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의무와 믿음 (4)2022.03.30.
바실리스크의 시커먼 독과 그 독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괴한 연기, 그리고 흑마법사들의 시신에서 뽑아낸 정수로 빚어진 사술이 거대한 뱀의 몸을 감쌌다. 거대한 뱀들의 왕에 비해 턱없이 작았으나, 따뜻한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대마법사가 신나게 집게손가락으로 뱀을 가리켰다. 방벽이 걷히자마자 다시 멀쩡하게 서 있는 소렐을 보고 샤를렌은 울 뻔했다. 옆에 서 있던 라이킨의 부하, 신시아는 이미 울고 있었다.
“아버지.”
샤를렌은 한 장면도 눈물로 인해 놓치고 싶지 않아서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로렌스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가 왜 대마법사를 믿으라고 하셨는지 알겠어요.”
끝까지, 끝의 끝에 다다라서도 믿어야 했다. 목숨을 걸고 마지막 남은 선한 힘을 지키고, 타락한 것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대마법사의 의지와 책임감을 믿어야 했다. 이젠 믿는다.
“이드리스 집안은 늘 애써왔지.”
헤아릴 수도 없는 긴 시간 동안 대마법사들이 목숨을 내어가며 수많은 사람을 지켰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로렌스가 샤를렌의 손등을 덮고 토닥였다.
“필사적으로 애썼단다. 수많은 희생을 감당하면서. 오늘도 애쓰고 있구나.”
자칫 잘못하다간 라이킨이 정말로 미쳐버릴 수도 있었지만, 아주 과감한 수를 썼다. 소렐은 그가 틀림없이 바실리스크를 몰아내고 다시 육체에 대한 주도권을 찾을 거라고 믿었나 보다. 그건 대마법사로서의 자신감인가, 아니면 라이킨을 아주 잘 아는 아내이기 때문인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키에에엑! 듣기 싫은 뱀의 비명소리에 라이킨은 인상을 찌푸렸다. 소렐은 집게손가락을 흔들면서 열심히 마법을 꼼꼼하게 퍼붓는 중이었다. 물론 그중의 반은 바실리스크에게 직접 물리적인 공격을 퍼붓는 라이킨을 보호하고, 또 공격이 더 잘 먹히도록 돕는 마법이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라는 기가 막힌 그릇에 기생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그릇에 대한 주도권은 빼앗긴 바실리스크는 흑마법사들의 사술에 의지했다.
“웬만하면 머리를 다 잘라서 흡수해버려요! 어차피 뿌리는 라이킨에게 박혀 있으니까, 그쪽이 더 안전해요!”
“뱀을 먹는 건 비위가 상해서…….”
라이킨은 진심으로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머리 두 개나 잘 먹었으면서!”
“그 덕에 공주님께 주먹으로 맞았는데요.”
“그건 미안해요! 하지만 더 아프게 때렸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예, 사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오늘 참 파란만장하다. 분명히 시작은 보안국이었는데, 어느덧 그들은 슈토넨의 삼나무 숲에서 바실리스크와 싸우고 있었다. 그사이 바실리스크의 머리가 하나 줄어들었지만, 대신 바실리스크의 형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라이킨만 삼키면 이 형체에도 제대로 된 힘이 생긴다.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육신을 한 번 차지했다가 쫓겨난 바실리스크의 분노가 대단했다. 놈은 슈토넨 후작 일행의 시신 위에서 날뛰었다.
“공주님!”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소렐만 부를 때가 있었지만, 소렐은 용케 알아듣고 라이킨이 필요한 마법을 아주 적절하고도 기발하게 사용했다. 라이킨은 머리 하나를 상대하던 와중에 그를 공격하려던 다른 머리에 황금색 토끼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마구 때리는 광경을 보고 기가 찼다. 귀엽긴 한데 하는 짓이나, 파괴력이 영락없이 사나운 헬레인 토끼들이라 안 좋은 기억이 생각났다. 저건 무척, 엄청나게, 몹시 아플 거다. 어마어마하게 아플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아아아악! 짜증이 나지. 헬레인 토끼들의 어마어마한 무기가 바로 저거니까. 도발에는 아주 탁월했다. 근데 또 그 도발에 넘어가면 더 무서운 게 기다리고 있다. 뱀 머리 세 개를 사이좋게 돌아가며 두들겨 패는 토끼들이 와르르 물러서면, 당장 대마법사의 무시무시한 마법이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벼락이 번쩍거리기도 했고, 화염이 떨어지기도 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무엇보다 무시할 수 없는 건 미쳐버린 가디언의 검이었다.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내가 포기할 것……! 바실리스크의 교활한 혀를 조심하라고 한다지만, 이 뱀파이어도 만만하지 않았다. 사느냐 죽느냐가 순간에 결정되는 전투에서는 되도록 말을 아껴야 했다. 아니면 시끄러운 건 알아서 닥치게 하든지. 라이킨은 날름대는 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건 목숨을 건 전쟁이다. 힘을 최대한 아끼고, 소렐을 지키며 바실리스크를 쓰러트려야 했다.
“얘들아, 힘내!”
물론 간혹가다가 실없는 웃음이 터져서 긴장감이 확 풀리기는 하지만. 소렐의 응원을 받은 무시무시한 토끼들이 이번엔 혀가 잘린 뱀 머리를 때려주러 와르르 몰려왔다.
“라이킨은 방해하지 말고!”
앗, 그런 거였어? 그렇다면야. 황금색 토끼들은 그를 힐끗 본 뒤 다음 머리로 또 허공을 밟고 열심히 몰려간다. 라이킨은 사납게 웃었다. 저 귀여운 토끼들이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는 거야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아주 익숙했다. 소렐의 마법이라 해도 토끼들이 그를 취급하는 건 똑같나 보다.
“음, 그리고 눈!”
소렐은 열심히 생각하고, 또 열심히 마법을 부렸다. 뱀의 약점이 뭘까? 시골에서 오래 살았던 그녀는, 아무래도 눈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번쩍거리는 빛을 바실리스크의 눈앞에서 터트렸더니 당장 요동친다. 아차! 라이킨이 위험했다! 몸부림치는 바실리스크 때문에 라이킨이 균형을 잃었다. 소렐은 얼른 그를 결합점으로 붙잡아줬다.
“으, 미안해요!”
아직 합동작전은 좀 서툴러서! 라이킨은 워낙 잔뼈가 굵은 기사이기도 해서 서툰 지원이 짐처럼 느껴질 거다. 그녀의 사과를 들은 라이킨이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결합점은 그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렸다. 펑펑 불빛이 터지자 머리를 흔들어대다가 저들끼리 부딪친다. 충격에 끙끙대는 바실리스크의 머리 중 하나를 고른 라이킨이 그대로 검을 아래로 세우고 뛰어내렸다. 그를 걱정하는 소렐의 마음처럼 결합점들이 그를 따라갔다. 입에 상처를 입었던 뱀의 머리가 이번에는 정수리에 검이 꽂혔다.
“어, 더 깊게!”
그렇지! 더 깊게 꽂혀야지! 소렐은 말한 바를 그대로 마법으로 실현했다. 충분히 바실리스크의 머리 하나를 파괴할 만큼, 가공할 위력과 치명적인 날을 더했다. 끼에에에엑!
“윽!”
바실리스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보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죽음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바실리스크의 비명소리는 귀를 후벼 팠다.
“윽……!”
제 머리를 마구 흔들어대는 바실리스크에게 검 하나를 꽂아 매달린 라이킨도 몹시 위험했다. 그러나 그는 장검을 더 깊게 박아 넣으며 검자루를 꽉 쥐고 버티고 또 버텼다. 소렐과 연결된 결합점들이 그를 감싸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떨어져도 되는데……!”
그녀가 알아서 안전하게 받아주겠다는 뜻이었지만, 라이킨은 버텼다. 몸부림치던 머리 하나가 마침내 힘을 잃고 완전히 땅으로 추락할 때까지, 그에게 항복할 때까지 버텼다. 그사이 소렐은 라이킨이 더 다치지 않도록 나머지 머리 두 개에 집중하고 있었다. 쿵! 결국 머리 하나가 혀를 빼문 채 입에 피를 흘리며 질척대는 진창과 시신 위에 쓰러졌다.
“머리 잘라야 해요, 라이킨!”
소렐은 황금색 그물을 다시 펼쳐 난동을 부리는 바실리스크를 묶으며 외쳤다.
“꼭 지금 잘라야 할까요……?”
나머지 두 놈도 다 죽이고서 완전히 숨통을 끊은 뒤에 잘라도 늦지 않은 거 아닌가?
“지금 잘라야 해요!”
그렇다면야. 가디언은 대마법사의 명에 결코 토를 달지 않는다. 라이킨은 깊이 박혔던 검을 미간을 찌푸리며 뽑기 시작했다. 바실리스크가 멍청하게 제 머리를 흔들어대며 날뛰는 동안 더 깊게 들어간 거다. 뽑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같은 몸을 사용하는 다른 머리들이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
소렐이 소리를 빽 지르며 두 개의 머리를 압박했다. 내 머리는 새로 돋아날 것이다! 하나를 자르면 둘이 돋아나지! 검을 빼느라 힘을 쓰고 있던 라이킨은 문득 그의 주위로 허공을 밟고 깡총거리는 토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희 뭐하니?”
가서 얼른 공주님을 도우라며 그는 턱짓을 해보였지만, 토끼들은 삐삐삐 소리를 내며 오히려 성질을 발칵 냈다.
“삑!”
‘너 할 일이나 빨리 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허공을 뛰어다니며 뒷다리를 사납게 탕탕 굴러댄다. 그 와중에 성질 급한 녀석 몇 마리는 쪼르르 달려가서 그물에 붙들려도 꿈틀대며 입을 쩍쩍 벌리는 바실리스크의 머리 하나를 얼른 때려주고 오고, 또 때려주고 오기도 했다. 어쨌든 소렐이 기다려주고 있으면서 버티니, 라이킨도 어서 놈의 머리를 잘라버려야 했다. 검을 빼내니 검날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소렐이 손을 썼던 모양이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바실리스크를 이래서 베어내고 찌를 수 있었던 건가. 라이킨이 검을 뺀 걸 보자마자 토끼들이 와다다다 달려가서 목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향했다.
“새로 돋아날 거였으면 진작 돋아났어야지.”
라이킨은 심드렁하게 대꾸한 뒤, 곧장 날렵하게 몸을 날려 토끼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에 내려섰다.
“아, 아직 그럴 힘까지는 없나?”
비웃음과 동시에 검을 높이 든 뒤 목을 내려쳤다. 물론 단번에 잘릴 정도로 얄팍한 목이 아니다. 뱀들의 왕답게 굵디굵은 목은, 한 번 내리치는 것 가지곤 흠집만 날 뿐이다. 라이킨은 한 번 더 내리쳤다. 어떻게든 반격하려는 바실리스크의 목 부분을 모여 있던 토끼들이 동시에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토끼들과, 그것도 소렐이 만들어낸 토끼들답게 아기인 토끼들과 싸우는 건 그림이 꽤나 웃겼다. 그가 내리치면 가만히 있다가, 그가 다시 검을 들어 올릴 때까지 비는 시간에 토끼들이 바실리스크를 마구 때렸다. 겉으로 보기엔 참 귀엽지만, 헬레인 토끼에게 여러 번 맞아본 라이킨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헬레인 토끼들과 함께 동맹이 되어 싸울 때도 있었지만, 적으로 마주할 때는 그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실어서 때렸다. 그랬다. 토끼들은 헬레인 왕국의 예비 부마가 뱀파이어이고, 공주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에 대단한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읏……!”
쾅, 하고 바실리스크가 요동을 치며 맹렬히 반격하자 버티고 있던 소렐이 어깨를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서둘러 머리를 하나라도 잘라야지 라이킨이 다시 사로잡힐 위험성이 낮아진다. 그는 소렐이 비명을 지르다가도 입술을 앙다물고 더 섬세하고 치밀한 마법을 펼치는 것을 보고 더 속도를 높여 머리를 잘랐다.
“삐!”
거의 다 됐다! 토끼 하나가 고개를 반짝 들고 외쳤다. 라이킨 평생에 이렇게 열심히, 또 빠르게 목을 쳐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자르고 소렐을 도우러 가야 했다. 가디언이 대마법사를 지켜야 하는데 오히려 대마법사에게서 도움을 받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으른 듯하면서도 철저하게 의무와 책임만은 중요하게 지켰던 기사는 한 번 더 날뛰는 뱀의 목을 내리쳤다.
“삐삐!”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몸통에서 분리된 육중한 바실리스크의 머리가 완전히 땅에 쿵 하고 떨어졌다. 떨어지자마자 소렐에게 달려갈 줄 알았던 토끼들이 목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마 ‘혹시라도’ 새로운 머리가 돋아날 수도 있으니, 방비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걸핏하면 몸통으로 그를 휘감아 조여 죽이려고 하니, 그걸 막는 토끼들의 역할이 대단했다.
떨어진 머리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형태만 겨우 갖췄으니, 사라지는 건 결국 뿌리박혀 있는 라이킨에게로 돌아가 완전히 흡수되는 걸로 끝날 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다음 머리로 건너갔다.
“아.”
아, 이거 괜찮은데. 바실리스크의 머리 하나가 또 흡수되어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는 씩 웃었다. 멀리서 보고 있던 샤를렌도 언제 울 뻔했냐는 듯, 팔짱을 척 꼈다.
“웃는데요.”
“그러게. 살 만한가 보구나.”
“……아버지, 육포 없어요?”
“구경하려고?”
“웃는 거 보면 이젠 구경할 일만 남은 것 같아요. 육포 안 가지고 오셨어요?”
로렌스는 점잖게 서서 품 안을 뒤져 육포 주머니를 내밀었다. 역시 아버지, 안 챙기는 게 없으시다. 샤를렌은 질겅질겅 육포를 씹기 시작했다. 떨어진 머리가 점점 사라진다.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오빠놈은 훨훨 날아다녔다.
“그래도 끝까지 보려무나. 대마법사가 가디언과 함께 뱀들의 왕에게 대적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말이야. 이젠 거의 일어나지도 않는 일이지. 조슈아?”
“예, 합하.”
“이걸 수습하려면 조사관들이 나와야 하겠구나. 어쨌든 여긴 슈토넨이니까 말이야.”
“예,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도록 조처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조슈아가 멈칫거렸다.
“그런데 이제 마음을 놔도 되는 겁니까?”
“결코 아니지. 라이킨은 심각한 상황에서도 잘 웃는 아이니까 말이야.”
로렌스는 엄숙하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납게 웃는 라이킨과 바실리스크가 또 한 번 부딪치면서 굉음을 만들고, 지축을 흔들었다. 뱀파이어들은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으려 시커먼 나무를 붙잡은 로렌스는 고개를 들었다.
“자, 이쯤이면 이 주변 사람들은 여기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다 알 거야. 바실리스크가 워낙 시끄러워야지.”
끼에에에엑! 기어이 다섯 개의 머리 중 세 개나 잃었다는 것에 분노한 바실리스크가 날뛰기 시작했다. 소렐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한 번 더 몰아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헬레인 왕국은 이런 고대생물들을 봉인하고 없애다가 멸망했고, 아빠는 그런 헬레인 왕국에서 마지막 남은 헬레인 토끼를 보호하고 지켰다. 소렐은 이 자리에서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최선을 다할 거다. 반드시 라이킨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거다. 까만 눈이 완전히 황금색으로 번쩍 빛났다.
“라이킨, 이제 세 개 다 먹었죠!”
“……먹은 게 아니라…….”
“그럼 나머지 두 개는 더 빨리 해치울 수 있겠죠!”
공주님의 의욕은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