 텐데 어쩌겠어?”
간단하게 대답한 라이킨은 소렐을 좀 더 바짝 안았다. 그녀의 눈이 반쯤 내려앉아 있었다.
“좋아. 그렇게 만들어야지.”
샤를렌은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라이킨에게 다가간 뒤, 먼저 소렐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공주님. 무척 기뻐요.”
바실리스크를 죽인 직후에 입이 마르고 닳도록 한 말을 다시 한번 전한 샤를렌은 소렐이 팔을 뻗어 그녀를 안자, 마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샤를렌…….”
“당연히 와야죠. 한 건 없지만.”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 왔으면 내가 힘이 나지 않았을 거예요, 나 사실 조금 무서웠는데 다 같이 와줘서 힘냈어요.”
웅얼웅얼하는 말에 샤를렌은 조금 더 소렐을 꼭 껴안았다. 체력을 다 소진해서 눈이 감기기 직전인 데다가, 체구까지 작아서 더 안쓰러웠다.
고대마법의 계승자라는 건 대단한 영광이자 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작은 어깨에 지나친 짐이기도 했다.
“너무 잘했어요, 너무 잘했어. 씩씩하고 용감하게 잘했어요.”
조금 무서웠다고 말하는데 거기에 대고 해줄 수 있는 말이 얼마 없었다. 샤를렌은 그저 잘했다, 용감하다, 기쁘다, 연신 말하면서 소렐을 토닥여주기만 했다.
공주님은 그 말이 만족스러운지 웃으면서 다시 라이킨의 어깨에 기댔다.
“너희는 가서 쉬어라. 현장 수습은 내가 남아서 할 테니까.”
로렌스의 말에 라이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 어디 묵을 곳이 있나?”
잔뜩 지친 소렐을 뉘어 놓을 곳이 있어야 했다. 로렌스는 난감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도시에서도 멀리 떨어지고, 가까운 농가마저 없는 외진 곳이었다. 울창한 삼나무만 가득한 이곳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건물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집에 갈 거예요.”
그때 눈을 감고 있던 소렐이 간신히 눈을 뜨고 말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니? 그러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알아보마.”
“아니에요, 이동마법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샤를렌도?”
보는 사람들은 마음이 아플 지경인데, 말을 느릿느릿하게 한 소렐은 샤를렌을 쳐다보았다. 함께 돌아가겠냐는 거다.
“나는 엔버네스에서 일을 하긴 해야 하는데……,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소렐은 말하기도 힘든지 고개만 끄덕였다. 라이킨은 그녀에게 더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곤 로렌스에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더 보내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가라.”
그게 전부였다. 눈을 깜빡하는 사이, 순식간에 샤를렌과 라이킨, 소렐은 다시 엔버네스의 공작저로 돌아왔다.
훈훈하게 덥힌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던 얼굴을 감쌌다. 부지런히 저택을 돌아다니면서 조금 이른 아침을 시작하고 있던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복도를 걸어가다 말고 그들을 발견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변호사님도 오셨군요.”
호랑이는 담대하다. 그녀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의사, 목욕물, 식사, 무엇부터 준비할까요?”
세 사람에게서 세 가지가 동시에 마구 튀어나왔다. 에벌린은 커다란 저택을 돌보는 대단한 총괄 관리자답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전부 다 준비하도록 하지요.”
에벌린이 아니었다면 세 사람은 곧장 따뜻한 식사와 뜨거운 목욕물을 누리지도 못하고 기다시피 움직였을 거다.
그로부터 한 시간 동안 식당에서는 음식을 천천히 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탈진한 대마법사를 비롯해 정신적 피로도가 극심한 뱀파이어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음식만 없앴다.
*
모든 것이 따뜻하고 안락하기만 했다. 포근한 거위깃털 베개, 매끄럽고 부드러운 침구, 푹신한 매트리스, 아니, 매트리스보다 더 편안한 품. 그녀를 품고 있는 뱀의 매끄러운……, 뱀?
‘뱀?’
눈앞에 아가리를 쩍 벌린 뱀이 보이는 듯하다. 소렐은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휙 돌리자마자 꽉 잠긴 목소리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왜요, 공주님, 왜요…….”
아, 뱀이 여기 있구나. 사악한 의지와 파괴 욕구는 완전히 용해되어서 사라진 채 그녀의 곁에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들었다가 겨우 눈을 뜨고 그녀를 확인하는 참이다.
“나쁜 꿈을 꾸셨습니까?”
라이킨이 그녀를 좀 더 안아 올리며 물었다.
“아까 싸우던 게…….”
아무리 베어내고, 마법을 맞아도 달려들던 뱀이 자꾸 생각이 나서.
“잔상이 남았군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여태까지 소렐이 위협을 심하게 느낄 정도로 싸웠던 적은 없었다. 어릴 때 납치되었던 경험은 차치하고, 그녀가 힘이란 걸 갖췄을 때 엘펜하임도, 그 누구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걱정하고 겁을 내며 싸웠던 존재는 바실리스크가 유일할 거다.
“꿈을 꾸는 것도 아닌데 눈앞에 어른거리지요.”
그녀 때문에 잠에서 깬 목소리가 묵직하게 그녀를 감쌌다.
“장병들이 검을 다듬은 뒤 휘둘러보는 게 꼭 나에 대한 공격 같아 움찔거리고, 다람쥐가 날렵하게 움직이다가 마주쳤을 뿐인데 암살자인 것 같고, 잔뜩 긴장해서 방어하게 됩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동그란 어깨를 쓸어주었다. 화들짝 놀라서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한동안 계속될 겁니다. 쉽게 사라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손이 떠난 자리를 입술이 따라갔다. 쓸어 올려서 결국 뺨과 이마에 닿았다. 일생에 단 한 명일 연인에게 소중히 제 표식을 남겼다.
“언제쯤?”
“사람에 따라 다르지요. 더 큰 적을 만나서 이기면 괜찮아지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걸려서 익숙해지거나……, 아니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도움을 받거나.”
라이킨은 머리를 받쳤다.
“아니면 잊어버리게 하거나.”
“어떻게?”
그는 대답 대신 놀라서 깨어난 그녀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평소처럼 녹아내릴 듯이 부드러운 게 아니라 거칠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소렐은 지나치게 커다란 그를 다 감싸 안지도 못했다. 간신히 넓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가 퍼붓는 어떤 쾌감과 강렬한 애정을 고스란히 받는 데만 집중해야 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주위는 공작부부의 휴식을 위해 아주 고요했고, 창문과 침대에는 두꺼운 커튼이 내려졌다. 소렐의 상기된 얼굴 위로 흐트러진 금발이 쏟아졌다.
“……진짜 뱀 삼켰다.”
라이킨이 쳐다보는 시선에 소렐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중얼거렸다.
“예.”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거렸다.
“혹시 저 때문에 놀라 깨신 겁니까?”
정확하게는 그의 안에 녹아든 바실리스크의 힘이다. 그것 때문에 충분히 소렐이 놀랄 수 있었다.
“완전히 흡수했는데…….”
당황한 라이킨이 자신을 다시 점검했다. 아직 흡수되지 않아 살아있는 바실리스크가 살기라도 뿜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나도 익숙해질 거예요.”
소렐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익숙해지고 있고요. 앞으로 더 큰 적을 만날 게 뻔하니까…….”
할 일이 많고, 지켜야 할 선한 이들도 많다. 대마법사는 하품을 길게 한 뒤 다시 라이킨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데 라이킨은 어느 쪽이었어요?”
“뭐가 말입니까?”
“잔상이 어떻게 사라졌냐고요.”
“……저는 익숙해졌습니다.”
정확하게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전장에서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것마저 사치일 때가 많으니까.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내가 좋은 사람 해주려고 했는데.”
그녀에겐 이미 좋은 사람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이미 하셨습니다.”
품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나서, 라이킨은 같이 웃었다.
“……그런데 공주님, 슈토넨 후작의 저택 아래 묻힌 시신들을 그냥 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소렐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 시신들은 제물이었어요. 바실리스크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더 줘서 슈토넨 후작을 죽이기 위한 제물. 제물을 건드려서 사술을 없앨 수도 있지만, 대가가 꽤 컸을 거예요. 그만큼 강력하고……, 죽기 직전의 원한을 다 담은 거니까. 사실 이건 이제 와서 생각해보고,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그땐 이유를 몰랐으니까.”
예언해놓고서 예언한 이유도 모르는 건 웃기는 일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헬레인 토끼들이 그랬다.
“그리고 결국 그걸 통해서 바실리스크가 어느 정도 강해졌지만, 또 그 덕분에 우리가 바실리스크를 없앨 수 있었던 거고요. 형체 없이 라이킨 안에서 의식을 조종했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라이킨을 봉인시켜야 했어요.”
말하다보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도 소렐의 표정이 슬퍼졌다.
“나는 그건 시, 싫어서……. 나 혼자 살아남을 자신도 없고, 살기도 싫어서…….”
라이킨은 얼른 커다란 손을 뻗어 소렐을 더 꼭 안았다.
“생각하기도 싫어서…….”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공주님. 여기 있어요. 공주님 덕분에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좀 긁혀서 그렇지.
“응, 다행이에요.”
또다시 같은 꿈을 꾸고, 더 나은 미래로 함께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길을 완전히 잃지 않아서 다행이다. 소렐은 삶의 의미를 꼭 안고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