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암투 (7)2022.03.16.
“자, 라이킨, 착하지요?”
아니, 이게 아닌가? 올센 보안국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바실리스크가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소렐은 어떻게 하면 바실리스크에게 의식을 또 잠식당할 위기인 남편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 열심히 고민했다. 물론 그녀의 손에는 여차하면 남편을 세게 때려서 기절시켜버릴 정도로 위력적인 마법이 황금빛을 내며 일렁이는 중이었다.
“이성을 찾고, 침착하게…….”
아니, 이것도 아닌가? 음, 그래. 그냥 때리자. 머리를 한 대 세게 때려서 기절시키는 게 더 낫겠다.
“이성…….”
아니지! 이성을 강조했는데 그녀가 이성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세 번 정도는 말이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남편이 아주 혹할 만한 것으로, 바실리스크의 잠식과 분노마저 이겨낼 만한 것으로 말이다!
“참으면 내가 키스해줄게요!”
내뱉고 보니 너무 얄팍한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키스야 이제는 입술이 닳아 사라질 정도로 많이 하는 애정 표현이잖나.
“꼭 안아주고 하루종일 라이킨이랑만 있을게요! 연구도 안 할게!”
“밤까지.”
얼굴이 새빨개진 소렐이 열심히 말하는 중간에 끼어든 거친 목소리가 난폭하게 말했다.
“아, 정신 차렸네.”
토끼 공주님은 언제 그런 약속을 하려고 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뻔뻔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갑자기 못 차릴 것 같습니다.”
“머리 하나는 이미 꿀꺽했잖아요! 정신 차려봐요! 라이킨은 할 수 있어요!”
소렐은 그를 다그치며 그와의 연결을 더 강화하려고 애썼다. 두 사람 사이의 결합점이 무섭게 빛나며 쨍, 하고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저는 하나고 이놈은 머리가 넷…….”
라이킨의 말이 뚝 끊기더니, 다시 쉭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르기만 하던 그의 눈에 붉은빛이 돌았다. 소렐은 이쯤에서 말은 포기하고 행동으로 나서기로 했다.
“좀 아파요. 나중에 봐요.”
그녀는 황금빛이 일렁이는 손을 높이 들었다. 이쯤이면 남편의 머리를 세게 치기에 딱 좋은 각도일 거다. 하지만 라이킨이, 아니, 바실리스크가 그녀의 손목을 턱 잡았다. 아, 잡았다, 이거지? 소렐의 표정이 더 살벌해졌다. 순식간에 퍽, 하는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잡힌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남편을 세게 후려친 소렐은 그가 비틀거리는 사이 잡힌 것을 떨치고 거리를 벌렸다. 그냥 기절시키도록 하자. 여기에서 바실리스크가 깨어났다간 수습이 어려워진다. 정말 소렐이 신 헬레인 왕국의 여왕이 되는 사태가 올 수도 있었다. 헬레인 토끼도 없는 헬레인 왕국이라니.
“공주…….”
신음처럼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정신 차린 거였어? 소렐은 일단 내지르고 봤던 주먹을 내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정신 차렸습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대답했지만 대마법사는 다시 황금빛 마법이 똘똘 뭉친 주먹을 들었다.
“정말?”
교활한 고대의 존재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이미 편지에 세밀하게 심어진 사술이 바실리스크를 자극했다는 것까지 파악한 대마법사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뻗어 나온 황금색 선이 라이킨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묶으려는 순간, 라이킨은 붉은 눈을 빛내며 소렐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대마법사는 한숨을 쉬었다. 사지가 붙잡힌 남자의 복부에 마법이 정통으로 꽂혔다. 윽, 하고 신음을 흘린 그는 팔과 다리를 완전히 결박당한 상황에서도 움직였다.
“……아서…….”
대마법사의 황금색 눈에 뻣뻣하게 일어나는 바실리스크의 머리 하나가 보였다. ‘바실리스크의 두 번째 머리, 분노.’ 사술에 의해 힘이 강해진 바실리스크의 머리 중 ‘분노’가 라이킨의 분노에 반응하여 동화되고 있었다.
“……모드릭 헴피온…….”
그놈을 불러와! 빠드득 이를 갈던 바실리스크의 머리가 외쳤다. 혹은 라이킨이 외쳤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소렐은 빠르게 판단하고, 내던져진 서류철을 다시 제자리에 감쪽같이 돌려놓음과 동시에 라이킨과 함께 보안국 기밀문서보관실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찬바람이 대마법사의 뽀얀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녀가 입은 부드럽고 따뜻한 망토도 휙 날렸다. 이 세대의 대마법사는 자신의 남편이자 바실리스크를 대적하고 있었다. 소렐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불안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신 차리게 해서 집으로 데리고 가야지!’
그녀의 목적은 아주 뚜렷하고 분명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바실리스크 따위에게 당할 생각도 없었다. 대마법사는 이길 것이다. 이겨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비록 그녀가 이제 막 마법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풋내기라고 해도 대마법사는 대마법사고, 머리 하나가 잘린 바실리스크는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라이킨을 믿었다. 그리고 여러 위기를 거치고 여기까지 온 자신도 믿었다. 아서 모드릭 헴피온! 아, 물론 바실리스크의 분노가 그녀에게 오롯이 향하는 건 좀 많이 억울했다. 그녀의 이름은 소렐 이드리스이지 아서 모드릭 헴피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렐은 그래서 라이킨을, 혹은 바실리스크를 슈토넨으로 끌고 온 참이었다. 오랫동안 국경의 요새 역할을 해왔던, 그러나 이젠 그 기능을 거의 다 상실한 옛 관문이다. 라이킨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바실리스크의 머리 중 ‘분노’는 그의 분노에 반응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저걸 막아야 하나……?’
소렐은 잠시 아리까리해졌다. 라이킨은 이미 바실리스크의 머리 하나를 제 것으로 흡수해버렸다. 말도 안 되게 강력한 뱀파이어가 또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크윽…….”
얼굴을 일그러뜨린 라이킨의 위로 뱀의 형상이 푸르게 일렁거렸다. 그 형상을 보던 소렐은 지금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던 손을 멀리 뻗었다. 설원 위에 황금색 토끼 한 마리가 퐁, 하고 튀어나왔다.
“슈토넨 후작을 찾아!”
토끼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나중에는 열 마리로 불어나서 무섭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변경백, 이 개…….”
라이킨의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욕설이 쉭쉭대는 뱀의 위협적인 소리에 묻혔다. 소렐은 라이킨의 전신을 결박한 채, 푸른 뱀의 허상을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뱀의 머리가 나타나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내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게 아마 두 번째 머리 ‘분노’일 거다. 솔직히 소렐도 이 설원에서 소리를 버럭 지르고, 잘하지도 못하는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고 싶었다. 흑마법사들은 곳곳에 바실리스크를 자극하여 결국 라이킨의 몸을 차지할 수 있도록 돕는 사술을 숨겨두었다.
‘……동화. 아니면 봉인뿐.’
우드득, 하고 라이킨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마법의 일부분이 뜯겨져 나갔다. 아무리 육체를 잃고, 머리 하나도 잃었다 해도 상대는 뱀들의 왕. 소렐 역시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남편을 지키고, 나아가 바실리스크가 해를 끼칠 모든 연약한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그녀는 손을 뻗은 채 한 번도 써본 적 없던 거대한 마법을 부르기 시작했다. * 늦게까지 자고 있지 않았던 로렌스 오블리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세게 일어났는지, 그만 의자가 뒤로 넘어가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샤를렌! 샤를렌, 얘야!”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안대를 눌러 쓰고 잠들었던 샤를렌도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아우, 뭐야, 어우…….”
“샤를렌!”
위층으로 올라온 아버지가 요란하게 방문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온통 캄캄한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늦게 자신이 안대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샤를렌은 간신히 안대를 밀어젖히고 엉금엉금 침대에서 내려왔다.
“일어나라! 어서!”
“깼어요, 깼어, 왜요?”
급히 가운을 챙겨 입고 방문으로 달려가 문을 연 그녀는 평소보다 더 심각하고 창백해 보이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았다.
“우리 소렐이 아주 큰 마법을, 나라 전체를 움직일 마법을 쓰고 있다.”
샤를렌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그녀는 다시 방 안으로 달려갔다.
“준비하고 나와라!”
“네!”
로렌스는 또다시 복도를 달려갔다. 엔버네스의 발레시나스 공작저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 모든 게 다 생각대로 되는 건 결코 아니다. 소렐은 바실리스크를 봉인해버릴 마법을 시작하면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봤다. 만약 그녀가 실패한다면, 혹은 만약 그녀가 목숨을 바쳐야 할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이킨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실리스크에게 몸을 내줘서 이 세상을 파괴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은 막을 거다. 비록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해도 막을 거다. 하지만 목숨까지 거는 건 이 세상에서 얼마 살지도 않았고, 이제 겨우 신혼인 소렐에게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
“라이킨, 화를 좀 가라앉혀 봐요! 나랑 오래 살기 싫은 거냐고요!”
소리를 질러봤자 돌아오는 건 더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위협적으로 입을 쩍쩍 벌려대는 바실리스크의 머리밖에 없다. 그나마 ‘분노’ 하나만 선명하게 보인다는 게 다행이다. 나머지 머리 세 개까지 보인다면 정말 가망이 없었을 테니까.
“삐!”
삐삐! 삐약! 발치에서 요란하게 부르는 소리에 소렐이 고개를 휙 돌렸다. 다행히도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해주는 이가 또 있었다. 토끼 아홉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서 뒷발을 탕탕 구르고, 코를 움찔대며 저마다 오지 않은 친구가 하나 있다고 표시하고 있었다. 벌써 찾아낸 것이다.
“아, 고마워! 먼저 가!”
타닷, 하고 아홉 마리 황금색 토끼가 오지 않은 친구들을 향해 달려갔다. 소렐은 다시 한번 라이킨을 세게 묶었다. 이렇게 살벌하게 남편을 포박하는 아내도 없을 거다.
“찾았대요. 찾았으니까 가자고! 나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슈토넨 후작한테 화내요!”
대마법사는 그녀가 찾던 뱀파이어가 바로 여기 있다고 삐삐 소리치는 단 한 마리의 토끼를 향해 다시 한번 이동마법을 사용했다. 눈 한 번 깜짝하는 사이에 슈토넨 후작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대마법사와, 격노한 칼리에르 공, 그리고 그 분노에 춤을 추고 있는 바실리스크까지 대면해야 했다.
“삐!”
저놈이야? 저놈이야! 저놈이네! 자그마한 황금색 토끼 열 마리가 칼을 빼들고 있는 뱀파이어들 너머, 슈토넨 후작 쪽을 가리키며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토끼 한 마리가 순식간에 열 마리로 불어난 것에 대해 신경을 쓸 시간도 없었다. 추위와 눈을 뚫고 나타난 대마법사는 뒤에 무시무시한 것을 달고 왔다.
“아.”
고개를 든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선명하게 웃었다.
“변경백.”
저건 바실리스크가 말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 말하는 거다. 소렐은 조금이나마 안심하며 빠르게 슈토넨 후작 측을 살폈다. 계속해서 이동하다가 잠시 머무는 작은 거처에 불이 피워졌고, 그 불로 인해 여러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가 살벌하게 일렁였다.
“여기 있었어?”
잘됐네. 한가하게 말한 라이킨은 소렐의 의도대로 정확하게 슈토넨 후작을 노려보았다. 일단 다행이다. 대마법사는 날뛰려고 꿈틀대는 남편을 보며 한숨을 돌렸다. 그가 그녀를 공격한다면 수습을 할 정신도 없겠지만, 지금은 시간을 좀 벌었다.
“대, 대마법사다!”
어떤 뱀파이어는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다.
“공주님.”
우드드득, 마법이 또 뜯겨나갔다. 정확하게 분노의 대상을 발견한 바실리스크를 막긴 역부족이었다.
“이거, 풀어주십시오.”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 붉은빛이 일렁였으나, 초점이 나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슈토넨 후작 무리를 두고 혼자 싸울 마음이라곤 요만큼도 없었던 소렐은 라이킨을 결박했던 마법을 모조리 풀어냈다. 몸이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라이킨은 검을 빼들고 슈토넨 후작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를 지키고 있는 수십 명의 뱀파이어들 따위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차가운 검이 모닥불 빛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슈토넨 후작도 당장 검을 빼들었다.
‘……분노에 매몰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소렐은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뱀파이어들을 상대하며, 초조하게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정신없이 싸우는 사이, 슈토넨 후작이 머무르던 처소 구석에는 손발이 묶이고 재갈도 물려진 ‘흑마법사들의 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