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암투 (3)2022.03.02.
페르난데스 7세는 뱀파이어들끼리의 암투에 감히 국왕을 끼우는 거냐고 화를 내지도 못했다. 칼리에르 공에 대한 반역죄가 은밀히 고발되었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라이킨은 그저 당당하게 왕을 바라볼 뿐이다. 아니, 사실 그는 웃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소렐의 기척이 왕 근처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도 페르난데스 7세를 빤히 보며 기웃거리는 게 분명했다.
‘음, 슈토넨 후작이 보낸 증거가 도대체 어디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소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조그맣게 들려왔다. 오늘 대마법사를 슬쩍 함께 데리고 들어온 목적은, 바로 그 ‘증거’였다. 도대체 어떤 증거길래 왕이 묵과하지 못하고 라이킨의 반역 혐의를 조사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걸까? 소렐은 그 증거가 뭔지 반드시 알아야겠다고 그에게 슬쩍 묻어서 왕궁에 들어온 참이었다.
‘……우리 반듯하신 공주님이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에게서 좀 안 좋은 걸 배우신 건 아닐까? 라이킨은 잠시 고뇌에 빠졌다.
‘응?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슬쩍 넘기는 사이, 눈을 부릅뜨고 있던 페르난데스 7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흑마법사들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발견했소?”
“제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대마법사가 발견한 겁니다. 제가 어떻게 땅 아래를, 그것도 불에 타서 완전히 무너진 저택 아래를 꿰뚫어 보겠습니까.”
모든 이유를 합리화하고, 납득시키기엔 대마법사가 가장 편리한 만능열쇠다. 사람들은 칼리에르 공이 너무 뛰어난 열쇠까지 가져버린 것처럼 볼 것이다. 하지만 편리하다고 하기엔 라이킨은 지난가을부터 지나치게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허면 대마법사의 주장일 뿐이지 않소. 공, 이런 문제는 함부로 말할 게 아니오. 물론 나도 대마법사의 출중한 실력을 믿지만, 그게…….”
페르난데스 7세는 결국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난감해 죽겠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어쩌다 뱀파이어들 사이에 끼어서 문제를 중재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나. 물론 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그는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이 나라의 제일가는 권력자답게 이득만 취할 것이다. 뱀파이어들끼리 싸운다면, 솔직히 왕에게는 이득이었다. 하지만 라이킨이 기다렸다는 듯이 흑마법사와 관련된 증거를 가지고 올 줄은 몰랐다.
“시신은 파낼 수 있습니다.”
라이킨은 간단하게 말했다. 모든 올센의 왕들은 늘 이랬다. 뱀파이어나 수인들처럼 세력이 강대한 신하들이 저들끼리 싸우면, 왕들은 저울질을 해가며 이득을 취하고, 신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애쓴다. 하도 많이 겪은 일이라 이젠 딱히 새로운 느낌도 없었다.
“폐하께서 동의만 하신다면, 지금 당장 잠시 슈토넨으로 옮겨 가서 땅 아래를 직접 구경하시는 것도 가능합니다.”
상상을 했는지 페르난데스 7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도 대마법사 덕분에 땅을 파지 않고도 그 아래를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다고 하니, 폐하께서도 원하신다면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불에 타죽은 흑마법사들의 시신을 보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 정말 모르겠네. 라이킨은 알겠어요?’
페르난데스 7세가 대답을 하지 않는 사이, 또 종알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머리에 울려 퍼졌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가는 곳이나, 뭐 그런 곳 없냐고요.’
‘모르겠는데요.’
‘아이, 참! 대상이 뭔지 모르면 추적 마법은 사용할 수 없는데! 증거가 도대체 뭐지?’
소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편을 모함한 반역 혐의의 증거를 찾고야 말겠다고 맹세하고 이곳에 들어온 참이었다.
‘설마 알현실에 뒀겠습니까.’
‘그렇진 않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라이킨이 좀 캐볼 수 없어요? 물론 우리가 반역 혐의를 모르는 척하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모르는 것에 대한 증거가 어디 있는지 왕을 떠보라고?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냥 왕의 머릿속을 헤집어서…….’
‘그건 진짜 반역이에요.’
소렐은 그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가만 보면 그녀의 남편은 은근히 게으르고, 또 복잡한 건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안 되면 그냥 밀고 나가거나 검부터 빼고 보니, 소렐이 뜯어말리지 않으면 큰일을 여러 번 치르고도 남을 거다. 어휴. 칼리에르 공에게 유일하게 말이 먹히는 공주님은 소리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거 참 난감하오.”
페르난데스 7세가 중얼거리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정말 흑마법사들의 시신이 그렇게 많소? 확실하오? 만약에 지금 다시 찾아간다면, 그 시신들이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보장이 있소?”
“아무리 슈토넨 후작이라고 해도 무너진 3층 저택의 잔해를 다 치우고, 이 겨울에 얼어붙은 땅까지 파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겁니다. 하지만 서둘러야겠지요.”
왕은 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복잡한 법적 절차를 생각해보다가 관뒀다.
“저는 일단 폐하께서 잠시 슈토넨으로 행차하셔서 보시는 게 어떨까, 생각했습니다만.”
“슈토넨까지 가려면 시간이, 아, 대마법사가 함께한다고 했지.”
일정을 생각하던 왕의 말문이 또 막혔다. 고대마법이 갑자기 끼어들기 시작하니 모든 상식이 다 파괴되는 느낌이다. 이래서 고대마법을 그리도 차지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나, 싶다.
“나는 물론 칼리에르 공, 그대의 말을 믿소.”
안 믿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말이오.”
거봐라.
“사람들은 정말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증거가 아니라면 쉽게 믿지 않는단 말이오.”
슈토넨 후작이 들고 온 증거는 눈에 확실하게 보이나 보지.
“더구나 이런 흑마법사에 관련된 일은, 알다시피 아주 중한 범죄로…….”
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페르난데스 7세는 손짓을 하다가 다시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확실한 흑마법사 전문가를 불렀지요.”
“응? 그게 무슨 말이오?”
“제가 설마 이런 일을 제가 본 것만으로 말씀드리겠습니까, 폐하.”
칼리에르 공을 뭐로 보고.
“신뢰할 만한 사람을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그게 누구요?”
라이킨은 빙긋 웃었다. 소렐은 그 특유의 표정이 나왔다는 것이 조금 유감스러우면서도, 그냥 좋아서 마냥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생겼다!
“엘펜하임의 성기사입니다, 폐하.”
* 카메론 셀레스트가 지금 사심 없이 바로 죽여 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칼리에르 공이었다. 이유는, 하는 짓이 그와 너무 똑같기 때문이었다. 카메론이 이용하는 입장이라면 그거야 기쁘지만, 당하는 입장은 어느 누구나 다 그렇듯 달갑지 않았다.
“……글래스턴 대학 케르고 칼리지 소속 교수시군요.”
뭐,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를 죽여버리고 싶은 게 다행히도 카메론 셀레스트 뿐만은 아니었다. 슈토넨 후작은 물론이고, 지금 카메론을 주시하고 있는 보안국장 역시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칼리에르 공을 저주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성실하게 대답하는 반듯한 성기사를 보다가 보안국장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딴 식으로 일거리를 늘려놓다니, 다들 제정신이냐고!’
어느 날 갑자기 폐하께서 심각하신 얼굴로 부르시더니, 뜬금없이 칼리에르 공이 반역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들어 왔단다! 정작 보안국장은 금시초문인데 아무튼 그렇다면서 ‘그’ 칼리에르 공을 조사할 궁리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 관둘까…….’
어느 높으신 분이, 분명히 칼리에르 공의 정적인 분이 직접 찔렀나 보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도 이미 사직서를 날리고 싶은데, 오늘은 더한 게 떨어졌다.
‘아, 보안국장께서 오늘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 칼리에르 공이 웃는 얼굴로 와선 갑자기 슈토넨 후작의 무너진 저택에 흑마법사들이 묻혀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전하며, 증인으로 뜬금없이 망한 엘펜하임의 전 글래스턴 지부장을 내세웠다.
‘수고가 많기는 개뿔이…….’
이로써 한 가지 분명해진 건, 칼리에르 공의 반역 사실을 국왕 폐하께 고발한 작자가 바로 슈토넨 후작이라는 거다. 고로 지금 보안국장은, 역대 모든 보안국장이 피할 수 없는 관문이었던 ‘정치싸움’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어느 선배는 적당히 편승해서 화려하게 물을 잘 탄 뒤 잘 먹고 잘살았고, 또 다른 선배는 엇비슷하게 하려다가 삐끗해서 목이 날아갔다. 나머지들도 다 비슷했다. 그리고 지금 보안국장은 솔직히 온갖 과로에 시달려서 야망이고 부귀영화고 나발이고 그냥 은퇴하고 싶었다.
“국장님, 이 일은 어떻게…….”
“내가 은퇴하면 누가 후임이지?”
“끔찍한 소리 그만하시고요…….”
“아니,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 누구지?”
“하나도 안 궁금하신 거 압니다. 저 사람, 전 글래스턴 지부장 카메론 셀레스트가 맞습니다. 신원확인 됐습니다.”
보안국장은 고개를 처박고 아주 험악한 욕설을 몇 번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까지 왔나, 그냥 작위나 가지고 잘 먹고 잘살까 보다, 뭐 그런 종류의 말에 저 삼류 건달들이나 쓸 법한 욕설을 더한 거다.
“……칼리에르 공이 아주 제대로 된 증인을 데리고 왔군. 가장 실력 있는……, 그래, 마커스가 좋겠어. 마커스더러 저놈한테 말리지 말고 확실하게 캐보라고 해.”
보안국장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많이 묻혀 있다면, 보안국 전원이 삽부터 들고 슈토넨까지 쫓아가야 하니까.”
“정말 ‘삽질’이군요.”
“네가 그 말 할 줄 알았다. 그런 말 하지 마.”
“옙.”
일이 늘어나다 못해 머리 위에서 와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
“참 깔끔하군요.”
라이킨은 기분 좋게 왕궁을 거닐었다. 그의 곁에는 보이지 않는 아내가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카메론 셀레스트를 이렇게 써먹다니, 참 깔끔했다.
‘속으로 말해요,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보잖아요!’
“여기선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주님께서 모습을 보이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런 추측성인 말이 가장 위험해요. 그런 순간에 방심했을 때 당하는 거라고요.’
“……요즘 첩보소설 읽으십니까?”
‘어떻게 알았지!’
머릿속에 까르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라이킨은 좋아서 같이 웃었다. 어떻게 알긴, 늘 자기 전까지 열심히 읽고 있는 걸 그가 다 봤으니까 알지. 소렐도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고 혼자 신나게 웃는 거다.
‘이제 조용히 나한테만 말해요, 누가 들으면 칼리에르 공이 허공에 대고 말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소문낼지도 몰라!’
‘예,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는 공주님과 이 한적한 왕궁에서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안 된다 하시니 입은 다물고 머릿속으로만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물론 침묵하고 있으면 또 재미있는 말이 들리기도 했다.
‘살금살금 가야지. 서랍도 다 뒤집어보고 열어보고……. 아, 근데 그건 범죄인가? 뭐 어때, 우리 남편이 큰일 났는데! 나는 반역자의 아내는 싫단 말이야. 다 뒤져서 찾아낼 거야! 그런데 그러다가 엄청난 비밀을 발견하면 재미있겠다.’
소렐이 멋대로 생각하는 소리다. 가디언과 대마법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소렐이 아직 이 마법은 미숙해서 그런 건지 그녀가 생각하는 소리가 제멋대로 밀려들어왔다. 평소에 이렇게 생각하시는구나.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라이킨은 그냥 미소를 지은 채 듣고만 있었다.
‘……다 들었지!’
들켰다.
‘뭘 말입니까?’
‘방금 내가 생각하는 거! 다 들었죠! 웃고 있잖아! 아, 부끄러워, 어떡해…….’
소렐은 분명히 지금 발갛게 달아오른 양 뺨을 붙잡고 부끄러워하고 있을 거다. 라이킨은 오른쪽으로 무심히 손을 뻗었다. 정확하게 닿는다. 동그랗고 좁은 어깨, 길게 늘어뜨린 매끄러운 흑단 같은 머리카락, 아담한 체구. 이젠 보지 않아도 곧장 잡을 수 있었다. 그대로 어깨를 잡고 끌어당겨, 달아오른 뺨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스러워서,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너무 좋아요.’
좋아해요, 사랑해요, 라이킨과 똑같은 감정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가려지지 못하고 그대로 내보이는 감정들에 그는 참지 못하고 그 뺨을 그대로 감싸고 입을 맞췄다. 소렐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왕궁의 어느 회랑, 움푹 들어간 벽감 사이에 기대선 그녀는 눈을 감고 쏟아지는 키스를 받느라 숨을 헐떡였다. 그녀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 소중하게 보듬은 커다란 남자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그녀도 다 느낄 수 있었다. 같은 감정이었다. 색채는 조금 다르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근데 이래도 되나?’
소렐은 이 와중에도 이곳이 어디인지, 그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를 퍼뜩 떠올렸다. 움찔거리는 아내를 알아차린 라이킨은 그녀를 조금 더 몰아붙였다.
‘됩니다.’
증거에 발이 달려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소렐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랑스러웠고, 너무나 행복하게도 그를 무척 사랑했다. 그러니까 된다. 안 될 게 도대체 뭐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