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의무와 믿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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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의무와 믿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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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의무와 믿음 (5)
2022.04.02.
아버지는 머리 하나 달린 바실리스크도 무척 잡기 힘들다고 하셨다. 라이킨은 몸속에 빠르게 세 번째 머리의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머리 두 개만 남은 바실리스크를 쳐다보았다.
원래 머리가 다섯 개였던 놈이라 덩치가 무척 거대하다. 독을 뿜어내고 있었고, 소렐은 놈의 눈을 멀게 하려고 빛을 흩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곁에 내려서서 바실리스크의 공격을 쳐낸 라이킨이 물었다.
“이대로 목을 하나 더 자르면 됩니까?”
“눈은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조심해요.”
“눈은 왜요?”
“바실리스크가 흑마법사 때문에 너무 힘을 많이 얻었어요. 원래대로라면 이 정도까지 힘을 쓰지 못할 텐데.”
소렐은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마치 막다른 곳에 몰린 바실리스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듯. 라이킨은 별의별 적을 다 상대해봤지만, 이렇게 강대한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할 만했다. 비록 제 손으로 소렐을 죽인 줄 알았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았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라이킨뿐인 건가? 그녀는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너무 강해졌으니까 라이킨의 몸을 차지해서 그렇게 자유자재로 쓴 거고…….”
“정확하게 뭘 걱정하십니까, 공주님?”
“쓰려면 벌써 썼겠지만, 바실리스크와 눈을 마주하면 돌이 된다는 예가 있으니까…….”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라이킨은 다시 한번 달려드는 또 다른 머리에 칼집을 냈다.
“예, 그런 힘이 있었다면 벌써 사용했겠지요. 하지만 주의하겠습니다. 공주님도 조심하십시오.”
“라이킨이 가서 열심히 공격해주는 게 날 지켜주는 거예요, 알죠?”
다시 뱀의 머리로 올라가려던 라이킨이 소렐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것까지 다 알아차리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소렐은 그 와중에도 뽀얗게 웃었다. 라이킨은 그 웃음을 보다가 같이 씩 웃고는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펑펑, 폭죽처럼 눈부시게 하얀빛이 바실리스크의 눈 주변으로 마구 터지고, 괴로워하던 뱀 머리 하나가 라이킨의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쉽게 잡을 수 있을 거야. 걱정할 거 없어.’
머리를 쓱 피하곤 오히려 올라타서 마구 찔러대기 시작하는 라이킨을 보며 소렐은 어떤 확신을 얻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바실리스크는 모조리 라이킨에게 흡수될 거다. 대마법사의 가디언은 더 큰 힘을 얻을 거고, 그 힘은 나중에 태어날 고대마법의 계승자에게 고스란히 물려질 거다.
같이 살기로 했다. 죽을 때까지 서로를 돌봐주고, 지켜주며, 보듬고 살기로 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다.
스스로 잠시 죽음을 위장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소렐은 바실리스크를 올려다보았다. 저 뱀들의 왕은 라이킨을 더 이상 해칠 수도, 소렐을 죽이고 마법을 빼앗아갈 수도 없다.
“삐삑!”
소렐의 강한 의지만큼 황금색 토끼들이 더 사납게 뱀 머리 위를 뛰어다녔다. 녀석들은 특히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공주님께서 명하시니 너는 특별히 지켜주도록 하겠다’라는 표정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라이킨을 따랐다.
키에에에에엑!
격분한 바실리스크가 소리를 내질렀다. 소렐은 이제 움찔거리지도 않고 양팔을 넓게 벌려 오히려 맹공을 퍼부었다. 그물 모양을 하고 있던 결합점들이 다시 풀어지더니, 저들끼리 꼬여 날카롭게 하나로 뭉치면서 라이킨을 따라갔다.
모든 것이 대마법사를 따라 움직인다. 라이킨은 그녀의 가장 강하고 예리한 검. 언제나 적의 머리를 벨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삐!”
토끼 두어 마리가 라이킨을 아예 타고 올라갔다. 그의 머리 위와 어깨 위에 앉아 힘차게 바실리스크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네가 소리 지르는 것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듯.
토끼들이 삑삑댈 때마다 그의 검에 깃든 황금색 빛이 점점 더 짙어지고, 길어졌다. 검에 찔리고 베일수록 상처는 더 깊어지고 커진다.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아래로, 목이 시작되는 부근까지 다시 도착한 라이킨은 바로 목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의 복수를……!
쉭쉭대며 독을 내뿜는 바실리스크의 머리에서 흑마법사들의 사념이 웅성거렸다.
“이미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에 끼어들 수 없어!”
대마법사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진리를 크게 외치며 사념을 쳐냈다.
“차가운 시신은 땅으로!”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바실리스크의 다른 머리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죽음의 주문은 안개로!”
같잖은 사술이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스스로를 바쳐 완성한 주문이니 얼마나 원한이 강하겠냐만, 그 보복은 이미 슈토넨 후작이 죽었으니 끝났다. 보복의 끝이 소렐이나 라이킨에게로 향하는 건 순전히 탐욕에 불과했다.
소렐이 손을 높이 뻗어 흔들 때마다 짤랑짤랑, 별이 부딪치고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라이킨은 검을 들고 갈라지기 시작한 바실리스크의 목을 또 내리쳤다. 이것만 자르면 이젠 머리는 딱 하나만 남는다.
“빛바랜 원한은 재로!”
우리의 원한을 감히……!
캬악, 바실리스크가 독을 쏟아부으며 소렐에게 달려들었으나, 라이킨이 좀 더 빨랐다. 그는 어떻게든 그를 물어뜯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머리를 베고, 베고, 또 베어냈다.
“삐!”
라이킨의 머리를 꼭 붙잡고 있던 토끼들이 뛰어내려 같이 뱀 머리를 두들겼다. 폴짝댈 때마다 이미 반쯤 갈라져 있던 틈이 점점 더 벌어진다.
라이킨은 한 번 더 검을 내리찍었다. 머리 하나가 결국 또 잘려 나갔다. 바로 직전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했다.
바실리스크가 힘을 잃을 때마다 라이킨은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가 지키는 대마법사도 그의 힘에 의지해서 더 커다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어째 토끼들이 더 많아지는 기분인데.’
실컷 두들겨대더니, 이번엔 너덧 마리가 그에게 한꺼번에 달라붙어서 다음 머리로 빨리 가자고 보챈다.
라이킨은 휙 뛰어내려서 소렐에게 덤벼드는 마지막 머리를 쳐냈다. 그 힘에 마지막 머리가 튕겨져 나간다. 순수한 그의 완력 때문이 아니라 달라붙어 있는 황금색 토끼들과 그를 지키는 마법 덕분이었다.
“공주님.”
“응!”
무슨 말 할 건지 알아! 소렐이 바로 준비했다. 검을 세우고 있던 라이킨이 픽 웃는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녀는 열심히 다음 마법에만 집중하며 또 외쳤다.
“한 번에!”
“예, 한 번에.”
“한 번에 안 된다면 또!”
“예, 또.”
즐거웠다. 라이킨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굳이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같은 마음이고, 같은 미래를 바라볼 거다.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이겨낼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도 기뻤다. 그는 소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응? 안 도와줘도 괜찮아요.”
혼자서도 올라갈 수 있는데!
“……기분상 그냥 하게 해주세요.”
그런가? 소렐은 라이킨의 어깨를 안았다. 그들은 곧장 마지막 머리가 시작되는 곳으로 다시 이동했다.
머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에 바실리스크의 발악은 대단했다.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기 전, 대단한 마법사 하나와 싸울 때는 그저 봉인에 불과했다. 힘을 빼앗겨 오래도록 강제로 잠들어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머리가 하나하나 잘려 나가고 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아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까. 놈은 가장 굵은 꼬리로 지면을 사납게 쳐댔다. 여태까지 대마법사의 그물에 막혀 있었으나, 더더욱 용을 썼다.
“이런 때가 가장 위험한 법입니다.”
허공에 선 라이킨은 차갑게 바실리스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미 땅은 푹푹 패여서 뱀이 지나가고 몸부림을 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뒹굴었다. 그랬기에 로렌스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마지막 일격에 순식간에 전세가 바뀌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드물긴 했지만 분명히 있는 일이었고,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건 뱀들의 왕이다.
“그러니 조심하시지요.”
“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그 말에 라이킨은 픽 웃으면서 검을 고쳐 잡았다.
“이대로 뒀다간 이 삼나무 숲이 완전히 망가지겠어요.”
이미 상당히 망가졌다. 슈토넨이 국경 역할을 하지 않게 된 후로 한 번도 이 정도로 큰 규모의 피해를 입은 적이 없던 숲이 엉망이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느릿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말한 라이킨은 그들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 바실리스크의 입을 간단히 피했다.
소렐이 미소 짓는 것을 보며, 그는 곧장 아래로 휙 떨어졌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기겁을 할 만큼 완벽한 추락처럼 보였지만, 소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실리스크와 마주했다.
대마법사는 그녀의 검을 보냈다. 이미 펑펑 터지고 있는 마법은 바실리스크의 혼을 빼놓고 있었고, 머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뱀은 달려들다가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과거의 흔적은 과거로.”
소렐은 중얼거리며 양손을 펼쳤다.
나는 과거가 아니야!
바실리스크가 발악했으나, 이미 대마법사의 힘은 가디언에게 맞닿았다. 황금색 마법이 라이킨의 검을 감쌌다. 그의 귓가에 소렐의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묵직해지는 검을 그 혼자만 잡고 있는 게 아니라 저 허공에 떠 있는 소렐도 함께 잡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검을 들어 내리찍었다.
케에엑……!
비명마저 뚝 끊겼다. 거대한 상처가 목에 났으니,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바실리스크는 또 꼬리라도 움직여보려 했으나, 어느덧 황금색 그물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출구가 없었다.
라이킨은 다시 한번 검을 높게 들었다. 거대해진 검이 황금빛을 번쩍이며 뱀을 내리쳤다. 마지막 남은 뱀은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어떠한 저주도 남길 수 없었다.
쾅!
비명조차 들리지 않고, 새들은 이미 애저녁에 이곳을 피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젖은 흙이 철퍼덕, 사방에 다 튀었다.
높은 곳에 선 대마법사는 천천히 아래로 허공을 밟고 내려왔다. 거대한 뱀의 사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소렐은 방금 라이킨이 한 말을 선명하게 기억하며 긴장했다.
‘이런 때가 가장 위험한 법입니다.’
바실리스크가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간신히 얻었던 약간의 형체마저 다 잃었다. 머리가 잘렸으나 그 불순하고 사악한 힘의 뿌리는 라이킨에게 가 있다. 바실리스크의 마지막 머리까지 흡수한 라이킨이 멀쩡할까?
‘……하긴 처음부터 대단히 바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아까 뱀 머리를 상대하면서 사납게 웃어대던 걸 떠올린 소렐은 의외로 바실리스크의 힘이 라이킨에게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양손은 일렁이는 황금색으로 무섭게 빛났다. 만에 하나,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했다.
“……쓸데없이 형체도 없는 주제에 지저분하게…….”
피어오른 먼지와 날리는 눈 사이에서 짜증 섞인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소렐은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디뎠다.
“내려오지 마십시오, 공주님. 온통 진흙투성이입니다.”
어찌어찌 피하긴 했지만, 뱀과 싸웠는데 라이킨의 꼴이라고 멀쩡할까. 그는 조금 튄 진흙을 오만상을 쓰며 털어냈다. 공주님 앞에서 기사는 최대한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나는 괜찮은걸요.”
라이킨의 새파란 눈이 소렐을 올려다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또 사람의 눈 같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틀림없는 그의 눈이다.
“……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괜찮습니다.”
소렐은 그와 조금 떨어진 허공에 서서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손에 깃들어 있던 마법을 휙 없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제 말을 다 믿으시면 안 됩니다. 끝까지 확인하셔야지요.”
라이킨이 그녀를 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소렐은 양손을 마주 잡고 조금 난감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지만 내가 의심을 계속하면 라이킨이 상처받잖아요?”
“받지 않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나는 라이킨을 믿는데?”
“그래도 의심하셔야 합니다.”
“라이킨도 날 의심하지는 않을 거면서.”
“……제가 그래도 공주님께서는 하셔야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뻗었다. 당연히 공주님을 허공에서 내려드리겠다는 손짓이었다.
“음, 굳이 확인하고 의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 다 알아요.”
소렐은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면 그는 알아서 그녀를 안는다. 하도 땅이 뒤집히고, 눈이 녹아 엉망이니 그녀를 내려놓지는 않는다. 소렐은 희미해지기 시작하는 바실리스크의 거대한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요.”
“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예요.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두고 봐야겠죠. 라이킨도 고생 많았어요.”
그녀는 말하다가 그의 목을 둘러안고 쪽 소리가 나도록 뺨에 입을 맞췄다. 라이킨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훨씬 더 강해졌다. 바실리스크가 아무래도 그에게 잘 스며들고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공주님께서 더 애쓰셨지요.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뱀은 맛있었어요?”
라이킨은 그만 웃고 말았다. 같이 웃은 소렐은 조그만 황금색 토끼들 중 한 마리를 로렌스가 있는 쪽으로 보냈다. 이젠 다 끝났다고, 괜찮다고 알려야 했다.
“글쎄요. 그 고생을 해가면서 먹을 만큼 맛있지는 않았습니다.”
같이 농담을 한 그는 소렐이 끌어당기는 손에 귀를 가져다 댔다.
“있잖아요. 나는 라이킨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는 마법사라서, 라이킨이 강해지면 나도 강해지는 거예요.”
“예, 그렇지요.”
“나는 아마 라이킨 덕분에 아주 오래 살 거예요.”
그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거야말로 오늘 들은 소식 중 가장 기쁜 소식이군요.”
“어, 라이킨이 나한테 수명을 나눠주는 건데요?”
“많이 가져가세요.”
뱀파이어의 눈이 휘는 순간, 소렐은 이 숲이 비로소 다시 평온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