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의무와 믿음 (3)2022.03.26.
사람이 고개를 떨어트리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무심코 넘겨버릴 때가 대부분인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끔찍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이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그를 간지럽히듯 스치고, 검을 쥐고 있는 손에 따뜻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기어이 품 안에 완전히 쏟아진 몸 위로 솟아오른 검이 차갑게 빛났다.
‘안 돼.’
그냥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그에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평생을 남에게 휘둘리다가, 겨우 찾은 안식이자 행복인데, 어떻게 이 작고도 황홀한 행복을 그의 손으로 꺾게 하나. 믿을 수가 없어서 검을 간신히 놓는 라이킨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소렐은 그에게 안겨 눈을 감고 있었다.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다.
‘이렇게 끝이 날 리가……, 그럴 리가…….’
하지만 전장에서 천 년 가까이 지낸 그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기쁨이던 작달막한 공주님의 숨은 끊어졌다. 즉사할 만큼 치명상이었다. 이 작은 몸에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상처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방법이…….”
공주님은 대마법사니까, 이렇게 허망하게 갈 리가 없었다. 방법이 있을 거다. 마법도 계승해야 하고, 그와 여름 별장에도 또 놀러 가고, 아직 보지 못한 곳을 찾아 떠나고,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며, 함께 여러 계절을 보내며 긴 시간 동안 곁에 있어야 하는데. 공주님이 할 게 얼마나 많으신데,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이대로 그를 두고 돌아가실 리가.
“아.”
라이킨의 세상에서 소렐 이드리스의 죽음이란 금기였다. 너무나 멀어서, 아직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아. 끊어질 듯,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제 손으로 아내를 죽인 남자의 거대한 몸 위로, 더 거대한 뱀의 실체 없는 형상이 드리웠다. *
“아, 아버…….”
샤를렌은 헐떡이며 아버지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지금 이 가족의 비극을 보고 뜬눈으로 보고 있었다.
“진정해라.”
로렌스는 전혀 진정되지 못한 목소리로 간신히 딸을 감싸며 정신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괜찮을 거다’라는 말은 전혀 괜찮지 않을 것이기에 소용이 없었다. 그저 가디언이 대마법사를 죽이고, 뱀들의 왕에게 삼켜져 결국 고대마법까지 빼앗기는 세상의 멸망을 목도할 수밖에. 이젠 바실리스크에게 먹히는 일만 남은 황금색 결합점이 라이킨을 감싸고 천천히 가라앉았다.
“미친 새끼야, 정신 차려!”
물론 샤를렌은 절대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법정에서 상대방을 물어뜯던 태도 그대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라이킨에게 닿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해야 했다.
“이대로 바실리스크한테 먹힐래? 정신 안 차려?”
사실은 먹혀들 리가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거대한 바실리스크가 라이킨과 소렐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는 꼴을 보고 소리라도 질러야 했다. 하지만 말에는 물리적인 힘이 없다. 샤를렌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바실리스크가 그대로 고대마법사를 통째로 삼키듯 내려앉았다.
“아…….”
이대로 끝이다. 샤를렌은 탄식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아니다. 포기하지 마라. 이게 끝이 아니야.”
‘대마법사를 믿어라’라고 말한 로렌스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검을 움켜쥐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했다.
“네 오빠가 미치긴 했어도 멍청하진 않잖니.”
하지만 아버지의 발은 이미 앞으로 나가 있다. 샤를렌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활을 쥘 뿐이다. 이게 과연 바실리스크에게 통할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야 했다. 그리고 사실 아버지는 언제나 옳았다. 크아아아악!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모두가 귀를 막다 못해 머리를 감싸고 어깨를 움츠렸다. 샤를렌은 처음에는 그녀의 멍청하고 미친 오빠가 괴로움을 못 이기고 절규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절규라고 하기엔 비통함이 모자랐다. 그건 통증에 관련된 비명이었다. 샤를렌은 황금색 마법이 일렁이다 고이는 자리에서, 결코 잡히지 않는 형상에 불과한 뱀 머리 하나가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각도로 턱이 어긋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버지, 저기 보이세요?”
조슈아와 신시아도 어떻게든 위험천만하게 고여 있는 황금색 물결 사이에서 라이킨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애썼다.
“맙소사!”
조슈아가 먼저 보았는지, 숨을 급하게 들이켜며 비틀거렸다. 신시아가 당장 그를 붙잡았다. 아무도 그가 정신없다고 탓하지 못했다.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라이킨은 손에 잡히지 않는 뱀이 벌린 입을 붙잡고, 맨손으로 턱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가 내려놓은 소렐의 시신 위로 황금색 결합점이 쏟아져서 그녀를 감쌌다. 아아아악! ‘있을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났다. 그릇이 바실리스크의 머리를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바실리스크는 흑마법사들의 사술로 인해 힘이 넘쳐났고, 덕분에 예전과는 달리 나머지 두 개의 머리도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그냥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턱이 비틀려 나가떨어진 머리 대신, 머리 하나가 그사이 서둘러 고대마법을 다시 한번 집어먹기 위해 소렐에게로 입을 쩍 벌렸다.
“조심……!”
샤를렌이 조심하라고 소리를 치려다가 소렐을 뒤에 눕혀놓고 싸우는 오빠를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황금색 결합점을 뱀 머리 하나가 그를 통째로 삼켰다. 그러곤 비명을 또 질렀다. 키에에에엑!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젖혀지는 놈의 턱에 소렐을 찔렀던 장검이 박혀 있었다. 조슈아는 그 와중에 그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쓰나.”
하지만 뱀이 뒤쪽으로 쇄도하는 것을 막지 못한 라이킨은 웃지 못했다. 웃을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지키려던 소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라지고, 그녀에게 박혔던 장검만 남았다. 건드리는 것조차 무서워서 검을 빼지도 못했다. 아직 살려낼 방법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검을 뺐다간 출혈이 더 심할까 봐 빼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공주님?”
그는 미친 사람처럼 이미 죽은 사람을 불렀다.
“공주님, 어디 계십니까?”
저 뱀이 삼켰나? 그러면 저 뱀의 배를 갈라야겠다. 라이킨은 자신을 공격하는 뱀머리를 짓밟고 뛰어올랐다. 입에 검이 제대로 박혀 괴로워하고 있는 머리로 달려들어, 겁도 없이 그 입 안으로 팔을 뻗었다.
“위험하게……!”
샤를렌이 탄식했다. 바실리스크는 뱀이니, 독을 품고 있지 않겠는가. 지금 눈에 뵈는 것 없이 사납게 날뛰고 있는 오빠가 당할까 봐 걱정되었다. 키에에에엑! 와드득, 딱히 듣고 싶지 않은 소리와 함께 검을 잡고 긁어내다시피 하며 빼낸 라이킨은 다시 한번 뱀 머리가 요동을 치며 괴로워하는 것을 두고 소렐이 있던 자리로 뛰어내렸다. 황금색 결합점이 그를 감쌌다.
“공주님?”
그는 자신에게 아가리를 쩍쩍 벌려대는 뱀의 머리를 장검으로 무섭게 찍어대면서도 공허한 목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어디 계세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가 않아.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건가. 가디언이 움직일 수 있는 피 묻은 결합점이 허공에 펼쳐졌다. 어쩐지 다른 결합점도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주는 것 같았다. 결합점이 부지런히 그와 연결된 대마법사를 찾아오려는 사이, 바실리스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뱀들의 왕은 지금 유일하게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자를 향해, 죽어버린 모든 흑마법사들을 원동력으로 삼아 독을 쏘아댔다. 시커먼 독이 라이킨을 덮쳤다.
“마스터!”
이거 못 보겠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라이킨을 부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저 뱀을 만질 수 있다면 나가봐. 아니면 짐만 될 뿐이니 가만히 있게.”
로렌스 역시 초조한 얼굴을 하고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모두가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당장 저 쏟아지는 독에서 라이킨을 구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할 일이 아니다. 일렁이던 결합점이 라이킨을 순식간에 감싸 독으로부터 보호했다.
“……공주님?”
연신 소렐만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약간 변했다. 넋을 놓고 공격만 하던 눈에 빛이 약하게 돌아왔다.
“공주님!”
라이킨은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를 지키는 안락하고 따뜻한 보호막이 된 결합점이 환하게 빛났다. 살아 있다. 분명히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소렐이 그를 이렇게 쉽게 떠났을 리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에게 돌아오려고 죽을힘을 다할 테니까.
“공주님, 제발…….”
애써 웃었지만, 입술이 떨렸다. 한참을 잊고 있었는데 소렐이 일깨워준 눈물이 또다시 쏟아질 것만 같았다.
“모습 좀 보여주세요.”
보지 못한다면 뱀부터 죽인 후에……, 그 후에는 살아나갈 이유가 있을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발.”
간절하게 비는 말을 끝으로 라이킨은 숨을 죽였다. 어떻게든 소렐의 기척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타닷, 탓, 빠르게 뛰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너무 작아서 바실리스크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치고 있는 와중에 들릴 리가 없었지만, 라이킨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타다닥, 발소리가 빠르게 지면에 부딪친다. 사람이 뛰는 게 아니라, 작은 토끼가 뛰는 거다. 라이킨은 결합점이 온통 막고 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를 지키기 위한 단단한 황금 방벽 너머 어디에서 들리는 발소리인가. 그는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평생 하지도 않던 짓까지 했다.
‘……다치시면 안 되니까.’
또 다치면 안 되니까. 이곳은 전장이지만, 라이킨은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자마자 결합점으로 만들어진 방벽을 자유자재로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불쑥 튀어나왔다. 얼마나 높이 뛰었는지, 라이킨은 손을 뻗어 간신히 작은 토끼를 붙잡아 얼른 품에 넣었다. 따뜻하다. 살아 있었다. 답답한지 꼬물대고 있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미안……, 으으…….”
뭐라 말하려는 걸 제대로 듣지도 않고 꽉 안기만 했다. 긴 팔이 품에서 뻗어져 나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를 끌어안았다. 라이킨은 드러난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간신히 숨을 쉬었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가 아직 채 들어가지 못한 토끼 귀까지 같이 쓸어내리기도 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푸하, 겨우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숨을 쉴 구멍을 찾은 소렐이 간신히 호흡하며 말했다. 마법을 부려서 틈을 만들고, 라이킨을 보호하고, 또 발각되지 않게끔 작은 토끼 모습으로 여기까지 달려오니 숨이 찼다. 미안하다고 했으나 라이킨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꼭 안고 연신 얼굴을 더듬어 확인하기만 했다.
“진짜 미안해요!”
얼마나 끔찍했는지, 라이킨의 얼굴은 안 그래도 창백한데 그나마 남아있던 핏기가 다 빠져나갔다. 소렐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사과부터 했다.
“내가 마법으로 허상을, 그러니까, 죽은 척을……!”
“압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숨이 차서 헥헥거리는 소렐의 등을 쓸어주었다. 라이킨이 뭘 잘못했는데? 소렐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신을 얼른 차렸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공주님께서 고생하시게 했습니다.”
에에이, 그게 뭐가 잘못이라고. 소렐의 눈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지만, 라이킨은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소렐이 그의 손에 죽는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 아니었다면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바실리스크에게 잠식되어 계속 날뛰었을 거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전혀!”
없어요! 너무 빠르게 달려서 힘들지만 소렐은 열심히 말했다. 살아 있는 거지. 아프지 않은 거지. 그래, 그러면 됐다. 더 바랄 것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이젠 괜찮아요? 버틸 수 있겠어?”
그건 아내가 남편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라, 대마법사가 가디언이자 바실리스크의 숙주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예. 여태까지 겪은 것 중 가장 충격적이고 괴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라이킨은 그가 ‘예’라고 대답하자마자 벌어지기 시작하는 방벽을 보고 웃었다. 이젠 바깥으로 뛰어나가 싸울 시간이다.
“공주님께서는?”
라이킨이 그녀의 기척을 완전히 느끼지 못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지켜보고, 또 그를 보호하다가 다시 알맞게 돌아오느라 숨도 차고 힘들 텐데.
“나도 괜찮아요!”
쾅, 하고 거대한 뱀에게 벼락이 떨어졌다. 소렐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내가 지켜줄게요!”
숨이 찰 테니까 조금만 목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말해도 그는 다 알아들으련만, 소렐은 매사에 열심히라 힘차게 말했다. 그게 너무 사랑스럽고, 또 라이킨을 반드시 정신 차리게 하겠다고 혼자 부지런히 뛰어다닌 게 고맙고도 안쓰러워서 그는 고개를 숙여 소렐에게 짧게 입을 맞춘 뒤 그대로 몸을 돌렸다.
“힘내요! 쟤한테 먹히지 말고!”
바실리스크에게 화염을 선사하며 또 끼에에엑, 듣기 싫은 비명을 길게 뽑아낸 공주님은 양 주먹을 꼭 쥐어 보이며 밝게 웃었다. 곁에 머물고 싶지만 바실리스크는 죽지 않았다. 라이킨은 아직까지도 충격에 쿵쾅대는 심장은 소렐의 곁에 두고 검을 치켜세웠다. 이 순간, 오직 대마법사와 가디언만이 대적할 수 있는 거대한 적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