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암투 (1)2022.02.23.
“불이 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군요.”
라이킨은 툭, 하고 불에 탄 어떤 물건을 들여다보다 던지며 중얼거렸다. 거대한 규모의 후작저가 홀라당 탔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는 카메론 셀레스트가 씩 웃고 있는 건 싸늘하게 쳐다보며 지나간 뒤 다른 곳을 살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렐은 가만히 땅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머리카락을 휙 날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공중에 부유했다는 건, 커다란 마법을 사용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소리가 들려요.”
카메론 셀레스트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소리가 들린다고? 다시 말해 살아있는 존재가 있다는 말 아닌가. 하지만 육안으로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불에 타다 남은 집의 잔해들뿐이다. 기둥이나 서까래 역할을 하던 것들이 반은 타서 사라지고, 시커먼 숯이 되어 남았다. 하지만 건물의 잔해와는 별개로, 나온 재의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잔인하네요.”
소렐은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녀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뭔가를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긴 대마법사의 비범함을 어떻게 평범한 이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겠는가. 그건 아무리 저 강력한 뱀파이어이자 대마법사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디언이라 해도 힘들 거다. 카메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킨은 소렐과 같은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끔찍하군요.”
하나도 끔찍하지 않다는 덤덤한 표정으로 대마법사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까지 태연하게 치고 있었다. 그는 사실 지금 소렐이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장면을 많이 보았다. 새카맣게 타버린 시체들, 절규하며 비틀린 모양과 바닥을 더듬고 벽을 긁어대며 끝까지 신음하고 애원하다가 죽은 이들의 모양은 끔찍했다. 소렐은 자신이 보고 있는 시야를 라이킨에게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인 것도 같습니다. 그들은 동료를 희생시키는 것도, 또 자신이 희생하는 것도 아주 당연하게 여기니까요.”
“그건 그래요.”
“그러니…….”
라이킨은 카메론 셀레스트를 비롯해 생포한 성기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씩 웃었다.
“저놈들에게 뭐 굳이 누가 이곳을 태웠냐고 물을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웃던 라이킨은 문득 잔뜩 남은 검은 재가 자신에게로 밀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스산한 바람이 불며 재가 날리더니 그의 발목을 휘감는다. ……왕께 경배를……. ……우리의 원한을……. ……죽음의 선물을…….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가 뭐라 중얼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사라진다. 그건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라이킨은 자신의 발목을 휘감더니, 이번에는 허리를 한 바퀴 휘감는 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다. 소렐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갈까요, 공주님.”
……왕이시여! 이곳에 남은 원한과 피는 뱀파이어 안에 잠들어 있는 뱀들의 왕을 부르고 있었다.
“오래 머무르기엔 그리 좋지 않은 곳입니다.”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라이킨이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혹은 어떤 존재를 느끼는지 아는 듯했다.
“아예 쓸어버리시고 돌아가시지요.”
이곳에 흑마법사들, 시신마저 제물로 삼는 이들의 원한이 가득하다.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보통 이런 곳은 성기사들이 깨끗하게 정화하거나, 최소한 그 원한을 눌러놓기라도 했다. 대마법사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했다.
“……아뇨.”
하지만 소렐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는 게 좋겠어요.”
“어째서요?”
“……그냥 그래야 해요.”
헬레인 토끼의 예언인가.
“놔둬야만 해요. 그래야 모든 게 완성될 수 있어요.”
저도 모르게 말은 툭 해놓고서도, 소렐은 도대체 뭐가 완성될 거라는 뜻인지는 몰랐다.
“아무튼 그래요. 돌아가요.”
저 아래 묻힌 시신들이 그냥 곱게 죽었을 리 없다. 분명히 흑마법사들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주문을 외우다 죽었을 것이다. 그 주문이 어떤 주문이었을까? 복수? 혹은 그들의 희망이었던 바실리스크를 자극하는 주문? 그건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바실리스크가 심어져 있는 라이킨에게는 그리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예.”
라이킨은 소렐이 하는 말을 모두 마음에 담아두었다. 언젠가는 미래에 저 예언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슈토넨 후작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고, 또 여태까지 잘만 도망 다니던 카메론 셀레스트까지 붙잡았으니 오늘 수확이 꽤 컸다. 소렐은 이동마법을 사용했다. *
“왔구나!”
다시 엔버네스의 글래스턴 공작저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그들을 다급하게 맞이한 건 로렌스였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렐과 라이킨을 반기다가 뒤에 딸린 성기사 셋을 발견했다.
“……이 신사들은 누구시지?”
눈치챘으면서도 괜히 물어보는 아버지의 장단을 라이킨이 재빠르게 맞췄다.
“소개드리지요. 전 글래스턴 지부장이자 에설론 백작에게 낙인을 찍어 우리 공주님을 팔아넘기려고 한 카메론 셀레스트와 그 부하들입니다.”
대충 ‘그 부하들’로 나머지를 퉁 친 라이킨은 빙긋 웃었다.
“슈토넨에 간 거 아니었니?”
“갔더니만 거기 있더군요. 우리 공주님께서 붙잡으셨습니다.”
“잘되었구나. 잡을 놈들을 잡았어.”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뱀파이어들이 와서 카메론 셀레스트를 비롯한 성기사들을 끌고 갔다. 그런 뒤에 라이킨이 로렌스에게 서둘러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분명히 로렌스는 그들을 무척 기다린 것 같았다.
“그래. 네가 고발당했다. 그것도 역모야.”
라이킨의 눈이 가늘어졌다.
“슈토넨 후작입니까?”
오래된 귀족은 그들만의 법칙으로 전쟁을 한다. 사실 흑마법사들에게 의존하는 건 슈토넨 후작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써먹었던 편법에 불과했다. 그는 정치를 하는 원로이자, 뱀파이어 보수파의 거두다. 은밀하고 빠르게 그의 동조자들을 제거했던 라이킨 때문에 잠시 수세에 몰렸지만, 흑마법사들 덕분에 잠시 시간을 벌었다. 그러니 이젠 그가 원래 하던 대로, 정치적인 싸움부터 걸지 않겠는가.
“아니, 왕세자다.”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라이킨은 미간을 찌푸렸다.
“증거는요?”
“증거가 있는 모양이더라. 아마 그 증거가 슈토넨 후작에게서 나왔겠지.”
“아, 그렇게 연결되는 거군요.”
싫어하는 놈과 죽여야 하는 놈의 조합이라. 그럼 간단했다. 다 죽여버리면 되겠군.
“왕세자를 바꿀 생각은 하지 마라. 그랬다간 정말로 왕실과 전쟁을 할 수도 있어.”
“나쁘진 않은데요.”
“그건 칼리에르가 추구해온 일이 아니다. 네게 강요하려는 건 아니다만, 독립 군주가 되고 싶었다면 벌써 네 어머니 대에서 독립 군주가 되었을 거야.”
로렌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그가 사랑한 여자가 이룬 업적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1대 칼리에르 공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이만큼의 세력과 재산을 일군 게 아니었다.
“예, 압니다.”
그녀의 체스말로 살아왔던 라이킨이 그건 가장 잘 알았다. 동시에 그건 그의 관심사가 아니기도 했다. 그가 존중하려는 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무조건적인 애정을 준 아버지지, 그 여자의 업적이 아니었다. 그러니 안다고 고개를 끄덕인 건,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그 뭣 같은 여자에 대한 애정, 그러나 결코 자식들보다는 대단하지 않아서 꺾은 애정을 그래도 존중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역모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그에게도 지켜야 할 여자가 있었다. 아니, 단순히 여자라고 말하기엔 그에겐 의미가 너무 컸다. 그에게 살아갈 이유도 주고, 길고 지루하던 권태마저 잊게 한 대마법사가 파랗게 질려서 묻고 있었다.
“역모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쪽에서 바로 치고 들어온 거란다. 그러니까, 우리의 적들이 말이야.”
로렌스가 한 번에 이해하려고 눈을 크게 뜨고, 귀를 바짝 세우고 있는 소렐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네, 그런데 역모의 이유가…….”
공격해왔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도대체 뭘까요. 소렐은 황당해서 로렌스를 쳐다보았다. 라이킨에게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울 구실이 뭐가 있단 말인가.
“……네가 있지, 아가.”
로렌스는 무겁게 말했다.
“우리 집안에 왕족은 없었다만, 마침 옛 왕궁터까지 수복한 왕족이 있잖니.”
아. 소렐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나치게 강력한 권력자가 나라에 있다는 건, 왕에게 거리낄 만한 일이지. 네 잘못이 아니야.”
발레시나스 공작은 무엇이 소렐을 힘들게 할지 알았기에 분명하게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란다.”
권력도, 재산도, 힘도 가지고 있는 칼리에르 일가에게 없는 게 딱 하나, 그게 바로 왕관이다. 그런데 대마법사이자 멸망한 헬레인 왕가의 직계혈통이 등장했다. 그러더니 헬레인 왕가의 옛 왕궁을 차지하고 있던 엘펜하임부터 무너트렸다. 모든 권력자들, 특히 왕들은 언제나 의심을 하기 마련이고, 그 마음에 독을 풀기엔 너무나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어차피 소렐 이드리스가 대마법사가 되었을 때부터 칼리에르 공은 견제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라이킨은 내 작위까지 계승할 후계자지.”
“그건 수천 년 후일 텐데요……?”
“보통 사람들은 말이다, 아가. 짧은 수명 대신, 자기 가문이 자신을 대신해 아주 오래도록 존속될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단다.”
예언을 하는 헬레인 왕가조차 그러했다. 가문의 끝은 상상하기 싫은 일이다.
“그래서 그 수천 년 후의 일까지도 미리 걱정하는 거지.”
올센 왕가에 큰 공작위를 두 개나 차지한 뱀파이어가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거다. 소렐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그런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서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뒤늦게 그녀에게 대마법사들이 겪었던 수많은 정치적인 어려움이 고서적을 펼치듯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아직 공식적인 조사가 시작된 건 아니다. 내가 먼저 알아낸 일이야.”
언제나 발레시나스 공작은 정보 입수가 빨랐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심각하신 걸 보면 증거가 꽤나 강력한 모양입니다.”
“그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
하지만 라이킨은 입귀를 비틀어 뒤틀린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슈토넨 후작이 겪은 전쟁과 그가 겪은 전쟁은 차원이 달랐다. 처음부터 지휘를 했던 이와, 전장의 진흙 바닥에 처박혀가며 일반 병사로 구르고,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 투입되어 혼자 살아 돌아와야 했던 이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기대가 된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아라. 너는 이제 아내가 딸린 몸이야, 이놈아. 나는 하나도 기대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제 속에 들어와 앉으셨군요, 아버지.”
리페르게라 공주가 방문한 이후로 소렐은 계속해서 사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영향력이 막강한 집안에 세련된 옷차림과 외모, 유서 깊은 혈통에 능력과 재산, 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존재가 등장했으니 왕실에겐 위협으로 다가왔을 거다. 혹은 질투의 대상이거나.
“왕세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왕은 결국 자식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어. 라이킨, 이래저래 상황이 좋지 않지만 제발 극단적으로 가진 말자꾸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나이에 따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싶진 않다는 뜻이다.”
라이킨은 웃었다.
“제가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면 도와주시긴 하실 거군요.”
“이놈아…….”
결국 로렌스는 이마를 짚었다. 이 와중에도 실실 웃는 아들놈의 얼굴을 보자니 속이 터지는데, 끙끙 앓아대던 걸 생각하면 차라리 자신만만하게 웃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곧 급습하겠군요.”
칼리에르 공에게 역모혐의를 씌우려면 왕세자도 만반의 준비를 다 해야 할 것이다. 라이킨은 겉옷을 벗고, 단추를 풀었다.
“그래도 네게 감히 함부로 하지는 않을 거다. 슈토넨 후작의 증거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봐야 해. 저쪽도 증거가 아주 명백하지 않는 한 우리를 함부로 공격할 배짱은 없지.”
로렌스는 일찍 알아차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차고 있던 검을 풀어놓는 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있을 겁니다, 아버지. 슈토넨 후작저가 완전히 불에 타버렸고, 그 아래 지하에 흑마법사들이 갇혀 있다가 죽었습니다.”
라이킨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슈토넨 후작은 이미 각오할 만큼 각오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대책을 의논하기보다는 움직이고 싶군요.”
“라이킨! 저들이 어떤 함정을 준비했는지도 모르는데 뭘 하겠다는 거냐!”
발레시나스 공작은 치밀하게 상대의 수를 간파하고, 온갖 정보를 먼저 섭렵한 후에 대책을 빠르게 세워 움직이는 전형적인 계략가였다. 그래. 그것도 가족이 있는 가장이라면 당연히 그런 식으로 안전하게 움직여야 했다. 라이킨도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충실히 그 법칙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뭘 하긴요. 그 함정이 뭔지 보러 갑니다.”
새파란 눈동자가 격노했다.