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암투 (2)2022.02.26.
잘나면 피곤한 것이다. 라이킨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잘났으니 어중이떠중이들이 질투하는 것이고, 잘나서 짊어진 짐도 많고, 잘났으니 다른 이들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거다. 그러니까 피곤했다. 결국 대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소렐은 날 때부터 그랬고, 죽을 때까지 계속 그녀를 피곤하게 하고 가끔은 위험하게 만드는 이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가지고 있는 능력은 너무나 뛰어나고, 또 해야 할 일은 많고, 책임은 끝이 없다.
‘피곤하군.’
그가 바라는 건 그저 소렐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 곁을 지키면서 평온하게 사는 인생인데 말이다. 아주 소박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소박한 삶을 때려치우고 역모라니, 그딴 귀찮고 피곤한 걸 그가 왜 하겠냔 말이다!
“라이킨!”
소렐이 그의 보폭을 따라잡으려고 하기도 전에 라이킨은 얼른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먼저 물었다.
“공주님. 헬레인 왕조를 수복하시고 싶으십니까? 여왕이 되고 싶으세요?”
“아뇨, 헬레인 토끼들이 없는 헬레인 왕조는 의미가 없, 근데 그건 왜 물어봐요?”
“하시고 싶으시면 하시게 해드리려고 했지요. 진심으로 여왕에는 흥미가 없으십니까?”
“그러는 라이킨은 여왕 부군에는 흥미가 있어요?”
“남편은 마땅히 아내를 따라야지요.”
로렌스는 그냥 이마를 짚고 자리에 털썩 앉은 채 아들의 말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냥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저놈을 누가 말리나.
“헬레인 왕가는 끝났어요. 토끼들도 없고, 왕궁은 이미 왕궁의 기능을 잃었고, 국민도 없는 걸요.”
그리고 소렐은 왕가의 후계자로서 교육받지 않았다. 그런 삶은 상상해본 적도 없다. 소렐은 씁쓸하지만, 이미 백 년도 전에 끝난 이야기를 조용히 말했다. 헬레인 왕가의 정신을 이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메리 공주조차 소렐에게 ‘네가 헬레인의 후계자다’라는 말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 인형이 좋니?’나, ‘오늘 저녁은 뭐가 좋을까?’, ‘어떤 그림책을 읽어줄까?’라는 질문밖에 하지 않았다.
“그냥 재산과, 나만 남았을 뿐이에요.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소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라이킨이 무모한 짓은 하지 말고 먼저 나한테 뭘 할 건지 이야기를 하고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아차. 라이킨은 옷을 갈아입으려고 가다 말고 완전히 동작을 멈췄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손을 뻗어서 소렐이 입고 있던 겉옷의 리본을 풀었다.
“제가 놀라게 해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소렐이 입고 있던 두터운 외투가 벗겨졌다.
“놀라지는 않았어요. 다만 바실리스크가 라이킨에게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을 뿐이에요.”
“나는 그런 걱정은 안 했다. 장담하는데 그놈의 뱀보다 저 녀석이 더 호전적이고 더 큰 사고를 칠 거야.”
뒤에서 로렌스의 뼈 있는 한마디가 날아왔다.
“음, 저도 아버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해요!”
소렐도 뒤를 향해 외쳤다. 라이킨은 약간 찔리는 표정으로 그녀의 외투를 잘 접어서 어느새 다가온 에벌린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공주님의 기사이자 공주님의 옷시중까지 들어드리는 최측근을 자처했다.
“당장 누구한테 쫓아가려고 했어요? 왕세자에게 쫓아가려고 했지요?”
조용히 따지기 시작하는 소렐에게 라이킨은 픽 웃어 보였다.
“공주님, 저는 그런 애송이는 상대하지 않습니다. 따지려면 왕에게…….”
“결국 일단 왕궁으로 쳐들어가려고 했다는 거네요.”
소렐이 팔짱을 끼고 딱 끊어 말하자 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라이킨이 가서 잘할 거라는 건 아는데, 그거야말로 겉으로 보기엔 권력을 믿고 막 나가는 공작인데요. 쓸데없이 국왕폐하를 겁먹게 하지 말자고요.”
이제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칼리에르 공비가 아주 맞는 말을 해서, 로렌스가 웃고 말았다.
“네?”
소렐은 알겠냐는 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예…….”
기어이 남편의 대답을 들은 칼리에르 공비는 그제야 만족하고 로렌스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자, 저기 가서 앉아요. 아버님 말씀을 들어보니 아직은 시간이 있는 모양이니까.”
“공주님, 아무리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결국은 슈토넨 후작이 제출했다는 그 증거가 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쳐들어가서 도대체 그놈의 증거가 뭔지 보겠다는 뜻이었다.
“반역죄는 보통 죄질이 아니에요. 슈토넨 후작이 사활을 걸었을 거라고요. 그러니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해요. 라이킨 성격대로 다 쓸어냈다간, 정말 내가 원하지도 않는 헬레인 왕조를 다시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달래도 아버지 말은 듣지도 않는 아들놈의 입이 한 방에 다물렸다. 라이킨은 어쩔 수 없이 소렐의 손가락을 따라 다시 자리에 앉았고, 로렌스는 이젠 제법 공비다운 말을 침착하게 하는 며느리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네가 제대로 지적했구나. 반역죄는 잘 상대해야지, 아니면 부작용이 엄청날 거란다. 물론…….”
물론 로렌스 오블리앙 역시 뱀파이어였다.
“일이 잘못된다면 뭐 어쩔 수 없이 따로 왕조를 세워야겠지만 말이다.”
그도 가끔은 왕의 비위를 대충 맞춰주는 것이 신물이 났다. 모든 권력자의 의심은 끝이 없었고, 아내가 이루었던 모든 공로는 쉽게 잊힌다. 가끔 가다가 온화한 성정을 뚫고 나오는 짜증은 칼리에르 왕조를 만들어서 아들이든 딸이든 하고 싶은 녀석을 앉혀놔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데 둘 다 생각이 없다 하니 그냥 이대로 살고 있던 건데, 며느리가 왕이 되고 싶다면 아들과 협력해서 왕조를 새로 세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어차피 저 아들놈은 그를 닮아 제 아내 시중드는 걸 낙으로 여기니 말이다.
“……그걸 굉장히 쉽게 말씀하시네요…….”
소렐은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글래스턴과 발레시나스를 합치면, 뭐, 나쁘진 않아. 재산도 충분하고. 하지만 이래저래 명분이나 많은 사람의 지지가 없으면 힘든 일이니 최후의 방법으로 두기로 하고……. 소렐 네게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네 의견은 뭐냐?”
소렐은 얼른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게 통, 하고 솟아오르는 것 같아서 라이킨은 그 와중에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슈토넨 후작의 중죄를 알고 있잖아요? 증거도 있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고발에는 고발이다. * 엔버네스의 올센 왕궁을 걷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외모는 오늘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다. 새카만 밤을 화려하게 빛내는, 그러나 서늘한 달 같은 존재였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시린 추위밖에 느낄 수 없는 이가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모든 전쟁에 참전한 전설적인 인물, 그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걸출한 지휘관, 그러나 지금은 공식적인 활동은 천 년 만에 얻은 아내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곤 전혀 하지 않는 뱀파이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눈부신 금발을 깔끔하게 넘긴 그는 안내하는 이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만 멈췄다. 저 안에서는 페르난데스 7세가 혼비백산한 심정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을 거다. 왕세자가 와서 칼리에르 공의 반역을 고하더니, 이번엔 칼리에르 공이 직접 나타났으니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할 것이다. 하지만 노련한 왕답게 곧 표정 관리를 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라이킨을 맞겠지. 라이킨은 전부 다 예상할 수 있었다.
‘왕들이란.’
그 역시 저 안에서 수십 명의 왕을 알현했다. 때로는 전장에서 돌아와 간신히 몸만 씻고 바로 보고를 한 적도 있었다. 저 알현실은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 모든 이들의 충성심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공간이지만 이젠 더 이상 라이킨에게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무관심으로 점철된 무채색 세계에 알록달록한 색을 불어넣은 이가 종알거렸다.
‘여긴 너무 지루해요.’
라이킨은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습관처럼 웃을 뻔했다.
‘너무 딱딱하고, 실내장식도 촌스러워요. 저 커튼 좀 봐!’
그는 웃음을 꾹 참고 속으로 점잖게 중얼거렸다.
‘지금 왕이 즉위했을 때 새로 바꾼 실내장식입니다, 공주님.’
‘그래서 이렇게 촌스럽구나!’
라이킨은 입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웃지 않으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자신의 가디언과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게 의사소통을 하는 마법을 사용 중인 공주님은 라이킨과 함께 알현실 바깥에 서 있었다. 물론 그녀의 존재를 느끼는 이는 라이킨 한 사람뿐이었다. 소렐의 모습은 투명하게 주변과 녹아들어,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근데요, 라이킨.’
그는 소렐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있는 복도 쪽을 힐끗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였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왕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까지요.’
‘……기싸움을 하는 거네.’
‘그렇지요.’
‘재미없다.’
‘예, 재미없습니다. 재미없고 지루하기만 하지요.’
그의 얼굴에 언뜻 권태와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걸 소렐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남들은 모르게 통통 뛰듯 빠르게 다가와서 가만히 서 있는 라이킨의 손을 답삭 잡았다.
‘얼른 끝내고 가서 나랑 있어요!’
‘함께 뭘 할까요?’
‘뭐든 라이킨이 좋은 걸로!’
‘그렇다면 바로 우리 둘만 함께 오붓하게 더 깊은 사이가 되는 걸로.’
‘취소예요, 이……! 이……!’
소렐은 그를 지칭할만한 적당한 단어도 찾지 못해 씩씩거렸다. 대신 아무도 모르게 작은 주먹으로 그의 굵은 팔뚝을 팡팡 때렸다.
‘창피하게 진짜!’
‘어차피 아무도 못 듣잖습니까. 이거 좋은데요. 가끔 이 마법을 사용하시는 게 어떨까요, 공주님?’
‘싫어요.’
때마침 알현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들어가십시오.”
‘들어가기나 해요!’
라이킨은 분명히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다 못해 곤두박질친 상태로 들어가야 했으나, 뜻밖에도 웃음을 참으면서 아주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물론 페르난데스 7세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느라 라이킨이 얼마나 가볍게 들어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긴 전장을 천 년간 굴러다닌 군인의 걸음이 가벼워봤자 얼마나 가볍겠는가. 그는 자신의 곁에 딱 붙어서 함께 들어온 소렐의 기척을 느꼈다.
‘앉아 계십시오.’
‘괜찮아요! 세상에, 여긴 더 촌스럽네!’
발랄한 목소리가 그쯤에서 그쳤다.
“폐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어서 오시오. 나야 괜찮았소만, 글래스턴 공작은 어땠소?”
“날이 차군요.”
페르난데스 7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차지. 앉으시오.”
라이킨은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오면 어쩔 수 없이 옛 버릇이 튀어나온다. 왕이 앉으라고 명해야 앉는, 철저한 군인의 삶에서 비롯한 버릇이 아직까지도 몸에 배어 있었다.
“어쩐 일로 날 만나러 왔소? 한참 신혼에 이래저래 바빠 보이던데.”
“예, 제가 폐하의 치세에는 특별히 나랏일에 나서지 않았지요. 이게 다 폐하께서 평화롭게 통치하신 덕분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네 선조 때는 지겹게 이 방을 들락거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쟁터를 다니던 군인이 알현실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면 좋은 일이 아니란 뜻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공의 말이 맞소.”
하지만 꺼내는 말마다 맞는 말이니, 페르난데스 7세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타났군.”
“예. 도저히 묵과하지 못할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요?”
페르난데스 7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실 그는 이 잡기 까다로운 뱀파이어를 어떻게 조사할지조차 골치가 아픈 와중이었다. 칼리에르 공을 체포한다면, 순순히 체포에 응할지도 미지수인 데다가 그를 정말 체포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올센에 그를 체포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긴 할까? 칼리에르 공을 반역죄로 체포했다간 대마법사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가만둘 수도 없고. 이래저래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칼리에르 공은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이다.
“지난 사냥대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요, 폐하.”
더러운 흑마법사가 나타나 사냥대회 전체를 망쳐버린 건 유쾌한 일을 좋아하는 페르난데스 7세의 성격에 아주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 일을 떠올리자마자 왕의 미간에 대번에 금이 갔다.
“그 흑마법사를 누가 사냥대회에 감히 데리고 왔는지 알아냈습니다.”
페르난데스 7세는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라이킨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설마 슈토넨 후작은 아니겠지.’
라이킨은 그의 머릿속을 읽은 듯이 대답했다.
“슈토넨 후작저가 며칠 전 불에 탔습니다. 완전히 전소되었더군요.”
‘아이고.’
국왕은 속으로 신음했다. 이 뱀파이어들이 지금 왕을 가운데에 두고 싸우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다.
“유감입니다. 그렇게 유서 깊은 저택이 완전히 불에 타서 없어지더니.”
“그런 말은 못 들었소만.”
“큰 사건인데 아직까지 보도조차 되지 않았지요.”
라이킨은 싱긋 웃었다.
“그게, 건물이 타고 무너진 것 외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어서 그럴 겁니다. 죽은 사람도 없고, 값진 물건은 하나도 타지 않았지요.”
국왕은 적당히 침묵했다.
“하지만 폐하, 그 저택 아래에는 시신 수십 구가 있습니다.”
시신이라니? 국왕은 고개를 들었다.
“불에 탄 흑마법사들의 시신입니다. 확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