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암투 (4)2022.03.05.
‘자, 우리는 얼른 증거를 찾아야 해요.’
눈만 마주쳐도 불이 붙는 신혼인데, 불이 붙다 못해 혼자 타오르고 재가 되는 건 라이킨뿐인 건가. 소렐은 달콤한 키스 후에 곧장 왕궁에 몰래 들어온 목적에 충실했고, 그는 끙 소리를 내며 소렐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보안국에 있을까요? 거긴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들어가는 게 조금 난감할 텐데.’
‘어딘들 보안이 삼엄하지 않겠습니까.’
라이킨은 키스할 때는 간신히 뿌리쳤으나,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따라붙는 시선들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왕궁을 벗어나는 척하고 있었다. 소렐과는 달리 그는 지금 사람들의 눈에 보이니까.
‘왕의 집무실 책장 서랍, 보안국 비밀금고 정도가 지금 유력한 후보입니다.’
‘아, 그래요? 난 또 왕실 보물창고부터 뒤져야 하는 줄 알았네. 알겠어요.’
‘……예?’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공주님?’
라이킨은 걸음을 멈췄다. 소렐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굳었다.
‘공주님! 혼자 어딜, 돌아오세요!’
아니, 사실 그는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잠시 이동해서 물건만 확인하고 돌아오면 그만이다. 하지만 라이킨의 손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크게 잃었던 사람은 작은 신호에도 공포에 질리기 마련이다. 공포, 그래, 공포였다. 영지 전체를 몰살하고 부모님마저 살해한 ‘그 여자’와 마주했던 공포, 처음으로 전장에 나섰던 열 살 때 느꼈던 공포가 그에게 다시 찾아왔다.
‘공주님!’
라이킨은 빠르게 돌아섰다. 까만 머리를 흩날리며 개구쟁이처럼 통통 뛰어가는 여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쾅, 쾅, 하고 뭔가가 시끄럽게 그의 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늘 죽은 듯이 있다가 가끔 꿈틀거리는 심장박동 소리였다.
‘으응?’
아주 평온하다 못해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맹하다고 느낄 태평한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빠르게 소용돌이치던 사고가 가라앉았다.
‘왜 그래요, 라이킨?’
아, 그래. 소렐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 의사소통은 계속 유지되는 거였지. 알고는 있지만 라이킨은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로 가신 겁니까?’
‘국왕폐하의 집무실 쪽이 어딘가, 알아보고 있는데요?’
‘혼자 가시지 마십시오.’
‘지금 라이킨을 쳐다보는 사람이 몇 명인지 알아요?’
‘정확하게 열다섯 명인 건 저도 압니다만, 그래도…….’
아니, 소렐은 대마법사다. 라이킨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흩었다. 안다. 아는데 그냥…….
‘걱정됩니다.’
그녀가 경비가 삼엄한 곳에 혼자 몰래 간다는 것 자체가 신경 쓰이고, 그냥 싫었다. 함께 간다면 그가 위험한 곳을 먼저 살피고, 그녀가 열심히 뒤지는 동안 그녀의 뒤를 지킬 텐데. 마땅히 그가 해야 할 일인데 지금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애가 탔다.
‘걱정된다면 시선이나 잘 끌어줘요.’
‘제가 말입니까?’
보통 남이 시선을 끌 때 잠입해서 중요한 작업을 하던 라이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 지금 라이킨보다 더 시선을 잘 끄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는 일단은 다시 돌아섰다. 지금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시선을 잘 끄는 게 아니라 지금은 제가 감시대상이기 때문에…….’
‘아뇨.’
소렐은 말을 딱 잘랐다.
‘라이킨이 잘생겨서 시선을 끄는 거예요. 반짝반짝 빛이 나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라이킨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도 햇볕을 받으면 빛나잖아요?’
‘그건 공주님도 그러십니다만.’
‘아냐, 햇빛에 부딪치면 눈부시게 빛나요. 눈도 파란색이고, 똑같이 빛나고. 그러니까 거기 잠깐 서 있어요. 보는 사람들도 행복할 권리가 있지. 그렇지만 웃어주지는 말아요. 웃어주면 반하니까 내가 곤란하단 말이야. 아, 그렇지만 나한테는 웃어줘야 해요!’
졸지에 반짝반짝 환하게 빛나는 남자가 되어버린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이거,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건가? 혹시 소렐이 무의식중에 생각하는 게 그냥 여과 없이 그에게 흘러드는 건가?
‘그……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죠? 그럴 줄 알았어요.’
아니, 그녀가 또박또박 대답하는 걸 보니 분명히 그에게 말하는 게 맞다.
‘라이킨은요, 음, 이건 내가 지금 라이킨 얼굴을 안 보니까 하는 말이고, 또 조금 긴장되니까 긴장을 풀려고 하는 말인데요.’
‘예.’
하긴 공주님이 언제 남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서랍을 뒤지는 짓을 하셨겠나. 라이킨은 웃음을 꾹 참고, 그리고 불안함도 꾹 참고 대답했다. 소렐 이드리스는 대마법사다. 그가 모든 것을 다 해주지 않아도, 그가 쫓아다니면서 챙겨주지 않아도 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라이킨은 지금 뒤에 남아서 충실히 그녀를 보좌하는 역할을 잘 수행해야 했다.
‘라이킨은 웃어주는 게 조금씩 달라요.’
‘다릅니까?’
‘네. 보통 잘 웃기는 하는데……,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걸 잘 웃는다고 하지는 않겠네.’
소렐은 긴장하면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웃는데 무섭게 웃어서…….’
‘제가요?’
‘네. 라이킨이요. 아, 근데 오해하지는 말아요. 나한테 무섭게 웃는다는 건 아니니까. 짜증나는 사람한테는 보통 냉소를 짓죠. 비웃기도 하고. 근데 으, 나한테 그런다고 생각하면 엄청 화나는데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상처받을 것 같아.’
‘제가 왜 공주님을 비웃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라이킨은 충실히 대답해주면서 주변을 살폈다. 아주 한가롭다. 그 누구도 대마법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확실히 그가 눈에 띄는 사람이긴 한가 보다. 그렇다면 그 역할에 더 충실해야지. 그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니, 만약에 그런다고 하면 분명히 라이킨은 바른 말을 한 걸 거고, 나는 반박할 말도 못 찾을 걸요. 분명해. 어쩐지 그럴 것 같아.’
‘그런 가정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부부싸움을 안 할 것 같아요?’
라이킨은 멈칫거렸다.
‘아니, 아무리 해도 그렇지 왜 상대방을 비웃습니까…….’
‘그쵸? 그냥 가정만 해봤어요. 라이킨은 나한테 웃어주는 게 달라요.’
‘어떻게 다릅니까?’
그는 부지런히 소렐에게 말을 붙였다. 그녀가 긴장하지 않도록, 지금 뭘 하고 있냐고 시시때때로 확인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궁금해 미칠 지경이긴 했지만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환하게 웃어요.’
또 반짝반짝 빛난다는, 그건가.
‘진심으로 웃어서, 나 때문에 행복하구나, 하고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웃어줘요.’
‘저는 늘 공주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렇게 돌발상황이 벌어지는 건 빼고 말이다.
‘……나도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라이킨은 직감적으로 소렐이 뭔가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이킨, 국왕폐하는 이상한 연애편지 같은 걸 소중하게 보관하시네요.’
‘……그거 한 삼십 년은 된 겁니다. 날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지요.’
‘아, 여긴 아니네. 별 거 없어요. 아니, 별 거가 많기는 한데, 딱히 라이킨과 관련된 건 없어요.’
왕의 집무실에는 없다, 이거지. 그렇다면 왕은 아직까지 고민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다. 정말로 칼리에르 공이 반역을 저질렀다고 믿는다면 당장 그 증거를 직접 움켜쥐고 씩씩대고 있을 테니까. 아까 알현실에서 만났던 페르난데스 7세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도 나름 잔뼈가 굵은 정치꾼이긴 했지만, 은연중에 나오는 분노 같은 감정을 라이킨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 돌아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응. 돌아왔어요.’
그의 커다란 손에 따뜻한 손이 감겨드는 게 느껴졌다. 이동마법 한 번에 바로 그의 곁으로 돌아온 대마법사는 못 하는 게 없었다. 라이킨은 어느새 부쩍 자란 대마법사의 손을 꼭 잡고 경탄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불안하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안하게 가라앉았다.
‘정말 쉽게 오고 가시는군요.’
‘응? 그럼 당연히 쉽게 오고 가지, 어렵게 오고 갈까요?’
‘제 말은, 너무 대단하시다는 뜻이었습니다.’
옆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내가 좀 그렇긴 하죠. 비밀이지만 나는 엄청나게 대단한 대마법사거든요.’
픽 웃은 라이킨은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또 어떤 비밀이 있으십니까?’
‘음, 라이킨을 아주 사랑한다는 거?’
‘커다란 비밀이군요.’
그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로 걸어갔다. 문이 바로 열렸지만, 바로 타지는 않고 잠시 멈춰 섰다. 그를 내내 주시하고 있는 이들은 그가 도대체 왜 저러나, 하고 궁금해 하겠지만, 그저 칼리에르 공비전하께서 먼저 마차에 타시도록 기다리는 것뿐이다.
‘됐어요, 이제 타요!’
이쯤이면 그냥 말로 해도 될 텐데, 끝까지 임무에 충실한 소렐은 말하지 않고 마법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라이킨은 그제야 마차에 올라탔고, 칼리에르 공작의 마차는 문이 닫힌 뒤 바로 왕궁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모습을 보이셔도…….”
‘안 돼요. 지금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라이킨은 대답하는 대신 창문을 가려버렸다. 그러곤 소렐이 앉아 있을 게 분명한 자리를 쳐다보았다.
“아휴.”
남편이 어떻게 해서든 얼굴을 봐야겠다고 주장하니, 이길 수가 있나. 소렐은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양 뺨을 감싸는 손에 붙잡혀 그대로 키스를 또 받았다.
“……괜찮다니…….”
괜찮다니까.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말을 할 틈도 주지 않았다. 도망갈 공간조차 내주지 않고 파고들었다. 자그마한 손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감싸면 웃으면서 더 거칠게 굴었다. 소렐이 간신히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있을 때쯤엔, 이미 글래스턴 공작저가 가까워져 있었다.
“으으…….”
마주 보니 소렐은 얼굴이 붉어져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늘 할 일이 많았는데 지금 다 까먹었잖아요…….”
“저는 공주님 얼굴만 봐도 중요한 건 다 잊어버리니, 둘이 똑같군요.”
라이킨은 그게 못내 기쁘다는 듯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소렐은 손가락 사이 틈새로 그를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만졌다. 라이킨은 기꺼이 얼굴을 내주었다. 아니, 더 만져달라고 들이댔다. 매끄러운 피부에 휘어지는 눈이 섬세하다. 소렐은 그 눈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그는 다정하게 웃는다. 마음이 따뜻해지게 웃는다.
“날 볼 때마다 웃어줘서 고마워요.”
“공주님께서 절 웃게 하시는 것이니 제가 감사할 일입니다만……?”
그건 또 무슨 말씀. 마땅히 행복한 사람이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나는 라이킨이 웃는 게 좋아요.”
아무 미련도 없는 표정으로 언젠간 사라질 것처럼 구는 게 아니라, 생동감 있게 웃어줘서 안심이 된다.
“매일 웃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공주님께서 항상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염병이지만 당사자는 행복해 죽겠는 대화를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차가 멈춰 섰다. 소렐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음, 그러니까…….”
그다음에 뭘 해야 하더라?
“옷 갈아입고 보안국을 한번 털러 가볼까요?”
아, 맞다. 그랬지. 소렐은 어쩐지 신나 보이는 라이킨을 향해 한마디 했다.
“그게 그렇게 기대돼요?”
“예. 혼자 가시는 것보다는 저와 함께 가시는 게 공주님도 좋지 않으십니까?”
그녀는 눈을 살짝 흘기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좋아요.”
마차는 이미 도착한지 한참 되었는데, 마차 문은 여전히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슈토넨 후작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어디에 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여러 곳을 오가는 모양이다.”
로렌스의 말에 보안국에 슬쩍 잠입할 채비를 다 갖춘 라이킨이 픽 웃었다.
“바꿔 말하자면 계속 피신하는 중이라는 얘기지요.”
“그래.”
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르기만 했다간 습격당할 가능성이 높아지니, 계속해서 움직이는 중인 거다.
“저희가 구석까지 몰긴 했나 봅니다, 아버지.”
“그렇다 해도 방심하진 말자꾸나. 집무실에는 없었다고?”
“예.”
“보안국에는 직접 들어갈 생각이니?”
“예.”
라이킨은 검날을 살피며 대답했다.
“겸사겸사, 카메론 셀레스트에게 안부도 전할 생각입니다.”
보안국에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라이킨은 그래서 더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