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의무와 믿음 (1)2022.03.19.
쉬익, 하고 커다란 뱀이 위협적으로 내는 소리에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은 흑마법사가 반응했다.
‘그분께서……?’
흑마법사들은 차마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뱀들의 왕이 가까이에, 아주 지척에 있었다.
“뭐야, 저게?”
“습격이다!”
‘흑마법사들의 입’으로 뽑혔기에 공교롭게도 동료들이 불타 죽어가는 와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어쩌면 지상에 홀로 남은 흑마법사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흑마법사들의 입’은 저 멀리 산맥의 동굴 안, 어두운 숲속, 버려진 해변 등에서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홀로 웅크리고 있는 동료들이 남아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을 뿌리 뽑으려고 해도 뿌리 뽑지 못할 것이다. 주술과 흑마법은 여전히 구전되고, 또 새로운 흑마법사들에게 물려지고 있으니까.
“설마 칼리에르 공?”
온몸이 묶이고 재갈까지 물려 주문이라곤 하나도 외울 수 없으니 흩어져 있는 한 줌의 동료들만이 희망이던 와중에, 갑자기 주위가 혼란스러워졌다.
“제기랄!”
“리처드!”
“루시, 조심해!”
주변을 삼엄하게 지키던 뱀파이어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고 나갔다.
‘그분이 오셨어!’
두건 아래 재갈이 물린 입이 찢어질 듯 움직였다. 비명이 들려왔다. 흑마법사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소리다. ‘흑마법사들의 입’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손발에 묶인 것을 푸는 건 바라지도 않고 오직 입에 물린 재갈을 어떻게든 풀어내려 애썼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주문을 외워야 했다. 동료들이 지하실에 갇혀 죽어가면서 남긴 주문을 외워야 했다. 바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자, 어서 가!”
소렐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분명히 그들을 걱정하고 있을 사람들에게로 토끼를 두 마리 보냈다. 날쌔게 뛰어서, 날아올라서 허공을 건너 엔버네스까지 질주할 거다. 그녀는 뱀파이어들을 마구 베어 넘기면서 슈토넨 후작에게로 무섭게 접근하는 라이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삐삐 울던 토끼들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라이킨은 아직까지도 슈토넨 후작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만큼 숨어 있던 뱀파이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비겁하긴.’
소렐은 뱀파이어들에게 둘러 싸여 거의 보이지도 않는 슈토넨 후작을 노려보았다. 누군가를 죽이려고 작정했다면 스스로도 각오를 했어야지. 하긴 각오를 하고 방비했기에 이 정도로 많은 뱀파이어들을 동원한 건지도 모른다. 다만, 슈토넨 후작은 그 누구도 뚫지 못했던 슈토넨 요새까지 들어가지 못한 게 유감이었다. 그곳이라면 칼리에르 공을 상대로도 해볼 만했을 텐데 말이다.
“진열을 정비해라!”
슈토넨 후작도 변경백으로 수백 년간 이 나라를 지켰던 몸이다. 그는 우렁차게 명령하며 검을 뽑았지만, 문제는 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눈이 돌아간 칼리에르 공이 그대로 부딪쳐 뱀파이어들을 와르르 무너뜨린다는 거였다. 한마디로 정비 따위를 할 시간도 없었다.
“으아아악!”
차라리 비명이라도 지르면 다행이다. 어떤 이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급소를 꿰뚫린 채 죽었다. 수백 년간 함께해온 검을 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전장의 화신, 올센의 수호자는 분노에 미쳐 날뛰었다.
“……세상에.”
대마법사마저 넋을 잃었다. 라이킨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일은 어찌 보면 참혹한 일이었으나, 지나치게 깨끗하고 단순하게 끝나서 오히려 깔끔해 보이기만 했다. 그저 그가 지나가면 뱀파이어들이 와르르 쓰러질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실리스크 때문이야.’
바실리스크의 네 번째 머리를 잘라 흡수하고, 두 번째 머리 ‘분노’에 동조하여 움직이고 있는 라이킨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에서 바실리스크를 봉인할 마법을 차근차근 준비 중이던 소렐은 그 사실을 깨달은 게 자신만이 아니란 걸 알았다.
“……흑마법사를 불러와. 저놈의 앞에 두지.”
슈토넨 후작은 흑마법사가 바실리스크를 보면 환호할 거라는 걸 알았다. 어차피 바실리스크 때문에라도 딱 한 놈, 말이 통하는 놈만 남겨두고 모조리 죽인 거다. 아껴뒀던 패지만,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코앞까지 당도해서 미쳐 날뛰고 있는데 아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쓸 수 있는 건 모조리 쓰고 도망쳐야 했다.
“예!”
누군가가 슈토넨 후작의 명령을 듣고 서둘러 안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달려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더 황당한 건 발에 걸렸던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멀쩡한 군인이 넘어졌다. 손을 내밀어 그 뱀파이어를 넘어지게 한 소렐의 눈이 불타올랐다.
‘흑마법사를 바실리스크 앞에 둔다고? 미쳤어?’
그들이 접촉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했다. 소렐은 서둘렀다. 바실리스크의 두 번째 머리가 라이킨을 집어삼킨 건지, 아닌지 불확실했다. 라이킨이 통째로 바실리스크와 함께 봉인되고, 소렐이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건 너무나 슬프지만 최선의 방법이 될 거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지혜를 모아서 하나씩…….’
모든 대마법사들의 지혜가 그녀의 머리 안에 있다. 소렐은 크게 외쳤다.
“라이킨!”
“아악!”
“크윽…….”
부른 건 라이킨 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했다. 그들의 머리를 때리는 느낌이 들 만큼 강력한 힘을 담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름의 주인은 그리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부르면 언제나 한결같이 대답한다.
“예, 공주님.”
아주 침착한 목소리다. 소렐은 그 목소리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물론 그녀의 손에서 무섭게 불꽃을 튀기며 뱀파이어들이 흑마법사에게로 가는 것을 막고, 바실리스크도 막으려 하는 마법은 그녀의 표정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살벌했다.
“머리 자르는 거 잊지 말아요.”
바실리스크의 두 번째 머리말이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뜯어낸 뒤 그가 흡수해야만 했다. 그래야 바실리스크의 영향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다.
“아.”
라이킨은 덤덤하게 중얼거리며 다가오던 뱀파이어의 목을 날렸다.
“이미 잘랐습니다.”
그는 싱그럽게 웃었다. 소렐의 표정만큼 환하게 웃어준 뒤, 순식간에 고개를 돌려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말?”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렐의 손에서 일렁이던 마법이 순식간에 모양을 바꿨다.
“아아악!”
쾅, 하는 소음에 마법에 얻어맞은 뱀파이어들이 나가떨어졌다. 방긋 웃은 대마법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바실리스크의 머리를 두 개나 잘랐다고? 그렇다면 나머지 세 개도 다 잘라다가 흡수해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소렐은 혹시 바실리스크가 일부러 라이킨의 의식을 뒤흔들며 거짓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그를 유심히 살펴보며 확인하고, 뒤에서 그를 도왔지만 라이킨은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슈토넨 후작에 대한 분노 때문에 더 머리가 맑아진 모양이다. 그래서 두 번째 머리를 흡수할 수 있었던 걸까?
‘너무 좋아하진 말고, 주의해야 해.’
소렐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가 처음으로 해보는 대규모 전투에 임했다. 뱀파이어들이 이 작은 곳에 어찌나 많은지, 라이킨이 날뛰고 있는데도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긴 슈토넨을 지키던 변경백이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엄밀히 라이킨과 소렐은 슈토넨 후작을 기습한 것이었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이들은 우왕좌왕하며 쓸려나갔다.
“흑마법사를 불러오라니까!”
이젠 슈토넨 후작의 목에서도 쇳소리가 났다. 상대는 바실리스크의 힘을 흡수하기까지 한 전쟁 귀신에, 대마법사까지 있다. 물론 슈토넨 후작에게도 지난가을 동안, 라이킨이 쓸어버린 뱀파이어 강경파의 잔당들이 다 몰려와서 세력을 오히려 불리긴 했다. 하지만 대마법사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흑마법사 없이는 불가능했다.
“아아악!”
비명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슈토넨 후작의 곁을 성실히 지키던 뱀파이어가 죽음을 각오하고 흑마법사가 묶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어두운 땅 위에는 뱀파이어 수십이 쓰러져 있었다.
“대마법사를 공격해라!”
간신히 정신을 차린 뱀파이어들이 활을 집어 들었다.
“……이 새끼들이 어딜 감히…….”
으스스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라이킨은 이제 완전히 전장을 휘젓고 돌아다니던 때로 돌아왔다. 글래스턴에 조용히 틀어박혀 학문만 연구하는 점잖은 교수의 모습은 솔직히 대충 둘러쓴 껍질에 불과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적들이 증오하고 저주했지만 끝내 피가 잔뜩 묻은 승리를 거머쥔 공포 그 자체가 날뛰었다.
“으아악!”
뱀파이어들이 무참히 쓰러진다. 그사이 슈토넨 후작의 가장 가까운 부하는 동료들의 희생을 딛고 흑마법사가 있는 곳으로 겨우 도달했다.
“……어디 갔……, 네이놈!”
그는 끙끙대며 기어가고 있는 흑마법사의 입을 발견하곤 얼른 끌고 왔다. 밖으로 나가면 또 아수라장이다. 뱀파이어는 흑마법사에게 물린 재갈을 재빨리 풀었다.
“저기 바실리스크가 있다!”
흑마법사들은 감히 부르지도 못하는 이름이 함부로 불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도 턱 밑까지 들이대졌다.
“살고 싶다면 여기에서 목숨값이라도 해.”
이제 라이킨은 겨우 십여 명의 뱀파이어만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창백하게 질려 어떻게든 대피하려고 말을 찾는 슈토넨 후작이 있다. 멍하니 더듬거리기만 하던 흑마법사의 입술이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살고 싶지 않아.”
그러나 그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라이킨이 뒤집어엎고 있는 주변 소음에 묻혀버렸다.
“썅, 뭐 저런 게 다 있어?”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칼리에르 공이 날뛰어대는 것에 더해 대마법사가 돕는 것까지 합하자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온다. 욕이 터져 나오는 사이, 흑마법사는 주저앉아서 뭐라 중얼거렸다. 슈토넨 후작은 처음에는 그게 제대로 주문을 외우는 줄 알았다. ……우리의 원한을……
“어서 빠져나가십쇼!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죽음으로 완성된 복수를…… 슈토넨 후작은 부하들의 외침에 간신히 말에 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부탁하지!”
……우리가 몸 바쳐 완성한 제물로……
“안 돼!”
갑자기 대마법사가 비명을 질렀다.
“흑마법사를 보호해라!”
감이 좋은 슈토넨 후작이 바로 명령했다. 뱀파이어들이 빠르게 슈토넨 후작과 흑마법사를 감쌌다.
“라이킨!”
안 돼.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대마법사도 바로 막을 수 없는 게 있다. 아니, 사실은 막을 수 없는 게 많았다. 펠릭스 이드리스가 사랑하는 이를 지나치게 일찍 잃었듯이, 소렐 이드리스 또한 사랑하는 이가 갑자기 멈춰 서서는 눈을 부릅뜨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다. 아무리 마법을 사용해도 먹혀들지 않는다.
“라이킨, 제발 정신, 아윽……!”
그에게 아무리 다가가려고 해도 마법이 오히려 부딪쳐 나왔다. 끔찍한 원한이 갑자기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원한들이 튀어나온 건가? 이런 짓을 할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 ……우리의 보복을. 그리고 궁극의 목적을. 지하실에서 끔찍하게 죽어간 흑마법사들은 그냥 죽지 않았다. 시신을 제물로 삼아 사술을 거는 게 특기인 집단답게 그들의 죽음조차 제물 삼아 후일을 기약했다. 불에 스스로를 태워가며 보복을 준비했다. 그 보복은 살아남은 자가 책임지고 완성했다. 그래서 혼자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의 입’은 거침없이 주문을 외웠다.
“크아아아악!”
이번에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것을 질러댄 건 슈토넨 후작의 부하들이 아니라 바로 라이킨이었다. 소렐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대마법사의 황금색 마법이 그를 어떻게든 감싸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수십, 아니, 백 명에 가까운 이들의 죽음으로 완성한 마법은 지나치게 거대했다.
“그래……. 그거지.”
슈토넨 후작의 늙어 주름진 입가가 떨렸다. 이러려고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던 거지. 대마법사, 저 뱀파이어마저 움직여서 다른 뱀파이어들을 도륙하는 위험한 존재를 대적하려고 손을 잡았던 거지. 어쨌든 그의 선택은 틀린 게 아니었다.
“왕이시여.”
흑마법사들의 입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 바실리스크를 불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라이킨의 거대한 몸 위로, 다시 한번 뱀의 형상이 어른거렸다.
“안 돼, 라이킨!”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애원하는 소렐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걸까. 두 번째 머리 ‘분노’에 비하면 흐릿하게 나타나다가 사라지기만 했던 나머지 머리 셋이 동시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슈토넨 후작은 점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저 정도 크기라면 대마법사, 저 어리고 어설픈 것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겠다! 더구나 바실리스크를 담고 있는 그릇은 ‘그’ 칼리에르가 아닌가! 원래 내 적이었던 존재가 갑자기 동료가 되면 그토록 든든한 것도 없는 법이다.
“라이킨, 정신 차려요!”
소렐은 그녀의 남편이자 가디언에게 끊임없이 말하며 그들의 단단한 결합점을 흔들어도 보고, 신호도 보내보았다. 하지만 빳빳하게 일어선 바실리스크의 머리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라이킨은 그녀를 돌아보며 더 이상 웃어주지도 않았다.
“……으응?”
슈토넨 후작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뱀의 머리들은 전부 다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대마법사를 공격하지 않는 거지?”
히히, 히……! 간신히 주저앉은 흑마법사들의 입이 낄낄 웃었다. 설마 먼저 그러라고 바실리스크를 불러냈겠는가. 그의 동료들은, 그리고 그는 슈토넨 후작을 결코 행복하게 해줄 생각이 없었다. 둘은 제거되었으나 아직 셋이 남은 바실리스크는 자신을 끝내 이 세계에 완전히 불러낸 흑마법사들의 소원을 들었다. 복수를! 라이킨의 초점 잃은 눈이 슈토넨 후작에게 향했다. 흑마법사들의 입은 제대로 숨도 못 쉬면서도 계속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