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암투 (6)2022.03.12.
천 년 동안 적들의 숨통을 조였다가 끝내 끊어놓기로 유명한 칼리에르 공의 흔한 수법을 아시는가. 그는 상대방을 곧장 먼지 한 톨 안 나올 때까지 샅샅이 턴 뒤, 치명적인 약점부터 사소한 일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나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움직였다. 그 작업이 그에겐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손가락만 한 번 까딱하면 정보부터 죽음까지 바로 끝나니,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소름 돋는 일이다. 차라리 요 몇 달간 칼리에르 공이 미쳐 날뛰면서 닥치는 대로 암살을 해버리는 쪽이 더 일반적이고 익숙한 방식이었다.
‘그런 사람이니, 전하께서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분명히 슈토넨 후작은 증거를 건네면서 왕세자에게 경고했지만, 왕세자는 그렇다 해서 이 일을 숨길 수는 없었다. 무려 반역이다! 그냥 넘어간다면 침묵하는 왕세자까지 공범인 거다!
‘이 일은 이 나라의 운명이 달린 일입니다.’
하지만 말이다. 왕세자 라이오넬 빌헬름 앨버트는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솔직히, 뱀파이어들끼리 싸우는 게 그의 입맛에 맞는 거지, 그가 직접 나서서 칼리에르 공과 대적하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뱀파이어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칼리에르 공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왕세자도 잘 알고 있었다. 살아있는 전설을 상대로 한다면 슈토넨 후작도 어렵다는 건가.
‘……오래 묵은 뱀 같은, 교활한 노인네.’
가만히 앉아서 어설프게 혼자 칼리에르 공을 상대할 줄 알고? 그럴 수야 없지.
“……슈토넨 후작에게 앓는 소리를 계속해야지.”
그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직 어리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왕세자가 이 일을 도저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우는 소리를 계속했으니, 아쉬운 게 많은 슈토넨 후작이 또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다. 칼리에르 공은 반역으로 잡고, 슈토넨 후작은 칼리에르 공과 잔뜩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잡으면 되는 일 아닌가. 이쯤이면 슈토넨 후작이 반응할 때도 됐다. * 그러니까 이건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적을 잡는 습관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궁금한 건 못 참는 공주님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대체 우리 남편을 반역 혐의로 엮을 만큼 거대한 증거가 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다! 눈이 이글거리던 소렐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라이킨, 그 증거란 거 말이에요.”
“예.”
온몸이 투명해진 채로 소렐과 함께 천천히 걸어가던 라이킨이 대답했다. 사람들에겐 두 사람의 인기척이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발견하면 없애버릴 거예요?”
“아닙니다. 그랬다간 왕실이 더 거부반응을 일으킬 테니까요.”
모든 정황이 칼리에르 공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왕은 더 뱀파이어들을 경계할 거다. 안 그래도 소렐이 헬레인의 유일한 후계자입네, 하고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상황에서 그건 귀찮았다. 정말 귀찮았다.
“무엇인지 확인만 하고, 그에 대한 방비를 세워야지요. ……사실 확인한 후에는 그냥 쫓아가서 목을 베어버릴 것 같긴 합니다만.”
라이킨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될까요?”
“이미 국왕폐하께 말씀도 올렸고, 공주님께서 카메론 셀레스트까지 세워놨으니 우리 쪽 구색은 다 갖춘 셈입니다. ……대충 하지요.”
귀찮은데. 라이킨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적들에게 아주 많은 정성을 들이지는 않았다. 헤아리는 건 이쯤이면 됐다. 감히 아내를 운운한 새끼들을 아내와 아버지 때문에 참 많이 봐주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카메론 셀레스트부터 슈토넨 후작, 왕세자까지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텐데. 천 년 동안 검은 아주 확실한 처리 방법이었다.
“대충……? 어떻게 반역 혐의로 모함을 당했는데 대충해요?”
소렐은 걸어가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라이킨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반역증거만 찾고 빠져나오면 되고, 저쪽은 우리 목을 노리고 있는 적이고. 저는 적이란 걸 확인하면 일단 목부터 따…….”
아차. 라이킨은 공주님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따버리고……?”
그러나 너무 늦었다. 공주님께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다 아셨다.
“……그 후에 나머지를 생각하는 걸로……, 예, 그런 식입니다.”
소렐은 그를 쳐다보다가, 라이킨이 찔끔하는 사이 고개를 흔들곤 먼저 걸어 나갔다. 그들은 이미 보안국 서류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서류창고에 서 있었다. 당연히 이곳도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장소다. 공개가 금지된, 그러나 중요한 서류들이 이곳에 가득하니까.
“……이런 곳에서 형체도 모르는 물건을 찾으려면 꽤나 애를 먹겠습니다만.”
라이킨은 거대한 책장들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애를 먹으라고 이런 곳에 가져다놨겠지요. 보안국이 가장 사랑하는 건 서류입니다.”
“서류를 사랑해요?”
소렐이 눈썹을 모았다. 이 곰팡내 나는 종이들을 사랑한다고?
“사실 모든 관료주의가 다 서류를 사랑하지요.”
“으음. 라이킨은 아니군요. 라이킨은 목을 따는 걸 사랑…….”
“이쪽으로 오시지요, 공주님.”
그는 서둘러 소렐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빽빽한 서류창고의 끝에는 딱 봐도 수상할 정도로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아?”
소렐의 눈이 커졌다. 토끼 귀가 튀어나와 있었다면 쫑긋거렸을 거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철문에 바짝 다가섰다. 이 건물을 설계한 남자가 웃었다.
“뭔가가 느껴지십니까?”
“응, 네. 라이킨의 흔적이 느껴져요.”
“제가 설계한 곳이라 그럴까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라이킨의 일부가 약하게 느껴져요. 들어가야겠네요.”
딱 봐도 슈토넨 후작이 제보했다는 소위 반역증거가 저 안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제가 뚫어보지요.”
소렐이 당장 마법으로 철문을 어떻게 하려는 걸, 라이킨이 말렸다. 공주님은 다 좋은데 한번 꽂히면 성격이 그보다 더 급해지는 게 문제였다.
“마법으로 할 수 있는데……?”
“보통 평범한 문이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렇구나. 소렐은 조금 뒤로 물러났다. 저 철문 뒤에서 라이킨의 흔적이 그녀를 자꾸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계속 철문을 쳐다보았다. *
“……엔버네스로 다시 가야겠군.”
슈토넨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왕세자가 도저히 혼자서는 칼리에르 공을 상대하기가 힘든가 보다. 국왕은 아직까지도 발레시나스 공작을 의지하나 보지? 아니면 후작이 제공한 반역 혐의에 대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나? 하긴 왕세자는 어리다. 전면에 내세우기엔 왕보다 훨씬 약했다. 슈토넨 후작의 눈은 요즘 바쁘게 돌아다니는 그가 꼭 대동하고 다니는 수상한 인물에게로 향했다. 입에 재갈을 물린 ‘흑마법사들의 입’, 유일하게 화재에서 빼돌려진 흑마법사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증거에 쓸데없는 짓을 해놓은 건 아니겠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뒷덜미를 노릴 증거는 슈토넨 후작이 만들어낸 것과 흑마법사들의 사술을 섞어 아주 그럴듯하게 완성되었다. 완성해놓고도 수없이 확인한 후에 왕에게 보냈으니, 별 탈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니라면 일단 저 흑마법사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던 놈을 뱀들이 득시글대는 구덩이에 던져버릴 테니까.
“바로 가시겠습니까?”
부하들의 질문에 슈토넨 후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의해서 천천히 이동하지.”
“예.”
동료들이 끔찍하게 다 타죽고 혼자 남은 흑마법사의 얼굴에는 얼룩덜룩한 멍이며 상처가 가득했다. 죽도록 슈토넨 후작을 노려보며 저주를 하려다가 두들겨 맞은 흔적들이다. 손발이 묶이고 재갈까지 물린 ‘흑마법사들의 입’은 이젠 포기했는지 조용했다. 슈토넨 후작은 신중하게 경로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되, 절대 칼리에르 공에게 잡혀선 안 된다. 이미 그는 칼리에르 공, 그 전장의 미친놈을 자극할 만큼 자극했다. * 라이킨은 소리 없이 조용히 두터운 철문을 열었다. 원리는 글래스턴 은행 금고문과 똑같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깔끔하게 열 수 있었다.
‘여길 만든 지가 언젠데……, 여기도 철문을 좀 바꿔달아야겠군.’
물론 그거야 이젠 보안국장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철문 안에도 서류가 가득했다. 서류뿐만 아니라 영 수상해 보이는 보석이며 편지, 혹은 단검 같은 무기들도 있었다. 전부 보안국이 다뤘던 수상쩍은 사건에 관련된 물건들일 거다. 어차피 이 수많은 물건 사이에서 그들이 필요한 소위 ‘증거’는 소렐이 찾는 게 빠를 테니, 라이킨은 걸음을 늦추면서 그런 증거들을 슬쩍 훑어보았다. 그사이 소렐은 당장 라이킨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튀어 나갔다.
“장갑 끼셨지요, 공주님?”
“네, 조심해서 만질 거예요! 물론 웬만한 사술은 나한테 별 거 아니란 거 알잖아요?”
그러니 라이킨은 아주 느긋하게 기다리고만 있었다. 소렐이 가장 안쪽에서 집어 드는 서류철은 아주 얄팍했다. 그래, 뭐 그리 두꺼울 필요도 없을 거라는 건 알았다. 그녀가 서류철을 펴고, 내용을 읽는 모양이다. 그는 한때 글래스턴 은행 금고에 잠들어 있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붉은 루비를 보며 흥미로워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공주님?”
소렐의 눈이 뚫어져라 종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종이의 어느 한 부분만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라이킨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까만 눈에 초점이 사라진 채, 선명하게 검붉은 글자를 보고 있었다. 그것만을 보고 있었다.
“공주님? 공주, 젠장!”
그게 피로 쓴 자신의 이름이란 걸 알아차리는 순간 라이킨은 소렐의 손에서 당장 얄팍한 서류철을 낚아채고 던져버렸다.
“공주님!”
라이킨은 소렐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는 아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 알았다. 강제로 각성할 때와 똑같은 매개다. 그의 피로 그가 직접 서명한 이름을 통해 당시에 그가 했던 잔인한 말들을 또 듣고 있는 거다. 애완토끼니 뭐니, 하는 그런 꾸며낸 말들.
“공주님, 저를 보십시오! 공주님!”
까만 눈에 초점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만큼 그를 두렵게 하는 것도 없었다. 소렐이 그를 보고 있지 않다. 그가 아니라, 그녀를 너무 아프게 했던 저 먼 과거를 선명하게 보고 있다.
“공주님, 제발……!”
또 나를 놓지 말아줘. 혹시라도 또 그를 두고 가버릴까, 눌러놨던 상처가 또 튀어나와서 그를 뒤흔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라이킨은 순식간에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는 소렐의 따뜻한 손이 그의 손목을 잡을 때까지 거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
까만 눈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그녀는 라이킨과 마찬가지로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괜찮아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한다. 라이킨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걸 보셨…….”
“응, 맞아요.”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봤던, 라이킨이 뱀파이어 협정서에 서명하면서 나에 대해 말하는 장면을 본 거예요. 어차피 피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거기서 거기니까.”
애완토끼 어쩌고 하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소렐은 이상하게 침착해서 라이킨을 더 불안하게 했다.
“가디언의 피는 나한테 무척 큰 영향을 미쳐요. 마주할 때마다 안 볼 수가 없어.”
소렐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아프거나 힘든 건 아니지만, 라이킨이 그녀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무시무시하다.
“괜찮으십니까?”
“응, 여러 번 봤던 장면인걸요.”
떠돌아다니면서 가끔 일부러라도 더 보고, 보고 나서 펑펑 울던 장면이다. 소렐은 라이킨의 표정이 더 심각해지는 걸 보곤 얼른 웃었다.
“이젠 괜찮아요. 라이킨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잘 아니까.”
하지만 라이킨은 괜찮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소렐을 잡고 있던 손을 툭 떨어트리다가, 고개를 돌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서류철을 바라보았다.
“아, 막상 내용은 제대로 못 읽었네요.”
라이킨은 뚜벅뚜벅 걸어가서 던졌던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나풀대는 종이의 내용이야 뻔했다. 라이킨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슬쩍 돌려서 계획을 말하는 것처럼 꾸며진 편지는 쓸데없이 길었지만, 축약하자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마법사를 새로운 헬레인 왕국의 여왕으로 즉위시킨다. 글래스턴 공작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글래스턴을 헬레인 왕국에 편입시킨다. 어차피 글래스턴 공작이 발레시나스 공작위도 물려받을 테니, 발레시나스도 헬레인 왕국에 따라간다. 순식간에 글래스턴과 발레시나스라는 알짜배기 영토를 잃을 올센왕국은 펄쩍 뛰겠지만, 라이킨은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하고 뻔한 ‘반역계획’에 끄트머리에는 그의 서명이 붙어 있었다. 뱀파이어 협정서에 서명했던 바로 그 피의 흔적이 선명하게 옮겨져 있었다.
“아, 뭐야……. 너무 뻔하고 허접한 위조 사술…….”
발돋움을 해서 라이킨의 두터운 팔뚝 너머로 꾸며진 편지내용을 읽던 소렐이 푸, 하고 지루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팍 들었다.
“어, 라이킨?”
어라, 좀 이상한데. 소렐은 손을 뻗어 서류철을 잡으려고 했지만, 라이킨의 손은 훨씬 높이 있어서 가지고 가는 게 불가능했다. 물리적으로 안 된다면 마법이다. 손에서 순식간에 편지를 가장한 위조서류가 쑥 빠져나가자 라이킨의 눈이 소렐에게로 휙 돌아갔다.
“……맙소사.”
그 사나운 눈과 마주한 소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슈토넨 후작은 아마 이 증거가 왕의 앞에서 칼리에르 공과 대면하도록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실리스크가 왕 앞에서 나타나면, 칼리에르 공은 빼도 박도 못하고 죄인이 될 테니까. ……뱀들의 왕이시여…… 바실리스크에게는 아직 잘리지 않은 머리가 네 개나 남아 있었다. 소렐은 제 가디언의 눈에 깃든 분노를 보고, 증거에 잠들어 있던 사술이 누굴 향한 건지 알아차렸다. 쉬익, 하고 뱀이 혀를 날름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이제 갓 대마법사가 된 지 얼마 안 되는 햇병아리, 아니, 토끼는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무시무시한 마법을 불러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