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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의무와 믿음 (2) (172/181)

172. 의무와 믿음 (2)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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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렌과 로렌스는 일단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지금 글래스턴 공작저에 있는 뱀파이어들도 전투준비를 끝냈을 거다. 하지만 어떻게 대마법사에게 바로 갈 수 있을까? 일은 어디에서든 벌어질 수 있었다. 사실 오늘 밤, 라이킨과 소렐은 보안국에서 슈토넨 후작이 만들어낸 증거를 찾아볼 예정이었다.

16606127007709.jpg“보안국일까요?”

16606127007714.jpg“아니, 그랬으면 내가 바로 알았을 거다.”

큰 마법이 발생했다면 당연히 보안국이 뒤집혔을 거다. 난리가 났을 텐데 엔버네스는 아직 조용했다.

16606127007709.jpg“……슈토넨까지 말을 달리는 건 무리겠죠. 기차가 다니려면 아직 몇 시간 더 있어야 하고.”

해가 뜨려면 한참 멀었다. 샤를렌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곧장 전투를 할 수 있는 차림으로 벽에 기대섰다.

16606127007714.jpg“그래, 아무래도 슈토넨일 가능성이 크지. 소렐이라면 곧장 이동했을 테고.”

로렌스는 턱을 문질렀다.

16606127007714.jpg“걱정되는구나.”

16606127007709.jpg“그러게요. 오빠는 걱정이 덜 되는데…….”

16606127007714.jpg“그래.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로렌스가 느낄 정도로 큰 마법을 사용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만일 바실리스크가 기어이 라이킨을 삼켰다면, 혼자 남은 소렐이 상대해야 한다. 경험도 거의 없는 대마법사가 지나치게 강한 가디언을 상대할 수 있을까? 너무나 걱정이 컸다. 그때, 갑자기 발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16606127007738.jpg“삐!”

삐삐삐! 여기 좀 보라고! 짜증을 내는 소리에 키가 지나치게 큰 뱀파이어들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그마한 황금색 토끼가 뱅글뱅글 돌며 바닥을 탕탕 두드리고 있었다.

16606127007714.jpg“소렐이 보냈구나!”

당연하지! 토끼는 로렌스에게 대답을 하듯 한 번 신경질적으로 삑, 하고 외친 뒤 대뜸 허리를 세우곤 앞발을 쭉 내밀었다.

16606127007714.jpg“응?”

로렌스가 다시 친절하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사납기만 했다.

16606127007738.jpg“삐익!”

이 답답한 사람들아, 빨리하라고! 어째 성질을 내는 모습이 옛 헬레인 토끼와 아주 똑같다.

16606127007709.jpg“……뭐라는 걸까요?”

샤를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토끼는 파닥파닥 작은 앞발을 자꾸 움직였다.

16606127007714.jpg“글쎄,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잡으라는 것 같구나.”

이렇게? 샤를렌은 아버지가 잡은 토끼 앞발을 보곤, 반대편 앞발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냥 허상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16606127007738.jpg“삐!”

이번엔 조금 밝은 소리로 토끼가 외쳤다. 나만 믿어! 어쩐지 그렇게 들렸지만, 동시에 어째 좀 불안했다.

16606127007709.jpg“어, 어어……, 어어어어!”

샤를렌이 점점 크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끝으로, 부녀는 발레시나스 공작저에서 사라졌다. * 바실리스크는 완전히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를 장악했다. 그 저주받을 생물은 미끄러지듯 뱀파이어를 움직여서 이미 죽은 제물들에게 화답했다. 흑마법사들이 제 몸을 바쳐가며 바란 소원을 뱀들의 왕이 이루어줄 차례였다.

16606127012549.jpg“이, 이놈이……!”

웃다가 숨이 차서 끼륵, 끼르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도 웃는 걸 멈추지 않는 ‘흑마법사들의 입’이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챈 뱀파이어가 검을 높이 들었다. 하지만 대마법사가 훨씬 빨랐다. 싸운 경험은 거의 없으면서도 첫 각성 때 엘펜하임 수뇌부를 다 처리해버린 그녀는 이 아수라장에서도 뭘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 곧장 구분했다.

16606127012549.jpg“끼익……!”

대마법사의 마법에 맞은 흑마법사들의 입은 마지막 숨소리까지 괴상하게 냈다. 일단 바실리스크와 흑마법사 간의 연결고리부터 끊은 소렐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동작으로 움직이는 라이킨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라이킨은 아주 묵직하면서도 가볍고, 또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피도 거의 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잔인했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뱀파이어들조차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16606127012563.jpg“아읏……!”

손을 뻗었던 소렐은 오히려 세게 되돌려지는 마법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지르며 손을 거뒀다. 라이킨을 아무리 막으려 해도 안 된다. 아내가 혹시 넘어질까 봐 걷는 길까지 살피던 남자는 그녀의 신음 소리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바실리스크는 꼿꼿하게 서서 슈토넨 후작을 노려본 뒤, 그대로 쏘아지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16606127007738.jpg“히이이잉!”

후작이 타고 있던 말이 놀랐다. 소렐은 광범위한 마법을 펼쳤다. 황금색 실들이 올올이 얽혀서 거대한 그물을 만들었다. 하지만 바실리스크, 그 형체만 없고 그녀의 마법조차 가디언의 힘으로 끊어내는 존재를 옭아맬 수는 없었다.

16606127012549.jpg“아아악!”

16606127012549.jpg“살려줘!”

16606127012549.jpg“도와줘!”

온갖 비명이 들리다가 마침내 끊어지는 이곳이 바로 지옥 아닐까. 결국 흑마법사들은 지극히 그들다운 뱀들의 왕을 현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소렐은 거대한 바실리스크 앞에서 다시 한번 지독한 무력감을 맛보았다. 아니, 그녀를 괴롭게 하는 건 바실리스크가 아니라 라이킨이었다.

16606127012563.jpg‘내가 뭘 할 수 있지?’

아니, 여기에서 결국 완전히 끝이 아닐까? 라이킨을 구해주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목숨을 내놓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거 아닐까? 소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런 일은 겪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미 손에서 나오고 있는 무시무시한 마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빠짐없이 착실히 준비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야 했다. 비록 고대마법은 여기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끊긴다 해도, 라이킨이 바실리스크와 함께 봉인당해버린다 해도…….

16606127012563.jpg‘그건 안 돼…….’

안 되는 건데. 라이킨은 살아서 꼭 행복해야 하는데. 아무런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여기서 끝이란 말인가. 애써 마음을 다잡고 끌어모았던 용기가 날뛰는 바실리스크 앞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16606127021805.jpg“크으윽…….”

말에서 떨어진 슈토넨 후작이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울린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도대체 그 고생을 뭐하러 했을까.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길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런 고생 따위 하지 않고, 그가 여태까지 경멸만 하던 방식대로 우아하게 모든 걸 정리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할 걸 그랬다.

16606127021805.jpg“으, 으으…….”

그는 눈이 조금 녹아 질척거리는 땅을 발로 밀었다. 진흙이 밀린다. 불빛이라곤 타다가 밟힌 모닥불뿐이다. 이토록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다면 싸우지도 않았을 텐데. 아니, 어쩌다 같은 뱀파이어도 아닌 바실리스크 따위에게 죽는단 말인가. 슈토넨 후작은 떨어진 검을 더듬거리며 주웠다.

16606127021805.jpg“이, 뱀파이어의 자긍심도 없는 놈…….”

가장 고귀한 방식으로 고귀한 뱀파이어가 된 주제에 뱀대가리에게 몸을 빼앗기다니. 슈토넨 후작은 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온 라이킨이 내리치는 검을 힘겹게 막았다. 부딪치는 검 사이로 불꽃이 튀었다.

16606127021805.jpg“정신 차려라! 고결한 칼리에르의 이름을 잊었냐!”

그때 마침 황금색 토끼 두 마리가 네 명의 뱀파이어를 각각 앞발에 매달고 나타났다. 발레시나스 공작저로 뛰어갔던 성질 급한 토끼는 로렌스와 샤를렌을, 글래스턴 공작저로 뛰어갔던 토끼는 마침 잠들지 않았던 조슈아와 소렐의 호위를 맡았던 신시아를 데려왔다.

16606127007709.jpg‘고결한 칼리에르의 이름은 무슨…….’

오빠와 함께 칼리에르라는 이름을 어쩔 수 없이 물려받았던 샤를렌이 마침 도착하면서 슈토넨 후작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16606127007714.jpg“라이킨!”

하지만 로렌스는 아들의 몸 위로 거대한 뱀 머리가 셋이나 솟아나 있는 걸 보고 질겁하며 달려갔다.

16606127012563.jpg“가까이 가시면 안 돼요!”

소렐이 소리를 질렀다. 막 도착한 뱀파이어들은 대마법사의 곁으로 모였다.

16606127012563.jpg“머리를 하나 더 먹었어요. 그런데 흑마법사가 하나 살아 있었고, 죽은 흑마법사들이 모조리 시신을 제물로 바쳐서 거대한 사술을 완성했어요.”

그녀는 헐떡거리며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빠르게 말했다. 라이킨은 바실리스크에게 완전히 잠식당한 상태였다.

16606127012563.jpg“여러분은 절대 막지 못해요.”

소렐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지금도 어떻게든 라이킨을 붙잡아 보려고 그물을 펼쳐 그를 여러 번 묶고 있었다.

16606127012563.jpg“제가……, 제가 해야 해요.”

아무도 막지 못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라이킨은 검을 들고 내리꽂았다. 한 번 막은 건 천운이었지만 두 번은 없다. 슈토넨 후작이 누워 있을 자리에서 피가 튀었다.

16606127012563.jpg“물러나세요.”

바실리스크는 이제 자신을 대적하는 유일한 존재를 향해 돌아섰다. 다른 뱀파이어들은 바실리스크의 눈에 들지도 않을 만큼 미약한 존재였으나, 헬레인의 핏줄을 잇고 고대마법을 물려받은 대마법사만은 군침이 뚝뚝 떨어지는 먹이였다.

16606127012563.jpg“어서요!”

소렐이 날카롭게 말하자마자 로렌스는 뱀파이어들을 물러나게 했다.

16606127012563.jpg“뒤로 멀리 가세요!”

16606127007709.jpg“아버지, 그래도 어떻게 공주님 혼자서 둬요!”

샤를렌이 울부짖듯 말했으나 로렌스는 딸을 가차 없이 끌고 갔다.

16606127007714.jpg“대마법사가 판단하는 거다!”

16606127007709.jpg“하지만……!”

저건 오빠가 아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아버지마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16606127007714.jpg“대마법사를 믿어!”

로렌스는 조슈아와 신시아에게 손짓을 하며 뒤로 멀찍이 빠졌다.

16606127007714.jpg“……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어.”

문제는 대마법사가 스스로를 얼마나 믿고 있느냐다. 대마법사가 된 지 반 년도 채 되지 않은 소렐 이드리스는 검을 늘어뜨린 뱀과 마주했다. 그에겐 온갖 여유와 살기가 넘쳐났다. 아주 안정된 몸을 손에 얻었으니,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 남은 건 더 큰 힘뿐이다. 대마법사와 가디언 사이에 연결된 결합점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디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위험신호를 감지한 것이다. 소렐은 새삼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가디언 없이는 안 되는 대마법사.’ 혹자는 그게 ‘불완전하고 모자라다’라고 표현할지 모르지만, 소렐은 괜찮았다. 모든 의미를 잃고 방황만 하던 그녀를 기어이 찾아와서 다시 살게 해준 라이킨이 있으니까, 그로 인해 완성되는 건 당연했다. 쾅! 온갖 굉음이 주위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바실리스크의 힘과 고대마법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소렐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에게 그가 그렇듯, 그에게도 그녀가 같은 의미라면, 그렇다면 라이킨을 잠시라도 정신 차리게 해서 몸을 되찾게 해주는 방법은 있었다. 그래, 있을 거다. 될 거다. 소렐은 가슴을 펴고 무력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는 바실리스크를 쳐다보았다. 대마법사는 모든 희생을 각오했다.

16606127012563.jpg“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뒤에서 보고 있는 뱀파이어들은 미칠 노릇이었다. 두 손 놓고 구경만 하려고 온 건 아니지 않나. 하지만 로렌스가 단호히 안 된다고 하니, 상황만 계속 파악할 뿐이다. 조마조마하다. 대마법사와 바실리스크의 거리가 좁혀지는 가운데, 주변에 널린 게 시체라 더 끔찍했다. 같은 뱀파이어의 시체라 끔찍한 게 아니다. 그 시체에 남겨진 죽음의 흔적이 두렵고 무서웠다.

16606127007714.jpg“이 근처에 사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근방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라.”

로렌스의 침착한 말에 조슈아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16606127032804.jpg“예, 합하.”

라이킨은, 아니, 바실리스크는 라이킨이 오래도록 아끼면서 모든 전장을 휩쓸 때마다 장비했던 검을 아주 만족스럽게 휘둘렀다. 붉어진 눈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품을 리가 없는 광기로 가득했다. 쾅! 방금 전까지 슈토넨 후작을 비롯한 다른 뱀파이어들과 부딪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요란하게 지축을 뒤흔들었다. 고대의 힘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한쪽은 사악한 뱀들의 왕, 한쪽은 고대마법의 계승자다. 소렐은 입술을 앙다물고 쉴 새 없이 몰아쳐오는 바실리스크의 속도에 밀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사실은 바실리스크의 속도가 아니다. 그를 담고 있는 라이킨의 속도다.

16606127012563.jpg‘이젠 남은 게 없어.’

대마법사는 다홍빛 도톰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라이킨을 잃고 싶지 않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 다른 방법은 없다. 라이킨을 얻어 날개를 단 바실리스크는 고대마법마저 다 뿌리치며 그녀에게로 쇄도해오고 있었다. 황금색 결합점이 물결처럼 일어나 거대한 파도가 되어 주변을 전부 덮었다. 그러나 이젠 라이킨의 몸 위로 일렁이는 거대한 바실리스크를 다 덮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쩌면 아빠라면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바실리스크는 이제 갓 대마법사가 된 소렐에겐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16606127007709.jpg“아악!”

샤를렌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미 로렌스는 희게 질려 굳어버린 이후였다. 라이킨과 소렐이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위에서 검을 세우고 뛰어내리는 뱀파이어를 따라 바실리스크가 입을 크게 벌리며 소렐에게로 내려 꽂혔다. 검은 그 힘을 그대로 실어서 뭐든지 다 뚫어버렸다. 손을 통해 익숙한 감각이, 사람을 뚫는 감각이 느껴진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따뜻한 체온도 느껴졌다. 라이킨은 눈을 부릅떴다. 검 자루를 잡은 그의 손 위로 누군가의 피가 흘러내렸다.

16606127032816.jpg“……아, 안 돼…….”

안 된다. 이런 건 안 된다. 검에 꿰뚫린 소렐이 힘없이 그에게 기댔다. 안 된다고, 입술을 부들부들 떠는 그에게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16606127012563.jpg“아, 돌아왔다.”

목소리도 내지 못해서 겨우 쥐어 짜낸 속삭임을 끝으로, 그녀는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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